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uperfrog > 모모의 친엄마를 공개합니다.

#1
그동안 모모의 팬에서 시작, 스토커와 이모의 단계를 거쳐
이제 숨겨진 친엄마로 그레이드업된 분이 있습니다.
다 아신다구요? 맞습니다. 바로 toofool님!!
^^ toofool님이 모모의 돌, 추석을 맞아 돌빔과 추석빔을 보내셨습니다.
키우는 엄마보다 더한 정성이라 제가 항상 감사를 드립니다.
이뻐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운데 말이죠.   
오늘 아침 택배로 받은 이것.. 공개합니다!!


뭔지 잘 모르시겠다구요? 저 마루에 허연 것들만 보인다구요?
모모는 왜 저렇게 팅팅 부었냐구요?
눈꼽이나 떼고 찍을 걸 그랬나요..^^;;;
그럼 이 사진은 어떤가요.. ㅋㅋㅋ

짜잔!! 바로 레인코트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웃겨서 한참 웃었습니다!!! ㅋㅋ
toofool님께는 죄송하지만 처음에는 견주가 개 산책시킬 때 쓰는 망토인줄 알았어요..^^;;;
헌데 몸통에 고정시키는 똑딱이가 달려있더군요. 함께 들어있던 소시지로 유인해서 입혔더니
처음에는 반항하다가 나중에는 저걸 입고 얌전히 돌아다니더군요..ㅋㅋ

이제 휴일날 비오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모모에게는 가증스럽게도
'모모야, 비가 와서 못나가겠다. 어쩌냐.. 에구 불쌍한 것..' 이라는 멘트도 못 날리게 생겼습니다.
저 이쁜 레인코트 입히고(모자는 차마 못 씌우겠어요..ㅠ.ㅜ 꼭 못생긴 아가씨 같아서..;;;)
열심히 비오는 산책길을 걷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모모 친엄마님..!

#2


모모의 레인코트가 배달되어 입혀보고 낄낄거리고 있는데 
방금 전 왔던 택배아저씨가 또 초인종을 누르더군요.  
나가보니 제앞으로 온 게 하나 더 있었습니다.(바보 택배 아저씨..-.-)
예전에 이벤트 했을 때 삐리리님에게 선물을 드렸는데 삐리리님이 저 잡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사은품이 여행가방이라니 대단합니다. 헌데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보내신 건가요? singles 읽고 싱글이 되면
저 이쁜 빨간 가방 들고 집나서라는 건가요?!!!
혹시라도 싱글이 되면 저 가방에 모모를 넣어갈게요..!! 삐리리님, 잘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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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9-24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인코트 입은 모모- ^ㅂ^ 으하하- 꼭 비오는 날에 입혀서 델꼬 나가신 후 사진 올려주세요- 물장구님! 으히히히.

superfrog 2004-09-24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빨간두건아가씨 같지요? 모자는 이 키우는 엄마가 봐도 너무 웃겨서 말이죠, 도저히 팔불출 모드로 나갈 수가 없어요..^^;;;

panda78 2004-09-24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뿌기만 한 걸요! 와락 껴안고 모모가 싫어할 정도로 얼굴을 부비부비부비 하고 싶은데..
아아- 이뿐 모모야 우리 모모야- 와락! 꼬옥!
 

 

 

 

 

전 2권.  흐음.. 여전히 촌시러운 저 표지는 마음에 안 들고, 베텔스만에서 나온 것도 싫지만, 그래도.. 읽고 싶어요. 흐흐.. 저는 다빈치 코드 꽤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결말은 비록 실망스러웠지만요. ^^;;

 

알라딘 소개글도 올려 봅니다.

소개글
<다 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이 2000년 발표한 작품으로 <다 빈치 코드>의 전작이다. 현대 과학과 종교 사이의 논쟁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반물질.갈릴레이.신물리학 등 현대과학 지식에, 바티칸.일루미나티.베르니니의 예술 작품.교황선거회의 등 가톨릭의 전통의식과 역사를 잘 섞어넣은 지적 스릴러 소설. <다 빈치 코드>가 파리를 주요 배경으로 삼았다면, 이번 작품의 무대는 고대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시 로마다.

스위스의 유럽입자물리학 연구소 CERN에서 유능한 과학자 베트라가 살해당한다. 베트라가 살해된 이유는 바로 '반물질'을 창조했기 때문. 반물질이란 무엇인가?

"반물질은 물리적인 면에서는 물질과 동일하다. 다만 자연계에서 발견되는 보통 물질과는 반대의 전기적 성질을 지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반물질은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유는 100퍼센트의 효율로 에너지를 방출하기 때문인데, 일반물질의 경우 핵융합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효율이 1.5퍼센트에 불과하다. 반물질은 공해나 방사능도 방출하지 않는다. 그리고 반물질 한 방울로 뉴욕 시의 하루 전력량을 모두 충당할 수 있다. 하지만 반물질에는 한 가지 결점이 있는데 ...극도로 불안정하다. 어떤 것과 접촉만 해도 타오른다. 심지어 공기와 접촉해도 마찬가지다. 반물질 1그램은 20톤의 핵폭탄 에너지와 맞먹고, 이것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의 파괴력과 같다."

베트라를 죽인 범인은 일루미나티의 조직원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베트라가 가슴에 일루미나티(Illuminati)라는 낙인이 찍혀 살해되었기 때문. 이 끔찍한 사건에 자문 역할을 하게 된 로버트 랭던(<다 빈치 코드>의 주인공)은 관련자들에게 일루미나티의 실체를 설명한다.

한편 베트라 박사를 죽인 살인자는 교황선거회의에서 유력한 교황 후보로 발탁된 4명의 추기경을, 고대 과학의 4원소 흙earth.공기air.불fire.물water의 낙인을 찍고 각각의 원소를 이용해 살해할 것을 예고한다. 수천년 전부터 계속된 교회의 탄압에 대한 복수를 위해,

물질과 닿기만 하면 상상할 수 없는 대폭발을 일으키는 반물질이 누군가에 의해 바티칸에 깊숙이 숨겨지고, 랭던 박사는 24시간 안에 반물질을 찾는 동시에 추기경들의 연쇄살인을 막아야만 하는 상황에 밀어넣어진다. 과거의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현대 인류를 구해야만 하는 숨막히는 여정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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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9-24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라 살려고 합니다. 저두요.
그리고 님 추석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비록 옆지기님이 안 계시더라도요...

마태우스 2004-09-24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가급적이면 안사려고 합니다. 다빈치 코드랑 전 코드가 안맞는 듯...

panda78 2004-09-24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태님은 다빈치코드 재미없으셨어요? 다행이다, 제가 드린 게 단테 클럽이라.. ^ㅂ^;;

만두님, 감사합니다.. 뭐 즐겁기야 하겠냐마는(큰집은 안 오신다 그러구.. 쩝.) 잘 버티고 올게요. 만두님도 좋은 추석연휴 되셔요--- ^^ (저는 만두님은 이거 안 사실 줄 알았어요..;; 시리즈는 다 보신다는 걸 깜빡..]
 

 

메소포타미아 지역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비옥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농경사회에서도 신격화된 지배자가 통치하는 고대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지금의 이란, 이라크에 해당하는 아라비아 지역으로 우리에겐 서아시아이지만 유럽인에겐 오랫동안 동방으로 지칭되었습니다. 이민족의 침입 통로가 없었던 이집트와는 달리 이 지역은 사방이 이 민족이었습니다. 현대에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지역의 종족간의 갈등은 그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4000년 전에도 이곳에서는 수메르로부터 시작하여 아카드,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시아와 같은 수많은 인종의 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습니다.

 

 
 

 

수메르

수메르 인들은 이 지역에 기원전 3000년 전 부터 인공으로 만든 계단식 언덕 꼭대기에 지구라트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짓고 이 곳을 중심으로 경배를 드리고 생활하였습니다(도1,2,3,4). 지구라트는 '높은 건물'이라는 뜻이죠. 지구라트는 신전과 가옥이 혼합된 복합적인 건축 공간으로 죽은 이를 위한 건축인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교되는 구조물입니다. 이 건축물은 주변에 큰 바위나 돌을 구할 수 없어서 진흙을 구워 쌓아갔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형태는 비슷하지만 그 재료와 용도가 다르지요. 벽돌 건축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특징으로 후대의 왕조에서 지은 바빌로니아의 성벽은 유약을 바른 벽돌로 발전하여 그 화려함을 더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구라트는 수메르,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왕조를 거쳐 계속해서 건축되었습니다.

 

도1 <지구라트> 우르왕조, 기원 전 2100년 경, 이라크
 
 
 
도2 우룩 (Warka)의 지구라트 위에 세워진 <화이트 템플> 유적,
기원 전 3500-3000년경
 
 
도3 <지구라트>의 북동쪽 전면과 복원된 계단, 우르왕조
이라크, 기원 전 2100년 경
 
 
도4 <지구라트>를 공중에서 본 모습,
아랫분은 복원된 것이다.
 
 
 

 

 
 
수메르의 아부 신전에서는 크고 작은 인간 모양의 형상들이 많이 발굴되었습니다(도5,6). 커다란 눈은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듯, 그 느낌이 매우 종교적입니다. 상들이 한결같이 두 손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배자의 모습 같습니다. 이집트와 같이 이 상들의 경우에도 신체의 자연스런 움직임이나 사실적인 묘사는 만든 이의 관심 밖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보다는 큰 눈을 통한 종교적인 교감을 표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을 것입니다.

 

도5 <아부 신전 출토의 조상들>
기원 전 2700-2500년경, 이라크, 텔 아스마, 가장 높은 것 76.3 cm,
시카고 대학 동양미술관
 
 
도6 <여성 두상>
기원 전 3500-3000년경, 석회석, 높이 20.3cm
바그다드, 이라크 박물관
 
 
 
 
메소포타미아의 미술에서는 반인반수 형태를 지닌 상상의 모티브가 자주 등장합니다. 우르 왕의 묘에서는 청동과 보석으로 만든 황소가 장식된 하프가 발견되었습니다(도7,8). 황소 머리 아래엔 동물 우화적인 이야기가 펼쳐 있습니다(도7). 사람 얼굴에 몸통은 소 형태의 반인반수가 중앙의 사람에 의해 좌우대칭으로 서 있으며, 그 아래 엔 사자와 갖가지 동물들이 사람 같이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음식물은 나르고 있습니다. 아마 향연을 준비하고 있는 듯합니다.

 

도7 우르 출토 하프의 상감 패널
기원 전 2600년 경, 31.1×11.3 cm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 대학 박물관
 
 
도8 우르 왕 고분에서 출토된<황소 머리모양의 하프>
기원 전 2600년 경, 31.1×11.3 cm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 대학 박물관
 
 
 
 
 

 

아카드의 바빌로니아 왕국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일찍 차지한 수메르 인들이 이 지역을 선사문명에서 자치도시 국가로 변모시켰다면, 수메르를 침략하여 승리한 아카드 족은 왕이 통치하는 전제국가로 이끌었습니다. <나람 신의 승리비>(도9)를 통해 우리는 호전적인 왕의 승리를 볼 수 있습니다. 뿔이 달린 헬멧을 쓴 왕은 태양과 달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아카드 족이 세운 바빌로니아 왕국은 함무라비왕 시대에 법을 만드는 등 체계가 잡힌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높이 2.1m의 돌 아랫 부분에 쐐기 문자로 새겨진 이 법은 인류 최초의 법전입니다. 그리고 그 위엔 태양신 샤마쉬로부터 법의 내용을 전달 받는 함무라비왕의 모습을 새겼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듯이, 함무라비 왕의 법 또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신으로 부터 받은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법이 더욱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겠지요. 신은 함무라비 왕에 비해 훨씬 크게 묘사되었습니다. 어깨에서 무언가가 솟아 나오는 것을 보면 이는 아마 초자연적 능력을 가시화 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이처럼 법의 권위를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이미지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도9 <나람신 승전비>
기원전 2254-2218년, 사암, 이란, 수사출토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0 <함무라비 법전 비석>
기원전 1769년경, 높이 2.1 m, 부조
높이 71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1 <함무라비 법전>의 윗부분
기원전 1769년경, 높이 2.1 m, 부조
높이71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앗시리아 왕국

바빌로니아와 서로 패권을 다투다 기원전 900년경에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앗시리아는 그 엄청난 힘을 왕궁에 과시하였습니다. 궁의 한쪽 길이가 200m에 달하는 사르곤 2세의 왕궁은 실로 화려했습니다(도12,13). 한 기록에서 사르곤 2세는 "나는 내가 내 손으로 내 발 밑에 복종시킨 아수르, 나부 (…) 등의 노동력으로 내 궁을 지었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12 사르곤 2세의 왕궁 추정도
기원전 720년경 (Charles Altman의 도면)
 
 
 
도13 사르곤 2세 왕궁의 내부 추정도
 
 
 
 
도14 <라마수>
사르곤 2세의 왕궁, 기원전 720년경, 대리석
파리, 루브르 미술관
 
 
도15 <라마수>
사르곤 2세의 왕궁, 기원전 720년경, 대리석
파리, 루브르 미술관
 
 
도16 <사르곤 2세>
기원전 720년경, 대리석
파리, 루브르 미술관
 
 
 

도1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궁은 채색된 환조와 벽면의 부조로 장식되었습니다. 지금은 채색이 벗겨져 있지만 조각만으로도 우리는 그 성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왕궁 안의 양쪽에 버티고 있었던 반인반수 조각 라마수(도14)를 봅시다. 우선 얼굴은 사람이고 다른 부분은 동물이죠. 수염이 더부룩하고 뿔 달린 왕관을 쓴, 눈이 큰 위엄 있는 얼굴입니다(도15). 많은 학자들이 이 얼굴은 사르곤 2세의 모습(도16)이라고 말합니다. 몸통은 황소인데 독수리 날개를 지니고 있군요. 라마수는 땅과 하늘에서 힘센 동물의 특징을 모은 초인간적인 힘의 상징인 듯 합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면 라마수는 다리가 다섯 개나 됩니다. 물론 다리가 5개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낸 것은 아니겠죠. 아마도 정면에서 보면 다리가 2개, 옆면에서 보면 4개가 보이도록 이런 방법을 쓴 것 같습니다.

 

 
궁 내부의 벽면 전체에 새겨진 방대한 부조는 주로 전쟁과 사냥의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도13). 앗시리아의 가장 중요한 장르인 부조는 아주 낮은 부조기법으로 이야기를 서술적으로 펼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아쉬바니팔 왕의 사자사냥 장면을 봅시다. 마차에 탄 왕은 활을 힘껏 당기고 있으며 신하는 앞뒤에서 사각지대를 막아주고 있습니다. 으르렁대며 떼를 지어 달려오는 사자들은 아주 용맹스럽습니다(도17,18). 죽어 가는 사자들도 매우 실감나게 묘사되었습니다. 창에 찔려 죽어가면서 피를 토하는 사자나 암사자의 모습을 보면 그 처참한 광경의 피 냄새가 진동하고 포효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도19,20).

 

도17 전쟁중의 아쉬바니팔 2세, 아쉬바니팔 2세의 왕궁, 기원전 875년, 높이 약 101cm
런던, 대영박물관
 
 
 
도18 아쉬바니팔의 사자사냥, 이자르, 니네베 출토
아쉬바니팔 북쪽 궁전의 부조, 기원전, 645-640년경
런던, 대영 박물관
 
 
 
 
도19 피 토하는 사자
 
 
 
도20 아쉬바니팔의 사자사냥, 이자르
니네베 출토아쉬나르팔 북쪽 궁전의 부조
기원전, 645-640년경런던, 대영 박물관
 
 
그럼 왕은 왜 사자사냥의 장면으로 왕궁을 장식하였을까요. 아쉬바니팔 왕은 평소에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이러한 야생의 동물을 주었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생전에 사자 370마리, 코끼리 30마리, 황소 257마리를 잡았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하였습니다. 즉 이렇게 용맹한 동물들을 잡을 수 있는 왕은 더 큰 힘이 있음을 과시하는 방법이지요. 한 시기도 쉴 틈 없이 적과 대치하여야 했던 앗시리아에서는 용맹스러움이 가장 큰 덕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신 바빌로니아

아쉬바니팔왕이 그토록 강성하여 주변국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의 계승자에 이르러 이 지역은 다시 아카드 족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신 바빌로니아 왕조가 세워졌습니다(기원전 612-538). 구약 성경의 다니엘 편에 묘사된 이 왕조의 느브갓네살 왕의 위력은 실로 막강하였습니다. 그의 시대에 지어진 '공중 정원'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지구라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에서 지칭하는 바벨탑이라고 추정됩니다. 즉 그 만큼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문화는 강인한 앗시리아의 미술과 비교해 볼때 보다 섬세하였습니다. <이쉬타르문>(도21)은 유약을 발라 구운 벽돌로 지은 세련된 건축물의 일부입니다. 이들도 역시 앗시리아인들이 애용한 사자로 벽을 장식하였지만 규칙적인 패턴으로 묘사된 사자는 용맹스럽기보다 오히려 장식적인 안정감을 줍니다.

 

 
도21 신 바빌로니아의 <아쉬타르 문>
기원전 575년경
베를린 시립미술관
 
 
도22 도21의 부분
기원전 575년경
베를린 시립미술관
 
 
 
 

 

페르시아 제국

바빌론 왕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는 이 지역의 마지막 승자였으며, 이집트와 그리스에게도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기원전 525년엔 이집트를 멸망시켰으며 기원전 4세기에는 그리스와 여러 번 접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30년의 익수스해전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함으로써 동방의 왕국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긴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 왕궁을 초토화 시켰지만 그 폐허만으로도 우리는 옛 웅장함을 엿 볼 수 있습니다(도23,24).

 

도23 페르세폴리스
다리우스 1세
기원전 500년경, 폴리스궁전
 
 
도24 도23의 층계 부분
 
 
 
 
 
 
이웃 나라 이집트가 3000여 년 동안 한 민족에 의해 지속된 것에 비교하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실로 여러 민족의 힘의 각축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힘의 과시는 용맹스러운 미술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탑이라는 상징적인 건축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부터 받는 위협을 묘사하였거니와 이 지역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적대감 또한 매우 컷습니다. 그리스에서 다루겠지만, 그리스 미술에서는 젊은 영웅과 추한 적을 대치시키는 주제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그리스인의 적은 바로 페르시아였으며, 그 들은 이 적을 반인반수로 그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수메르인의 하프(도7,8)나 사르곤 왕궁의 문지킴이 '라마수'(도14,15)에서 보았듯이 반인반수의 상상적 존재는 바로 이 지역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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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9-24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제 그림도 보여드리고 싶군요... 호호호

panda78 2004-09-24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ㅡㅡㅡㅡㅡㅡㅡ^ 마태님, 언제 마태님 실물부터 보여 주세요. 정말 뵙고 싶어요. 히히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시대에 이르면 과거의 수렵이나 작은 촌락을 이루면서 살던 시대와는 판이한 미술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과도 같은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신권사회를 이루는 것이 고대 국가의 특징이지요. 기원전 3000여년 경에 세워진 이집트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을 거치면서 이후 30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도1은 나일강 유역의 도시국가를 통합하여 고왕국을 시작하였던 통치자, 나르메르의 승전을 기념하는 그림이 새겨진 판입니다. 그 앞면을 보면 나르메르 왕이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알기 쉬운 이야기 그림처럼 전개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왕은 크고 포로는 작습니다. 패널의 뒤쪽 상단을 보아도 깃발을 들고 왕의 앞 뒤를 호위하는 신하들은 왕의 1/3크기에도 못 미칩니다. 이 패널을 제작한 사람들에겐 사물의 실제 크기나 비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겠지요. 다만 왕은 더 위대한 사람이고 그가 적을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 만을 명료하게 나타내는 것이 중요했고, 이집트의 미술가들은 그러한 목적을 분명하게 달성한 것입니다. 이집트의 이 기념판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같은 목적으로 제작된 <나람신 승전비>(도2)와 그 모습이 흡사합니다. 왕과 쓰러진 적의 모습을 묘사하는 정해진 방식이 있었으며 이러한 묘사방식은 이집트에서 생겨나 근동의 고대국가에서 두루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1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
기원전 3150-3125년경, 높이 63.5 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2 <나람신 승전비>,이란
수사출토,기원전 2254-2218년경, 사암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피라미드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지평선 위에 묵중히 자리잡은 사각뿔 형태의 피라미드는 조형적인 면에서 매우 절대적입니다. 인간이 만든 조형물 중에서 가장 기하학적이고, 가장 추상적인 구조물일 것입니다. 이집트는 절대적인 신권사회였습니다. 왕 파라오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으며, 이집트 미술을 대표하는 파라미드는 이러한 왕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들에겐 죽음이 종말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삶의 영원한 지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도3 <기자의 피라미드>, 맨카우레, 카프레, 쿠푸 고분
 
 
 
 
도4 <기자의 대 스핑크스>, 기원전 2570-2544년경, 사암, 높이 19.8 m
 
 
 
 
가장 유명한 기자의 세 피라미드는 고 왕국 시대의 왕 맨카우레, 카프레, 쿠푸왕의 무덤입니다. 무덤의 긴 연도 앞 입구에는 스핑크스가 무덤을 지키고 있지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건립하기 위하여 10만 명이 3개월 씩 동원되어 기초공사에만 10년, 그리고 본 공사는 20년이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십 킬로 밖에서 채석된 돌을 다듬고 뗏목으로 옮겨와 이곳에 쌓은 과정을 상상하면 이러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 얼마나 강하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사후에도 현세가 지속되므로 피라미드 내부엔 현세에서 누린 삶의 현장들이 그림으로 그려지고 왕의 소유물들이 함께 부장되었습니다. 보다 후대의 것이지만 아래 보는 황금 마스크가 발굴된 투탄카멘의 피라미드는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그 호화스러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육체는 사후에도 영원한 삶을 지속시켜야 하는 일종의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를 썩지 않게 하는 방법, 즉 미라를 제작하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두개골과 내장을 먼저 작은 관에 안치하는데 도6의 관 모양의 용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미이라로 만들어 안치될 수 있는 사람은 파라오와 부자가 된 고위관리들 뿐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미술은 다른 많은 역사적인 시기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최고 권력자의 미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5 <투탄카멘의 마스크>
이집트, 테베, 18왕조, 기원 전 1323년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6 <투탄카멘의 내장을 담은 관>
이집트, 테베, 18왕조, 기원 전 1323년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이집트의 양식

이집트 미술은 역사상 가장 완고하고 보수적인 미술로 알려져 있습니다. 3000여 년 동안 지속된 양식의 일관성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도7에서 볼 수 있듯이 이집트의 인물상은 항상 얼굴은 옆면, 눈은 정면, 가슴은 정면, 발은 옆면으로 조합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나타내었을까요. 이집트 미술은 조각이나 회화나 할 것 없이 모두 대상의 특징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8의 규범에서 보듯 그 규칙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었습니다. 그림의 크기가 크던 작던 높이를 23.5로 나누어 금을 긋고 무릎은 언제나 7선을, 허리는 13선을, 어깨는 19선을 지나게 그렸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그리던지, 어느 왕을 그리던지 결과는 언제나 똑같은 상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획일적으로 했냐고요? 이러한 질문은 우리시대에 가능한 것이고, 만약 이집트 미술의 제작목적을 생각한다면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형상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왕과 왕조의 지속성이 강조되듯 그 안의 미술도 변함없는 모습을 취해야 했을 것입니다.

 

도7 <헤지라의 초상>
기원전 2778-2723년경, 높이 115 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8 이집트 벽화의 인체비례
 
 
 
 

 

그러나 한편 고분에서 발굴된 관리들의 초상에서는 매우 사실적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카푸레 왕의 상>(도9)과 관리였던 <카 아페르상>(도10)을 비교해 보면 왕의 상은 엄격한 규범에 맞춰 제작하였지만 관리의 상은 구체적인 한 사람의 초상 같습니다. 얼굴이 크고 네모나며 신체가 건장한, 아마도 무관을 담당하였을 듯한 남자입니다. <서기관>(도11)의 모습도 매우 현실적입니다. 정직한 얼굴, 왕 앞에서 항상 같은 자세로 이렇게 쓰고 있었을 반듯한 정좌자세, 중년의 신체가 지닌 배의 주름 등 우리는 바로 실제의 서기관을 보고있는 것 같습니다.

 

도9 <왕 카푸레>, 이집트, 기자출토
기원전 2520-2494년경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10 <카 아페르> 이집트 사카라의 고분
기원전 2450-2350년경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11 <서기관> 사카라출토
기원전 2400년경, 석회암, 높이 53.3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2의 패널은 티(Ti)라고 하는 귀족이 하마 사냥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의 모습은 우리가 앞서 본 규칙에 맞게 그려졌지만, 작살로 고기를 잡고 있는, 작게 묘사된 노예들은 규칙과는 관계없이 아주 생동감이 있습니다. 또한 이집트의 한 부조에 묘사된 밧줄을 끌고 있는 노예의 다리를 보면 해부학적인 관심까지 보입니다(도13,14). 노예들에게 법칙을 적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겐 위엄을 부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12 <하마사냥을 지켜보는 티>
기원전 2510-2460년경 부조
높이 114.3 cm, 티의 무덤
 
 
도13 <밧줄 끄는 인부들>
기원전 2400년경
티 마스타바, 사카라
 
 
도14 도13의 가운데 인물 도면
 
 
 
 
우리는 무덤에 부장되어 있는 흙 조각에서도 이러한 활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절구에 반죽을 하는 듯한 여자 노예(도15)는 일로 세상을 산 튼튼한 신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낚시를 하는 어부들은 빠른 동작들을 보여줍니다(도16).

 

도15 <여자 노예>, 기자 출토
기원전 2325년경, 높이28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16 <어부>
기원전 2000년경, 높이 31.5cm, 폭90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다시 왕의 상을 보면, 어느 왕에게나 똑같이 적용된 엄격한 규범의 의미를 더욱 잘 알 것 같습니다. 즉 그들은 관리나 일반인들과는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여야 했으며, 이들을 나타내는데 적용한 엄격한 규범은 바로 그들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로 나타내는 적절한 조형언어였던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조각가를 지칭하는 말은 '영원히 살아있게 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새기고 깎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우리말이 행위에 기준을 두었다면, 이집트어에서의 조각가는 역할에 의미를 두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미술을 다시금 생각하면, 무한한 개성과 순수함을 요구하는 현대미술은 오히려 특별한 상황으로 이해됩니다. 역사 속의 미술은 언제나 목적을 지니고 제작되었으니까요.

 

 

이집트의 회화

그리스부터 이어져오는 서구의 회화는 크게 보아서 사실과 표현이라는 두가지 기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이집트의 회화는 이후 지속되는 서구회화와는 매우 다른 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왕의 새 사냥(도17)과 연못이 있는 정원(도18)의 그림을 봅시다. 왕은 우리가 앞서 본 규범에 맞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왕은 크고 왕비인 듯한 서 있는 여자는 그 보다 작고, 왕의 다리 사이에 있는 여자는 더 작습니다. 새들은 모두 옆면으로 그려져 있고 물 속에 있는 물고기까지 옆면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보이려면 우리 눈이 물 속에 들어가 있어야겠죠. 즉 화가가 한 시점에서 모든 사물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고 각 사물마다 다른 시점에서그린 것입니다. 어린애들 그림 같다고요? 그러나 오리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를 그린 묘사력을 보십시오. 관찰력이 매우 뛰어난 묘사력이지요. 우리는 지금도 이러한 묘사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순수미술분야가 아니지요. 바로 자연도감의 그림들입니다. 도감의 그림들은 새나 물고기를 옆으로 그립니다. 그래야 그 특징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는 힌트가 되지요? 네, 바로 이집트 미술은 사물의 특징을 정확히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보는 시점에서의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특징을 전달하는 관점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이해하면 연못 그림(도18)도 전혀 엉뚱하지 않습니다. 연못은 위에서, 오리와 물고기 그리고 연꽃은 옆에서, 나무는 옆에서 본 모습입니다. 아마 한 시점에서 연못을 보았다면 우리는 연못이 사각이었는지, 연못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나무들에 가려서 연못이 거의 안 보였을 테니까요. 이 그림은 우리에게, 네모난 연못이 있고, 연못 주위엔 나무들이 빙 둘러 있었으며, 연못엔 오리와 물고기, 연꽃이 떠다니고 있었음을 마치 말로 전하듯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17 <수풀 속의 새 사냥>
기원경 1400-1350년경, 프레스코
런던, 대영박물관
 
 
도18 <네바의 정원>
테베의 고분벽화, 기원전 1400년경, 64×74.2 cm
런던, 대영박물관
 

 

아마르나 문화

이집트 미술은 거의 30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왔지만 기원전 14세기에 약 20-30년 동안 다양하게 변화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아메노피스 4세 치하의 개혁에서 였습니다. 그는 당시 수구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크고 주로 승려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를 개혁하기 위해 아몬신을 믿던 종교체계를 태양신인 아톤 신으로 바꾸고, 테베에 있던 수도도 현재의 아마르나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수도의 이름을 '아케나톤' 즉 아톤신의 지평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이름도 '아크나톤' 즉 '아톤 신을 대리하는 자'라고 바꾸었습니다. 그는 매우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시장에 돌아다니며 서민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기도 하고, 왕 혼자의 권위보다, 부인과 가족이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즐겼습니다. 그는 온 가족이 함께 아톤신의 빛을 받는 모습을 새기게 하고(도19), 부인 네페르티티의 상을 많이 제작하게 했습니다(도20,21). 도20,21에서 보는 부인상은 정말 매력적이지요? 아주 모던한 머리장식과 화장법이 특히 눈길을 끕니다.

 

도19 <왕의 가족> 아마르나 출토
기원전 1365-1349년경, 높이 44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20 <네페르티티> 옆면
기원전 1353-1335년경
석회석에 채색, 베를린, 국립박물관
 
 
도21 <네페르티티>
 
 
 
 
 
 
 
왕 자신의 모습도 종래 왕의 상과는 매우 다르게 제작되었습니다. 도22의 아메노피스 4세를 보십시오. 신체의 유연한 선과 긴 얼굴이 매우 감성적이지요. 두상(도23)을 보면, 측면의 얼굴에 눈은 정면인 종래의 법칙을 적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얼굴이 길고, 눈은 옆으로 가늘며, 두텁고 육감적인 입을 지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왕의 상을 이렇듯 개성 있게 나타낸 시대는 일찌기 없었습니다.

 

도22 <아메노피스 4세 흉상> 기원전 1365-1360년경, 사암
높이 153cm, 카르낙 출토,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23 <아메노피스 4세(아크나톤)> 기원전 1360년경
석회적, 부조, 높이 14cm, 베를린, 국립박물관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개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왕위를 계승한 아들은 수구세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여 수도를 다시 테베로 옮기고 자신의 이름도 '투탕카톤'에서 '투탕카몬'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미술의 성격 또한 다시 보수적으로 변하였지요. 아메노피스의 개혁과 성격은 너무 과격하여 그는 광인이라고 까지 불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지중해 윗 쪽, 주제3에서 살펴 볼 에게문화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자유로운 미술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엄격하였던 이집트 미술을 생각한다면, 아마르나 문화의 이른 종식은 너무나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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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9-2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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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티브 아트(primitive art)

신석기 혁명이후 나일, 유프라테스, 그리고 갠지즈와 황하와 같은 비옥한 충적층을 기반으로 원시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국가 공동체사회가 등장하면서 인류 미술의 역사는 새로운 장을 맞게 됩니다. 기원전 수 천년 전에 등장하는 이러한 고대국가는 신권에 가까운 권력자와 성문화된 율법을 바탕으로 보다 조직된 사회체제입니다. 미술의 규모와 기능도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 걸맞게 보다 기념비적인 규모로 추진되며 그 기법은 더욱 세련되고 정교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개의 과정은 서양미술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흐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포스트 모던을 주장하는 21세기 현재의 지구촌 사회에도 문명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원시부족사회의 미술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신앙과 전설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제의품이나 여러 공예적인 생활용품들, 장신구들을 대대로 전수되어온 솜씨로 만들어 냅니다. 그들이 생산한 민속미술, 혹은 장식품들은 관광객을 위한 상품으로 개발되기도 하고 도시의 미술관에 수집되어 전시되기도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문신이 유행하는 것처럼 원시미술은 이국적인 패션의 하나로 현재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도1 관광기념품으로 팔리는 아프리카 마스크
 
 
 
 
도2 몸에 문신을 한 남자
 
 
 
 
도3 마르케사스 섬
문신을 하고 곤봉을 든 전사
19세기, 에칭
 
 
 
 
일반적으로 역사이전의 선사시대 미술이나 부족의 미술을 일컬어 '원시미술', '프리미티브 아트'라고 부릅니다. 지역적으로는 크게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중앙 아메리카의 프리 콜롬비아 미술을 통칭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공예적인 생산품에 대해서 어떻게 미학적 가치를 매기고 미술의 역사에서 어떤 위상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부족미술의 경우 그 양식이 수천년에 걸쳐서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동서양의 타 미술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근래에 들어 이러한 지역의 미술에 대한 연구와 유적의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원시미술을 미술사에서 어떻게 위치 지울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현대미술과 프리미티비즘 : 모더니즘 속의 프리미티비즘

19세기 프랑스의 개성적인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은 남태평양의 섬으로 떠나며 자신이 현대의 야만인임을 자랑스럽게 자처하였습니다. 그의 회화 <그리스도의 탄생>(도4)은 어두운 마스크를 쓴 인물, 장식적인 패턴의 문양이 새겨진 기둥 등 남태평양 부족미술의 신비한 색채와 도상으로 가득합니다. 서구의 전통적인 기독교 주제가 원시미술의 조형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지요. 도6과 같이 그가 즐겨 제작하였던 거친 목판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원시미술의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도4 폴 고갱 <그리스도의 탄생, 신의 아들 테 타마리 노 아투아>
1896년, 캔바스에 유채, 뭔헨 시립미술관
 
 
도5 파푸아 뉴기니 민속의상
1953-54년 사진
 
 
도6 폴 고갱 <십자가의 그리스도>
나무조각
 
 
도7 마르케사스 부족의 지팡이 장식
 
 
 
 
 
20세기 큐비즘으로 이행하는데 선구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도8)은 그가 당시 민속박물관에서 보았던 아프리카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도9). 오랫동안 이 그림을 공개하지 않았던 피카소는 수 차례에 거쳐 화면의 구성과 여인들의 포즈를 변경하였는데 오른쪽 두 여자의 얼굴이 처음과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10의 사진을 보면 젊은 시절 피카소의 작업실에 다양한 아프리카 조각과 가면들이 수집되어 있었던 것이 보이지요? 이러한 예는 20세기 미술사에서 너무 쉽게 발견됩니다. 마티스나 드렝과 같은 야수파의 회화, 브랑쿠지와 자코메티의 조각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의 선구자들은 원시미술의 단순함과 과감한 생략, 왜곡을 높이 찬양하고 그것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도8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 ,
1907년캔바스에 유채, 244×234 cm
뉴욕 근대미술관
 
 
도9 아비뇽의 아가씨와 아프리카 조각의 비교
 
 
 
 
 
도10 바토 라브와르 작업실에 있는 피카소
파리 1908
 
 
 
 
 
이러한 현대미술과 부족미술, 혹은 원시미술간의 유사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1984년 뉴욕의 근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 《20세기 미술 속의 원시주의: 부족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유사성 Primitivism in 20th Century Art: Affinity of the Tribal and the Modern》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도11은 이 전시회의 성과물로 나온 도록의 표지입니다. 피카소의 여인의 두상과 아프리카 조각의 형태상의 유사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한 편집이 눈에 띄는군요. 이 도록에는 피카소 뿐 아니라 원시미술과 유사한 현대작가들의 예를 수없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 언급된 파울 클레의 회화와 뉴기니아 전사들의 나무 방패의 채색문양은 그 선의 패턴과 색채에 있어서 정말 흡사하지 않습니까?(도12, 도13)

 

도11 <20세기 미술 속의 프리미티비즘 >
뉴욕 근대미술관 1984년 전시 도록
 
 
 
도12 파울 클레 <의도> 1938
캔바스에 채색과 신문 접착, 75×112 cm
베른 미술관
 
 
도13 뉴기니아, 전사들의 방패, 목재에 채색
 
 
 
 

이 전시회를 기획하였던 미술관의 의도는 현대미술과의 형태적인 유사성을 통해 부족미술의 독특한 미학적인 특질을 드러내고 그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형태적인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원시미술의 제의적인 측면이나 서사적인 내용, 그리고 장소성 등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형식을 중시했던 현대미술의 이념에 부족미술의 본모습이 가려졌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초 원시주의는 서구미술에서 바라본 입장이 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19세기 유럽의 원시미술 수집 붐 : 트로카데로 인류학박물관

원시미술에 대한 수집 붐은 19세기 프랑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식민지에 대한 영토적, 학문적인 확장의 결과로 인류학, 인종학의 발달과 고고학적인 발굴이 진행되었으며, 이때 수집된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의 부족미술품은 박물관에 수집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만국박람회와 같은 전시를 통해 유럽인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아래 도14의 삽화는 1978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인데 왼쪽에 트로카데로 박물관이 눈에 띄는군요. 오른쪽(도15)은 그 내부의 모습입니다. 현재 파리의 에펠탑을 마주보고 있는 트로카데로 인류학 박물관은 188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서 건립된 볼거리의 하나였습니다.

 

도14 왼쪽에 트로카데로 민속박물관과 오른쪽의 샹 드 마르
1887년 파리 만국박람회 일러스트레이션
 
 
 
도15 파리, 트로카데로 박물관
오세아니아 갤러리, 1930년
 
 
 
 

 

 
 
원래 프리미티브 미술이란 유럽이외 지역의 미술이라는 말과 함께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느낌을 주는 전성기 르네상스 이전의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원시미술이라는 뜻은 공간적인 의미와 함께 시간적인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로 과거, 그러니까 미술이 진보하기 이전의 원형의 시기를 의미합니다. 영국의 19세기 중반 라파엘전파 미술가들은 회화에 있어서 순수함의 원형을 바로 15세기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지리적인 의미가 더욱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브류타뉴나 퐁타벵과 같은 도시 밖의 미술을 지칭하는 데서 더 나아가 점차 유럽이외의 오지의 미술을 일컫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미술에서의 원시주의는 서구인들이 자신과는 다른 문명, 소외된 타자의 미술을 정의하는 식민주의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19세기 일어난 원시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 충동은 물론 근대화에 따른 자연에 대한 희구와 문명 밖으로의 도피심리의 결과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족미술이라 할 수 있는 원시미술로는 크게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발견 이전의 중남미 미술과 북미의 인디안 미술 등이 있습니다.

 

 

아프리카미술

현재 52개의 국가로 형성된 아프리카는 사실은 그 지형적 다양성 못지 않게 수 백 여 개의 다른 인종, 언어 문화적인 집단들로 이루어진 부족사회의 모습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족미술이 그렇듯이 아프리카 미술에는 고급미술과 응용, 혹은 공예와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시각미술을 지칭하는 'art' 즉 '미술'이라는 개념을 대부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미술은 사후세계에 대한 염원과 통치자에게 신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미술에서 기원한 문화적인 양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초기 아프리카 조각(도16, 17)은 영원한 느낌을 주는 양식화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도16의 수염을 기른 남자의 두상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조상(2주 두 번째 주제 참조)과 그 인상이 흡사합니다.

 

도16 <턱수염이 있는 남자>
기원전 500년경, 테라코타
20×14.5×8.5 cm, 튜니지아, 바르도 박물관
 
 
도17 <여인상> 나이지리아, 노크문명
대략 기원전 500년-기원 400년, 테라코타
볼티모어 박물관
 
 

 

 
 
그러나 11-12세기, 나이지리아 서쪽지역인 이페(Ife)에서는 사실적인 표정과 모델링이 돋보이는 자연주의적인 양식이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도18, 19). 이페에서 출토의 통치자상(도18)은 얼굴이 신체보다 커 비례상의 어색함은 남아 있으나 인물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례상 머리가 커진 것은 솜씨의 미숙함 때문이 아니라 머리를 지혜가 머무르는 곳으로 중시하는 토속신앙에 따라 통치자의 이상화시키는 한 방편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강렬한 눈빛까지도 포착한 도19의 청년의 두상은 그 다부진 표정에 있어서나 근육의 해부학적인 묘사에 있어서 뛰어난 자연주의 초상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18 <왕의 초상> 나이지리아 이페 출토
, 11-12세기
아연합금, 높이 약 183 cm 이페 박물관
 
 
도19 <왕의 초상>
이페 출토, 황동, 13세기
 
 
 
도20 제단, 나이지리아, 베닌
17-18세기, 청동, 높이 약 45 cm
 
 
 
도21 여왕의 두상, 상아
나이지니아 베닌, 16세기 중반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편 아프리카는 역사적으로 상아해안이라 알려진 서부의 해안을 따라 문명과 교류가 활발하였고, 13세기에서 18세기까지 이 곳에서는 베닌(Benin)이라는 도시국가가 번성하였습니다. 15세기 포르투칼과 무역을 하기도 하였던 이 도시국가는 신전에 앉은 통치자를 묘사한 개인용 제단(도20)이나 상아로 만든 인상적인 왕의 모후의 조각상(도21)에서 보듯 상당히 정교한 청동조각과 궁정미술을 남기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의 식민지가 된 이후의 아프리카의 미술

19세기까지 유럽과 관계가 활발하였던 서부해안 지역의 아프리카 많은 지역은 이슬람이나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면서 토착의 신앙과 문화에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에 의해 이교의 우상숭배의 증거로 혹은, 개인이나 상인들에 의해 민예품으로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 미술품들이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많은 컬렉션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들은 현재 아프리카 미술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콜럼부스 이전의 아메리카 미술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 중남미에서는 현재의 멕시코, 과테말라, 페루 등을 중심으로 기원전 2세기이후 부터 화려하고 강력한 문명이 꽃피었습니다. 수학과 천문학이 발달하여 정교한 달력을 만들 줄 알았으며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던 마야문명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도22, 23, 24). 도23과 같이 토템신앙을 바탕으로 장식적인 문양이 두드러진 거석들이 고원도시의 광장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또한 최근의 고고학적인 발굴로 알려지기 시작한 서부 멕시코 일대의 기원 7세기 경의 테오티후아칸 유적에서는 건축물을 뒤덮은 다양한 타일장식에서 보듯 도자기 공예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가 발휘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도25, 26). 현재 페루에서 발견되는 사람의 얼굴모양을 한 부장용 용기(도27) 역시 사실성과 높은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22 피라미드 성전, 과테말라
마야문명,
기원후 700년 경
 
 
도23 <통치자상>
온두라스, 코판 계곡
높이 약 357cm
 
 
도24 온두라스
코판 계곡, 마야의 대성전 상상복원도
하버드 대학 피바디 박물관
 
 
도25 멕시코, 테오티후아칸 유적의 조망도
앞쪽 <달의 피라미드>, 뒤쪽 <태양의 피라미드>
기원후 50-200년 경에 건설
 
 
도26 멕시코, 테오티후아칸 유적
신전의 벽돌 부조장식
기원후 3세기
 
 
도27 <통치자의 초상을 한 물병>
도기, 높이 35.6 cm, 페루

버킹험 펀드

 
 
콜럼부스의 상륙을 역사적인 기점으로 삼는 이유는 현재 신대륙의 문화를 이 지역의 토착문명과는 그 뿌리를 달리하는 유럽문명의 확장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중남미의 문명은 콜럼부스 이후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으며, 다만 그 미술이 토착민들에 의해 공예적인 방식으 로 전승되고 있을 뿐입니다.
 
 
미술에서 '원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변모과정 역시 서구의 식민지 확장의 역사와 같이 하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현대미술의 형성기에 고갱, 마티스, 블라맹크, 드렝, 피카소에 이르는 여러 미술가들과 개인 콜렉터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원시주의, 프리미티비즘은 부족의 실재 미술이기보다는 서구 모더니즘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문명의 외곽에 있는 이러한 원시미술은 먼저 앞 시간에 보았던 선사시대의 미술이 그러하였던 것 같이, 사회 공동체 내에서의 시각이미지의 본래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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