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의 정치경제학,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존재가 되어라>

로메로 감독이 그려낸 좀비는 현대 자본주의가 좋아하는 이상적인노동자 모델이자 같은 목적을 지녔다면 서로 해치지 않는 이상적인경제적 인간상이기도 하다. 1932년 영화 <화이트 좀비>는 그야말로기계 부품처럼 일하는 좀비를 보여준다. 하지만 로메로 감독의 좀비는 인간을 잡아먹으러 다닌다. 그런데 잘만 이용한다면 이 좀비를 아주 훌륭한 일꾼으로 부릴 수가 있다. 좀비는 인육을 원하니 하나가 죽어도 옆을 물면 또 좀비 일꾼을 쉽게 만들 수 있고, 서로 다투지도않는다. 좀비의 이 세 가지 특성이야 말로 자본가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노동자상이다. 오늘날 공장 자동화에 로봇 이용이 점점 증가하는 것 역시 로봇이 바로 이 세 가지 특성, 즉 적당한 에너지 공급만으로 얻을 수 있는 끊임없는 노동력, 손쉬운 교체, 노동자 연대(노조)의 원천 차단이라는 특성을 완벽하게 갖췄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자기는 단순 노동자 취급받기를 원치 않으면서도 막상 자기가 남에게 일을 시키면 로봇 같은 단순 노동자를 원한다. 이런 이중적 태도를 만족시키는 가장 완벽한 대상이 좀비다. 우리에게 좀비가 두려운 까닭은 나의 삶도 혹시 언젠가는 좀비 같은 노예 노동으로 추락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암묵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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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빌런은 마을을 뜻하는 단어 ‘Village‘에서 나왔다. 영주와 귀족이 중심이 되는 영웅 서사에서, 귀족의 시각으로 보면 미천한 마을 사람들이 빌런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락민들은 사람을해치면서까지 원하는 걸 얻으려는 탐욕적인 캐릭터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사태를 반대로 보면 마을 사람 villain을 착취하는 영주야말로 진짜 악당이다. 그러므로 빌런은 태생적으로 양면적인 존재다. 영주가 히어로고 마을 사람이 빌런 같지만 반대로 착취하는 폭압적인 영주에 맞서는 사람들의 행동이 영웅이 될 수도 있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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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비행기에 앉아 있다면 아무리 안전띠를 매도 소용없다.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
- 무라카미 하루키 - P24

"너절한 소문에 불과한 말들이 진실로 둔갑할 만큼 우리의 수준이 추락해서는 안 됩니다. 타인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험담은 처방할 약도없는 고약한 전염병입니다." - P127

"너도 이제 독해져라. 인생은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해. 넌 책을 많이 읽으니까 로제 마르탱 뒤 가르가 ‘실존은 그 자체가 전투이다. 산다는 건 결국 자속적인 승리의 축적이다.‘라고 한 글을 읽어봤을거야."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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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와인드를 끝장낼 단 하나의 무언가는 없어." 그녀가 말한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이 합쳐져 사회에 양심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일깨워 줄 무작위적 사건들이 뒤죽박죽으로 일어나야 해."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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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 지방에도 규율이 막아 주던 위험보다 그 규율이 갖는 억압이 더 무거워지는 때가 찾아왔다. 

마녀 사냥은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균형의 추가 옮겨 가기 시작했을 때, 사회 모든 계층의 구성원들 사이에 생겨난 공포의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흔하고도 개인적인 악덕을 초월한 사람만이 모든 이를 동정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언젠가 받게 될 그 동정 말이다. 억압없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며, 규율과 자유 사이에서 균형은 충돌하게 마련이다.

마녀 사냥은, 그러나 단순한 억압이 아니었다. 이것은 또한 중요한 부분인데, 희생자를 고발한다는 구실하에, 비행과 죄를 공공언히 저지르던 류의 사람들을 위해서 오랜 세월 미루어 둔 기회로 작용했다. - P17

(마녀 사냥을 통해)
즉 이웃을 마녀라고 모함할 수 있었고 게다가 덤으로 정의감을 맛볼 수도 있었다. 해묵은 원한은 하느님과 악마의 대결이라는 천상의 차원에서 결론지을 수 있게 되었다. 

행복한 자들을 향해 불행한 자들이 품었던 의심과 질시가 평범한 보복행위로 터져 나올 수 있었으며 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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