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신간평가단을 하겠다고 지원 댓글을 달던 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마지막이라니... 아쉽고 짠하고 마음이 그렇습니다. 게다가, 다달이 좋은 책들은 더 많이 나오고 있고요. 이번 달에는 주목신간 고르기가 더욱더 힘들었습니다. 가리고 가려서 뽑은 이 달의 신간, 책 읽기 좋아진 계절이라 좀 두꺼운 책 위주로 선정해보았습니다. 

 

1. 안전, 영토, 인구 

  미셸 푸코의 말년 강의 가운데 하나입니다. 프랑스든 여기든 이제야 이 강의들이 출간되는 듯 한데요. 푸코는 삶의 권력(생체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가장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철학자로 유명하죠. 그에게 안전(안보?), 영토, 인구라는 법적 규정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그리고 이것을 읽는 사람들과 이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이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참고도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 인정투쟁 

  벤야민, 아도르노, 하버마스 등이 형성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를 잇는 악셀 호네트의 대표작이 출간되었네요. 검색에 따르면 재출간인 것 같은데, 여튼 고전들은 언제나 읽혀야 하니까 이렇게 다시 나오는 건 아주 반가운 일이겠지요. 잘 알려져있듯이 인정투쟁은 헤겔의 사회철학에서 처음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고전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호네트는 우리 사회를 비출 수 있는 거울이 될 수 있을까요? 

 

 

3.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목차를 보니 이슬람 세계를 중심으로 서술된 세계사인 것 같습니다. 역사, 문화, 사회 등을 통틀어서 서술한 이슬람 입문서들도 숫자가 많지 않은데, 이렇게 한 분야에 집중한 책이 나오는 것도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역사 쪽 책들을 보면서, 이번 달에도 유럽에 관련된 역사책들이 많이 눈에 들어왔는데, 한번쯤은 (우리도 거기에 소속되어있는) 비유럽에도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4. 러시아 문화사 강의 

  이 책을 선정한 의도는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선정한 이유와 비슷합니다. 유럽같지만 유럽 아닌 유럽, 마찬가지로 아시아같지만 아시아 아닌 아시아, 하지만 일명 도선생과 톨선생이라는 전세계를 뜨겁게 달구는 대가를 배출한 그곳. 충분히 흥미가 생기는 곳에 대한 적절한 입문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5. 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 

  진보적인 성향을 띄는 일본 사학자들이 대한제국 병탄에 대해 발표한 논문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어쩌면 그 주체라고 볼 수 있는 그 공동체의 일원들이 어떻게 이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객관적 시선으로 우리를 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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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정치- 미국에서 식품산업은 영양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매리언 네슬 지음, 김정희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1년 9월
29,000원 → 27,550원(5%할인) / 마일리지 1,450원(5% 적립)
2011년 09월 24일에 저장
품절

진화의 종말
폴 R. 에얼릭 & 앤 H. 에얼릭 지음, 하윤숙 옮김 / 부키 / 2011년 9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2011년 09월 24일에 저장
절판

장기 비상시대- 석유 없는 세상, 그리고 우리 세대에 닥칠 여러 위기들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지음, 이한중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9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2011년 09월 24일에 저장
품절

스파르타 이야기- 신화로 남은 전사들의 역사
폴 카트리지 지음, 이은숙 옮김 / 어크로스 / 2011년 9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11년 09월 24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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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읽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정치사상가 아렌트

  아렌트는 그의 연구주제인 ‘전체주의’ 때문에 현대에 가장 주목받는 정치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전체주의의 기원』, 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으로 알려져 있다. 『아렌트 읽기』의 지은이인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은 그에게 수학한 제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인정받는다는 아렌트 전기의 지은이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은 이 책을 고르는데 아주 중요한 정보이며, 동시에 이 책을 설명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책에는 아렌트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이 등장하고, 지은이가 아렌트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도 간혹 등장한다. 또한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고 그와(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현재 체계적으로 정리중인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강의록과 편지에 대한 언급도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가 쓴 9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의 아렌트 전기의 축약본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단순히 그의 저서들을 요약, 정리한 것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애쓴 느낌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차는 크게 네 부분으로 짜여있다. ① 서론을 대신한 그의 삶에 대한 지은이의 간략한 서술, ②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③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서술, ④ (현재도 진행중인 것으로 보이는) 『정신의 삶』에 대한 자신의 연구 성과. 하지만 이 네 부분이 무 자르듯이 똑 나누어지지 않는다. 아렌트의 문제의식은 분명히 전체주의로부터 출발하였으나, 그것을 실증적으로 다루지 않고 전체주의가 가능하게 된 인간의 삶의 특정한 상황과 연관지어 다룬다. 그 상황에 대한 연구가 바로 『인간의 조건』 의 내용이 된다. 『정신의 삶』 은 말년의 아렌트가 그 조건들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탐구와 자신의 사색의 결과를 정리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신의 삶』의 결론은, (이 책에 따르면) 다시 ‘전체주의’로 돌아간다. 즉, 특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돌파해 나갈 수 있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서술인 것이다.

  따라서, 글의 처음에서 결론부터 일단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아렌트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치 현실에 대한 교범’ 역할을 하는 『전체주의의 기원』 에 대한 설명이 담긴 초반부에 비해서, 그런 교범의 역할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사유의 바다로 들어가는 후반부로 갈수록 논의가 깊어지고 넓어지며 어려워지는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아렌트의 사유의 역사의 일부이므로, 그리고 단순히 전체주의의 제도, 혹은 집권세력을 변화시키는 것 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서 어떤 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앞으로 그와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을 줄이는 더욱 근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리고, 아주 쉬운 말이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그래서 우리에게 더 귀감이 될법한 말들이기에 더욱 그 내용이 인상깊게 남는다. 나 스스로가 아렌트의 저서를 직접 읽어본 적이 한 번도 없기에, 이런 느낌이 더욱 강한 것 같다.


제 4의 책, 『혁명론』

  전체적인 인상과 더불어서, 이 책을 읽으면서 아렌트에 대해 생기는 호기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혁명론』 이라는 책이 어떤 내용일까 하는 궁금증이다. 이 책의 목차는 주요 저서 세 권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지만, 사실 이 책 또한 그 세 권에 못지않은 빈도로 등장한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다루는 부분은 정치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혁명론』은 스탈린 체제(그리고 아마도 마르크스-레닌 주의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체주의라고 규정했을 때 우리가 혁명의 모델로 삼아야 하는 실제 정치혁명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또한 『인간의 조건』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혁명이 전체주의가 되지 않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간의 상황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이 구현되었을 때의 인간들은 어떤 태도를 갖추었는가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혁명론』에 대한 내용이 부각된다.

  이 두 맥락으로 미루어볼 때, 아렌트의 『혁명론』은 어떻게 혁명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적 변혁을 단순히 역사적으로 기술한 책은 분명히 아닌 것 같다. 반대로 혁명의 기초를 이루는 철학적 태도 내지는 정치구조를 바꾸기 위한 행동지침을 다루는 혁명의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한쪽에 치우친 책이었다면, 이 책은 위의 두 맥락에 모두 등장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그 실체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지만 혁명의 순간에는 매우 중요한 혁명의 요소, 즉 ‘혁명의 정신’에 대한 기술일 것이다. 그 책을 보지 않았으니 이 또한 짐작일 뿐이지만.

  『아렌트 읽기』에 등장한 『혁명론』 언급을 바탕으로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아렌트는 정치적 혁명의 형태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고 한다. 하나는 프랑스 유형인데, 아렌트는 이 유형의 대표인 프랑스 혁명을 포함한 거의 모든 혁명이 이 유형을 따라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혁명에서는 혁명지도자들이 대중을 의도적으로 조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래를 선포하며, 그들의 행동이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청사진을 달성하기 위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윤리적 덕목을 내세워 혁명에 수반되는(혹은 지도자들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지배권력의 교체로 혁명이 완수된다.

  그런데 아렌트는, 이러한 유형의 혁명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아예 혁명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데,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지배-피지배의 구분이라는 정치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명분이 무엇이 되었든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정치와 거의 다를 것이 없다. 그가 보기에, 폭력을 동반하는 정치는 전체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그것은 사실상 인간에게서 정치적인 행위를 할 수 없도록 (아렌트가 쓰는 의미에 따른) 정치적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가 말하는 정치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능력이기에 정치적 감각의 마비는 곧 인간으로서의 자격의 상실을 뜻한다. 그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인민의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마비시키는 정치,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유형의 혁명이란, 혁명이 아니라 전체주의에 매우 근접해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또 다른 유형은 미국 유형이다. 아렌트는 이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우선 가장 단순한 이유는, 인민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폭력이 동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의도적 조직이 아닌, 자발적인 결합과 끝없는 토론에 따르는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미국 유형의 혁명의 특징은, 혁명의 지도자들(지도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의문스러운 어떤 ‘주도자’들)이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 즉 자신들이 꾸릴 정치공동체의 미래를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 공동체를 구성한 이후의 사람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영향 아래 놓일 (공동체 구성원 자신을 포함한) 미래의 세대들에게 내맡겨진다. 이것은 아렌트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감각을 보장해준다. 이 정치적 감각의 상호교차점이 정치적인 것의 장소, 즉 공공의 영역이 된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감각은, 그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보았던 ‘행위’개념, 즉 창조성 - 자유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다. 그 어떤 인간도, 어떤 행위를 할 때에는 그 행위에 전제되는 여러 상황들, 행동의 뿌리들이 있다. 그 뿌리란, 특정한 정치공동체가 지금까지 형성해온 행동 양식인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정치공동체 구성원 전체와 연관되어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결코 그것들이 그 행위가 어떤 모습일지 결정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혹은,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와 연관되어있지만 결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어떤 모습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게 되고, 이것은 창조 – 자유 – 행위가 된다. 이 결정성을 승인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정치공동체가 전체주의적 가능성을 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칸트주의자 아렌트

  이렇게 아렌트의 관심은 전체주의라는 일종의 정치적인 현상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 즉 창조 – 자유 – 행위라는 문제로 넘어오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긴 나머지 한 가지 호기심은, 여기에는 아렌트의 이름 만큼이나 고전적인 철학자들의 이름, 특히 칸트의 이름이 아주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유와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 아렌트는 칸트에게 배우고 또 그를 넘어서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고 할만큼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칸트 자체도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에 상당히 깊게 천착한 철학자이고, 역사철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세계적인 관점에서 정치적인 전망을 제시한 철학자인 만큼 칸트와 아렌트 사이에는 분명한 접점이 있다.

  가장 핵심적인 접점은 바로 ‘세계시민적 관점’일 것이다. 정치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칸트는 이전의 정치사상가, 또는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보편사’의 관점, 즉 이 세계의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어떤 관점에서 사고해보라고 제안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공통된 관점에서 역사를 통찰했을 때 특별한 공동체의 역사가 아닌 ‘보편사’가 드러날 것이라고 제언한다. 하지만 그 보편사의 순간(또는 역사의 종말)이 언제, 어떻게 도래할 것인지에 대한 말은 아껴둔 채, 그 때에 등장할 정부는 이미 존재하는 여러 공동체들이 각자의 권리, 즉 자유를 보장받지만 동시에 그 권리를 도덕의 이름으로 제한할 수 있는 느슨한 연대체가 될 것이라고만(되어야 한다고만?) 슬쩍 이야기한다.

  아렌트의 『혁명론』으로 이야기를 다시 돌리면, 미국의 건국은 칸트가 이야기했던 과정이 실제로 역사에 드러난 사건이 된다. 아렌트는 칸트의 관점을 미국의 건국의 사례를 들며 조금 더 급진적으로 끌고 간다. 즉, 칸트가 제안했던 보편사란, 사실 칸트 스스로도 그것이 정말 존재할까 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제안한 세계적 정치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 즉 가장 구체적인 개인에서부터 최고 수준의 연대체에 이르기까지 미래를 창조해갈 능력 – 즉 자유를 지속적으로 보장하는 ‘그’ 정치체제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정치적 감각 – 역시 자유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렌트가 ‘자유’라는 개념은, 칸트가 ‘자율’이라는 말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을 포함하며 동시에 자율을 추진하는 동기가 이성이 아닌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실천이성)은 자신의 행동의 원칙을 확립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도약 자체까지 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확립한 원칙이 실천이성이 아닌 또 다른 이성, 즉 순수이성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연과 필연, 자유와 자연의 모순이라는 고전적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칸트가 이 둘(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매개하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판단력에서, 미학이 아닌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자율을 통해 도덕적 원칙을 확립하면서도, 판단에 의해 그 원칙을 보편적 법칙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곧 다른 이의 관점에 대한 고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지은이는 이것이 『정신의 삶』에서 쓰지 못한 부분, 즉 ‘판단함’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전체주의 현상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한 그의 사유는 이렇게 자유에 대한 사색, 그리고 현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뛰어넘을 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실상 현재 출판된 『정신의 삶』은 ‘사유’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를, 그리고 ‘의지’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두 학자는 그게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델 – 자유에 기반한 소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세계시민적 인간상(소크라테스)의 사례, 그리고 이러한 정치가 가능하게 하기 위한 비이성적 능력에 대한 고찰의 좋은 사례를 남긴 선배 철학자(아우구스티누스)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가 진정 맺고 싶었던 결론, 그리고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쓰여지지 않은 ‘판단함’이었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그리고 현실과의 접점

  이런 생각의 궤적을 따라서, 아렌트는 더 이상 정치사상가나 정치이론가가 아닌 정치철학자 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자가 된다. 나는 그를 전체주의 현상에 대해 다룬 정치사상가나 이론가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이런 구도는 상당히 흥미로웠고, 철학자로서의 아렌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던져주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해 짧게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보겠다. 첫째, 철학하는 사람들이 항상 강조하듯이, 그리고 아렌트가 그랬듯이, 이 책은 단순히 아렌트에 대한 입문서로 끝나지 않는다. 지은이는 분량이 많지 않은 이 책에 아렌트 철학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아렌트가 만약 지금까지 살아있었더라면’ 이라는 말로 운을 떼며 이것이 현재의 정치 현상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과감하게 적어내고 있다. 아렌트의 학문적 태도가 그랬듯이 매우 조심스럽게 제안하면서도, 그 틀이 매우 합리적으로 현상을 분석해낼 수 있는 도구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철학이 현실, 특히 현대의 정치와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지은이의 입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폭력에 매우 민감한 아렌트의 이론의 체계에 비추어 볼 때,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정치현상인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슬로건에 대한 비판은 매우 매섭다. 제국주의적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며 자기 안에 스스로 전체주의의 요소를 생성시켜나가는 미국에 대한 비판은 물론,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 테러라는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며 그것을 자신의 세력을 결집하는 데 이용하는 무국적 테러 세력에 대한 비판 또한 놓치지 않는다. 양자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사람들은 모두 양측의 테러로 인해 겁에 질려 정치적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적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그대로 하게 된다.’ (특히 미국의 경우) 아렌트의 관점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그 사회가 완전히 전체주의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언제든지 전체주의 현상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다. 분명히 현재 무차별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또 그것은 철저하게 ‘아렌트 연구자’인 지은이의 관점에 한정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이 책의 내용으로만 비추어보자면)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며, 그가 이상적인 정치로 제시한 민주주의의 내용은 상당부분 미국의 민주주의를 모델로 하고 있다. 반면, 건국 당시가 아닌 그 이후의 미국, 특히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아렌트 말년의 미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분명 아렌트 스스로도 비판적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주의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거나, 혹은 ‘전체주의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전체주의는 아니라고 했던 점 같은 것을 미루어보면, 혹시 그가 미국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나 스스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정리를 해야할지 몰라 그냥 의문부호로만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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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택광이라 하면 요즈음 주목받기 시작한 좌파적 성향의 평론가인데, 사실은 난 그에 대해서 이 이상 무엇이라 말을 할 수가 없다. 그가 쓴 글을 읽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내가 책읽기, 여러 가지 담론에 대한 주목에 소홀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내 주위 여기저기에서 이름만 무성할 뿐, 내가 관심을 두는 여러 분야와는 접점이 잘 생기지 않았다. 크게 보자면 정치적인 성향이 일치하는데다가 문화이론 내지는 철학으로 그와 내가 묶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결론부터 말해서) 마르크스에서 라캉으로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랑시에르에 주목하는 그의 길은 내가 가고자 하는 길과는 들어맞지 않았다.

  이 책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있다. 하나는 자신의 이론적 입장에 대한 설명 비슷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간의 사회현상들을 분석한 결과를 그려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갈래가 어떤 지점에서 연결되는지, 그것이 명확하지가 않다. 이론 부분에서는 문화비평이라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문화비평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간주되는 신칸트학파에 대한 개괄이 있다. 그리고 그들과는 관점을 공유하면서 또 다른, 가장 현대적인 감각을 갖추었다고 할만한 문화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벤야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다른 이야기들도 있지만 내 기억에 가장 깊게 남을만큼 반복해서 등장하고 길게 설명된 것은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다른 한 부분, 즉 그가 사회현상을 직접 분석한 부분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욕망’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상징이다. 그리고 그는 상징을 문화와 거의 동일한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널리 알려져있듯, 이 두 단어를 가장 많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이론가는 바로 라캉이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의 빈도수에 걸맞게, 그의 사회현상 분석 또한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는 라캉의 구도를 거의 그대로 끌어와서 이야기한다. 궁극적인 무엇, 사건의 원인, 사람들이 열망하는 무엇은 실재계로서 실재하지만 절대 인지할 수는 없는 ‘그 무언가’가 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를 찾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특정한 문화현상으로서 드러난다. 이것이 곧 상징이며, 어떤 때에는 상상계의 산물이기도 하다. 최근에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이론가인 랑시에르에 이르면,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종잡을 길이 없어 그저 그가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이상한 것은, 그가 문화비평과 사회현상 분석의 방법론이라고 그토록 강조하면서 적었던 ‘철학’의 내용들이 이상하리만치 실제 비평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질문을 붙잡고 늘어져야만 했다. 단적으로 말해, 비평의 방법이라는 이론에 대한 설명에선 신칸트학파와 벤야민을 이야기하고, 실제 비평할 때는 라캉과 랑시에르를 인용하고 있다. 일관성을 찾기 힘들다. 대체 왜, 이럴거면 이론 파트에서도 자신이 지금까지 연구한 학자들 – 라캉과 랑시에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나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조금은, 뜬금없는 무리수 같은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신칸트학파를 칸트와 나눌 수 있는 이유는 인식론적인 입장의 차이 때문이다. 신칸트학파 사람들은, 칸트의 범주 개념을 무한히 펼쳐놓는다. 이는 칸트가 범주를 양, 질, 관계, 양상이라는 유한한 네 가지 분류체계(와 12개념으)로 제한한 것과는 대비된다. 범주란 인식의 토대를 만들어주는 틀이다. 칸트는 유한한 범주로 보편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려 했지만, 신칸트학파들은 이런 범주를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문화는 바로 한 사회가 이런 인식의 틀, 즉 범주들을 역사적으로 축적시킨 결과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자라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인식의 매개로 작용한다. 이것이 신칸트학파가 문화연구, 즉 사회현상에 대한 연구를 중요하게 여기고 이에 대한 학적인 연구를 최초로 시작한 까닭이다.

  이런 (내가 알고 있는 한의) 신칸트학파의 개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강조하는 무한한 범주와 인식의 구분이 라캉의 상징(상상)/실재계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이다. 범주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산물이고, 그것은 인식을 결정짓는다. 또한 칸트가 정의한 범주의 정의에 따라서, 사실 인간은 범주 없이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범주 자체가 인식을 결정짓는다. 라캉의 상징 또한 실재에 접근하는 매개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가 대타자라는 말에서 강조하듯이 어떤 의미에서도 실재(계) 그 자체에 인간은 접근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로지 상징(계)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신칸트학파의 범주와 라캉의 상징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신칸트학파에 대한 신나는 설명은 어쩌면 라캉의 이론적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간접적 방법일 수도 있다.

  내가 나름대로 조악하게 맞춰본 이 입장이 맞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내겐 어떻게 해서든 이 공백을 메워야만 했고, 그 까닭은 이론 부분을 벗어나자마자 뜬금없이 (내 추측에 의하면) 라캉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친절하게 부가되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회현상 분석에 들어가고 나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이 ‘중산층의 욕망’이 반영된 ‘쾌락의 평등주의’에 입각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가 아마도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가장 기본적인 틀인 것 같다. 쾌락의 평등주의는 주로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의미가 담긴 현상을 분석할 때 유용하게 쓰이는 것 같고, 중산층의 욕망은 모든 사회현상이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문화적 저변으로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그의 조감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적절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내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입장은 못되는 것 같다. 실제로 그가 쓴 꼭지들 가운데서는 흥미로운 독법들도 몇몇 있었기에, 그저 단순한 이론적 이념의 소산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종합해보면, 그의 문화비평은 라캉(그리고 랑시에르)가 세운 이론을 방법으로 사용해, 중산층의 욕망이 중심이 되는 쾌락의 평등주의를 보여주려고 하는 지속적인 노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글을 주욱 읽어내리다 보면,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다름 아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숨은 구조에 대해 관찰해보기로 하자.’ 이다. 그 구조란 다름아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이 두 가지, 바로 그것이다. 대개 모든 글의 구조가 이런 식으로 짜여있다.

  좋은 말로는 확고한 그의 시선 아래 이 사회의 현상들을 여기저기에 배치하여 자기 입장의 설득력을 높이려고 하는 포부로 읽힌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그가 개념화한 ‘문화비평’이라는 장르 자체가 지닌 태생적 한계일 수도 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문화비평의 목적은 ‘사회적인 현상을 통해 사람들을 그렇게 움직이게끔 만드는 구조를 포착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문화비평 영역을 처음으로 개척한 신칸트학파, 베버, 짐멜, 벤야민 등의 인물들은 다양한 사회현상에서 ‘모더니티’라는 단 하나의 주제를 읽어내고 여기에 천착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가 무의식 중에(혹은 드러내놓고) 이런 학자들의 태도를 따라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나, 다양한 사회현상에 대한 분석, ‘지금 여기에 대한 비평’이라는 광고문구를 달아놓았지만 사실 그가 내리는 결론은 거의 모든 글에서 똑같다. 그래서, 그가 지어놓은 틀의 적절함보다는 오히려 반복의 지겨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가 제기한 분석의 과정이나 결과가 아니가 그가 선정한 여러 가지 사건 자체들일 것이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 그리고 실제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잊혀진 사건들, 이 책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복각이다. 시류에 대한 비평을 실은 책들이 대개 이런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지만, 이 책은 조금 남다른 데가 있다. 그의 관심분야가 넓어서인지, 아니면 그만큼 한국에서 많은 사건들이 있어서인지, 그는 거의 모든 사건과 사고들에 대해서 분석의 틀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시대순, 의미순으로 차분하게 되짚어보는 데 더 큰 도움을 준 책이었다.

덧댐1. 딱 하나, 정말 인상깊게 남은 꼭지가 하나 있다. 예전에 개그콘서트에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코너인 ‘마빡이’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가. 그는 이것을 무의미한 노동이라는 개념과 연결지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만큼은 책을 덮고 난 다음에도 머릿속에 웃음과 감동으로 내내 남았다. 실제 개그콘서트의 마빡이보다는, 오히려 그가 쓴 마빡이에 대한 분석에 난 더 크고 즐겁게 웃었다.

덧댐2. 334페이지 각주 번호가 어긋났고, 357페이지 개그콘'스'트라고 인쇄된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마빡이 부분을 참 재미있게 보고있는데 콘'스'트라고 적혀있어서 김이 좀 샜네요. 다음 쇄에서는 아마 고쳐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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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날이 가면 갈수록 추천도서 선정이 어려워집니다... 관심분야도 점점 넓어지는데다가, 새로나온 책 모두를 볼 수 있는 기능을 알게 되면서(...) 수많은 책의 제목과 소개를 다 살펴본 뒤에 이것저것 골라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요. 하루를 꼬박 투자해서 선정하는 것인데, 가장 마지막에 고른 이 다섯 개는 어느 정도 직감에 기대는 일이 많습니다. 여튼 이번 달에도 다섯 개를 골라보았습니다. 

1.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저자만 보고 무작정 골라놓고 마지막까지 빼지 않은 책(...)입니다. 보수주의적 관점이 다분한 학자이긴 하지만 그가 만든 다른 다큐멘터리인 <Ascent of Money>를 정말 인상깊게 보았기 때문이죠. 그의 다른 책도 어서 보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 책 역시 그가 제작에 참여한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제가 보았던 그 다큐멘터리같은 포스를 책에서도 내뿜어주길 기대해봅니다. 그의 전공은 경제사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분야이지만, 서양의 경제사란 자본주의 이후에 문명사 그 자체이기도 할만큼 다른 많은 분야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지요. 세계사를 다시 정리해볼만한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 법의 재발견 

  제게는 저자에 대한 흥미는 둘째치고, 가정을 법으로 분석해본다는 책의 내용소개 자체가 끌립니다. 가장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가정의 영역에 가장 공적인 표상인 법이 개입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가정이 매우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회학이나 철학에서 다루는 이론적인 분석과는 또 다른, 다시 말하면 아주 실용적인 접근을 이 책에서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되네요. 

 

 

3. 로드 

  부제에서 볼 수 있는 '길의 사회학'이라는 문구가 제 마음을 잡아당깁니다. 길은 가장 중요한 사회간접자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 건축적 의미 이외에도 사회학적으로는 더 다양한 담론화가 가능하겠지요. 여섯 가지 테마로 나누어서 설명했다고 하니 그 내용이 아주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항상 길을 밟으면서 어딘가로 떠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길이 다르게 느껴질 것만 같아서요. 

 

 

4. 자기계발의 덫 

  자기계발, 이 책의 원제의 표현에 따르면 'self-help' - 일종의 자기위안처럼 보이는 이 트렌드가 어떻게 사회를 지배하는지를 분석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현재 한국의 문제이긴 하지만, 단지 한국사회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이 책은 미국사회에서 자기계발이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설명하였으니까요.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몇몇 자기계발서들도 그 유행이 미국발이었던 적이 많은 만큼, 이 두 현상은 분명히 유사할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분석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도 있겠지요. 

 

5. 그렇다면, 과학이란 무엇인가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검토해보니, 코끼리를 보면서 장님들이 서로 싸우는 표지가 아주 인상적이네요. 이제는 지나간 이슈가 되어버린 황우석 사태를 바라보면서, 인문학자들이 생각해야하는 질문은 바로 '과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 과학사회학의 상대주의에 경도되거나, 혹은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 정도의 소개에 그치는 자연과학 개론서에 그치게 마련이죠. 이 책은 그런 단점들에서 조금 벗어나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되는데, 내용은 과학철학의 쟁점들을 다루면서 저자는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최근의 성과들이 충분히 반영된, 과학에 대한 적절한 저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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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1-08-0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계발의 덫> 저도 좀 살펴보았는데요, 이 책 역시또다른 자기계발서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더라구요.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책은 자기계발서이긴 하지만 말예요.

박효진 2011-08-09 16:29   좋아요 0 | URL
목차와 출판사 책 소개만 보고 선정한 것이라...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선정되면 흥미롭게 읽어볼 수는 있을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