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여유가 더 없어지기 전에 최근 읽은 책들에 관하여 메모를 남겨두려 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시는 책에 관한 그만한 생각을 떠올릴 수조차 없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문학작품을 많이 읽는 편도 아니고, 문학계 동향을 꾸준히 추적하여 온 것도 아니라서 최근 문학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 시인이 되겠답시고 기형도, 오규원 전집과 이성복, 문인수, 엄원태 등 시인들의 시를 필사하고, 시학회를 기웃거리며 신춘문예 일정을 챙기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먹고 살다 보니 흥미가 거의 떨어졌다. 한 달에 못 읽어도 한두 권은 꾸준히 읽던 시집도 요즘은 드문드문 읽을 따름이다. 책을 골고루 읽으려고 열댓 개 분야를 정하여 열다섯 권에 한 권꼴로는 문학 책을 꼭 읽게 되도록 배려(?)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 한가롭지(?) 않게 되었다. '쓸모'를 따지는 이런 말이 문학에 대한 모독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학을 펼칠 시간과 여유가 나더라도 汎用性이 상대적으로 큰 고전이나 세계문학을 집게 되지, 개중에서도 한국소설은 적어도 내게는 점점 순위가 많이 밀려나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의무감에서가 아니라면 작가가 창조한 세계와 문장에 빠져들 필요와 동기가 잘 일지 않는다. 긴 시간을 들이기엔 '가성비'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어느 작가의 이런저런 작품들은 다르더라는 것이 있으셨다면 추천해 주시길...)


  그렇게 내가 '편협한' 관점을 가진 '문외한'인 것을 전제로... 오늘날 '작가', '소설가', '문학'과 같은 말들이 주는 '아우라'는, 비교적 최근인 『토지』가 완성된 1994년 즈음과 비교하여도 상당히 왜소하고 스산해졌다. 30년 전, 50년 전, 100년 전과, 지금의 창작환경을 어떤 기준을 갖고 비교해야 하는지, 비교할 수나 있는지 어려운 문제지만, 문학이 지식의 최전선에 있고 작가가 곧 지식인이었던 시절과 지금은... 어떻게 보아도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이다. 은유, "[삶의 창] 작가의 연봉은 얼마일까", 한겨레 (2018. 10. 19.)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866586.html; 민동용, "억대 연봉에 수십만 독자… 우리도 베스트셀러 작가랍니다: 웹소설 작가 3인 ‘밀차-강하다-달콤J’", 동아일보 (2020. 1. 8.)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00108/99127701/1


  간혹 거리에서 사진기를 멘 모습을 뵙기도 했지만 조세희 선생께서도 '글로서는' 오래 침묵하고 계신다. 최재봉, "[최재봉의 문학으로] 조세희의 침묵", 한겨레 (2018. 1. 18.)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8404.html 87년 체제를 열어젖힌 데 대한 보상(?)으로 명예와 권력을 넘어 경우에 따라서는 富와 그 세습까지 보장받은 이들이,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자신들의 시대를 스스로, 비가역적으로 강제 '폐막'시키고 있는 동안, 보수주의자로 분류되었던 소설가 김훈이 오히려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추락사와 산업재해 문제에 관하여 꾸준히 발언하고 계신다. 김훈, "[왜냐면] 아, 목숨이 낙엽처럼", 한겨레 (2019. 5. 14.)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893771.html

  대하소설만 위대하고 거대담론을 다뤄야만 가치있는 문학은 아니지만, (또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오늘날 박경리 선생님이나 작가 최명희 님처럼 그야말로 목숨 걸고 쓰시는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다(오히려 만화 같은 장르에서 그 비슷한 경외감을 느낄 때가 있다). 박상현, "문학은 민족 생존권 깨닫게 할 거대담론 다뤄야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출간", 연합뉴스 (2020. 2. 24.) https://www.yna.co.kr/view/AKR20200224122300005정영훈, "사람들이 토지·태백산맥 안 읽는 진짜 이유는…", 프레시안 (2012. 9. 11.)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8066 (갈수록 갸웃할 때가 많아지는 것 같지만, 여러 논란과 평가는 일단 접어두고라도 40년, 50년 넘도록 꾸준히 '소설'을 내고 계시는 김주영, 조정래, 황석영 같은 분들은 가히 노익장이라 할 만하다. 문순태 교수님께서는 재작년 두 번째 시집을 내시기도 했다.)

  가치 혼란,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한때 존경받았던 분들이 다양한 갈래로 '흑화'하고 판단이 흐려진 모습, 혹은 민주-반민주의 단순한 전선하에서는 용케 덮일 수 있었던 진면모(?)를 드러내어 보이며 실망에 실망을 안기고 있다. 최근 '문학동네'는 젊은작가상 수상작에 대한 삭제와 수상 취소 요청, 또 이를 접한 독자들의 문제제기를 받고 입장을 조금씩 후퇴해가다가 어제는 판매중지를 공지하기까지 했지만, 그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지 모르겠다.


[『토지』와 『혼불』을 함께 다룬 논문들을 몇 개 발견하여 기록해 둔다. 김희진, "최명희 『혼불』과 박경리 『토지』의 인류학적 연구", 2013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search.html?dbGubun=SD&m201_id=10042338; 김희진, "최명희 『혼불』과 박경리 『토지』연구 - 풍속을 중심으로 -", 인문사회 21, 7(3), 2016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17170; 이경, "겁탈과 여성인물의 생존서사 : 『태백산맥』, 『토지』, 『혼불』을 중심으로", 여성학연구, 26(3), 2016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63871; 우수영, "박경리 『토지』와 최명희 『혼불』을 통해 고찰한 한국의 음식문화", 현대소설연구, 58, 2015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85392김순례, "한국여성대하소설을 통해본 ‘여성의 가문의식’ 연구 -토지와 혼불을 중심으로", 국제한인문학연구, 1(1), 2012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693603 오세은, "여성 가족사 소설의 '의례와 연대성'-토지미망혼불을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7, 2002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0888529; 이덕화, "『토지』와 『혼불』의 비교연구", 여성문학연구, 2, 1999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69184 (박경리와 최명희 두 여성적 글쓰기』, 태학사, 2002라는 책도 내셨다)]



  다시 찾은 박경리기념관에서 이 책이 눈에 띄어 샀다. 『토지』를 연재하면서, 또 『토지』 완간 이후에 틈틈이 쓰셨던 글들로, 직접 '미완'으로 표시하신 부분이 있는 등 계획을 갖고 '일본론'을 다듬어 나가셨던 게 아닌가 싶다. 어찌 보면 『토지』 자체가 '소설로 쓴 일본론'이고, 작가께서 일본 평론가와 인터뷰 자리에서 "나는 철두철미 반일작가입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기도 하다.

  책 끝에 실린 강원일보 인터뷰를 보면, 『토지』 완간 이후의 계획에 관하여 "앞으로는 실제적인 이론이 서는 일본론을 집필할 예정입니다. 우리 세대 지나면 쓸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두 번 입 못 떼게 철저하게 조사해 쓸 겁니다. 어중간하게 칼 뽑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말씀하신 대목이 나온다(책 205쪽). 말씀 그대로 통렬하다. 삶을 걸고 내뿜는 일갈 앞에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나 실증주의 같은 것을 차마 들이대지 못하겠다. 특히 일본 역사학자 다나카 아키라[田中明]의 「한국인의 '통속민족주의'에 실망합니다」(책 158쪽)에 대한 지상 반론(紙上 反論)인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책 173쪽)는, 정연한 글에서 벼락이 치는 것만 같다. 1부 다섯 번째 글 "출구가 없는 것"과 2부 "美의 관점"은 내용이 상당히 겹치는데, 뒤의 글이 좀 더 종합적이다. 일본문화를 분석한 글로, 대작가의 통찰이 빛난다. 책에서 글 하나를 고른다면 위 "美의 관점"을 추천하고 싶다. 일본문화의 허무주의와 탐미주의, 현실 도피와 쾌락 추구,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을 꿰는 논설로, 몇 문장으로 요약하기 힘든 글이다. 청산하는 독일과 청산하지 않는 일본의 차이를 '(진실을 추구하는) 철학의 부재'에서도 찾고 계신다(책 76쪽 이하).

  작가께서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우려하신 대로(책 17쪽), 일본 우익이 통치 위기를 모면하고자 혐한 감정을 조장하고, 한국 학자들까지 동원하는 양상이 걱정스럽다. "가는 시냇물처럼 이어져온 일본의 맑은 줄기, 선병질적이리만큼 맑은 양심의 인사(人士), 학자들이 소리를 내어보지만 날이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 반대로 높아져가고 있는 우익의 고함은 우리의 근심이며 공포다. 일본의 장래를 위해서도 비극이다. 아닌 것을 그렇다 하고 분명한 것을 아니라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그 무서운 것이 차음 부풀어 거대해질 때 우리가, 인류가, 누구보다 일본인 자신이 환란을 겪게 될 것이다. 씨가 마르게 사내들이 죽어간 제2차 세계대전, 일본의 악몽은 사람이 현인신(現人神)으로 존재하는 거짓의 그 황도주의 때문이다. 가타비라 같이 속이 비어 있는 신국사상에 매달려온 일본인의 역사의식 그것의 극복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으로, 야심 없는 이웃으로 마주 보기 위하여, 그리고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책 29~30쪽)


  "저는 과거에 원한을 갖고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본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일본의 민족성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 스스로도 희생자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체제입니다. 체제가 뭐냐를 물어야지요."(책 202쪽)


  박경리 선생님의 문장들이 반드시 어법에 맞지만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렇지만 끈덕진 말맛이 감돌고, 절로 설복되는 묵직함이 있다. "나는 인생만큼 문학이 거룩하고 절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책 148쪽)라고 말씀하시며 "결코 사사오입의 인생을 살지 않[고] 내부에서 가장 치열한 사고의 반란을 겪었던"(책 121쪽) 분이시기에, 역설적으로 문장에도 인생 그 이상의 무게가 실릴 수 있는 것 같다.

사람은 아니 모든 생명은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살기 위하여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도 삶의 투쟁, 삶의 인식, 삶의 조화 그 모든 삶에 수반되는 엄청나게 거대하고 신묘한 본질적 삶의 교향악 위에서 군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술은 삶의 추구며 방식이다. - P59

나는 철두철미 반일 작가지만 결코 반일본인은 아[닙니다]. - P84

일본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한국인의 분노를 지겹고 불쾌하고 귀찮아한다. 언제까지 이럴 것이냐, 하면서도 철도를 놓아주었느니, 학교를 세워주었느니, 아무도 그것을 부탁한 바 없는 일을 좀스럽고 쩨쩨하게 늘어놓는 데 대해서는 말이 없다. 간간이 들려오는 침략이 아니라는 망언에 대해서도 무반응이다. 그들의 계속되는 망언은 괜찮아도 한국인의 분노는 왜 지겨운가. 사리를 명백하게 하지 않는 이상 잘못은 되풀이된다. 과거지사보다 미래를 보는 데서 오는 근심이다. 장차 세계에서, 인류라는 차원에서 일본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 것인가. 인류에 속하는 일본인 역시 오늘 군비 확장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자결하지 못하는 모친의 목을 조르는 아들의 비극이 없기 위하여. - P87

후일 일본론을 쓸 생각입니다마는 너무나 학생들은 일본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고 사회 자체도 일본의 정체에 무관심하며 또는 일본을 모범으로 생각하는 부류의 확대되는 양상을 보며 걱정을 한 나머지 나로서는 이나마도 성급하게 엉성하나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학생들이 일본을 모른다는 것이 학생들의 잘못은 아닙니다마는 마지막 꼭 해두고 싶은 말은 결코 일본을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 P109

하기는 우리 민족 전부가 겸손하고 고상하고 객관적이고 했으면 오죽 좋을까마는 그렇지 못하다 해서 함구령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은 학자의 독점물은 아니며 사람마다, 너 나 할 것 없이 역사에 동참해온 것만큼 알 권리, 말할 권리는 있다. 설령 일부 지각없는 사람들이 우쭐해서 과잉 표현을 좀 했다 하자. 그들의 천진한 자랑 때문에 일본의 땅 한 치 손실을 보았는가, 금화 한 닢이 없어졌는가, 왜 그렇게 못 견뎌 할까. 그같은 자랑조차 피해로 받아들이는 그들이고 보면 우리 한국의 천문학적 물심양면의 피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안이 벙벙해진다. - P181

그러나 나는 어리석고 느슨한 내 겨레를 슬퍼하지는 않는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들도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P190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 P192

"나앉은 거지가 도신세 걱정한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이 얘기는 일본의 경우일 수도, 우리의 경우일 수도 있다. - P193

저는 『토지』를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토지에는 왜 농부가 주인공으로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 인류적인 삶을 다루었기 때문에 주인공이 따로 없다고 했습니다. 『토지』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나무나 돌도 제 역할합니다. 저는 바람과 물에도 다 필연성을 부여했습니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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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 P78

냉철한 비판이란 공평함을 뜻합니다. 최소한의 공평을 소지했던들 그와 같이 머리만 따고, 혹은 꼬랑지만 잘라서 말해버리는 것은 무책임입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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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마 사운드업'에 대하여 남긴 다음 후기가 종종 "좋아요"를 받고 있어서(마침 오늘 하나를 더 받아서) '크레마 카르타G'에 대해서도 평을 남겨둔다.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정상 작동 중 액정 절반이 나갔다. 킨들에 비해 실망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닌데, 달리 대안이 없어 슬프다."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1437743


  지금 돌이켜보면, '크레마 사운드업'을 택한 것은 행동경제학적으로 '타협효과(Compromise Effect)' 때문이었던 것 같다. 너무 싸거나 비싼 제품, 기능이 너무 없거나 불필요한 기능까지 쓸데없이 갖추고 있는 '것 같은' 제품들의 양 극단을 피하고 가격과 사양 면에서 타협, 절충을 한 것이다. (횟집에서 3만 원, 5만 원, 8만 원 세트 중 5만 원 세트를 고르고, 피로연을 준비하는 혼주들이 광어회, 문어 숙회, 전복 갈비탕이 나오는 A 코스나, 갈비탕이 나오지 않고 잔치국수가 나오는 정도인 C 코스를 피하고, 스테이크 또는 LA갈비와 갈비탕이 나오는 B 코스를 압도적으로 많이 고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횟집 주인이나 예식장 입장에서는 당연히 5만 원 세트나 B 코스의 마진을 높여두는 것이 현명하다. 전자제품도 세 가지 정도 모델을 유지하면서 가운데 사양 제품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은 위 후기와 같이 액정이 나갔고, 첫 구매 시에 아꼈던 금액 이상으로 '수리비'가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전자제품은 부수적인 기능에 신경 쓰느라 '기본적인 내구성'이 갖추어져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 탓이다. '크레마 사운드업'을 고를 때는 편리한 휴대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한데,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싸들고 다녀야 하고, 책상 위에서만 도서관 귀중본 넘기듯 경건하게 다뤄야 한다면 전자책 단말기로서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아무튼 '알라딘'의 후광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한 '기본적 신뢰'를 배반당한 기분이 들었고, 외국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수리는 바로 맡기지 못하고 '크레마 카르타G'를 다시 살 수밖에 없었다. 여담이지만, 아마존 킨들을, 역시 '타협전략'에 따라 구매했고 훨씬 오래 썼지만, 아무리 험하게 다뤄도(이 정도면 망가졌어야 하지 않나 싶었던 순간에도 멀쩡하게 살아남아)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다.


  '크레마 카르타G'를 고른 이유는 '너부리' 님의 다음과 같은 평 덕분이었다. "카르타, 카르타+, 사운드, 그랑데, 엑스퍼트 다 써봤는데 겉보기에 카르타G가 제일 튼튼해 보이네요." https://blog.aladin.co.kr/ygbaby/11038054 사실상 오로지 안 망가지는 제품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지금까지 망가지지는 않고 있어서 비교적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아래 위로 배치된 물리키의 기능 설정이 (적어도 나의) 직관에 반한다. 오른손으로 키 쪽을 잡고 읽는다고 할 때, 내 생각에 위의 버튼은 앞쪽으로, 아래 버튼은 다음쪽으로 넘어가는 것이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반대다. 설정을 바꿀 수도 없다(뭐,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하였다).


  나는 주로 알라딘에서 전자책을 사보기만 했어서 모르겠지만(대출을 많이 해보지 못했고, PDF 파일들은 한글이더라도 킨들로 본다), 낮은 스펙과 2020년 4월 1일부터의 한국이퍼브 서비스 종료가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한국에서 전자책 기기와 컨텐츠가 아직 '충분히 편리하고 다양해지지 못한 덕분에' 서점사 등 여러 업체들이 안주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넷플릭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마존이 상당한 수준의 한국어 번역을 해내기 시작하는 순간 모두 문 닫을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정부는 익숙한 습관과 마인드를 버리지 못하고 예산은 예산대로 들면서 결론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이상한 일을 벌이고 있다. 류은주 기자, "정부 '2년내 한국판 넷플릭스 5개 만들겠다'", IT조선 (2020. 6. 22.) http://it.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19/2020061903219.html 언제쯤 우리는 "K-", "한국판", "토종" 이런 말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일단 5개를 만들겠다는 것부터가 '플랫폼 비즈니스'의 핵심에 '네트워크 효과'가 놓임을 간과하고 있다. 위 기사의 부제는 "2022년 국내 미디어 시장 10조, 콘텐츠 수출 16.2조 목표"인데, 이용자들이 왜 넷플릭스를 찾는지도 모르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부터 잘못 선택하고 있다.


  순진한 걸까. 아니면 이번에도 정말 한 몫씩 골고루+쏠쏠히 '해먹은' 뒤 사람들의 망각 속에 흐지부지하려는 걸까.


  다음 글들을 함께 참조...


  김은지 기자, "넷플릭스, 뉴미디어시장 장악… 체면 구긴 토종 미디어 초비상", 디지털타임스 (2020. 6. 17.)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20061802150931032001

  주성호 기자, "'한국판 유튜브' 키운다던 KT '두비두' 결국 접는다", 뉴스1 (2017. 4. 28.) https://www.news1.kr/articles/?2980354

  도안구 기자, "오픈소스 OS에 대한 티맥스의 한결같은 ‘토종’ 타령", 테크수다 (2018. 7. 4.) https://www.techsuda.com/archives/1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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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묵향 > [마이리뷰] 3월 1일의 밤

다시 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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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짤막하고, 술술 잘 읽히는 편이다. 책 초반부를 읽을 때 별 다섯 개를 매기고 시작하였는데, 한국사회에 대한 분석 부분이 지금 읽기에는 그리 와닿지 않고(소개된 연구들이 2012년 초판 1쇄 발행 당시로 보더라도 왠지 최신의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친절하게 소개하여 비교해볼 수 있게 해주시는 게 어딘가!), 뒤로 갈수록 해설서로서는 문장이 불친절해지는 것 같아 별 네 개로 마무리한다. 하지만 부르디외, 또 『구별짓기』에 관한 좋은 안내서임이 분명하고, 한국 학계에서 부르디외의 편향적 수용에 대한 홍성민 교수님의 비판에도 십분 공감한다. 아울러, 교수님 말씀처럼 한국판 『구별짓기』를 위하여, 부르디외에 대한 진지한 재전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2019. 8. 20. 발행된 6쇄까지 나와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대단한 일인 것 같다.


  부르디외를 잘 모르면서 그의 '상징자본'이니 '아비투스'니 하는 개념들이 다소 불명확하고, 또 한편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행동경제학을 파던 중에 칸트, 또 부르디외의 문제의식과 닿는 지점에 이르게 되어 논문과 책을 찾아 읽고 있는데... 벌써 20년이 지난 글이지만, 홍성민, "[인간과 사상] 부르디외", 사회비평 제25권 (2000)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006959이 부르디외 사상 전반의 얼개를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책 40쪽에 나오는 내용인데, 칸트의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은 프랑스어로는 Critique de la faculté de juger 또는 Critique du jugement로 옮긴다. 그리고 『구별짓기』의 프랑스어 부제가 다름 아닌 (La Distinction) Critique SOCIALE du jugement (강조는 인용자), 그러니까 칸트의 제목에 '사회적'을 수식어로 붙인 '판단의 사회적 비판'이다. 아무튼 한국에서는 부르디외가 주로, 미국에서 공부한 문화사회학자(소비사회학자)들을 통하여 단편적으로만 소비되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겠다.


[다만, 부르디외 식 구분에 따른 '중간계급' 내지 '프티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지식소비자 중에, '미국화로 인해 학문의 다양성이 죽고, 그것이 만악萬惡의 근원이다'라는 식의 주장을, 자신이 읽고 접한 구체적 학문적 근거에서가 아니라 어디선가 들은 남의 말을 토대로 과감하게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그 남들도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남의 말을 토대로...), 일부 진실이 없지는 않지만, 반드시 맞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분들은 동시에 '유럽 식 대안'으로 가야한다는 입장을 막연히 갖고 계신 경우가 또한 많고, 그것은 아마도 유럽 여러 나라들이 가진 사민주의적 전통과 그 연장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온건성'을 염두에 두신 것일 게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 꼼꼼히 따져보거나 깊이 숙고하지는 않은, 추상적 말씀이실 때가 많다는 것이 솔직한 인상이다. 그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미국은 전 세계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연구자와 이론을 게걸스럽게 흡수하고 있고, 특히 유럽의 논의라면 대개는 우리보다 훨씬 정치하게 꿰고 있으며('덕 중의 덕은 양덕'이라는 말도 있지만, 대학산업이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분야 중 하나이다 보니 연구자층이 워낙에 두텁고, 드넓은 미국 전체에서 찾으면 차원이 다른 덕후도 더 많을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다. 게다가 유럽 학자들이 우리나라보다는 결국 미국에 가서 자신의 이론을 프로모션하므로...), 그 밖에 다양한 경로로 받아들인 여러 나라의 논의가 그 자체로 미국 내에서의 다양성-혹은 제국-을 이룬다(그래서 차라리 비판을 한다면, 한국 연구자들이, 주로 미국, 그 중에서도 미국의 일부 경향만을 제한적으로 수입하였다고 비판함이 조금 더 정확한 것 같다. 그러나 인력과 자원의 한계로 미국에서 쏟아지는 논의들조차 온전히 따라가고, 소개하고, 때로는 돌아가는 판에 선수로 참여해 비판하고 한다는 것이 사실상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다. 우리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으려면, 맨날 세계 몇 위에도 못 들었냐고 욕하기 전에, 학자들이 교육과 행정, 심지어 입시에까지 들여야 하는 에너지를 잘 분배, 분산하여 누군가는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혜성같이 떠오른 싱가포르 난양공대(NTU) 같은 곳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운영방식이 우리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에 입시정책은 있어도 대학정책은 없고, 특히 각 대학의 자율성에 맡겨 스스로 경쟁력을 쌓을 수 있게 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부르디외가 세계적 학자가 된 것도 1980년대를 전후해 미국 대학을 자주 방문하면서부터였다. 그처럼 미국 대학들은 플레이어라기보다는 플랫폼처럼 되어있다(물론 분야에 따라 당연히 편차는 있다. 넘사벽으로 미국이 압도적인 분야들이 있지만, 그래도 구대륙이 여전히 우위를 가진 분야가 없지는 않다)어떤 이론과 주장이 지구적 단위에서 학문적 토론의 식탁에 논의거리로서 오르려면, 우선은 유수 저널에 영어로 논문이 등재되어야 한다. 부러운 일이지만 최근 세계사에서 영국, 미국이 연달아 헤게모니를 쥐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런 탑급 학회들이 미국에 근거를 둔 경우도 많고 미국 학자(전 세계에서 모여 미국에 자리 잡은 학자)들을 가장 비중 높은 구성원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학회들이 미국만의 학문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미국의 싱크탱크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저러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미국 인구는 전 세계의 4%밖에 안 되지만, 어떻게 나머지 96% 인구 중에서 똑똑한 인재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주저앉힐까'를 고민하고 있다. 에릭 슈미트가 위원장으로 있는, '인공지능에 관한 국가안보위원회(NSCAI)' 위원 중 한 분의 말씀에 따르면, '어쨌든 인공지능 개발도 사람 싸움이고, 미국의 가장 큰 전략적 목표는 중국이든, 러시아든, 인도든, 또 세계 어느 다른 나라에서든 제일 똑똑한 사람들을 모아 미국에서 활동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중국 상류층의 최대 인생목표는 사실 (미국 등으로의) '이민'이다]. 아무튼 백악관에서 나오는 인공지능 보고서들이 이분들을 거치는데, 개중에는 미국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국적 불문 미국 영주권을 줘야한다고 주장하는 분까지 있다고 한다(이민정책을 선택적으로 운용하자는 것이다). 그만큼 미국의 의사결정그룹 다수가 다양성을 전략적 가치로까지 생각하고 있는 판인데, '미국을 거친 이론은 무조건 다양하지 않다'고 하는, 20, 30년 전쯤부터 나오던 이야기를 만연히 반복하는 것은 편견의 산물일 수 있고, 아무튼 현실과 반드시 부합하지는 않는 것 같다.]


  책으로 돌아와, 문화 확산의 매체가 책이 다룬 프랑스 1970년대와는 현격히 달라진 마당에(질 리포베츠키 Gilles Lipovetsky의 표현에 따르면, 대중소비사회에서 이제 '과소비사회'로 넘어온 마당에, 책 172쪽), 부르디외의 이론이 오늘에까지 바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맥락에서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숨겨진 경로'를 찾아낸다"고 하는 문제의식과 방법론만은(최샛별, 2008),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데도 유효한 것 같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 성별, 세대, 직업, 지역, 경제력, 종교 등에 따른 한국적 아비투스가 너무나 복잡다단해졌기 때문에(책 43쪽에 정리된 '아비투스'의 개념적 활용 범위가 유용하다), 기존의 (계급/민족) 환원주의적 이론과는 다른 부르디외 식의 종합적 접근이 더 절실하다고 느낀다. '대중 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한 실증분석이라니!! 그런 점에서 책 46쪽 이하에 나오는 부르디외의 설문지는 무척 흥미롭다(예컨대, 아래 이미지와 같은 것들). 이전까지 부르디외를 문화이론가로서만 많이 접했지, 그의 실증연구방법론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저작들에도 관심이 간다. 책 103쪽 이하 '중간계급' 부분도 재미있게 읽었다.






  번역은 꽤 된 편인데도, 이상하게 한국에서 부르디외가 온전히 수용되거나 여전히 먹히지(?) 않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도 든다. 『구별짓기』 (하)권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셈인지? 이렇게 모으니 동문선 출판사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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