어제 너무 일찍 잠드는 바람에 (10시 반부터 잤다. -_-) 오늘 아침에 눈 뜬 시각이 7시. 쉬는 날 이 시각에 일어난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깝다. 서재 좀 들여다보고 쓰던 리뷰 마저 쓰고나서도 9시가 채 되지 않아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어제 페이퍼쓰면서 헷갈렸는데, 씨네큐브에서 11시에 한 번 상영하는 영화는 <엘리펀트>가 아니라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다. 일찍 나가서 표를 끊고, 정말 맛대가리없이 비싸기만한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래고, 영화를 보고나니 12시 30분. 친구와 만나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바로 길 건너편의 역사박물관으로 갔다.
왕코르와트 보물전은 기대보다 별로였다. 아무래도 내가 보고 싶은 건 앙코르 와트 자체니까, 거기서 출토된 유물 일부를 보는 것만으로는 영 성에 차지 않는다. 앙코르 와트에 가려고 여행 일정을 알아보는 것만 3년째다. 경비는 그렇다치고, 일정이 문제다. 캄보디아로 바로 가는 비행편이 없어 베트남이나 미얀마를 경유해야하니, 꼬박 일주일이 걸린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휴가라도 일주일씩 회사를 비울 수가 없다. 고작해야 토,일 포함해서 5일. 그래도 매년, 내년엔 어떻게 좀 해 볼까,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아, 내년엔 갈 수 있을까. 내가 앙코르 와트를 꿈꾸게 된 건, 화양연화 때문이다. 양조위가 앙코르 와트의 기둥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는지, 그곳에 가서, 가만히 기둥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싶다.
전시회를 보는 데는 1시간 좀 넘게 걸렸을 뿐이다. 두 시간 마다 안내자가 설명을 한다고 했는데, 그 시간은 맞추지 못했고, 설사 시간을 맞추었다해도 별로 듣고 싶지 않았을 거다. 나와서 친구가 돌아가자고 하는 걸, 억지로 끌고 3층의 상설 전시장으로 올라갔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역사박물관 같은델 돌아보겠냐, 너 여기 다시 올거냐, 하면서.
그런데 오늘의 수확은 바로 이 상설 전시장이다. 제법 잘 꾸며놨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용비어천가와 경국대전이 있다. 유리관 너머로 들여다보며, 오호~, 라고 감탄사. 왼쪽엔 커다란 화면에 서울의 도심, 거리, 성곽, 하천 등이 비춰진다. 전시 내용이라야 의복이니 그릇이니 가구니 하는 것들이지만, 거 왜, 내가 지금 <고전 읽기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라 유난히 흥미로왔다. 곳곳에 터치 스크린이 있어서 이런 저런 설명을 볼 수 있다. <Touch Museum>이라는 곳이 있는데, 직접 만져볼 수 있게 복제품을 만들어놨다. 거기서 한옥의 기와도 올려보고, 낯선 꼬마들이랑 집도 짓고, 콩도 까보고 했다. 뭐야, 부실 공사야, 라고 꼬마들이랑 킥킥거렸고, 어쩐지 뛰어다니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다른 방에서는 <독립신문>과 <한성순보>를 읽었다. 펼쳐져 있는 페이지를, 친구랑 소리내어 읽으며 좋아라 했다.
1층의 기증유물 전시실에서는 저 대동여지전도를 볼 수 있었다. 대마도까지 우리땅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지도에는. 각 지방의 거리를 표시해놓은 표도 있고 (기차 시간표랑 비슷하게 생겼다.), 옛날에 출판된 책도 있다. 운현궁의 봄과 한국통사가 나란히 놓여있는 진열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 들여다보며 감격스러워했다.
박물관을 나와서 홍대 앞으로 갔다. 비가 제법 쏟아졌고, 바지는 모두 젖었고, 그래도 좋다고 히히덕거렸고, 뭘 먹을까 한참 고민을 했고, 결국 매콤한 닭도리탕에 매화주 한 잔으로 마무리.
집에 돌아와서는 피곤에 겨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두시간쯤 자고 일어나 서재 마실 다니다 느림님 이벤트에 당첨,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를 받기로 했다. 웬 횡재냐!
즐겁고,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 내 주말 계획의 절반은 멋드러지게 성공한 것이다. 하하.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