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모리슨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아 이건 메모해놓자 싶어 마이크를 꺼내갖고 와서 가슴에 달았다. 훈이 사진을 찾아달라고 해서 비공개로 돌려놓은 기록을 하나씩 보다가 불과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무척 낯선 과거 자신의 모습들을 마주하면서 좀 놀라웠다. 그러다가 또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이 뭘까 곰곰.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뭐였고 그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뭐였던가 싶어서 더불어 그렇게 유약한 정신으로 마주하는 동안 더 뻔뻔해지고 더 과감해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흙을 파고들어 머리를 어둠 속에 놓고 있노라면 마치 난처한 상황이 저절로 사라져 얼추 시간이 흐르고난 후에 머리를 들어올리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일상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고. 거기엔 모두 자신이 들어있는데 말이다. 왜 그걸 보지 못하는가 기이하기만 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저 말 못하고 생각 못하는 바보로 아는 건 대체 또 뭔지. 그게 언제나 매번 신기하고 신기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딸아이 베프가 좋아하는 과자라며 친구 줬는데 엄마도 좋아할 거 같아서 하나 더 샀어 하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 내게 내밀었다. 밤이 늦어 커피 말고 우유를 조금 유리잔에 따르고 포장을 뜯어 한입 크게 베어무니 역시 맛났다. 18년 전으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어. 어떻게 할래? 막둥이도 진이도 (정이는 그런 질문 한 적 없다) 그런 질문을 한 적 있다. 심지어 내 딸아이조차. 같은 선택을 하면 또 같은 인생길을 똑같이 반복하는 거고? 물어보니 막둥이도 진이도 크게 고개를 끄덕끄덕. 18년 전으로 돌아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하고 같은 결정을 하게 될 거다. 어제 영화를 보고 광화문 사거리에서 흡연자들이 담배를 태우는 한켠 공간에서 담배를 물면서 갑자기 그 질문이 또 떠올랐다. 한치 흔들림도 없이 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걸 안다. 내 환상이 내 현실로 이루어졌으니.
모이어스 폴 디는 세서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의 사랑은 너무 진하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이런 것인가요?
모리슨 너무 진하다, 맞아요. 아주 과도한 수준에 이를 수도 있어요.
모이어스 사랑이 너무 진해졌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모리슨 잘 몰라요. 정말이지, 잘 몰라요. 그게 심각한 문제예요. 우린 멈출 줄을 몰라요. 베이비 석스도 이렇게 묻지요. "넘칠 때는 언제이고 부족할 때는 언제인가?" 이것이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문제예요. 하지만 시도해봐야 해요. 시도해봐야 합니다. 해야 돼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빈곤해집니다. 마음이 빈곤해져요. 사랑이 없이 산다는 것은 재미도 없고 위험도 없어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삶이죠. 사랑은 살고 싶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삶을 당당한 것, 당당한 사건으로 만들어줍니다.
모이어스 그렇지만 선생님의 소설 속 사랑 이야기를 읽어보면 세상이 사랑을 파멸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이 세상 때문에 파멸의 운명을 맞게 되는 일 말이죠.
모리슨 저는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벼랑 끝에 세워놓으니까요. 낭떠러지에 가능한 한 가깝게 몰아갑니다. 어떤 재질의 인물들인지 보려는 거죠.
모이어스 [가장 푸른 눈]의 피콜라 브리드러브는 현대문학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푸른 눈을 원하는 소녀 말이죠. 소녀를 학대하는 사람은......
모리슨 전부 다죠.
모이어스 부모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미움받는 못생기고 촌스러운 외톨이. 그리고 마침내 광기에 빠집니다. 하지만 저는, 그 소설을 읽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 소녀를 기억합니다.
모리슨 아이는 이른바 주인 서사master narrative에 완전히 굴복한 거죠.
모이어스 어떤 서사요?
모리슨 주인 서사요. 어떤 것이 추한 것, 무가치한 것인지 혐오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생각 말입니다. 아이는 그 생각을 가족으로부터, 학교에서, 영화에서, 온갖 데서 받아들였습니다.
모이어스 주인 서사가 뭔가요? 인생이라는 것입니까?
모리슨 백인 남성의 인생입니다. 주인 서사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는 사상적 각본입니다. 주인의 이야기, 역사입니다. 특정한 관점을 갖고 있지요. 크리스마스선물로 받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물건이 작고 하얀 인형이라고 생각하는 소녀들이 있다면 바로 주인 서사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고 넌 그렇지 않다." 그래서 피콜라는 거기 굴복해버립니다. 이야기의 화자를 비롯한 소녀들은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하는데 약간 반항심이 있고 좀 당돌한 아이들이죠. 어떤 어른도 믿지 않아요. 피콜라는 가진 게 너무 없어요. 가진 게 전혀 없고 필요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완벽한 피해자가 됩니다. 철저한 연민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 피콜라가 공동체나 사회로 돌아올 방법은 없어요. 학대를 당한 아이로서 피콜라가 할 수 있는 것은 환상 속으로, 광기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에요. 우리 정신은 언제나 그런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거든요. 우리 스스로 상상해버려요. (4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