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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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3년(tv, 책을 말하다)의 올해의 책으로 발표된 후부터 찜해두고 올 1월에 구입한 책이였다. 대충 훑어볼때 왜 그리 책이 안 땡기던지. 그래서 지금까지 방치하였는데 우연한 계기로 내 책 꽂이에서 내 손으로 간택(?)되었다.

그리고 잊지 못할 훌륭한 책이 되어 버렸다.

정민의 '책 읽는 소리'를 읽고 우리의 고전이 너무 읽고 싶어 나의 책 꽂이를 살펴 보았지만 비슷한 책이 한권도 보이지 않았다.

죄다 외국 문학 아니면 현대 국문학이 전부였다.

그러던 찰나 이 책이 보였다. 그래 시기라도 비슷하니 이 감흥을 이어가자며 꺼냈던 책인데 너무나 놀라웠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내가 자랑스러워질 정도였다.

띠지의 찬사가 허황된 것이 아닌 제대로 드러맞는 책.

그런 책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난 딱 만나버린 것이다.

 

예전에 책 정리를 할때 내가 좋아하는 책은 왼쪽부터 정리해갔고 장편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자연스러운 습관을 아무 의심 없이 지나쳤는데 어느날 태백산맥 세트를 시켰더니 오른쪽부터 순서가 되어져서 온 일이 있었다.

그때는 단순히 '잘못 끼워진건가?' 하며 거꾸로 마추려다가 문득 낯설지가 않아 그대로 두었었다.

그러다보니 조정래님의 책끼리 모아서 정리할때 태백산맥 덕분에 자연히 다른 장편들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순서를 다 바꿔야 했다.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왼쪽에서부터 꽂지만 장편들은 순서가 다 오른쪽부터 시작이 된다.

책을 정리하고 보니 그게 조금 뒤죽 박죽인 느낌은 나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전의 나의 습관이 낯설게 느껴졌었다.

이러한 석연치 않은 의문을 나는 단순히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서예를 할땐 오른쪽에서부터 쓰니까 라며 지나쳐 버렸는데 이 책을 읽고 잊고 있던 그 의문이 풀어져버렸다.

왜 책의 번호를 오른쪽부터 나열해야 편안한지를 말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활자가 가로가 되어버렸지만 예전에 세로로 된 책들과 신문을 기억할 것이다.

일본은 세로와 가로의 쓰임이 자연스럽게 복합적인데 우리는 왜 세로 쓰기를 다 버리고 가로쓰기가 되었을까?

보기가 불편하고 쓰기가 불편해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은 서양식이다.

서양의 그림은 네모 반듯한 캠버스에 시선이 자연스레 좌상左上에서 우하右下로 가지만 우리의 시선은 우상 좌하이기 때문에 족자나 병풍의 글과 그림들이 긴 것이다.

그러니 내가 느꼈을 책정리에서의 평안함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던 이유가 서양식의 시선 때문이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조들의 유명한 그림을 보면 이러한 시각의 방향을 모르더라도 자연스레 우상, 좌하의 시선으로 눈이 좇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을 몰랐을때 그림의 백미를 놓쳐버리는 경우도 많다.

 

책의 순서에 관한 나의 의견이 억지스럽고 충동적인면이 있더라도 우리의 옛 그림에서는 이렇게 그림 보는 방법을 알아야 진정한 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감상하는 방법을 몰랐으니 외국의 화려한 그림과 비교했을때 우리의 그림이 초라하고 고리타분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외국의 그림을 잘보는 것도 아닌데 이 책을 보기 전까지 우리의 그림을 대충 본 것이나 우리의 미를 알지 못했던게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특히 저자는 김홍도의 그림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의 그림을 열정적으로 알리고 있는데 읽고 있는 나에게 그러한 열정이 그대로 전달되어 오고 오래된 그림들에서 풍겨져 나오는 숨겨진 아름다움에 놀랄 따름이였다.

저자의 설명을 듣고 그림을 볼때마나 커다란 수수께끼를 풀듯 풀려나가는 의미와 섬뜩함은 이 책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울 지경이였다.

책을 읽기전, 제목의 '특강'이라는 말이 있었음에도 알아보지 않고 편견에 사로 잡혔던 우리 그림에 대한 고리타분함이 그대로 이 책에도 전달되어 있었다.

 

이 책은 여러 군데에서 저자가 강의를 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처음엔 그러한 형식이 적응이 안되어서 얕잡아 보기도 했었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했던 것만큼 책으로도 쉽고 재미있게 다가온다. 오로지 그림을 그림만으로 보는 것이 아닌 그림 속에 담겨 있는 우리의 풍속이나 역사 문화까지 고루 담겨 있어서 그러한 재미가 더 쏠쏠했는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음양오행 같은 경우는 '뿌리 깊은 나무'에서 자세히 설명된 걸 읽었음에도 이 책에서 설명된 것이 내 마음속에서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 조금은 혼란스럽고 어려웠지만 따로 공부를 해봐야 겠다라는 생각이 든 배경에는 저자가 재미나고 열정적으로 강의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특히 그림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고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닌 시와 그림과의 절묘한 조화는 우리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한 것들이 무지한 나에게 바로 보이면 더 좋았을 거라는 배부른 생각도 해보았지만 역시 숨겨진 백미의 맛이였다.

그래서 충동적인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랑이 아닌 이렇게 책으로 볼 수 있는 우리의 멋과 미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터였다.

늘 우리의 것은 팽개치고 외국의 문학, 외국의 그림에 감탄하며 홀렸던 것이 사실이나 이러한 계기로 서서히 우리의 옛 것에 관심을 두고 애정을 쏟는 것이 참 좋다.

오로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우리의 문화, 아름다움에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렇게 커다란 것들이 보인다.

그 가운데는 분명 우리가 있을 것이고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기백이 넘칠 것이다. 그 희열의 중심부로 들어와 보라.

이 책을 통한 경험은 그만큼 소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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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브 스토리 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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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드디어 판타지의 세계 비전으로의 여행이 시작 되었다.

그 여행이 험란한 길임을 앎에도 내가 먼저 설레였던건 왜일까.

아마도 와타루의 지지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와타루의 여행을 지켜보고 싶었고 와타루가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씁쓸함이 들었다.

1권에서 판타지에 대한 장르의 편견을 깼음에도 2권에서는 어느새 비전으로의 여행이라는 것을 안 후 다시 환상을 가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번복 속에서 만난 비전의 세계는 만만치 않았지만 밀려오는 씁쓸함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분명 현실과는 다른 세계지만 현실과 너무 비슷한 룰을 가지고 있고 닮아 있어서가 아니였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종족간의 다툼, 차별 그 안에서 몰려드는 수 많은 문제들이 현실세게의 인간군상과 너무나 흡사했다.

어려움이 처했을때 진정으로 와타루를 도와 주는 여러 친구를 만나 따뜻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와타루가 가야 할 길은 멀다.

우연히 수인족 키키마를 만나 가시라 마을의 역사와 배경을 알게 되고 여러 사건을 통해 조금씩 운명의 탑으로 향해가지만 아직 정보를 모으는 수준이다.

우연히 하이랜더가 된 후 첫번째 보석을 찾게 되지만 찾아야 할 보석도 많고 위험에 처한 미쓰루와 자신도 구해야 한다.

또한 낯선곳의 몽롱함도 있었지만 아직 어린 소년인 와타루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 물론 누구나 도움을 받고 살아가며 그 도움으로 인해 자신의 길을 향해간다.

그러나 너무 어린 와타루였기에 그러한 도움의 손길은 눈에 띄게 많은 안도감과 허무감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임에도 눈에 띄는 그러한 도움에 살포시 아쉬움을 표해본다.

 

와타루가 이끌어가야 할 전개가 어떠한 것인지 예상하지 못하기에 가지는 생각일 수도 있으나 운명의 탑으로 가는 과정은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더이상 와타루와 미쓰루가 상처를 받지 않고 원하는 되돌림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과연 그것이 이루어질까 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된다. 또한 와타루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냥이족 미나의 문제까지 겹쳐 있기에 훨씬 복잡하고 위험하다.

실제로 2권에서 그러한 위험에 직면한채 끝을 맺었으니 운명의 탑의 의미를 잃어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왜 이러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 운명의 탑의 모습을 잘 상기하면서 헤쳐나갈 필요가 있다.

와타루 뿐만 아니라 독자인 우리도 말이다.

 

비전의 세계에 들어왔어도 현세의 세계와 똑같이 시간은 흘러가기에 미나를 통해 잠깐 엄마를 만나고 오지만 어린 와타루가 그렇게 큰 짐을 감당할 수 있을까란 걱정이 들기도 한다.

아직 어리기에 염려하는 이러한 것들이 동정이나 당연함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와타루가 비전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수시로 내뱉게 되는 어디서 많이 본듯한 모습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 않기를 또한 염려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판타지의 세계는 이러한 현실감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기대했던게 사실이나 와타루가 펼쳐나갈 세계는 현실에서의 잘못된 것을 바꾸고자 함이였으니 그러한 마음을 많이 거두고 와타루와 그의 친구들, 미쓰루를 지켜보는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와타루와 미쓰루가 바꾸고자 하는 것들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간절했기에 비전의 문이 열렸던 것처럼 그들의 운명의 탑을 향해가는 과정만으로도 그들의 애절함은 남으리라.

부디 그들이 초심을 잃지 않기를...

그래서 꿋꿋이 헤쳐나가주기를...

현실에서든 비전에서든 그들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을 말이다.

 

 

p. 153

어리석은 쪽이 때로는 올바른 것보다 훨씬 강하고,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경우가 있어 작은 마음, 구멍이 뚫린 마음, 텅 빈 고목나무 같은 마음에는 어리석은 것이 더 스며들기가 쉬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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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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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을 요즘 심심찮게 볼수 있다. 나 또한 그러한 인문학을 죽이는데에만 기여했지 살려본적은 없는 것 같다.

그랬기에 그러한 인문학을 알고자 아니, 인문학과 조금이라도 친해지는척이라도 하고자 이 책에 관심을 갖었다.

문외한인 인문학에 대해서 조금은 알 수 있을거라 생각했고 또한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오인하고 이 책을 접했다. 그러나 서문을 읽고부터 나는 이건 아닌데라는 느낌을 가지며 읽어나갔고 겉모습으로 판단한 이 책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희망의 인문학.

우리의 희망이 인문학이 아닌, 인문학으로 인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례들이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 이 이 책의 취지라면 이해가 가는가.

나 또한 이해하지 못했고 이상하게 흘러간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쳐서 무얼 어떻게 하자는 건지, 과연 인문학이 가난한 사람들을 먹고 살게 해줄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처음부터 쉴새없이 해나갔다.

그러나 그러한 취지의 실험, 클레멘트 강좌가 시작되고 그에 따른 변화를 보면서부터 나의 생각도 변화되어 갔고 왜 희망의 근원이 인문학이 아닌 인문학으로 인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왜 하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며  인문힉이여야 하는가.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고대 아테네에서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성찰적 사고와 자율성을 몸에 읽히고 공적 세계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을 길러 내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를 어려운 의의로 들리지만 책을 쭈욱 읽어나가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과정과 그 후의 사례들을 보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교육이 결과를 위한 교육도 아니고 대학을 진학하기 위한 과정도 아니라고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생활고에 찌들어 안주해버리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시키므로써 자신의 존재를 생각해보며 어떻게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지 스스로의 성찰과 행동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최저의 극빈자들에게 과연 이 교육이 먹혀 들어갈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말만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불가능 하다는 일을 얼 쇼리츠와 주변인들은 해나간다.

그들이 첫 수강생들을 모집하고 교육해가며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는 모습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는 우울함을 동반하기도 했지만 서서히 그들을 이해시키고 참교육의 현장을 보여주는 모습에서는 희망이라는 가능성을 보았음에 틀림없었다.

한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클레멘트 코스의 과정을 한곳에서만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또한 미국에서만 하는 것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켜 나가며 우리나라에서도 올 1월에 방문 강연을 했다는 사실에 참으로 놀라웠다.

강좌를 연다고 해도 최고의 강사진들은 어떻게 소화해 낼 것이며 어떻게 꾸준히 교육시킬까 의아해 했지만 그들은 해낸다.

그리고 그 희망의 씨앗을 서서히 퍼트려 가고 있는 중이다.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기술하기 전에 저자가 다양한 인문학의 기초가 되는 것들을 역설하는 글들을 읽었을때의 그 당황함을 기억한다.

분명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고 하면 우리가 어렵게 생각하고 부유층들의 학문으로 인식된만큼 쉽게 알수 있고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그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들은 너무나 어려웠다.

생활고에 찌든 사람들이 과연 이 모든것을 이해하며 완전하게 교육을 마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이들이 인문학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는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에게 이 의의를 어느정도 전달하고 학생들을 뽑았지만 실제로도 학업을 쉽게 포기하는 이들은 생활고의 어려움도 개인적인 사정들도 아닌 왜 내가 이것을 배워야 하는지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중도포기한 사람들이 많았다.

현재 내가 소크라테스를 배워서 무얼 하며 고대 그리스 시를 이해함으로써 어떻게 현실과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그들을 교육시키면서 지식의 홍수에서 방황하는 그들을 보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변화에 나도 몸부림이 쳐졌다.

나도 공부를 하고 싶다, 인문학을 배우고 싶다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무슨 생각이였는지 올들어 이상하게 공부를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과 함께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순전히 관심만...) 근처대학의 인문학부에 지원을 해보았지만 고등학교때의 성적이 가관인지라 톡 떨어지고 말았는데 그러한 미련에 더욱더 불을 지르게 된 계기가 이 책이 아닌가 싶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을 정의할때 생활고에 찌들고 그 생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만 말했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 가난한 사람들에 나또한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현재 내가 가진 것을 보았을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치의 희망도 없고 무얼 어떻게 미래를 꾸려나가야 할지 아무런 준비도 없기 때문이다.

늦지 않은 나이라면 늦지 않은 26의 나이에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겉모습의 풍요만 좇는듯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자꾸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을 보면 아직 자아성찰이 덜 된듯 하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의문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고 그 의문의 풀림으로 인해 더더욱 그 안으로 뛰어 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 알수는 없지만 나또한 가난한 이들처럼 인문학을 배움으로써 희망을 품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만나게 된게 아닌가 싶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 휘둘려지는 힘과 무력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 단순히 가난으로써의 위험이 아닌 지식층들이 누렸던 위험성을 가질 수 있는 가치를 누릴 수 있게 된다면 저자의 뜻은 어느정도 이루어 진 것이리라.

그 뜻이 널리 널리 퍼지길 바라며 그 희망에 나또한 기대를 걸어본다.

 

p.s: 오타발견

 

p 361 운영되는 곳이 있을지도 무른다 -> 모른다 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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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관계 1
안도현 지음, 이혜리 그림 / 계수나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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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도토리는 떨어져 있는 길참나무잎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나뭇잎들의 위로를 받으며 그 나뭇잎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위해서 조금은 두려운 과정을 견뎌내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겨울이니까요.

그리고 나뭇잎과 도토리는 나무 위가 아닌 나무 아래서 새로운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도토리가 땅에 떨어져 두려움에 떨고 있을때 나뭇잎이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도토리 너는 끝까지 살아 남아야 한다고 그래야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관계가 무어냐는 도토리의 질문에 나뭇잎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서로 도와주면서 함께 살아간다는 거야"

 

라고 말입니다.

도토리는 그래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렇게 나뭇잎과 함께 땅위에서 있는데 어떻게 도우며 살아가야 하는지를요.

더군다나 나뭇잎은 겨울이 깊어 갈수록 썩기 시작했어요.

도토리는 자꾸 잠이 왔구요. 그것은 도토리와 나뭇잎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과정인데 도토리는 꿈이였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도토리는 아픕니다.

 

나무잎이 네 몸속에 길참나무 한그루가 있다고 말했을때 그 의미를 몰랐는데 그제야 그 길참나무가 도토리의 몸을 뚫고 나왔으니까요.

새싹의 솟음이 도토리를 아프게 했지만 도토리는 행복해 집니다.

그런 싹은 한두개가 아닌 숲 전제에서 솟아 올랐으니까요.

싹이 자라서 나무가 되면 나뭇잎이 말한 관계에 대해서 또렷이 이해하고 반갑게 맞이할 수 있겠죠?

도토리 싹이 잘 자라 주어야 나뭇잎과의 만남이 이루어 질테니까요.

 

우리가 생활하면 얼마나 많은 만남과 관계 속에서 살아 가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안도현님의 글과 이혜리님의 그림을 자꾸 자꾸 보다보면 도토리가 나이고 나뭇잎들은 수많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꺼예요.

비단 친구들 뿐만이 아닌 부모님이나 가족들도 떠올려 보며 소중한 사람들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지켜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떠오를 거예요.

분명 기분 좋은 일일꺼예요.

한번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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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무어 4 - 가면의 섬 율리시스 무어 4
율리시스 무어.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 지음, 이현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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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3권까지 너무 재미나게 읽고 4권을 기다렸나 보다.

3권의 리뷰를 보고 어떤 분이 댓글로 4권이 나왔다고 알려 주셨다.

그래서 바로 구입해서 읽었다.

그 전의 책과 조금은 디자인이 산뜻해진 4권은 읽는 재미가 더 쏠쏠했다.

 

율리시스 무어와 빌라 아르고의 비밀을 파헤치면서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릭, 제이슨, 줄리아는 시계공 피터 다이달로스를 찾아 메티스를 타고 18세기 베네치아로 가게 된다.

시간의 문이 열리면서 그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피터를 찾아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킬모어 코브를 지키기 위해 피터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지금껏 아이들이 찾았던 열쇠 보다 시간의 문을 영원히 닫고 열 수 있는 첫번째 열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열쇠를 아이들이 먼저 찾아야 한다.

오블리비아 뉴턴이 먼저 찾아서는 안되며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피터의 마음을 흔들리게 해서 비밀이 새나가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많은 부분 털어놓았지만...)

 

베네치아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만남 그리고 모험은 여전히 흥미진진 했다. 시간의 문을 통해 이탈리아의 노숙자들이 빌라 아르고에 감으로써 네스터와 제이슨은 위험에 빠지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새로운 인물 미나소를 만나게 된다.

그도 오래전부터 네스터와 함께 시간의 문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고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나소의 도움으로 무사히 그들을 다시 베네치아로 돌려보내지만 아이들이 풀어가야 할 숙제는 많아진다.

과연 시간의 문을 지배하는 첫번째 열쇠는 존재하는가.

그 열쇠를 찾아 얼마나 많은 모험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들은 진실을 향해 나아가지만 킬모어 코브와 빌라 아르고를 지킨다는 사명을 갖기엔 너무 어리다.

그러나 그러한 어림을 무조건적인 무시와 동정이 아닌 진심으로 아이들을 걱정하기에 나오는 염려일테다.

 

네스터가 제이슨과 줄리아 부모님의 이사를 조금 늦춰 아이들이 시간을 벌 수 있게 해주었지만 이제 부모님도 빌라 아르고에 오셧고 아이들의 모험과 숙제는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많은 의문들이 남아 있고 아이들은 의문들을 향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것이다.

오블리비아 뉴턴처럼 다른 목적을 위해 킬모어 코브와 빌라 아르고를 해치도록 두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그려졌기에 무능한 어른들의 모습이 많이 보여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이용하는 모습이 되어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느새 나는 그런 아이들의 응원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네스터와 미나소처럼 아이들이 걱정되고 미더워 보이지만 그들이 반드시 잘해낼거란 기대감이 아이들에게 힘이 되듯이 말이다.

 

피터를 찾아 비밀을 찾아 떠난 베네치아의 여행은 지금까지의 책보다 진행속도가 좀 느렸다.

모험과 공간의 뛰어넘음은 존재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긴장감과 후련함이 조금 부족했었다.

그에 반면 아이들의 한계구나, 부진함이구나 이렇게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이 아닌 과정이라 생각하고 편히 읽었던 것 같다.

여전히 다음 이야기는 궁금하고 밝혀질 비밀들과 진실들이 늘 우리에게 존재하는 정의 실현을 해주길 바라는 기대감이 있어서 였을까.

그러나 나도 아이들을 무조건 믿고 따라보려 한다.

그들의 모험과 어려움속에 나도 모르게 녹아들고 마음의 짐을 같이 나누어 보려 한다.

대리만족일 수도 있겠으나 아이들이 옳은 방향으로 향해 주길 바라는 마음일 테다.

 

이런 마음일때 아이들은 첫번째 열쇠를 찾아낼 것이고 킬모어 코브를 지킬 것이고 의리로 똘똘 뭉쳐 어른들이 했던 실수를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쭈욱 지켜 보는 수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있는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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