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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ㅣ 사계절 1318 문고 8
박상률 지음 / 사계절 / 1997년 12월
평점 :
누군가의 성장을 이야기듣는다는 일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다. 아이가 어른이 된는 과정에는, 기쁨과 슬픔, 아련함과 힘겨움, 당당함과 쓸쓸함 등의 서로 다른 감정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이처럼 복합적이고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기가 또 있을까? 그러므로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그 나이또래는 물론,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가치있는 이야기가 된다.
<봄바람>역시 성장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철모르던 어린아이가 사랑을 알게되고, 외로움을 알게되고, 세상의 모순을 알게되는 과정을 매끄럽게 그리고 있다. 이러한 성장과정 중에서 가장 근간에 위치하는 것은 '서울에 대한 동경'이다. 크고 넓은 곳에 대한 동경,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심, 그것은 소년기에 자연스럽게 태동하는 감정이며,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동경에는 논리적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작품에서는 그것을 봄바람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진술은 단순히 어린아이를 화자로 내세웠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경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진술이다. 그런데 이것을 본능적인 동경으로 파악하기에는 다소 의심의 여지가 남는다. 왜 모험을 떠나는 장소가 하필이면 서울이어야 하는가?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려면 오히려 바다 건너 저 먼 곳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거기에는 우리의 근대화가 만들어낸 '비뚤어진 성공의 신화', 아니 신화처럼 위장된 허울뿐인 거짓말이 숨겨져 있다. 서울에 대한 동경은 60년대부터 시작되어, 70년대와 80년대에 이르러 일반적으로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여파가 남아있는 현상이다. 누군가는 학업을 위해서, 누군가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명예를 위해서 고향을 떠나서 도시로 몰려든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서울이 목표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고향을 떠난 뒤의 서울은 목표가 되지 못하고 아주 힘겨운 삶의 과정이 된다는 것. 누구나 성공을 꿈꾸며 서울로 올라오지만, 그곳에 가기만 하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서울이라는 곳은 누구나에게 기회에 제공되는 이상향이 아니라는 것. 그런데 문제는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 빈민층이 되거나, 공장 노동자가 되거나, 몸을 파는 직종에 종사하게 되어 버렸다. 물론 드물게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들의 성공은 경제적인 성공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서 그들의 성공이 과연 진정한 성공인지 여부도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하여튼 그들의 이야기는 화려하게 포장되어 거짓 신화가 되어, 봄바람 속에 섞이게 된다.
물론 이 작품이 '서울에 대한 동경'을 긍정적으로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봄바람에 이끌려 고향을 떠났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에 대한 비판이 강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이 어째서 일어나는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즉, 현상을 건드렸을 뿐, 원인을 다루지는 못했다. 때문에 이 이야기는 성장에 대한 고찰이 되지 못하고, 성장에 대한 단순한 기록과 추억에 머물게 된다.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이 작품은 조카 녀석의 숙제를 도와주려고 같이 읽었던 것인데, 나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조카는 별다른 흥미를 나타내지 못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녀석에게 이 이야기는 너무나 낯설고 낡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종류의 성장 이야기, 즉 시골 소년이 품었던 도시에 대한 동경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볼 문제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1318문고'라고 되어 있는 이 이야기의 타이틀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 어른들이 자신의 성장을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