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름답다 사계절 1318 문고 14
박상률 지음 / 사계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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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의 주인공이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었다면?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만큼 작가의 전작인 <봄바람>과의 연관성이 강하다는 증거인데, 이전의 작품이 유년기에서 벗어나서 소년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면, 이 작품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바로 이렇게 달라졌기 때문에, 작품의 분위기는 전작에 비해서 훨씬 무겁고, 전망도 암울하다. 이제 주인공이 느껴야 하는 아픔은, 단순히 성장기에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하는 정도를 넘어서, 입시제도라는 모순된 사회구조에 의한 것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아픔은 훨씬 구체적이고, 또한 훨씬 강도가 높다. 앞의 아픔이 은근하게 느껴지는 통증이라면, 뒤의 아픔은 숨도 쉴 수 없게 몰아치는 맹렬한 고통이다.

이러한 아픔과 함께 주인공을 괴롭히는 또 다른 유혹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性)의 문제이다. 사실, '성'이라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되는 순간은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다. 오히려 상당한 두려움과 공포를 동반한다.

최근 들어 몇몇 영화에서 소년들의 성을 단순한 흥미거리로 다루고 있는데, 나는 이러한 접근에 불만을 느껴왔다. 물론, '성'이라는 것이 큰 유혹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보다 솔직해지자, 그것들과 처음 만나게 된 순간부터, 당신은 그것이 좋았는가? 오히려 당황스럽거나, 죄를 짓는 듯한 기분에 시달리지는 않았는가? 접근하지 말이야 했을 어른들의 세계에 잘못 들어선 것같은 낭패감을 느낀 적은 없는가?

'성'이라는 것은, 더구나 사춘기 소년들이 처음으로 접해야 하는 성은, 결코 환상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환상이니 매력이니 하는 것들은 학습되는 감정에 불과하다. 주위의 또래 친구들이, 혹은 내게 그것을 보여주었던 형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그러한 소년의 심리를 잘 내보이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은 유달리 젖가슴에 집착하는데, (그 이유는 너무도 당연스럽게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진부하기는 하지만, 이보다 명확한 설정이 또 어디 있을까?) 그렇다고 그 인물이 가슴을 동경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젖가슴은 막연한 공포의 대상의 되고 있기도 하다. 첫 키스를 경험했을 때 뭉클한 젖가슴의 감촉에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 몰래 젖가슴을 훔쳐보면서도 외면하게 된다는 설정은 탁월하다. 이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여타의 작품과 구분되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탁월한 심리묘사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이전 작품인 <봄바람>에 대한 글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그것은 바로 '작품의 현재성'이 보족하다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요즘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요즘 아이들의 정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주인공의 고민과 사색이 낡은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주인공이 구사하는 언어는 요즘 고등학생들의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의 고민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며 진부하다.

이러한 현재성의 결여는 작가와 요즘의 청소년들의 감정이 일치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즉, 작가는 청소년들의 눈에 맞추어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마음까지 맞추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활용되고 있는 사투리의 구사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할 수 있다. 사실, 이 작품은 뚜렷한 향토색을 나타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사투리의 사용도 불필요한 소설적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이쩌면 작가는, 이런 장치를 통해서 요즘 아이들과의 괴리를 줄여보고자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의도였다면 그 장치는 성공적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작가와 요즘 아이들 사이의 괴리는 이런 기법적인 문제로 해결될 수 있을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이러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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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주의자의 꿈 -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
조희봉 지음 / 함께읽는책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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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대학을 졸업하면 당연스럽게 책읽기를 멈추는 우리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학생 시절에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니다. 교과서와 참고서 이외의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었던 고등학교, 책읽기보다 술마시기에 더 열을 올렸던 대학교, 책을 읽느니 직장상사나 동료들과 술자리를 하기를 강요하는 직장생활, 이런 상황에 살고 있으면서 어떻게 손쉽게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더구나 실용서적이 아닌 책들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그리 쉽게 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아니다.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책을 읽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씩은 확인받고 싶어한다. 자신들의 생활방식이 그리 유별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자신들이 택한 놀이수단이 크게 유해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 역시도 확인받고 싶었다.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생활방식을 택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이다. 연애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의 연애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왜 저런 사람을 좋아하는 것인지? 왜 저런 말에 재미있어 하는지? 왜 저런 행동을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하지만 막상 자신이 그 연애의 당사자가 된다면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그걸 지켜보고 있는 다른 사람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채로. 연애편지도 역시 그렇다. 남이 읽으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쓰는 입장에서는 그것만큼 심각하고 간절하기만 한 구구절절한 사연도 없지 않은가?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즐거워서 책읽기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왜 책을 읽는 것인지? 도대체 무엇이 재미있어서 저 따분한 것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인지? 먹지도 못하고 보기 좋은 장식품도 되지 못하는 저 따위 것에 왜 돈을 투자하는 것인지? 그런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알 수 있는 방법은 경험해보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책을 즐겁게 읽어본 사람들에게는 감미로운 텍스트가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텍스트가 될 것이다. 하긴,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이 책을 열어볼 턱도 없지만 말이다.

이 책의 저자가 주창하는 책읽기 방법은 '전작주의'이다.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이 용어는 사실 별다르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저자는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흐름은 물론 심지어 작가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징후적인 흐름까지 짚어 내면서 총체적인 작품세계에 대한 통시/공시적 분석을 통해 그 작가와 그의 작품세계가 당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찾아내고 그러한 작가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일정한 시선'(pp.24-25.)이라고 설명한다. 설명은 거창하지만 대단한 의미가 있는 용어는 아니다. 뭐, '좋아하는 작가의 모든 작품을 모두 읽는 것'이라는 뜻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내는 이것을 일부러 택하고 싶지는 않다. '전작주의'라는 생각 자체에는 동의하고, 그런 독서방법이 책읽기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그것에 '-주의'를 붙였다는 점이다. 나는 그 말이 주는 카리스마를 의심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조금 더 자유로운 전작주의이다. 읽고 싶은 책, 느낌이 좋은 책을 따라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게 되는 것, 그것이야 말로 가장 행복한 '전작주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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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사계절 1318 문고 8
박상률 지음 / 사계절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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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성장을 이야기듣는다는 일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다. 아이가 어른이 된는 과정에는, 기쁨과 슬픔, 아련함과 힘겨움, 당당함과 쓸쓸함 등의 서로 다른 감정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이처럼 복합적이고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기가 또 있을까? 그러므로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그 나이또래는 물론,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가치있는 이야기가 된다.

<봄바람>역시 성장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철모르던 어린아이가 사랑을 알게되고, 외로움을 알게되고, 세상의 모순을 알게되는 과정을 매끄럽게 그리고 있다. 이러한 성장과정 중에서 가장 근간에 위치하는 것은 '서울에 대한 동경'이다. 크고 넓은 곳에 대한 동경,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심, 그것은 소년기에 자연스럽게 태동하는 감정이며,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동경에는 논리적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작품에서는 그것을 봄바람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진술은 단순히 어린아이를 화자로 내세웠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경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진술이다. 그런데 이것을 본능적인 동경으로 파악하기에는 다소 의심의 여지가 남는다. 왜 모험을 떠나는 장소가 하필이면 서울이어야 하는가?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려면 오히려 바다 건너 저 먼 곳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거기에는 우리의 근대화가 만들어낸 '비뚤어진 성공의 신화', 아니 신화처럼 위장된 허울뿐인 거짓말이 숨겨져 있다. 서울에 대한 동경은 60년대부터 시작되어, 70년대와 80년대에 이르러 일반적으로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여파가 남아있는 현상이다. 누군가는 학업을 위해서, 누군가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명예를 위해서 고향을 떠나서 도시로 몰려든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서울이 목표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고향을 떠난 뒤의 서울은 목표가 되지 못하고 아주 힘겨운 삶의 과정이 된다는 것. 누구나 성공을 꿈꾸며 서울로 올라오지만, 그곳에 가기만 하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서울이라는 곳은 누구나에게 기회에 제공되는 이상향이 아니라는 것. 그런데 문제는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 빈민층이 되거나, 공장 노동자가 되거나, 몸을 파는 직종에 종사하게 되어 버렸다. 물론 드물게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들의 성공은 경제적인 성공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서 그들의 성공이 과연 진정한 성공인지 여부도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하여튼 그들의 이야기는 화려하게 포장되어 거짓 신화가 되어, 봄바람 속에 섞이게 된다.

물론 이 작품이 '서울에 대한 동경'을 긍정적으로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봄바람에 이끌려 고향을 떠났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에 대한 비판이 강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이 어째서 일어나는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즉, 현상을 건드렸을 뿐, 원인을 다루지는 못했다. 때문에 이 이야기는 성장에 대한 고찰이 되지 못하고, 성장에 대한 단순한 기록과 추억에 머물게 된다.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이 작품은 조카 녀석의 숙제를 도와주려고 같이 읽었던 것인데, 나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조카는 별다른 흥미를 나타내지 못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녀석에게 이 이야기는 너무나 낯설고 낡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종류의 성장 이야기, 즉 시골 소년이 품었던 도시에 대한 동경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볼 문제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1318문고'라고 되어 있는 이 이야기의 타이틀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 어른들이 자신의 성장을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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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로의 숲을 찾다 - 내셔널트러스트의 여행
요코가와 세쯔코 지음, 전홍규 옮김 / 이후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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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는 정치문제와 같다, 라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접근하기에는 다소 어려워 보이는 문제. 그것은 환경문제와 관련된 책들도 마찬가지이다. 한번쯤은 읽어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만, 너무나 피상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거나, 혹은 너무나 전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책을 읽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자면, 이 책은 참으로 친절한 책이다. '내셔널트러스트'라는 환경운동을 다루고 있지만, 그 운동의 소개나 설명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여행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워즈워드가 환경운동에 미친 영향, 일본 환경운동의 한 예인 '토토로(トトロ)의 고향 기금', 친환경적 교통수단으로서의 자전거에 대한 고민 등등은 매우 설득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재미있다.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입문서가 될 듯 하다. 이 책에 대한 불만은 별로 없다. 다만, 너무나 쉽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점, 환경운동을 하다보면 성공뿐만이 아니라 실패와 고난도 많으리라고 짐작되는데 그러한 부분이 빠져있다는 점 등이 아쉽다. 원 제목은 '내셔널트러스트의 여행', '토로로의 숲을 찾다'는 변역과정에서 만들어진 제목인 듯 하다. 원작의 분위기를 왜곡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와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성공적인 제목이라는 찬사가 동시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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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와 광인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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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머 J. 애들러와 찰즈 밴 도런이 지은 <독서의 기술(How to read a book)>(범우사, 1986)이란 책을 보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그 책이 속하는 장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라는 말이 나온다. 사실 나는 이 말에 그리 주목을 하지 않았었다. 장르라는 것은 그 안에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구태여 확인작업을 선행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장르의 혼합, 혹은 장르의 파괴라고 할만한 작품들이 활발하게 양산되고 있는 것이 요즘 추세인데, 구태여 기존의 장르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뭐, 대충 이런 심산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생각으로 인해서 이번 책읽기는 낭패를 보고 말았다. 나는 책을 읽는 중간중간에 여기저기에 낙서를 하는 편인데, 중간 정도 읽었을 때 이렇게 써넣고 말았던 것이다.

'사건에 진입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길다. 그래서 '사건'에 대한 박물적인 기술에 그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물론 그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음)' 이것이 나의 오류였다. 처음부터 장르를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을 무심결에 소설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로 생각한다면, 내가 적어놓았던 지적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흥미롭기 위해서는, 싱싱하고 독특한 소재를 잡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요리하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한 법이니까.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그리고 저자는, 요리의 달인은 아닌 셈이다. 똑같은 소재를 소설적인 관점에서 작품으로 만들었다면, 훨씬 재미가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작품의 장르를 알고 난 후에도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외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분류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식으로 하자면 평전(評傳)에 적합할 듯 하다. 평전이란 '비평을 곁들인 전기'라는 뜻이니, 이 작품처럼 적당히 가미된 작가의 평가나 시대비판이 들어간 글에는 적합한 용어가 되리라. 평전이라는 장르 구분을 염두에 두고 다시 이 작품을 읽어보니, 앞서 내가 찾았던 결점은 다소 상쇄가 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부족한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을 평전으로 보기에는 객관적인 근거가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평전이란,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철저히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다만 그 평가에 있어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 너무 적기도 하고, 사실을 허구처럼 (즉 소설처럼) 전달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이 작품을 소설로 착각했던 이유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작품은 소설과 평전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책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만큼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이 책에서 보여주는 사전의 편찬과정, 그리고 모국어(母國語)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모습은 흥미로우면서도 부럽다. 우리에게 저런 부분이 부족했다는 것을 반성하게 해주었기에 더욱. 저들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문화적 자부심이란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문화적 자산이나 역량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계기를 만들고자 했던 노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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