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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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언 고닉의 가벼운 에세이집을 읽고난 후 바로 마리 루티를 읽으면서 중간 틈틈이 펼쳐 휴식 삼아 읽은 건 김영하의 산문집이다. 그의 입을 빌려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전해 듣는 동안 왜 내가 다시 읽기 모드로 돌아섰는지 알 수 있었다. 고백삼아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혼을 할 수 없으리라 여기며 홀로 이혼하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넉넉한 생활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액수가 더 커질 테고 나이를 먹으면서 누리고픈 것들은 더 누릴 수 있을 테니 남편의 따뜻한 눈길 따위 받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여기면서 좋아하는 책을 넉넉하게 사서 쟁여두며 맛집을 돌아다니며 딸아이를 등교시키고난 후 홀로 시간을 보내곤 할 때 이혼을 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어떤 생활을 해나갈지 그곳에서 나는 어떤 인물로 생을 꾸려나갈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자주 상상하면서 시나리오를 써나가곤 했다. 더할나위 없이 불행해진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는 상상의 시나리오를 써나가면서 그냥 이렇게 살다 죽겠지_로 매번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이혼을 하고난 후 이게 정말 내게 벌어진 일인가 자문하기도. 나이가 들어 폐경 조짐이 보이고 노안이 오고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싶은 나날들이 쌓여갈 때 바라는 풍경이 있다면 직접 내 손으로 그걸 그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읽는다'는 비비언 고닉의 문장을 심장 한쪽에 새겨놓고 언어란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집이라는 고다르의 영화 속 대사를 따라 읊으면서 우리가 나눈 것들은 기껏 말뿐이고 말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면 그만이라는 그의 말이 떠오르면서 우리는 함께 했어도 언젠가는 파멸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겠구나 알았다.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말하면 사람들은 다 기겁할 것이다. 나 역시 장난으로 가볍게 대꾸를 했을 뿐이라고 여겼으니까. 비 오는 날 상상놀이를 이어가는 동안 어쩌면 나는 이렇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낯선 말들이 오고가는 틈바구니 사이로 내 혀와 내 팔다리가 쏟아내고픈 말을 다이렉트로 내뱉으면서도_ 그랬다.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들, 읽기라는 행위를 우습게 여기는 시선들, 책이 사라져가는 풍경들 사이로 어지간히 도망쳐보려고 했다. 얼마나 읽지 않았는지 그 시간을 헤아리는 건 나보다 내 친구들이 먼저였다. 분산된 신경들을 한데 억지로 모아 읽어봤자 의미를 헤아리려고 억지로 또 힘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닫고 읽기를 포기했다. 너무 당차게 말야. 도망쳐봤자구나 그걸 다시 알게 된 건 비비언 고닉을 읽으면서부터였다. 읽는 존재에 대한 광폭한 사랑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소년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건 내가 말로 한다고 해서 깨닫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반복 강박. 전남편이 내게 처음 사랑한다 고백을 하는 순간에도 네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는 내가 아니다, 네 판타지다, 하고 수없이 말을 해도 그걸 마주하지 않더니 나중에는 사기를 당했네, 속았네 투덜거려서 어리석구나 아무리 타이르며 말을 해줘도 막힌 귓구녕을 더 스스로 막더니만_ 소년 역시 보이는 행태가 너무 전남편과 똑같아 현기증이 살짝 느껴지기도 했는데 다정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을 해도 아니 난 달라, 나는 안 그래, 하며 눈도 코도 귀도 막더니만 결국 자기가 만든 판타지 속에 갇혀 허우적대다가 신경질을 때때로 낼 때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홀로 쌍욕을 하면서 불러들인 것도 아니건만 이 무슨 리바이벌을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허참.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비비언 고닉을 차분하게 읽어나가는 동안 나를 자신의 반쪽이라고 여긴 그들의 태도도 그저 학습된 것일뿐, 더 지혜로운 척 하지 않고 덜 오만했더라면 또 다른 결과를 맞이했을 수도 있을 터인데 하고 이내 아쉬움을 느끼는 건 혼자 앉아 반추하는 동안이다. 5월 마지막 날이다. 불러들이지도 않고 올 사람은 오고 가라고 온갖 욕설을 내뱉어도 가지 않을 이들은 가지 않고 그런 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라는 걸 알 것도. 무례하게 내 행복을 자신의 불행과 견주어 비웃는 이들은 내 친구가 아니다 싶어 그만 안색을 싹 바꾸고 말하고 말았다.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이혼해. 그렇게 궁상맞게 살지 말고, 라고. 말을 내뱉는 순간 아 썰리는 건가 싶었지만 할 말은 하고 살아가기로. 읽는 동안 버릴 책과 버리지 않을 책, 다정함을 유지하되 무례한 경우에는 여지 없이 그 얼굴에 침을 뱉는 걸 특기로 삼아야겠다고 다시 인류애를 되새겨버림. 그러니까 다시 읽는다고 하는 말을 뭐 이렇게 장황하게 해버렸을까.

"남자가 완전체 인생을 살 용기를 낼 수 있게끔 여자는 반쪽짜리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사회의 암묵적 협약은, 저 깊이 흐르는 불안이라는 관점을 통해 보자 별안간 이해가 되었다. 이런 불안 때문에, 우주에서 인간은 혼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더라도 제정신으로 그 주장을 밀고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의 고독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차별주의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인식이, 근원적 이유를 사유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우리 사이에서 득세하기 시작했다. "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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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5-31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줘서 정말 좋아요. 혹시라도 저한테는 침 뱉기 전에 한번만 반성하고 갱생 할 기회를 주세요.
 












나얼 노래와 벤슨 분 노래를 엇갈아 들으면서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 친구와 커피를 마시면서 나눈 대화를 떠올려보다가_ 기 빨려, 라는 표현을 쓰는 친구에게 말했다. 네가 말하는 선순환이라는 게 서로 좋은 기를 주고받는 걸 뜻하는 거잖아. 그런데 좋아하는 이들을 만나서 계속 기가 빨려, 그렇다면 그건 균형이 맞지 않다는 거야. 그러니까 봐봐. 뭔가 바뀌기를 원하고 변화를 원하는데 선순환도 같이 이루려고 하고 사람들을 만나 함께 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기가 빨려서 지치고 쉬이 나가떨어져. 몸이 버티지를 못해. 그렇다면 바꿔야 하는 거야.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는 그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거고. 안주와 변화. 그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추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걸 알고 있다. 이마 라인에서 싹이 돋듯 하얀 머리카락이 뽕뽕뽕 솟아있는 모습을 거울로 보면서 외모를 두 단계 정도 업그레이드시킵시다_라고 어제 친구가 한 말을 떠올려본다. 어떻게 업그레이드 시켜야 합니까? 물어보니 일단 수영을 시작합시다. 그래서 네, 알겠습니다_라고 답했다. 변화와 안주. 친구가 말했다. 영어단어를 하나 더 외우고 영어책을 읽는다고 해서 삶이 업그레이드 되는 건 아니잖아_라고. 친구의 대답을 듣고 말했다. 영어단어를 하나 더 외우고 영어책을 읽는다고 해서 삶이 업그레이드 되고 인간이 업그레이드 되고 이런 건 물론 아니지만 뭔가를 새롭게 하고 그 낯선 걸 내 걸로 만들 때 기분이 좋아지고 영어를 할 줄 아는 너와 영어를 못하는 너를 바라봤을 때 네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곧이어 말했다. 안주하느냐 아니면 다른 변화의 요인을 내 삶으로 끌어들여와서 새롭게 필드를 바꿀 것인가, 이건 네가 선택할 일이야. 나는 지금 네게 변화해야만 해, 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야. 너를 잘 들여다봐, 뭔가가 바뀌기를 원하는 거잖아, 한편 만족하는 것도 알아. 만족하고 안주하면 그대로 나이드는 거야, 지금 네가 마흔다섯이니까 백살까지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거야_라고 이야기하니 악담하는 거 같은데! 하고 버럭 하는 친구에게 말했다. 인생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안겨줘. 그중에서 어떤 걸 받아들일지 내칠지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 거고. 그래서 언니는 전남편을 내친 거고?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내 전남편이 나를 먼저 내친 거야. 절벽 아래로 밀었고 헤엄도 칠 줄 모르는데 나를 바닷속으로 내꽂았어. 물론 그게 그의 진심은 아니겠지만 그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나를 배신하는 일을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돈과 시간이 있고 다른 여인들의 유혹이 있으니 그에 넘어가는 걸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면 그런 사람을 믿고 어떻게 내 한평생을 함께 할 수 있겠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속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면 그건 습관이 되고 버릇이 되어서 죄책감을 지닐 수조차 없게 돼. 내가 그를 버리고난 후에야 그도 알게 된 거야. 모르고 내내 살아간다고 해도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진이랑 통화할 때 소개팅들은 다 어떻게 됐어? 할 거야? 물어봤다. 모두 다 거절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홍대앞에서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올라서 생각을 이어갔다. 만일 내가 그저 섹스만을 원한 거라면, 네 몸만을 원한 거라면 내가 지금 여기에서 손을 번쩍 들고 꽤 야한 옷을 입고 저랑 오늘밤 섹스하실 분 계실까요? 말하면 무척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 목선을 훔쳐보고 있는 저 잘생긴 청년과도 잘 수 있을 거 같은데_라는 생각을 하면서. 친구들 말이 그저 섹스만을 원하는 거라면 늦은 밤 클럽이나 술집에서 만나는 이들과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중년 여성들도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건너 건너 들었다. 언니 이야기를 듣고 물었다. 왜 그렇게 사는 건데 그 분들은? 그랬더니 호빠 가는 심정이랑 비슷한 거 아니겠는가? 다만 호빠를 가면 다정함과 몸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거고 돈이 없으면 없는대로 찰나의 다정함과 찰나의 섹스를 할 수 있는 거고. 그래서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언니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다정함이고 사랑인 건 알겠는데 물론 플러스 몸도_ 그보다는 민이와 딸기주스를 마시면서 각자 좋아하는 책을 펼쳐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했을 때 서로에게 보여주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아이를 외롭게 했을 수도 있다. 그 죄책감뿐만은 아니지만 만일 소개팅을 했다가 마음이 맞거나 눈이 맞거나 그러면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려. 그러니 거기에 다른 인연의 실이 더해서 꼬인다면 또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알 수 없으니까 일단은 내 계획을 먼저 실행하는 게 우선인듯_ 말하니 진이는 잘 생각했네, 라고 했다. 어떻게 얻은 평정심인데_ 라는 말은 통화 끝내고난 후 나 홀로 했다.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만한 사람이 내 일을 하고 있노라면 알아서 잘 오시겠지 싶었다. 지나가다가 민이 잠옷 하나 사고 예쁜 가디건 보여서 가디건도 샀다. 민이가 보더니 엄마, 그거 예뻐, 나도 입을래, 해서 응, 입어 했다. 내가 나의 뮤즈다_라는 프리다 칼로의 말을 어젯밤 잠들기 전에 다시 매만져봤다. 결국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이들고 싶고 그 나이든 모습이 추악해지지 않기를 원하는 거구나 알았다. 친구와 제대로 이야기해보지 못했지만 아줌마들의 좋은 면모와 아줌마들의 추악한 면모들이 있지 않나. 그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이 친구와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게 겹치는구나 그것도 깨달음. 왜 신이 이 녀석을 내게 보냈는지 알 거 같았다. 내 각진 면을 자꾸 녀석이 둥글게 만들어준다는 걸 깨달음. The idea of you_는 소설보다 영화가 훨씬 좋다. 물론 소설이 더 리얼에 가깝긴 하지만. 리얼과 판타지를 적절하게 짬뽕시킬 때 만족감이 극대화된다는 것도 알았고. 1년 전 오늘 딸아이와 서로의 뒷모습을 찍어준 게 기록에 떠올라 덧붙인다. 친구들에게 선물받은 책들도 함께. 불과 1년. 1년 동안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게 때로는 놀랍기도 하고. 1년 후에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나 스스로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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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5-29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얻은 평정심인데_ 라는 말은 통화 끝내고난 후 나 홀로 했다.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만한 사람이 내 일을 하고 있노라면 알아서 잘 오시겠지 싶었다.

인생의 참 지혜를 얻은 아름다운 여인.... 이 제 친구입니다.

수이 2024-05-31 17:01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건 좀 빼주시면....... 감사하겠나이다
 

몇 년 전 어느 유명한 비평가가 5년 전 출간된 이래 거들떠보지 않았던 책을 어쩌다 다시 펼쳐 읽고는 곧바로 글을 써서 올렸다. 그 비평가는 책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고, 출간 당시 자기가 그 책에 얼마나 무자비한 악평을 했는지에 또 경악했다고 했다. ˝그때는 틀림없이 내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그리고 술회했다. ˝확실히 수용적인 기분은 아니었다.˝
아, 수용성! 다른 말로는 준비된 상태라고도 한다. 책과 독자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는 말할 것도 없다- 이루어진 모든 성공적인 연결을 책임지는 건 인간의 신비 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수수께끼, 바로 감정적 준비다. 모든 생의 형태는 결정적으로 여기에 달려 있다. 훗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가 될 - 혹은 될 수도 있었을 - 인연을 우리가 반가이 맞이하거나 내칠 때 끼어드는 무작위성을 생각하면, 인생이란 우울하리만큼 우연과 정황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평생을 함께한 친구 사이나 연인끼리 ‘혹시라도 우리가 다른 때 만났더라면‘ 하는 생각에 몸서리치는 일은 또 얼마나 잦은가? 책과 독자의 관계도 똑같아서, 이제는 내밀한 인연을 맺은 책이라 해도 적당한 기분이 아닐 때 읽었더라면 자칫 열린 마음과 반가운 심장으로, 즉 준비된 상태로 조우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170-171)



‘감정적 준비‘ 라는 단어가 너무 적확해서 가만히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 오는 문장_ ‘모든 생의 형태는 결정적으로 여기에 달려 있다.‘ 이 한 문장을 읽기 위해서 나는 이 책을 읽었구나, 하고 알았다. 녹음하고난 후에 바로 제인 오스틴 문장을 마주했는데 거기에서 또 웃음보 터졌다. 아까 친구와 인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겹쳐지는 것들이 있어서 더 중얼거릴까 하다가 관뒀다. 오늘 구름은 정말 아름다워서 걷다가도 보고 책을 읽다가도 고개를 들어 보고 친구와 동생과 통화를 하면서도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마주하는데 나라고 해서 두렵지 않고 떨리지 않다면 어디 인간일까 싶지만 몸으로 부딪쳐 살아보기로 한 작정한 순간들_을 매듭으로 묶고 또 매듭으로 묶어놓았는지라. 오늘은 좀 춥더라. 아이스라떼는 에바였다. 하여 뜨끈한 카푸치노, 뜨끈한 라떼 맛집으로 순간이동하고픈 순간들도 잦았다. 책을 읽다 낯선 단어를 외우다가 문득 언니와 술잔을 기울이며 나눈 대화 한 조각이 떠올랐다. 제일 두려운 건 사랑의 좀비가 되는 일이야. 언니의 딕션은 정확히 그게 아니었는데 언니 말을 들으면서 나는 사랑의 좀비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사랑의 좀비가 된다는 건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언니와 나는 일견 다른 이들에게는 사랑의 좀비와 다를 바 없는 처량한 여자들, 사랑의 상실에 온몸을 내던진, 그런 어리석은 여자들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만 우리는 알고 있지. 우리의 결말이 어떻게 다다를지는. 하고 둘이 담배를 태우다가 미친듯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마가렛 애트우드가 말했던 문장을 떠올리면서 담배를 한대 더 태웠는데 그 역시 그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던 뜨거운 경험을 한 걸 테지 싶었다. 로빈 리를 다 읽고난 후 리뷰는 쓰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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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5-27 2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까악~~~~~~~~~~~~!! 이제 알라딘 TV 진출하시는 겁니까? 유튜브도요? 제가 구독과 좋아요!를 준비시키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수이 2024-05-29 08:59   좋아요 0 | URL
또 갑자기 삭제해버릴 수도 있는지라.........

단발머리 2024-05-27 2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근데.... 왜 로빈 리 리뷰는 안 쓰신다는 거에요? 저 광화문 나가서 시위라도 할까봐요. 가뜩이나 시위 많아 복잡하던데....
왜요, 왜 안 쓰신다는 겁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05-29 09:00   좋아요 0 | URL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요. 하지만 저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사랑도 하고 싶은 사람인지라 모순된 문장들이 많이 나올 거 같아 미리 쓰지 않기로.......

그레이스 2024-05-27 22: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받고 처음 몇페이지 읽었는데 쑤욱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어서 닫았습니다. 급하게 읽고 싶지 않아서요.

수이 2024-05-29 09:01   좋아요 1 | URL
펼치시면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쑤욱 빨려들어가시게 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애써서 미루고 미루면서 읽었어요. 저는 이 책으로 처음 비비언 고닉의 면모를 알게 되어 좋았어요. 다른 책들도 찾아 읽어보려고 해요.
 






오늘 아침 딸아이와 등교하기 전에 이야기, 아이는 어제 배운 가스라이팅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보통 가족과 연인 사이에서 가스라이팅이 흔히 행해진다는.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내가, 나 아니면 누가 너한테 이렇게 해줄 거 같아? 라는 말이 가스라이팅의 대표격인 발언들이라고 하면서. 선생님이 들려준 연인 케이스를 들려주면서. 딸아이는 볶음밥을 한 숟가락 그득 떠서 입 안에 넣고난 후 우물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엄마 내가 또 상상놀이를 해봤거든. 내 남자친구가 나에게 그렇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거지. 그럼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라고. 뭐라고 대답할 건데? 물었더니 아이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나는 내 길을 갈게, 넌 너의 길을 가, 그리고 세상에는 너 말고 남자들이 깔렸어. 나한테 가스라이팅 하는 남자새끼 따위 내 인생에 필요 없어_라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혼하고 싶은데 이혼을 하기 망설여진다는 한 친구도 떠올랐다. 내 인생에 또 남자가 어디 있겠어, 지금 내 남편 말고. 더구나 나는 이렇게 늙었잖아. 그래서 소주잔을 털어넣으며 남자는 깔리고 깔렸어, 다만 멋진 이들이 드물뿐, 이라고 말하니 다시 시작해야 하잖아, 이렇게 나이 들어서 또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서 꾸미고 감정소모하는 일 나는 싫어, 그 짓을 어떻게 또 다시 해, 라고. 감정 소모, 에너지 소모. 할 일이 많고 많아서 그런 짓을 하는 데 시간을 쓰고 돈을 쓰는 건 너무 안타깝다는. 논리의 맥락은 알겠는데 좋으면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싶다가 삶의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느냐 그 프레임에 모두 다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친구 말에 덧붙이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내가 참으면, 나 하나만 희생하면 되는_ 친구가 그렇게 말을 할 때는 솔직히 화를 내긴 냈다. 지금이 조선시대냐? 뭘 희생하고 말고 그래, 하나뿐인 네 인생이야. 네가 네 삶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걸 보고 네 자식 새끼들이 그걸 본받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인간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 영향을 받는다. 가족과 친구들. 그 모습을 보고 삶의 향방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니까 내 가족과 내 친구들이 나를 반영한다는 소리도 된다. 사랑으로 모든 것들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나는 아빠를 참 많이 사랑했다. 하지만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엄마를 많이도 사랑했다. 하지만 저렇게 어리석게 참고만 살지는 않을 거야, 난 모던 걸이니까, 라는 생각을 십대 시절부터 했다. 허나 말은 그렇게 잘도 떠들어댔으면서 나도 참고 살고 어리석게 행동하고 시간 따라 늘어가는 건 뱃살과 주름살과 더할나위없는 시니컬함이었다. 번개를 맞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없는 거 빼고 다 가진 여자처럼 다정하고 인류애 충만한 중산층 중년부인 역할을 하고 있을 거다. 왜 갈등이 시작되었는지는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가면을 쓰고 만족한 척, 다 가진 척 이런 역겨운 가면 놀이를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짜증이 치밀어오르곤 했다. 그렇게 혼자 있을 때 자주 묻곤 했으니까. 한참 갈등을 하고 있을 때 선택을 하게끔 도와준 문장 하나 덧붙이고 오늘을 시작한다. 비행기와 상자였다. 누가 한 말인지는 까먹었다. 비행기는 바람을 거슬러서 오고 가고 상자는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놓고 테이프를 붙여놓은 테두리에 불과할 뿐이다. 비행기는 바람을 거스른다는 말, 그렇게 그 동체가 오고간다는 말, 그렇다면 순응할 필요가 있겠는가 싶어 의문에 방점이 찍혔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네모난 상자는 내가 만든 세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곳인데 그저 테두리에 투명 스카치 테이프를 붙인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만일에 내가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겠다고 한다면? 나를 작은 새로 바라본 건 누구의 시선일까. 나를 온실 속의 화초로 만든 건 누구의 시선이고. 그런 것들을 헤아리는 동안 이미 선택이 행해지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나를 작은 새로 바라보고 자신의 새장 속에 가둬놓고 싶어했던 이들의 시선, 나를 온실 속의 화초로 여기고 자신의 온실에 나를 가둬놓고 싶어했던 이들의 시선. 비행기와 상자를 접하고 장자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혼자서 깊이 오열했던 순간들. 더 이상 이렇게 살기 싫어, 전남편과 산책을 하면서 마음 속 말을 내뱉었던 순간들. 나는 행복하지 않아, 너와 함께 있어도 이렇게 함께 걸어도 이제 행복하지 않아, 라고 담담하게 말했던 순간들. 솔렌과 솔렌의 딸 이자벨이 나누는 대화 속 그리고 솔렌의 독백에 밑줄을 그었다. 솔렌의 두 남자들, 전남편 다니엘과 현남친 헤이즈는 소설 안에서 내내 비교당한다. 솔렌의 시선으로. 이혼전문변호사가 남자가 이혼을 선택할 때와 여자가 이혼을 선택하는 순간들은 좀 다르다고 인터뷰하는 걸 보았다. 남자들은 대개 새로운 사랑이 생겨서 이혼을 하는 확률이 높고 여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인생길을 이 남자와 함께 걷고 싶지 않을 때 이혼을 택한다는. 물론 내가 이혼한 경우는 솔렌이 이혼을 한 케이스와 다르긴 하지만 이 사람은 더 이상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내 세계를 온전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함께 할 필요가 무어 있겠는가 싶은 순간들, 그 느낌들은 동일하다고 여긴다. 그저 달콤하기만 한 순간들은 생각보다 더 짧다. 그 이후를 함께 할 수 있을 때 그런 관계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 싶은 건 이미 여러 종류의 매체들을 통해 다져진 사랑이란 이데아에 사로잡혀버렸기에 하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이 사랑이 끝났구나_ 라는 걸 촉으로 먼저 알게 된 건 그가 이 말을 했을 때였다. 우리도 3년 지나면 별 거 없어_ 그러니까 정확히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이 사랑을 끝내겠다_라고 먼저 생각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3년이 지나면 그 도파민의 효력이 다 떨어져 서로를 돌 보듯 소 보듯 그렇게 다른 이들처럼 살아갈 거라고 한다면 나는 이 사랑은 시작하지 않는다. 왜? 이미 그런 건 지겨울 정도로 수없이 많이 해봤거든. 행복해지기 위해서 한 선택과 결정들. 헌데 그 멍청한 레퍼토리를 굳이 또 이 나이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싶은 건 그딴 게 아니니까. 그런 내 생각이 네게 가닿았던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지금은 담담하게 해본다. 솔렌과 헤이즈의 관계를 짚어나가는 동안 드는 생각들. 헤이즈는 끝없이 묻는다. 행복해? 라고 솔렌에게. 솔직히 이 대목들이 이 뻔한 장면들이 나를 매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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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4-05-27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좋아요 백번 누르고 가요 수이님..❤️‍🔥

수이 2024-05-27 19:06   좋아요 1 | URL
사랑둥이 은오님 사랑을 거부할 알라디너들이 몇이나 될까 싶은 순간 후훗
 

오랜 세월 늘 앉아왔던 의자에 앉은 나는, 중요한 깨달음이 임박했다는 예감과 기대감으로 갈라져 쉰 목소리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정신분석가에게 말했다.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알게 됐어요, 정말로 깨달았어요. 남자들이랑 맺은 관계가 그간 얼마나 기만으로 얼룩져 있었는지 말이에요.˝
정신분석가는 지치고 따분한 표정을 숨길 생각도 없이 대답했다.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알게 됐어요‘라는 말을 스스로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아세요? 이제야 비로소 처음 알게 된 것들을 언제 행동에 옮길 생각인가요?˝
나는 물끄러미 그 여자를 바라보았고, 그도 나를 빤히 보았다. 참 기구한 팔자네, 그날 생각했다. 뉴욕의 정신분석가로 살면서 오랜 세월 허구한 날 나 같은 피분석자들의 얘기를 들어줘야 하다니.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통찰 제조 공장들, 날마다 처음 이런저런 것들을 깨닫는 사람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깨달음에 기초해 행동하지 못한다. 그 순간 뭔가 사춘기의 반항심 같은 것이 내 안에서 폭발했다. 됐어, 다 집어치워, 마음속으로 외쳤다. 날 여기서 내보내달라고, 이 의자에서, 이 방에서, 이 삶에서 나가게 해줘. 못 하겠어, 도저히 못 하겠단 말이야.
얼마 후 나는 [이름 없는 주드 Jude the Obscure]를 다시 읽다 끔찍하고 형편없는 행동을 해놓고는 참담하게 부적절한 변명을 늘어놓는 수 브라이드헤드와 맞닥뜨렸고, 정신분석가 상담실에서 벌어진 바로 이 장면이 떠올랐다. ‘이 여자도 못하겠다 싶은 거지. 이 여자도, 그냥, 나가버리고 싶은 거야‘하는 생각이 들었고, 가엾은 수를 공감해줘야 할지 경멸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못 하겠다.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 나는 줄곧 토머스 하디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때문에 가슴 아파했다. 기나긴 세월 온갖 시련을 견디고 견뎌도 결국 무시무시한 패배로 끝나고 마는 그 비참한 운명에 이유가 있다면,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곅급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런 인물들 사이에서도 수 부라이드헤드는 누구보다 더 내 마음을 아프게 쥐어짰다. 내가 성장의 여러 단계를 거치는 사이에도 이 여자의 이야기는 변함없이 그 신화적 힘을 잃지 않았고, 희박한 승산에도 굴하지 않고 통합된 삶 비슷한 무언가를 이루려는 그의 투쟁(이라고 생각했다)을 지켜보던 나는 - 까마득히 오랜 시간에 걸쳐! - 기쁜 마음으로 그와 나를 동일시했다. 최근 그 책을 다시 읽었는데, 물론 주드와 수 두 사람 모두의 기념비적인 불행을 따라가는 동안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 답답해지는 건 여전했지만, 이번에 내가 가장 흥미롭게 주시한 건, 빅토리아시대의 위대한 소설가가 한 캐릭터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질병, 즉 의식에의 저항을 추적하는 그 천재적인 방식이었다. 피와 살을 지니고 구체적 현실로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그 캐릭터는 가히 사례 연구에 근접하는 듯 보였다. (216-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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