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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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승길에서 영혼들의 죄를 씻어주는 설화 속 바리공주는 그 옛날 불라국 오구대왕의 일곱번째 딸로 태어난 후 버려진다. 오구대왕이 병에 들고 그 병을 고치기위해서는 저승땅 동대산 동수자의 약수가 필요하다.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바리, 바리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멀고 험한 저승 땅에서 약수를 구해온다.
 
 그리고 1980년대 북한의 청진에 딸만 일곱번째로 태어나 버려진 그리고 버려졌다는 이름으로 바리데기라 불려진 소녀가 태어났다. 그 소녀는 집에서 키우는 개(흰둥이)가 물고와 겨우 생명을 유지했다. 사람들의 아픔을 볼 줄 아는 그녀는 흰둥이가 낳은 일곱째 강아지 칠성이 그리고 할머니와 교감을 하며 성장하지만 버려진 그녀의 출생만큼이나 힘든 세상살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가 관료인데다 중국과 무역을 하는 터라 90년대 북한의 대기근속에서도 배곪지 않는 생활을 하였지만 외삼촌이 탈북후 남한으로 가면서 그들의 삶은 풍비박산난다. 가족들은 뿔뿔이 흝어지고 만주뻘에서 생활하던 그녀는 언니(현이)와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를 차례로 잃는다.
 
 다행히 중국에서 일자리를 잡고 친절한 중국인을 만나 발마사지를 배우지만 그 안정된 생활도 잠시, 빚에 떠밀린 중국인 내외로 인해 중국인 언니 샹과 함께 팔려 영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중국에서 배웠던 발마사지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사람의 과거와 아픔을 보는 능력으로 그녀는 영국에서 다시금 발마사지를 통해 사람들의 고통을 안아준다. 불법체류자라는 위험한 신분속에서도 함께 도움을 주는 여러나라의 사람들과의 삶속에서 그녀는 파키스탄계 무슬림 알리와 만나 어여쁜 아이 홀리야순이를 낳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삶은 그녀에게 평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뒤이어 발생한 9·11로 인해 알리의 동생 우스만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고 그를 찾기 위해 영국을 떠난 남편 알리는 행방조차 알 수 없다. 게다가 삶의 희망인 아이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야만 한다.
 
 도대체 삶이란 왜 이토록 잔인한 것일까?
 
 바리는 나에게 한국이라는 땅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근으로 죽어간 많은 북한의 사람들, 탈북의 틀에서 고생하는 북한 동포들, 아직도 팔려나가 해외를 떠도는 많은 불법체류자들, 그리고 남아공의 흑백갈등, 테러로 생명을 잃어야 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리는 그들 모두를 보듬는다. 그것이 이 잔인한 세상을 헤쳐나갈 희망이라고 말해주는 듯.
 
 바리는 발마사지를 하다가 에밀리라는 부유한 영국의 부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 역시 다른 사람의 삶의 흔적과 아픔을 읽을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을 빼앗긴 아픔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삶은 온통 커튼으로 닫혀있다. 어느날 바리는 에밀리 부인의 집에서 활기와 희망을 본다. 에밀리가 죽은 남편과 그와 다른 여자사이의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이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그리고 아이라는 희망을 통해 에밀리 부인은 삶의 고통이라는 커튼을 걷어제쳤다.
 
 인종을 떠나 사람은 모두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 아픔을 서로 공유하고 보듬을 때 우리에게 희망이 찾아온다. 바리는 우리모두가 감추어둔 우리안의 선한 마음이 아닐까? 그리고 바리공주가 찾는 그 생명의 약수는 바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보듬는 마음이 아닐까 하고 혼자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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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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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
(하권 308쪽)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들었다. 솔직히 이런 소설은 읽기에 거북함이 앞선다. 사회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간에 90년대 후반학번이라는 이유로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함께 아무런 노력도 없이 어느덧 절차상의 민주화가 진행된 이땅에 무임승차했다는 일종의 부채감을 지우기는 힘들다.

오히려 역사서적이나 사회과학서적을 읽을 때야 머리 대 머리로 이해하기에 부채감의 무게를 애써 무시할 수 있지만,소설이나 시를 대할때면 정서 대 정서로 읽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읽어내려가기엔 정서적 부채감이 크다.  

오래된 정원을 오랜시간 동안 책꽂이에 방치한 변명아닌 변명이다.

책을 읽다가 특정 사실들을 접하면 작가의 행적을 더듬는 버릇이 있다. 오래된 정원을 보면서도 오현우의 수감생활은 황석영씨의 방북사건으로 인한 5-6년간의 옥에서의 삶이 투영되었으리라는, 그리고 한윤희의 독일생활은 방북후 베를린에 거쳐했을 때의 경험이 귀한 체험으로 소설에 녹아있구나 하고 작가의 생활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1980년 광주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 올림픽, 동구의 몰락, 문민정부, IMF 경제체제까지 20여년 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6-70년대의 변화가 독재와 새마을 운동을 기반으로 한 닫힌 사회에서의 경제상의 변화였다면 8-90년대는 절차상의 민주화를 확보해내면서 열린 사회로의 문화상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80년 이후 절차상의 민주화가 확보될 때 쯤 동구의 몰락이라는 사건은 운동을 통해 사회를 뜨겁게 사랑했던 이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자조와 함께 IMF 경제위기에 에둘렸고, 경제위기 이후 부자아빠야 말로 아빠로서 인정받고, 20대 부터 재테크에 미쳐야하는 21세기에 황석영씨는 그 20년(오현우의 옥생활은 18년이죠)을 수감생활을 했던 한 인물을 불쑥 내밀었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주인공 오현우는 70년대 지하운동조직의 수괴로 검거되어 18년만에 석방된다. 그는 18년전 사랑했던 연인 한윤희와 함께 했던 갈뫼를 찾고 그곳에서 그녀의 노트를 발견한다. 오현우는 70년대 후반 자신의 활동을 추억하고, 자신의 수감생활이후 한윤희의 눈을 통해 그리고 그녀의 삶을 통해 자신이 부재했던 세상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둘의 희망인 딸 은결이를 만나는 장면까지..

책을 덮고선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추억해내는 모습은 지금 이 곳에서 역사를 기억해내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그리고 오현우의 삶은 그의 부재속에서도 한윤희를 통해 사회속에서 지속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윤희의 삶을 통해선 자신의 삶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 치열하게 살아간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오래된 정원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추구한 세대의 초상이 될 것이다(작가 후기)라는 말처럼 소설 [오래된 정원]은 읽는 이에게 그 초상을 기억하게 해 주기도, 때로는 처음 초상을 보여주기도, 그리고 실재하는 초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서의 짊을 한 번 탁탁 털어 구겨진곳 다시 펴내곤 깔끔하게 환기시켰다. 그 부채감을 잊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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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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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
(하권 308쪽)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들었다. 솔직히 이런 소설은 읽기에 거북함이 앞선다. 사회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간에 90년대 후반학번이라는 이유로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함께 아무런 노력도 없이 어느덧 절차상의 민주화가 진행된 이땅에 무임승차했다는 일종의 부채감을 지우기는 힘들다.

오히려 역사서적이나 사회과학서적을 읽을 때야 머리 대 머리로 이해하기에 부채감의 무게를 애써 무시할 수 있지만,소설이나 시를 대할때면 정서 대 정서로 읽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읽어내려가기엔 정서적 부채감이 크다.  

오래된 정원을 오랜시간 동안 책꽂이에 방치한 변명아닌 변명이다.

책을 읽다가 특정 사실들을 접하면 작가의 행적을 더듬는 버릇이 있다. 오래된 정원을 보면서도 오현우의 수감생활은 황석영씨의 방북사건으로 인한 5-6년간의 옥에서의 삶이 투영되었으리라는, 그리고 한윤희의 독일생활은 방북후 베를린에 거쳐했을 때의 경험이 귀한 체험으로 소설에 녹아있구나 하고 작가의 생활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1980년 광주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 올림픽, 동구의 몰락, 문민정부, IMF 경제체제까지 20여년 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6-70년대의 변화가 독재와 새마을 운동을 기반으로 한 닫힌 사회에서의 경제상의 변화였다면 8-90년대는 절차상의 민주화를 확보해내면서 열린 사회로의 문화상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80년 이후 절차상의 민주화가 확보될 때 쯤 동구의 몰락이라는 사건은 운동을 통해 사회를 뜨겁게 사랑했던 이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자조와 함께 IMF 경제위기에 에둘렸고, 경제위기 이후 부자아빠야 말로 아빠로서 인정받고, 20대 부터 재테크에 미쳐야하는 21세기에 황석영씨는 그 20년(오현우의 옥생활은 18년이죠)을 수감생활을 했던 한 인물을 불쑥 내밀었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주인공 오현우는 70년대 지하운동조직의 수괴로 검거되어 18년만에 석방된다. 그는 18년전 사랑했던 연인 한윤희와 함께 했던 갈뫼를 찾고 그곳에서 그녀의 노트를 발견한다. 오현우는 70년대 후반 자신의 활동을 추억하고, 자신의 수감생활이후 한윤희의 눈을 통해 그리고 그녀의 삶을 통해 자신이 부재했던 세상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둘의 희망인 딸 은결이를 만나는 장면까지..

책을 덮고선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추억해내는 모습은 지금 이 곳에서 역사를 기억해내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그리고 오현우의 삶은 그의 부재속에서도 한윤희를 통해 사회속에서 지속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윤희의 삶을 통해선 자신의 삶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 치열하게 살아간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오래된 정원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추구한 세대의 초상이 될 것이다(작가 후기)라는 말처럼 소설 [오래된 정원]은 읽는 이에게 그 초상을 기억하게 해 주기도, 때로는 처음 초상을 보여주기도, 그리고 실재하는 초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서의 짊을 한 번 탁탁 털어 구겨진곳 다시 펴내곤 깔끔하게 환기시켰다. 그 부채감을 잊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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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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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손님마마라고 천연두를 부르는 말이다. 소설은 1950년 신천대학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황해도 신천에서 있었던 사건을 주인공 류요섭의 50년만의 고국방문을 통해 풀어간다. 그의 고국방문은 신천대학살 사건에 대한 화해의 의도이고, 주인공은 화해를 위해 그의 고향에서의 사건을 정확히 기억해낸다.

주인공 류요섭의 가족은 기독교의 한국 포교와 더불어 기독교인이 되었고, 신천은 이런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지역이다. 해방이 되고 황해도 지역엔 소련의 세력이 되면서 공산주의가 정치적인 이념이 된다.
이 과정에서 본래 지주들과 소작농 사이의 갈등이 시작된다. 인민위원들에 의한 토지접수가 시작되고 지주들과 기독교는 탄압을 받게 된다.(지주들이 대체로 기독교였던 점도 있지만)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쟁 초반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후 북진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기독청년단은 자신들이 십자군인양 착각하게 되고 12세기 십자군이 그랬던 것 처럼 공산주의자들을 마귀로 지칭하면서 성전(聖戰)이라는 이름 하에 동족에 대한 잔인한 살육이 전개된다.

그 사건의 중앙에 있었던 류요섭의 형 류요한은 그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미국에서의 외로운 생활을 한다. 그리고 남아있던 류요한의 가족들은 신천학살의 주인공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힘든 생활을 하고. 신천학살의 당사자였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그 아픔을 공산주의의 선전물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아픔을 겪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의 동생이고, 동생이 기억의 저편들을 더듬어가며 화해의 손짓을 한다. 이 점은 아마도 역사의 당사자들이 이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지금의 현대인들의 모습이며 기억의 저편을 더듬는 과정은 역사를 다시 복원해야 하는 그리고 복원된 역사를 가지고 화해해야 하는 숙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하나 손님 즉 나쁜 의미의 손님마마는 우리 민족을 갈라놓았던 기독교와 공산주의였고, 손님마마는 현재도 여전히 우리 땅에 남아 우리민족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황석영의 <손님>은 어쩌면 일종의 주술행위이다. 소설이 황해도의 진지노귀굿의 흐름을 따랐다는 점에서 역사를 기억하고 민족간의 화해를 바라는 그런 굿을 소설을 통해 하고 있다. 역사속에서 화해를 바라며... 그리고 손님마마의 해꼬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민족을 향해 굿판을 한판 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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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Mr. Know 세계문학 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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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치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에 대한 소개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혹자는 완벽한 자유인이라고도 하고 많은 예술가들에게 원초적인 자유의 영감을 주는 인물 조르바.

 그런 조르바를 이제야 만났다. 조르바에 대해 건네 들은것이 벌써 스무해는 다되었을텐데 말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삶에 있어 새로운 시간을 갖고자 하는(새로운 깨달음 혹은 좀 더 깊은 생각을 위해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작가('두목')가 크레타 섬에 도착하면서 묘한 인물 '조르바'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해 그와 함께하며 나눈 일상과 대화, 그리고 헤어짐을 다룬다. 즉 조르바와의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조르바로 가득찬 책이다. 

 지식과 생각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는 '두목'에게 '조르바'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언제나 거침없는 행동속에 숨겨진 자유와 무엇에든 얽메이지 않는 원초적인 자유를 누리는 '조르바'를 통해 '두목'은 자유의 본질과 마주친다. 진리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자유가 바로 조르바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지만 두목은 그 자유를 인정할 수 없어(자신이 추구해온 진리탐구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어서일까?) 사색과 글쓰기에 끈덕지게 매달린다. 

 '자유'란 무엇인가? 본질적인 자유란? '조르바'는 그 어떤 것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추구한다. 그는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약, 국가라는 지리적 그리고 사상적 제약, 식욕과 성욕이라는 육체적 제약을 극복했다. 심지어 그는 도자기를 만드는데 제약되는 손가락을 잘라버리므로 꿈의 제약마저 벗어났다. 그와 달리 진리를 통해 자유를 얻고자 하는 두목은 도덕과 사회적 제도라는 줄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두목 "당신과 함께 갈 수도 있어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조르바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두목 "언젠가는 자를 거요"

 조르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 (339쪽)


 조르바는 진리를 통해 자유를 추구하는 두목이 바로 그 줄에 묶여 있음을 알고 있다. 진정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 줄을 잘라야 하는데 두목은 그렇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줄은 사회적 제약일지 모르지만 사회적 제도속에서 안정하고자 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다. 미지의 세계로 나가는 것은 바로 도박이니까. 본질적 인간이 아닌 사회적 인간(사회에 의해 제약되지만 한편으로는 보호받는)일 뿐이다.

 
 조르바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 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두목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조르바 "자유라는 거지!" (25쪽)

 바로 본질적 인간은 자유 그 자체다.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줄을 잘라야 하지만 그 줄을 자를 생각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적 자유속에 만족하며 산다. 조르바는 '박제된 자유인'일 뿐이다. 우리는 그의 자유를 부러워하지만 그와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조르바를 끊임없이 꿈꾼다. 조르바를 구경꺼리 유명한 작품처럼 벽에 걸어놓고 그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꿈꾼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박제되었을 뿐이다.

 더 이상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는 없다. 독재정권을 겪으면서 우리에게 자유는 민주적 자유가 전부였다. 90년대 후반 경제위기를 겪은 후 이제 자유는 '경제적 자유'일 뿐이다. 자유에 대한 정의에서조차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더 더욱 조르바가 그리워진다. '인간은 자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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