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는 쉬었습니다.

이 코너를 찾아주신 분들이 계셨어요.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적립금 드리는 이벤트는 여기. 1/31 까지입니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MD의 감상평: 파키스탄 남자를 주인공 삼아 9/11과 제3세계의 삶을 그려내는 이야기가 얼마나 낭만적일 수 있을까.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바로 그런 소재의 낭만적인 소설이다. 슬픈 사랑과 좌절된 꿈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는 각각의 사건에 대한 섬세한 묘사로 이루어져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부드럽게 끌어들인다. 게다가 작품 전체가 주인공의 발화(상대방의 반응은 드러나지 않는다)만으로 구성되어서 날렵하고 산뜻하다. 만듦새가 좋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섣불리 따져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왜 자신이 이렇게 되었냐고 묻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은 정치적인 혐의 바깥에서 온전히 세련된 모습으로 독자들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그러면 독자들이 그 예쁜 슬픔을 끌어안고 '당신은 왜'라고 먼저 묻게 된다는 걸, 이 영리한 소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런 분들께 추천: 질질 짜지 않는 러브스토리 찾습니다 / 빨리 읽히는데 생각할 꺼리를 안겨주는 소설 찾습니다 / 근대소설 느낌 안 나는 제3세계 문학 찾습니다 / 소설 좋아하는 친구에게 추천할 신작 찾습니다

 

이런 분들은 주의: 그러니까 미제국주의자놈들이 역시 나쁜 거죠? / 아니 그러니까 이 중동 테러리스트 놈들은 답이 없다니까요 / 외국인 노동자가 토종 한국인을 위협하고 있다 / 거대 서사 중독자

 

 

 

 

 

유빅

 

 


 

 

MD의 감상평: 이건 이미 유명한 소설이잖아! 음. 그렇다. <유빅>은 필립 K. 딕의 작품 중에서 베스트라고 봐도 좋을 유명작이다. 여기 다시 소개한 이유는 이상하게 그걸 몰라봐주는 사람들이 많아 보여서다. 물론 <유빅>은 신나게 읽는 엔터테이너는 아니다. 초반에 삽입된 맥거핀은 반칙에 가깝고, 등장인물들이 역경을 극복하는 자발적인 액션은 보기 힘들다. <유빅>은 PKD가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실제 현실과 감각되는 현재 간의 간격'에 대한 인지부조화 실험이며, 그 부조화의 틈바구니에서 신비의 형태로 출현하는 '구원'을 동시대의 감수성을 이용해 시적으로 형상화한 걸작이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시를 장편소설로 확장한다면 나는 그게 <미국의 송어낚시>가 아니라 <유빅>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소설은 말 그대로 마스터피스다.

 

이런 분들께 추천: 카프카의 후계자를 찾습니다 / '합법 마약'이 무슨 소린지 알고 또 좋아함 / 본격 포스트모던이 멀미가 나서 중간 기착지를 찾는 분 / SF를 무시하는 친구에게 선물하세요

 

이런 분들은 주의: 장르소설이 흰소리 지껄이는 거 딱 싫다 / 그럼 커트 보네거트 같은 느낌인가? (아님) / 와 초능력자들이 막 나와서 싸운다니 재밌겠는걸

 

 

 

 

 

 

이력서들

 

 


 


MD의 감상평: 블랙 유머가 도처에서 출현하지만 전체적으로 삭막하다. 마치 강제로 탈색된 게오르게 그로스의 그림 같다. 희안한 인물들이 등장해서 부조리한 전개가 펼쳐지지만 그 부조리는 불안과 긴장을 유발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극복이나 추구할 대상으로 격상되지 못한다. 역사의 무게에 눌려 찌그러진 인물들이 부조리한 상황을 부조리하다고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서사 기법들이 동원되지만 그 재기넘치는 시도들조차 이 방향성 없는 중성적인(아이히만적인?) 부조리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함으로써 좌절의 침묵을 강화시킨다. 끊임없이 떠드는 이 소설은 아연한 침묵을 향하고 있다. 드라마-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 사건의 총합으로써의 역사 소설, 우리도 이런 게 많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런 분들께 추천: 뉴 저먼 시네마나 그 비슷한 건조하고 쓸쓸한 영화 애호가 / 전범국의 부조리 문학은 프랑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 궁금하신 분 / 불순한 감정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다크포스 컬렉터

 

이런 분들은 주의: 로맨스다운 로맨스 없습니다 / <변신> 이외의 카프카를 읽어낼 수가 없다 / <호밀밭> 이외의 샐린저를 이해할 수가 없다 / 그것봐 내가 세상은 엉망이랬지!

 

 

 

 

 

 

브랫 패러의 비밀

 

 


 


MD의 감상평: 죽은 줄 알았던 남자가 돌아오면서 그에게 쏟아지는 의혹과 그 진실을 다룬 이야기. 아마 이런 소재를 다룬 작품 중에 가장 조용한 작품일 것이다. 조세핀 테이는 거의 우아할 정도로 차분하다. 실종자의 복귀라는 현상을 둘러싸고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는 모습은 투명한 거미집이 조용히 완성되는 모습 같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거미이자 동시에 희생양인, 독자들로 하여금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범죄자가 있다. <브랫 패러>는 빅토리아 시대 드라마의 유산을 이어받아 심리 서스펜스물로 변환시킴으로써 미스터리가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삶의 일부임을 증언한다. 이것은 중요한 성취다.

 

이런 분들께 추천: 제인 오스틴이 미스터리 소설을 썼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 코지 미스터리 애호가 / 연극적 소품 애호가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류 심리 서스펜스물의 기원을 찾아서

 

이런 분들은 주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시시하던데? / 피 없는 미스터리는 선지 없는 순대 / 하드보일드 간지 편식쟁이 / 메타포 및 알레고리 중독자

 

 

 

 

 

음..가능한 2월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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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새 2013-01-08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 넘흐 재밌는 서평입니다. 저의 서재에 이렇게 쉽게 몇 권을 추가하시다니, 능력자십니다. sunshine같은 책 소개.

외국소설/예술MD 2013-01-09 09:24   좋아요 0 | URL
댓글 하나하나가 제게는 썬샤인입니다. 출근하자마자 기뻐요. ㅎ

아기새 2013-01-09 12:23   좋아요 0 | URL
저 여기 consult 좀..

유빅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끌리는데, 대체 저는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 1권을 300페이지나 읽고나서도 몰입이 안되어 더 이상 진도가 안나가는지라 주저되네요..☞☜ kite runner도, 천개의 빛나는 태양도 별 감흥없이 후딱후딱 읽고는 평이한 서사에 실망. 흙흙.
소위 '제 3세계 문학'으로 맘에 드는 분은 이사벨 아옌데 님과 위대하신 가르시아 마르케스 님 뿐 ㅜㅜ
어케... 사야할까요? 소설(을 끝까지 못 읽는 장)애자 임뮈 으흙으흙

외국소설/예술MD 2013-01-09 14:27   좋아요 0 | URL
아 네 예를 드신 두 작품.. 파묵이나 호세이니하고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좀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작가 소개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작가는 미국에서 글쓰기 수업을 받았고, 실제로 미국 소설의 느낌이 많이 납니다. 작품 배경의 상당 부분도 미국이고요. 거대 서사가 아니라 '베스트 아메리칸 숏 스토리즈'같은 데 수록될 법한 느낌이니 한번 골라 보셔도 되지 않을까 해요. 미리보기로 우선 한번 판단해 보시죠. ㅎㅎ

jj305 2013-01-23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넘 흥미진진하게 잘 봐서... 이번엔 브랫페러의 비밀에 도전했는데 넘 재미있네요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고있어요... ^^ 감솨

외국소설/예술MD 2013-01-29 13:10   좋아요 0 | URL
아 둘다 재미있는 소설이죠. 잘 고르셨습니다. ㅎㅎ 스토리텔링이 좋은 물건 찾으시는군요 ㅎㅎ
 

 

클릭하면 좀 커짐

 

 

 

그날은 간만에 회사를 쉬는 날이었다. 대낮이라 낯설어진 동네를 미적지근한 걸음으로 돌아다녔다. 거리는 더웠다.

 

카페에서 저 사진을 찍었을 때쯤 트위터를 보니 모리스 샌닥이 죽었다고들 했다. 그렇구나. 카메라 LCD로 방금 찍은 장면을 다시 보고, 또 보고, 샌닥이 죽었다는 말을 자꾸만 생각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아무 상관 없는 장면이었다. 차라리 숀 탠 같잖아? 그렇지만 샌닥이었다. 마침 우연이 사진 위로 날아와 앉았으니까. 어차피 사진 위에 얹혀진 빛들이 모두 그 순간 우연히 모여든 것들이라면, 그때 마침 모리스 샌닥이 죽었다는 우연도 사진 속에 마땅히 포함시켜야지 않을까. 사진 속 건물 옥상은 작은 보트처럼 항해 중이었다. 그 여정의 끝에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간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종종 발견했다. 주로 바다가 있었고, 쓸쓸했고, 그렇지만 실낱같은 연대 같은 게 남아 있어야 했다. 발견하는 일이 드물어서 한번 마주하면 오래도록 머물러 돌아다니곤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릴 필요 없이 한쪽 발은 꿈 속에 담근 채 노곤히 움직이기 좋은 순간들. 샌닥의 그림책을 읽으면 그런 기분이 든다. 반쯤은 꿈인 나라. 반쯤만 꿈인 나라. 하나 뿐인 출구 앞에서 막막한 현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닳아가는 꿈들이다.

 

나는 샌닥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 어떤 다른 이론가나 소설가들에게 진 것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어느 곳에서 '지금이 좋다'라는 느낌이 들 때, 그것과 가장 닮은 게 샌닥의 책들이었니까. 그 기억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다.

 

두 장의 사진을 추가한다. '샌닥의 순간들' 중의 일부다. 부디 안녕히 가셨기를.

 

 

 

 

 

 

 

이건 작년에 발견한 나라

 

 

이건 유조선이 엎어졌던 그 해, 태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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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12-1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릭하면 좀 커짐. ㅋㅋㅋㅋ 아 재밌다.

외국소설/예술MD 2012-12-14 11:31   좋아요 0 | URL
저는 잘 웃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흐뭇.
 

 

 

벌써 11월..

갑니다.

 

아, 이벤트는 여기. 11/30까지 입니다.

 

 

 

 

 

미야자와 겐지 전집 1권

 

 

 

 

MD의 감상평: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모티프가 된 작품으로 유명한 '은하철도의 밤'이 수록된 미야자와 겐지 소설(동화) 모음집. 태연하게 부조리한 대사들을 내뱉는 우화들, 통상적인 전개를 무시하고 도약해 버리는 이야기들, 정확한 정체가 모호한 캐릭터들은 미야자와 겐지를 간단히 아동 문학가의 범주에 집어넣을 수 없게 하며, 이런 특징들은 되려 팝 또는 포스트모던 계열의 현대 일본 소설을 연상케 한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나 초기의 하루키, 시마다 마사히로 등이 보여준 기괴한 멜랑콜리의 기원, 즉 '동화 없는 시대의 동화'를 구축한 선구자의 베스트 앨범.

 

이런 분들께 추천: 그림형제의 동화를 읽었는데 약간 미친 이야기들 같아서, 좋았다 /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좋다 / 80년대 지브리 류 아니메 스타일이 좋다 / 뭐? 그저그런 애니 '첼로 켜는 고슈' 원작은 짱 재미있다고?

 

이런 분들은 주의: 전집이라니까 다 나오고 사면 되나? / 동화는 아이들의 인격 함양과 정서 발달을 위한.. / 철이도 메텔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라마야나

 

 

 

 

MD의 감상평: <라마야나>는 고전 서사시를 현대 방식으로 재서술한 판타지 모험담이다. 비슷한 예로 베오울프나 아더왕, 니얄 사가 등 유럽의 고전 모험-전쟁담을 떠올릴 수 있겠다. 그러나 <라마야나>의 속도감은 다른 고전들은 물론 현대 작품들조차 거의 따라잡기 어려운 수준이다. 군더더기 없이 속개되는 스토리의 집약된 에너지로 가득한 이 작품은 보통 '고전'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선입견을 무너뜨린다. 300페이지를 겨우 채운 이 짧은 서사시에 'Epic'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불타는 석탄을 압축시킨 다이아몬드 같은 신화-모험담.

 

이런 분들께 추천: 반지의 제왕 완독에 수 차례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 스케일 큰 작품을 읽고 싶지만 여유가 없는 바쁜 현대인들 / 저는 고전에 대한 편견을 없앨 마음의 준비를 마쳤어요

 

이런 분들은 주의: 그럼 라마야나는 몇써클 매지션임? / 이거 완전 이교도 놈들 투성이네 / 고독과 상실과 그에 기반한 블랙 유머를 편식하는 '고전 문학' 애호가

 

 

 

 

 

 

체벤구르

 

 

 

MD의 감상평: 간단히 표현하자면 <체벤구르>는 소비에트 버전의 '오디세이아'다. 그만큼 경이롭다. 여정이라는 컨셉트 아래에 모인 각각의 작은 이야기들은 목가주의에서부터 포스트모던을 예감케 하는 분열적인 모습까지 그 모양과 색이 모두 다른 벽돌들이다. 이 돌들로 쌓여진 거대한 벽은 마치 대지 예술(Land Art)처럼 신기하고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그 벽, 성이 아닌 끝없는 벽을 따라가는 길은 '아직 오지 않은' 꼬뮤니즘의 완성을 향해 나 있다. 인간-역사에 대한 의지와 문학적 숙련도 모두 최고 수준에 다다른 위대한 작품이다. 플라토노프 동지 만세!

 

이런 분들께 추천: 문답무용問答無用

 

이런 분들은 주의: 소비에트라니 재미없는 거 아니야? / 오디세이아라니 재미없는 거 아니야? / 공산주의는 나쁜 거 아니야? / 러시아 애들은 이름이 여러 개라며? / 인간에 대한 의지라니 속편한 잠꼬대 하시네요.

 

 

 

 

 

 

카운트 제로

 

 

 

MD의 감상평: 윌리엄 깁슨이 스프롤 3부작 중에서 (뉴로맨서를 제치고) 가장 마음에 들어한다는 작품. <뉴로맨서>의 싸이키델릭한 네트워크 묘사와 음울한 사이버 펑크 세계관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거기에 각자 분리된 스토리가 절정에 이르러 서로 합쳐지는 전개는 소설적인 재미를 추가로 선사한다. 모험과 모략에 더해 권태와 생활이 버무려진 이 포스트-뉴로맨서는 사이버 네트워크, 즉 새로운 시대의 카우보이들이 암약하는 이 신 서부극 장르가 부흥하기 이전에 이미 예언처럼 완성된 '안티 웨스턴'이다. 출발점이자 폭심지. 여기가 바로 '그라운드 제로'다.

 

이런 분들께 추천: "네트워크는 넓으니까." 라는 대사의 출처를 안다 /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를 감명깊게 읽었다 / 테크놀러지 시대에 접어든 환상소설이 어떤 식으로 가지를 펴 나갔는지 궁금한 문학 탐구자 / 인터넷을 사랑하는 덕후 여러분, 그 기원, 성지가 여기입니다.

 

이런 분들은 주의: 총알을 슬로우모션으로 피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 아.. 이 사람이 찰스 경이 말한 그 사람이야? / 자꾸 언급되길래 PKD를 읽어 봤지만 결국 왜 좋은지 이해할 수 없었던 순수문학 애호가 / 응? PKD가 뭐야?

 

 

 

 

 

12월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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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의 그냥 마음대로 추천도서들

(이벤트 기간: 10/31까지. 바로가기)

 

 

 

만(卍) .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 다니자키 준이치로

 

 

 

MD의 감상평: 이 순진하리만치 집요한 욕망들을 탐미주의니 악마주의니 여러 이름을 붙여 분류하는 모양이지만, 육체의 매력과 애욕의 힘을 이렇게 노련하게 몰아치는 작가는 이후로 등장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부드럽게 풀어내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보이고, 뜨겁게 밀어내면 미시마 유키오가 이미 거기에 있다. 지미 헨드릭스처럼, 다니자키 준이치로도 후대의 성과를 이미 쟁취했던 단독자였다. 그러니 차라리 후대의 비슷한 작가들을 '다니자키 준이치로 유파'라고 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검술 같기도 하고.

 

이런 분들께 추천: All You Need is Love / 가와바타 야스나리 또는 미시마 유키오를 좋아함 / 와타나베 준이치나 단 오니로쿠 같은 일제 핑크 로망의 조상님을 찾아서 /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를 보았는데 미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분들은 주의: 이게 사랑과 전쟁하고 다를 게 뭔가요? / 연애 혐오자 / 여성가족부 임원 / 문학지상주의자는 증상이 악화될 수 있으므로 전문가나 친구와 상담 후에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점과 선 / 마쓰모토 세이초

 

 

MD의 감상평: 어지간하면 메인 탑북에 선정된 책은 이 코너에 집어넣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 책은 예외로 하고 싶다. 탑북 치고는 많이 안 팔렸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확실한 걸작이기 때문이다. 꼼꼼하고 치밀한 이중 알리바이 시간표 트릭이 안겨주는 즐거움, 천재 대신에 인간을 마주하게 하는 풍부한 디테일,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한 냉소적인 성찰까지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을 두루 갖추었다. 괜히 폼잡지 않는 진짜 '드라이'한 추리소설. 쌉쌀한 감칠맛이 일품이다.

 

이런 분들께 추천: 챈들러보다 해밋이 좋더라 / 사회파 미스터리는 트릭이 좀 애매한 거 같던데, 괜찮을까? / 미스터리 소설이면 잔인하고 엽기적인 범죄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되시는 분. 안심하세요.

 

이런 분들은 주의: 고유명사 암기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자 / 카리스마 계열 명탐정 숭배자 / 고전 알레르기 보유자 /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논리 두뇌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으신 분

 

 

 

 

 

고기 / 마르틴 하르니체크

 

 

MD의 감상평: 고기로 돌아가는 사회. 사람은 고기의 소비자이자 동시에 공급자다. 범법자는 판결 없이 '도축'되어 '육류'로 보급되는 것이다. 주인공조차 이 지옥에서 살아가기 위해 겨우 발버둥치는 사람일 뿐, 어디에도 각성이나 구원의 여지는 없다. 디스토피아 설정 중에서도 극단에 속하는 이 작품은 그 구조가 헐겁고 문장이 조악한 편이다. 그런데 그 빈틈들이 설정의 극악함과 어울려 참혹함을 더욱 가중시키는 연료 역할을 한다. 위대한 걸작들에게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날비린내가 맴도는 소설이다. 흥미로운 얼터너티브 초이스.

 

이런 분들께 추천: 디스토피아 소설 애호가 / 대체역사 계열 SF 애호가 / 동구권 환상소설의 현대화 계보를 추적중인 사냥꾼 / 체제비판 문학 컬렉터

 

이런 분들은 주의: 극단은 유치함의 다른 이름이라고 믿는다 / 우아한 소설 또는 문장 미학 편식쟁이 / 카프카는 카프카 소설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 조지 오웰은 조지 오웰 소설에서 찾으세요

 

 

 

 

 

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 / 데이비드 웡

 

 

 

MD의 감상평: 지금까지 거의 볼 수 없었던 본격 허접 개그 호러물. 슬랩스틱 또는 화장실 개그와 호러가 서브컬처라는 동질감 속에서 만난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런 케이스는 처음 본다. B급 호러-개그 소설들의 흔한 설정에 약물-싸이키델릭이라는 소스를 덮어씌운 꼴이 참으로 희안한 몰골이다. 그런데 화자는 더없이 진지하고, 독자들은 그 진지함과 황망한 사건들의 갭을 망연히 바라보다 어느새 휘말려 든다. MTV-필립K딕-스티븐 킹 하이브리드 버전의 미래파 펄프 픽션. 영화화되어 선댄스에서 개봉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이런 분들께 추천: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쳐>나 <웨인즈 월드>를 감명깊게 보았다 / 병맛은 전위의 다른 이름 / 미국식 개그 센스를 좋아한다 / 소설 <멋진 징조들>이 좋긴 했지만 좀 얌전했다 / 장르소설이 궁금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애호가(반 농담임)

 

이런 분들은 주의: 이말년이나 불암콩콩 등을 들어본 적 없거나 혐오함 / 러브크래프트 등을 숭상하는 호러 교조주의자 / 이걸로 호러 소설 입문해도 되나요? / 뭐,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애호가라고? 좋아 내가 한번 읽어봐 주지.

 

 

 

 

끝. 11월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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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2-10-18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보관함에 막 쓸어담;;;;;

감사합니다. ^^;;;

외국소설/예술MD 2012-10-18 18:45   좋아요 0 | URL
제가 더 감사하죠 ㅎㅎ 부디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요. 좋은 책들임에는 분명합니다. ^^

딸기꼬치 2012-10-19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기가 맛있겠네유...

외국소설/예술MD 2012-10-19 17:56   좋아요 0 | URL
에비.. 저거 사람고기여유..;
 

원래는 월간 이벤트로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몇몇 분들의 요청이 있어 이벤트가 종료된 후에도 서재에서 볼 수 있도록 옮깁니다.

 

매월 장르 소설 두 권, 비 장르소설 두 권씩을 고르는 걸로 하고 있습니다.

그 경계가 불분명한 작품들은 역시 제 마음대로 집어 넣었습니다(..)

또한 어느정도 유명해지거나 판매가 호조인 책은 일부러 제외했습니다.

 

첫회가 좀 덜 재미(..)있어서 카피는 약간 수정을 했습니다.

심심하실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9 (첫회)

 

 

세월 / 마이클 커닝햄

 

 

 

MD의 감상평: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마이클 커닝햄의 제1매력으로 꼽히는 시적인 문장이 얼마나 잘 전달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세월>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번갈아 전개되는 시공간을 잇는 매끄러운 접점, 우아함과 날카로움을 번갈아 드러내는 대사들, 생에의 의지와 그것을 둘러싼 운명의 위력 간의 균형. 정적을 그려내는 솜씨와 파티장에서 캐릭터들을 와르르 부딪히게 만드는 솜씨 모두 발군이다. <세월>은 흠을 잡기 힘든 노련한 소설이며, 따라서 좋은 소설이고, 어쩌면 위대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이런 분들께 추천: 문예미학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분 / 느린 호흡의 소설도 OK / 이 작가의 이름을 3회 이상 들어본 적이 있다 /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를 감명깊게 보았다

 

이런 분들은 주의: 시대물이라면 당연히 로맨스가 있겠지? / 느린 호흡이 무슨 뜻이에요? / 여자친구 책선물 추천해 주세요

 

 

 

 

 

범죄소설: 그 기원과 매혹 / 김용언

 

 

MD의 감상평: 솔직히 말씀드리겠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인문/사회 분야의 교양을 좀 갖추어야 한다. <범죄소설>은 미스터리 또는 하드보일드 소설을 잉태한 당대 사회를 읽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작업이 필요한가? 소설들이 더 재밌어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럼 뭐하러 이 책을 읽는가? <범죄소설>은 범죄소설을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3부를 읽어 보시라. 이 책은 범죄소설 팬들, 즉 우리 자신을 위한 송가다.

 

이런 분들께 추천: 범죄소설과 인문학을 다 좋아하는 분 / 실제 범죄를 다루는 언론 및 매체의 속성에 관심이 많은 분 / 범죄소설과 연관된 자아를 재발견하거나 확장하고 싶은 신실한 팬

 

이런 분들은 주의: 이 멍청이들아 홈즈는 실존인물이다! / 근데 발터 벤야민이 누구예여? / 범죄소설은 갖고 노는 거지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파저란트 /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MD의 감상평: 소설 속에 빼곡히 등장하는 상품명들. 정처도 희망도 없는 청춘들. 이렇게만 써 놓으면 왕가위의 영화들이 하나의 스타일로 군림했던 90년대 후반을 떠올리게 한다. <파저란트>를 비롯한 일군의 작품들이 '팝 소설'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면 심증은 더욱 굳혀진다. 그러나 <파저란트>는 발랄하거나 '감각적'이지 않다. 욕망에 매몰되고픈 욕망조차 이루어지지 못하고, 여정의 종착지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세기말의 방랑기는 이렇게 쓰여졌다. 인간이 사라지고 사건과 제품으로만 가득 찬, 종말 이후의 지구를 돌아다니는 것처럼.

 

이런 분들께 추천: 영화 <천국보다 낯선>을 보다가 졸지 않았다 / 청춘 방황물의 새로운 느낌을 찾는 문학청년 / 독일 현대소설 중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데?

 

이런 분들은 주의: 독일 소설을 수면제와 혼동하시는 분 / 롤러코스터류 소설 애호가 / '기승전결' 이론 신봉자 / 백수 한량들이 방종하는 내용을 용납할 수 없는 새누리새마을정신 보유자 / 근데 이거 좀 깔쌈한가?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 / 클레이튼 로슨

 

 

 

MD의 감상평: 지금은 미국 아마존에서조차 새 책을 구할 수 없는 고전 걸작 미스터리. '10대 걸작선' 어쩌고 하는 목록들이 지겨울 때도 되었다지만, 읽어 본 입장에서 말씀드리건대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이 존 딕슨 카의 작품들과 함께 10대 밀실 미스터리 걸작에 꼽히는 건 합당한 결과다. 마술과 심리 트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등장인물들의 밀실트릭 싸움은 지금 읽어도 화려하고 즐겁다. 이른바 '본격 미스터리' 세계의 진짜배기 클래식이다.

 

이런 분들께 추천: 퍼즐을 짜맞추는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은 소설 팬 / 존 딕슨 카 등의 정통 트릭 미스터리 팬 / 시야를 확장하고자 하는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팬

 

이런 분들은 주의: 하드보일드 편식쟁이 / 고전 알레르기 보유자 / 그러니까 이 지도를 보면서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가며 읽어야 하는 게 소설이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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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 2012-10-27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쓱으쓱 다 읽었네요 으쓱으쓱

외국소설/예술MD 2012-10-29 18:11   좋아요 0 | URL
참 잘했어요 도장을 드립니다.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