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 원시의 자유를 찾아 떠난 7년간의 기록
제이 그리피스 지음, 전소영 옮김 / 알마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오랜 세월에 걸친 동경의 결과다. 처음엔 희미했지만 여행을 하면서 점차 뚜렷하게 알게 된,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다. 야생성을 찾아 떠난 이 여행에서 내가 구한 것은 깔끔한 사진첩에 끼워질 멋진 사진 속의 장관이 아니었다. 예술이나 섹스, 사랑 그리고 마음을 들뜨게 하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야생성에도 그속에서 일관되게 고조되는 울림이 있다. 나는 바로 그 속성을 찾고 있었다. 야생성을 마셔버린 나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야생성에 취해 있었고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아예 흠뻑 취해버렸다. 
나는 야생의 의지를 찾아 나섰다. 그 의지가 야성적인 아름다움 속에, 자연력의 생기 속에 스스로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보고 싶었다. 야생성은 생명에 대해 단호하다. 포획되어 갇힌 야생성은 죽어버리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순수한 자유나 순수한 열정, 순수한 갈망처럼 근원적이다. 야생성은 그 자신의 선언문이다. p.12

   야생성에 대한 강한 갈망과 동경에 이끌려 탄생하게 된 이 책은 자연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따라 떠난 7년간의 여정을 풀어낸, 매우 방대하고도 깊이 있는 사실적 묘사와 고찰이 담겨 있다. 책 속에 담긴 광활한 자연과 그 속의 날것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생명의 활기는 문명이라는 감옥에 갇혀 진정한 야생성이라고는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나조차도 그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이라는 생소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나는 송라인(songline, 땅의 경계표지와 길을 찾아가는 미묘한 기준을 제시하는, 구절이 연속되는 형태의 구전 노래), 즉 땅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음악의 형태로 마음속에 땅을 간직하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p.15,16

   저자는 이 ‘송라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인간의 정신, 마음의 능력을 평화롭고 풍요롭게 사용하는 아주 멋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만이 가진 아주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자극과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음악과 언어를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제한적이 되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 그 자체와 교감하고 하나가 되는 자유가 아닌 인위적인 조건 안에서 대가를 지불(혹은 무단으로 사용)하고 누리는 흥겨움이나 감정의 고조는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원래의 고전적인 의미에서 자연과 문화는 정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문화는 어느 쪽인가 하면 자연의 숭배였다. p.75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소산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은 고대 그리스보다 수세대 전부터 민주주의를 실천했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개념을 생태민주주의적 지혜로 확장시켰다. p.116

   사실 우리가 문화적이라고 하는 것의 이면에는 얼마나 무질서하고 혼잡한 것들이 많은가. 도시의 풍경은 겉으로 보기에는 멋지지만 조금 높은 곳에서 들여다보거나 건물과 건물 사이, 혹은 뒷면을 찾아보면 온갖 오물들과 정리되지 않은 전선들, 쓰레기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우리의 문명, 문화는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면이 다분하다. 그에 비해 자연에 순응하면서 그 흐름을 읽고 있는 그대로 예술과 사회구조에 표현해내려고 했던 그들의 흔적은 어쩌면 지금의 인류보다 훨씬 문화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들과 접촉이 있기 전까지 모든 것이 좋았고, 강하게 살았고, 있는 그대로 풍요로웠던(p.132) 아마존의 원주민들은 기독교가 그들의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끌고 들어온 자본과 기업의 계략으로 인해 돈에 대한 인식이 생기게 되었고, 이는 곧 그들의 자유로웠던 삶의 방식이 화폐경제에 의존하게 되는 감옥 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서구사회는 그들의 물질주의적인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이 본래 지니고 누려야 할 열정과 자유의 ‘야생성’을 점점 야만적인 것으로 변질시켜 갔고 문명과 반대되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정착시켰다. 이 책은 이처럼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참다운 야생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야생적인 것은 살 수도 팔 수도 없고, 빌리거나 복제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명백하고 잊을 수 없으며 수치를 모른다. 땅과 얼음, 물, 불, 공기처럼 근원적이고 어떠한 성분으로도 분해되지 않는 순수한 정신, 바로 제 5원소다. 당신의 야생성을 낭비하지 말라. 그것은 귀중하고 필수적이다. 야생성 속에 진실이 있다. 야생성은 듣는 순간 즉시 인식할 수 있는, 녹색의 금으로 불리는 전 우주의 송라인이다. (중략) 야생성은 끝없이 생명을 갈구한다. (중략) 인류의 지고한 목적은 세계의 모든 언어 안에 흐르는 리듬에 유창해짐으로써, 대지를 더 생생하게 만들고 그것을 노래로 구현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생명 깊숙이 자리한 영혼이 이 야생 세계의 송라인에 그 진정한 야생성의 잊을 수없는 표시를 남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p.159,160

   우리가 오늘날 혼란스럽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고 증오가 넘치고 악의와 위선, 계략이 판치는 세상에 살게 된 것은 본래 가지고 있던 야생성을 강제로 억누르고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단 한 번 성공적이었을 뿐인지도 모를 인위적인 사회시스템을 확장하려는 힘에 자연스럽게 저항하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 범죄자들을 좁은 감옥에 가두는 대신 야생의 자연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다스려지고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회복하게 하는 시도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례를 보면서 야생성을 낭비하지 말고 그것을 되찾아 진실을 품으라는 저자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누이트 족의 언어 중에 가장 발달된 것은 눈에 대한 표현이다. 그런데 오만한 서구의 탐험가들과 선교사들의 발길이 들락날락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이런 이런 표현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전통과 새로운 문물 어디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술과 약에 중독되거나 황폐한 인생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점점 포기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아마존의 삼림 파괴 문제나 그에 따른 지구온난화 때문에 극지방의 얼음이 녹고 있는 현실이 그 증거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해당 지역 원주민들의 문화와 인간적인 삶의 조건까지도 모두 부정하고 황폐화시키는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 

사람들이 땅의 지형이 어떠한지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를 모를 때, 그 땅은 두려운 황무지가 될 수 있다. p.211

   인간은 지구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지구에 파묻힌 자원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어쩌다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궁극적인 앎에 대한 목적은 잃어버린 채 수단에 점점 목매어가고 있는 모습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무엇이 인류를 이런 광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일까? 타인의 삶과 다양한 종의 생명을 침해하고 심지어 멸종에 이르게까지 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원주민들의 눈에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문명화되었다고 하는 인간들의 눈에는 황무지로 보이게 하는 정신상태, 혹은 그 무지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거짓말투성이에다 독선과 교만으로 가득 찬 서구 문화의 대표적 선수들인 선교사들이나 탐험가, 예술가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오늘날 그래도 이 책의 저자처럼 지구와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와 의미를 회복하려 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이 늘어나고 있고 힘을 내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생성이 지닌 놀라운 즐거움과 쾌락, 행복이 오늘날의 무질서하고 더럽고 수치스러운 탐욕과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었고, 언제 어디에 있어도 자유와 평화로움을 주체적으로 누릴 수 있고 내가 속한 우주와 내게 주어진 인생에 감사하며 살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얻은 것 같아 매우 유익하고 기쁜 독서의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알맹이 없는 이야기 하나. 세상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애초부터 빛이란 것이 없었다면 그것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촉감을 주는지 상상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특이한 문명과 문화, 역사가 이룩되었을 것이다. 알맹이 없는 이야기 둘. 세상은 다양한 물질들과 그 물질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무수한 조합들 가운데 상당히 특이한 경우에 속하는 것 같다. 스스로 생각을 하고 의심을 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심지어는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줄도 아는 매우 독특한 생명체. 아, 이 생명이란 것도 어떤 것은 있는 것으로, 어떤 것은 무생물로 분류된다. 문득 이런 알맹이 없는 생각들 때문에 난 상당히 신비한 기운에 휩싸이곤 한다. 그리고 길을 잃은 아이처럼 한동안 멍하니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정말 어떤 심오한 목적에 의해 세상이 운영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모든 것이 우연의 연속에 불과한 것인지 등에 대한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는 친구의 죽음으로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평생을 악몽과 같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사람의 독백을, 천재적인 영화감독으로서 주목받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해하려 하는 한 아들의 목소리를, 교수 자신도 1년이 걸려서야 해결한 방정식을 시험문제로 내면서 끝까지 남아 시험지를 제출한 한 여학생과 겪게 되는 복잡한 물리학 이론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의 문제를 다룬 이야기, 보통의 마을 소년과 아미쉬 마을 소녀의 만남을 통해 기존의 문명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아미쉬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일면을 보여주는 이야기 등이 담겨 있는데,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쉽게 접하지 못하지만 반드시 인식하고 있고 문제 삼을 소지가 다분한 소재들을 바탕으로 쓰인 이야기 하나하나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낸 상처가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아물어가는 모습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평생을 사랑할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이 왜 헤어져야만 하는 것인지, 그 사람은 왜 죽어야만 했는지, 그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실감이 나지 않는지, 어색하게 웃음으로 무마하려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무릎이 풀려버리는 것은 어째서인지, 왜 사람과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인지,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그토록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어떻게’라는 방식으로 밖에 대응할 수 없는 것인지... 이 책은 살면서 가볍게든 심각하게든 어찌해서든지 들게 되는 무궁무진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직접적인 방식이 아닌 작가만의 담담한 목소리로 몇 가지 상황에 대해 거울로 반사하듯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서 역으로 우리에게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다시 질문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에 대해 고민하거나 그냥 스쳐지나가는 등의 반응을 보일 것이고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어떤 덩어리의 부피를 키우거나 줄이는 자양분이 될 것이란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써니람다 2011-05-2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런 서평 잘 읽었습니다.
 
미스 헴펠 연대기
세라 S. 바이넘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느낌표 선정도서이기도 했던 ‘내 생애의 아이들’이라는 작품과 집 안에서 옛날 책들을 뒤지다가 우연히 책꽂이에서 발견해 편안한 마음으로 읽었던 ‘따뜻한 학교’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두 편 다 선생님과 학생들 간의 사랑과 우정, 성장과정을 그린 교육소설에 해당하는 작품들이었는데 캐나다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18세의 어린 여선생님이 등장한다는 점과 경북 상주의 한 중학교를 배경으로 갓 사범학교를 졸업한 여선생님이 등장한다는 점 등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이런 작품들은 급격한 감정의 변화는 없지만 잔잔한 감동과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자극적인 독서에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과도 같은 책읽기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런 소설들은 내게는 독서의 즐거움은 주지만 경험적인 측면에서 동조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일반적인 중고등학교의 과정을 거쳐 온 것도 아니었고 실제로 내가 보고 느꼈던 학창시절의 모습이란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다뤄지는 것처럼 낭만적이거나 달콤하다거나 미래지향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교육소설들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단 말인가? 이야기니까 아름답게 표현된 거겠지, 식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미스 헴펠 연대기’의 장점은 앞서 내가 언급한 일반적인 성장소설 혹은 교육소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훨씬 솔직하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슬쩍 넘어갈 수도 있는 내용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 예를 들어 민감한 시기에 가장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는 성 문제에 대해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라든지, 교사 본인도 앞으로의 진로나 연애 문제 등에서 아직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여전히 성숙해가는 과정에 있는 내면의 모습을 담담히 묘사하고 있는 부분, 등장하는 학생들의 캐릭터도 적당한 성격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개성이 강한 친구들에 대한 에피소드도 많이 할애하고 있다는 점 등을 통해 잔잔한 가운데서도 보다 현실적으로 교육현장의 모습을 그려낸 것 같다. ‘미스 헴펠 연대기’는 성장 및 교육소설의 분야에서 기존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아트리스와 버질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고통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방법으로는 최대한 있는 그대로 유무형의 기록을 수집하고 보존하면서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슬픈 흔적들을 예술의 영역에서 다룬다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 사실 전쟁을 비롯한 갖가지 흉악한 범죄의 내용들이 최근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재료로 각광을 받게 되면서 이제는 인간의 온갖 추악함과 잔인함, 피범벅이 나오지 않고서는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 것들을 보며 스릴을 즐기고 쾌감을 느끼면서도 뭔가 이건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찜찜함을 지울 수가 없다.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삶과 죽음, 선과 악, 성, 정의와 불의, 죄 등의 문제는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우주의 법칙일지도 모르니까. 착한 사람의 불행한 죽음, 악인의 풍요롭고 윤택한 일생 등을 보면 우리는 그 모든 기가 막힌 상황들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적당한 자세인 것은 아닐까?

   홀로코스트, 즉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인류에게 가장 부끄럽고 치욕적인 사실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다룬 얀 마텔의 신작소설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역사적 사실의 언급은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죄를 지은 자가 또 다른 정의를 추구하면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이중성을 맞닥뜨린 한 작가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소설가 헨리는 역사가 예술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홀로코스트를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한 책을 출판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사를 하고 모든 것을 잊은 채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던 헨리는 어느 날 독특한 희곡을 우편으로 받게 되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 내용에 이끌려 이 희곡을 보낸 사람을 직접 만나기까지 이른다. 희곡을 쓴 사람은 박제 일을 하고 있는 한 노인이었는데 무뚝뚝하고 때론 무례하다고 느낄만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이지만 헨리는 그와의 만남을 통해 잃어버렸던 문학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된다. 당나귀와 붉은고함원숭이의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대화로 가득한 희곡 ‘20세기의 셔츠’의 의미를 파악해가던 중 헨리는 자신이 전에 출판하려고 했던 책의 내용과 이 의문의 노인이 평생에 걸쳐 작업해왔다는 희곡이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노인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된다.


   예술은 때로 굉장히 잔인한 방식으로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뻔뻔한 행위는 후세 사람들에게 어쩌다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이면의 진실을 왜곡하고 망각하게 하는 작용이 더 큰 것 같다. 작품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경제적 가치가 어떻게 되느냐에 더 목을 매기도 하고 또 다른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면서 본래 목적이 아무리 순수하다고 해도 결국은 의미가 퇴색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정한 예술이 가난과 고통에서만 나온다고 하기도 좀 그렇지만. 이 소설은 불편한 질문을 던지면서 끝을 맺고 있다. 예를 들면, ‘당신의 딸은 확실히 죽었다. 그런데 당신은 딸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야만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는 식의 질문 말이다. 그리고 같은 방식의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답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모순과 불합리가 가득한 이 세상에 묵묵히 순응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저항하고 투쟁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동안 피해왔던 고민을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복 수사 제복경관 카와쿠보 시리즈 1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지금까지 읽었던 일본 미스터리 소설 중에 경찰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 소설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사사키 조의 소설 ‘제복 수사’는 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전에 도서관에서 보았던 같은 작가의 ‘경관의 피’라는 제목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보통 미스터리물이라고 하면 제도권에 최적화된 인물보다는 조금 튀고 개성이 강한 인물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많이 봐왔던 것 같은데 이 소설은 물론 주인공이 꽉 막힌 인물은 아니지만 강력계 형사로서 25년이란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경찰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 주인공이라서 그런 점이 오히려 특색 있게 느껴졌다. 찾아보면 그런 캐릭터가 많겠지만 그건 뭐... 나의 독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할 수 없다.

   한 경관의 실수로 인해 주인공이 속한 도경 전체가 불합리한 인사이동의 바람에 휩싸이게 되는데 주인공 카와쿠보 역시 이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베테랑 강력계 형사의 경력이 효율적으로 쓰일 수 없는 인구 6,000명의 작은 마을 시모베츠로,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주재 경관이란 신분으로 근무지 이동을 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아주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인 것 같지만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날부터 발생한 사건을 시작으로 총 5건의 사건을 통해 폐쇄적인 지역 이기주의가 가진 추악한 이면을 연작소설 형식으로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청소년 문제에서부터 일그러진 가족사, 무너진 가정 내 폭력 문제, 교묘한 탐욕, 어린이 유괴 및 성범죄 등이 이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내용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흉악한 사건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마을의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울타리를 형성해서 철저하게 외부의 차단을 막고 자기들끼리의 방식으로 ‘해결’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마을과의 병합으로 얻어질 이익에 방해가 될까봐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해자들은 그 마을을 떠나거나 숨소리조차 죽이며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주인공 카와쿠보는 시모베츠 마을에 부임한 이후로 점점 드러나는 마을의 실상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비록 그것이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게 되더라도 개별사건들을 처리해 간다. 작가가 원래는 시리즈로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처음 이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부득이하게 시리즈화하게 되면서 오히려 더 흥미진진한 효과를 내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작은 마을 단위에서도 갖가지 기가 막힌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야기로 엮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리즈도 한국에서 곧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꼭 읽어봐야겠다. 


카와쿠보는 생각했다. 이 마을에서 유리창이 처음 깨진 것은 아주 오래전이 아니었을까. 최소한 카와쿠보가 주재 경관으로 부임한 이후의 일은 아니다. 나는 유리창이 연이어 깨진 곳을 마을 안 몇 군데서나 목격했다. 이 황폐화는 끝 간 데까지 가고말 것이다. 이제는 그 누구도 황폐화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다. 최소한 주재 경관인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은 아니었다. (p.208)


   카와쿠보라는 인물은 특별한 개성은 없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묵직함, 침착함이 돋보이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인물들이 세상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오염된 세상을 뒤집을 만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불편했던 것은 이 세상과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계속 떠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