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後의 세계와 부활에 대한 관심
3세기이후 로마는 급격히 붕괴되어 정치와 경제면에서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제의 부자도 오늘은 거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혼란하였으니 아무도 앞날에 대한 확신을 갖을 수 없었습니다. 현실에서의 이러한 불안감은 내세신앙을 낳게 하였으며 로마말기에 유행하였던 많은 사교들은 내세와 부활을 약속하는 공통점들을 지녔습니다. 크리스트교도 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다른 사교들 보다 도덕적인 설득력이 있고 포교가 조직적이었던 큰 장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같은 크리스트교도 중세와 현대의 양상이 다르듯이 초기의 크리스트교도 달랐으며 313년에 밀라노 칙령에 의해 공인되기 이전의 박해시대와 이후의 양상 또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박해시대의 사람들은 신, 구약의 많은 일화들 가운데서도 특히 <요나>와 <나자로의 부활>을 주제로 삼아 구원과 부활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3세기말에 제작된 <요나이야기 석관>(도1,2,3)에서 이야기는 아래 왼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 재앙을 알리라고 명하였으나 요나는 도망치려고 배를 탔습니다. 갑자기 거센 풍랑이 있어 그치지 않자 사람들은 제비뽑기를 하여 요나를 물 속에 던져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큰 물고기에 삼켜진 요나가 살려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하느님은 그를 살려주며 니느웨로 가게 하였습니다. 요나가 하느님 말씀을 따르자 하느님은 언덕에서 쉬고 있는 그의 자리를 아주까리 잎으로 시원하게 까지 해주었습니다. 즉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구약성경 요나편 참고). 믿음에 의한 구원과 부활의 주제는 몇몇 일화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위 왼쪽에 새겨진 나자로의 부활(도2의 왼쪽 위), 바위를 쳐 물이 솟아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갈증을 해소시키는 모세 등등. 석관의 가장 오른쪽에 새겨진 낚시하는 장면은 영혼을 낚는 어부인 예수를 상징할 것이며, 그 위에 작은 크기로 새겨진 양치기도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선한 목자로서의 예수, 즉 구원자의 모습입니다.

 

도1 <요나 이야기의 로마석관>, 3세기말, 로마
 
 
 
 
도2 도1의 왼쪽 부분
 
 
 
도3 도1의 오른쪽 부분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배치하였던 로마의 역사 부조방식과 사뭇 다릅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와 요동치는 큰 물고기 그리고 아주까리 그늘 밑의 요나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다른 이야기들은 남는 공간에 하나씩 넣는 듯이 배치하였습니다. 화면 구성의 면에서 서로간의 균형엔 관심이 없으며 조각을 하는 방법에서도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엔 전혀 개의치 않은 듯합니다. 인물이나 사물을 배경에서 두드러지게 하고 세부를 깊게 선각으로 처리함으로써 이야기를 분명히 전하는 것에 관심을 쏟은 듯합니다.
 
 

그리스도 도상의 성립 - 기독교 공인 이전과 이후

우리에게 예수의 모습을 말해보라 하면 아마 얼굴이 긴 편이며, 구불거리는 긴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턱수염을 길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화가들이 약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동원한 예수의 모습이 점차 전형을 이루며 내려온 것일 뿐 실제 예수의 모습과는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2-3세기가 지난 후 예수의 모습을 그려야했던 로마 말기의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았을까요. 생전의 예수를 본 사람도 없고 이전에 존재했던 신도 아니며 또한 신학적으로도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닌 예수를 어떠한 형태로 나타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아주 큰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 조각을 많이 보아온 그들은 제우스나 아폴로 (도5,6), 아름다운 그리스 소년(도4) 이나 철학자 등 예수의 뜻을 공유할 수 있는 신의 도상에 예수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의 바람을 나타내었습니다.

도4 <그리스 청년모습의 그리스도>
3세기, 로마,국립박물관
 
 
 
도5 <아폴로 모습의 예수>
3세기, 쥴리무덤의 천장, 바티칸
 
 
 
도6 도5의 부분
 
 
 
 
 
 
 

예수의 상을 처음으로 그린 것은 3세기경이라고 추측되는데 예수를 마차를 타고 나타나는 태양신 아폴로의 모습을 빌어 나타내고 주변을 포도덩쿨로 장식하여 자신을 '포도덩쿨'이라고 비유한 예수를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도5,6). 이들은 희생양을 어깨에 이고 있는 그리스의 젊은이 도상을 빌어 선한 목자 예수를 나타내고(도7), 디오니소스 신화에 그려지던 포도덩쿨과 포도주를 빌어 예수의 피를 나타내는 등 그리스 미술의 도상을 빌어 크리스트교의 의미를 상징하곤 한 것입니다. 공인 이전엔 그외에도 교사나 철학자로 그리고 물고기 모양으로 예수를 나타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구원자 예수 크리스트'라는 뜻의 그리스어의 단어 첫 자를 모은 ikthus라는 단어가 물고기라는 뜻이 된데서 기인하는 표시였습니다.

 

도7 로마석관, 4세기, 로마, 라테라노 박물관, "칼리메레야,
우리의 신이 너와 누이동생 힐라라의 심신을 회복시켜주었다."라는 글이 새겨있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가의 종교로 자리바꿈하면서 예수의 모습도 전지전능한 우주의 지배자로 또는 옥좌에 앉은 황제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어서 공인 이전과 큰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의 고위관리였던 쥬니우스 바수스(Junius Bassus) 석관은 여러 면에서 이 시대 미술을 대변합니다. 가운데 부분인 <우주의 지배자 예수>는 특히 흥미롭습니다(도8,9). 헬레니즘적인 우아함을 지닌 청년모습의 예수는 하늘나라를 뜻하는 콜루스(Coelus)의 의인화, 즉 우주를 발아래 두고 있으며, 베드로와 바울이 양쪽에서 보좌하는 가운데 옥좌에 앉아있습니다.

 

도8 <쥬니우스 바수스의 석관>, 359년
대리석, 118×213.8cm,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묘소
 
도9 도8의 위 중앙부분
<우주의 지배자 예수>
 
 
 
 

5세기경부터 황제의 후원아래 지어지기 시작한 대규모의 교회에 그려진 예수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치거나 구원하는 예수가 아니고 천상의 세계에 군림하며 세상을 심판하러 오는 절대자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산타 푸르덴지아나 교회(Santa Prudenziana) 후진(apse)부분의 모자익 벽화는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함께 있는 <존엄한 예수>(Cristo in Maesta, 도10)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머리엔 황금빛 두광을 둘러 성스러움을 상징한 예수는 주변의 사도들 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보석이 박힌 옥좌에 앉아있습니다. 가난하게 살았던 사도들에게 원로원 의원의 옷을 입히고 예수에겐 황제의 모습을 부여하는 발상은 기독교의 권위를 높여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10 산타 푸르덴지아나의 후진 모자익, 390년경, 로마, 산타푸르덴지아나
 
 
 
 
 
 

지상에서의 황제의 개념을 천상의 예수에게 대치시키는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순교한 자리인 로마의 교외엔 큰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바오로 교회 후진부분은 <존엄한 예수>뿐만 아니라 승리의 아취가 덧붙여지고 그 한가운데 원형 속엔 예수의 흉상이 무섭게 그려져 있습니다. 위 양쪽에 네 복음사가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그려진 것으로 모아 이 예수는 최후의 심판에 나타나는 심판자, 승리자, 지배자의 역할의 하느님임을 알 수 있는데 승리의 아취는 바로 로마황제들이 전쟁에서 이긴 후 개선을 기념한 소위 개선문(Arco Trionfale)의 개념이 교회건축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도11). 주변의 다른 인물들보다 월등히 크고 엄격한 인상을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예수의 도상을 우리는 '존엄한 지배자'(Maestas Domini)라 부르는데 5세기에 시작된 이 개념과 도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비잔틴의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세상의 지배자) 나 로마네스크 시대의 예수도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도11 산 파올로 푸오리 델레무라, 로마
385년 시작하여 완공되었으나 1823년의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손실된 후 보수되었음
 
도12 도11의 후진과 승리의 문 부분
 
 
 
 
 

신화와 기독교, 도상과 의미의 혼재
라티나 길가의 카타콤브에 그려진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도상이 기독교적 의미로 변화하는 혼합적인 현상을 잘 보여줍니다(도13,14). 감실 양쪽엔 헤라클레스의 노역이 그려지고, 한 가운데엔 헤라클레스가 알체스티(Alcestis)를 그의 남편 아드메투스(Admetus)에게 데려다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교의 신화가 왜 기독교인들의 기도장소에 그려진 것일까요?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 신화에 익숙했던 고대 말에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노역의 하나로 저승사자 케르베루스(Cerberus)를 잡으러 지옥에 내려갔을 때 그는 남편이 죽은 자리에서 죽음을 택한 알체스티를 다시 살려 역시 되살려낸 남편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즉 죽음과 부활의 주제인 것입니다. 헤라클레스의 이 일화를 통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다시 부활하였으며 만인의 부활을 약속하는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헤라클레스는 원래 인간세계에 있었으나 수많은 고통을 감내한 후 영원히 사는 神의 영역에 들어갔으니, 사후의 영생으로 보상되는 현세의 고통을 나타내는데 더 이상 좋은 비교가 없었을 것입니다. 카타콤브 의 화가와, 무덤의 주문자, 그리고 이를 보는 이들은 이렇게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를 섞어가며 고대 말의 종교를 형성한 것입니다.

 

도13 <알체스티를 남편 아드메투스에게 데려다주는 헤라클레스>
비아 라티나의 카타콤브 벽화, 4세기 후반, 로마
 
 
도14 도13의 왼쪽 그림,
<히드라를 처치하는 헤라클레스>
 
 
 
 

기독교 도상이 형성되면서 그 반대의 현상도 나타나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이프러스에서 발굴된 도15의 모자익을 봅시다. 무엇을 나타낸 것 같으세요. 언뜻 보면 성모자와 경배하는 동방박사들 같죠? 그러나 이는 헤르메스가 어린 디오니소스를 님프에게 데려다주는 장면입니다. 어린 디오니소스는 아기 예수같이 두광을 쓰고, 이를 안고 있는 이는 마리아 같지만 머리와 발목에 날개가 달려있는 헤르메스입니다.
같은 주제를 다룬 그리스 시대의 도기화(도16)와 비교하면 양식의 변화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그림에선 디오니소스가 그림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강보에 쌓인 작은 아기에 불과하지만 이제 중세초기에 그려진 그림에서는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에 두광까지 묘사해 두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스러움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고자 하는 중세의 방법인 것입니다.

 

도15 <어린 디오니소스를 님프에게 데려다 주는 헤르메스>
4세기 전반, 사이프러스에 있는 네아 파포스의 바닥 모자익
 
 
도16 <어린디오니소스를 님프에게 데려다 주는 헤르메스>
기원전 440년경, 바티칸 박물관
 
 
 
 

교회건축의 성립


초기의 교회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나 큰 도시들에서는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소아시아반도와 중동지역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순교자들의 무덤에서 죽은 이와 예수를 기념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 교회로 발전한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기원은 기독교가 국교화 되기 전 남의 눈을 피하여 모임을 가져야 했던 신자들은 가정집의 큰 방 하나를 개조하여 모임을 가지며 여러 명이 식사의 제례를 치를 수 있는 공간으로 교회를 대신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황제 자신과 어머니가 강력한 후원자가 된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엔 많은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장소에 대규모의 교회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의 일생에서 중요한 시기마다 하느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312년 겨울에 일어난 마센티우스 전쟁에서는 전날 밤 꿈에 키로(Chi-Rho) 형태로 나타난 하느님으로부터 "이 기호로 정복하라"라는 계시를 받고 깃발에 이를 새겨 싸운 후 이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였습니다. 키로는 크리스트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약자인 XP를 한 글자로 만든 기호로 P라고 쓰며 현재도 카톨릭교단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기독교는 공인과 함께 정치적으로 로마 제정과 밀접해졌으며, 로마말기의 불안정한 사회상황에서 빠른 기간에 국가 종교의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그리스의 신전은 원래 신을 모시는 곳이었으며 모든 사람들은 신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종교행사를 가졌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미사는 예수의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건물 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공회당인 바실리카형식을 빌어 교회를 설계하였습니다. 바실리카는 원래 로마시대에 재판이나 상인들의 중개, 그 밖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각종 행사에 쓰던 평범한 장방형 건물이었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구조를 그들의 필요에 따라 변형하였습니다.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현재의 바티칸 언덕부분을 교회에 주며 베드로의 무덤을 보호케 하였습니다. 교회는 이 곳을 찾아오는 많은 순례자들을 수용하고 베드로의 죽음을 기념하며 또 미사를 드려야했습니다. 현재의 베드로 대성당은 15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개축되어 4세기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후대의 연구에 의해 기본원형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도17과 18은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의 평면도와 원래모습을 짐작케하는 그림입니다. 회랑(nave)과 측랑(aisle)은 로마 바실리카의 원형에서 빌어온 것으로 교회는 이 장방형 부분을 신자들이 앉는 곳으로 사용하였으며 좁은 한쪽 끝을 둥글게 한 후진(apse)은 제단으로 사용하여 이곳은 성직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제한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무덤은 후진과 익랑(翼廊, transit)사이의 중앙에 놓이고 무덤 위는 닷집으로 덮어 장엄하게 하였다고 추측되며 팔을 벌린 듯이 좌우를 가로지르는 익랑(翼廊, transit)의 폭을 넓게 하여 이 무덤을 찾는 많은 순례객들이 운집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바실리카를 T자로 변형시킨 것은 십자가의 상징을 도면화 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으나 초기 기독교의 교회 모두가 같은 형태는 아니어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그 후에도 발전하여 다음주에 살펴볼 로마네스크의 상징적인 평면도로 완성되었습니다. 중정(artrium) 부분은 도1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붕이 없는 옥외 공간으로 바실리카가 지어진지 약 50년 후에 증축한 것입니다.

 

도17 베드로 대성당 평면도
 
 
 
 
도18 베드로 대성당 원래모습
 
 
 
도19 베드로 대성당 중정
페라보스코(1620년경)의 판화
 
 
 
 

385년 경 사도 바울이 순교한 자리엔 <베드로 대성당>과 거의 같은 규모, 같은 구조의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로마 시내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로마 성곽 밖의 바오로 성당>(San Paolo fuori le mura)이라고 부르는 이 교회는 1823년의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손실되었지만 18세기 동판화가 피라네지의 에칭을 통해서나마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도20). 400년경의 한 기록은 "내부는 궁정 같이 화려하게 빛났으며" 코린트식의 대리석 기둥과 창문사이는 온통 "금빛으로 빛났다"고 당시의 웅장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도20 피라네지, <산 파올로 푸오리 델레무라>
에칭, 18세기
 
 
 
 
 

초기의 필사본

파피루스 두루마리 형식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접는 책으로 바뀐 것은 기원 후 1세기 경이었습니다. 몇 세기동안 두 형식이 공존하다가 4세기 이후에 비로소 책 형식이 더욱 보편화 되었는데 이로써 여러 개의 두루 마리에 써야했던 글도 한 권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은 주로 소설이나 성경의 이야기들인데 삽화를 함께 곁들이고 있어서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시대 회화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도21은 베르길리우스(Vergilius: 70-19B.C)의 詩集 중 마흔 네 번 째 장에 그려진 그림으로 <農耕詩>(Georgica)부분입니다. 말과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한가로운 전원에서 한 목동은 피리를 불고 다른 목동은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태들이 어딘가 어색합니다. 사물들이 마치 허공에 걸린 듯이 보이는 것은 아마 원근법이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가능한 한 서로 겹쳐지는 것을 피하였으며 또한 빈 공간도 없이 메꾸고 있습니다. 고전시대엔 얼굴을 3/4각도에서 그림으로써 양감을 나타내던 얼굴묘사 방법은 완전한 측면으로 변하여 도안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도21 <농경시 삽화>
베르길리우스 로마누스의 필사본 삽화
 
 
 

 
 

이 시대 그림들이 나타내는 사물들은 실제 우리 앞에 있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서 특정 의미 전달을 위한 형식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도22는 창세기 24장 중 레베카와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제가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야기는 대충 이러합니다. 아브라함이 종을 시켜 자기의 고향에 가서 아들 이삭의 신부를 골라오게 하였습니다. 엘리에제는 낙타 열 마리와 함께 길을 떠나 나홀이라는 성에 다다랐습니다. 성에서 나와 물을 긷는 처녀에게 마실 물을 청하니 처녀는 물을 항아리 채 주고 낙타에게도 물을 길어 주었습니다. 엘리에제는 레베카라고 하는 이 처녀를 이삭의 신부로 택하였습니다.
그림에서 다시 이 이야기를 봅시다. 레베카는 오른쪽 위에 그려진 나홀성에서 나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기둥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우물에 이르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반나체로 그려진 샘의 님프가 자기 항아리에서 물을 샘으로 흘려 넣고 있고 물을 기른 레베카는 낙타 열 마리를 데리고 온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을 주고 있습니다.
늘어선 기둥들보다 사람을 크게 그린 것을 보면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실제의 공간감을 나타내는 데 큰 관심이 없음이 분명하며, 연속된 시간에 일어난 레베카의 두 장면을 같은 공간에 그리는 것을 보면 구체적인 시간에도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형상들은 특정 시간과 장소를 나타낸 현실의 모습이기 보다 이야기 전달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22 <레베카와 엘리에제>, 비엔나 창세기 필사본 삽화
6세기경, 비엔나 도서관
 
 
 
 
 

헬레니즘의 잔존
우리는 지금까지 고대 말과 초기 기독교 시대에 나타나는 미술의 새로운 경향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방법 또한 뿌리 깊은 것이어서 한 편에서는 매우 세련된 헬레니즘 경향의 미술품들이 6세기경 까지도 제작되고 있습니다.
로마의 옛 귀족 가문인 니코마끼(Nicomachorum)집안과 심마끼(Symmachorum)가문에서는 두 집안끼리 맺어진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상아로 된 딥틱(Diptych:두 쪽 병풍)을 제작했습니다. 왼쪽 것은 파리의 클루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오른쪽 것은 런던의 빅토리아와 앨버트 박물관에 있는데 도23은 보관 상태가 좋은 전자의 것입니다. 이 부조의 내용은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진 이후 이외의 종교들이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했을 때에도 옛 귀족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종교의식(儀式)이 행해졌음을 보여줍니다. 바카스의 여사제가 주피터를 상징하는 참나무 아래 놓인 제단에 향을 올려놓고 있으며 작은 시종은 포도주 잔을 사제에게 건네주고 있습니다(도23). 여사제의 모습에서 보이는 헬레니즘 전통의 완벽한 아름다움은 참으로 경탄스럽습니다. 가능한 한 옛날의 아름다움의 세계에 가까이 가고자하는 주문자의 바램과 만든 이의 노력을 우리가 상상해보면 옛 고전문화에 대한 그들의 향수가 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옛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변해 가는 사회 속에서 다른 한 편으로 몰리고 있는 옛 귀족들은 그리스 신화를 종교형태로 고수하고 옛날의 고상함과 우아한 아름다움을 자신들이 지켜야 한다고 믿었으리라 봅니다.

도23 <니코마키 심마키 딥틱>
중 왼쪽 부분
4세기말, 상아
파리, 클루니 박물관
 
도24 <성 미카엘 천사>
6세기 초, 상아
런던, 대영박물관
 
 
도25 <아나스타시우스 영사 딥틱>
517년, 상아
파리 국립도서관
 
 
 
 
 

헬레니즘의 전통은 구 세력에게만 옹호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가 안정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기독교 주제들도 세련된 옛 양식으로 제작되곤 하였습니다. 도24의 딥틱에 새겨진 미카엘 천사 또한 그 세련됨이 놀랍습니다. 도25에서 볼 수 있는 좌우 대칭적이고 평평한 도안과 같은 고대 말의 새로운 양식과는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다시금 재현시킨다고 해서 고전의 미의식이 그대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도24의 미카엘 천사의 발을 보십시요. 층계를 세 칸이나 딛고 있지 않습니까. 옛 형식을 옮겨오려고 애를 썼으나 그들이 중요시 여겼던 공간감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결과이리라 봅니다.

 

 

 

 

그리스 로마의 신

 

고르곤(Gorgon)
스테노. 에우리알레. 메두사의 세자매로 서쪽 끝 밤의 나라와 헤스페리스(저녁의 딸)들의 동산 가까이 살고 있다. 고르곤의 머리는 뱀이며, 멧돼지의 어금니와 같은 커다란 이빨에, 손은 청동이며, 커다란 황금날개를 가지고 잇다. 그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돌로 변하기 때문에 그녀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3명 가운데 2명은 불사신이었으나, 메두사만이 죽을 운명이어서, 영웅 페르세우스의 손에 목이 잘렸다.

메두사
고르곤이라는 세 마녀들 주의 하나고, 원래는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여신 아테나의 저주를 받아 무서운 괴물로 변하였다. 얼굴 생김새가 너무 끔찍하여 그것을 본 사람은 돌로 변하였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죽이자, 그 피에서 포세이돈의 자식인 날개 달린 천마 페가소스와 크리사오르가 태어났다. 메두사의 잘려진 머리는 아테나의 갑옷에 장식으로 붙여졌다. 또한 고르곤의 머리는 신전이나 다른 곳을 장식할 때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런 건물을 '고르고네이온'(Gorgoneion)으로 부르기도 한다.

디오니소소(Dionysos)
로마신화에서는 '바쿠스'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대지를 풍요를 주재하는 신이며, 포도재배와 관련하여 술의 신이 되기도 한다.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멜레를 질투한 헤라의 속임수에 세멜레는 번개에 타 죽었으나, 내태에 있던 디오니소스는 살아나 제우스의 넓적다리 속에서 달이 찰 때까지 자랐다고 한다. 그는 이후 성장하면서 여러지방을 떠돌아 다니는데, 이때 포도재배를 각지에 보급, 문명을 전달했다고 전한다. 디오니소스에 대한 신앙은 술과 가무를 동반하는 광란의 축제였으며 로마 시대에 와서도 이 신앙은 계속되어 점차 비종교적인 경향이 강해졌다. 술의 신이자 여성스러운 외모를 하고 있는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수 많은 추종자를 거르리고 있었으며, 신화에서는 쾌락적인 사티로스와 마이나데스가 그의 추종자였다.

아마존(Amazon)
사냥과 전투를 즐겼던 여성전사들의 부족으로 트로이 전쟁에서 참가하였다. 전투의 신 아레스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여전사들의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리스인들이 이들에게 매혹되는 것은 아마도 여성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그리스 남성들의 집단적인 두려움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신화에서 아마존들은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돌보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였으며 남성들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였다. 많은 그리스 영웅들이 아마존과 연관되어 있으며, 특히 아킬레우스, 헤라클레스, 테세우스는 아마존과의 연애관계로 얽혀 있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가 가지고 있는 허리띠를 빼앗고자 원정을 하였다고 한다. 아킬레우스는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이아(penthesilea)를 죽였는데, 여왕이 죽는 순간 사람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스 미술가들은 기원전 6세기초부터 아마존을 집중적으로 나타낸다.

아킬레우스(Achilles)
그리스 신화의 특출한 전사로서 그리스의 트로이 포위기간 동안 그가 보여준 모험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미술가들은 그와 파트로클로스의 우정, 핵토르와의 전투, 트로이의 왕자 트로일로스에 대한 기습공격과, 켄타우로스가 그를 양육한 이야기, 아마존들과의 전투와 같이 트로이 전쟁 회에도 다양한 에피소드를 즐겨 묘사하였다.

아테나(Athena)
아테네의 수호여신. 제우스와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의 딸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티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이 제우스의 지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땅의 신 가이아의 예언에 제우스는 메티스를 삼켜버렸다. 그러나 달이 찬 아테네가 제우스의 머리에서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함성을 지르면서 태어났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괴물 고르곤의 목이 달린 방채 아이기스를 든 무장한 처녀의 모습으로 상징되고 있다. 올빼미가 이 여신의 상징으로 이것도 옛 동물숭배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외래에서 전래된 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전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신화에서는 끝까지 처녀성을 지킨 것으로 묘사되며, 특별히 '처녀신 아테나(아테나 파르테노스)'라 하며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이 처녀신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호전적인 면을 지니지만, 여성들이 하는 일을 보호하기도 하며 장인들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페르세우스(Perseus)
제우스와 아르고스의 와녀 다나에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딸에게서 낳은 자식에게 살해 될 것이라는 신탁을 믿고 다나에를 밀실에 가두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마음을 두었던 제우스가 황금의 비로 변신하여 지붕으로 스며들어가 페르세우스를 낳게 하였다. 페르세우스는 고르곤인 메두사를 죽였으며, 바다 괴물로부터 안드로메다를 구하였다. 그가 죽인 메두사의 머리는 아테나 여신에세 바쳐져 그녀의 방패에 부착되었다.

헤라클레스(Herakles)
그리스의 영웅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다. 헤라 클레스는 제우스의 서자였으며, 인간처럼 줄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후에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그는 신이 되어 올림포스에 올라간다. 올림피아에 있는 제우스 신전을 장식하는 12가지 과업은 길고도 복잡한 그의 영웅적인 과업 중 전범화된 것이 어떤 것인지 확인시켜준다. 그 12가지 과엄은, 네메아의 사자퇴치, 레르네에 사는 히드라 퇴치, 케리네이라의 산중에 사는 사슴을 산 채로 잡는 일, 에리만토스산의 멧돼지를 산 채로 잡는 일, 아우게이아스왕의 가축 우리를 청소하는 일, 스팀팔스 호반의 사나운 새 퇴치, 크레타의 황소를 산채로 잡는 일, 디오메데스왕의 사람 잡아먹는 4마리의 말을 산 채로 잡는 일,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의 띠를 탈취하는 일, 괴물 게리온이 가지고 있는 소를 산채로 잡는 일, 님프 헤스페리스들이 지키는 동산의 황금사과를 따오는 일,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를 산채로 잡는 일이다. 후에 리디아의 여왕 옴팔레와 결혼하였다. 미술에서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유아기부터 장년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강력한 남성으로서 궁극적으로 신이 되었기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로마의 황제들은 말할것도 없고, 독재자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와 알렌산드로스 대왕의 분신으로 모셔졌다.

헤르메스(Hermes)
전령신. 로마 신화에서는 메르쿠리우스로 부른다. 헤르메스는 지팡이(케리케리온 혹은 카두세우스)를 들고 날개가 달린 신발을 신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영혼의 인도자로서 그는 지하세계와도 관련이 있다. '헤름'(Herms)이라는 기둥들 위에 올려진 수염 난 두상들은 본래 헤르메스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의도였으며, 주요도로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다.

 

 

 

 

카타콤 (Catacomb)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로 나폴리, 시라쿠사, 몰타, 아프리카, 소(小)아시아 등의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로마 근교에 많다. 카타콤은 원래 그리스어 ‘카타콤베’로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뜻하며, 로마 아피아 가도(街道)에 면(面)한 성(聖)세바스찬의 묘지가 두 언덕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3세기에 이 묘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세까지만 해도 지하묘지로서 알려진 것은 이 묘지뿐이었으나,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가 발견된 뒤로는 모든 지하묘지를 카타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지하에 묘지를 두는 풍습은 동방에서 전래되었으나 그리스도 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지하묘지의 풍습이 더욱 성행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피라네지, 지오반니 바티스타(Piranesi, Giovanni Battista ; 1720-78 )
 
18세기 이탈리아의 판화가, 건축가, 이론가. 피라네지는 고전기와 고전기 이후 로마의 건축물과 그 부근을 묘사한 대형 판화를 제작함으로서 로마의 명성을 높였고, 고전 고고학에 대한 관심과 신고전주의 미술운동에 이바지했다.
 
 

피라네지는 20세에 베네치아 대사의 건물화가로 고용되었고, 당대의 판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며 1745년에는 로마에 정착했다. 이 시기에 그는 동판에 섬세하고 날카로운 선을 반복함으로서 형성되는 풍부한 질감과 강렬한 명암 대비로 특징지어지는 독창적인 판화기법을 발전시켰다.

그가 평생 제작한 2000여 점의 판화 중 <감옥의 고안Carceri d'Invenzioni>시리즈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이 작품에서 감옥은 고대 로마 또는 바로크 시대의 페허로 신비로운 단두대와 고문기구들로 가득 찬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묘사됐다. 이 외에도 그의 전성기 판화인 <고대 로마>와 <로마 풍경>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정확한 묘사, 극적이고도 낭만적인 웅장함의 표현으로 건축을 묘사했다.

 

 

 

 

바실리카(basilica)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된 대규모 건물을 지칭하며, 고대 그리스 신전을 로마식으로 발전시킨 형식이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식으로 인정한 312년 이후에 바실리카는 기독교 의식을 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교회 건물로 사용되었다. 건물의 내부는 돔이 얹혀져 있고 채광창으로 빛을 끌어들이는 원통형의 중심부와 그 주위를 둘러싼 둥근 보행회로(ambulatory)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바실리카는 로마네스크와 고딕 성당의 주요 형식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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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라는 용어
서양의 4세기부터 14세기까지를 일컫는 '中世'(middle age)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중간시대라는 뜻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시대를 현대(modern era)라 부르고 그들이 모범으로 삼았던 그리스 로마 시대를 고대라고 부르며 그 사이의 시대를 중간시대라 일컬은 데서 유래하는 용어입니다. 물론 역사의 한 구간을 중간에 끼어있는 시대라고 인식한 것은 르네상스인들의 편견이며 자기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인식의 결과입니다.
천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있는 중세를 흔히 암흑기라고 부르곤 했지만 이 또한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중시한 르네상스인들이 神중심적인 중세를 비하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중세는 지중해 중심의 라틴민족과 유럽북방의 게르만민족이 융합하여 근대의 유럽국가의 원형을 형성하고 그 문화를 낳은 참으로 역동적인 역사의 연속이었습니다.

중세의 기간
중세의 시작 연대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달리 잡고 있습니다. 3세기경에 중세의 징후가 이미 나타나기 때문에 3세기를 시작으로 삼는 이도 있고, 서 로마가 멸망한 476년을 기준으로 삼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의 공통된 특징이 기독교이므로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삼는 학설이 일반적입니다. 중세의 끝 경계는 분명히 자를 수 없지만 이탈리아의 경우 르네상스의 시작을 15세기로 삼으므로 그 이전 즉 14세기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중세 미술과 오늘의 미술: 사회적인 역할의 차이
중세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늘의 미술을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술 자체에 대한 자각이나, 문명의 진단이나 예견을 요구하는 현대미술과는 달리 중세의 미술은 종교적인 또는 정치적인 필요와 주문에 따라 공방에서 만들어진 제조품입니다. 중세 미술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예나 조각들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장이의 생산품이었으며 이러한 익명성은 중세미술을 폄하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습니다.

생활 속의 미술: 부수미술(minor art)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
19세기 이후 순수미술 운동이 벌어지면서 미술은 예술자체를 목적으로 한 소위 순수 미술(fine art)과 쓸모를 위해 만들어진 응용 미술(applied art)분야로 크게 나뉘었으며 현대 미술에서 이 분류는 회화, 조각 위주의 소위 주요 미술(major art)과 공예나 상업 디자인의 부수 미술(minor art)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중세 미술은 모두 응용 미술이며 대부분이 부수 미술이니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은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미술의 범위를 넓혀 인간이 사회 생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모든 조형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중세 미술은 무궁무진한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중세의 미술품은 예술가 혼자의 몸짓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종교와 사회의 주문에 의한 것이어서 당시 사회의 특별한 관심들을 정확히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미술이 고대의 것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객관적인 사실묘사를 무시하고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힘을 높였다는 점입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이러한 비사실적인 성격을 부정적으로 판단하였으나 20세기 초의 미술사 연구에서는 큰 전환을 이루어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전달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적 묘사의 거부는 로마말기부터 시작된 현상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로마황제 초상들을 살펴보면서 4세기 전반에 제작된 콘스탄티누스황제상이 (5주, 주제2, 도26)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인 황제 상임을 이미 보았습니다.
같은 황제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도1)에 새겨진 <황제의 훈시>(도2,3)는 같은 개선문에 새겨진 이전 황제시대의 부조(도4)양식과 현격히 다릅니다. 양감은 없어지고 평면에 깊이 새기는 방식의 낮은 부조로 변하였으며, 주변의 인물보다 훨씬 크게 묘사된 황제는 중앙에 정면으로 배치되었습니다. 황제이지만 주변인물과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한 아드리아누스 황제의 부조(도4)와 비교하면, 4세기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엔 대상을 보이는 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부각시키고자 하는 중요성에 따라 크기와 위치를 정하였던 것입니다.

 

도1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2-315년, 로마
 
 
 
 
도2 <황제의 훈시> 부조
 
 
 
 
도3 <황제의 훈시> 도2의 중앙부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부조
315년경, 로마
 
 
도4 <아드리아누스 황제의 사냥 축하 의식 중
다이아나신에게의 헌주>
130년경, 대리석,,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아드리아누스 황제
로마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마차 경기장에 세워진 <데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 기단부> 부조 (도5,6)를 보면 위의 변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황제와 대신은 소위 로얄 박스로 차별화하고, 황제는 한 가운데 제일 크게 위치해 있습니다. 사실적인 요소는 전혀 없어서 모든 사람은 일률적이고, 따라서 개별화 시킬 수 없으며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오로지 크기가 큰 황제뿐입니다.

 

도5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오벨리스 기단부>
39년, 대리석, 콘스탄티노플의 마차 경기장
왼쪽엔 황제와 가족이 로얄 박스에, 오른쪽엔 황제와 대신들이
로얄 박스에 새겨져 있다.
도6 도5의 부분, 마차 경기를 관람하는 장면이며
윗단엔 황제와 대신들, 아랫단엔 관중석이 새겨졌다.
 
 
 
 

로마 말기에 사실성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특별한 존재를 우상화하기 위하여 택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미소리움>(도7)에서는 황제에게 두광까지 씌워서 신성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황제는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이며, 미술은 그렇게 믿도록 설득하는 매개체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기독교 주제가 주를 이루는 중세 미술에 더욱 효과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제 미술의 양식은 더욱 추상화되고 상징적인 힘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도7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미소리움>
또는 <데오도시우루스 황제 취임 20주년 기념 쟁반>
388년, 은, 지름 74cm 무게 15kg
마드리드, 왕립 역사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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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제사 때문에 시댁에 다녀오면서 비를 좀 맞은 뒤 버스를 탔는데, 버스에서 에어컨을 틀더군요. - _ -

두시간 정도 벌벌 떨면서 집에 온 뒤 감기로 꼼짝 못하고 며칠 째 드러누워 있습니다.
컴퓨터도 며칠만에 켜는 듯.. 어제 병원에 빨래 배달도 못가고...ㅠ_ㅠ 징징..

인터넷 뱅킹 쓸 일이 있어서 잠시 들어왔다가 알라딘에 모처럼 와서 구경만 잠시 하다가 갑니다.
내일되면 좀 나아지려나.. 갑자기 추워지니까 참 안 좋군요.

내일 병원으로 면회갔다 온 뒤에 뵙겠사와요------  <(_ _)>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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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10-0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나으시길...^^

superfrog 2004-10-0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하게 하고 주무시고 언능 나으세요..^^

코코죠 2004-10-0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판다님 아프세요? 이런 이런, 날씨가 차갑더니 판다님 아픈 거에요? 어쩌죠. 어쩌죠 어쩌죠. 빨리 나으셔야 해요. 판다님이 아프시면 이곳도 우중충해지쟌아요. 제가 여기서 발 동동거리며 기다릴테니 어여 나으세요.

로드무비 2004-10-04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안 보이신다 했더니!
빨리 나으셔요.
판다님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요.^^

icaru 2004-10-04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에게서...감기 녀석이 얼렁 떨어져 나가야 할 텐데요....
글구...제게서도요... 저도 목구멍이 칼칼하고...연신 재치기 해 대고 있습니다...요즘...

비로그인 2004-10-0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구~~얼렁 빨딱 일어나세요. 불쌍해라~

꼬마요정 2004-10-04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빨리 나으세요~~~ 요정빔을 쏘아보낼게요~~^^*
(막내랑 놀다보니 ^^;; 막내가 12살이거든요~)

물만두 2004-10-0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 다려왔어요. 약 드시고 언능 쾌차하세요^^


하얀마녀 2004-10-04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런 못된 감기... -_-+

플레져 2004-10-04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판다~~ 안보여서 방명록에 몇 나 남기러 왔는데...못된 감기, 나쁜 감기 물렀거라~~!!

마태우스 2004-10-04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너무 무리하시더니 결국... 버스보다 제사가 더 큰 책임이 있다구요!!! 연약하신 팬더님께서 차례와 제사를 모두 소화하시긴 무리란 게 판명되었으니, 판다님 시댁에선 내년부턴 이런 말도 안되는 스케줄을 당장 중단하라!

panda78 2004-10-05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분 모두 감사드려요--- ^ㅡㅡㅡㅡ^ 아, 정말 행복합니다. 이렇게 댓글달아 주시구... ㅜ_ㅡ
주말엔 하루에 약을 4-5번 먹고서도 기어다녔는데, 어제부터 조금 나아져서 오늘은 빨래 배달도 무사히 다녀왔답니다. ^^
모두 걱정해 주신 덕분이지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새책은 아니라 헌책을 방출하더라도 이벤트 한번 계획해야겠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말예요. ^^
 

로마의 원래 회화는 역사적 사건의 기록에 의의가 있었던 듯합니다.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회화는(도1) 남자들이 서로 만나는 장면을 여러 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건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헬멧과 방패를 든 사람이 토가를 입고 창을 든 남자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 등으로 보아 실제 있었던 사건의 기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회화는 매우 드물며 로마 회화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환영적 기법의 회화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도1 <역사주제의 그림>
기뭔전 3세기 또는 2세기 후반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의 무덤 출토, 높이 87 cm
로마 팔레초 데이 콘세르바토리
 
 

고전기와 헬레니즘 시기에 발달하였던 그리스 회화의 원작은 거의 소실되는데 반해, 로마에서 수용한 회화의 현상은 남아있는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원 후 화산 폭발로 도시 대부분이 화산재로 뒤덮였던 폼페이는 건축과 회화의 생생한 현장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양하고 풍부한 폼페이의 회화 양식은 4단계로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제 1 양식

우선 도의 그림부터 봅시다. 그림이 어디 있는지 찾게 되죠? 돌을 쌓은 듯한 벽이 바로 그림입니다. 그림이 벗겨진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벽돌이나 콘크리트로 벽을 쌓은 후 회벽을 칠하여서 마치 대리석 벽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실내장식의 벽화입니다. 도을 자세히 보면 아랫단과 윗단 사이는 석고를 도톰히 하여 더 튀어나와 보이게 하는 스투코(stucco)방식도 그림과 함께 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리석 같이 보이게 하는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마치 속임을 당한 듯 실망스럽겠지만 이러한 방식은 지금의 우리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니어판에 얇은 원목이나, 원목 무늬의 비닐을 붙이는 것과 같은 수법 이지요. '석재 양식'(mason style)이라고 부르는 이런 그림은 헬레니즘 시대부터 지중해 전역에 사용되었던 방식으로 폼페이의 제 1양식은 이의 이탈리아식 버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2 <살루트의 집> 폼페이 Ⅵ 2,4
기원전 2세기 말 또는 1세기 초
 
 
도3 폼페이 Ⅵ 2,4
기원전 2세기 또는 1세기 초
 
 
 
 

제 2 양식

기원전 1세기초에서 말 사이에 유행하였던 제 2 양식은 한층 더 발달된 눈속임의 효과를 보여줍니다. 그 초기 형태는 로마의 파라티네 언덕에서 발굴된 일명 <그리핀의 집>(도4.5) 벽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다양한 색의 돌을 맞추어 벽면 무늬를 만들고 그 양쪽엔 산호무늬 대리석을 붙인 것 같죠? 도5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가득 그려져서 발코니와 기둥, 그리고 천장 가까이의 석가래까지, 즉 건축적 요소들까지 프레스코로 그림으로써 벽면이 입체감 있게 느껴지지게 됩니다. 제1 양식과는 달리 제2 양식에서는 스투코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회화 기법만을 사용해서 깊이감과 양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도4 <그라핀의 집, 네 번째 방>
기원전 1세기 1/4분기
로마, 팔라티네 안티쿼리움
 
도5 도4의 부분
 
 
 
 

제 2 양식의 가장 발달된 모습은 나폴리 근처 보스코레알레(Boscoreale)지역의 한 별장, 침실 벽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천연색 도판이 없어서 아쉽지만 도6과 도7을 이어 보면서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도6 < P.파니우스 시니스터의 별장, 침실M의 벽화>
기원전 50-40년경, 1930년 발굴당시 모습
 
 
 
도7 도6의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진열된 현재 모습
 
 
 
 

작은 침실이지만 마치 창밖으로 정원과 이웃집들이 보이는 열린 공간으로 느껴지죠? 기둥과 감실 등으로 건축적인 틀을 설정하고 그 안의 면적을 마치 창문 너머의 광경이 보이는 것처럼 효과를 내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서양문화에서의 그림의 역할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즉 그림은 실제는 아니지만 마치 무엇처럼 보이게 하는 환영(illusion)의 효과를 나타내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도8 도6,7의 부분
 
 
 
 
 

제 3 양식

이렇게 실내를 꾸미는 벽화는 그 장식적인 기능에 걸 맞는 양식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폼페이의 일명 '베티의 집' 벽화(도9)를 보면 기둥사이에 펼쳐진 창 너머의 그림이라는 요소를 이어 받고 있지만 기둥이 너무 가늘어서 실제 건물같이 느껴지지 않으며 기둥 사이의 그림도 창 밖의 풍경이기보다는 그림이 걸려있는 듯한 구성입니다.

 

도9 <베티의 집> 폼페이 Ⅵ15,Ⅰ
기원 후 62년경
 
 
 
도10 <뱀을 죽이는 어린 헤라클레스> (도9)의 가운데 부분
 
 
 
 

도11,12,13,14는 폼페이의 일명 M. 루크레티우스 프론토의 집 벽화와 부분들입니다. 선명한 붉은 색이나 까만 바탕에 잔무늬의 장식을 두르고 그 가운데 그리스 신화 이야기 그림을 걸어 놓은 듯한 장식벽화가 집안 전체에 그려져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로마 귀족들의 화려한 삶과 이 많은 벽화의 수요에 동분서주했을 화가들의 삶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도11 폼페이의 M.루크레티우스 프론토의 집 벽화
기원후 40-50년
 
 
 
도12 도11의 남쪽 벽 부분
 
 
 
도.13 <비너스에게 구애하는 마르스>
도11의 안쪽 벽 가운데 부분
 
 
도14 <별장 풍경> 도11의 안쪽 벽 왼쪽 부분
 
 
 
 
 
 

제 4양식

4양식은 1, 2, 3양식과 같이 그렇게 분명히 구분하기가 좀 곤란합니다. 2, 3양식이 절충되고, 이와는 매우 다른 장식적인 양식들이 함께 사용되기 때문입니다(도15). 이들이 천장과 벽을 이어가며 만들어 내는 기하학적인 연결은 마치 '벽지패턴'같은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도16).

 

도15 <베티의 집 중 익시온의 방>
기원후 62년
 
 
도16 <베티의 집 중, 동쪽벽>
기원후 62년 이후
 
 
 
 

이외에도 로마벽화에서는 일루젼 기능을 하면서도 그리스 방식과는 다른 회화방식도 형성되었습니다. 그림이 신비하다하여 이름 붙여진 폼페이의 <신비의 집>벽화에서는 한방의 네 벽면에 거의 등신대의 인물들이 마치 연극과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도17, 18, 19, 20). 우리가 도10이나 13에서 본 인물들은 근경, 중경, 원경으로 공간감 있게 구성되어 있는데 반해 <신비의 집>인물들은 평면적인 배경에 거의 근경의 인물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이야기 서술을 강조하는 로마적인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인물 중에 실레누스형의 남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바카스 신화와 관계된 이야기라고 짐작되지만 분명하지는 않으며 특정한 의식을 행하는 장면인 듯 합니다.

 

도17 폼페이의 <신비의 집> 북, 동쪽 벽화,
인물 그림 높이 162cm, 기원전 60-50년경
 
 
 
도18 도17의 부분
 
 
 
도19 도17의 부분
 
 
 
도20 도19의 부분
 
 
 
 
 

환영기법은 그리스에서 비롯되었지만 로마에서는 이를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부인(?)인 리비아의 별장 지하에는 정원만을 그린 벽화가 그려졌습니다. 정원의 담장이나 일루젼적인 방법은 앞서 살핀 제2 양식과 연관지을 수 있으나 건축적 기능의 기둥은 모퉁이에도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미풍에 흩날리는 나무들은 향기 마저 느껴질 듯 감미롭습니다. 아마도 여름철을 위한 시원한 지하 식당인 듯 한데 아마 이 곳에 앉아 있으면 지하이면서도 사방이 정원으로 둘러싸여서 시야가 탁 트인 듯 느껴질 것입니다.

 

도21 <리비아의 별장 정원그림>
높이 2m, 기원전 20년경
로마, 테르메 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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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로마'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세요? 개선문, 콜로세움, 로마 황제…. 바로 그런 것이 로마의 유산입니다. 로마 황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영토확장과 그것의 유지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를 하면 개선문과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전쟁에 승리한 후 신전을 지은 것과 큰 대조를 보이죠? 그리스인은 승리 후 신에게 감사드렸다면 로마인은 이를 황제의 업적으로 기린 것입니다. 티투스 황제(Titus: )의 개선문엔(도1) 그들이 예루살렘 점령 후 전리품을 들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부조를 새기고(도2), 아치 안에는 독수리로 로마황제를 상징하였습니다(도3). 로마인에게는 승리와 개선이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306-337)는 4세기에 그의 개선문을 축조하면서 이전의 현제(賢帝), 아드리아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시대의 조각을 그의 개선문에 붙였습니다(도4,5,6). 이전 현제의 위업을 계승한다는 암시겠지요.

도1 티투스 개선문 80-85년, 대리석, 포로 로마노
 
 
 
도2 도1의 부분<예루살렘 신전의 점령>
 
 
 
도3 도1의 부분<티투스의 신격화>
 
 
 
도4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2-315년 대리석
 
 
 
도5 대리석, 지름 340cm,
130-138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도4)의 개선문에 부착됨
 
 
도6 180-190년경에 제작
(도4)의 개선문에 부착됨, 대리석, 높이 314cm
 
 
 
 
 
 

로마인은 또한 기념주를 만들어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부조로 새겼습니다. <트라이아누스 기념주>(도7)는 높이가 40m에 달하는 거대한 기둥입니다. 기둥표면을 나사모양으로 둘러가며 띠를 형성하였는데 200m에 달하는 이 띠엔 트라이아누스가 수행한 다치아(Dacia, 현재의 루마니아)와의 전쟁, 즉 101-102년과 105-107년 두 번에 걸친 전쟁의 기록을 부조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스의 페리클레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파르테논 신전을 건립하면서 반인반수나 거인족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적을 암시한 것과는 달리 로마인은 황제가 다치아와 직접 싸우는 장면을 묘사하였으니, 이는 신화보다 인간의 역사를 중요시 여기는 사고의 결과일 것입니다(도8,9).

 

도7 <트라이아누스 기념주>
110-113년경, 대리석, 높이 38m, 로마
 
 
도8 도7의 부분
띠의 높이 96cm
 
 
도9 <다치아 성의 함락> 도7의 부분
 
 
 
 
 

콜로세움은 많은 영화의 장면들 덕분에 검투사들의 싸움터로, 기독교인의 박해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공공의 행사장소였습니다(도 10,11). 우선 외부부터 보면 콜로세움은 거대한 원형의 단일 건물입니다. 그리스인은 주로 열주형태를 사용한데 반해 로마인은 아치를 주요 건축 요소로 적용하였습니다. 아치 사이에 그리스 식의 기둥이 있지만 건축적인 기능을 하지 않고 단지 장식적인 역할을 할 뿐이죠. 내부는 현대의 운동 경기장같이 스타디움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관람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도11 에서 보는 현재의 바닥은 지하 부분이고 그 위는 마루로 덮여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에 5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주 실용적인 건축물이죠.

도10 <콜로세움>, 석회석(트라베르티노), 높이 48.5m , 로마
 
 
 
도11 도10의 내부
 
 
 
 
 

로마 미술의 또 다른 업적 중 하나는 초상 조각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12의 초상을 봅시다. 어떻습니까? 귀족의 초상이라고 여겨집니까? 왜 아니죠? 미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서민도 사진을 찍을 때면 되도록 잘 나오도록 인상관리를 하는데 로마인은 귀족도 미화시키지 않다니 매우 특별한, 현실적인 사회라고 생각됩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집에 조상들의 초상조각을 진열해 놓았다가 집안 식구의 장례 때 이 상들을 들고 나갔다고 합니다. 조상이 후손의 장례에 참석한다는 의미일 테니 가문의 중요성이 컸던 사회에서 생겨난 관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도13).

도12 <로마귀족의 초상>
1세기 중엽, 대리석, 높이 35cm
로마, 트르로니아 박물관
 
도13 <선조의 초상을 들고 있는 귀족의 초상>
기원전 1세기 말, 대리석, 높이 165cm
로마, 팔라조 콘세르바토리
 
 
 

초상의 대상은 남녀노소가 다 포함되지만 우리 수업에서는 로마초기부터 4세기경까지의 황제초상을 살펴보겠습니다. 황제의 초상들은 각 시대가 어떠한 지도자를 원하였는지 잘 보여주어서 사회의 변천까지 느낄 수 있으니까요.

도14의 초상은 기원전 82년부터 4년 간 로마를 통치하였던 독재자 실라(Silla: 138-78 B.C.)의 초상입니다. 독재자로서의 권위보다 마른 얼굴에 집요한 성격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어서, 그리스의 인물상과는 매우 다른 로마의 초상 전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삼두정치시대를 마감하고 황제시대로 접어들면서 실제를 직설적으로 나타내던 로마의 초상방식은 점차 그리스 헬레니즘 양식을 가미하고 있습니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제위27B.C.-14A.D.(도15))는 섬세한 얼굴에 예민한 성격의 개인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지만 주름까지 나타내던 이전의 로마초상과 달리 얼굴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어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국가를 황제체제의 로마의 평화시기(Pax Romana)로 정립시키는 시기에 그리스방식을 적용시킴으로써 황제를 정통화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玉>(도16)은 이 시대 헬레니즘적 성격의 기반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투구를 쓴 로마의 의인화 옆에서 그리스 영웅같이 반 누드로 있고, 우주의 상징인 오이코우메네(Oikoumene)가 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습니다. 방패를 딛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옥좌아래엔 황제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있으며, 아래 단엔 로마군들이 적을 포로로 삼는, 즉 승리의 순간을 새겨 넣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이상화시키는 이 모든 내용들은 우아하고 세련된 헬레니즘 양식으로 잘 포장되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14 <실라초상>
기원전 80-75년,대리석, 높이 26cm
베네치아 고고박물관
 
 
도15 <아우구스투스 황제초상>
기원전 35-29년, 대리석,높이 37cm
로마, 알바니 콜렉션
 
 
도16 <아우구스투스 玉>
15-37년경, 카메오, 19×23cm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다시 황제 초상으로 돌아가봅시다. 1세기 후반의 안정된 로마에서는 생김새를 그대로 나타내는 직설적 사실주의가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다. 도17과 18의 두상은 모두 기원 후 69년에서 79년까지 집정한 베스파지아누스황제(Vespasianus : 제위69-79)의 초상입니다. 왼쪽 초상(도17) 을 보면 눈, 코, 입이 얼굴 한 가운데로 모여있고, 눈가와 이마에 주름이 많으며 코가 크고, 입이 들어간 황제의 실제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같은 황제의 초상으로 오른쪽 상도 있습니다. 똑같이 생겼으나 미묘하게 다르죠? 좀더 세련되게 다듬은 오른쪽의 초상(도18)은 아마도 공식적인 황제 초상으로 사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도17 <베스파지아누스 황제>
69-79년, 대리석, 높이 29cm
코펜하겐, Ny팔스버그 글립토테크
 
도18 <베스파지아누스 황제>
69-79년, 대리석, 높이 40cm
로마 국립박물관
 
 
 

로마가 최대의 영토를 지니고, 또한 내부적으로도 가장 안정된 로마 전성기의 황제는 늠름한 젊은이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핀 <트라이아누스 기념주>(5주 주제2,도7)의 주인공인 트라이아누스황제(Trianus: 황제 98-117, 도19)는 98년에서 117년까지 19년 간을 통치한 소위 5현제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기념주에서도 부관과 의논하고 있는 인간적이고 현명한 황제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도20).

도19 <트라이아누스황제 취임20주년 기념초상>
108년, 대리석, 75cm
런던, 프리티시 박물관
 
도20 <트라이아누스와 부관수라> 도7의 부분
110-113년,대리석, <트라이누스 기념주>
 
 
 
 

그러나 2세기 후반부터 로마는 그들이 정복한 변방의 민족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 황제 161-180년 A.D., 도21)는 그의 『명상록』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의무였음을 토로하며, 전쟁의 광경을 '뼈다귀를 위해 싸우는 인형들'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미술엔 특히 이러한 비참함이 강하게 베어있습니다. 그의 기념주엔 포로를 참수하는 끔찍한 광경이 묘사되고(도22), 그의 시대에 제작된 또 다른 부조의 장면은 적장이 아들과 함께 항복하는 장면을 처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도23,24). 눈동자와 머리칼, 그리고 옷자락을 깊게 파는 표현주의적인 조각기법은 참담함을 나타내는데 적절한 새로운 양식이 되었습니다.

 

도2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안토니나 기념주>부분, 180-192년, 대리석
 
 
도22 <포로들을 참수하는 로마군>,
<안토니나 기념주>부분, 180-192년, 대리석
 
 
도23 <적장의 투항을 받는 아우렐리우스 황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부분,,180-190년
높이314cm, 대리석, 로마
 
도24 도23의 부분
 
 
 
 
 

시대의 어려움을 철학자적인 자세로 감수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는 달리 그의 계승자 콤모두스 황제(Commodus:제위 180-192)는 변경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원로원이 아닌 경기장에서 세월을 보내어 국가를 더욱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강한 황제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헤라클레스에 비유하였습니다(도25). 안밖으로 흔들리던 로마는 이제 더 이상 훌륭한 한 인간인 황제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진 황제를 요구하는 사회심리를 볼 수 있습니다.

 

도25 <헤라클레스 모습의 콤모두스황제>
190년경, 대리석, 높이 118cm
로마, 팔라조 콘세르바토리
 
 
 

이보다 150년 가량이 지난 4세기 전반, 황제는 절대자가 되어갔습니다. 도26의 초상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상(Constantinus:제위 305-337)입니다. 황제상은 더 이상 특정 인물을 닮은 초상이 아닙니다. 커다란 두 눈은 현실이 아닌 먼 곳을 응시하여 초월적인 인상을 줍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초상은 높이가 2.6m에 달하는 실로 큰 두상이지만 이 또한 거대한 좌상의 일부이니 실제의 황제상은 거의 12m에 달한다는 사실입니다(도27,28). 이제 황제상은 인간의 상이기보다 숭배의 상이 된 것입니다. 로마사에서는 1-2세기를 황금시대라 하고, 2세기말부터 나타난 정치적인 쇠퇴가 이어진 3-4세기를 녹슨 철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 때는 47년 동안 25명의 황제가 바뀌고, 그 중 1명만이 자기 침대에서 죽었다고 하니, 죽고 죽이는 무력적인 찬탈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합리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사회는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지도자와 신비종교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도26 <콘스탄티누스황제 초상중 두상부분>
312-315년, 대리석, 높이 260cm
로마, 팔라조 콘세르바토리
 
 
도27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두상이 진열된 모습>
 
 
 
도28 콘스탄티누스 황제 상의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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