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mila > 느리면 느린대로
준연이를 임신했을 때 아주 터무니없는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행여나 천재 아이가 나오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었다.
돌아보면 전혀 불필요했던 이 고민의 발단은 Q채널의 한 다큐멘터리 프로였다. 천재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다룬 프로그램이었는데, 다큐에 등장한 천재아이들은 또래집단과의 지능적, 정서적 차이때문에 심리적인 갈등을 겪고 있었다. '만일 뱃속의 아이가 천재라면, 과연 내가 저 갈등을 자연스럽게 풀어줄 수 있을까?' 한심스럽게도, 나는 그 문제로 여러 날을 고민했다.
결국 준연이가 태어났고, 생후 6개월에 세자리수 계산을 하거나 뭐 그런 따위의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준연이는 모든 면에서 늦었다.
준연이는 15개월이 넘도록 걸음마를 시작하지 않았다. (빠른 아이들은 10개월에도 걷는다.) 이 책 저 책 뒤져보니 16개월이 지나도 걸음마를 안 하면 신체발달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 의사와 상담하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부모인 내가 보기에 이건 신체 발달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준연이는 기본적으로 다른 아이들보다 겁이 많은 것 같았다. 뭔가 실패의 가능성이 있는 건 시도조차 하고싶지 않은 눈치였다. 발을 떼어보려다 앞으로 넘어지는 것, 그게 싫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렇다고 해서 니가 평생 기어다니겠냐?' 안 걷겠다는 놈을 억지로 걷게 할수 없는 노릇이라 그냥 내버려뒀다. 그랬더니,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 녀석이 기어다니기의 고수가 되기로 작정하고 나선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서너달 기어다니다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준연이는 기어다니기만 여덟 달 넘게 하다보니 나름대로 그 영역에서는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야되나?
일단은 기어다니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수준으로 빨리 기어다녔다. 발발발발... 어떤 땐 꼭 강아지가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어느날 이 모습을 목격한 친정 어머니가 '바퀴벌레보다 빠르구나!'하고 탄성을 지르시기에 이르렀다.
준연이는 한술 더 떠 기어다니기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에 이르렀으니.... 새로운 영역이란 바로, '뒤로 기어다니기!' 나는 어린 아기가 방과 방 사이를 뒤로 기어서 이동하는 건 태어나서 그때 처음 봤다. 앞으로 기어다니는 게 지겨웠던 걸까? 뒤쪽을 보지도 않고 쏜살같이 후진해서 기어다니는데, 스스로 그걸 즐기는 모습이 더 가관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아예 기어다니기로 학위논문을 써라, 써' 하고 혀를 끌끌 찰 무렵에서야, 준연이는 직립 보행을 시작했다. 어느날 개월수가 거의 비슷한 또래 아이가 집에 놀러 왔는데, 그 아이가 걸어다니는 걸 보더니 다음날부터 벌떡 일어나 그냥 걸어다녔다.
다른 아이들 엄마는 아이들을 기르다 '우리 아이가 혹 영재가 아닐까?' 하고 한번쯤은 고민한다는데, 난 지금까지 그런 고민을 해본 적도 없다. 지금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말이 좀 늦은 편인 것 같다.
때때로 조바심이 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땐 이런 생각을 한다. 결국엔 준연이도 말도 배우고 수다도 떨 것이다. 나중엔 너무 시끄럽게 나불대서 '야, 제발 그만 떠들어! 엄마 머리아파 죽겠다!'하고 소리지르게 될게 뻔하다. 그런 상황을 서너달 앞당기는 게 뭔 대수냔 말이다.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시기가 늦춰지면, 오히려 그 전 단계를 제대로 마스터할 시간적 여유를 얻지 않던가. 기어다니기의 달인 준연이가 내게 그걸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