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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이즈 섹스? - 성과 충동의 존재론, 그리고 무의식 ㅣ 여이연이론 36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 김남이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21년 8월
평점 :
김남이의 번역으로 알렌카 주판치치의 [왓 이즈 섹스?]를 완독했다. 왓 이즈 섹스의 부제는 이러하다. 성과 충동의 존재론, 그리고 무의식. 자그마한 스크린 너머로 끝없이 여자들의 나체를 탐하면서 물결이 찰랑찰랑 넘치지 않을 정도의 도파민에 매일매일 중독되어있는 이들. 그건 대체 뭘까? 섹스가 가능한 이들이 있고 불가능한 이들이 있다고 중립선을 긋는 건 존재론적으로 불가하다. 마음만 먹으면 스타킹을 입은 다리 사진만 SNS에 올려놓아도 나랑 같이 자지 않을래요? 라는 디엠들이 쏟아져들어오니까. 우리 세대에 있어서 섹스는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야, 엄마, 라는 딸아이 말을 들어도 역시 주변을 둘러보면 섹스는 흔하기 그지 없다. 이미 초등학교때 성관계를 경험한 아이들도 있다고 하니까. 스터디카페 화장실에서 성관계를 하다가 다른 여학생에게 현장(?)이 발각되는 바람에 그 스터디카페는 한동안 폐쇄되었다. 하필이면 현장을 발견한 아이는 남학생의 전여친이었고. 존재의 중심에는 섹스가 존재한다. 관계의 중심에는 섹스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성충동. 알렌카 주판치치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불가능성"에 있는) 성으로 시작해서, 그것의 사건적 차원에 있는 사랑으로 끝맺었다. 만일 어떤 종류의 의미작용의 발명에 있을 자신의 동맹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를 그저 멀리 데리고 가지는 못할 수도 있는 그런 사랑 말이다. 여기에서 나는 멈추고 싶다. (269)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면 '먹버'다. 회의론에 시달리게 하고 함께 '먹버'가 가능하지 않다면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는 룰은 좀 어이가 없을 수도 있지만 어떤 깊이와 어떤 관계를 그 사이에서 찾기를 원하지 않는 표피에서만 활동하고 싶다면 이 룰은 또 여전히 이 세계에서 존재한다. 섹스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그에게 모든 사면권을 줘야 한다면 세상은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_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군, 앗. 대물이면 좋은 게 아무리 개쓰레기 짓을 해도 열이면 열, 여자들이 다 용서해줌, 이라는 댓글을 인스타에서 보았다. 언니의 유일한 약점은 이성애자라는 거야. 라는 친구의 말이 따옴표되어 겹쳐졌다. 아니 에르노 역시 개쓰레기 짓을 하는 자신의 엑스들을 얼마나 용서하고 용서하며 받아들이고 받아들였는가. 그런 의미에서 아니 에르노 역시 어쩔 수 없는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다만 그는 그 안에서 성찰했고 그것들을 문장으로 남기며 어떤 것들을 발견하고자 애썼고. 언니는 술자리에서 또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읽고 쓰는 여자들이랑 자고 싶어 안달하는 놈들이 꼭 있지.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신드롬에 걸려 꼭 받아주는 년들이 있고. 내 이야기하는 거야? 하고 버럭 했더니 내 이야기하는 건데! 버럭 하고 둘이 미친듯 웃고. 현상학과 맞물려서 그 느낌들 있잖아, 그것들을 문장으로 쓴 작가들은 남자가 대부분이잖아, 그걸 정확하게 캐치해서 정확한 문장들로 섹스에 대해서 말하는 여자들은 보지 못했어, 라는 말을 시차를 두고 소위 '읽는' 남자들에게 들으면서 그래서 그걸 나한테 써달라는 거니? 하고 속으로 되묻기도 했지만. 헤어진 그와 마지막으로 섹스를 하고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차 안에서 든 생각은 그거였다. 가능한 섹스와 불가능한 섹스.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 한 침대 위에서 몸을 뒹군다고 해도 그 사이에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거구나, 괴리감은 그래서 느껴지는 거고. 섹스를 가능하게 만들어준 사람이지만 동시에 불가능한 섹스를 향한 마음을 만들게 한. 너는 나를 멀리 데리고 가지는 못할 사람이구나, 라는 아쉬움이 든 건 물론 그런 기대를 애초에 품었던 스스로가 잘못한 거라는 생각도 더불어. 알렌카 주판치치는 '모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활동을 멈추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분석이라고 그는 말했지만 어쩌면 섹스에 있어서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문장일 수도, 라는 생각도. 섹스 (이야기)는 언제나 거의 비슷한 거 같지만 그 지점들은 항상 다르다. 다른 것들을 느끼게 만들어주고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내가 지닌 방향성을 확인하게끔 만들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섹스리스보다는 섹스를 추구하고. 표피에 머물러 그저 합일점을 먹고 버리는 행위에 빗대는 건 반대하는구나 역시 알았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네, 섹스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라는 대답은 못하겠다. 다만 읽는 동안 우연히 '당분간'의 마지막 섹스와 겹쳐 개인적으로 사유할 시간을 엄청 많이 가지게 되었다는 점, 그로 인해서 새로 알게 된 용어들이 많아졌다는 점 역시 감사하다. 수많은 섹스를 하는 이들과 수많은 섹스리스들 사이에서_ 왜 섹스가 중요한 게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어리둥절 반응과 섹스는 너무 더러워, 라는 강박증적 반응과 장미꽃잎이 드넓게 퍼진 하얀 침대보 위에서 (꼭) 사랑하는 사람과 광적인 섹스를 하는 것에 대한 환상을 가진 반응과 이 나이에 내가 섹스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겨우 섹스에 쩔쩔맬 거 같아, 라며 분노하고 당황스러워하는 반응과 뺨에 손바닥을 갖다대면 바로 번번이 무너져버리곤 하는 그 수동적인 반응과 좋은 섹스를 하고난 후 바로 버리고 뿌듯해하며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자랑하는 반응과 그 수많은 반응들 사이에서 알렌카 주판치치의 문장 하나로 마무리.
말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에게는 지금 작동하는 말들이 부족하다. (269)
그러니까
섹스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에게는 지금 작동하는 섹스들이 부족하다.
당신의 몸이 작동하는 지점은 딱 거기까지였던건가, 라는 회의감과 내 몸이 작동하는 지점 역시 딱 거기까지였던 거 아닌가, 라는 회의감은 가지지 않기로 했다. 올리비아 노래 듣는 동안. 그리고 솔직히 거짓말인 거 다 알면서도 속아준다는 걸 왜 모르는가, 물론 그 역시 사면권을 주는 거였지만. 아 더 이상은 안되겠다 이 새끼, 선을 넘었어, 라는 말이 저절로 말풍선으로 빚어지는 동안 어느덧 책 속의 구절들이 읽히고 있더라.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냉철하게 듣는 동안 가을 바람이 휙 불었고 다 잊기 전에 다 써놓자, 대신 사면권은 없어, 라고 말하고 나도 모르게 혀를 메롱 하고 내밀고 있더라. 왓 이즈 섹스? 에 대한 나만의 대답은 차곡차곡 정리해나가기로. 이 몸이 먼지가 되고 바람이 될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