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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카르트의 철학, 특히 『성찰』을 읽으면서 사람들의 오해를 가장 많이 사는 부분이 바로 「제 3성찰 - 신에 관하여 : 그가 현존한다는 것」이다. 1, 2성찰에서는 인간이 지닌 인식능력이 믿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유한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신으로 퇴보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등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제 3성찰은 제목도 그렇고, 실제로 그 내용에 있어서도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이후에도 신의 현존에 대한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철학자는 자신의 시대 안에서 사상을 전개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자기 생각을 쓰면서, 그 당시에 쓰던 언어와 개념을 통해 자신의 글을 서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쓰는 말이 그의 생각을 온전히 대변해주는 것 또한 아니다. 따라서, 그 언어의 한계 밑에서 자기만의 독해, 또 다른 생각을 잡아내야한다. 이 글의 내용은 글쓴이가 읽어낸 제 3성찰의 바닥에 깔려있는 또 다른 의미이다. 

  데카르트의 제 3성찰은, 자신의 논증 속에서 인간이 정신 속으로 갇혀버린 난국(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에 처한 가운데, 정신의 외부에 있는 최초의 타자의 현존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타자는 그가 정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한다. 

  1, 2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모든 감각정보를 부정하고, 오로지 정신만이 명증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모든 감각을 멀리하며, 물질적 사물의 상을 내 생각에서 모조리 지워버리자.(p.56 첫 번째 줄)’ 하지만 참과 거짓을 설정할 수 있는 기준을 남겨두는데, ‘극히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것을 일반적 규칙으로 설정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p.57 일곱 번째 줄)’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정신이 타자의 현존을 인정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된다. 타자의 현존이 정신 속에서 극히 명석 판명하게 지각된다면, 그것은 곧 타자의 현존에 대한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감각은 거부되고, 그것이 어떤 판단의 기준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즉, 내 외부에 어떤 사물이 있고, 이런 사물로부터 저 관념이 유래하고, 또 그 관념은 사물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설령 이에 대한 내 판단이 옳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내 지각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p.57 밑에서 일곱 번째 줄)’ 게다가 데카르트가 회의하는 대상은 단순히 감각자료일 뿐만 아니라, 모순이 없는 명제까지 포함된다. ‘예컨대 둘 더하기 셋은 다섯이라는 것을 고찰할 때 나는 적어도 그 진리성을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명석하게 직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나중에 이런 것들도 의심해야 한다고 판단했는데(p. 57 밑에서 둘째 줄)’ 

  기하학적 명제마저도 어떤 존재가 속이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약 그것이 신이라면, 우리는 가장 먼저 그런 기만자 즉 신의 존재 유무를 파악하고 그러한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성찰에서 신은 이런 맥락을 배경에 두고 등장한다. 즉, 인간의 명석 판명한 인식을 위해 요청되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는 위치가 바뀐 셈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심의 근거를 제거하기 위해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신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지, 또 존재한다면 기만자일 수 있는지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p.59 밑에서 열 번째 줄)’ 

  현재 단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정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정신을 분석하는 일 밖에 없다. 데카르트는 이에 따라서 인간의 정신을 관념, 의지, 정념, 판단으로 나눈다. 둘 이상의 관념이 긴밀하게 관계를 맺으며 떠오르는 것이 의지, 정념, 판단이기 때문에, 데카르트에게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념이다. 또한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것은 나머지 셋 가운데 판단이다. 이러한 판단은, 아직까지는 모순적이지만 않다면 참으로 간주되는 혼란스러운 상태다.

  데카르트는 관념에 세 가지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만들어질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본유), 둘째는 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것(외래), 셋째는 다른 관념을 짜깁기해 만든 것(만든)이다. 이 가운데 외래관념의 경우, 사람들은 흔히 그것이 외부의 사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자연적 충동(p.62 아홉 번째 줄)의 영향이거나(자연이 나에게 그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고 내가 말했을 때의 의미하는 바는, 어떤 자발적인 충동에 의해 나는 그렇게 믿게 되었다는 것이지, 그것의 참됨이 어떤 자연의 빛에 의해 나에게 명시되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외부와 관계없이 생성되거나, 그 사물의 각기 다른 모습이 감각을 통해 전달되어 같은 관념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그러나 주목할 것이 있다. 과학적 지식과 본유개념을 동일하게 간주한다는 것이다. ‘천문학적인 근거에서 얻은 것, 즉 내가 본유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떤 개념들로부터 끌어낸 것이거나(p.63 위에서 네 번째 줄)’) 

  이런 외래관념을 제외하면 본유관념과 만든-관념이 남는다. 이들에 대한 대상의 현존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들의 표상적 실재성을 검토하는 방법이 있다. 표상적 실재성이란 관념의 속성이기도 하고, 어떤 특정한 한 관념의 속성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이런 표상적 실재성을 띄기 위해서는 자연의 빛이 알려주는 인과법칙에 따라, 표상적 실재성을 띄게 해주는 원인으로서 형상적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 ‘자연의 빛에 의해 분명한 것은, 전체 작용 원인 속에는 적어도 그 결과 속에 있는 것만큼의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p.64 위에서 넷째줄)’ 표상적 실재성은 관념과 관념 사이의 관계에 한정되며 정신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속성이지만, 형상적 실재성은 관념과 외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형상적 실재성은 표상적 실재성보다 크거나 혹은 같다(각주 70). 

  하지만 아직 데카르트는 정신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따라서 ‘나’의 세계는 표상적 실재성만 존재하거나, 혹은 ‘나’를 근거로 삼는 형상적 실재성과 그것을 반영한 표상적 실재성을 띈 관념들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형상적 실재성의 근원의 근원을 계속 추적해 올라갈 수 있는데, 이것은 자연의 빛이 가르쳐준 인과법칙에 따라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원형에 근접해간다. ‘한 관념이 다른 관념으로부터 생길 수는 있지만, 이런 소급은 그러나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으며, 마침내 제일의 관념에 도달하게 되는 바, 이 관념의 원인은 이른바 원형과 같은 것이며, 관념 속에 그저 표상적으로만 있는 모든 실재성이 이 원형 속에는 형상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p.66 가운데)’ 이 ‘원형’은 자신의 정신의 연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데카르트의 과제는 이제 이 ‘원형’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으로 바뀐다.

  그에게 관념은 다시 생물, 물질(무생물), 신이라는 세 종류로 나눠진다. 모든 생물은 만든-관념이다. 물질에 대한 관념은, 여러 가지 감각으로 관찰되는 자료들은 제2성찰에서 나온 밀랍의 사례에서 보듯 그 대상 자체의 속성이 아니다. ‘이 관념에 있어 명석 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은 극히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p.67 밑에서 여덟째 줄)’ 물질에서 명석 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은 연장(부피), 형태, 위치, 운동, 실체, 지속, 수 등이다.(여기서 데카르트가 왜 근대적 정신의 선구자인지를 알아보셨다면 철학과 대학원을 추천합니다. 농담 아님.) 감각으로 인한 관념들은, 만약 그것이 외부에서 주어진 관념이라면 그에 걸맞는 표상적 실재성과 형상적 실재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야한다. 하지만 ‘나’의 정신 속에서는 두 실재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감각으로 인한 관념들은 내 내부에 근원을 두고 있는 관념들이다. 즉, 상상이라는 이야기이다. 또한 연장, 실체, 위치, 수 등도 아직까지는 표상적 실재성만 갖추고 있는 단계이다. 상상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고 나서야 신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제까지의 증명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신을 제외한 모든 관념은 인간의 상상의 산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관념들이 명석 판명한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명석 판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외부와 아무런 접촉이 없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데카르트는 ‘관념이 정신에 근원을 두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현존 없이도 인간의 정신 속에 세계가 구축될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데카르트는 마지막으로 신의 관념을 검토한다. 검토의 주안점은 ‘신 관념이 정신에 근원을 둘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데카르트는 처음부터 ‘신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무한하고 비의존적이며, 전지전능하며, 나 자신을 창조했고,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다면 그 모든 것을 창조한 실체이다. 실로 이런 것은 내가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나 자신에서 나온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p.69 밑바닥).’ 라고 못박으며 시작한다. 

  ‘나는 유한하다(p.70 두 번째 줄)’는 말이 갑자기 등장해 뜬금없지만, 이 말은 성찰이라는 책의 출발점이다. 유한한 존재이기에 잘못된 인식을 하는 것을 보면서 데카르트는 회의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유한한 존재 안에 무한한 존재(실체)인 신이라는 관념이 있다는 것은, 그 관념의 근거가 정신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무한 실체의 관념은 실제로 무한한 실체로부터 유래해야(p.70 세 번째 줄)’ 한다. 

  또한 데카르트는 신이 무한한infinite 존재이지 규정할 수 없는indefinitive(‘유한한 것의 부정(p.70 다섯 번째 줄)’)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의 부정, 즉 비존재를 뜻할 뿐이다. 신 관념이 존재-비존재를 초월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듯이 보인다. 또한 신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무한’이기 때문에, 어떤 관념이든 그에 대한 표상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실재적인 어떤 것도 나에게 나타내지 못한다고는 가상할 수 없(p.71 첫 번째 줄)’다. 또한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의 정신에 당연히 온전히 잡힐 수도 없다. 무한한 존재라는 것 자체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정신이 완전한 인식에 이르는 과정을 밟아나가면 무한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런 가능성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 유한한 존재라는 반증이다. 신은 언제나 ‘완전한 현실태’로서 무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한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다. 따라서 무한에 다다른다고 하는 표현 자체가 모순이다. 게다가 무한한 존재인 신은 자신 안에 모든 표상적 실재성과 형상적 실재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그 기원으로 둘 수가 없다. 

  하지만 만약 신이 무한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외부에 현존한다는 것은 아직 ‘나’의 정신 안에 증명되지 않았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신이 현존하지 않더라도, 신 관념을 가진 [나]는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전히 질문은 인간의 존재에 중심이 맞춰져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이 가정을 논파하는 시작도 ‘나’의 존재에서 출발한다. 내가 존재한다면, ‘내가 만일 내 자신에서 나왔다고 한다면(p.74 세 번째 줄)’ 나 자신을 완전하다고 인식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타자가 없고, 결핍이 없다. 따라서 감각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품을 수 없다. 유한에 결국 갇히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시간 앞에서 그 존재의 현존조차 보장받을 수 없다. 무한히 작은 시간 속에서 어떤 시각의 나와 다른 시각의 나는 그 동일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동일성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부단히 새로 만들어지고 없어지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보존은 단지 생각의 차원에서만 창조와 구별될 뿐임은 자연의 빛에 의해 명백하게 알려지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p.75 일곱 번째 줄)’ 

  그렇다면 내 존재와 현존을 보장해주는 것은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결코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현재 단계에서 ‘나’는 아직 사유만 할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존재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이런 조건이 결국 ‘나’, 즉 정신 외부의 어떤 존재를 요청하게 된다. 이것은 무한한 시간을 조망하며 ‘나’의 존재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이 존재는 바로 신인데, ‘나는 사유하는 것이고, 또 신의 관념을 갖고 있으므로, 내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 신이 갖고 있는 모든 완전성의 관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p.75 밑에서 네 번째 줄)’ 

  이 원인, 즉 원형이 신이라는 무한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데카르트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첫째, 신은 정신을 비롯한 모든 것의 현존을 보장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근원을 캐물어가는 질문의 끝에는 반드시 신이 자리잡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사유하는 나’의 현존을 보존해주는 존재는, 다름아닌 ‘나’ 속에 신의 관념을 불어넣어준 바로 그 외부의 존재, 즉 신이기 때문이다. 둘째, 완전하다는 것은 단 하나의 존재라는 뜻이다. 변화하지 않고, 분할되지 않는 존재야말로 완전한 존재 즉 무한한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다. 따라서 신이 아닌 다른 여러 개가 아니다. 셋째, 이 단계에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나’는 여전히 정신에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관념을 산출하는 존재 이외의 다른 존재(부모)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의 관념은, 외래 관념도 아니고, 만든-관념도 아니다. 따라서 본유적이다. 이것이 본유적일 수 있는 이유는 신이 자신의 모습과 유사한 존재로서 인간을 창조하였기 때문이(랜)다. 따라서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로서 신이 존재하며 현존해야만, 신 관념을 가진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 또한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나’를 기만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는데, 속이는 것은 거짓을 가정해야만 가능하지만, 신의 무한함 안에 거짓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연의 빛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지기 때문이다. 

  신의 현존을 증명한다고 말하는 데카르트의 글은, 곳곳에 이 글의 주안점에는 인간이 놓여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증명마저도, 앞에서도 말했듯 그 목적이 ‘인간의 인식이 정당한지 검토하는 과정’에서 증명해야 하는 과제였다. 또한 인간의 정신을 통해 신을 증명할 뿐 아니라, 신의 현존마저도 인간의 현존과 외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교두보로서의 의미 이상을 지니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현존에 대한 증명은 ‘정신의 외부에 있는 최초의 타자에 대한 증명’ 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무한한 존재인 신에 대한 증명은, 앞에서도 나오듯 존재들의 현존을 보장해주는 존재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증명은, 신 자체에 대한 증명일 뿐 아니라, 데카르트가 회의 속에서 구해내지 못했던 정신 외부의 모든 사물에 대한 증명, 그리고 정신적이지 않은 또 다른 타자들의 존재에 대한 구제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제 3성찰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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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서양철학소모임 발제문.

1. 써놓고 보니 표상적 실재성과 형상적 실재성 사이에 연결고리가 약하다. 데카르트가 약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고, 난 이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2. 제 3성찰에서 전개되는 데카르트의 신존재 증명을 더 명확히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철학의 신 관념,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큰 화제였던 ‘존재-비존재’, ‘유한-무한’ 논쟁에 대한 선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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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적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교환가능성'이다. 근대적인 가치체계는 교환불가능한 것들을 교환가능하도록 끊임없이 강요하고, 종용해왔다. 여러가지 특수한 상품 - 특히 화폐 - 를 매개로 구축된 사회는 사용가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교환가치로 메웟다. 그리고 급기야는 시장이 인정하는 형태의 거래가 생활의 전부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교환적 사회를 지탱하는 사상적 뼈대는 '시각화', 그리고 환원이다. 이 두 가지 경향의 결합이 바로 수량화다. 수는 시각의 추상이다. 타자와 타자 사이를 구별하는 습관은 시각적 분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수량의 개념이란, 이런 분절적 세계를 그보다 더 추상적인 계열로 들어올림에 따라 생겨난다. 

  따라서 수량화는 인간의 감각 가운데 시각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세계의 수량화는 곧 자본주의이다. 양화시키고, 그 양의 비교를 통해 교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 성립되며, 이것의 실천은 곧 자본주의적 실천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세계는 시각을 통해 인간의 다른 감각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방향으로 필연적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수량화를 골자로 하는 자본주의적 사회는, 인간의 다른 감각마저 시각으로 환원하려고 시도한다. 모든 것이 이미지화되는 현상은 이런 배경 아래서 벌어진다. 이미 수량화는 환원불가능한 것들을 대상으로 교환을 시작했으며, 인간의 감각 또한 그에 포함된다. TV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고는 '모든 감각의 시각화'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보여준다. 냄새, 맛, 질감, 소리 등이 이미지화되어 처리되고, 시청자는 다시 이를 시각을 통해 수용한 뒤 다른 연관된 감각을 떠올린다.

  이 연관된 감각을 떠올릴 수 있는 근거는, 분명히 이전에 그와 같은 감각적 경험의 내용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각화 이전의 원초적 체험으로서 내재하며, 교육과 자본주의적 사회화 진행 이전의 원형으로서 조작할 수 없는 관념이 된다. 그러나 시각화 이후의 감각은, 세계와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시각적인 변환을 겪는다. 이 단계의 인간은 관념과 이미지를 연결하는 작업만 지속적으로 수행하며, 이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세계는 '세계의 이미지'로서 세계를 대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은 다른 감각기관을 통해서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시각화된다는 것은 이 능력이 발현되는 경로에 변화가 오는 것일 뿐, 그 능력 자체를 없애버리진 못한다. 그 능력은 사회 이전에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주어진다. 즉, 대면의 경험으로서 확인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니라, 대면이라는 상황을 가능하게 해주는 초월적 전제인 것이다.

  시각화는 사회적 조건이다. 이는 인간의 능력과 전면적으로 배치되며, 따라서 충돌한다. 이 충돌은 교환가능성이라는 거래와 소통의 토대이며, 따라서 이는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회화과정은 세계와 인간의 근본적 접촉을 차단하고, 둘 사이를 강력하게 매개한다. 매개의 세계는 자신을 인간에게 강요하고,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강요되기 때문에 공통되다는 점을 무기로 소통의 장을 마련한다.

  사회가 부여한 세계는, 사실상 이미지의 집합이다. 이미지는 매개 이전의 세계와 인간을 연결하면서, 동시에 이미지 이외의 다른 접촉의 통로를 억압한다. 억압의 방법이 다른 감각의 이미지화이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감각의 억압을 알지 못하며, 다른 모든 감각이 생생한 것 만큼이나 자연스럽다.

  그러나, 위와 같이 배재당한 감각은 단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이 간으성은 자본주의의 외부에서, 시각에 포착당하지 않은 채 인간에게 접근하며, 불현듯 찾아온다. 모든 감각을 이미지로 대체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은, 이 가능성을 결코 이미지의 총체로서 환원할 수 없음에 당혹해한다. 그 '환원될 수 없는 감각성'이 이 가능성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은, 인간이 가진 모든 감각을 통해서 그가 사랑의 대상임을 알아챌 수 잇다. 이것은 시각에도 해당된다. 시각 또한 사랑의 대상, 즉 인간에게 내재하지만 억압당한느 다른 감각의 능력을 일깨워 줄 수 있는 계기로서의 대상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애초에 시각의 대상으로서 주체의 세계에 포섭된 그 대상이 어떻게 전감각적 대상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 또 그 과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이다.

  위와 같은 과정은 논리적 절차를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감각의 일깨움은 즉각적이다. 다른 대상은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할지라도, 그 대상은 매우 우연한 기회 속에 필연적으로 다른 감각을 통하 대상의 수용을 주체에게 제안한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며, 또한 순간 사라진다. 이 제안의 인식은, 사랑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분기점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지각의 주안점이 이동하는 것이다. 시각의 주안점은 대상의 가시성/비가시성일 뿐이고, 이것은 심리적 거리와 상관이 없다. 심리적 거리란, 감각경험을 주체의 내부에 생성된 관념 사이의 거리다. 따라서 감각의 거리는 심리적 거리와 동일하다. 시각화된 세계에서 모든 이미지는 있거나(가시적), 없다(비가시적). 그러므로 모든 관념의 위상이 동일하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주체의 가장 큰 특징이며, 또한 자본주의적 교환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다른 감각은 그 물리적 거리가 가장 주요한 감각의 조건이다. 따라서 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요청받은 주체에게는 다음과 같은 반응이 촉발된다. - 좀 더 가까이 하고 싶다. 이는 이전에 고려되지 않던 감각의 조건이 새로 편입되는 특기할만한 현상이다.

  이와 같은 '거리의 편입'은 그 자체만으로도 시각화 이전의 인간의 능력이 촉발되었으며, 그 능력을 사용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이다. 유배당한 다른 감각들이 갑작스레 되살아나며, 이 모든 움직임이 시각으로 인지한 최초의 대상, 즉 자신에게 전감각적 세계 대면의 가능성을 일깨워준 계기로 나아간다. 오래도록 시각적 환원을 겪어온 다른 감각에게, 그 감각의 대상이란 전감각적 계기 이외의 다른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감각적인 세계 대면은, 이전까지 이미지로 대체되엇고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온 모든 감각들의 위상을 격상시킨다. 모든 위상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반대로 시각의 위상은 낮아진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상황은 시각 이외의 다른 감각을 살려냄으로써, 오히려 시각 역시도 주체 내부에 형성되는 세계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든다. 다른 감각을 통해 주체의 세계에 드러나는 것에 대해 시각이 재발견함으로써, 이전희 시각화된 세계와는 동떨어진, 시각의 참된 역할이 복원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여전히 자본주의적 시각화의 폭력이 주체에게 작용한다. 시각화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독립되어 지속적으로 운동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시각화가 이요하는 시각은 끝내 인간의 능력 가운데 하나이며, 게다가 그 과정의 자연스러움 때문에 내재된 문제가 있다. 이런 현상은 사랑의 과정 속에서 왜곡된 형태로 세계에 출현하게 되는 데, 페티쉬즘과 플라토닉 러브가 이러한 왜곡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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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으로 수정 및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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