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ward Coley Burne Jones

19세기의 영국의 화가·장식가.
본명 Edward Coley Burne-Jones
국적 영국
활동분야 미술
출생지 버밍엄
주요작품 《멀린과 니무에》(1858~1859) 《피그말리온과 조각상》(1875~1878) 《부활의 아침》(1882)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1884)

 
본명은 에드워드 콜리 번 존스(Edward Coley Burne Jones)이다. 1833년 버밍엄에서 출생하였다. 옥스퍼드의  엑시터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그곳에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를 만났다. 1856년 라파엘 전파의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를 만남으로써 삶의 전기를 맞이한 뒤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채 옥스퍼드를 떠났다. 그후 런던에 정착하여 로세티의 지도 아래 작업을 진행하였다.
로세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는, 형태와 표현 양식의 순수성, 그리고 중세 미술의 고양된 도덕성을 미술에서 회복하고자 하였다. 주제를 성서나 고금의 문학작품에서 취하고, 유려한 선묘(), 단정한 구도, 풍요한 색채로 신비적이고 낭만적인 작품을 만들었는데, 장식적인 경향이 강했다.

작품으로 《창조의 날들 Days of Creation》 《비너스의 거울 The Mirror of Venus》 《멀린과 니무에 Merlin and Nimue》(1858~1959)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 King Cophetua and the Beggar Maid》(1884) 등이 있는데, 이러한 작품은 중세와 고전주의 시대의 작품들, 그리고 성서에 바탕을 둔 주제 의식에서 주요한 영감을 얻은 것들로서 풍부한 감정과 낭만적인 스타일이 두드러진 것들이며 일반적으로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 작품 가운데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 시절의 친구인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모리스와 함께 중세 응용 미술을 부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모리스가 경영하는 상점에서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 태피스트리 등을 직접 디자인했던 것이다. 그가 디자인한 창문은 옥스퍼드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나 버밍엄 성당을 포함해서 영국의 많은 교회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윌리엄 모리스의 켈름스코트 출판사에서 일러스트 작업도 하였다. 1894년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The Sleeping Princess
 
 

 
우수에 잠긴 아름답고 매혹적인 소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 에드워드 번 존스의 그림을 기억하시나요?
그의 이런 아름다운 그림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잠바코!!
 
 
 
 

The Lament, 1866

 

 

 


Spring, 1869-70



 
 
 
런던의 부유한 그리스계 사업가의 딸로 태어나
그리스계 의사 데메트리우스 잠바코와 결혼해 '잠바코'라는 성을 얻은 그녀...
두 아이를 가졌으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어요.
파리에서 살던 잠바코는 1866년 남편과 헤어져 런던으로 돌아왔고
예술가들과 친교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죠.
잠바코는 미술을 애호하는 집안에서 자란 덕에 미술적인 감각도 남달랐죠...

잠바코는 어머니를 통해 자연스레 번 존스를 알게 되었는데요
이미 결혼한 몸이었지만, 번 존스는 잠바코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죠.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을 동경해 온 번 존스에게
그리스 혈통의 아름다운 잠바코는 최고의 미인일 수밖에 없었어요
 
 

Portrait of Maria Zambaco, 1870
 
 
 
위의 그림 아래에 있는 큐피트 화살에 묶여 있는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해요.
"26세의 마리아, 1870년 8월7일 EBJ-에드워드 번 존스-가 그림)"
이 그림에서 그는 잠바코를 사랑의 여신으로 표현했어요.
잠바코의 어머니도 둘의 사랑을 엮어보려 했는지
번 존스에게 자신의 딸을 모델로 한 그림을 그리도록 부탁하죠.
하지만, 번 존스에게는 헌신적인 아내 조지아나가 있었어요.
번 존스는 아내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숨겨 왔으나
친구의 비밀 누설로 인해 아내 조지아나와 잠바코는 일대일 대면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번 존스 없는 집에서 말이죠.
이 장면을 뒤늦게 목격하게 된 번 존스...
번 존스는 쓰러지며 벽난로에 머리를 부딪치기까지 했다고 해요
그 일이 있은 후... 둘은 어떻게 했을까요?
 
 
 


Phyllis and Demophoon, 1870


 
잠바코와 번 존스는 수로에 몸을 함께 던져 이승을 등지기로 하죠.
이 둘은 정신없이 수로로 달려갑니다...
이들은 사랑밖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죠.
수로로 가보니 물은 생각보다 정말 차가웠어요.
그 물에 몸을 던질 수가 없었죠.
이들은 결국 투신을 포기하고 돌아오고 맙니다.
"정욕은 나를 놀라게 하고 위협한다.
정욕은 한마디로 그릴 수 없는 절망이다.
모든 행복의 포기이며,
갈수록 퇴보된 상태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다."

 

 


Portrait of Maria Zambaco, 1871



번 존스는 갑자기 로마로 떠나버립니다.
이것을 뒤늦게 안 잠바코는 미친 듯이 그를 찾아 헤매였죠.
번 존스는 로마로 가던 도중 큰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내 조지아나의 품으로 되돌아옵니다.
아내의 넓은 마음으로 인해 번 존스는
잠바코와의 관계를 1870년 초 완전히 청산했어요.
하지만 번 존스가 그녀를 잊은 것은 아니었죠.
그 이후로도 번 존스는 그녀를 모델로 하여
계속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Temperantia, 1872


 


The Beguiling of Merlin, 1874


 
위 그림은 잠바코와 헤어지고 얼마되지 않아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라고 해요.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번 존스는 이렇게 썼답니다.
"매년 산사나무에서 싹이 돋아날 때 그것은
이 세상에 다시 돌아와 무언가 말하려는 멀린의 영혼이다.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지 못한 채 떠나갔으니까..."
그는 아직도 그녀에게 말 못한 이야기가 많은 듯 합니다...

너무나 사랑했지만
결코 연인이 될 수 없었던 이들의 사랑 이야기..
 
 
The Annunciation, 1879

 


Love Among the Ruins, 1894



존스와 헤어진 잠바코는 파리로 가서 조각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노력한 그녀는 유명한 조각가 로댕의 제자가 되었죠.
그리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파리의 예술 속에 심취하여 살았다고 하네요.
이렇게 해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은 또 다시 예술로 피어납니다.
 
출처블로그 : 네이버 로지가 살고 있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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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4-10-06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의 수태고지는 도상학적으로 조금 특이하네요.

panda78 2004-10-27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당히 독특하죠?
 

르네상스

우리는 문화가 발달한 시대를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부흥한 예술을 높이 평가하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용어는, ‘다시re’, ‘태어나다naissance’라는 뜻입니다. 중세에 죽었던 문화가 15세기에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를 내포한 이 명칭에서 우리는 15세기 문화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의 원형은 그리스·로마의 고대에 있었던 것입니다. 고전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학문을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이라 하였으니 고전을 통하여 신(神) 중심의 중세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지향하고자 함입니다. 이 시대는 또한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의 결과로 지리상의 발견이나 지동설을 밝힌 시대이기도 합니다.

 
 

미술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등 아마도 미술사에서 가장 천재로 칭송되는 예술가들이 활동하여 인류역사에 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은 순수 미술품이 아니라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며 사회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수도원 식당의 벽화였으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공화정 정부가 시청앞에 놓았던 주문한 상입니다. 그 시대에도 많은 돈을 들이는 사업에는 특정한 목적과 그만한 효과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이탈리아가 특별히 좋은 예술품들을 많이 낳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목적과 효과를 위하여 새로운 방식의 혁신적인 미술을 좋아하고 선택하였으며 미술가는 서로 경쟁적으로 이에 부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15세기 초 피렌체(지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몇몇 작품들의 주문과 제작을 살펴보면 교회나 상·공업자, 정부 등의 주문자와 미술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부조 공모

피렌체(지도) 대성당의 세례당엔 현재 3개의 청동문이 있습니다. 1401년 교회에서는 그 중 한 문의 작가선정을 위해 공모를 했습니다. 청동문의 부조는 성경의 여러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모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주제를 내도록 하였습니다. 그 중 기베르티
(Ghiberti, 1416-1696) 와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 1377-1446)가 낸 두 작품을 봅시다(도1,2).

도1 브루넬레스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1401년,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공모작
 
 
도2 기베르티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1401년,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공모작
 
 
여러분은 어느 작품을 선정하겠습니까. 안정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기베르티 것을, 현장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브루넬레스키 것을 선호할 것입니다. 당선은 기베르티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정의 기준엔 단순히 미감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기술적인 면도 작용하였습니다. 기베르티의 것은 하나의 부조에 이삭부분만 따로 붙인 것인데 브루넬레스키 것은 7개의 부분으로 주물하여 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브루넬레스키 것은 한 부분이 잘못되면 그것만 주물을 따로 떠서 붙이면 되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만약 그의 것을 선정하였다면 주물값이 더 들고, 시간도 더 들었을 것입니다. 심사위원들은 기베르티의 더 발달된 주물기법을 높이 산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현대의 학자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두 작가를 평가합니다. 기베르티는 이삭의 묘사에 고전적인 방법을 구사했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긴박한 장면의 표현으로는 브루넬레스키의 표현이 더 현장감 있다고 말입니다. 또한 공간 사용의 문제에서도 기베르티는 반원형과 사각의 모서리로 구성된 외곽의 틀에서 한 가운데의 면적만 이용했지만 브루넬레스키는 반원형이 이루는 공간을 모두 이용함으로써 확장된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작가의 이후 활동을 보면 근본적인 지향점이 매우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베르티는 이 공모를 계기로 주문을 가장 많이 받는 조각가가 되었지만 조형상에서는 르네상스적이기 보다 후기 고딕의 장식성을 띄었습니다. 반면 브루넬레스키는 이후 조각보다는 건축에 주력하면서 피렌체 대성당의 둥근 지붕을 비롯한 르네상스 건축의 새로운 공간 개념을 실현시킨 것입니다. 15세기 당시의 기준과 현대에서 평가하는 르네상스는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예입니다.

 
 

길드의 수호성인상 주문

피렌체의 대성당과 시청을 잇는 시내 한 가운데엔 오르산미켈레(Orsanmichele)라는 성당이 있습니다. 건물 외벽에 있는 14개의 감실에는 기베르티의 <세례요한>(도3), 도나텔로(Donato di Niccolio di Betto Bardi 일명 Donatello, 1386-1466)의<성 죠르지오>(도6), 베로키오(Andrea di Francesco di Cine 일명 Verrocchio, 1435-1488)의 <도마의 의심>등 당대에 가장 뛰어난 조각가들이 제작한 성인상들이 있습니다. 그럼 이 성인들은 왜 선택되고, 제작에 필요한 비용은 누가 냈을까요. 이 성인들은 모두 카톨릭의 성인들이지만 복음사가라던지, 순교자라던지 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도3 기베르티 <세례요한>
오르산미켈레 성당 전면, 피렌체
 
 
도4 기베르티 <마태오>
오르산미켈레 성당 측면, 피렌체
 
 
 
 

당시 피렌체의 공식적인 정치와 경제는 일종의 동업자 조합인 모직상 길드, 면직공업자 길드, 갑옷제조업자 길드, 건축가와 조각가 길드 등 길드의 대표자들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이 성인들은 바로 길드의 수호성인으로, 예를 들면 원래 세리였던 마태오는 은행가 길드의 수호성인이며, 낙타털을 입고 다녔던 세례요한은 모직상 길드의 수호성인이고, 용을 창으로 찔러 공주를 구한 죠르지오는 갑옷제조업자의 수호성인이었고, 이교의 상 제작을 거부하였던 기독교 초기의 순교자 4명은 건축가와 조각가의 수호성인이었습니다. 이들 성인은 종교적인 기능보다 피렌체 사회의 정치, 경제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길드는 거의 공공장소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에 자신들의 수호성인을 놓고, 이의 제작비를 부담함으로써 자신들의 조합의 위치를 확고히 한 것입니다.

도5 난니 디 방코, <네 성인>
돌과 나무를 다루는 건축가와
조각가 길드의 수호성인, 1411-13년경,
대리석, 피렌체, 오르산미켈레
도6 도나텔로, <성 죠르지오>
갑옷제조업자 길드의 수호성인
1415년경, 대리석
피렌체, 오르산미켈레
도7 도5의 아래 기단부
 
 
 
도8 도6의 아래 기단부
 
 
 
 
 
 

길드에서는 조각상에 조합의 특성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면직 공업자들은 그들의 수호성인 마르코에게 면 쿠션을 밟고 있게 하였으며, 건축 조각가 길드는 그들의 작업 광경을 새겨 넣었습니다(도5,7). 각 길드에서는 당연히 다른 길드의 상보다 돋보이는 작품을 놓으려 하였고, 조각가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새로운 방법의 조각을 제작하였습니다. 은행가 길드는 기베르티에게 <성 마태오>(도4)를 주문하면서 이 작품은 모직상 길드가 주문한 <세례요한>(도3)과 크기가 같거나 더 커야하며, 청동주물은 몸과 머리 두 부분으로 주조해야한다고 계약서에 명시하였습니다. 기베르티는 물론 계약사항을 이행하였고 또한 이 상보다 4-5년 전에 설치된 도나텔로의 <죠르지오>(도6)상이 지닌 양감과 고전적인 구조를 참고하여 그가 전에 만든 <세례요한>(도3)의 약점이었던 장식성을 극복하였습니다. 기베르티가 참고한 도나텔로의 <죠르지오>(도6)는 제작 당시부터 당대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약간의 콘트라포스트 포즈를 구사한 당당한 자세와 늠름한 양감등은 르네상스인들이 추구하였던 고대 조각의 이상을 충분히 되살렸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조각상 밑의 부조에는 원근법을 적용함으로서 매우 낮은 부조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공간감을 주는 스키아챠토(schiacciato)식 부조기법을 창안하였습니다(도8). 이는 당시의 화가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하던 회화의 원근법을 부조에 적용시킨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난니 디 방코의 <네 성인>(도5)의 얼굴 부분을 보면 여러분들도 금방 로마의 초상이 떠오를 것입니다(도9,10비교). 르네상스의 소설가와 철학자들이 고대의 문헌을 참고함으로써 현실을 묘사하였듯이 조각가들 또한 고대 조각을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15세기에 요구되고 있던 사실적 묘사의 방법을 키워나간 것입니다.

도9 도5의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부분
 
 
 
도10 로마시대의 초상조각
 
 
 
 
 

가족 예배실의 벽화

이번엔 회화의 예를 보겠습니다.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었던 교회의 벽화들은 무슨 이유로 그토록 수요가 많았고, 주문자들은 무엇을 원했을까요. 르네상스 교회들은 규모가 크건 작건, 양쪽 벽면이나 제단 양쪽에 가족 예배실을 두고 있습니다. 피렌체의 아르노 강가에 가까이 있는 작은 교회 산타 트리니타의 사세티(Sassetti)家 예배실도 그 중 하나입니다(도11). 이를 사세티 예배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배실의 벽화 제작비용을 사세티家에서 대고 그 대신 이 공간에 가족의 석관들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도11 도메니코 기를란디이오
사세티 예배실
피렌체, 산타 트리니타
 
 

 

도12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 <목동들의 경배>와 <사세티 부부의 경배> 도11의 부분
1483-85년, 목동들의 경배는 패널에 템페라 기법, 사세티 부부는 프레스코
 
 
 
우선 하단부분을 보면 한 가운데 <목동들의 경배>가 제단화로 그려져 있고, 그 좌우엔 사세티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좌우의 벽엔 그들의 석관이 안치되어있습니다(도11,12).
 
 

중앙과 좌우 벽면의 중간과 윗단엔 우리가 주제1에서 살펴 본 성 프레체스코의 일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 중앙 윗단의 그림을 자세히 보도록 합시다(도13).

 

도13 도메니코 기를란디오
<교황으로부터 수도원 인증을 받는 프란체스코>
1482-86년, 프레스코, 피렌체, 산타 트리니타
 
 
도14 도13의 왼쪽 부분
 
 
 
도15 도13의 오른쪽 부분
 
 
 
이 그림엔 성 프란체스코와 수도사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 오른쪽 앞에서 두 번째 인물은 아래 하단에 그려졌던 이 예배실의 주인 프란체스코 사세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벽화에 자신의 가족과 가문의 주변을 모두 등장시켰습니다. 왼쪽엔 이미 성장한 세 아들을 두고 아직 어린 넷째 아들은 자기 옆에 그리게 하였습니다(14,15).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검은머리의 옆면 인물은 로렌조 디 메디치(Lorenzo di Medici)이며 그 옆은 피렌체에서 명망 있던 안토니오 푸치(Antonio Pucci)로 사세티의 사돈입니다. 그리고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은 로렌조의 아들들과 그들의 가정교사였던 인문주의자들입니다. 메디치 은행의 제노바 지점장이었던 사세티는 메디치家의 총수인 로렌조를 자신의 옆에 그리고, 그의 가족까지 함께 넣음으로써 그들 가문과의 결속을 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인증을 받았지만 이 그림의 배경은 로마가 아닌 피렌체이며, 그 중에서도 정치의 중심인 시뇨리아 광장입니다(도17). 이 그림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요. 지금으로 비유한다면 대기업의 계열사 사장이 시청 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큰 행사에 자신과 기업의 총수 가족이 함께 참가하고 있는 모습 같다고 할까요. TV나 신문이 없던 시대에 교회라는 공공장소는 남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이 프레스코의 덕분에 우리까지 그의 가족과 위치를 알게 되었으니 그의 주문 목적은 달성된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의 종교와 정치, 경제 그리고 미술의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청 앞 광장과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대표작으로 손꼽는 <다비드>(도16)상은 피렌체의 시청 앞에, 넓은 시뇨리아 광장을 바라보며 놓여있습니다(도17,18). 다비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어린 목동이었을 때 돌 팔매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처치하여 나라를 구한 영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인물이 왜 교회가 아닌 시청 앞에 놓여 있을까요.

도16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1504년, 대리석, 높이410cm
피렌체, 아카데미아
 
 
도17 시뇨리아 광장과 베키오 궁 전면
 
 
 
도18 베키오궁 앞에 놓인 <다비드>
원래의 자리엔 복제품이 놓여있으며 원작은
피렌체 아카데미아에 소장되어있다.
 
 
 

이 상은 원래 피렌체 대성당에 놓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어느 조각가도 감당하지 못하던 높이 410cm의 거대한 조각이 당시 스물 여섯 살의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지자 이의 완성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1504년 작품이 완성되자 이 작품의 위치를 다시 정할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이 자리에서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안토니오 다 상갈로(Antonio da Sangalo)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습니다.

 

"나는 코지모가 제안한 것처럼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볼 수 있는 대성당의 코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각상은 공공적인 상이고 대리석은 기후에 약하기 때문에 … 가장 좋은 자리는 시뇨리아 회랑 중앙이라고 생각한다. 중앙 아치 밑에 놓으면 그 주변을 둘러 볼 수도 있고 … 마치 작은 채플처럼 뒤가 어두운 감실처럼 되어서 좋다. 만약 외부에 내놓으면 쉽게 상할 것이니, 지붕이 있는 곳이 더 좋다."

 

조각가인 상갈로는 공공 장소이면서도 미술품으로 더 어울리는 곳, 더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한 것입니다(도19).

 

도19 <다비드>를 시뇨리아 회랑에 놓았을 경우의 가상 화면
 
 
 
 
 

그러나 시장 대변인의 의견은 그와 달랐습니다.

 

"내 판단으로는 그 상에 적합한 장소는 두 곳이 있다. 첫 번째는 현재 <유디트>(도20-21)가 있는 곳이고 두 번째는 (도나텔로가 청동으로 만든)<다비드>가 있는 시청 의 중정 한 가운데이다. 첫 번째 장소를 택한 이유는 (도나텔로의)<유디트>가 매우 격렬하게 죽이는 장면이라는 점인데 이는 (붉은) 십자가와 백합으로 상징되는 우리(피렌체)와 어울리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를 살해하는 것이 적합지 않다. 더욱 나쁜 것은 (…)그 상이 그곳에 놓인 이후로는 피사에 패하는 등 나쁜 일만 일어났다는 점이다. 또한 중정에 놓여있는 (도나텔로의)<다비드>는 뒤쪽에 놓인 다리가 매우 어색하다. 따라서 (미켈란젤로의)<다비드>는 이 두 장소 중 한 곳에 놓여야 하는데 나는 <유디트>자리를 선호한다."

 

당시 시청의 문 앞에는 도나텔로의 <유디트>상이 있었는데(도20,21) 이와 교체하자는 의견입니다.

 

도20 <유디트>의 원 위치를 재현한 모습
 
 
 
도21 도나텔로 <유디트>
1453-64년, 청동
피렌체, 베키오궁
 
 
 
 

결국 <다비드>상은 시청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피렌체는 어려움에 놓여 있었습니다. 1494년엔 프랑스에게 공격당하고, 이탈리아 안에서도 로마와 밀라노, 베네치아 사이에서 외교적인 줄타기를 해야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렌체는 나라를 구한 애국적인 영웅이 필요했으며 힘과 지혜를 겸비한 다비드는 방어와 자유를 상징하는 영웅으로 민심을 통일하기에 적합했던 것입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라는 미술품은 광장에서 이렇게 정치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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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세기의 이탈리아 중·북부(지도) 미술과 사회

프랑스에서 파리와 근교를 중심으로 고딕미술이 발달하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중·북부 지방(지도)이 새로운 미술의 근원지가 되었습니다. 현대의 이탈리아는 반도 전체가 하나의 국가이지만 당시엔 우리 나라의 도(道)크기 정도의 여러 국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특히 중·북부지역은 남쪽의 교황국가와 북쪽의 신성로마제국(현재의 독일지역)의 다툼 속에서 자치권을 키워나갔습니다. 상·공업중심의 도시국가로 발달하면서 도시엔 시청과 광장이 형성되었습니다. 시청과 광장이 생긴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이 지어졌다는 사실을 넘어 다수에 의한 정치와 시민의 모임이 활발해졌음을 의미합니다. “도시는 공기마저도 자유롭다”는 기록은 당시의 활발한 도시 분위기를 잘 말해줍니다.

 
 

종교는 여전히 사람들의 삶에 가장 큰 중심이었지만, 그러나 종교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교리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보다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신성보다는 이 땅에서 고통을 겪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하면서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였습니다. 10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교회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사람은 바로 아씨지의 프란체스코 (S. Francesco d'Assisi)였습니다. 이탈리아 역사에서는 르네상스를 태동시킨 이 시대의 인물로 세 사람을 꼽습니다. 「신곡(神曲)」을 저술한 단테(Dante)와 성프란체스코(Francesco, S. Francesco) 그리고 화가 지오토(Giotto, 1267-1337)입니다. 세 사람은 문학, 종교, 미술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들인데 이들에게서 우리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현실을 그렸다는 점입니다. 단테는 「신곡」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이 소설의 지옥과 연옥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은 당시 사회의 것이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이 세상에서 산 예수를 되찾아주었죠. 그리고 화가 지오토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행해지고 있던 상징적인 비잔틴 방식의 그림을 현실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탈리아의 14세기 미술을 우리는 프로토 르네상스(Proto-Renaissance)라고 부릅니다. 원시적인 르네상스라는 뜻이죠. 역사에서 중세 말이라고 부르는 이 시대가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문을 연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이제 미술로 들어가야겠습니다. 그럼13-14세기의 그림은 어떻게 그리고 왜 변하였을까요. 여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린 네 점의 패널화를 비교하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십자가모양의 나무패널에 템페라기법으로 그린 것으로 교회에 걸려있던 것입니다. 그 앞에서 기도를 하던 성물이죠. 13세기 초에 베를링기에리(Berlinghieri)가 그린 첫 번째 그림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이지만 마치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 같습니다(도1). 눈도 뜨고 있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부활하여 영원하게 된 승리의 예수인 것입니다. 이보다 10년쯤 뒤에 쥰타피사노(Giunta Pisano)가 그린 예수님은 이와는 달리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러운 모습입니다(도2,3). 성프란체스코는 자신도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종교운동은 그들의 기도 대상이었던 예수님의 모습까지 바꾼 것입니다(도3,4). 그리고 이보다 40-50년 후에 치마부에(Cenni de Pepo, 일명 Cimabue, 1272-1302)가 그린 예수는 고통스런 표정과 함께 인체의 볼륨감까지 살린 인간의 형상입니다(도5). 우리가 비잔틴 회화에서 본 금색도 사라졌죠. 예수의 몸도 십자가에 매달려 휘어진 모습입니다. 이제 1290년대에 지오토가 그린 예수상은 더욱 사실적입니다(도6).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 이렇게 고개는 앞으로 숙여지고, 엉덩이는 뒤로, 그리고 무릎은 앞으로 튀어나올 것입니다. 어깨도 이렇게 아래로 쳐지고요. 13세기의 100여년 사이에 기독교의 예수는 영원한 절대자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회화는 상징에서 사실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종교의 변화, 미술의 변화가 아니고 더 크게 보아서는 사회의 요구였던 것입니다.

도1 베를링기에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220-30년경, 나무 패널에 템페라
루카, 빌라 쥬니지 국립박물관
 
도2 쥰타 피사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230-50년경, 나무 패널에 템페라
볼로냐, 산 도메니코
 
도3 도2의 부분
 
 
 
도4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부분
 
 
 
도5 치마부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280년경, 피렌체, 산타 크로체
 
 
도6 지오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290년경,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마리아 신앙과 제단화

마리아의 모습도 많이 변하였습니다. 13세기 초에 제작된 일명 <눈이 큰 성모>(도7)에서 마리아는 정면으로 앉아 아기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아기이지만 크기만 작을 뿐 어른 형상이죠. 바로 심판하러 오실 예수입니다. 테오토쿠스(Theotokus)라는 이 유형은 어머니로서의 마리아가 아니고 예수의 육화(肉化)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마리아였습니다.

도7 마에스트로 디 트레사 <눈이 큰 성모>
13세기 초, 높이47×67cm
시에나, 오페라 박물관
 
도8 지오토 <옥좌의 성모자>
1300-03년, 높이325×204cm
피렌체, 우피치
 

그러나 14세기 초에 제단화로 제작된 지오토의 <옥좌의 성모자>(도8)는 엄마와 아기의 관계이며, 예수의 비례도 이전의 어른 비례에서 벗어나 4등신에 가까운 아기의 비례로 그려졌습니다. 13-14세기 동안 확산된 마리아 숭배 신앙은 어머니의 미덕을 중요시하여서 바닥에 앉아 젖을 먹이는 <겸손한 마리아>(도9)로 또는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자비로운 마리아>(도10)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도9 죠반니 다 볼로냐 <겸손한 마리아>
14세기 후반, 템페라
베네치아, 갈레리아 델 아카데미아
 
도10 니콜로 디 세냐 <자비로운 마리아>
1331-45년, 템페라
시에나, 피나코테카
 
 

지오토의 회화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중세의 종교개혁자라 일컫는 프란체스코로부터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아시지는 그의 무덤 위에 교회를 크게 짓고 지오토에게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벽화로 주문하였습니다. 교회는 밀려드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내부의 기둥 없이 단일 한 공간으로 지어졌고, 양쪽 벽 창문 아래엔 프란체스코의 일생이 그려졌습니다(도11).

도11 <바실리카 디 산프란체스코>
윗 성당 내부
아시지, 성 프란체스코
 
도12 지오토 <세상의 물건을 거부하는 프란체스코>
1297-99년, 프레스코, 장면의 크기 270×230cm
아시지, 성 프란체스코
 
25장면의 일화 중 하나인 도12의 그림은 프란체스코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받기 위해, 현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옷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장면입니다. 그림의 상하좌우를 보면 위엔 석가래 모양이 아래엔 커튼이, 그리고 좌우엔 기둥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장면은 건물의 창 밖 풍경처럼 그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 회화에서 본 창으로서의 회화 개념인 것이죠. 배경의 건물 또한 원근법을 적용시킨 공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두 장면을 봅시다. 도14의 장면은 새들마저도 프란체스코의 설교를 경청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주제를 그린 1235년경의 그림(도13)과 비교해 보면 지오토는 나무와 사람, 그리고 새의 비례를 사물의 크기대로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중요한 것을 크게 그리던 중세의 방법에서 사물외관의 비례를 중요시하는 객관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도13 보나벤투라 베를링기에리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
1235년, 나무패널에 템페라, <프란체스코 제단화>의 부분
페샤, 성 프란체스코 교회
 
도14 지오토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
1297-99년, 프레스코
아씨지, 성 프란체스코 교회
 
 
 

지오토는 또한 성경의 주제를 매우 인간적인 감정으로 해석하였습니다.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그려진 예수의 일생 중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을 봅시다(도15).

도15 지오토<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
1304-06년, 프레스코, 높이200×185cm
스크로베니 예배당, 파도바
 
 
예수의 시신을 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 마리아, 양팔을 벌린 채 놀라워하는 여인과 두 손을 뺨에 대고 슬퍼하는 여인, 예수의 발을 만지면서 못 박힌 자국을 보며 애통해 하는 여인, 그리고 두 팔을 뒤로 젖힌 채 탄식하는 제자 등에서 우리는 인간의 감정을 풍부히 느낄 수 있습니다.
 
 

시에나의 마리아 신앙과 사회

앞에서 마리아 신앙에 대해 잠시 언급하였습니다만 마리아 신앙이 가장 크게 발달한 곳은 이탈리아 중부 도시 시에나였습니다. 당시의 종교는 단순히 종교적 기능만 지닌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기능도 지녔습니다. 마리아는 시에나의 수호성인이었습니다. 시에나는 전쟁에도 마리아상을 가지고 갔으며, 승전의 기쁨도 마리아와 함께 하였습니다. 화가 두치오(Duccio, 1255-1319)에게 의뢰한 <존엄한 마리아>(도16) 를 대성당으로 옮기던 날 시에나 도시는 상점도 문을 닫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말하자면 국가행사인 셈이지요. 마리아 제단화는 시에나에서 점점 크게 제작되어서 두치오의 <존엄한 마리아>는 높이214cm에 폭이 412cm에 달했습니다.

도16 두치오 <존엄한 마리아>, 1308-11년
나무패널에 템페라, 높이214×412cm
시에나, 두오모 박물관
 
 

시에나의 경우 마리아는 교회만이 아니라 시청에도 그려졌습니다.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1280/85-1344)의 <존엄한 마리아>(도17)는 높이가 713cm에 폭이 970cm에 달하는 거대한 벽화로 시청에서 도시의 수호자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17 시모네 마르티니 <존엄한 마리아>
1315년, 프레스코, 높이763×970cm
시에나, 팔라쪼 푸블리코
 
 
 
 

시에나의 시청과 벽화

시에나의 시청(Palazzo Pubblico)과 그 앞에 펼쳐진 광장은 중세 말에 형성된 공공 건축의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가 생활의 중심이던 중세의 도시는 주로 대성당 주변에 주요기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시에나의 9인정부는 시청을 지어 행정, 사법, 경찰서 등의 공공업무실을 모으고 그 앞에 넓은 광장을 마련함으로써 시민사회를 형성한 것입니다.

 

도18 시에나의 시청건물 정면
1297년경 시작
 
 
도19 시에나의 캄포광장
 
 
 
 
 

당시 9인 정부의 회의실이었던 방은 3면이 벽화로 가득합니다. 여기 그려진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와 효과>(도20)는 중세 회화 중에서 드물게 보는 비(非)종교 회화입니다. 벽화는 <좋은 정부의 알레고리>(도21), <좋은 정부의 도시에서의 효과>(도22), <좋은 정부의 시골에서의 효과>, 그리고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도23), <도시에서의 효과>, <시골에서의 효과> 등 6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도20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와 효과>
1338-40년, 프레스코, 시에나, 시청
 
 
 
도21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좋은 정부의 알레고리>
1338-40년, 프레스코, 시에나, 시청
 
 
 
도22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좋은 정부의 도시에서의 효과>
1338-40년, 프레스코, 시에나, 시청
 
 
 
 
 

도23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
 
 
 
 
탐욕과 불공정과 허영에 둘러싸인 나쁜 정부의 독재자는 거칠음과 사기, 공포와 전쟁을 상징하는 대신들이 보좌하며, 나쁜 정부가 들어서면 도시에는 군인들이 갑옷을 입고 활보하고, 시민을 잡아가고, 길바닥에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으며, 농촌은 황폐해 집니다. 반면 좋은 정부의 왕은 믿음과 자비와 희망이 도와주고 있으며 평화와 현명함, 인내와 정의의 대신들이 보좌하고 있습니다. 도시에는 결혼식에 가는 즐거운 춤 행렬과 구두 가게, 포도주 가게가 즐비하며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정부의 건물들은 시에나의 실제건물을 닮게 함으로써 좋은 정부는 바로 9인 정부의 시에나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사회를 반영하는 듯한 이 그림의 실제 목적은 9인 정부가 평화를 가져왔다는 정치선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벽화는 당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해주는 생생한 이미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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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과 하기아 소피아
비잔틴(Byzantine)(지도)은 현재의 이스탄불을 가리키는 옛 이름으로, 비잔틴 문화라 하면 1453년 터키에 정복당하기까지의 동로마제국 문화를 말합니다. 현대 정치사에서는 이 지역의 중요성이 약화되었지만, 고대 말에는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즉 동서 무역이 가장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비잔틴이라는 지명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고 로마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김으로써 이 곳에 동로마제국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역사의 중심이 서로마에서 동로마로 옮겨오던 시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오던 시대,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전이되던 4-5세기의 전환기는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재임527-565)황제 재임기간 중 확고한 동로마의 기독교 문화를 정착시켰습니다. 즉 532년의 시민폭동을 제압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제정일치(祭政一致)를 확립함으로써 절대군주일 뿐만 아니라 神이 택한 이 땅의 대리인이 된 것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폭동 진압 후 바로 건립하기 시작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ia,성스러운 지혜)는 비잔틴 교회양식을 대변합니다(도1,2,3,4). 거의 정 사각형에 가까운 평면에, 중앙엔 거대한 도움을 얹고, 양쪽에 반원의 도움을 둘러쌓음으로써 전체가 마치 거대한 동산같이 보입니다. 파르테논 신전이 아테네의 스카이 라인을 결정하였듯이 하기아 소피아는 바다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콘스탄티노플의 경관을 돋보이게 합니다. 터어키 지배 후 회교의 모스크로 쓰일 때 사방의 탑이 세워지고, 내부의 모자잌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마치 하늘지붕 같은 거대한 도움은 금으로 도금되거나 반짝이는 모자잌으로 장식되고(도4,5), 대리석 벽과 기둥은 마치 레이스같이 잔무늬로 새겨져 있습니다(도6). 현실의 느낌은 최대한 배제되고 신성함이 감도는 이 공간에서 천장의 작은 창들을 통해 들어오는 빛줄기를 맞으면 마치 하느님이 내리시는 빛과 같을 것입니다(도4). 내부에서의 성스러움이 중요시된 비잔틴의 도움은 실용성보다는 종교적 상징이 강조된 건축물로 이후의 종교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도1.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532-37, 콘스탄티노플 현재모습
 
 
 
도2. 트랄레스의 안테미루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옛모습
 
 
 
도3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평면과 입면
 
 
 
도4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내부
 
 
도5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도움부분
 
 
도6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주두 부분
 
 
 
 
 

이탈리아내의 동로마-라벤나
동로마지역의 미술품들은 이후 살펴볼 성상파괴운동으로 많이 소멸되었지만 이탈리아 반도 내의 동로마 영토였던 라벤나(Ravenna)에는 5-6세기의 미술, 특히 모자잌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서 비잔틴미술의 형성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호노리우스(Honorous)의 이복 누이인 갈라 플라치디아(Galla Placidia)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갈라 플라치디아의 묘당(Mausoleum of Galla Placidia)은 외관은 수수한 벽돌집이지만 전체가 모자잌으로 덮인 내부는 영롱하기 그지없습니다(도7,8). 짙푸른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그 한 가운데는 예수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자리잡고, 네 모서리엔 복음사가의 상징이 새겨졌습니다. 즉 복음사가에 의해 떠받들린 하늘의 예수인 것입니다.

도7 갈라 플라치디아의 마우솔레움
425-50년경, 라벤나
 
 
도8 도7의 내부 천장
 
 
 
 
 

북쪽 벽엔 아직 목자 모습인 예수가 보입니다(도9). 초기 기독교 시대의 도상을 이어 받았으나 이 곳의 예수는 남루한 옷을 걸친 목동이 아니라 그리스 전통의 우아한 자세에, 황금빛 옷을 입고, 두광으로 신성함을 드러내는 예수입니다. 그러나 양들과 정원의 묘사는 고대 미술의 서정성을 그대로 보여주어서 고대에서 비잔틴도상으로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보다 1세기가 지난 549년경에 제작된 산 아폴리네르 인 클라세(San'Appolinare in Classe)의 후진 천장의 모자잌은 더욱 비잔틴 방식으로 변화된 풍경과 인물묘사를 보여줍니다(도10). 우선 푸른 하늘은 황금색으로 변하고, 나무와 양들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서 매우 평면적입니다. 이 모자익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즉 모세와 엘리아에게 나타난 예수의 변신과 라벤나의 첫 번째 주교 성 아폴리네르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몸을 드러내지 않고 밤하늘의 십자가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비잔틴 미술은 현실의 색과 형태를 최대한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황금색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공을 초월한 영원함, 신성함을 상징하는 추상적인 색이지요. 승리의 아치 위에 예수와 함께 새겨진 네 복음사가도 이 땅에 살았던 인간이기 보다 신성한 계시를 신으로부터 받은 네 상징물 즉 사자(마르코), 소(루가), 독수리(요한), 천사(마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도11).

 

도9 <목자 예수>, 도7의 내부
 
 
 
도10 <예수의 변신과 성 아폴리네르>
모자익, 549년경
산 아폴리네르 인 클라세, 라벤나
 
도11 <천상의 예수와 네 복음사가>, 도10의 부분
 
 
 
 
 

산 비탈레(San.Vitale)교회의 모자잌 배치는 예수와, 제정 일치의 수장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부부의 정치, 종교적 위치를 실감케 합니다(도11-15). 역시 온 벽면이 모자잌으로 되어있던 비탈레 교회의 후진엔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짧은 머리의 예수가 있고(도13), 제단 양쪽엔 황제부부가 빵과 포도주를 헌납하는 모습으로 새겨졌습니다(도14,15). 우선 모두 정면이며 왕관과 두광까지 한 황제에게 시선이 집중된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지요? 머리모습만 서로 조금씩 다를 뿐 생김새도 비슷한 인물들은 신체가 길고 양감도 없이 평면적입니다. 신의 대리인임을 자처하는 황제의 모습은 정치가의 모습을 공적인 장소에 남기는 것을 삼가 하였던 그리스 공화정 시기의 페리클레스와 매우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로마말기에 인물들을 획일적으로 묘사하고 황제와 가족만이 로얄박스에 크게 묘사하였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황제묘사(5주, 주제3의 도2)나 데오도시우스황제의 오벨리스크 좌대부분의 황제(5주, 주제3의 도6)묘사양식이 그 정점에 이른 듯합니다.

 

도12 <산 비탈레 내부 후진부분>
546-48년경
라벤나
 
 
도13 <우주의 지배자 예수>, 도12의 부분
 
 
 
도14 <우스티니아누스황제와 일행들>
546-48년경
라벤나, 산 비탈레
 
도15 <데오도라 황후와 일행들>
546-48년경
라벤나, 산 비탈레
 
 
 
 
황제그림의 맞은 편엔 황후 데오도라(Theodora)와 일행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황후 역시 왕관과 보석장치, 그리고 두광에 의해 다른 인물들과는 다른 세계의 선택된 존재임을 유감 없이 보여줍니다. 특히 서커스 단원출신의 데오도라는 과단성 있는 정치력을 발휘하여 유스티니아누스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532년의 폭동 때도 황제는 피신하여 도망치려 하였으나 그를 결연히 붙들고 맞서게 하였다고 합니다. 다른 황제 때와는 달리 황후가 특별히 다루어진 것도 그러한 정치적 위치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산 비탈레의 후진을 보면 하늘아래 예수가 있고, 그 아래 제단 양쪽에서 예수에게 헌납하는 황제 부부상이 있는 배치에서 우리는 황제이면서 또한 교회의 수장인 제정일치제도의 군주상을 볼 수 있습니다.

 
 

초기 성상과 성상파괴운동
그럼 비잔틴 미술을 대표하는 성상, 아이콘(Icon)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아이콘이란 그리스어로 형상이라는 뜻의 단어로, 비잔틴에서 예수와 마리아, 성인들의 상을 종교성이 짙은 특별한 형태로 발달시키면서 '성상'이라는 의미를 갖게되었습니다. 성상은 죽은 사람을 대신하는 초상화의 역할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기기독교시대에 본 바와 같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5-600년이 된 예수의 초상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예수를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에 적합한 이미지를 만들기 마련입니다. 700년경에 제작된 초기의 예수상은 한 손엔 성경책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를 구원하게 하는 구원자, 절대권한을 가진 존엄한 자의 모습입니다(도16). 긴 머리와 턱수염은 당연히 그리스 神들의 아버지인 제우스상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초월적인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양쪽 눈이 서로 다른 모습에서 미루어 보면 초기의 성상은 현세의 사람을 모델로 하여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역시 같은 지역에서 제작하였다고 짐작되는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도17)상은 당시의 여러 회화양식이 함께 사용되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성모자 양쪽의 성인들은 좌우대칭의 엄격한 자세이지만 그 위의 천사들은 스케치풍의 자유로운 회화양식으로 그려졌습니다. 성모자 또한 자세는 정면이지만 눈은 옆을 바라보며, 양쪽 눈과 눈썹이 서로 다른 초상적인 수법을 보여줍니다.

도16 <예수 그리스도>성상
700년경, 86×45cm
시나이 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
 
도17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성상
68.6×49.2cm, 7세기 초
시나이 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
 
 
 

베드로의 초기 성상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 초상입니다(도18). 얼굴과 몸통에서 볼 수 있는 명암처리에 의한 풍부한 양감은 고대회화의 방식인 반면 황금색의 두광과, 화면위의 메달등은 상징적인 중세회화의 기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평면적이고 상징적인 배치를 이미 보았으니 이는 바로 고대말부터 발달된, 주인공을 신성화하는 한 방법인 것입니다(5주 주제2, 도25). 다시 말해 자유롭고 사실적인 고대회화방식과 성상으로서 요구되는 엄격함, 그리고 상징성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도18 <성베드로>성상
6세기 후반
시나이 산의 카타리나 수도원
 
도19 5주 주제2, 도25
<아나스타시우스 영사 딥틱>의 부분
 
 
 
 

성상의 문제는 양식면에서 만이 아니라 상의 쓰임, 효용, 역할의 관점에서 매우 첨예한 논쟁을 야기시킵니다. 초상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성상은 성인의 시신이나 성골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하여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성상이 되면 그 앞에서 기도하고 절을 하는 과정에서 그림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떤 성상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되기도 하였고, 어떤 성상은 예수의 시신을 쌌던 천의 자국 위에 그린 것이어서 성상 자체가 기적을 행한다고 이에 기도를 하였으며, 성상이 도시를 방어한다고 믿어서 성문에 성상을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폐해에 717년 레오3세는 성상파괴(iconoclasm, image-breaking)정책을 결정하였습니다. 고대부터 그리스, 로마의 서방은 사물을 대신하는 이미지에 우호적이었으며 근동지역은 예로부터 묘사정신의 이미지를 거부하여 왔는데 레오3세가 아랍의 국경 근방태생임은 이미지에 대한 그의 근본성향을 짐작케 합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틴 5세(ConstantineⅤ: 재임 741-75)기간 중 성상 파괴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실로 많은 조각과 모자익, 성상들이 소실되었습니다(도20,21).

도20 <이교의 우상을 파괴하는 기독교인>
1320년경, 베네치아, 성 마르코사원, 모자익 부분
 
 
도21 <예수의 상을 없애는 성상파괴론자>
살테리오 클루도브 비잔틴 필사본 부분
9세기 후반
모스크바, 역사 박물관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50여 년 이상 지속되면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성상 우호론자들의 반대도 거세졌습니다. 성상파괴정책 자체가 처음부터 원칙에 입각한 논쟁이기보다 성상을 제작해 오던 기존의 수도원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정치적인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신성은 완전하게 묘사될 수 없으며 사람(예술가 또는 장인)에 의해 어떠한 재료로도 재현시킬 수 없다."는 파괴론자들의 이론에 우호론자들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창세기 1:27)하셨으니 인간의 형상에 의해 하나님을 연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림은 문맹인에게 글과 같은 역할을 하여서 이를 통해 성경의 말씀을 알 수 있다고 그림의 매개체적인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성상파괴가 가장 극심하였던 레오4세(Leo Ⅳ: 재임775-80)가 죽자 황후 이레네(Irene)는 정책을 거두고 콘스탄티노플의 성문엔 60여 년 만에 예수의 성상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813년 레오5세는 다시 파괴정책을 강화하였고, 우호정책으로 완전히 선회한 것은 843년 황후 테오도라(Theodora)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림의 신성여부보다 매개체로의 가치를 인정하는데 두 황후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음은 그 자체가 의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언제나 주인공이기 보다 중개자, 매개자로서 중요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비잔틴 미술은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제정일치체제에서 정치적인 그림도 강화되고 또한 교리를 해석하는 새로운 이미지들이 완성됩니다. 9세기 말 레오6세는 옥좌에 앉아있는 예수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신의 모습을 하기아 소피아에 새겼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 두광을 지닌 성스러운 존재로 이 그림은 바로 왕은 절대자 神의 대리인임을 다시금 강조하는 정치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도22).
그리고 다른 한 벽의 모자익엔 이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바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하기아 소피아를 지어 마리아에게 바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새김으로써 콘스탄티노플과 이의 수호신 마리아, 그리고 하기아 소피아와 황제들 간의 관계가 하나임을 전달해 줍니다(도23).

 

도22 <그리스도 아래 무릎꿇어 엎드린 레오6세>
9세기 말, 모자익, 하기아 소피아, 콘스탄티노플
 
 
도23 <콘스탄티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대제 사이에 있는 성모자>
10세기 말, 모자익, 하기아 소피아, 콘스탄티노플
 
 
 
 

성상파괴운동의 시련을 겪은 후 성상은 더욱 성스럽고 교리와 밀접해져야 했습니다. 다프니에 있는 도르미션 교회의 그림들은 중세 미술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예라고 생각됩니다. 온통 금빛으로 둘러싸인 천장 한 가운데엔 존엄한 <우주의 지배자>가 무섭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모퉁이의 설명은 그 분이 바로 마리아의 몸에서 낳고 이 세상에 살았던 예수임을 설명해 줍니다(도24,25).

도24 <우주의 지배자 예수>, 1080-1100년경, 모자익 다프니
도르미션 교회
 
 
도25 (도24)의 부분
 
 
 
 
 

교회의 다른 한쪽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새겨져 있습니다(도26). 시간과 공간의 묘사가 최대한 배제된 그림이지만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예수의 발에서 떨어지는 피가 해골을 적시는 것이 보이죠? 이 해골은 바로 아담의 해골이며, 예수의 피는 아담의 원죄를 씻었다는 교리를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도26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11세기 말, 모자익, 다프니, 도르미션교회
 
 
 
 
 

비잔틴 성상을 대표하는 <블라디미르 마돈나>(도27,28)를 봅시다. 황금색의 넓은 테두리가 우선 그림을 성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검은 바탕에 금 장식이 놓인 옷을 입은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슬퍼보이죠? 이 마리아는 바로 예수의 죽음을 알고 슬퍼하는 마리아인 것입니다. 즉 비잔틴 성상은 사실의 설명이 아니라 교리의 전달이며, 시공을 초월한 성스러움을 지녀야 했던 것입니다. 이 강의에서는 충분히 전달할 수 없어서 아쉽지만, 종교성과 서술성을 동시에 지닌 비잔틴 미술은 그리스 정교의 미술로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12-13세기, 즉 중세 말의 이탈리아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도27 <블라디미르 마돈나>
12세기, 나무에 채색, 77.5×53.3cm
모스크바, 국립역사박물관
 
도28 (도27)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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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정리는 리스트로 하고, 일단 생각날때마다 한줄씩 올리기로.. ^^

 

 

 

소요님 이벤트로 받은 책.  <(_ _)> 감사드려요-!

 Bird나무님, 수식이 조금 나오긴 했지만, 재미있었어요. ^^

소요님, 상당히 재미있게 읽긴 했는데요... 음.. 가끔 나오는 그 수식들이 약간, 아주 약간 부담스러웠어요. 오일러의 공식같은 거... 자연 로그... ㅡ_ㅡ;;; 으음..
그러나 전반적으로 아주 재미있었고, 마음이 따끈따끈해지는 책이었습니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가 떠올랐어요. 마지막 부분 때문일까요?

요건 오늘 빨래배달하러 가는 길에 읽음.

 

 

 

 

 

필름 2.0 생활의 발견에서 소개글을 읽은 뒤 외워뒀다가, 오늘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서 읽었습니다. 무라카미 류 소설들 중 유일하게 좋아하게 된 책이로군요.  ^^

 

 

 

 

 

 

에쿠니 가오리 수필집 [당신의 주말은 몇개입니까]

제목이 마음에 들어 일부러 서점에 나가서 읽은 책. 그러나 에쿠니 가오리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에쿠니 가오리의 글을 좋다고 느낀 적이 없으니... ;;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3]

출간 이벤트로 [위험한 그림의 미술사]를 끼워주길래 덥썩 산 책. 1권이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여전히 재미있군요. 몇권까지 나오려나...? ^^ㅋ

 

 

 

 

 

미라님이 빌려주신 책. 미라님 고마워요- ^ㅂ^*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두근 콩닥콩닥거렸던 책.. 몰래 남의 일기를 훔쳐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 정말 싫다 싫어 이런 거' 그러면서 읽었는데, 다 읽은 뒤에 이명랑씨의 다른 책이 읽고 싶어졌으니, 신기하네요. ^ㅡ^;;

 

 

 

 

 

요것도 미라님이 빌려주신 책. <(_ _)> 넙쭉-

 

김영하의 단편집들을 읽으면서 음... 내 타입은 아니군. 그랬었는데, 이 책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소재가 소재니만큼 마냥 재미있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요.

 

 

 

 

 

요것도 역시 미라님이 빌려 주신 책- (^ㅂ^) <(_ _)> (^ㅁ^)  미라님, 땡큐야요-

꽤 기대를 하고 읽었으나, 가장 재미없었던 책... 별로 할 말 없네요.. ;;;

 

 

 

 

 

 

이건 새벽별 언니께서 빌려 주신 책. 보내주실 때 빠뜨리셨다고 일부러 따로 다시 보내주심. <(_ _)> 마마- 성은이 망극.. ;;;

음.. 그러나 과연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할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입니다. ;;  함정에 빠지지 않기가 너무나 어려워서...

 

 

 

 

요건 미스 하이드님이 주신 책.  ^ㅂ^ 감사합니다, 미스 하이드님--- 잘 읽었어요!
그리구 쪼꼬만 판다 인형두 잘 받았습니다. ^ㅡㅡㅡㅡ^

예---전에 <FBI심리분석관>으로 나왔을 때 읽었는데, 지금 보니 기억이 하나도 안남....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 _ - ;;

제사 지내러 갈때 버스 안에서 조금 읽고, 집에 와서 좀 읽다가 자고, 다음날 또 좀 읽고 하는 식으로 읽어서 정리가 좀 안되네요. 어쨌든 끔찍한 거 싫어하시는 분들은 보지 마시길... [스따리님, 그대 말이야요]

 

 

 

 

 

음.. 별 생각없이 잡았는데, 만만치 않군요.  [모래그릇] [ 고층의 사각지대] 와 함께 띄엄띄엄 읽고 있는 책 중 하나. 2권을 어서 마저 읽어야 하는데.... ;;;

이것도 새벽별 언니께서 빌려주신 책. 감사합니다. (^ㅂ^) <(_ _)> 정말 감사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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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rysky 2004-10-05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10월이 시작된 지 이제 겨우 닷새, 닷새 됐구만.. ㅠㅠ 남들이 10월 한 달 내내 읽어도 다 못 읽을 양을 벌써 해치운 대단한 우리 판다님!! (저게 다 몇 권이냐.. 하나 두울.. 헉, 10권!! @_@)
'살인자들의 인터뷰' 무섭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어요. 전 제목부터가 무서워서..;;
책도 좋지만 감기에는 무조건 휴식이어요!! TV 쫌만 보고 코오 주무셔요~ 공부는 뭐 내일부터 하면 돼죠. ^^

▶◀소굼 2004-10-0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많이 보셨네요; 무라카미 류..코인로커 베이비즈도 괜찮게 봤는데^^;; 다른 건 엄두 안남- -; 그리스 로마신화3은 살까 말까 망설이기만;

stella.K 2004-10-05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부끄러워라...

panda78 2004-10-05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언니는 작은 별도 돌보셔야지, 살림도 하셔야지, 거기다 학생들도 가르치셔야지 일이 많으시잖아요. 저는 먹고 뒹구는 걸요... 종일... ㅡ.ㅡ;;;;
우연의 음악... 결말이 너무 충격이라 읽고 나서 친구 줘버렸어요... ㅜ_ㅜ

소굼님, 다른 것들 보구 질려서 그건 안 봤는데... 함 봐야겠군요. ^ㅡ^ 저두 미술사 안 껴줬으면 망설였을 듯... 도서관에 안들어왔어요? ^^;;

스텔라님은 별 말씀을.... 책도 읽으시고 연극도 하시고 제가 부끄럽죠.

스따리님... ^ㅡㅡㅡㅡㅡㅡ^ 말 안해두 다 아시죠? 내 마음...***

로드무비 2004-10-06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래배달하러 가신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다 나으신 것 맞죠?
저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책들과 비디오테이프들 사들여놓곤
게속 딴짓만 하고 있네요.
책 정말 많이 읽으시네요.

soyo12 2004-10-06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10월에 많이 읽으셨네요.
오일러 공식은 언젠가 읽으니까 가장 아름다운 수식이라고 하더군요.
그 수식 안에 인간이 발견한 혹은 약속한 수학 기호가 다 사용된다구요.
뭐 별로 제 생각에는 그 수식이 제 삶에 상관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69는 이번에 부산 영화제에서 영화로 나오는 듯 하던걸요.
츠마부키 사토시 이 친구가 주연이던걸요. 영화 [워터 보이즈]의 주연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이번에 본 일본 드라마가 그 친구 주연이라 신경써놨지요.
ㅋㅋ 하지만 이름을 잘 못외우는 걸 봐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panda78 2004-10-06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69가 영화로... 어떨지.. ^^
그리구 수학이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 더 멋지다는 요지의 글이 책에 나왔잖아요. 거기서 쪼끔 감동했어요. ^^;;
오일러의 공식 설명한 글이나 삼각형으로 통나무 쌓기 등은 대충 읽고 지나갔음을 고백하는 바입니다.. ;;;

soyo12 2004-10-06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살인자들과의 인터뷰 어떠세요? 전 그 사람의 전작은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그런데 과연 두번째 책도 내용이 꽉 찼을 지가 지금 궁금하답니다.^.~

panda78 2004-10-06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의 전작이 뭔가요? ^^ 혹시 혹시 은 아니겠죠?
왜냐면.. 그 책이랑 이 책이랑은 똑같은 책이거덩요.. 제목만 다르구... ;;;;

soyo12 2004-10-06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지금 살펴보니 제가 잘못 알고 있었어요.
저는 그냥 FBI 심리 분석관이라고 해서 존 더글라스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다른 인물이 쓴거네요. 전 양들의 침묵의 그 부장의 모델이라던 존 더글라스의 [마음의 사냥꾼]을 말한 거였답니다.^.^;;

panda78 2004-10-06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사냥꾼! 그 좋은 책을 가지고 계시나요오---- 오오오----
역시 책은 사서 읽어야... 크흑. ㅠ_ㅠ
그 책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살인자들과의 인터뷰에도 존 더글라스가 잠깐 언급됩니다. 이 책의 저자가 프로파일링의 기초를 세우고 존 더글라스가 그걸 이어받았다는군요.

Fithele 2004-10-06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일러의 식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은... 만화책 Q.E.D 에 있습니다. ^^

마태우스 2004-10-06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월에 그리도 많은 책을 읽으셨습니까. 대단하십니다. 저랑 겹치는 것도 몇개 되는데요, <폭소>에 대한 소감은 상반되는 듯... <내이름은 빨강> 정말 만만치 않잖습니까? 그거 읽을 때가 참 힘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mira95 2004-10-06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의 엄청난 독서량.. 대단하네요.. 제가 10월들어 읽은 책은 겨우 <빨강머리 앤>5권 뿐이에요... 여전히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 빠져 허우젹거리고 있답니다...

panda78 2004-10-0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델님.. 저는 QED도 읽었건만 오일러의 공식이 나왔다는 기억은 왜 없을까요,, 므훗..;;

마태님, 저도 폭소 읽으면서 마태님 생각 했답니다. ^^;; 마태님 리뷰 읽고 관심을 가진 책이라서요.. ;;

미라님, 반가운 우리 미라님, 아이고, 학교 나가시면서 하루 한 권이라니 대단하신 거지요. 개는 말할 것도 없고..가 초반부에 아---주 진도가 안 나가는 편이기는 하지요. 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