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글은10월 8일 회계법인 KPMG뉴욕본사에 초청되어 연수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시카고 화이트 삭스 팀에 있는 이만수코치입니다.

남의 나라인 미국 땅에서 이렇게 많은 한국분들을 뵈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들 앞에서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내가 아직 너무 젊다고 생각했는데 작년에 애리조나에 있는 유학생이 저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극구 사양했지만 내가 벌써 그런 부탁 받을 나이가 되었나? 한참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자리도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과연 여기 계신 분들께 분야도 너무 다른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고민 많이 했습니다.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지도 모른다는 핑계를 대며 못올 것 같다고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팀이 2위를 하는 통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습니까???

제가 유명해서였거나 성공해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유명해서 라고 하기에는 저는 참 오래전 선수입니다. 요즈음 저보다 더 유명한 선수 너무 많지요.

그러면 성공해서 입니까? 성공했다고 하기에는 저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먼 사람입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도착한 이곳 미국에서 아직도 언어와 문화의 이질감 때문에 힘든 점이 많고 지도자로서도 초보단계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에 도달하기에는 앞이 깜깜할 때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왜 이 자리에 초대받았나?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이 나이까지 30년 넘도록 야구밖에 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긴 시간을 운동장에서 공을 던지고 치고받으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3번 바뀔 만큼 긴 시간을 야구를 해오면서 느끼고 얻은 것 중에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저도 여러분도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이기 때문에 공감가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저는 프로선수로 16년간 선수생활을 했고 이곳에서도 프로팀에서 6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82년도 삼성라이온즈 창단 멤버로 입단했을 때 구단주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저를 불러 “ 프로란 무엇이냐? “고 개인적으로 물어보셨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프로팀이 처음으로 생긴 때여서 프로가 되니 돈 많이 준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지 못하던 초창기시절이라 우물쭈물 하며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선수시절 내내 나에게 따라다닌 귀중한 질문이었습니다.


프로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교육이나 트레이닝이 요구되는 직업이나 경력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저 사람은 프로다” 할때는 그 일을 잘 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자주 씁니다.

저 사람은 노래솜씨가 프로야 , 축구실력이 프로야 , 심지어 고스톱도 프로야 할 때 쓰게 되지요.

이와 반대로 그 일에 숙달되지 못하고 잘하지 못할 때 “ 저는 아직 아마추어 수준입니다 “ 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프로와 아마추어를 돈이 생기냐 안생기냐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프로는 그 일에 익숙하고 그 일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맡은 일을 잘 해내기 위해서 재능도 필요하고 , 성실도 필요하고 , 인내도 필요하고 등등 여러가지 조건이 필요할껍니다.

저는 제 프로야구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 여러가지 조건 중에 가장 기본으로 꼽고 싶은 것이 있다면 < 고집과 섬세함 >이라고 하겠습니다.

고집이라고 하면 독불장군이나 내 것만 맞는다고 우기는 것이 먼저 떠오르시겠지만 내가 말하는 고집은 <기본에 대한 신뢰>를 말하는 겁니다.


요즈음은 팔방미인이 환영받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야구선수는 야구를 열심히 해야 하고 정치가는 정치를 열심히 해야 하고 음악가는 음악을 열심히 해야 하는 그런 < 고집 >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은 이렇게 해야 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하니까 나도 슬그머니 저렇게 해 버리는 경험을 사회생활 속에서 하게 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하는대로 하지 않으면 왕따가 될까봐 두려운 마음도 생기고 전통을 깬다는 눈총을 받고 싶지 않아서 기본을 져버리고 대세에 휩쓸릴 수밖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때로는 주변 사람들한테 “고집쟁이”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프로선수 생활을 하다보면 야구보다 야구외적인 일 때문에 에너지가 낭비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언제나 기본인 야구에 충실한 것이 우선이라는 < 고집 >을 가지고 16년간 선수생활을 해왔습니다.

프로 초창기에는 프로의식이 없는 선수들이 밤새워 술 마시고 다음날 경기에 술냄새 무지하게 풍기며 비몽사몽간에 경기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신문을 보니 프로야구 역사가 20년이 넘어가는 요즈음에도 심심찮게 선수들이 음주운전으로 경찰에 걸리는 것을 보면서 참 안타까운 마음이 많습니다.


운동선수의 기본은 뭡니까?

건강한 신체 , 건전한 정신이 경기력에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저의 경우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현역선수 시절동안 운동에 방해되는 것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

예를 들면 술 , 담배 , 잡기 등입니다.

“ 새나라의 어린이 “ 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정해진 시간에 자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에 신경을 썼습니다.

부상의 위험이 있는 어떤 스포츠종목도 취미로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시즌이 끝나 겨울이 되어서 가족들과 스키장에 해마다 가도 한번도 발목 부상의 위험이 있는 스키화를 신어보지 않았습니다.

운동선수의 < 기본을 지키고 싶은 고집 >입니다.

그런데 미국 메이저리그에 와보니 이미 선진야구에서는 모터 싸이클이나 스카이다이빙 등 부상의 위험이 있는 여가 활동은 문서로도 금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메이저리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국선수들까지도 몸값이 끝 간 데 없이 올라가서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줄 정도입니다.

그런데 선수들이 금쪽같은 몸을 보호한다고 BMW , 벤츠는 타면서 운동선수가 지켜야할 기본을 지키지 않는다면 뭔가 한참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기본에 대한 고집 >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유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진학한 중학교에는 유도부가 없어서 운동을 좋아하던 나를 아버지께서 야구부에 밀어 넣으셨습니다.

국민학교때부터 야구를 하던 친구들 틈에 끼어서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물주전자 심부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좋은 체격에 성실한 훈련 태도 덕분에 경기출장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자 코피를 흘려가며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따라다니는 많은 별명 가운데 “ 연습 벌레 “ “ 독종 “ 도 있었습니다.

저는 중고등학교부터 시작해서 대학교까지 11년간을 거의 4시간 이상 자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연습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도 칭찬 들어본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이곳에서 메이저리그 지도자들을 보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선수들의 단점을 고쳐주기보다는 장점을 개발하고 격려해서 단점을 묻히게 하는 지도 스타일입니다.

나는 현역시절 단점을 고치기 위해 밤을 새우며 연습하던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효과적이지 못한 때가 훨씬 많았다는 것이 지금 와서의 생각입니다.

우리 팀에 카를로스 리라는 파나마 선수가 있습니다.

야구인인 내가 보기에도 수비솜씨가 너무 엉망이라 저 선수 메이저리거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를로스 리 선수에게는 뛰어난 방망이 솜씨가 있었기 때문에 엉성한 수비를 탓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 반쪽선수 “ 라는 불명예가 달릴 법 한데 이곳에서는 그 선수의 방망이 솜씨를 계속 믿어주고 밀어주니 메이저 5년차인 지금은 가끔이지만 그림같은 수비를 펼치기도 하며 약점이었던 수비솜씨가 날로 좋아지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칭찬받고 자라지 못했던 제 기억을 생각하며 제 아이들에게는 구체적인 칭찬을 자주 해주며 키웠습니다.

대학교 2학년 , 고등학교 2학년인 두 아들들은 아직도 아빠에게 뽀뽀하고 , 여자친구 이야기까지 자세히 상담하는 착한 아이들로 자랐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가장 자주 해주는 말은 “ 아빠는 너를 믿는다 “

“ 아빠는 너를 사랑한다“ 입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힘든 사춘기를 말썽한번 부리지 않고 건강하고 명랑하게 커 주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 기본에 대한 고집 >외에 제가 < 섬세함 >을 중요한 부분으로 들었는데요.

우락부락한 운동선수에게 무슨 < 섬세함 >이 필요한지 뜻밖이라는 분이 많을 겁니다.

저는 < 섬세함 >의 반대가 대강대강 , 대충대충 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겨야 하는 기본이 지켜지지 않고 대충대충하면 삼풍백화점이 되고 성수대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분야의 사람은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스포츠로 정상에 선 사람들을 보면 섬세함이 필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축구의 차범근 감독 , 탁구의 양영자 선수 , 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박찬호나 김병현 선수도 대단히 섬세한 친구들입니다.

박찬호 선수나 김병현 선수는 개인적으로도 자주 만날 기회가 있는데 화려한 것 같아 보이는 박찬호 선수나 괴짜 같아 보이는 김병현 선수가 야구에 관해서 만큼은 대충대충이 없는 꼼꼼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겠습니까?

생긴 것은 동네아저씨처럼 털털하게 생겼지만 제 일에 관해서는 보기와는 다르게 무척 섬세한 편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쓰기 시작한 야구일지는 30년이 다된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날의 경기상황 , 느낀 점 , 보완해야 할 점 기록하고 경기 외에 일상적인 생활에서 느낀 감정들도 자세히 적습니다.

인터뷰 시간이나 경기장 도착시간 , 야구 장비나 도구의 준비 , 어웨이 경기시 준비물 등 야구에 관련된 것은 작은 것 하나라도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저희가족은 여행을 자주 가는데 아내가 짐을 챙기면 여행지에 가서 잊어버리고 온 것이 한두 개는 꼭 있지만 제가 챙기는 날은 100% 라고 늘 아내가 탄복을 합니다.

내 직업인 야구를 하면서 얻게 된 꼼꼼함이 이럴 때 빛을 내기도 합니다.


야구는 다른 어느 종목보다 섬세함이 요구되는 스포츠입니다.

점과 점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도 필요하고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0.03초만에 타자 앞에 도달하기 때문에 순발력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관전의 재미가 큰 경기입니다.

세계적으로 축구만큼 널리 퍼져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중국이나 유럽 쪽에서 붐을 일으킨다면 지금보다 더 활성화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메이저리그를 접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중에 하나가 한국야구와 미국야구의 차이점이 뭐냐는 겁니다.

양쪽 나라의 야구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한국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관리야구 체제이며 미국은 자율야구입니다.

한국에서 한동안 자율야구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꽉 짜여진 스케줄을 느슨하게 풀고 선수들에게 자유를 많이 주는 것으로는 자율야구를 정착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늘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관리야구 체제에서는 복종만이 살길이라는 것이 몸에 배어있었고 또 주어진 자유 뒤에 숨어있는 엄청난 책임감을 선수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20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야구는 자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교육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구단에서 선수단 운영을 할 때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해 줍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시즌과 비시즌이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제가 현역선수 시절에는 성적이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가을 마무리 훈련이라는 명목아래 페넌트레이스 내내 쌓인 피로를 풀 사이도 없이 운동장에 불려 나옵니다.

몇 주 쉬고나면 동계훈련이 기다립니다.

추운 한국에서 동계 훈련이 끝나면 따뜻한 곳으로 전지훈련을 한달에서 두달가량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미국은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가 마치면 바로 그날로 바이 바이 하고 손 흔들고 각자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탑니다.

그런 후 4달이 넘는 동안 철저한 자유가 보장됩니다.

그 다음해 2월 중순에 만나게 되면 비시즌 동안 시즌을 위한 체력준비가 완전히 다 된 것으로 간주하고 바로 실전에 들어갑니다.

두달 가까운 전지훈련 동안 쉬는 날이 딱 하루밖에 없는 강행군이지만 탈락되는 선수가 없습니다.

4달간의 자유 속에서 각자 알아서 체력관리를 한 결과일겁니다.

제가 현역일 때는 12월 한달 쉬는 동안에도 헬스클럽에 출석부를 만들어 놓고 매일 도장 찍어가며 감시 아닌 감시를 당했지만 정작 실전에 들어가면 힘들어하는 선수가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을 줄로 알지만 구단에서 선수들을 믿고 자율적인 휴가를 충분히 줄 수 있도록 선수들이 먼저 프로의식을 가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우리나라는 비싼 외화를 들여 해외전지훈련에 오면 3일 내지 4일 훈련 하루 휴식의 일정으로 스케줄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스프링 트레이닝 두달 중에 단 하루밖에 휴식이 없고 34게임 시범경기를 치러내는 강인한 체력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메이저리거들의 당연한 책임입니다.

운동장 밖으로 나가면 일체의 개인사생활이 자유스럽게 보장되지만 내가 겪어본 메이저리거들은 공인으로서의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해서인지 도에 넘치는 음주나 외박은 거의 없는 편입니다.

또 가족들이 언제든지 어웨이 경기를 따라올 수 있도록 구단에서 배려해 주기 때문에 아내나 애인들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프로 초창기에 어웨이 경기 갔을 때 밤마다 점호를 하고 코치들이 로비에서 12시까지 못 나가도록 보초를 서기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메이저리거들은 평생 쓸 부와 엄청난 명예를 쥘 수 있는 기회 앞에서 누가 뭐라고 간섭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자신을 관리합니다.

구단에서 관리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하거던요.

우리나라도 이제 몸값이 많이 올라갔다고 들었습니다.

이 좋은 기회 앞에서 선수들이 스스로 < 자기 일에 대한 고집과 꼼꼼함 >으로 자신을 관리 한다면 더 이상 구단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선수들의 장점은 뭘까요?

열심히 하고 예의 바르다는 소리를 제일 많이 듣습니다.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팀에 최대한 협조 합니다.

이곳에서는 야구보다 가족들 일이 우선일 때가 허다해서 제가 깜짝 놀란 때가 많았습니다.

삭스팀 제리 감독은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식 한다고 중요한 상황에서 3일간 빠지고 어떤 선수는 아내가 4번째 아이 출산한다고 2일씩 빠지고 외삼촌 돌아 가셨다고 3일 빠지고 외할머니 돌아 가셨다고 3일 빠지는 등등…………

부모 임종도 못보고 검은 리본으로 슬픔을 대신하며 경기에 나서는 한국선수들을 보면서 운동을 한 나에게는 황당한 이유로 밖에 안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20년이 넘는 야구의 역사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야구인으로써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활성화되는 길을 생각해봅니다.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야구 경기를 보여주는 것 외에도 야구장 시설로, 팬서비스로 , 이벤트로 , 심지어는 먹거리로도 관중들을 열심히 불러 모으고 있는 이곳 메이저 리그의 야구가 국민들의 건전한 여가 선용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을 보면 부러움을 느낍니다.

이제는 우리도 구장이 크든 작든 , 구장에 뚜껑이 있든 없든 팬과 선수가 함께 즐거울 수 있고, 그리고 구단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들이 야구단을 통하여 자신들이 추구하는 기업이미지를 잘 홍보할 수 있는 ( 우승만이 기업이미지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마인드가 있어야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야구는 야구단운영만으로 이익을 만드는 진정한 프로스포츠단 운영이 어려웠기 때문에 미국 시스템을 그대로 따라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프로야구실정에 맞는 좋은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것이 프로야구 1세대들의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구단만 노력해서 될 일도 아니고 선수만 잘 해서 되는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 나가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는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출발이 지역 연고 출신선수로 시작되다니 야구의 내용이나 특징보다는 내 지역선수에 대한 애착이 앞섰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앞으로 야구단이 발전하고 팬들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크게는 구단을 응원하고 작게는 선수를 응원하는 팬들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떤 구단이 어느 지역선수와 코칭스텝으로 구성하든지 간에 그 구단이 지향하는 목표나 팀 색깔이 팬들의 마음에 든다면 그 구단자체를 응원하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선수가 있다면 그 선수가 어느 팀에서 뛰든지 그 선수의 팬이 되어서 그 선수가 속한 구단을 응원 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나라 보다 야구 역사가 훨씬 오래된 미국의 분위기입니다.

( 미국과 우리나라 야구는 출발도 다르고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다른 점이 많아서 꼭 어느 쪽이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


저를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선수말년에 고생 좀 했습니다.

새로 바뀐 감독이 수십년을 해오던 나의 포지션이던 포수자리에서 1루수로 바꾸며 출장 기회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야구를 하면서 팬들에게 , 내 자신에게 한 약속이 현역선수 40세까지였습니다.

무조건 오래하고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조로 현상이 판치는 한국 야구계에서 선수 정년을 높이고 선수도 직업인으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선수 수명이 길었으면 하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아까 말씀드렸던대로 야구선수로서 야구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열심히 하는 < 기본에 대한 고집 >과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 섬세한 부분 >까지 꼼꼼히 챙겨서 뒤에 야구를 하게 될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열심히 내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래도 3관왕 , 홈런왕이 무색할 만큼 한 경기에서 한타석 정도의 차례가 돌아오는 벤치 생활은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힘들었습니다.

관중들이 이만수 이만수를 부르면 경기에 승패가 걸려있지도 않는 중요하지 않는 순간에 마지못해 대타로 내보내주면 방망이를 들고 걸어 나갈 때의 심정은 말로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은퇴 3년전쯤 우리 팀의 단장이 나를 불러서 2년동안 미국야구연수를 권했는데 사람들은 너무 좋은 기회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30살만 넘으면 노장소리 듣고 35살 되면 완전히 퇴물취급 당하는 이런 풍토는 계속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야구를 참 좋아했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는다는 고집으로 나머지 3년을 벤치에서 잘 보냈습니다.

그 덕분에 스타선수가 절대로 알 수없는 후보선수들의 고충도 알았고 경기를 지켜보면서 직접 시합하는 것과는 다른 경기의 흐름을 읽는 것도 배웠습니다.

우스운 이야기는 내가 한참 시합 뛸 때 공수 교대 하면서 벤치에 들어와 시원한 음료수를 찾으면 없을 때가 자주 있어서 의아 했는데 내가 벤치에 앉아 있어보니 후보선수들이 할일은 벤치에서 음료수 먹는 것뿐입디다.


나는 40살까지의 현역선수 생활이란 약속을 이루고 미국으로 선진야구를 배우러 왔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낯선 곳에 이 나이에 공부하러 오는 것이 맞나? 하는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길로 가라는 가족과 팬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현역 선수는 아니지만 지도자로서의 훈련도 역시 < 기본에 대한 고집과 섬세함 >이 필요하더군요.

나에게 주어진 일은 야구이고 야구에서 만큼은 기본을 철저히 지키고 대충하는 일이 없도록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누구보다 제일먼저 야구장에 도착해서 개인체력 훈련과 훈련일기를 쓴 것이 벌써 4년째가 되다보니 팀전체가 만수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라고 말해줍니다.

4년간의 홈경기중 작년에 단 하루 박찬호선수와 점심을 같이하고 오던중 길을 잃어버려 찬호도 나도 지각을 했는데 팀에서 무슨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늦게 올 사람이 절대 아니라며 걱정을 하고 이곳저곳으로 연락을 하고 야단이 났습니다.

메이저 일정 162경기는 미국 전역을 이곳저곳 날아다니며 해야 하기 때문에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바쁘고 빡빡합니다.

짧은 영어로 이 스케줄을 놓치지 않고 따라 하려면 꼼꼼함은 필수입니다.


미국생활은 정말 멘 땅에 헤딩하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것이 이렇게 힘들 줄 상상도 못했지만 그래도 말년의 벤치생활 보다는 낫습디다.

아들뻘인 새파란 선수가 뒤통수를 건드리며 내 이름을 부를 때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고 , 팀 내에 고약한 코치 한명이 마늘냄새 난다고 노골적으로 놀리면 보따리를 싸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내나라가 아니라서 그러려니 하면서 마음을 다 잡으며 한해 한해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보고 배운 것들은 훗날 지도자가 되면 쓰이게 될 귀중한 자료기 때문에 열심히 컴퓨터에 저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앞으로 이곳에 더 남아있게 될지 한국에 돌아갈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어느 곳에 있던지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고집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저와는 무척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계시지만 제가 바라기는 여러분께 주어진 일에 대해 < 기본에 대한 고집과 섬세함 >으로 여러분 분야에서 진정한 프로가 되시기를 바라며,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이 속해있는 분야가 한단계 UP GRADE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이만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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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헬퍼 2004-09-0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만수 제가 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무작정 지나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가져가서 읽고 싶어서요. 인사도 없이 무례하지만 이해해 주시길...다음에 정식으로...고맙습니다. 추천 먼저 누르고...

sayonara 2004-09-09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력과 기본의 중요성, 다 아는 내용이지만 언제 들어도 가슴 찡하죠.
저는 메이저리그에 화려하게 데뷔했다가, 몇년동안 부진으로 온갖 수모를 당하며 여러 팀들을 전전하다 최근에 다시 부활한 노모 히데오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가 동양인 메이저리거 첫선수죠.
 
트로이 일반판
볼프강 피터슨 감독, 브래드 피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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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는 예상외로 간결한 줄거리의 이해하기 쉬운 영화다. 고대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일리어드’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답지 않게 복잡한 복선이나 깊이있는 갈등관계 없이 몇몇의 꽃미남들이 줄거리를 이어간다.

게다가 엄청난 제작비를 들였다는 전투씬은 준비와 행진에 대부분의 시간을 들이고 나서 막상 결투가 벌어지면 금새 끝나버리고 만다. CG로 완성시킨 5만의 대군과 수백척의 함선들은 화려하다가 보다는 너무 그래픽 티가 날 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재미는 브래드 피트와 에릭 바나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킬레스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는 얼굴을 찌그러뜨리고 슬퍼하는 장면조차 멋지다.(예전 ‘기을의 전설’에서도 죽은 동생의 무덤에서 비슷한 표정으로 운다. 그때는 너무 과장되서 웃기다고 생각했던 표정이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너무 멋지기만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멋있는 브래드 피트보다 헥토르역을 맡은 에릭 바나가 더 눈에 띄었다. 호주에서는 코믹배우로 유명한 에릭 바나지만, 이 작품에서는 ‘트로이’의 기둥이가 듬직한 아들과 형, 진정한 전사의 역할을 너무나 멋지게 표현해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킬레스와 헥토르, 둘의 대결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동시에 헐리우드 사극 최고의 대결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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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부스 - 할인행사
조엘 슈마허 감독, 콜린 파렐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이렇게 간결하고 담백하면서도 재미있고 교훈적인 작품이 또 있을까?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영화 속 이야기에 깊이 몰입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좋은 각본과 좋은 배우들만 있으면 그럴듯한 액션이나 특수효과 없이도 이토록 강렬한 긴장감과 재미가 응축된 작품을 찍을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든다.

주인공 콜린 페럴은 물론이고 경찰역의 포레스트 휘태커, 저격수 역을 맡은 키퍼 서덜랜드 등 등장인물들의 연기도 최고였고, 길지 않는 80분의 러닝타임이었지만 두세시간의 영화들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배트맨’의 속편이나 존 그리셤의 스릴러같은 그저그런 작품들을 찍어왔던 조엘 슈마허는 완벽한 각본을 정말 멋지게 영화화했다. 아마 원래 이 작품을 감독하려 했다는 히치콕 감독이었더라도 이보다 더 완벽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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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4-09-1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렇게 완벽한 영화가 또 있을까요?! 주연자리에 멜 깁슨, 윌 스미스 등이 물망에 올랐지만 주연배우에 대한 과도한 비중(거의 원맨쇼잖아요)에 대한 부담감으로 고사했다고 합니다. 그걸 멋모르는 철부지배우 콜린 페럴리 도전해서 완벽하게 해냈죠.
알 파치노와 찍은 '리크루트', 경찰드라마의 영화버전 'SWAT' 등 콜린 페럴이 돋보이지 않은 작품이 없습니다.

icaru 2004-12-08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전 끝판에서 맥빠졌더랬어요...

sayonara 2004-12-08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끝부분이 좀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80분동안 놀라운 긴장감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만으로도 기억에 남습니다.

스릴러의 완벽한 끝맺음은 정말 어려운가 봅니다. 만화 '몬스터'도 끝부분이 좀 평범했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 - [할인행사]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 시드니 포이티어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요즘 활동중인 덴젤 워싱턴을 떠올리게 하는 배우 시드니 포이티어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잘생긴 외모와 지적인 태도, 자신만만한 언행은 오히려 백인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남편감이 흑인이기 때문에 집안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지만 결국은 양가의 부모들이 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딸의 아버지 맷이 마지막에 인종의 화합과 남녀의 사랑에 대해서 장황하게 연설하는 부분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아쉬움에 한숨이 나온다.
대부분의 흑인들은 영화 속의 존처럼 똑똑하고 교양있는 엘리트가 아니고, 또한 많은 백인 부모들이 짧은 고민끝에 딸의 행복을 빌어줄 정도로 마음이 열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둘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은 백인들뿐만이 아니다. 흑인하녀와 존의 아버지도 둘의 결혼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 흑인하녀는 뺀질뺀질한 젊은이에 대한 편견때문이지만 아버지는 둘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험난할지 알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의 시각이 영화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생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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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레인이의 중국이야기 13
- 눈물의 오징어볶음

2003.09.25.목요일
딴지관광청

나는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한다. 아니, 만드는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내가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내가 만드는 요리가 제법 그럴싸한 맛을 낸다는 거다. 난 나의 음식을 먹어 줄 사람들을 생각하며 즐겁게 시장을 보고, '한 그릇 더!' 라고 말 할 사람들을 떠 올리며 밥을 짓고, '정말 맛있었어.' 라고 부른 배를 기분 좋게 두드릴 사람들을 상상하며 요리하니까...

그러니까... 내 음식은 맛이 없을 수가 없는 거다.

중국에서 난 꽤 자주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초대했다. 타국 생활이란 게 원래 그런 거겠지만 한국과는 다른 야채와 양념들로 우리 입에 맞는 맛을 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특히 혼자 먹는 밥. 이게 정말 고역이라 멸치볶음, 김치찌개 하나를 하더래도 이사람 저사람 불러모아 함께 먹는 게 습관처럼 된 거다.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혼자서 밥을 먹고 있노라면 맛은 커녕 지금 내가 밥을 먹는 건지, 죽지 않을려고 무의식적으로 숟가락을 입에 가져다 넣는 건지... 밥을 먹는 게 일종의 살아가기 위한 행위 정도 밖에는 의미를 갖지 않는 것 같아 스스로 처량해질 때가 많은데 여럿이 함께 모여 밥을 먹으면 맛도 맛이지만 제대로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우리 집엔 꽤 많은 한국 양념들과 이곳 저곳에서 구한 야채, 그리고 조선족 식당에서 공수한 각종 먹거리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순대라던가 떡볶이 떡이라던가 깻잎, 어묵 같은 것들...

순대는 내가 살던 아파트 앞에 아바이순대라는 식당에서 살 수 있었는데 조리하지 않은 순대는 팔 수 없다는 주인 아저씨를 꽤 귀찮게 군 덕에 어렵게 구할 수 있었고 떡볶이 떡은 조선족이 운영하는 방앗간에서, 깻잎은 한국을 갔다오는 사람들이 사다주거나 가끔 한인 교회에서 파는 것을 샀다. 지금은 지천에 널린 게 한국 슈퍼들이고 그렇게 구하기 어렵던 깻잎이며 어묵이며 떡볶이며...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지만 당시엔 구하기 쉽지 않은 정말 귀한 것(?)들이었다.

난 가끔씩 그 귀한 재료들을 풀어내어 잔치를 벌였다. 냉동실에서 또아리를 튼 채 꽁꽁 얼어 있는 순대를 조금 풀어내어 쫄면과 깻잎, 양배추와 양파, 마늘을 충분히 넣은 후 갖은 양념을 하고 얼큰하게 볶아내어 훌륭한 순대 볶음을 만들었고 빨갛고 매콤한 양념과 오뎅, 라면사리를 넣어 떡볶이를 만들었다. 돈이 좀 넉넉한 날엔 해물시장에 들러 낙지도 사고, 조개도 사고, 새우, 꽃게도 사서 해물탕을 끓이기도 했다.

그런 다음 친구들을 불러내어 함께 먹는 거다. 그러면 난 금새 그들의 천사가 되고, 엄마가 되고, 베스트 프랜이 된다.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 어느 날이었다. 난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에 들러 가방을 내려 놓고 시장갈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하지만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고 편한 신발과 가방을 하나 준비하는 거다. 질퍽한 시장 바닥을 헤집고 다닐려면 슬리퍼보다는 운동화가 편하고, 세상에서 제일 얇은 비닐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중국의 부실한 비닐 봉지는 가끔씩 날 중국 시장에 쪼그리고 앉게 만드는 데다가 떨어진 물건 위로 사람들이나 자전거 바퀴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기도 해서 튼튼한 가방을 챙겨야 했다.

오랜만에 해산물 시장을 가기로 하고 집 앞에서 인력거를 잡아 탔다(시장이 그리 멀지 않은 곳임에도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지 않는 건 시장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꽃 시장 때문이다. 장을 다 본 후에 꽃 시장에 들러 꽃을 한아름 사 들고 인력거를 타면 인력거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꽃 향기가 살짝 묻어나서 나를 기분좋게 간지럽혀주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해산물 시장에 갈 땐 꼭 인력거를 탔다).

물론 타기 전에는 흥정을 잊지 않는다. 난 이미 오래 전에 그것을 나만의 규칙으로 정하고 있었다. 시장이 있는 거리를 말하고 일단 3 원에 가자고 한다. 5 원을 넘지 않는 한도내에서 흥정을 하고 그 이상을 부르면 난 깨끗이 돌아선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력거 아저씨들은 내가 다른 인력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 '커이커이(可以 keyi, 알았어.그래)' 하며 인력거 머리를 돌린다.

난 그 날도 어김없이 운동화를 신고 가방을 메고 3 원 짜리 인력거를 타고 시장엘 갔다. 먼저 한 바퀴를 쭉 둘러봤다. 이건 엄마한테 배운 건데 일단 시장을 다 둘러본 후에 어디에 뭐가 물이 좋고 싼지 파악해뒀다가 나중에 사야 절약도 하고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댔다.

오징어가 싱싱했다. 거무틱틱한 껍데기가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이 아주 건강해 보였다. 소쿠리에 다정하게 올라있는 다섯 마리를 다 사 버렸다. 한 번 해 먹기엔 많은 양이지만 모자라서 아쉬운 것보다는 남는 게 낫다. 이래서 난 항상 손이 크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지만 이런 음식 사치(?)는 중국이 아니면 감히 어디서 해보겠냐는 생각에 난 항상 음식을 넉넉하게 했다. 그리고 많은 것 같아 보여도 막상 먹고 나면 별로 남는 것도 없고 어쩌다 음식이 남아도 서로 싸 가겠다고 해서 마음의 짐도 덜어주니 음식의 양으로 야뱍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오늘의 메뉴는 오징어볶음으로 정하고 야채를 사러 돌아다녔다. 한국의 것보다 적어도 5 배는 클 것 같은 중국의 고추를 1 근 사고, 구불구불 미로같은 단면이 드러난 양배추 하나와 양파와 당근 파, 마늘 등등의 갖은 야채를 샀다. 그리고 늘 그렇듯 시장 끝에 연결된 꽃 시장에 들러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스티블루와 카라를 한 단씩 사 들고 인력거에 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아주 행복한 기분으로...

먼저 야채를 씻어 다듬었다. 양배추와 당근은 채 썰고 고추와 파는 어슷 썰어 놓는다. 마늘도 다진다. 오징어를 다듬기 위해 동그란 나무 도마를 꺼내고 네모난 중국식 칼을 부엌 벽 타일에 갈았다. 한국에 있을 땐 물컹한 느낌이 너무 싫어서 날 오징어는 손도 못 댔는데 이젠 혼자서 배로 가르고 내장도 손질한다(그러나 이런 종류의 일은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데다가 익숙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다).

주황색 비닐 봉투에 담긴 오징어를 하얀색 싱크대에 쏟아 놓으니 세모난 머리 다섯 개와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오징어 다리들이 제 멋대로 엉켜있다. 한 마리를 잡고 미끈거리는 배를 갈랐다. 그 다음 빨판이 징그럽게 달려 있는 다리를 잡고 한번에 내장까지 전부떼어낸다. 몸통은 얇은 뼈까지 깨끗히 제거하고 다리는 속에 감춰진 눈과 내장을 다 잘라내고 다듬는다. 그렇게 두어 마리쯤 손질을 했나보다. 오징어가 워낙 미끄러워서 조심한다고 했는데, 칼이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왼쪽 검지 손가락을 조금 잘라놨다. 손톱과 그 안쪽에 붙어 있는 살이 조금 떨어져 나가고 그다지 빨갛지 않은 속살이 드러났다. 순식간에 피가 뚝뚝 흘렀다. 아픈 것보다는 도마위를 흥건히 적셔놓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피의 흐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순서대로라면 이쯤에서 난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러면 엄마나 친구들이 달려와서 휴지로 피를 닦아 주고, 약을 발라줘야 한다. 그들의 걱정스런 말투에 나는 더욱 더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아픔을 호소해야 한다. 그리고 오징어 볶음은 엄마가 마무리를 해야하는 거다.

그런데, 난 혼자였다. 손도 못대던 징그러운 오징어를 씩씩하게 다듬다가 손이 베었는데도 눈물을 흘리며 아픔을 호소할 엄마도, 친구도.. 아무도 없었다.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는데 난 부엌에 한참을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하얗던 오징어가 빨갛게 물이 들도록...

갑자기 혼자라는 느낌이 무섭게 엄습했다. 그리고 이내 서글퍼졌다. 반창고를 갖고 달려와 줄 엄마 생각이 나는 듯 하다가 사라지고, 괜찮냐고 달려와서 피를 닦아줄 친구들 생각이 나는 듯 하다가 사라지고, 칼질을 하다가 손을 베인 나만 덩그러니 부엌에 남아 있었다.

오징어를 손질 하다가 손을 베인 작은 사건은 어이없게도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너무나 또렷하고 선명하게 각인시켜주었다. 네모나고 무식하고 무거운 중국 칼은 내 검지 손가락의 손톱과 살 뿐만 아니라 내 가슴 속의 그리움마저 도려냈다.

결국엔 울었다. 부엌 바닥에 주저 앉아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어가며 펑펑 울어댔다. 아파서 운 게 아니였다. 혼자인 사실이 너무나도 서러워서... 그리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어렸을 땐 피가 나면 조금이라도 더 나오게 일부러 짜내서 엄마한테 달려갔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렸어..' 라며 보여줬다. 그러면 엄마는 '어머 우리 딸, 피가 왜 이렇게 많이 났어?' 하는 표정으로 날 걱정스럽게 바라봤는데 난 그런 엄마의 얼굴이 좋았다. 상처를 살피느라 이마 가운데 살짝 찌푸려진 주름은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했고 호오~ 하며 약을 발라줄 때 오므라진 엄마의 입술은 그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 뿌듯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난 다쳐서 약을 바르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 사랑받고 보호받는 행복한 아이었다.

그런데 지금 난 혼자다. 이렇게 피가 많이 흘렀는데... 엄마의 동정심을 극적으로 끌어낼 수 있고 날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횐데 말이다.

꽤 많은 양의 피가 흘러서 그런지, 양파를 잘랐던 칼에 베어서 그런지 손이 점점 화끈거려왔다. 난 얼른 일어나서 눈물을 닦고 코를 풀고 다친 부위를 물로 씻어내고 약을 발랐다. 반창고를 붙여도 계속 새어나는 피 때문에 다시 붕대를 칭칭 감고 왼쪽 손에 고무 장갑을 꼈다. 칼 반대편에 붙어있는 내 조그마한 살점을 떼어내고 다시 오징어를 손질했다. 손이 아려왔지만 그보다 내 요리를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 얼굴이 더 아른거렸다.

피로 빨갛게 물들은 오징어를 버릴까 하다 물로 씻어보니 깨끗해지길래 그냥 넣고(사람의 피가 배인 거라 더 맛있을 거란 생각도 했다), 손질해 둔 야채와 갖은 양념으로 매콤하게 오징어볶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레인 : 야야!! 오늘은 오징어볶음이야. 열라 맛있으니까 얼릉 와..
                   니가 다른 얘들한테 전화 하구...

         친구 : 응.. 와아~~~~! 콜라 사 가꾸 갈께.

십 분도 안되서 친구들이 몰려왔다. 큰 접시에 오징어볶음을 한 가득 담아내고 커다란 공기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식탁에 올려놨다. 늘 그렇지만 별다른 반찬은 없다. 우린 항상 일품요리였다.

나까지 총 네 명의 여자아이들이 오징어 다섯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여전히 '맛있네, 맛있어.' 를 연발해 주는 친구들 덕에 난 아이들보다 몇 배는 더 맛있게 먹은 것 같다.

그런데, 한 친구가 상을 치우다가 붕대를 감고 있는 내 검지손가락을 발견했다.

         친구 : 야~ 너 손 왜 그래? 다쳤어?

         레인 : 아하하. 응. 이 바보들..

         친구 : 왜? 왜 그랬어?

         레인 : 오징어볶음 맛있었어?

         친구 : 왜 다쳤냐구 물으니까.. 그건 왜 물어? 왜 그랬냐니까?!

         레인 : 맛있었냐구!!! 대답이나 햇!

         친구 : 응. 맛있었어. 왜?

         레인 : 푸하하하.. 너네 그게 왜 맛있는 줄 알어?
                   내 피에 물들은 오징어를 넣어서 그래. 아하하하.. 웃기다.

         친구 : 너 손 다쳤구나?

         레인 : 응... 오징어 손질하다가 베었어.

         친구 : 어디바바.. 많이 다쳤어? 아직도 피가 베어나오네...

         레인 : 아이씨~ 괜찮어.

         친구 : 어디 풀러바.

         레인 : 괜찮대두. 아.. 그만해. 우리 후식이나 먹자. 콜라 가져 와!

         친구 : 많이 다친 거면 병원 가자. 응?

         레인 : 너네 자꾸 왜 그래..? 흐흑....

결국 또 한 번 울었다. 사실은 너무나 아팠다고... 그런데 아무도 없어서 그게 더 맘 아팠다고... 상을 치우다 만채 바닥에 주저 앉아 붕대에 칭칭 감긴 검지 손가락을 펴 들고 울어 버렸다. 오징어볶음을 맛있게 먹은 친구들은 이 어이없는 눈물 앞에서 잠시 당황해하는 듯 하더니 금새 같이 눈물을 떨구었다. 모두들 오징어만큼 만한 아니, 잘려진 손톱만큼 만한 그리움을 참아내고 있었나보다.

그날 저녁 우린 오징어볶음 먹고 터져 버린 매운 눈물 주머니 덕분에 보고 싶은 엄마, 아빠 얘기에서 맨날 싸우던 언니, 오빠, 동생 얘기, 한국에 두고 온 여자친구, 남자친구, 중국 올 때 헤어진 애인, 집에 있는 강아지 얘기와 한국의 그리운 것들에 대한 얘기로 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에서 붕대를 다 풀어낼 때까지 친구들은 나 대신 밥도 해 주고 머리도 감겨주고 가끔은 세수까지 시켜줬다.

우린 그 일을 '오징어눈물대사건' 이라 칭하고 가끔 웃었다. 사실은 그때 배가 너무 불러서 눈물이 난 거라고... 네가 울길래 따라 운 것 뿐이라고... 오징어볶음이 너무 매워서 눈이 빨개진 거였다고...

배불리 오징어볶음을 먹고 난 네 명의 여자애들이 하나의 검지손가락 때문에 바닥에 퍼질러 앉아 통곡한 일은 사실 슬프다기보단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아직도 검지 손톱 끝자락에 조그맣게 흉터를 남기고 자라지 않는 손톱을 볼 때마다 그날의 허전함이 떠 오른다.

그래서 난 오징어를 보면 가끔 외로워진다. 그리고 아주 가끔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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