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을 갖고 싶어하는 건 엄마일까? 딸일까? 모든 걸 공유해야 한다는 건 딸의 입장이 아니라 엄마의 입장 아닌가. 모든 걸 알고 싶다_는 바람이겠지. 가스라이팅이 제일 잘 작동되는 건 가장 가까운 관계일 때_ 그러니까 부모자식이거나 부부 혹은 연인이거나 나는 널 정말 아껴, 나는 널 정말 사랑해, 라고 수시로 말하는 친구들이나 선후배 관계 정도 되지 않을까. 그 누구보다 너는 내가 제일 잘 알지. 나 이 말 정말 싫어하는데 이 말 들을 때는 좀 소름 돋는다. 그 비슷한 말도 그렇고. 넌 그렇고 그렇잖아. 내가 이제까지 널 봐와서 아는데 넌 좀 그렇더라. 아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들으면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아는데, 개나 줘, 그런 말은. 하고 저절로 속에서 나온다. 이제는 나이도 있고 관계성이라는 것도 생각을 해서 함부로 하지 않지만 속에서 그런 말이 시니컬하게 나올 때는 어쩔 수 없다. 물론 저는 개를 사랑합니다. 맥락상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아서 한 거임. 나는 따로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자꾸 나를 꼬드겨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렇게 하면 네 삶에 도움이 될 테고_ 그런 짓 하면 천벌 받아 큰일 난다, 이런 식의 말 싫다. 엄마는 대체 왜 그래? 라는 말은 얼마 전에 딸아이가 내게 한 말이다. 그러면서 내가 내게 무엇이 제일 좋을지 잘 아는 거 아닌가. 그냥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해서 미리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아이는 말했다. 사라 아메드를 읽고 있는데 사라 아메드의 신간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나올 뻔 하긴 했다, 아까. 엄마는 대체 왜 그래? 혹은 엄마는 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 물론 나도 안다. 왜 엄마가 내게 그렇게 이야기하는지를. 내가 딸아이에게 말을 할 때 조언이나 충고랍시고 하는 그 마음의 바탕이 어떠한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분노가 일어나는 건 어찌할 수 없지. 꼬드긴다고 넘어가는 게 바보 아닌가. 물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공들여 꼬드기는 마음을 함부로 내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나를 위해서 그런다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나도 모르게 실망이 배어나올 때 있다. 차라리 말을 나누지 말걸, 그런 이야기도. 내가 이혼을 한 수많은 까닭 중에 하나, 엑스가 내게 넌 항상 그렇고 그렇고 그렇잖아, 그 말을 참 듣기 싫어서 한 까닭도 있긴 하다. 가장 가까운 관계, 살도 섞고 몸도 나누었으니 영혼이야 말하나마나. 그래서 잘 안다는 그 착각 속에서 깃든 가스라이팅을 온전한 정신으로 당하면서 잘 살아왔다, 라고 스스로를 칭찬하기도 자주 한다. 하지만 엄마와는 이혼이 불가합니다. 엄마가 나를 가스라이팅한다고 해서 내내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내내 같이 살아가는 것도 아닌데 절연하는 것도 오바라고 생각하긴 한다. 가스라이팅이 심한 건 비단 우리 엄마 뿐만은 아닌 거 같던데, 딸한테 가스라이팅 당하는 엄마들도 많고.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새삼 깨달았다. 엄마와 사흘 내내 붙어 지내다가 아아아아아악 나도 모르게 비명 소리가 나오긴 했다, 내적인 육성으로. 지랄맞음을 꾸욱 눌러참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대체 왜 그래. 이 말은 쏙 빼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가 잘 아는데 왜 나한테 내가 하기 싫은 걸 내 삶에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을 하면서 마음대로 그걸 해라 저걸 해라, 그러는 거야? 대체 왜? 그래도 이렇게 지랄하고나면 엄마도 생각하겠지. 내 큰딸은 겁나게 착하다고 여겼는데 다 내 착각이었어. 가슴을 치면서. 말 없이 가만히 웃고 있으면 다 착하고 다 바보인 줄 알더라. 그게 더 바보 같지 않나. 엄마가 차 안에서 문득 물었다. 왜 이혼을 하겠다고 갑자기 그런 거니? 그 바탕 속에는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이 제일 크긴 했다. 내가 나를 이렇게 위하는 마음이 큰데 왜 내가 기껏 이렇게 대접 받고 살아가는건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발바닥의 때만도 못 여기는 그 마음이 이제는 마주하기조차 지겨워진 것도 있었다. 너는 내가 당하고 사니까 되게 만만해 보이지? 그러다가 내가 내 본색을 드러내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냐? 나는 여름부터 묻고 또 물어보았다. 뭔가 기회를 주긴 줘야겠다 싶어서. 그때는 뭐 끝이지, 네가 네 본색을 보이면. 그럼 내가 이제까지 당하고 산 것처럼 계속 당하면서 내 시커먼 머리가 파뿌리처럼 시들시들 새하얗게 변할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 물어보았다. 그럼 당하지 말고 살아. 라는 엑스의 대답도 도화선이 되기는 했다. 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는 거구나, 내 마음대로, 나 하고 싶은대로. 눈이 반짝반짝거리는 걸 보고 앗차 말을 잘못 한 건가, 엑스는 표정이 잠깐 굳기도 굳었지만 오래 함께 걷는 내내 남산 꼭대기까지 걸어올라가는 동안 나는 이제 당하지 않고 살고 싶다, 너는 너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고 나는 나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각자 살자, 한 번뿐인 인생 아니겠냐, 매미는 울어대고 너무 더워 헐떡대면서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엑스가 내 손을 처음 잡아주었던 그때를 아직까지 기억한다. 당신이 내 손을 놓기 전까지 저는 이 손을 놓지 않을게요_ 라고 짧은 연애를 했을 때에도 편지 속에 써넣었다. 수시로 이혼 이야기가 오고 가고 단 한 번도 나 스스로 먼저 이혼 이야기를 꺼낸 적 없이 이미 떠난 마음은 잡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이혼에 흔쾌히 응하면서도 아 두렵고 불안하긴 했다. 이혼 직전까지 번번이 갔다. 이혼도 해보았다. 다시 취하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올해 여름 여느 때처럼 산책을 하다가 문득 알았다. 내가 먼저 손을 놓아버리면 우리는 영영 끝나가는구나_ 이건 중의적이다. 이 손과 저 손이 달랐기에. 잠을 자지 못하고 미친년처럼 서울 거리를 매일 세 시간씩 걸으면서 이 손과 저 손 사이에서 나는 한참동안 말없이 방황을 하기도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왜 이혼을 하겠다고 갑자기 그런 거니? 엄마는 새삼 물어보았다. 언저리 이야기는 많이 한 거 같은데 엄마가 그런 식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너는 왜 이혼을 하겠다고 한 거니? 물어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내 인생이잖아. 그런데 옆에서 배 놔라, 감 놔라, 내가 그 소리 듣기 싫어하는 걸 알았지. 한 번뿐인 내 삶인데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나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은데 그런 소리 들으면서 참고 살아봤자 나한테 득 되는 게 아무것도 없던데. 엄마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잖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세세하게 아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것도 잘 모르잖아. 남편이랑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구나 그걸 알려준 사람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의 손을 잡고 싶지 않아졌고 그는 너무 일찍 내 손을 놓아버렸어. 설령 내 손을 잡고 있었다고 해도 그건 단순히 민이 엄마로서 그런 거고. 그러니까 나도 내 삶을 살아야 하잖아. 뭐 하러 허수아비 손을 잡고 살아가? 하긴 내가 이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도 처음에 간곡히 내 손을 잡으면서 말하긴 했다. 참고 살아라, 그게 여자 삶이다. 그때도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올뻔 하긴 했다. 세상이 지금 어느 시대인데 대체 엄마는 왜 그래? 라고. 수없이 울고 또 울면서 참아온 엄마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봐온 까닭도 있지만 뭐 내 삶이 엄마 삶이랑 또이또이 그렇게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지만 막상 그렇게 되고보니 아 나도 그냥 참고 살아야 하나, 친구들도 다 하나 같이 이혼을 간절하게 말리는데 했다가 어느 순간 아 하지 않으면 안될 순간이 오긴 오겠구나 광화문을 걷다가 알긴 했다. 불행해지고 가난해질까봐 이혼을 미루고 미루면서도 언젠가는 아 하겠구나 계시처럼 그런 생각이 들 적마다. 이혼을 하겠노라고 했더니 친한 친구들이 대차대조표를 써보라고 해서 대차대조표를 써보려고 노트를 꺼내 펼쳐들었다가 가운데 줄을 쫙 긋고난 후에 쓸 필요가 하나도 없구나 알았는데 가운데 줄을 긋자마자 이혼으로 인해 얻게 될 것들은 쓰기도 전에 쫘라라락 머릿속에서 두루마리 펼쳐지듯 목록이 나오는데 이혼을 하지 않고 결혼 생활을 지속할 경우 내가 얻게 될 것들은 나한테 플러스로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까지 내 다이어리 속 한 페이지는 가운데 줄만 달랑 그려져 있다. 무모한 것은 그 누구보다 나 스스로 가장 잘 알았다. 더 이상 잔인한 소리를 주고받지 않아도 되니 좋다 느낀다. 잔인하고 고드름보다 더 뾰족하고 차가운 말을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주고받다보니 마치 얼음 공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가 아직까지도 내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 아쉬워한다는 걸 오늘도 느꼈다.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겠지. 순간 울화가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내가 하고싶은대로 그렇게 살게 내버려뒀으면 좋았잖아. 왜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불행과 고통을 겪게 만들어, 소리를 지르면서 미친년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결국 그 달콤한 말에 넘어간 건 나였잖아. 내가 선택했고 내가 결정했잖아. 그걸 누구한테 덮어쓰게 하려고 하는 거냐, 더구나 엄마한테 그러면 나쁜 딸년이잖아. 사람들은 엄마는 두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고 놀라겠지만 그래도 되는 거라는 걸 안다. 나쁜 딸년_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도 다른 이들이 남몰래 귓속말을 주고받아도 어쩌겠는가. 그냥 생긴대로 사는 거야. 그걸로 족하기로 했다. 엑스에게는 그런 적 있다. 왜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불행과 고통을 겪게 하느냐. 대체 왜? 내가 이혼을 한 까닭은 또 있다. 나는 엑스와 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가 싫었다. 그런 식의 생의 태도를 내 걸로 삼고 싶지 않았다. 흔한 말로 내가 하면 연애요, 다른 이들이 하면 불륜이라는 걸 내 삶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당신의 세컨드가 되어도 괜찮아요, 라는 말을 듣고 좀 화가 나기도 했다. 나는 그냥 하나면 족하지 굳이 둘은 필요 없기에. 저는 에너지가 그렇게 남아도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님 손을 잡겠다고 한다면 일단 제가 이혼 좀 하고 올게요. 전 별로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거든요. 그랬더니 모랄리스트라며 웃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도 내가 모랄리스트인 줄 몰랐네, 에피큐리언인 줄 알고 그동안 오래 착각하면서 살아왔는데_ 대꾸했다. 사실 굳이 누구 말을 충고랍시고 들을 필요는 없다. 그런 순간들이 닥쳐온다. 살아가다보면. 말을 하고 페이지를 넘기다보니 알겠더라. 운전하고 있는 엄마 옆모습을 바라보고 또 말했다. 엄마, 나는 사랑이 하고 싶었어. 그래서 이혼한 거야. 라고.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살기 귀찮고 그런 거 번거로워서 그래서 심플해지고 싶어서 이혼한 거야.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