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습찾기
마리네야 테르시 지음, 유혜경 옮김 / 책씨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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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10대들의 모습을 다룬 소설을 보면 왜 내가 10대때는 이러한 소설을 많이 접하지 못해 자극을 받지 못했을까라는 아쉬움이 든다.

10대때의 나의 독서를 살펴보면 그냥 닥치는대로 읽었고 그나마 자각하고 골라 본 것은 10대 후반에 읽은 문학 조금이 전부다.

대부분 크게 공감이 가지 않고 내 수준에 맞지 않는 독서였다는게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이다.

거창하게 10대의 독서를 운운하는 것은 이 책의 주인공 가브리엘 때문이다.

 

17살의 나이에 갑자기 비워진 아빠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고통의 과정의 겪으며 자신의 내면에 가까워지는 가브리엘이 나는 부러웠다.

아빠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그가 부럽다는 말이 얼핏 잔인하게 들리 수도 있으나 아빠를 잃고 아빠가 어떠한 떠남을 강행했든 어떠한 과정이 있었기에 아빠를 원망했든 결국은 아빠를 소중한 사람으로 되돌려 놓는 마음이 기특해서이다.

자신도 의아해하는 엄마와 아빠의 바닥을 드러내면서도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을 봤으면서도 가브리엘 자신도 그렇게 아빠를 사랑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갑자기 자살을 한 아빠에게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고 또한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에 편지를 쓰기로 한 가브리엘.

여기에는 아빠에게 쓴 편지와 자신의 일기들로 채워져 있지만 17살의 가브리엘이 가질만한 성숙을 뛰어 넘는 내면이였다.

때론 유치할때도 있었지만 쉼 없이 고뇌하고 자신이 처해진 상황을 어떻게든 헤쳐 나가려는 그의 내면은 무르익음의 농도가 짙었다.

 

아빠에 대한 수 많은 의문들과 엄마에 대한 짜증, 그리고 현실적인 사랑과 모순적인 사랑의 경험 속에서 똑부러지게 나아기진 않지만 깊은 늪 속에서 서서히 뭍으로 올라오듯 그 과정은 적나라하다.

그의 사고와 마음의 드러남은 일기와 편지를 통해 거짓을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자신도 아빠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할 수 없었다고 했듯이 그의 행동도 서서히 자신이 이끄는 진실을 향해 가고 있다.

 

엄마에게 아빠의 죽음의 전반상황을 듣게 되고 엄마, 아빠에 대한 고통과 분노의 감정 속에서도 이젠 엄마와 더 가까워져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동안 아빠와 너무 다정해서 엄마가 질투심을 느낄 정도였으니 이젠 그러한 아빠가 없고 아빠에 대한 배신감이 느껴져도 결국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아빠니 엄마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억지로가 아닌 스스로의 생각으로.

늘 일에 찌들려 아빠와 가브리엘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 해 주지 못하고 아빠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리던 엄마도 가브리엘 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가브리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와 가깝게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둘에겐 미래가 있잖니. 안그래?" - p.208

 

아빠의 죽음으로 엄마도 가브리엘도 커다란 고통과 혼란스러움 가운데에서 헤메였지만 이젠 각자의 미래이면서도 공동의 미래이기도 한 그들의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정체성을 찾지 못해 혹은 자책감에서 나오는 혼돈 속에서 삐뚤어 질 수도 있었지만 가족의 소중함과 늘 곁에 있어주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주는 알레한드라의 품으로 안착하려는 마음이 애닯게 다가왔다.

책을 읽는 도중에는 이러한 느낌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가브리엘의 토로를 보고 있자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착각이 일 정도로 내면의 혼란을 다 끌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끌어 냈다면 힘들다, 살 맛이 안난다로 끝내 버렸을 그 무언가를 혼란스러움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나는 10대 때 그런적이 있었던가. 20대인 지금의 나는 나를 더 감추고 살고 있진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면 가브리엘의 혼란을 부러워하며 그의 안착됨을 기특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10대의 나의 혼란은 철저히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었고 20대인 지금의 나는 태연히 마음을 드러내지 않음에 능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모습을 찾아야 하는건 가브리엘이 아니라 가브리엘을 통한 내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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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연애는 왜 그 모양이니?
로리 고틀립 외 지음, 윤정숙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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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며 잠시 나마 '나의 연애는 왜 이 모양일까' 라고 생각해 봤지만 그렇게 논할만한 연애담이 없다는 것이 참담하게 다가왔다.

연애를 안한지가 근 3년이 되어가고 그나마 3년전의 경험도 내 인생에서 한번뿐인 연애였으니 갑자기 이 책을 마주하기가 고약스러워진다.

한심하고 못된 나를 만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 혹은 스스로 위로해야 할지도 모르는 처연함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씁쓸함이 책을 마주하기 전부터 나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첫 대면부터 이렇게 책을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주관적인 생각을 덕지 덕지 붙여 책을 펴들고 보니 위험했다.

이 책의 저자의 문체가 지극히 자조적이였기 때문이다.

he said, she said로 남,녀의 상황 대조를 실어 놓았지만 내가 책을 읽기 전부터 빠져들었던 자괴감의 늪으로 끌고가기 충분할 정도로 씁쓸함이 많았다.

거기다 정서의 낯섬이라니...

솔직담백한 고백 속에서도 그들의유머, 그들의 생각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를 쉴새없이 되뇌이게 되는 동떨어진 느낌은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무조건 동조하기에는 무리가 갔다.

오히려 당신들의 연애는 왜 그 모양이냐고 진실됨을 찾아 보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의 진실을 찾는단 말인가. 사랑의 진실? 그들이 계산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거짓을 향해 갔다는 생각이 든 것도 아니다.

단지 나는 현실 속으로 뛰어 들지 못했고 그들은 뛰어 들어 부딪혔다는 차이만 있었을 뿐.

그래서 그들의 부딪힘을 지켜보며 혀를 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경험담과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아서 좋긴 하지만 그래도 연애에 대한 환상을 조금이라도 품고 싶다고 이렇게 다 드러내는 건 싫다고 말이다.

이런 나의 모습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연애의 쓴맛을 잊은 후에 품은 환상이 너무나 달콤한 것을...

 

이 책에서 남,녀의 만남에서부터 사귀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의 많은 부분들 속에서 분명 연애의 환상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연애를 자꾸 실패했기에 그러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완벽한 소울 메이트는 없다는 것을 보고도 난 왜 이들의 말을 믿고 싶지 않고 당신들이 진지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아직은 너무나 개방적인 그들의 사고방식과 연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리라. 당신들과 같은 솔로이지만 그렇게 재고 빼고 더하는 복잡함보다는 운명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도 못하면서 당신들의 연애는 머가 그리 복잡하냐고 짜증만 내고 있는 것이리라.

 

자조적인 서술도 싫고 정서의 낯섬에서 나오는 유머도 어색하고 무엇 보다 환상을 갖지 못하는 드러남이 거북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솔로일 수 밖에 없다고 비난을 던져와도 조금은 위로를 기대했던 나는 심하게 풀이 죽어 버렸다. 이런 식으로 연애를 해야 한다면 연애와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이런 연애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함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좀 더 유쾌하게 써내려가지 못한 그들의 연애, 좀 더 아기자기하게 꾸미지 못한 책의 구성등이 조금은 아쉽게 다가왔다.

그 아쉬움이 왜 너의 연애는 그 모양이냐고 경종을 울려주는 자극일 수도 있는데 그 자극을 그들의 연애담으로만 돌려 버려서 민망하기 그지 없지만 내게는 그들을 비난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나는 연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고 당신들처럼 계산적인 건 싫다고 말하면서도 어느새 조건주의자가 되어버려 그 조건 속에서 연애의 환상을 품고 있는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사랑만을 지향하면서 어느새 사람이 아닌 조건으로 판단하는 속물근성을 가져버린 나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다.

정작 중요한 나는 제대로 갖추어 놓은 것이 없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조건이 필요없는 불꽃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것인지 모르면서도 현실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나를 거둬들이지 못한다.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빛깔 없는 사랑을 꿈꾸었던 것일까.

책에 대한 수 많은 푸념을 쏟아 놓았지만 분명 이 책을 읽기 훨씬 전부터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씁쓸함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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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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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 남자네 집' 을 읽고 오랜만에 마주하게 되는 신간이다.
'그 남자네 집'은 소설이였지만 '호미'는 산문집이라서 조금은 더 관심이 가면서도 주춤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남자네 집'에서 자자의 솔직함을 보며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이렇게 솔직해질 수 있을까란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 솔직함에 묻어 나오는 투덜거림이 조금은 진부해서 잠시 주춤거렸는지도 모른다.
 
이번의 책은 어떤 느낌일까 라는 설레임과 혹시 이번에도 푸념거리가 많은건 아닐까하는 걱정 가운데 마주한 '호미'는 우선 깔끔했다.
책 크기가 다른 책들에 비해 조금은 아담해서 손에 잡기도 편했고 어디에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책에 빠지다보니 읽은 시간은 적었지만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어서 추억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 버스 안에서 읽고, 병원 대기길 복도에서 읽고, 혼자서 커피와 도넛을 먹으며 그 시끄러운 던킨 도너츠에서도 읽고, 버스정류장에서 철퍼덕 거리고 앉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렇듯 책 속의 이야기와 나의 추억이 겹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듯 자잘한 일상 속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특히 1장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는 마침 명절이라 시골집으로 향하는 내게 가장 찬란한 예찬이 되고 있었다. 분명 시골에서 자라서 저자의 전원생활의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도 수 많은 불편들을 감수하며 나는 과연 살 수 있을까란 생각들을 하며 그렇게 사색에 빠졌다.
내가 늘 스쳐 버렸던 것들, 밟고 지나쳤던 것들에게 말을 걸고 친해지는 모습이 잠시나마 나를 정화시켜 주었다고나 할까.
분명 자연속에서 친화력을 갖으면서 그런 여유를 느끼지만 어느새 시멘트 건물이 그득한 도심으로 돌아오면 나의 마음은 시멘트 보다 더 굳게 닫혀 버리고 만다.
그 마음을 계속 지킬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가고 마는 것일까.
 
 
 
확실히 산문집 속의 저자의 글에서는 세월의 향이 묻어났다.
자연예찬뿐만이 아니라 표현력과 몰입하게 되는 끌림까지 언어의 구사는 담백했다.
연륜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과 경험에서 나오는 생생함의 조화라고나 할까.
때로는 아이같고 때로는 노인 같고 때로는 정의를 부르짖으며 내 한몸 아끼지 않는 불굴의 청년으로도 보이는 저자의 이면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속에서 허우적대며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씩 현실이 돌아오고 들은 적이 있는 과거의 이야기가 나오고 다른 시각으로 보는 또 다른 추억은 서서히 '그 남자네 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꼿꼿하고 칼칼해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반복되는 이야기 속의 푸념을 잔소리로만 인식해버리는 굳어버린 귀와 내 마음 때문이리라.
어쩜 현실적인 이야기로 돌아왔을때에 현실감을 잊고자 현실도피를 하고 싶은 마음에 책을 펴든 내 마음을 들켜버린 후 그래 주지 못했다고 이렇게 모순된 푸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자연속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첫 시작의 울림을 피할 수 없는 나의 삶으로의 회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무조건 현실도피만 하고 싶다는 나의 마음은 정당하지 못하리라.
 
평범하고 자잘하다고 생각하는 일생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취할 수 없듯이 그 안에서 평안을 찾는것, 긍정적인 아픔을 품는 것, 혹은 중립을 취하더라도 나의 일상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늘 똑같은 일상의 패턴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닌 나를 제대로 내려다보고 내 자신에 솔직해져 간다면 현실도피를 일삼는 시간이 줄어들지도 모른다.
나 같은 젊은이의 생각이 이러할진대 문학과 함께 하였다지만 이젠 할머니의 소리를 들어도 어색하지 않는 작가 박완서님은 어떠할까.
일흔이 넘은 노인이라고 말하지만 글 속에서 늙음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할머니라 칭하는 것은 열정적인 삶의 모습이요 나의 부끄러운 잔상을 말하는 것일뿐 고리타분함이라든가 세대갈등을 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나이를 뛰어넘는 저력에 대한 자그마한 찬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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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경영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심현식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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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경영이라...
내게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경영의 몰입'이 아닌 '몰입의 경영'이라는 제목은 인간미가 느껴진다. 말 장난 같지만 인간의 능력보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먼저 언급되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나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저자는 경영을 먼저 내세워 따분하게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닌 몰입이라는 감정에 대해 다양한 경험을 들려준다.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몰입이 어떠한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결코 어렵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몰입과 경영이라는 단어를 들었을때 몰입에 더 솔깃했던 건 내가 평상시에 인식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한번은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이러한 간접경험을 통해서였다.
저자는 '몰입'이란 자신의 삶에 완전히 동화되어 몰아지경에 이르는 주관적인 경험을 두고 제시한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의 삶에 완전히 동화된다는 것에 살짝 주늑이 들긴 했지만 몰아지경에 이르는 주관적인 경험은 누구나 있었고 빈번히 일어났다는 사실 또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몰입의 감정속으로 스스로 이끌 수 있다는 것도.
 
1장의 서문에 '비지니스 리더들의 가치와 목표, 활동 방식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라고 밝혀서 몰입의 비중보다 경영과 비지니스에 더 초점을 맞췄을거라 생각했고 책의 전체적인 맥락도 몰입 안에서의 의의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느낀 이 책의 특징은 몰입이 더 컸다.
어떻게 몰입하여 경영으 하며 기업을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해 서술해가고 있지만 몰입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영과 비전이 자연스럽듯이 몰입은 어느 곳에나 어울렸다.
몰입을 경함할 수 있는 열정, 환경, 관심등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어느 곳이건 어디에서나 말이다.
그래서 '경영의 몰입'이 아닌 '몰입의 경영'이라는 제목에서 단순히 인간미만을 느낀 것이 아닌 더 큰 가능성을 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에 완전히 동화된다'는 경험에 무조건 어떤 특정한 것을 배경으로 두었던 것 또한 틀안에 박힌 나의 사고방식이였다는 사실도 말이다.
다소 장황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몰입'이라는 감정의 경험을 나타낸 것이 좀더 다양하고 넓게 몰입의 의미를 대입해보라는 뜻은 아니였을까?
그랬기에 '기업 환경에서 몰입을 나타내는 법'만 찾으려는 독자의 시선을 포괄적으로 돌려 수 많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몰입의 힘과 가능성을 알았다면 이제 기업의 경영에 몰입을 대입해보자.
왜 직장에서는 몰입이 일어나지 않고 구축화 시키지 못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때이다.
초반에 제시했던 몰입의 경험을 통한 행복을 맛보고 그 안에서 충분히 성장했다면 회사내에서의 그러한 경험도 어렵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염두해야 할 것은 이러한 몰입을 끌어내는 대상이 일반 직원들의 개개인이 아니라 경영인의 리더심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책의 초반에서 충분히 몰입에 대해서 다루었지만 회사라는 곳에서 개개인이 몰입을 이끌어 내야만 잘 운영되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몰입과 그 개체의 늘어남의 영향도 크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영향력이 있는 경영자들에게 몰입의 효과를 이끌어 주기를 권하고 있다.
 
"기업 내부의 수 많은 문제들을 CEO가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있지 않아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CEO가 이런 가치관을 회사 전체에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라며 말한 케임브리지 인큐베이터 설립자인 티머시 로의 의견만 들어보더라도 경영자의 위치에서 전파되는 파급효과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직장에서 몰입을 이끌어 내는 것은 의외로 쉽다.
내가 모르는 정답이 이 책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잊어 버리고 등한시 했던 것들을 인식시켜 주면서 단순한 경영의 부가가치만을 높이는 것이 아닌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여서 자신의 일속에서 몰입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업으로써 사회에 공헌한다는 사명감이든, 종교나 윤리를 바탕으로 둔 진솔함이든 그 가치관을 기업 내부에 얼마만큼 인식을 시키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가치관만을 운운할 수 없는 것은 근무조건이라든지 업부의 의미 부여나 직원들의 태도도 염두해 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들을 가장 쉽게 바꾸어줄 수 있는 사람이 리더자이기 때문에 그 위치는 상당히 중요하다. 그렇기에 리더자의 낙관적인 태도, 자신들이 기울이는 노력의 효과를 통한 몰입의 리듬 개발은 비단 리더자만의 것이 아니다. 개인, 경영자, 사회 등 여러가지 조건들이 조화를 이루었을때 몰입의 개발은 수월해진다.
 
몰입은 즐거울때 그리고 의미부여의 가치가 높아갈때 자주 이루어진다. 모든 것에서 몰입을 이끌어 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몰입을 찾고자 하는 의지는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의지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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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이여, 가장 큰 소리로 웃어라 - 니키 드 생팔 전기
슈테파니 슈뢰더 지음, 조원규 옮김 / 세미콜론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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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혼신을 다했다' 라는 말은 니키 드 생팔을 보며 하는 말 같다.
예술의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끊임없는 창작과 삶에 대한 열의는 정말 대단했다.
열의의 반대의 감정 속으로도 많이 들어가 본 그녀였기에 온통 환희에 찼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인생 앞에서 나는 너무나 한가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생각, 사고관이 한가하기에 나의 인생도 한가한 듯한 이 느낌.
지울 수가 없다. 그녀는 끊임엇이 예술을, 인생을 추구했기에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분명 멈춤, 탈선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 길을 결코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 또한 그녀만큼이나 그녀의 인생을 믿고 따라간 셈이였다.
 
그녀의 전시회를 가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큰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전시회가 끝나기 3일전 서울을 갈 일이 있어서 전시회를 가볼까 했지만 도저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거기다 책도 읽지 않은 상태였고 그림이 아닌 다른 미술은 너무나 문외한이여서 흥미를 끌 요인이 적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녀의 작품들과 사진들이 너무나 갈급했다.
평전이기에 그녀의 작품과 그녀의 모습들이 당연히 많이 나왔을거라 생각했지만 서문에 그녀의 대표작들만 조금 나와있었을 뿐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료는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그녀의 전시회를 가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해 보기도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상상해 갔던 것들을 바로 확인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그녀에게 그녀의 작품은 그녀 자신보다 더한 드러남인데 왜 책에는 그렇게 많이 없었을까란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건 분명 답답한면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면을 발결할 수 있는 계기도 되어 주었다.
작품 속과 밖의 니키를 더 자세히 만날 수 있었던 시간들이였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창조적인 힘이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라고 말한 니키.
 
그녀는 상처로 뒤덮인 어린시절과 자식을 버린 부모라는 죄책감, 평생의 연인 장의 외도와 죽음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창조적인 힘을 끌어낸 사람이였다.
실제로 그녀도 이해하기 힘든 행동과 정신적 압박과 혼란속에서 그 모든걸 이겨 냈지만 나였다면 진즉 정신을 놓아버리거나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겐 보통 사람으로써 견디기 힘든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이 평생 따라다녔다.
그랬기에 그녀가 하는 손짓 하나에도 혼이 깃들어 있고 아픔이 느껴지면서도 그 행위를 막을 수 없는 힘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예술과 사람의 동반자인 장을 만나면서 그녀는 더욱 더 빛을 발하고 새로움을 만들어 갔지만 그로 인해 힘들었던 부분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와 사는 것이 때로는 너무나 힘들었다는 그녀.
그러면서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녀.
 
그녀에게 예술은 많은 것을 견디게 해주었고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높이 사고 싶은건 열정과 희열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결과는 타로공원에서 자연스레 드러나는데 그녀가 얼마나 그 공원에 열정을 쏟고 사랑을 부었는지 공사장 인부들 하나 하나가 그녀의 마음을 알아가고 그녀를 걱정하는 모습은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자신의 열의를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다는 것.
그건 그 사람의 내면 속에는 커다란 활 화산 같은 열정이 불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녀는 평생 그 화산을 안고 있었다. 그 화산이 폭발하고 꺼졌을때 비로소 그녀의 목숨도 빛을 일어갔을 뿐.
그녀의 작품들은 오래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화 환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평전이긴 하지만 평전보다는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였고 처음에 말한 자료의 부족함도 마찬가지여서 아쉬움이 많았다.
그러나 니키 드 생팔이라는 열정이 넘친 예술가를 알아간 것은 이러한 푸념들이 감히 명함도 못 꺼낼 정도로 귀한 앎이였던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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