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H > 검은 꽃이 피기까지

이번 계간 <문학동네> 겨울호 포커스 책이 <검은 꽃>이었습니다. 그래서 원고를 하나 썼습니다. 마이페이퍼 개장 기념으로 올려봅니다.

 

<검은 꽃이 피기까지>

애초에 하려고 했던 일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생각지도 않던 엉뚱한 일만 남은 것을 일컫는 사자성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창작의 세계에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어떤 문학평론가는, 본래 쓰려던 것을 쓰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노동이라고 말한 바 있기도 하다. 옳거니. 맞는 말씀이다. 자기가 뭘 하려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나는 가끔 무섭다. 그건 그렇고.
그 영화감독은 영화로 유명하다는 뉴욕대를 졸업한 패기만만한 친구였다. 이십대에 이미 35미리 장편 영화의 감독이 되었는데 흥행에는 참패했다. 그래도 영화제에선 가끔 불러주는지 이탈리아 어느 시골에서 열린 영화제에서 스타가 된 이야기를 가끔 하곤 했다. 포도를 밟아 와인을 만드는 시실리의 어린 처녀들이 잘생긴 이십대의 영화 감독을 따라다니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유쾌하다. 엉뚱한 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환대를 받고, 그런가하면 팡파레를 기대했던 곳에서 썰렁한 침묵의 야유를 받게 되는 것, 그런 게 있어야 인생에는 어떤 활력이 생겨난다.
그 감독은 찍고 싶은 영화가 많았다. 우리는 2000년에 만났는데 그는 미국식으로 일하고 있었다. 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며 집 근처로 찾아와 무턱대고 함께 시나리오를 쓰자고 했다. 아무래도 나는 점잔빼며 탐색하는 사람들보다는 그런 저돌적인 사람에게 끌리는 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게 치장한 느와르적 풍모가 거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청운의 꿈을 품고 고국으로 돌아와 영화계에 투신한 젊은 교포의 열정을 꺾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뉴욕대 선배 중에는 뉴욕 근처에도 안 가봤을 것 같이 생긴 곽경택이라는 감독이 있었는데 그 무렵 <친구>라는 도저히 흥행할 것 같지 않은 제목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영화를 하시려는 겁니까?"
"뭐든지 자신 있습니다. 시나리오만 써주시면 멋지게 만들겠습니다."
듣는 사람이야 기분 좋았지만 뭐든지 잘 만들 수 있다는 그 자신감은 과도해 보였다. 자기도 좀 그랬는지, "단, 뮤지컬만 빼구요."라고 토를 달았다. 몇 차례의 술자리 끝에 나는 그가 정말 만들고 싶어하는 장르는 역시 느와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패션이 말해준 것이 진실이었다.
나는 그와 일하기로 했다. 그는 신이 나서 영화사를 섭외하러 다녔다. 몇몇 회사가 그의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다. LA의 교포 건달들이 등장하는 데뷔작이, 내용의 완성도나 만듦새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지만, 그 화려한 스타일만큼은 영화판에서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었다. 특히 <장군의 아들> 이후 액션 영화에 목말라 있던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 같은 사람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어쨌든 흘러흘러 그는 대형 블록버스터를 줄줄이 기획하고 있던 신생 영화사와 계약을 맺었고 그와 나는 연세대 내에 있는 한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감독이라는 게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 할 일도 없는 날건달 같은 직업인지라 내가 책상에 앉아 써내려 가는 동안 그는 내내 옆에서 커피며 김밥이며를 갖다 바치며 어서 메가폰을 잡을 날이 오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는 유달리 감동을 잘하는 성격이었다. 내가 몇 장 쓰면 그걸 보고 감탄 또 감탄하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강하게 자기 의견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는 자기 영화에 반드시 넣고 싶어하는 어떤 장면,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그는 아르바이트 삼아 잠깐잠깐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장나라라는, 이름만 봐서는 도저히 뜰 것 같지 않은 무명가수의 데뷔 뮤직비디오를 찰리 채플린 스타일로 강원도 탄광에서 찍어오기도 했는데 주문한 회사에서는 신인가수 얼굴에 숯검댕이가 웬말이냐며 항의하는 바람에 결국 그 실험적인 비디오는 거의 사장되고야 말았다.
어쨌든 시나리오의 초고가 나왔다. 영화사에는 회의를 하더니 이대로는 흥행성이 없다고 했다. 다시 합숙에 들어가 2고가 나왔다. 회의가 다시 열렸는데 전보다 더 심해졌다고들 했다. 다시 3고가 나왔고 영화사에서는 당분간 프로젝트를 보류하는 게 좋다고 했다. (실망한) 그와 (어느 정도는 이런 사태를 예상했던) 나는 술집을 전전하며 예술을 몰라주는 세태를 원망하며 술을 퍼마셨는데 그때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다(역시 예술은 배가 고파야).
소위 '일레븐 데스페라도'의 구상도 그때 나왔다. 미국에 다녀오던 그가 비행기에서 들었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구한말인가 일제시대엔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갔는데, 그 사람들이 나중에 엘살바도르인가로 옮겨가 거기에 나라를 세웠다가 몰살당했다는, 다소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떠난 연도는 1905년이고 간 곳은 하와이가 아니라 멕시코였고 마지막에 가서 죽은 곳도 엘살바도르가 아니라 과테말라였다. 어쨌든 그는 (미구에 자신이 만들) 그 영화의 라스트신만큼은 확실하게 그려놓고 있었다. 11명(왜 11명인지는 모른다)이 마야의 피라미드 위에서 멕시코제 기관총을 쏘다 장렬히 몰살당하는 것이었다. 거기가 엘살바도르이든 파나마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마카로니 웨스턴이나 존 포드 식 서부영화의 황량한 라스트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수첩에 적었다. 별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때는 뭐든지 다 적던 시절이었다. 그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는 있겠지만 그게 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도대체 엘살바도르에서 몰살당한 사람들과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그 구상을 적은 300원짜리 수첩을 서랍 속에 처박아두고 잊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내 시나리오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영화사에선 그래도 신의를 지켜 나머지 잔금을 치러주었고 나는 그쪽에서 완전히 손을 털었다. 그후 그 감독은 미국에서 혼자 썼던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들을 전전하며 몇 군데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듣기도 하고 또 막간에 뮤직비디오도 몇 편 찍으면서 세월을 보냈고 나는 나대로 소설에 전념하느라 그를 통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을 정리하는데 그 수첩이 눈에 띄었다. 물끄러미 수첩에 적힌 글귀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처음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떠올랐다. 총질이나 하는 마카로니 웨스턴 풍의 영화 말고 좀더 진지하고 근사한 그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 역시 옆구리를 찔렀다. '왜 그렇고그런 서부극이 될 거라고 생각해? 당신이 쓰면 다를 거야.' 돌아보면, 지난 세기에 내가 저지른 모든 일이 미친 짓이었는데 오직 결혼만이 예외였다.
나는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가 2001년이었다. 감독에겐 가끔 전화가 왔다. 나는 그 구상을 소설로 쓸 거라고 말했다. 그 무렵 그 감독은 한 신생 영화사의 창립 멤버가 되어 자기 방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호기롭게, "혹시 취재 경비가 필요하면 저희 회사에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큰소리를 쳤다. 충무로에 돈이 개똥처럼 흔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제작 경비를 지원받으며 소설을 쓰는 작가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또 그렇게 써서 과연 좋은 소설이 나오겠는가. 게다가 내 마음속에서 이 소설은 점점 영화라는 미디어와 멀어지고 있었다. 영화와는 무관하게 철저히 소설적인 그 무엇이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자료를 통해 속속 사건의 정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05년 1033명의 조선인이 멕시코행 배에 오르는 것이다. 하와이 이민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대한제국의 퇴역군인들을 주축으로 신부와 내시, 무당과 몰락 양반이 한데 어우러진 이들은 4년 계약을 맺고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게 되지만 계약이 만료된 후에도 돌아오지 못한다. 이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나라는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돌아와봐야 별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1910년, 유명한 멕시코 혁명이 시작된다. 에밀리아노 사파타, 판초 비야, 오브레곤이 등장하는 멕시코 역사상 최고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조선인들 중 일부도 혁명에 휩쓸리고 또 일부는 쿠바 등지로 옮겨간다. 1916년, 여전히 유카탄 반도에 남아 있던 젊은 남자들은 과테말라에서 벌어진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가 무정부 상태인 과테말라 북부 밀림에 작은 나라를 세운다. 이 사건은 1916년 신한민보, 1922년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었다.
문제는 <애니깽>이었다. 그 영화를 본 사람은 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제대로 개봉도 못하고 막을 내린 영화였다. 주연배우인 임성민이 촬영 중에 죽는 바람에 영화가 엉망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그 얘기를 했다. 내가 구상을 꺼내놓기만 하면 '어, 그거 애니깽이잖아?'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모두 흥미를 잃었다. 상황이 심각했다.
그러나 분명 그 이야기에는 내 영혼을 미혹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써야만 했다. 어쩌면 '유랑'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유랑. 나의 아버지는 오사카 근교의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만주를 떠돌던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해군 조선소 곁에 노동자들을 상대로 함바집을 열었다. 거기에서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났다. 대대로 빈농의 후손이었던 할아버지는 악착같이 일해 땅을 살 돈을 모았다. 꽤 수완이 좋았던지 그는 해방 전에 이미 논 마지기를 사기에 충분한 돈을 모아 고향의 처가로 보냈다. 할머니네 집에서는 물론 그 돈으로 논을 샀다.
해방이 되자 할아버지는 일본에서의 장사를 접고 할머니, 그리고 자식들과 함께 요코하마에서 귀국선을 탔다. 그러나 고향에선 엉뚱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 할아버지의 돈으로 산 땅 중에서 일부가 처가 쪽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토지개혁을 거치며 할아버지는 부재 지주로 분류되었던 것 같고 처가 쪽에선 땅을 잃지 않기 위해 경작을 하던 자신들의 이름을 등기부에 올렸던 것 같고 그러다보니 애초부터 그게 누구 땅이었는지 불분명해진 것이었으리라. 해방 후엔 그런 일이 흔했으니까. 어쨌든 그 후로 두 집안은 사이가 틀어졌다. 땅이 거기 있는 한, 그들의 화해는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만주와 오사카를 거쳐 다시 고령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는 자식들을 낳아 먹이고 길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뇌졸중으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었다. 초등학교를 마치자 집에서는 더 이상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는 가출하여 대구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혼자 힘으로 야간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사병으로 입대하여 장교가 되었고 몇 년 후 배를 타고 월남으로 떠났다. 바로 그해에 내가 태어났다. 그곳에서 벌어온 돈으로 부모는 서울의 외가 근처에 집을 샀다. 그런데 집장사가  사기꾼이었다. 월남에서 번 돈을 하루 아침에 날린 것이었다. 만약 내 부모가 그때 서울에 집을 장만했더라면 내 어린 날의 유랑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화천에서 태어나 대구(여기에서 내 동생이 태어났다)로, 광주, 진해, 양평, 파주를 거쳐 서울로 입성했다. 1년에 한 번씩 전학을 다녔고 매번 새로운 언어와 게임의 규칙을 익혔다. 나는 빨리 잊고 빨리 배우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유랑의 서사에 매혹되었는지도 모른다. 1996년의 나는 내 소설의 주인공의 입을 빌어,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라고, 제법 폼을 잡고 인생에 대해 아는 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건 그저 내 바람에 지나지 않았을 지 모른다. 사실 멀리 떠나면 모든 것이 변한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고 국가나 이념, 종교와 언어는 모두 그 다음 문제다. 미국으로 떠난 이민자들은 개신교도가 되고 탈북자들은 누구보다 열렬한 자본주의 신봉자가 된다.
나는 아내와 함께 멕시코행 항공편을 타고 멕시코로 날아갔다. 생각 같아서는 이민자들의 행로를 따라 배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멕시코까지 날아가는 비행기만 해도 천신만고였다. (어쩐지 이상하게도 값이 쌌던) 이 비행기는 도쿄와 밴쿠버를 들러 승객을 태우고 가는 바람에 바람에 물경 24시간이 다 걸려서야 치안상태 불량한 걸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멕시코시티 공항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멕시코시티는 그 자체로 라틴아메리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품고 있었다. 인상적인 유물, 가면, 도자기, 피라미드 같은 좋은 쪽으로부터 도둑, 택시강도, 매연, 오염, 무절제, 카니발적 광기, 경제 불안과 같은 나쁜 쪽까지,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광범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 여행을 시작하는 곳으로는 그만이다.
나는 멕시코시티에서 무사히 일주일을 머무른 후, 비행기를 타고 유카탄 반도의 거점 도시인 메리다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1905년의 조선인들이 각 농장으로 팔려갔다. 나는 메리다에 여장을 풀고 본격적으로 그들의 흔적을 찾아나섰다(어떤 신문은 '그들'을 '조상', 혹은 '선조'라고 쓰고 내 여행을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 나선 고난의 여정'으로 표현했다. 내 소설 어디에도 그런 표현은 없다. 그들은 내 조상이 아니라 1905년 제물포를 떠난 1033명의 조선인들이다. 내 소설에선 이 점이 중요하다. 민족은 가족이 아니다. 나는 몇 번이고 거듭하여 '민족의 수난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민족의 수난사'가 되는 지점에서 소설은 끝나고 '8.15 특집극'이 시작된다).
나는 가능하면 그들처럼 먹고 그들처럼 자려고 노력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에네켄 농장들은 황무지가 되어 있었고 유카탄 반도엔 마야유적들을 찾는 관광객들만 북적거렸다. 수소문 끝에 택시를 대절하여 찾아간 농장 역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으로 변해 있었다. 한때 채무노예들이 북적거렸을 들판엔 녹슨 무개차와 레일이 깔려 있었고 창고엔 에네켄 삼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수북히 쌓여 있었다. 농장주의 저택에서 버스를 타고 온 미국 관광객들이 유카탄의 전통 음식을 먹고 있었다. 햇볕은 뜨거웠고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섰다.
당시의 조선인들이 세웠던 숭무학교 건물은 전자제품 대리점이 되어 있었다.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천천히 멕시코라는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서 소설이 시작되었다.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과테말라로 향했다. 기이한 것은 그들이 나라를 세우고 죽어간 띠깔 역시 지금은 과테말라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밀림 사이로 우뚝 솟은 띠깔의 피라미드들을 보러 일 년에 수십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관광지가 됨으로써 '그들'의 흔적은 더 빨리 사라졌다. 나는 관광객의 한 사람이 되어 가이드를 고용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밀림을 지나고 열대의 새들을 만나고 피라미드에 오르고 허름한 식당에서 콜라와 살사 소스에 버무린 닭요리를 먹었다.
며칠 후 나는 해발 1500미터에 위치한 안티구아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소설의 나머지 부분을 썼다. 그리고 몇 달 후, 도저히 영화화할 수 없는 1350매짜리 장편 소설을 탈고했다. 너무 많은 인물과 너무 광활한 지역이 나오는, 헐리우드조차도 시도하기 어려울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 감독에겐 미안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애초에 하려던 일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을 일컫는 한자성어가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인생의 버스는 항상 엉뚱한 곳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1905년의 그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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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9)

난 술에 취하는 거 좋아한다.
그냥 얼큰 달큰한 그 취한 느낌이 좋다.

소주는 소주라서 좋고,
와인은 와인이라 좋다.
맥주는 맥주라서 좋고,
위스키는 위스키라서,
브랜디는 브랜디라서,
진은 진이라서
보드카는 보드카라서
럼은 럼이라 좋다.

소주는 이런 저런 사람 냄새나서 좋고,
사람들 옹기종기 머리 맞댄 시장 뒷골목 뒷고기 집에도
돈 냄새 물씬 나는 고급 요리 집에도
입은 옷 찢어져도, 온 몸에 뭔가 품고 화려한 옷 입고 있어도
이리저리 어느자리에서든 별 무리없이 어울려 좋다. 
바다 냄새 물씬 풍기며, 달콤하게 고소하게 혀에 착착 들러붙는
내가 좋아하는 생선회랑 찰떡궁합이라 더욱 좋다.
그리고 때마침 내가 회 먹으러 간 날, 세월을 잘못 먹은 생선 덕분에
내 좋아하는 회에서 약간 비릿내가 나더라도 소주 한잔 털어 넣고
캬~하며, 잊을 수 있어 좋다.
 
와인은 성숙한 포도향이 나서 좋다.
기왕 이면 로제 와인이나 화이트 와인보다는 레드 와인이 좋다.
붉은 포도색이 제대로 나서 좋다. 투명하면서도 짙은....

또 기왕이면 샤또로 시작해서 츠로 끝나는
향과 맛이 일품이라는 그 와인 병째 맛 보는 게
앞으로의 남은 내 와인인생에 거는 희망이다. ㅋㅋ

맥주는 골라먹는 재미가 있어 좋다.
디엔에이나 후치 같은 단 맛 나는 맥주도 좋고,
아사히, 밀러라이트, 코로나처럼 그냥 깔끔한 맛도 좋고
바이젠 이든 둔켈 이든 하우스 맥주도 좋지만,
무엇보다 찐한 흑맥주가 좋다.
쓰면 쓸수록 더욱더  좋다.
혀뿌리부터 혀끝까지 쏴하고 감싸는
쓴맛이 일품이다.
무엇보다 진짜, 사내다운 사내 냄새나는 것 같아 좋다

위스키는 증류향이 나서 좋다.
스카치든 아이리쉬든 캐나디언이든
아메리칸이 든 다 괜찮지만,
허무하게 이름이 드높은,
발렌타인 몇 년 산 마시고 있는 지에 따라
내 등급까지 매겨지는 것 같아 피하고 싶기도 하다. 
확실히 세월 묻은 게 깊이 있기는 하드만...

브랜디는 와인보다 더 깊은 포도향이 나는 게 좋다
물론 사과 ,체리, 살구로도 만들지만
포도로 만든 꼬냑이 최고 좋다.
사실 난 헤네시 광이다.
친구 집 가서 비워버린 술도 헤네시였다.
ㅎㅎㅎ... 그거 참.....침 넘어가는데
혀위에서 아래로 감아돌며 목구멍을 타고 스르르 넘어가는 느낌이 가히 일품이다.
그리고 그 병에 있던 V.O.S.P. 네 글자 중에
V. S. 이 두 글자 정도는 미리 마신 맥주 한 캔에 취해
못 본 걸로 해야겠다 생각도 했다.
맥주 캔도 제일 큰 사이즈였자나 넌 취해서 안보여 하고~~헤헤

그리고 위스키, 브랜디, 럼, 진, 보드카를 기주로
각양각색, 형형색색 예쁜 Cocktail도 아기자기해서 좋다.
Shake, Chilling, Frosting, No-mixing....
만드는 방법도, 즐기는 방법도 다양해서 좋다
칵테일 만드는 법도 꼭 배워 볼꺼다.
우울한 날이나, 의미 있는 날이나...
이것저것 섞고 흔드는 칵테일 만드는 과정의 재미를 느끼다 보면...
조금은 더 즐겁고 특별해 질 것 같다.

아 중국술도 좋다.
화주 만들어 먹다가 눈썹하고 앞머리 태운 기억이 있어 좋다
그리고 화주 만들어 먹던 날 함께 했던 이들과의
소중하고 따듯한 좋은 추억들이 있어 참 좋다.
아 벌써 여러 술에 취한거 같다.

마셔도 마셔도 끝없이 들어간다고 붙은 블랙홀.
아무리 마셔도 얼굴색 하나도 안 변한다고 붙은 인조인간.
내 평생에 한번, 무리로 덤벼들어 다이 됐다가 붙은 식물인간.
술 덕분에 생긴 소중한 경험들 그리고 별명들....

어쨌든 이제는 나를 즐겁게 해주는 술에 대한 예의로
술을 더 잘 즐기기로 했다.

어떤 술이든...
내가 그 술에 얼큰하게 ,온통, 흠뻑 취해서 좋았던 그 기분
잘 기억해서...
콜라에 쏟아 붓기로 했다. 왜 콜라에게 그런 영광을 ?
라이트 콜라, 체리콜라, 레몬콜라...
맛대로, 제조회사별로, 사이즈별로...
골라먹는 재미도 있고,
김빠지면 맛도 덜해 나름대로 기간별로 등급도 매길 수 있다.
술 보다 돈도 싸고.
아무리 과콜해도 그 다음날 머리도 안 아프다.  
아무리 과콜해도 막 살아버린 느낌도 안들고,
아무리 과콜해도 이성을 잃고 정신을 잃어버린 기분도 안든다

단 주의점...과콜하고 양치질 안 하면 이색이 누렇게 변한다.

그리고..가끔 그 기분이 가물거릴 때쯤에는
내가 망가져 버려도, 혹은 뭘 좀 게워내더라도
뭔 술을 그렇게 처마시냐...소리하면서도
망가진 내 모습.. 망가졌다 생각 않고,
풀풀 냄새풍기며 실감나게 김 내며 퍼져있는
내가 쏟아내 버린 속엣 것에도
그냥 묵묵한 시선으로 등 두드려 줄 수 있는
그런 부담없는 동무 옆에서
미친 듯 취해보면 된다.

아주 만약.. 그랬던 내 동무
자기 눈 안에 너무 커버린 다른 용무를 보느라,
나를 잠시 보아줄 시선이 시간이 당장 없더라도,
그런 동무 있음에 내 주사(酒使)가 더욱 빛나서 좋고
다음에 또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또 좋다.

그래도 그 기분이 너무나 그리울 때는
그냥 그때 기분에 맞는 음악 틀어놓고,
미친 듯이 또 한번, 혼자 취해보면 된다. 그러면...
혹시라도 참고 있던 뜨거운 것을 잘 못 참고 힘 조율을 잘못하여
친구 머리통이나 가슴팍에 게워내고는
친구 머리카락에, 가슴팍에 아무리 씻어도
어쩔 수 없이 ...은근하게 약올리듯 마음을 괴롭힐 냄새에 기분에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사과, 거듭 사과 할 필요도 없다. 
내 주둥이는 내 머리통에 달렸으니 내 머리통에 게워낼 걱정없고  
내 입에서 삐져 나와 목을 타고 흘러 가슴팍을 적실수도 있으나
보통 참고 참던 그것들은 폭발력을 가지므로...
제 몸에 온통 다 묻히기도 힘들다.
묻히려고 애쓰더라도,
그 만취한 정신에도 아주 원초적인 반사정신으로 속엣 것을 피하는
자신의 몸의 신비에 감탄할 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코로 나올 수도, 나오다가 목에 걸릴 수도 있다.
열나게 쓰리고 따갑지만, 괜찮다. 그냥 잠시 참으면 되니까 

이랬든 저랬든 술은 술이고, 그런 술이 좋다
주도를 스스로 만들어 낸 내가 대견해 좋고
그것도 세월따라 나름의 재미있는 역사가 생겨 좋다.
그런 주도를 확실한 주도로 이끄는....
내 사랑하는 술들이 있어 좋다  

홍야홍야 알큰달큰 취한 기분으로...
이리저리 넘실넘실 거려 정신없는 듯 보이기도 하겠지만.
힘의 강약과 장단을 알고 구사하는...
취권의 달인... 권법(拳法)소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험한 무림세계를  평정하고, 결국 무림의 고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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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내장남 누나셋은, 하늘에서 내리는 1억개의 별을 보고, 후카츠 에리라는 배우가 넘 맘에 들어서 그녀의 다른 출연작들을 기웃거리다 발견한 드라마다. 그것도 2003년 최신작. ^^

첨엔,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은 후카츠 에리랑 코유키 밖에 모르겠고, 나이가 5살 연상이라는 것을 가족들에게 숨기고 결혼했다가 나중에 시누이들에게 들키면서 약점을 잡힌다-라고 소개되어있는 내용이 재미있을 것도 같고, 없을 것도 같고... 시누이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이런 우울하고 화나는 내용은 곤란한데-라며 볼까 말까 고민했었다. 그러다 남자 주인공 오카다 준이치가 v6의 멤버라는 사실을 검색을 통해서 알게 된 후, 사진을 보고, ‘음, 괜찮은데’라며, 일단 1편만 보고 괜찮으면 계속 보기로 결심하다!




 

 

 

 

 

 

 

 

 

 

1편은 정말 후카츠 에리의 개인기에 가까운 다양한 표정과 연기가 압권이다. 물론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과장된 듯 하면서도 현실적이기도 하고, 발랄하고 재밌는 내용과 더불어, 오카다 준이치와 후카츠 에리도 너무 귀엽고.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에서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후카츠 에리가 왜그리 부쩍 나이들어 보이는지 좀 안타깝긴 하지만. ^^ 시어머니와 세 명의 시누이들의 캐릭터도 너무 분명해서, 거기서 나오는 웃음도 장난이 아니다. 기대치가 팟팟팟~ 올라가면서 끝까지 다 보기로 결정!! 이랄 것도 없이, 흠뻑 빠져들어서 정말 재밌게 봤다. ㅎㅎ


이 드라마는 음모, 배반, 함정, 이런 음험한 것들이 하나도 없는 밝고 귀여운 드라마다. 타이틀도 너무 동화적이면서 예쁘고. 초반 대부분은 후카츠 에리가 시누이들을 집에서 내보내려고 잔머리를 굴리다 실패하는 내용이지만, 정말 신나게 웃다가도 때로 따뜻한 가족애가 느껴지기도 하는, 정말 발랄하면서도 따뜻한 가족 드라마다. 마지막회는 눈물이 찔끔!할 정도로 감동적이기도 하고. 뭐, 계속 눈물 흘리게 두지 않고, 마지막은 또 폭소로 끝나긴 하지만. ^^ 보통의 일본 드라마와 다르게, 10회로 끝나는 것이 안타깝기조차 할 정도다. 보다보면 결론이 대충 어떻게 날거같다-라는 감이 오긴 하지만, 뭐 그렇게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오카다 준이치가 후카츠 에리랑 같이

가을동화 보다가 우는 장면도 꽤나 인상적. 정말로 우리나라 드라마가

일본서 인기 있나보구나. T^T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오카다 준이치도 너무 좋아졌다. 예전에 ‘키사라즈 캐츠아이’라는 드라마가 한참 인기 많을때도, 나리미야 히로키랑 사쿠라이 쇼 나오는 것만 알았지, 오카다 준이치는 몰랐는데, 역시 존재를 인식하니까, 그 드라마의 주연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더군.

 

그래서 ‘키사라즈 캐츠아이’도 보고, 후카츠 에리의 이전작 ‘사랑의 힘’도 한번 봐볼까나~라고 생각중이다. ^^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과 분위기는 정 반대라 할 정도로 틀리지만, 역시나 훌륭한 드라마인거 같다. ㅎㅎ 기분좋~은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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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황산벌

기획은 좋은데 감독의 능력이 많이 딸리는 듯.
이야기가 좀 어수선하고, 특히 김유신 캐릭터가 말하는 주제의식도 불분명하고,
전체적으로 영화가 말하려는 내용과 구성이 따로 노는 느낌.


신나게 욕지거리하면서 웃기려고하다가
마지막에는 꼭 점잖빼는 식상한 플롯은 여전하고,
(하나도 제대로 못 보여주면서 이것저것 다 보여주려는건 과욕)
무엇보다도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없다는 점이 제일 아쉽다.

 

이준익 감독이 만들어 논 영화들을 쭈욱 보니...
달마야 놀자, 공포택시, 아나키스트, 간첩 리철진, 키드캅.
자신의 스타일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느낌이 든다.


이거 하나는 명대사...
'호랭이는 가죽 떔시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디진다'

 

뇌물의 정의도 확실하게 짚어준다.
"아따 아부지. 원래 제가 뇌물을 잘 안당께요. 원래 뇌물이라는 것은 이거이 뇌물이어라, 하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선물이라고 주는 것이지요. 원래 받으면 안 되는 것이니 저짝에서는 당연히 거절하고, 이쪽은 자꾸 권하고, 또 사양하고 다시 권하고, 그렇게 밀고 당기는 동안 이심전심이라고 주고받는 양자의 마음이 살살 통하는 것이, 바로 뇌물의 묘미어라."


차라리 영화 홍보 할때처럼 좀더 만화기법을 두드러지게 썼으면 재미있지 않았을까...
예를들어 벌교삼인방의 특징을 에니메이션이나 CG로 과장하는 식으로....
전투씬에서는 다들 칼들고 흐느적거리며 시늉하는 사람들 투성이니
하려면 확실하게 하든가. 어설프게 하려면 확실하게 어설프던가.

 

솔직히 사투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뭐라고 외쳐대기는 하는데...
대충 뉘앙스는 알겠지만, 차라리 자막처리 하지 ㅡ.ㅡ;
책에서도 각주로 용어 설명해주듯이 사투리의 맛을 재미있게 전달하는
제작진의 배려와 스킬이 부족했다.

 

오로지 기획~! 하나 믿고 만든 것 같은데..

(물론 연기잘하는 배우들 몇명 나오기는 했지만)
TV 코미디에서도 몇번 나왔었던 '사투리 사극' 수준가지고
영화라 하면 좀 '거시기'하지.

 

 

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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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고나서 나에게 정착된 두가지 경향이 있다. 첫번째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굉장히 힘들어졌기에, 기존에 있던 친구들을 유지, 보수, 관리하며 여생을 살아야겠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만나서 불편한 사람을 억지로 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불편한 자리에 나가 억지로 만든티가 역력한 웃음을 짓곤 했는데, 이제 그런 짓을 하기가 귀챦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때로는 만나기 싫은 사람도 봐야 하지만, 앞으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겠다는 얘기다.

두번째 원칙에 너무 충실해져서인지 최근 들어서 친구를 만나면 단점만 보이고, 그래서 안만나는 친구들이 늘어나는 느낌이다. 엊그제 얘기. 초등학교 때부터 만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야구를 보잔다. 20분쯤 고민하다 "간만에 연락했는데..."란 맘에 그러자고 했다. 두산이 안타를 4개인가 치고 7-0으로 지는 바람에 경기 자체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는데, 엘지팬인 내 친구 두명, 특히나 엘지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친구 하나는 신이 났다. 날도 덥고해서 집에 가고픈 날 붙잡더니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한다. 그러자고 했다. 간만에 만났으니깐.

술마시는 건 사실 별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문제는 장소다. 이것들은 만나기만 하면 단란주점으로 날 끌고간다. 몇번 끌려가 봤지만 사실 난 단란주점에서는 어떠한 재미도 못느낀다. 돈 10만원에 여성이 두시간 동안 성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것도 영 맘이 불편하지만, 파트너로 나온 여자의 손도 안잡는 내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내가 손을 안잡는 건 그런 맘이 없어서가 아니라, 친구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러고 싶지가 않아서다). 정말 웃기는 건 계산을 할때다. 카드로 계산을 하면서 그 친구는 늘 이런다. "야, N분의 1이야" 머리숫자대로 똑같이 내잔 말이다. 난 그게 싫다. 싫다는 사람을 끌고 갔으면 지가 돈을 내던지 하지, 두시간 동안 우두커니 앉아 여자랑 몇마디 주고받고선 30만원씩 내라는 게 잘 용납이 안되었다.

그래서 난 언제나 단란주점 가는 것에 저항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숫자의 논리'에 밀려 말처럼 끌려갔다. 그런데 그날 역시 그 친구들이 X-point라는 아주 후진 단란주점에 가잔다. 이번엔 좀 세게 버티었다. 십분 가량 싸우다 결국 타협을 본 게, 자기가 아는 Bar에 가잔다. 그동네에도 맥주를 마실 곳은 많았지만 굳이 차를 타고 그 Bar로 갔다. 아주 귀여운 사이즈의 양주 한병, 그리고 과일안주 하나. 술을 끊은 난 양주 한잔만 받아놓고선 물만 마셨고, 노래도 가능한 곳인지라 친구들은 노래도 몇곡 했다. 좀 화려해 보이는 Bar라 만만치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36만원이 나온 계산서를 보곤 좀 놀랐다. 노래 5곡을 부른 게 5만원이라나. 친구의 말이다. "N분의 1이야!"

내가 12만원을 내야 한다는 얘긴데,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쓸 때도 물론 있지만 이번엔 왜이렇게 돈이 아까운지. 우아한 카페에 가서 맥주를 아무리 많이 마셔도 십만원이 안될테고, 좀 덜 우아한 곳-내가 좋아하는 양재동 바라든지-에 가서 양주 두병을 마신다 해도 그렇게까지 나오진 않을 것이다. 아, 돈아까와....

돈도 돈이지만, 그들과 있는 내내 맘이 편치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라면 같이있는 것만으로 편해야 할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다. 둘다 사업을 하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업 얘기만 계속해 날 멍청하게 만든 것도 그렇고, 친구 차를 타고 오는 동안 계속 어디론가 전화만 해 굉장히 심심했다. 무료함을 달래려 나도 아는 애한테 전화를 했다가 잠자는 걸 깨워버렸다. 아무리 이쁜 여자라 해도 자다 일어난 목소리-"여-보-쇼?"-는 과히 이쁘지 않으며,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리기 마련이다. 물론 굉장히 미안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그건 내가 "재는 원래 그런 애야"라면서 친구의 특성을 인정하고 그걸 기꺼이 감내해 왔던 데 있다 (참고로 그 친구의 별명이 '파쇼' 혹은 '장군'이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조금 올라가자 내 인내력이 많이 감소했고, 그래서 그 단점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리라. 물론 나 자신도 그렇게 편한 인간이 아닐 것이며, 내 친구들 중에는 나의 그런 점을 알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참은 애들이 많을 것이다. 30세가 넘어서 "너 이런 게 나쁘니 고쳐라"라고 말하는 것은 "우린 안맞아. 그러니 그만 만나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니깐.

편하기 짝이없는 친구 관계지만 그 관계를 잘 유지하는 건 이렇듯 어려운 일이다. 사소한 단점을 빌미로 인해 하나씩 하나씩 맘 속에서 지워 나간다면 내 주위에는 친구가 하나도 남지 않겠지. 친구의 단점을 보기보단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내력을 키워 나가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막상 가슴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그래서 갈수록 편협해지는 내 자신이 굉장히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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