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 한 세기 전의 작품이니 그 감각이나 정서에 동감할 수는 없었지만, 중간중간 드러나는 재기 넘치는 비판과 풍자는 주목할만한 부분이었다. 그러한 비판/풍자는 인간의 속물성에 화살을 겨냥하는데, 가령, '이 정도 일로 만일 웃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발이 두 개가 모자란 멍청이임에 틀림없다'라는 구절이 그 좋은 예가 된다. 이처럼 이 고양이에게 사람이란 멍청하고 추악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는, 서구 세력에 대한 일본의 열등감도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근대화'라는 변혁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동양의 정신'을 이야기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는 있으나, 그들은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로 희화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러한 희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동양의 정신'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 그것이 식민지배를 받지 않고 근대화를 수행할 수 있었던 나라의 특권이 아닐까?)

나체 신봉자만 해도 그렇다. 그렇게 나체가 좋은 것이라면 자기 딸을 벌거숭이로 해서, 덩달아 자기 자신마저 벌거숭이가 되어 우에노 공원을 산책이라도 해보란 말이다. 못하겠다고? 못하는 게 아니고, 서양인이 하지 않으니, 자신도 하지 않는 게 아닐까. 사실상 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예복을 입고 테이코쿠[帝國] 호텔 같은 데로 출입하지 않느냐. 그 사연을 물어보면 별 것이 아니다. 그저 서양인이 입으니까 나도 입는다는 것뿐일 테지. -p.288.

이외에도 눈에 걸렸던 것은, 작품 속에 녹아있는 군국주의적인 요소이다. 물론 이는 이 작품만의 특징이라고 하기는 힘들고, 당시 일본이라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인 정신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피해망상일 수도 있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폴 오스터라고 모든 작품을 잘 쓸 수는 없다. 그리고 객관적인 눈에서 보자면, 이 작품이 그리 떨어지지 않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그 동안 그의 다른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접했기 때문에 이 작품에 만족을 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우선, 아쉬웠던 점은 'Leviathan'이라는 거창하고 상징적인 제목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관계와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다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개인의 삶을 다루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문제는 개인적인 삶은 그에 합당한 표현으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창한 제목은 자칫 실망을 안겨주기 쉽다.

조금만 더 인내를 발휘해보자. 작가에 대한 믿음을 조금 더 유지하고, 우선 이 작품의 내용과 제목을 파악해보자. 소설의 나레이터는 피터 아론, 주인공은 벤자민 삭스. 소설 속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제목에 대한 암시는 벤자민이 쓰던 미발표 소설의 제목이라는 것.

그렇다면 당연히 이 제목에 대한 주도권은 벤자민에게 있다. 피터는 충실한 기술자에 불과하니까. 그는 쾌활하고 활력 있는 젊은 소설가이지만, 그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포진해 있다. 겉으로는 단정하고 세련된 모습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금이 가있는 상태, 그래서 미세한 충격에도 쉽사리 무너져 버리고 마는 상태, 이것이 벤자민과 피터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의 징조 - 즉, 괴물이다(벤자민에게나 피터에게나 모두 같다. 다만 벤자민이 이 괴물의 접근에 더욱 민감할 뿐이다). 특히 벤자민과 그의 아내의 관계는 이러한 괴물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그리고 적어도 어느 정도는) 더할 나위 없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둘의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모든 측면을 자신의 시각에서만 파악하려는 아집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제목 '리바이어던'은 현대인의 생활에 숨어있는 폭력성, 일상의 허위성에 관한 상징이 아니겠는가?

이런 식으로 제목에 대한 이해는 얻어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폴 오스터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였던 기발한 이야기의 전개와 거침없는 상상력 등에 비해서 이 작품의 이야기는 너무 평범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랑은 왜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소설쓰기란 무엇인가? 많은 작가들의 오만한 참회처럼, 힘겨운 求道行인가? 혁명의 수단인가? 아니면 서글픈 마스터베이션인가? 이 정의들은 모두 맞고 또한 모두 틀리다. 이는 소설쓰기를 통해서 파생된 결과임에는 분명하지만,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설쓰기, 나아가 소설이라는 예술작품의 본질은 무엇인가?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핵심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전설과 닮아 있으며, 소설쓰기는 전설 만들기의 근대적 변형이다.

근대는 무엇인가? 거칠게 말하면 '사회적인 자아의 패러다임이 개인적인 자아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했던 시대적인 특징'이다. 이를 통해 '전설'이라는 사회적 자아가 '소설'이라는 개인적 자아로 전환되었다는 가설을 설정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 간과했던 부분이 있다. 창조자의 태도에 관련된 부분이다. 전설의 창조자는 전설을 만든다는 것을 알 뿐, 그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유롭게 이야기를 변형시킬 수 있었다. 그가 만들고자 한 것은 오직 이야기일 뿐, 그것이 독창적인 이야기인지,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작가들은 자신이 창조하는 작품이 가진 의미를 알 뿐, 자신의 작품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감히 진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고, 작품에, 혹은 작품을 만드는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문제인가? 소설이 이왕 이야기라면, 의미 있는 이야기가 좋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알아버렸다는 것, 그것이 문제다. '개인적인 자아'라는 것을 몰랐을 때에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내 이야기가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전설을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른다면, 스스로 독창적인 재담가라고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게 독창적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뒤로, 전설은 더 이상 만족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독창적인 이야기, 즉 소설이 요구되었고, 그것은 독창적이기 때문에 만드는 과정에조차 의미를 담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또 한 번 알아버렸다. 독창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전혀 독창적이지 않다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소설에 부여한 의미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이런 인식에서 발생하는 것이 '탈근대적 글쓰기', 즉 작가가 유별난 개인임을 포기하고 글쓰기 과정을 그대로 폭로하는 것, 바로 메타 픽션이다. 아랑의 전설이 있고, 그 전설에 감춰진 또 다른 진실을 밝히는 소설이 있으며, 결국 그것은 소설 속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는 메타 픽션. 이것이 이 작품의 구조이다. 액자 속에 또 다른 액자가 들어있는 형상.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그래서 결국 무엇이 남는다는 말인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진실이 아니고 다른 진실이 존재했으며, 진정한 진실이라고 믿었던 다른 진실도 진실이 아니고 또 다른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사실, 이 질문을 해결하는 방법은 질문 밖에 있다. 소설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근대적인 발상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근대적 발상을 뛰어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행위부터 잘못이다. 애당초 의미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쓰여진 작품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의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의도도 역시 본질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고. 소설은 이야기이고.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것이라고. 전설처럼, 끊임없이 작가와 독자에 의해서 재생산되는 것이 이야기이다. 조금씩 업그레이드되어 가면서. 소설도 역시 마찬가지.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는 말처럼, 작품은 끝나지만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감동)는 새롭게 시작된다. 그런데 메타 픽션은 여행의 허망함을 폭로해버렸다. 허망함을 알았으니 누가 다시 길을 가려 하겠는가? 메타픽션이 이야기가 되려면 결국 그 허망함을 딛고 다시 길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결말이 다시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퀴즈 플레이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 한 남자가 살해당한다. 그는 스포츠의 영웅에 시련과 장애를 극복하고 이제 막 정치계에 입문하려고 하는 '고결한 인물'이다. 마치, '고귀한 신분의 몰락이 더욱 큰 비극을 가지고 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2 - 그러나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명제를 파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된다. 고결한 인물처럼 보였던 사내는 전혀 그런 인물이 아니고 오히려 추악하기까지 한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 인물의 異面에 의해 상처를 받는 남자의 아름다운 아내가 등장한다. 남편의 신분유지를 위해서 '행복한 부부'라는 가면을 써야만 했던 정숙한 아내에게 탐정은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자신을 느낀다.

3 - 하지만 이 명제도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남자의 아내는 전혀 정숙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형적인 팜므 피탈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것도 오래지 않아 밝혀진다.

4 - 도대체 진실이란 무엇인가? 이와 같이 감추어지고 은폐된 진실을 찾아다니기에도 힘겨운 탐정에게는, 전처와 아들과의 문제도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버거운 숙제로 부여된다. 너무나 많은 임무를 부여받은 탐정, 그래서 그는 이 작품 내내 종횡무진 뛰어다니고 고민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그의 매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농담을 뱉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청부업자들에게 폭행을 당할 때도 그는 끊임없이 그들과 그들의 배후에 있는 권력을 조롱하고, 그 권력의 핵심인물 중의 하나에게는 '돈 많은 자들은 하나같이 회장님 같은 개새끼라는 전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라는 욕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이러한 삶에 대한 조롱, 그리고 낙천적인 의식이 미궁에 빠진 이 탐정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5 - 만일 그가 다른 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비정하기만 했다면, 이 작품 속의 진실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전처를 사랑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소유하지 못하는 인물이고, 아무리 바쁜 와중에서도 아들을 위해서 시간을 버릴 줄 아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보낸 바로 그 순간에서 떠올려지는 키 포인트!

6 - '스퀴즈 플레이' - 치고 달리기 전법을 구사하기 위해서 자살 스퀴즈 번트를 대는 것, 즉, 자살! 바로 그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연쇄적인 득점을 올리는 것, 이것이 바로 고결하게 보였지만 추악했던 남자의 의도였다. 그리고 그러한 남자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방치했던 남자의 아내도 역시 추악한 인물에 불과했다.

7 - 이와 같이 이 작품은 다른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처럼 멜로드라마적 치정에 얽힌 범죄를 다루고 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보통은 자살을 위장한 살해인데 비해서, 여기에서는 살해를 위장한 자살이 나타났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문제를 해결해 가는 주인공인 탐정의 성격이 그 차별점이다. 탐정은 폭발하는 외향적 인물에 기본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와 정반대인 내향적인 특성이 공유된다. 즉,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아프지만, 아내를 잡지 않는다. 아내와의 이혼을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리고 반성한다. 이러한 자기 반성이 그를 행동하는 탐정이 아니라 생각하는 탐정으로 만들어주는 요소가 되며, 그러한 인물의 성격창조를 통해서 이 작품이 어설픈 액션이 아니라 치밀한 스릴러가 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행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imbuto : ① 아프리카 서부, Mali 중부에 있는 도시 ② 멀리 떨어진 곳, 원격지. / '개(犬)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라는 불교의 질문에 대한 미국식 해답찾기. 이 소설은 개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개는 일반적인 개가 아니라, 犬性과 함께 人性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사람처럼 사유하는 개에게 있어, 현대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 것인가? 더구나 철학적인 정신병자인 주인 덕분에 철학까지 할 수 있는 이 개에게 있어 현대를 사라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 것인가?

폴 오스터는 개라는 설정을 통해서,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극복할 수 없는 단절감을 보여주고 있다. 편견에 의해서, 혹은 자기 세계를 지친다는 미명에 의해서, 해체되어 가고 있는 현대사회는, 개에게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이해할 수 없는 관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늙은 개 본즈가 여러 가지 고난을 겪은 뒤에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되지만 바로 그때 자신의 자유를 잃어버린다는 설정, 그리고 그 풍족한 생활로 인해 병을 얻게 되고 그리하여 죽음을 맞게 된다는 설정은, 물질적인 풍요만 가득하고 정신은 공황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현대사회를 잘 풍자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