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백 - 소유할 수 없는 자유에 관한 아홉 가지 이야기
바히이 나크자바니 지음, 이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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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언어는 몽롱하고 사막의 모레가 씹히는 듯한 낯섬은 늘 빠른 속도로 책 읽기를 갈망하던 내게 치명적이였다. 첫장 '도둑'에서 책을 얼마나 덮었다 펼쳤다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책장이 잘 안 넘어간다고 포기해버리긴 싫었다. 그럴수록 꼭 읽어봐야 겠다는 갈망이 피어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갈망이 없었다면 이 책을 이렇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이 서서히 스며 들어가며 몽롱함의 한가운데를 파고든 느낌.

그렇게 책이, 그리고 나의 느낌이 변해가고 있었다. 신기했다.

 

총 9편으로 나뉘어진 차례를 본 터라 1장 '도둑'을 읽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끝나면 안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각각 9편의 이야기가 나뉘어 진다면 읽어야 겠다라는 갈망이 또다시 무너지는게 아닌가 하는 섣부름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2장 '신부'를 읽고 3장 '두목'을 읽을즈음에 나의 판단이 얼마나 어릭석었는지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각장의 이야기가 끝났다고 해서 그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가면서 맞게 되는 이야기는 점점 흡인력을 갖춰가고 있었다.

9장으로 나뉜 이 책은 각각의 이야기가 아니라 옮긴이의 말처럼 씨실과 날실이 만나듯 잘 짜야진 하나의 거대함이였다.

 

사막의 한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아홉 사람의 사연의 중점에는 새들백이 있었다. 순례자의 새들백을 베두인이 훔치고 그 새들백으로 인해 차례 차례 신비함을 맛보아 간다.

함께 여행했다는 이유외에는 특별히 공통점이 없는 그들이였다.

그러나 새들백을 통해 그들은 자기 자신의 욕망에 따라 변해간다.

그런 욕망은 그 전의 모습들이 아닌 무엇에 홀린듯한 몽롱함과 열정이 있었다. 과거의 자신은 잊은채 새들백을 통해 느끼게 된 자신의 의지 하나만 밀고 나간다. 신비하달 수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도대체 그 새들백에는 무엇이 있기에....

고결한 서체로 씌여진 글이 있었지만 그 글의 의미는 읽을 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새들백이 그들에게 미치는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다.

처음부터 공통된 것이 없는 그들이기에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몽롱하고 신비한 그 무엇의 분위기의 존재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사막을 건너고 새들백을 마주하게 된 과정보다 마주하게 된 후가 그런 느낌이 더 강했다.

 

그런 신비함을 느끼게 해주는 가장 큰 역할은 아무래도 글의 양상이겠다. 1장 '도둑'에서 새들백을 안고 절벽에서 뛰어 내린 베두인의 모습은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리고 시각이 다르듯 느끼는 바와 미치는 영향 또한 각양각색이다.

베두인의 행동을 보며 천사라고 생각하는 신부, 암시라고 생각하는 탁발승, 어리석다 생각하는 두목등 그들의 이야기에 펼쳐지는 조연같은 사건과 인물들은 그렇게 교묘하게 짜여있다.

어떤 이의 행동이 이상하다 생각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듯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그 행동은 파헤쳐지고, 또 본인에 의해서 한번 더 밝혀진 후 또 다른 가능성의 여부를 낳는 글의 양상, 독특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알아가는 과정이 쉬웠다고는 말할 수 없다.

공간과 문체의 낯섬은 나와 작가가 펼쳐놓은 세계와 일체가 되지 못했고 계속 겉도는 느낌이였다. 그러나 나는 과감히 저자의 농락 속으로 빠졌다고 인정하리라.

서서히 옥죄어 오는 저자의 세계는 더디게 내딛었지만 구석 구석을 훑고 맛보는 걸음의 시작이였던 것이다. 그러한 녹록치 않음에도 나를 이끌어 주었던건 저자의 세심함 때문이였다.

처음 책을 잡았을 때부터 내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끝까지 맛볼 수 있을지 저자는 알고 있었고 그렇게 길을 만들어 주며 친절히 정리까지 해주고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도 몽롱함은 가시지 않는다.

사막을 둘러싼 낯선 나라들의 문화와 생활방식만 해도 정신을 차릴수 없을 정도인데 사막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그런 몽롱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한바탕 꿈을 꾼 듯, 그 꿈이 나빴다, 좋았다의 단순한 표현이 아닌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분위기는 사막이라는 배경도 새들백을 통한 신비함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그 완벽함에 헤메느라 온전히 부응해 주지는 못했지만 그 분위기에 취한것만은 확실하다. 

내 기억의 언저리에나 존재할법한 스쳐가는 생각을 저자는 이렇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 역량에 놀랄 뿐 나는 여전히 사막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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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우울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이나미.이영준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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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러시아 문학이라면  환장을 한다.

도스또예프스끼를 통해 러시아 문학에 빠지게 된 후로 미친듯이 러시아 문학만 찾아서 구입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관심을 갖게 된 러시아 문학은 19세기의 문학이였고 그 이후의 문학도 만나긴 했지만 19세기의 매력에 듬뿍 빠져서 많은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무조건  러시아 문학만 찾다가 접한 20세기의 러시아 문학은 19세기의 문학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때문이다.

결국 19세기에만 머물러야 하는 건가 하며 구입해놓은 러시아 문학을 읽고 있을때 '펭귄의 우울'을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러시아 문학이긴 하나 우크라이나 태생의 작가로 러시아로 씌여진 문학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소련의 해체 이후 그렇게 분류가 되었으니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영향하에 씌여진 '펭귄의 우울'은 나의 예상을 뛰어 넘었다.

 

19세기는 지나 갔다고 20세기, 21세기의 러시아 문학에서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억측스러운 비교에도 이 책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내가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던 이유중의 하나는 책을 통해 그 시대의 많은 것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탓이였다.

'펭귄의 우울'은 90년대 러시아를 어느정도 잘 반영하고 있는 소설 같았다.

이런 분위기의 소설이 계속 나오고 진보된다면 사람들은 21세기 혹은 19세기를 잊는 러시아 문학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펭귄의 등장, 미리 씌여진 조문이 주류가 되는 내용이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으나 그 안에 풍자된 의미를 알아간다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자연스레 등장하는 펭귄이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러시아가 추운 나라이긴 하지만 동물원에서 분양한 펭귄을 집에서 키울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펭귄과 함께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엉뚱하면서도 의미를 담고 있었다. 펭귄의 검은색과 흰색 때문에 양복을 입은 것으로 많이 비유를 하게 된다.

양복의 의미 중에서 펭귄과 같은 색이라면 장례식에서의 검은 양복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빅토르는 우연한 계기로 유명 인사들의 예정된 조문을 쓰는 일을 맡게 된다. 장례식하면 검은 양복, 즉 펭귄의 등장은 드러나는 암시라는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빅토르는 단순한 조문을 쓰는 '십자가' 기자가 아니였다.

편집장에게서 받은 정보로 씌여지는 빅토르의 조문은 미리 씌여진다는 특징 외에 그 조문이 통과되면 그 유명인사는 살인을 당하거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단순히 과거의 깨끗치 못한 행동 때문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미심쩍다.

 

그러나 그로 인해 위험도 겪고 회의를 느끼면서도(빅토르는 글을 쓰고 싶었다.) 두둑한 보수를 받고 소냐와 나나를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는 순간 평범한 행복을 꿈꿔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기르는 펭귄 미샤와 소냐의 아버지 미샤를 만나면서 복선은 깔리기 시작한다. 그게 앞으로 다가올 위험일수도 있고 이름이 같은 펭귄과 사람의 운명일수도 있다.

저자는 괜히 이름을 같이 넣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 미샤가 살해된후 빅토르는 소냐를 떠안게 되고 유모 나나를 만나는 과정까지 순조롭지만 빅토르를 둘러싸고 있는 음모는 훨씬 컸다.

빅토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속시원히 드러내놓진 않지만 소설속에 나오는 암시만으로도 커다란 음모의 심각성은 충분했다.

오히려 빅토르가 평상시에 워낙 차분했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이 느껴졌을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예견치 못한 반전 앞에서도 태연한 빅토르를 보며  '펭귄의 우울' 속편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추리소설에 버금가는 맛이였고 열려 있는 결말은 그래서 더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소련의 붕괴이후 혼란을 담고 있는 90년대의 러시아는 빅토르르 통해 그렇게 비춰지고 있었다. 고독과 불안정 태연함.

또 우울증이 걸린 펭귄, 심장이 좋지 않은 펭귄의 등장이 그래서 낯설지가 않았을 것이다.

빅토르 또한 고독햇고 미래를 예견할 수 없는 불안 가운데서도 안정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도 불안을 뗄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이 어떻게  90년대만의 특징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도 그런 고민과 불안으로 그득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오히려 미샤 같은 펭귄의 등장이 새로운 활력소가 될지도 모르겠다.

머나먼 남극에서 온 낯선 펭귄.

그에  비견되듯 엉뚱한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빅토르의 주변을 돌아다니던  펭귄 미샤의 우울한 눈빛이 오히려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독후감을 쓰는 가운데 고개를 돌리면 펭귄 미샤가 서 있을 것 같은 기분. 낯설지가 않다.

내게도 미샤가 필요한 것 같다.

 

 

p.s: 오타 발견

      p. 198 칠백오심 달러만큼 -> 칠백오십 달러만큼

         으로 바꿔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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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사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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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지금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나의 꿈을 향해 불철주야 노력하며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꿈 속에서의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지각하고, 스쿨버스 놓치고, 시간표대로 교과서와 준비물을 챙기지 않는 꿈은 여전히 단골이 되어가고 그런 꿈을 꾸고 나면 그 감정의 응어리는 여전히 나를 엄습해 학교를 다시 다니라고 한다면 '싫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다.

그러나 어느새 그런 느낌은 잊어 버리고 학교를 갈망하는 나를 발견할 때면 그렇게 아쉬움이 많이 들었나 돌아보게 된다.

그랬기에 꿈 속의 우울이 풍겨나오는 이 책은 학창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하츠는 혼자다.

그리고 분명 학창시절의 친구들이 있었음에도 나역시 혼자다.

창가에서 혼자 밥을 먹는 하츠, 친구들과 재잘대며 밥을 먹고 있음에도 나만의 두려움이 풍겨 나오던 나.

왠지 닮아 있었다.

그러나 하츠가 훨씬 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하츠는 자신을 감추지 않은채(감추지 않으려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감추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궁상 맞지는 않았다.

그에 반해 나는 나를 감춘채 궁상을 떤적이 무척 많았고 두려운 적은 거의 매일이였다.

고독했지만 하츠에게서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료하다 느끼며 말을 아꼈을 뿐.

그러한 사실이 다른 아이들과 달라 늘 혼자였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다. 자기와 조금은 비슷한 니나가와가 있다 생각했기 때문일까?

니나가와가 하츠에게 그런 위안 거리가 된 적이 있었던가?

올리짱이 나오는 잡지를 보고 있는 니나가와에게 그 사람을 본적이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 말이다.

올리짱의 팬이였던 니나가와와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니나가와 집에 초대받는 하츠는 현실의 올리짱은 잊은채 자신만의 올리짱 세계에 갇혀 있고 다른 아이들처럼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니나가와가 순간 꼴보기 싫어진다.

펀치 수준이였다며 등짝을 채인 니나가와의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 가봐야 겠다며 태연히 말하는 하츠는 움츠린 니나가와의 등짝을 통해 조금씩 다가가게 된다.

 

그냥 달리고 싶어 하는 육상처럼 움츠린 등짝이 그냥 차고 싶어 바라보게 된 니나가와의 등짝은 하츠에게 조금씩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 변화의 결과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시작은 하츠에게 어떠한 의미가 될지 상상해보는 희미한 연결 과정도 있었다.

어느 순간 학창시절의 두려움과 고독은 잊은채 하츠의 세계를 여행하는 나를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의 중심에는 하츠의 깨어남과 동시에 더이상 학창시절의 회귀가 아닌 지금의 나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를 후회하고 짓눌려 있는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자신이였다.

하츠가 그랬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니나가와를 좋아하듯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하츠 또한 자신을 조금씩 발견해가고 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헤아려가고 자신이 늘 거부하던 진실에 대한 긍정도 하게 된다.

그러한 변화는 더디게 그리고 저자의 문체에 익숙해져 있어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지나온 후에 그러한 감정이 밀려드는 것 또한 하츠에게 다가오는 느낌들처럼 거부할 수 없다.

너무 고독한 고등학생, 삶의 재미 또한 너무 일찍 상실해버린 고등학생이라는 생각이 짙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한 한번쯤 10대 때를 돌아보자면 상실감과 고독이 덮칠때의 느낌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츠는 순간적 고독이 아닌 익숙한 고독이였기에 하츠만의 세계가 짙었지만 나와는 동떨어짐을 느낌과 동시에 공감을 사는 이유는 인간에게 나오는 감정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특정한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함이라 한바탕 꿈처럼 느껴져 잠시 제목과의 연관성을 망각해 버릴때도 있었다.

사건이 없는 평범함이 지극히 평화롭다는 것을 앎에도 등짝을 통해 서서히 변해가는 하츠의 내면을 말하고자 함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기에 시원하게 니나가와의 등짝을 발로 차는 하츠의 모습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닌 그 순간 자신의 벽 속에 갇힌 나를 깨트리고 나오는 시작에 불구한 것이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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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
알랭 비르콩들레 지음, 호세 마르티네스 프룩투오조 자료협조, 이희정 옮김 / 이미지박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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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하면 '어린왕자'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읽었음에도 사람들이 어린왕자에 열광하는 이유를 깊이 새겨 보지 않았고 그런 작가로만 인식하고 있던 생텍쥐페리의 사랑이라. 너무 유명해서인지 무조건 궁금했다.

내가 아는건 어린왕자 밖에 없기에 어린왕자의 그림자가 짙을거라 생각했다. 어린왕자 얘기가 빠질수가 없지만 이 책의 주류는 제목처럼 사랑이였다.

콘수엘로라는 부인이 있었음에도 철저히 외면당한채 그들의 사랑은 묻혀져 있어 그 사랑을 알리고자 쓴 책이였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때마다 편집이 상당히 불편했다.

콘수엘로가 가지고 있는 자료의 대부분이여서인지 편지,사진,발췌글등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해서 글을 읽어나갈때 문장의 끊김을 파고들며 그런 자료들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들의 풍부한 공개는 좋았으나 그런 편집에 대해서는 조금 못마땅했다. 그런대다 어린왕자라는 거대한 작품의 작가로만 알고 잇던 생텍쥐페리의 내면을 조금씩 알아갈때마다 한 인간으로써의 생텍쥐페리를 만나긴 했으나 환상속에 존재하던 환상이 깨어감이 당황스러웠다.

끊임없이 방황하고 콘수엘로를 사랑한다면서 대놓고 외도를 하고 그러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생텍쥐페리가 낯설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 생텍쥐페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 콘수엘로는 생텍쥐페리에게 온 마음을 다했음에도 무언가 벽이 가로 막고 있었다.

그녀를 온전히 동정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무엇.

그야말로 부부의 삶은 '무엇' 투성이였다.

떨어져 있을 때는 그리워 하며 애틋하지만 곁에 있으면 견디지 못하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다양한 사랑의 양상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사랑.

그러나 범접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연결됨은 제 3자로써 유추만 할 수 있을 뿐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그들의 삶이 편집되고 있다는 느낌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나뉨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이런 사랑이 과연 전설적인가 하고.

새로운 자료와 사랑이라는 매개체로 어린왕자의 덕을 보려함이 아닌가 하는 얄팍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그들은 분열되고 있었고 쉽게 끊어질 수 없는 질긴 사랑도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불꽃같은 사랑을 했기에.

그리고 생텍쥐페리가 너무나도 유명 했기에 라는 전제하에도 나의 눈에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이 너무 솔직했을까? 아님 내가 너무 메말라 버린 것인가!

다행이 그런 의문을 잠식시켜 주었던건 그들의 편지였다.

끊임없이 서로를 갈구하는 모습. 그리고 시적인 표현들로 그득한 언어.

생텍쥐페리가 실종되고 사망으로 공식화된 후에도 계속 써내려간 콘수엘로의 편지는 비틀어진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끊임없는 세상의 비판속에서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그리워한 콘수엘로를 보고 있자니 그녀의 아픔이 전해져왔다.

예술적 감각과 아름다움 그리고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온전히 생텍쥐페리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콘수엘로의 모습은 사랑의 위대함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세상의 시선과 비난이 괴로웠지만 자기 자신의 사랑을 지켜나가고 그녀의 마음의 소리에 늘 귀기울이는 콘수엘로는 그래서 전설이 되지 않았나 싶다.

생텍쥐페리는 그가 갈망하는 삶과 문학속의 어린 왕자처럼 전설이 되었고 콘수엘로는 그러한 남자를 바라보며 전설이 되었다.

 

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의 사랑이야말로 사랑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불꽃같은 삶이라 하겠다.

그들은 알았다.

늘 무언가를 채우지 못해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그 무언가는 서로라는 것을.

그 길이 쉽지 않아 기나긴 방황을 했지만 이제는 온전히 서로에게 정착해 평안함을 느끼고 있을 거라 믿고 싶다.

세상 사람들에게겐 전설을 남겨둔채.

그렇게 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를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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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 춤추는 별을 그린 화가 내 손안의 미술관 5
토마스 다비트 지음, 노성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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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책이라면 무조건 갖고 싶고 무조건 읽고 싶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게 시야를 틔워주고 관심을 갖게 해주었던 고흐의 그림들은 그래서 무척 소중하다.

그의 수많은 그림들을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단정하고 있던 고흐에서 업그레이드 된 고흐 그리고 이제는 나의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한 고흐로 바뀌어 버렸다.

고흐의 그림들과 그런 고흐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 책은 뭔가가 다르다. 기존의 고흐를 알리고자 하는 책들과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그 다른 느낌은 썩 좋은 느낌만은 아니다. 무언가 고흐를 오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고흐를 깍아 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내가 오히려 고흐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나보다 고흐 그림을 많이 보았을 것이고 많은 삶으 흔적을 좇았을 것이다. 고흐를 좋아하긴 하나 고흐의 모 든것을 알수 없듯이(당연한 말이다) 저자도 그런 고흐를 다 알아서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확연하게 드는 느낌은 시선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고흐의 그림과 테오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들여놓은 화가의 삶에 중점을 맞추어 고흐를 알려 왔다면 이 책의 저자는 그런 고흐의 바깥 부분을 중점으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모두의 시선이 쏠려 있는 곳에서 홀로 떨어져 다른 각도에서 그 모든걸 지켜본 듯한 느낌.

이 책의 고흐는 그래서 낯설었다.

 

어쩜 너무나 솔직해서 내가 안착시킨 내 안의 고흐를 인정하기 싫어서인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품는다 할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이 책에서의 고흐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 묻어나는 화가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의 삶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뺀다면 별볼일 없는 평범함이 잔뜩 묻어나지만 그는 그림 그리는 일에 빠졌기에 별볼일 없는 삶을 이끌어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마음을 그의 행위와 테오와의 편지로 추측할 순 있어도 속속들이 알 수 없듯이 그의 그림을 보며 그를 상상하고 그의 세계를 꿈꾸는게 전부일 수 밖에 없다.

저자도 나름대로 고흐의 삶과 고흐의 그림들을 꿈꾸며 정리했다.

그러나 그러한 정리가 팩션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 시대의 고흐의 뒤를 좇는 듯한 느낌, 하지만 고흐는 잠시 밀쳐둔채 주변의 풍광과 분위기에 너무 쏠려 고흐가 오히려 허구가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였다.

 

이 책의 시리즈격인 '렘브란트'에서도 밝혔듯이 온전히 렘브란트에 조명을 맞춘 것이 아닌 그 시대의 배경등 두루 두루 살핀 것 같다는 느낌을 밝힌 바 있다.

이 책에서의 고흐는 좀더 많이 벗어난 것 같다.

외톨이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 방황하는(실제로도 그러했지만..) 고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왜 나는 이렇게 비약이 심한 것일까.

왜 고흐를 옹호하려고만 하는 것일까.

안타까움 때문이다.

고흐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구축한 고흐는 이런 소소함이 아니다. 주변의 풍광에 동화되어 가는 자연스러움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렇게 소극적은 아니다.

고흐에 빠진 네가 어떻게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나의 시선은 고흐를 다 감싸안을 수 있는 고흐에 환장한 사람이라고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림에 환장한 고흐를 알리지 못해 그 사실이 더 안타깝다.

 

그림에 환장한 고흐를 알아가다 보면 그의 광기, 열정, 상처, 죽음까지도 만날 수 있는데 그의 주변만 돌고 있는 것 같아 너무나 속상하다. 내가 알지 못하던 고흐를 만났다는 생소한 호기심이 아닌 씁쓸한 마음이 올라오는건 무엇일까.

어쩜 내 안의 고흐를 깨트리지 못함이라는 고정관념과 편견일 수 있다. 어정쩡한 앎에서 오는 오만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애정이 결여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한발자국 더 다가가서 고흐를 지켜봐 주었으면.

그를 이해하려함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고흐를 바라봐 주었으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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