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코리아 2016 -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2016 전망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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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트렌드 코리아>는 많이 부족해보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들 읽히는지, 실제로 소비 트렌드와 관련된 한국인들이 얼마나 될까 싶다. 그럼에도 내가 해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혹시나 나중에 보고서에 써먹을 내용이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물론 그래본 적은 없지만,

 

그간의 비판때문이었을까 이번 <트렌드코리아2016>은 반성을 하려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트렌드라고 무조건 보여주려는 행동에서 벗어난 것 같다.

사회문화를 관통하는 트렌드 속에는 보이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시대의 그늘이 숨어있기도 하다. 호화스러움을 지양하고 평범함을 추구하는 2015년의 소비 시장 역시 그 이면에는 평범함 조차 누리기 힘든 사람들의 절절한 호소가 숨어 있었다. 실제로 2015년 10월, 한국소비자원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최근 1년간 소비 생활 만족도는 10.9% 하락했으며 소비 생활 양극화지수는 1994년 조사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갈수록 소비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만족스러운 소비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평범함은 과시의 대상으로 올라설 만큼 성취하기 힘드, 평범하지 않은 가치가 되고 있는 것이다. (164쪽)

그런데 사실 소비양극화가 최고에 올랐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책의 가치가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것 아닐까. 결국은 트렌드라는 것은 어떤 대중성을 가져야 하는데, 양극화가 심화되었다는 것은 평균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당연히 트렌드는 일부 상위 소비트렌드만을 반영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을텐데.

 

<트렌드코리아 2015>는 골목에 대한 부분을 말한다. 골목의 재발견, 재탄생. 하지만 골목의 재발견은 골목을 키워낸 소규모상인들 혹은 원 거주민들이 쫓겨나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런 과정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나로써는 젠트리피케이션은 관심있는 주제이다.

이러한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일본 도쿄의 '가구라자카'의 사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가구라자카는 도쿄 신주쿠의 길이 700m짜리거리다. 대표 골목으로는 게시야 신도, 숨바꼭질 골목, 효고 골목 등이 있다. 일본의 여타 다른 번화가와 달리 이 골목길에서는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친 에도 시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다른 지역의 복합 개발에 밀려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이 지역 주민들은 1990년대부터 전통 건물과 경관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 고층 건물 등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며 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에도 시대부터 계속되어온 전통적인 골목길에 자부심을 가져왔던 주민들의 굳은 의지로 거리의 정체성과 스토리를 지켜내며 이제는 그대로의 생명력과 개성을 유지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골목길로 자리잡은 것이다. (186~187쪽)

읽다가 한숨이 나왔다. 우리나라 골목과 과연 무슨 관계가 있길래 에도시대 골목을 예로 드는 것인가? 2-3백년 된 골목과 이제 2-30년된 한국의 골목이 어떻게 엮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골목이면 북촌 한옥마을 정도 아닌가. 현재 뜨고 있다는 골목과는 전혀 관련없는 것으로 해답이라고 제시하는, 책상위에 앉아서 나온 답이다. 딱!

 

예년에 비해 <트렌드코리아>의 재미는 덜한 것 같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들어맞는다고나 할까. 이상하게 올해에는 어떤 물건 혹은 브랜드, 실제 상점과 같은 실체보다는 현상에 주목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소비가 감소하니 소비트렌드 역시 수축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책 한권을 담아내기 힘들수 있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중에 몇 가지 흥미를 끈 현상들이 있다.

 

많은 연구결과에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더 높고 관련 질환의 발생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동일한 수준의 스트레스 상황에 처했을 때 경제적·사회적으로 상위에 있는 집단들은 빠르게 대처하고 곧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하위 집단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위험 인식의 심리적 불안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시사한다. (235쪽)

 

이런 불안사회에서 위험이 닥쳤을 때 의지할 사라, 의지할 곳이 없다는 사실은 불안을 더욱 가중시킨다. 때로는 불안이 도를 넘다보니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움직임에 불신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자신의 불안을 누군가 이용하는 것에 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지속될 경우,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실제로 위험이 닥쳤을 때, 늘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오히려 그 위험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다는 것이다. 불안에 대한 역치가 오히려 불안에 대한 둔감한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봐야 할 때다. (244쪽)

이러한 지적을 정치권과도 엮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테러방지법이니 하면서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법으로도 관리가 가능한 것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정부 여당에 대한 비판이 들어갔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현 정부 들어서 안전이라는 이름을 행정안전부라는 이름까지 만들어냈지만, 세월호 처리과정 등에서 보여주는 것을 보면 불안에 대한 역치로 불안에 둔감한 정부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저자들은 메르스와 관련해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정부와 관련 당국이 처음부터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즉, 무능한 자들이 관리하기 때문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저자들의 생각역시 정부당국을 대변하여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문제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적지 않은 시민들이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과학책등을 찾아보며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있어빌리티를 N포세대의 현상으로 설명할 때는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들을 좀 놀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기성세대가 구축한 성공의 프레임과 프로세스에 반감을 느끼는 젊은 세대는 오래 인내하고 한단계씩 쌓아가는 삭의 입지전적인 성공담론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성실과 겸손이 미덕이던 산업화 시대에는 인내하며 살아야 가능했던 성공의 매뉴얼도 유효기간이 만료됐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취업할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환경을 바꿀 수 없는 가혹한 현대에 달관세대들은 미래에 대한 기약없는 희망을 접었다. 대신 당장 눈앞에 필요한 것과 재미를 추구하고, 자격지심을 감춰줄 '있어빌리티'를 연마한다. 생활수준은 향상되었고 그에 따라 미적 감각은 높아져가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보니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극복하고자 포장하는 달관형 제스처가 하나의 현상이 된것이다. (369쪽)

 

이 책에서 그나마 관심있게 읽은 부분은 육아에 대한 부분이다.

학력수준과 문화자본이 높아진 똑똑한 젊은 부모들은 아이를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기르는 경쟁을 시작했다. 이렇게 정성 들여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보면 마치 검증된 공법을 총동원해 건축물을 설계하고 시공해나가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다. 이에 이런 자녀들을 빌딩 건축하듯 하나씩 하나씩 공들여 키운 아이라는 의미로 건축의 '아키텍처Architecture'와 아이의'키즈kids'를 붙여 '아키텍키즈Architec-kids'라 명명하고자 한다. 부모의 계획에 따라 설계된 도면을 바탕으로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길러지는아이들이 바로 '아키텍 키즈'다.(375쪽)

 

고도성장기인 1980년대에 태어나 본격적인 치맛바람·바짓바람 속에서 성장한 1세대가 이제 부모가 되었다. 소싯적에 <수학의 정석>을 풀던 세대가 '육아의 정석'을 찾아 나선 것이다. 좋게 보자면 과학적이고 열정적이며, 나쁘게 보자면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극성스러운 일부 신인류 부모들의 새로운 육아법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384쪽)

 

 

올해는 실질적인 실체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이 많이 보여 실망이다.  즉, 현실적인 소비가 한계에 드러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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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트렌드 2016 - 모바일, 온디맨드의 중심에 서다
커넥팅랩 엮음 / 미래의창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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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코리아 같은 경우에는 필독서로 자리 잡았지만, 읽어보면 의아한 내용이 많다.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도 강하고, 실체가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라서.

그러나 <모바일트렌드>는 모바일 전망의 요약된 백과사전이라 할만하다. 이 분야의 전문적인 서적을 읽을 필요가 없다면 이 책 한권이면 정보 습득에 충분하다.

 

관련기사 내 손안의모바일, 이젠 금융 서비스까지 품다 

http://bizn.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510060231255&code=930201&med=khan

 

현재 핫한 주제인 핀테크, 인터넷은행 등 궁금해할만한 내용이 전부 들어 있다.

 

2016년 모바일트렌드의 주제어는 '모바일, 온디맨드의 중심에 서다' 이다. 이제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모든 기술, 서비스가 모바일로 집중되는 것 같다. 그만큼 일상생활에 가까이 와 있다 볼 수있다. 특히 O2O가 가능해지면서 모바일은 온디맨드 그 자체이다.

 

우버로 대변되는 온디맨드 서비스. 우버의 모습은 온디맨드 기업들이 현재 어떤 위치이고, 어떤 방향으로 변해가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은 '모든 것이 우버화되고 있다(There's an Uber for Everything now'는 기사를 통해 우버 서비스의 무서운 파괴력을 보도한 바 있다. 제2의 우버를 표방한 스타트업들이 쏟아지고 있으며 BMW, 포드 등 전통적인 자동차 회사들까지도 우버식의 차량 공유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이제 우버는 '우버화uberification/uberization'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공유경제 자체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52쪽)

 

우버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유통업으로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미국 내 일부 지역과 스페인 바로셀로나,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음식 배달 서비스인 우버이츠를 시험중이다. 또한 인근 약국 등에서 생필품을 사다주는 우버코너스토어, 교통 체증이 심한 뉴욕 맨해튼에서는 주로 명품을 취급하는 길트그룹과 제휴를 맺고 자전거 택배 서비스인 우버러시 등을 운영 중이다. (57쪽)

 

하지만 온디맨드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외려 새로운 법적인 문제와 기존 사회 구정원과의 갈등 등이 드러나고 있다.  

온디맨드 서비스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이슈들은 여전히 법적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누구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flexible worker)'는 강점은 거꾸로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서비스 제공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규제와 충돌한다. 그리하여 기존의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했던 사업자들과 이해 충돌이 생겼고, 새로운 서비스 제공자들이 사업자 등록을 하지 않다보니 탈세 논란도 일었다. 또한 점차 온디맨드 서비스를 부업이 아니라 생계유지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이들의 불안정한 고용 형태와 일정치 않은 수입 등으로 인한 사회적 안전망도 논란이 되고 있다. (86쪽)

 

사람들의 요구에 맞는 서비스를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큰 것은 모바일이 기준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로화면에 익숙해왔던 지금과 달리 모바일에 맞춰 세로화면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 한 예이다.

트위터가 2015년에 인수한 페리스코프는 세로 화면을 주된 비율로 내세우고 있다. 세로 화면은 모바일 중심 시대에 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스마트폰에서 가로로 회전하는 추가 동작을 하지 않고도 촬영한 그래도 화면을 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이 2012년에 인수한 인스타그램도 2010년 설립부터 5년간 고수한 정사각형 화면 비율을 버리고, 2015년 8월부터는 가로세로 비율이 다른 사진과 동영상 업로드를 모두 허용하기로 정책을 바꾸었다. 화면 비율에 따라서도 이미지가 전달하는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모바일 이용자의 편의와 표현의 자율성을 고려했다고 할 수 있다.(161쪽)

가로 세로가 무슨 의미냐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사진이나 동영상은 기본적으로 가로가 중심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모바일 사용자들에 맞춰 변한 사례이다.

 

하지만 모바일 세상을 보는 것이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나라가 모바일계에서는 전혀 선진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물론 아는 사람들은 아이폰이 세상에 선 보였을때 이미 우리나라는 모바일계에서 뒤쳐졌다는 것을 알았다. 최근에는 중국의 모바일 발전이 너무 무섭다. 샤오미를 필두로한 하드웨어는 곧 따라잡힐 것이고,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중국에 많이 뒤쳐져 있다.

온디맨드 서비스 선진국으로 중국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의 온디맨드 서비스는 우리나라보다 3~5년 정도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2010년 이후, 중국 내 스마트폰 사용자가 늘어남에 따라 요식 업체들이 O2O 마케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 최대 커머스 기업인 알리바바는 온디맨드 서비스 시장 선점을 위해 중국 최대 가전 유통회사인 쑤닝원상과 상호 지분투자를 통한 제휴에 나섰고, 백화점을 보유한 인타이 쇼핑의 최대 주주로 올라서는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지배력을 높여 온디맨드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 (30쪽)

 

2015년 3월에는 알리바바가 독일 하노버에서 개막한 정보통신전시회 세빗에서 안면인식 결제 시스템을 공개하기도 했다.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이 기조 연설에서 안면인식 결제인 스마일 투 페이를 직접 시연한 것이다. 스마트폰의 전면 카메라를 통해 안면을 인식하는 기술로 알리페이 앱을 통해 중국 내에서 테스트를 거쳐 상용화될 예정이라고 한다.(224쪽)

 

이외에도 모바일결제, 핀테크, 인터넷뱅크 등 최근의 이슈들도 소개된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인터넷은행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국내 대부업체의 일본계 기업 비중이 50%를 넘어섰고 제1금융권과 제2금융권 간의 금리 격차가 심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중금리 대출을 주로 하는 인터넷 전문은행에게 인가를 내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업계의 일반적인 견해다.(261쪽)

 

모바일 환경, 기술, 생태계는 분명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이룰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혁신이 지속되려면 모바일의 혁신 역시 가속회 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모바일 혁신이 정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계속 발전할 지 아닐지 관심을 갖고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스마트폰 산업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줄을 잇고 있지만 그렇다고 당장 이를 쇄신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스마트폰 시장의 저성장이 고착화되지 않겠느냐는 지적이 뼈아프다. 저성장의 원인으로 신제품을 기다리는 대기 수요나 경기 불황과 같은 단기적 측면이 아닌 스마트폰 자체의 혁신 부재가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스마트 폰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먹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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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권석천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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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정치관련 책들과 읽는게 맞는게 싶지만, 실은 정치 이야기이다. 정치란 우리 삶이니까.

 

기본적으로 정의는 정치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면에서 언론은 그 역할을 저버렸다. 세월호 참사현장에서 나온 '기레기'(기자 쓰레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그 폐해는 정치의 영역에서 특히 심각하다. 매체 성향에 맞는 정치인 잘못은 눈감아주면서 성향이 다른 정치인에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댄다. '종북 대 애국', '독재 대 민주', '친노 대 친박'으로 나누고 재단함으로써 진영논리를 확대 재생산한다. 그 결과 사안은 같은데 해석은 정반대다.(339쪽)

 

그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정의라는 이름을 사람을, 사회를 단죄하는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고, 스스로가 그 권력에 도취되어 있다. 정의를 말 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닌 것이다.  

몸통은 검찰권이다. 임용된 지 몇달 안 된 실무수습 검사가 어떻게 검사실에서 피의자에게 성행위를 요구할 수 있는가. 특수부 부장을 지낸 검사가 어떻게 차명계좌까지 만들어놓고 기업과 다단계 사기범 측근의 돈을 받은 것인가.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한 건 검사들 손에 쥐어진 힘이었다. 검찰이 마음먹기에 따라 수사 대상과 범위가 달라지고 기소 여부가 결정되면 적용할 법조문이 가려지는 현실, 권한을 앞세워 권력과 돈, 향응을 추구하고 싶은 일부 검사들의 욕망을 수준 이하의 동료들이 폭로한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행정부가 국회를, 사법부가 국회를 압박하는 것이 너무 당연히 여겨진다. 국회의원들은 없어져야 할 것으로 보는데, 어떻게 보면 일반 국민들의 입이 될만한 국회를 깔보는 행동일 수 있다. 자기네들 리그에 붙여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서는 삼권분립이 제대로 지켜져야 한다.

 

대부분의 민주국가는 불체포 특권을 두고 있다. 1당 독재였던 소련 헌법에도 "최고회의 대의원은 최고회의의 동의없이 체포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왕이 마음대로 의원들을 가둘 수 있는 시대도 아닌데 이 특권이 왜 필요할까. 3권 분립에 따른 견제와 균형을 위해서다. 행정부나 사법부가 수사,재판을 통해 의회 기능을 무력화하고 의원, 특히 야당 의원을 정치적으로 탄압할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173쪽)

 

그리고 그 행정부의 권력이라는 것도 잘못됐다. 사실 국민들은 권한을 준것이지, 그들에게 권력을 준것은 아니다.

나는 공권력이란 말은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은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공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른바 공권력이 과거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75쪽)

 

게다가 세월호 사건을 통해 행정부의 무능이 그대로 드러났다. 관료주의의 폐해까지도 말이다.

"관료는 민원인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사례로 다룬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세월호 침몰 참사에서도 현장의 해경과 해양수산부, 안전행정부, 청와대 관료들 눈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닐까. 승객, 승무원 476명은 '집계해서 위에 보고해야 할 숫자'였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인재는 사람이 일으킨 재앙에 머물지 않는다. 비인간화된 사회와 교육이 빚어낸 인간성 소외의 재앙인 것이다.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들의 공허한 눈빛은 수많은 사람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 시험에 나오지 않을 질문에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듯, 인간에 대한 열량을 소비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40쪽)

 

 

그렇다고 미래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미 사회는 다양성을 잃어버렸다. 상위계층이 모든 것을 점점 장악해 나가고 있고, 그 토대가 바뀔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제 관심은 10~20년 후 대원외고 출신이 법조계의 주축이 됐을 때 재판과 수사가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이냐다. 과거 경기고는 전국, 각계각층에서 충원됐다. 가난한 수재가 적지 않았다. 성향도 이질적이었다. 인권운동의 상징인 고 조영래 변호사, 정통보수를 대편하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진보사법의 대표 주자 박시환 전 대법관, 안대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 학교 출신 법조인이다.

반면 외고를 비롯한 특목고 출신은 계층적 동질성이 강하다. 특목고 입학생 중 절반가량이 서울 강남 3구에 거주한다. 부모가 법조인, 의사, 교수와 같은 전문적인 경우가 많다. 기성 법조인들은 "재판, 수사하는 자와 받는 자의 출신 계층이 다르다는 건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111쪽)

 

문제는 개개인들 역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 사회에 낙오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자녀의 성공을 원하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도 스스로를 속이는 능력에 가깝다. 자기소개서는 "내가 아닌 나"를 거리낌없이 적어낼 줄 알아야 이기는 게임이다. 봉사도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활동이어야 한다. 술자리에서 "계층사다리가 사라졌다고 개탄하면서도 내 스펙이 아들딸에게 세습되는 건 당연하게 여긴다. 아이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이 없기'를 바라거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다가는 이 사회에서 갑으로 살기 힘들다는 사실을(24쪽)

 

저자가 이렇듯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월호에 대한 충격때문이다. 세월호는 사회의 많은 것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그렇게 가슴아픈 현실의 민낯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비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사람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다.

 

 

 일단 권석천의 글에는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보는 듯 하지만 실은 사람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법망을 조임으로써 범법자는 끝까지 단죄하되 공포의 희생자는 막는 전환점이 되길 기대한다. 아무리 소수의 일이라고 해도 당사자에겐 인생이 걸려 있다.(322쪽)

 

정의로운 사회는 멀기만 한 것일까?

'정의가 이기는게 아니다. 이기는 게 정의다.' 이 지랄 같은 상식을 깨는 건 슈퍼 히어로 한두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어깨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우린 결국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다.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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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야당을 갖고싶다
금태섭 지음 / 푸른숲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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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논란의 여지가 가능한 책이다. 안철수의 창당과정과 민주당과의 합당과정에 앞장 섰던 금태섭의 책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관심이 있어, 안철수의 정치행보를 알고 싶다면 읽어볼만하고, 안철수의 아쉬움점 등도 읽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지적은 충분히 생각해 볼만하다.

정치판은 합리적인 토론이 통하지 않고 내부 비판이 금기시 되는 장이 되었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 중에서 새누리당의 부패와 편협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지지할 정당을 찾기 어려워졌다. 그런 점들을 비판했다가는 싸늘한 눈길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진보 쪽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의 무능과 폐쇄성을 지적하면 가뜩이나 불리한데 우리 편끼리 싸우면 어떻게 하느냐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수 많은 '정치 고수'들에게 조중동에 이용당하는 걸 모르고 자기 진영에 총을 쏜다며 공격을 받기도 한다. 선거 때마다 있었던 야권 연대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할 선거 관련 부정을 저지른 정치인이라고 해도 연대의 대상이라는 이유로 관대하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당연히 해야 할 사퇴를 놓고도 야권 지식인들은 일제히 위대한 결단이라며 칭송한다. 이런 모습이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206쪽)

 

사실 그간 한국정치는 양당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본인의 정치적 의사와 맞는 정당을 찾기 힘든 구조였다. 옛날 민주당이 보수에서 진보까지 아울렀지만, 지역적 색채가 강했고, 지금의 야당은 지역색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정치적으로 많은 이들을 포용하기에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선택이 필요한데, 현실적인 가능성은 의문이다.

 

저자가 이기는 야당을 위해서 가장 주목하는 바는 의제설정 능력이다. 그러나 지금의 야당은 의제설정능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다른 정치전문가들도 지적하는 바다. 반대만 할 줄 알지 대안을 못 내놓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나 정의만을 내세우는 야당을 지지해달라고 하는 시대는 갔다.막연히 '민생문제'에 집중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야당은 그 이상의 '똑똑하고 유능한 의제 설정 능력'을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신뢰를 얻어야 한다.(303쪽)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적은 바로 젊은 정치인의 등장이다. 사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미 40대에 당을 대표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초선의원들의 나이가 50대를 넘어서고 있다. 전문정치인의 부재는 그만큼 아마추어 정치인들이 계속 정치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선진국에는 상당히 젊은 나이에 정부 수반에 오른 정치인들이 꽤 많다. 영국의 존 메이저는 47세에, 토니 블레어는 44세에 각각 수상이 됐고, 버락 오바마는 47세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20대 초반부터 지역사회 혹은 정당의 기초 조직에서 활동하면서 경력을 쌓아왔다. 존 메이저가 시장통에 설치된 연단 위에 올라가서 연설을 하기 시작한 것은 21세 때였다. 토니 블레어는 22세에 노동당에 가입해서 정치를 시작했고, 오바마도 대학 재학 중이던 20세에 첫 정치 연설을 했다.(307쪽)

 

그의 생각에 동의하듯 안하듯 인정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이기는 야당을 갚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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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 '정치 사랑'외에 탈출구는 없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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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회의 현실이다. 중간계층이 점점 엷어지고 있다. 중장년에게는 불안이 청년들에게는 좌절이 일상화되고 있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세상이다.

 

<1년만 미쳐라>,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서른살 꿈에 미쳐라>,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 ...
이렇듯 미치라고 외치던 때가 있었지만, 아무리 미쳐도 안되더라는 걸 깨닫는 데인 오랜시간이 걸리치 않았다. 그 어떤 미침으로도 이른바 '잉여사회'라는 구조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섭은 잉여사회를 "수많은 잉여가 아귀다툼을 하고, 그중 몇몇이 이기지만 결국은 착취당할 기회를 갖게 되는 종류의 사회"라고 정의한다. "우리 시대의 잉여는 풍요가 아니라 양극화로 대변되는 격차와 집중의 산물이고, 무너지고 있는 중간층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것이며, 좌절한 이상주의자이기는커녕 이상이라는 것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 잔해와 폐허 위에서 자립의 가능성을 박탈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라고 윽박지르는 이상한 마케팅이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기승을 부리고 있다. '미려차'는 말은 좀 사라졌을망정,... 자부심은 '열정'이란 말로 대체되어 "당신의 열정을 보여달라"거나 "좀더 열정을 가지고 일해라"라는 주문이 난무한다. 한 텔레비전 광고는 "당신이 머리가 아픈건 열정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제 열정을 갖지는 않는 당신은 죄인"이 된다. 이런 현실을 고랍하는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의 저자들은 "열정은 어느덧 착취의 언어가 되었다"라고 단언한다.
"열정은 제도화 되었다. 오늘날 면접관들은 열정을 '측정'한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답변은 간단한다. '악조건들을 얼마나 버텨내는지' 확인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접관들에게는 우리를 모욕할 권리가 주어진다."(24~25쪽)

 

하지만 이를 해결해야 할 진보(?)는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정부만 비판하면 국민들이 따라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선거마다 패배하고 있는데, 패배해도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바로 한국형 진보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특성이기도 하다. 늘 현실분석을 희망사항으로 대체하면서, 현실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증오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버릇,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신들의 희망사항이 전혀 실현되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성찰과 반성없이 자기들이 옳았다고 버티는 '유체이탈' 성향은 지금도 건재하다. (66쪽)

 

진보는 보수와의 관계에서 "나는 보수가 아니다"라는 걸 드러내는 자기 존재증명에 정치적 역량을 탕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즐겨 쓰는 '정체성'이니 '선명성'이니 하는 말이 바로 그런 자기 존재증명의 슬로건이다. 변호사 출신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재선의원은 "이 정당에서 내가 아무리 주도적인 활동을 해도, 결국 듣는 말은 '당신 80년대에 뭐했어?'였다. 아무리 뛰어도 나의 위치는 주변부였다"라고 토로했다.(83쪽)

 

586정치인들만 그러는 게 아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도덕적 우월감이나 선민의식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생활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변화에 대비하고 변화를 추진해야 할 사람들마저 "당신 80년대에 뭐했어?"라는 추궁에 대비하기 위해서인지 보수에 대해 호전적인 자세를 취하며 거친 언어를 구사한다. '싸가지 없는 진보'라고 비판하지만, '싸가지 없음'은 도덕적 우월감이나 선민의식의 표현이기에 그런 비판이야말로 싸가지 없는 게 되고 만다.(86쪽) 

 

현실을 모르는게 당연하다.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큰 정당은 여전히 80년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86 친노라는 이들이 80년대 민주화의 대가를 정당안에서 챙기고 있다. 국민은 뒷전이다. 그래서 현실문제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현재 청년들은 구조보다 더 시급한 문제에 걸려있다. 당장 하루하루가 힘들다. 그런 그들을 이해를 못하는 제1야당.

 

승리의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선 투표로 힘을 키우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다. 권지웅은 20대의 낮은 투표율에 대해 이렇게 항변한다. "정치적 무력감이 큰 탓이죠. 내가 해서 될까? 이런 거죠. 젊은 세대들은 집단적 행위를 통해 뭔가를 얻은 경험이 크지 않아요. 정치적 행위를 통한 성공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정체 상태의 시민에게 왜 투표하지 않느냐는 다그침이 통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투표에 관심이 없거나 할 수 없는 사람의 조건을 바꿔주는 방식으로 투표하게 해주는 것이 책임 있는 자세지요. '투표하라'고 다그칠 게 아니라 '왜 투표하지 못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작은 승리'의 경험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따라서 구조 타령보다는 미시적인 각론에 충실해야 한다. 가려운 곳을 제대로 짚어서 긁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형성되는 신뢰로 세력화를 이루고, 그렇게 결집된 힘으로 구조 개혁도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기반 없이 외쳐대는 구조개혁은 양심의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한 마스터베이션에 전락하기 쉽상이다.(118~119쪽)

 

오히려 새정치민주연합보다는 청년들이 만든 작은 유니온들이 더 실질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국회의원 하나 없지만 아르바이트생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에 더 앞장서고 있다.

 

나 역시 '2세대 진보정치'와 '2세대 사회운동'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청년유니온(노동)'과 달팽이유니온(주거)'처럼 거대 구조 보다는 의제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이 필요하다. 진보는 구조에 더 신경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어야 한다"라는 말로 답을 대신할 수 있겠다. 청년들이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린 현 상황에서 구조 타령은 허황된 선문답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정작 청년들이 정치에서 배제되면서 실질적으로 청년들을 위한 정책은 없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정년이나 임금피크제, 노동법은 모두 기성세대와 관련있는 일이다. 여야 모두 청년의 문제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안 역시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욱더 청년의 청치참여가 필요한 대목이다.

 

물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쉽지 않다. 강준만은 공간의 활용을 이야기한다.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청년들이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장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에 대한 투자는 소모적 복지가 아니다. 세대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출발은 청년 정치인 양성에 있다. 세대갈등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청년들이 이내 좌절하고 꿈을 접는 나라는 미래가 어둡다.(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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