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느즈막히 먹고 빨래 다 널고 체조하고 있는데 친구에게서 연락옴. 맥락 없이 인연생기, 만 달랑 보낸 까닭이 궁금하지도 않고 인연생기,라 세상 모든 일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는 일이란 어떤 사람과 닿아 없던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마리아 포포바의 글을 읽을수록 닿게 되는 것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어떤 울타리를 짓고 어떤 이들과 함께 하느냐 이게 인생을 확확 뒤바뀌게 하기 때문이다. 이걸 처음 깨달은 건 모파상의 소설을 읽은 중3이었을 무렵이었고. 친구가 얼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가족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친구와 연인은 다르지 않은가, 우리가 그들을 선택하고 그들이 우리를 택하여 함께 한다는 것. 함께 하고 서로를 버린다는 것. 서로를 버리는 일에 일말의 후회와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한 채. 지금이야 뭐 그러려니 하지만 분노의 촉발점은 언제나 그 지점이었다는 걸 알았다. 이별 후 다시는 영영 보지 않을 거라 생각을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서로를 찾게 되는 그 관계들, 그러니까 그 가치들. 이거야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붓다가 하신 말씀이지만 봐라, 지금 너를 둘러싸고 있는 네 가족과 네 친구들과 네 적들과 네 사랑들은 이미 과거의 너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었으니 그들을 다음 생에도 다시 함께 마주할지 아니면 영영 마주하지 않을지는 과연 누가 결정하는가. 말하나마나 뻔한 소리지만 지금 나를 그토록 아프게 한 이들이었다면 전생에 내가 그들을 그만큼 아프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될 테고 지금 나를 그토록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내가 전생에 그들을 그토록 사랑하였던가 싶은.

어제는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 맞으며 얇게 입고 나가 바들바들 떨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봄이라면서 왜 이래, 투덜거리면서. 털조끼를 입고 나갔어야 했는데. 오늘은 날이 좋다. 얇게 입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도톰하게 입고 나갈 것인가. 브레디 코베의 영화 호평이 대단해서 언제 볼까 시간을 둘러보고 있다. 아이는 명료하게 긴 시간이 아니고 너무 많은 곳을 원하는 건 아니고, 말했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모르는 거란다. 아가. 사람 인생은 사람이 결정한단다, 라고 속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읽던 책에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언급되어 서가 한쪽에 꽂혀 있던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꺼내어 먼지를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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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3-13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먼드 윌리엄스, 저 책에 리뷰가 하나도 없더래요. 페이퍼는 수이님꺼 이거 하나~~
더 써 주세요! 🤪
 

내가 사랑한 이들은 모두 뿔을 달고 있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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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 컴북스 이론총서
이양수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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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와 문자가 동등하다고 여겼던 때. 이양수의 폴 리쾨르를 무람없이 읽고난 후 막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난 후 꽃샘추위에 벌벌 떨면서 했던 그 생각, 혀와 문자는 동등하다, 떠올랐다. 미세먼지 그득한 서울 하늘, 이야기들과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서 새로운 이야기들이 생성될 것이다. 삶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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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한별의 문장들을 읽다가 자꾸 멈칫거리는 순간들, 그러니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 첫 순간이 떠오르는데 그때가 딱 중학교를 졸업하고 막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이 시점이었던 걸로. 아침 운동 나가기 전에 오늘 아침 페이지들.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한다."


우리 엄마가 지옥을 표현할 때 하는 말과 흡사.

지옥과 천국 사이일지도 모른다. 싶은 건 에밀리 브론테가 잠깐 스쳤기 때문이지만.

열락의 고통이라는 표현이 인간의 온갖 감정들을 담아낼 수도 있는 거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까지 공통적으로 아우르려 할 때

고개가 저절로 옆으로 기우는 버릇은 아마 죽기 전까지 고쳐지지 않을 거 같다.


홍한별을 읽으면서 멈칫멈칫, 자꾸 생각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이런 에세이는 오랜만인지라 반갑고 또 반가운 마음뿐.

















이양수의 [폴 리쾨르]를 완독. 우연히 접한 책 [역사와 사회적 상상에 관한 대화]를 읽고 읽어봐야겠다, 싶어 그러니까 나는 코르넬리우스보다 자꾸 폴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 언젠가는 읽겠지 했다가 또 우연히. 이양수가 들려주는 [폴 리쾨르]는 무람없이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내주었다. 어제 친구와 공원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다들 미세먼지에도 불구하고 공원 벤치에서 너나없이 어울려 수다를 떠는 중년의 아줌마들을 생각없이 바라보다가 텍스트를 읽는 태도가 생을 살아가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걸 알았다. 같은 텍스트를 읽어도 모두 다 제각각. 굳이 어둠 속을 헤치고 들어가야 하는가. 물어볼 까닭이 없는 건 그 길을 선택하는 이는 자신이기 때문이다. 판단 유보를 잘 하는 엄격한 얼굴이 자신의 욕망 앞에서는 어떤 표정으로 바뀌는지 그걸 볼 수 있는 이는 그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바라보는 타자가 존재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천천히 읽어나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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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에 사람들이 좀비떼처럼 우수수수수 밖으로 쏟아지는 시간, 냉기가 옅어지고 온기가 사방팔방을 메꾸어나가기 시작할 무렵. 더 이상은 요거트를 만들지 않는다. 시중에 파는 요거트가 내가 만드는 요거트보다 갑절은 더 낫다는 사실을 알고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읽는 오늘 아침. 봄이다. 고관절에서 삐그덕거리는 음향을 들으면서 간단하게 체조를 하고 오늘을 시작한다. 인연은 소중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개별성을 지니고 있다. 서운함도 없고 허망함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 그것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영원히 지내기로 한 그 사람의 말을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내 안에서 그가 사라지는 게 아쉬워지지 않을 무렵 그러니까 우연히 마주해도 더 이상의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기가 끝이라는 걸 아니까. 거기에서부터 쓸 수 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이끼를 걷어내고 그 안에 무엇이 놓여져 있는지를 헤아리는 일이 내 일이라면. 오늘 그 사람은 이끼가 그득한 곳을 거닐었다. 살아간다는 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수백번 돌리는 것과 다르다. 인간의 몸이 행하는 것들, 나는 앞으로 그것만을 믿을 계획이다.거짓된 눈으로 모든 것들이 리얼하다고 믿어봤자 언젠가 그 믿음이 깨질 때 박살나는 것은 그 자신이다. 소소하게 일상을 살아가며 진실되다고 믿으나 어디에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명확한지는 그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아는 거고. 거짓을 호화롭게 만드는 것도 어쩌면 재능일지도. '삶'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동등하다. 그 무형의 것들과 그 잡히지 않는 것들을 '삶'으로 만드는 건 오직 스스로. 그리고 마주하는 이들이다. 마주하는 그 얼굴들과 그 몸들이 내 '삶'을 만든다는 걸 부인할 까닭은 없다. 뭔가 '다른 삶'을 바란다면 방법은 하나다.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내가 내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덕규칙에 따라 사는 삶을 가리키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기에게 충실한 삶을 전제한다. 윤리적 삶은 자기에게 좋은 삶, 적합한 삶을 가리킨다. 실존적인 삶은 때론 기존 관습이나 관행을 거스르는 삶을 가리키기도 한다.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이 기존 관습적 삶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자기에게 좋은 삶은 새로운 행동으로 보여 주고, 타인에게 그 행동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 행동에 대한 새로운 의미는 새로운 가치로 자리매김한다. 따라서 실존적인 삶은 자기 삶의 진정성을 찾는 삶이며,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기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으려는 노력이 실존인 것이다. 자기 진정성은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삶에서 찾아야 할 과업이다." (8)



"리쾨르 철학의 출발점은 살아 있는 자기 자신, 자기 인식이다. 자기 인식은 실존적 구조를 갖는다.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구분이 이 차이에 입각하고 있다. 존재론은 주체의 독특성을 탐구한다. 대상의 속성 또는 본질의 탐구는 형이상학의 몫이다. 따라서 실존은 존재론적 탐구로만 가능하다. 리쾨르도 이런 존재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체는 대상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 자기 몸은 타인에게 관찰 가능한 대상이기도 하지만, 몸의 '자기'는 타인의 관찰 대상이 아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느끼는 것, 살아 있을 때만 느끼는 것이다. 몸을 가능하게 하는 피와 살과 같은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살펴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의 확실성은 대상의 확실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 쇠렌 키르케로그는 말한다. "주체는 대상이 아니며 대상일 수 없다." 바로 자기 자신은 스스로 설명되어야 할 무엇이다." (18-19)



"인간 실존의 이해는 결국 인간 행위의 이해다. 이런 상호 반응은 특정 방식으로 의미를 얻게 된다. 중요한 점은 복잡하고 다양한 상호작용 속에서 드러나는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자기 말과 행위들은 하나의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하나의 전체로 나타난다. 그 전체성이 자기 정체의 일부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구체적 상황을 인식하고 상황을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관습과 주위 환경에 매몰되면 자기 자신은 상황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순응적인 자기 자신에는 독창적인 모습이 나타날 수 없다."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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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3-10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 리쾨르.... (이름도 어려움) 괜찮네요. 저도 읽어볼까 싶어요. 수이님 이 시리즈 좋아하시나 봐요. 저는 모르는 분들 많아서 맨날 패쑤했었는데. 가까이 지내봐야겠어요!

수이 2025-03-11 09:23   좋아요 1 | URL
슬렁슬렁 읽기 좋던데요. 단발님도 좋아하실듯, 폴 리쾨르, 이름 하나도 안 어려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