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점 다 1888년 4월 아를에서 그린 것이라 합니다.  조금 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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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삶의 터전이었던 베네치아(지도)는 매우 감각적이고 시적인 회화를 발달시켰습니다. 유럽 내륙의 강대국들과 힘을 견제하였지만 베네치아의 재력은 동방무역권에서 얻어졌습니다. 바다에 연한 물위의 도시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문화는 동서 교류를 통한 이국적인 문화의 수용이 자유로웠습니다. 베니스회화의 전통은 죠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26-1516)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작품 <성 프란체스코의 황홀경> (도1)를 봅시다. 지금까지 우리가 르네상스 그림으로 보아온 작품들과는 매우 다르죠? 우선 인물보다 자연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흔히 프란체스코의 엑스타지는 십자형에 매달린 예수 형상의 세라피노로부터 오상을 받는 이야기로 그려집니다만 죠반니 벨리니는 이를 따르지 않고, 마치 프란체스코 성인이 자연으로부터 환희를 얻는 모습으로 그려냈습니다. 자연의 형상들은 섬세하게 묘사되었으면서도 석양의 빛을 받아 함께 어우러지는 톤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도1 죠반니 벨리니 <성 프란체스코의 황홀경>, 1480-85년
패널에 유채, 120×137㎝, 뉴욕, 프릭컬렉션
 
 
 
 

죠반니 벨리니의 제자였던 죠르지오네(Giorgione: 1477-1510)는 서정적인 톤을 자아내는 벨리니의 화법을 이어받아 르네상스 회화개념에 큰 변화를 보여줍니다. <폭풍>(도2)이라고 일컬어 온 그의 작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회화를 이해하는 종전의 방법과는 사뭇 다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오른쪽엔 누드의 여인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고, 왼쪽에 목동복장의 젊은이는 여인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화면에서 빗겨나 있으며, 먼 곳에서 폭풍이 이는 어두운 풍경이 화면전체에 펼쳐져서 詩的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매우 모호해서 학자들에게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떤 이는 원죄 이후의 아담과 이브라 하고, 어떤 이는 비너스와 마르스라고도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젖을 먹이는 여인이 이브라면 옷을 입고 있어야하고, 비너스라 하면 아기가 없어야 하니 어느 학설도 충분히 납득할 만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림에서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불길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 뿐 입니다. 이 그림은 이야기로 설명하기보다 느낌으로 전달하고 있지요. 죠르지오네에게 있어서 회화는 특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회화만이 할 수 있는 감성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습한 개울과 천둥이 번쩍이는 원경의 도시, 알 듯 모를 듯한 모호한 인물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검푸른 나무들, 이 모든 것은 어떤 암시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림이 이야기 내용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워진 것은 19세기말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내용이 없는 듯한 죠르지오네의 회화는 실로 현대적인 회화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2 죠르지오네 <폭풍>, 1505년경, 캔버스에 유채
82×73㎝,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죠르지오네의 <잠자는 비너스>(도3)는 아마도 여성누드를 관람자 눈앞에 대담하게 펼쳐놓은(?) 첫 번째 회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석양빛에 물든 황갈색 공기에 감싸인 듯한 풍경은 눈을 감고 있는 비너스와 함께 우리를 그림 안에 젖어들게 합니다. 화면아래 대각선으로 길게 누운 비너스는 잠들어 있으므로 보는 이는 아무 제재를 받지 않고 그녀의 몸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잠들어 있지만 보는 이의 시선을 이미 알고 있는 자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 시대에 살펴본 <크니도스의 비너스>(제4주, 주제2, 도6 )처럼 말입니다. 이 그림을 가지고 있던 지롤라모 마르첼로(Girolamo Marcello)는 1507년에 결혼하였는데 옆으로 긴 이 그림은 아마도 신혼의 침실에 놓인 가구 안쪽에 붙여있던 그림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 그림은 성적인 감흥을 일으켜 다산으로 이어지게 하니까 침실에 적합한 그림일 것입니다.

 

도3 죠르지오네 <잠자는 비너스>, 1510년경, 캔버스에 유채, 108×175㎝
드레스덴, 게말드 갈레리에
 
 
 
 

회화 기법의 면에서 이 그림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화면 전반에 펼쳐진 은은한 톤과는 맞지 않는 다른 기법의 부분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즉 화면 아래쪽에 놓인 흰 천은 명암의 대조가 강하여서 배경과 인물에 펼쳐진 서정적인 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죠. 이 부분은 죠르지오네의 제자 티치아노의 솜씨입니다. 그럼 이번엔 티치아노(Tiziano: 1490-1576)의 초기 작품 <나를 건드리지 마라>(도4)를 <잠자는 비너스>(도3)와 비교하여 보십시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는 강한 색조의 티치아노 화법인데 오른쪽 뒤의 배경엔 스승이 그린 집들의 모습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도제 교육으로 이어지던 스승과 제자의 작업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그림들입니다.

 

도4 티치아노 <나를 건드리지 마라>, 1512년경
캔버스에 유채, 109×91㎝, 런던, 내셔널 갤러리
 
 

이렇게 시작한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화풍을 서양회화사에 자리매김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의 회화가 갖는 선명한 색채감과 빛의 작용, 붓 터치, 내용의 암시적인 표현, 관능성, 인물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 등은 실로 거대한 회화 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초기작품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도5)은 옆으로 긴 화폭이어서 이 또한 결혼을 위한 그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우라 바가로토(Laura Bagarotto)와의 결혼을 계기로 남편인 니콜로 아우렐리오(Niccolo Aurelio)가 주문한 것이라고 추측되며 석관 위의 방패와 은그릇은 그들의 것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 또한 많은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도상과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죠. 석관 뒤에 큐피트가 있는 것으로 보아 누드의 여인은 비너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에 의상을 잘 차려입은 지체 높은 여성으로 무장한 듯한 여성은 세속의 사랑을 뜻합니다. 비너스의 신성한 사랑은 자연스러운데 반해 세속적인 사랑은 꾸미고 드러내며 또한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뒤쪽엔 우리가 도3과 4에서 본 바 있는 집들의 배경을 좌우를 바꾸어 다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엔 알 수 없는 상징들이 가득합니다. 왜 석관 위에 앉아있으며 석관의 부조는 무엇을 나타내는지, 양쪽 배경에 그려진 말 타고 달리는 인물들은 무엇을 뜻하는지 많은 학자들이 여러 해석을 하였지만 아직 명확하진 않습니다. 단지 세속적인 사랑이 머리에 쓰고있는 화관과 손에 든 꽃은 풍요를 뜻하며 그녀의 왼쪽에 그려진 토끼는 예로부터 다산을 상징하니 주문자는 그의 결혼이 풍요와 다산의 결실을 맺기를 기원한 것 같습니다. 또한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의 여인을 같은 얼굴이니 신부가 관능적인 사랑과 세속의 결실을 함께 지닐 것을 암시하는 듯 합니다. 더구나 이 그림은 신혼의 침실 가구 부분이라고 짐작되므로 이러한 연관은 충분히 가능한 것 같습니다.

 

도5 티치아노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 1514년경, 캔버스에 유채, 118×279㎝, 로마, 보르게제
 
 
 
 
 

위의 그림보다 24년 뒤에 그린 일명 <우르비노 비너스>(도6)는 죠르지오네의 <잠자는 비너스>(도3)와 위에 살펴본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도5)와 맥을 같이하는 그림입니다. 풍경이었던 배경은 실내모습으로 변하고, 멀리 있는 듯 하던 <잠자는 비너스>는 바로 내 눈앞에 누워있는 듯한 실제의 여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배경의 여자가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있는 옆으로 긴 가구는 이 그림들이 그 안쪽어디에 붙어있었던 가구형식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여기 보이는 침실에 있었다고 상상할 수도 있죠. 그림을 바라보는 이를 마주 쳐다보면서 보는 이의 시선을 그녀의 알몸으로 유도하고있는 그녀의 포즈는 이후 여성 누드 와상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종래의 미술사에서는 예술영역을 신성하게 여겨서 이에 대한 속된 해석을 금기시하였습니다. 위에서 본 여성 누드 상을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만 본 것이지요. 그러나 그림의 당시 역할이나, 실제 효과를 솔직하게 묻는다면 이러한 여성누드는 성적인 자극제였을 것입니다.

 

도6 티치아노 <우르비노 비너스>, 1938년, 119×165cm
 
 
 
 

티치아노는 종교화의 구도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페사로(Pesaro) 가문을 위해 제작한 <페사로 제단화>(도7)는 이 시대 피렌체의 제단화와는 매우 다릅니다(도8). 우선 주인공인 성모자가 오른쪽으로 비켜나 있고, 구도상의 중앙엔 베드로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모자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색채와 빛의 작용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회화에서 중앙집중적인 구도와 소묘를 중요시 여기던 피렌체의 프라 안젤리코의 제단화(도8)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베네치아에서는 죠반니 벨리니 때부터 빛과 색채의 요소를 회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겼는데 티치아노는 이를 대담하게 진일보시킨 것입니다.

 

도7 티치아노 <페사로 제단화>
1519-26년, 캔버스에 유채, 485×269cm
피렌체, 산타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도8 프라 안젤리코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
1438-40년, 나무패널에 템페라, 220×227cm
피렌체, 산 마르코 박물관
 

티치아노는 성자들을 거대한 기둥을 배경으로 한 층계 위에 배치함으로써 기념비적인 느낌을 주고 있으며 아래 양옆엔 주문자인 페사로 가족을 배치하였습니다. 왼쪽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가 이 그림을 주문한 야코포 페사로(Jacopo Pesaro)입니다. 그는 교황청 군대의 리더로서 1502년에 교황 알렉산더 6세(Pope Alexander Ⅳ)를 위해 터키군을 멸하였는데, 그의 뒤에 서 있는 이에게 알렉산더 6세의 문장기를 들게 하고, 터번을 쓴 항복한 터키군을 묘사함으로써 이를 기념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엔 페사로 가문의 수장인 프란체스코 페사로(Francesco Pesaro)와 다른 가족들을 그려 성 프란체스코가 이들을 마리아에게 인도하는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티치아노가 구사한 빛과 색채의 효과와 관능적인 감각은 신화그림에 더욱 적합해 보입니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에서 내륙 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페라라의 에스테(Este)가문의 주문으로 세점의 바카스 신화이야기를 그렸는데 도9에서 보는 <바카스 축제>(도9)는 그 중 하나입니다. 주제와 티치아노의 회화기법이 잘 어울려서 밝고 경쾌하며 또한 질펀한 쾌락의 축제를 보여줍니다. 쾌청한 날 나무그늘에서 벌어지는 장면으로 선택함으로써 티치아노는 원경을 밝게, 근경은 오히려 아주 어둡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공기 원근법을 적용한, 앞에서부터 점차 뒤로 물러나는 원근법적인 공간과는 아주 다르죠. 남녀는 서로 어울려 술 마시고, 춤추고, 또 한껏 취하여 널브러져(오른쪽 언덕 위) 있습니다.

 

도9 티치아노 <바카스 축제>, 1525년경
캔버스에 유채, 175×193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도10 죠르지오네 <전원의 합주곡>, 1508-09년
캔버스에 유채, 110×138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이 그림을 죠르지오네의 <전원의 합주곡>(도10)과 비교해 보면 티치아노의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죠르지오네는 여성의 누드와 음악, 야외라는 소재를 갈색톤으로 어우러진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광경으로 다루고 있다면 티치아노는 경쾌하고 관능적인 한 바탕의 축제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티치아노는 초상화가로서도 크게 환영받았습니다. 유럽 각국의 유명인들은 그에게 초상화를 주문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으며, 그를 높이 대우하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도 여러점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티치아노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붓을 떨어뜨리자 황제가 주워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가 그린 <손자 알렉산드로 추기경과 오타비오와 함께 있는 교황 파올로 3세>(도11)를 봅시다. 당시 교황들은 자기가문의 조카나 손자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니포티즘(Nipotism)이라는 정책을 써서 가문의 권력을 키웠는데 이 그림과 또 함께 비교하고자 하는 라파엘로의 <교황 레오10세>(도12)는 이 정책을 잘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교황 파올로3세는 로마의 파르네제(Farnese)가문 출신이며 교황 레오10세(Leox)는 피렌체의 메디치 출신입니다. 레오 10세의 왼쪽 뒤에 있는 줄리오 추기경은 나중에 교황 클레멘테 7세가 되었죠.

 

 

그러나 제가 이 그림들을 택한 이유는 정치상황을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베네치아의 회화기법과 우리가 지난 2주 동안 보았던 피렌체의 회화기법을 비교하기 위한 것입니다. 두 그림 모두 두 조카를 대동하고 있는 교황의 모습이지만 인상은 매우 다릅니다. 우선 라파엘이 그린 <레오10세>는 근엄하고 안정적인데 반해 티치아노가 그린 <파올로3세>는 날카롭고 즉흥적인 느낌을 줍니다. 교황은 오른쪽에서 막 다가오는 인물에게 고개를 돌리고 있는 순간적인 동작의 표현이어서 마치 스냅사진 같습니다. 배경에 걸쳐놓은 듯한 커튼도 이러한 동세에 기여하고 있죠. 피렌체전통의 회화방식과 베네치아 전통의 회화방식이 가장 두드러지게 대조되는 곳은 교황의 붉은 망토부분입니다.

도11 티치아노 <손자 알렉산드로 추기경과
오타비오와 함께 있는 교황 파올로 3세>
1546년, 캔버스에 유채, 200×174cm
나폴리, 카포티 몬테 국립미술관
도12 라파엘로 <추기경 줄리오와 루이지
데 로시와 함께 있는 교황 레오 10세>,
패널에 유채, 155×119cm, 피렌체, 우피치
 

라파엘은 붉은 벨벳의 밝은 부분은 붉게 하고 어두운 부분은 검게 함으로써 상체의 양감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에 티치아노는 밝은 부분을 흰색으로 어두운 부분을 붉은 색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라파엘의 방법은 소묘와 고유색을 중요시한 화법이라면 티치아노의 방법은 햇빛을 비춘 벨벳의 인상을 중요시한 화법입니다. 티치아노는 짧은 기간의 로마방문기간에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이 그림의 붓터치가 더욱 빠르고 즉흥적이었다고 하는데 티치아노는 오히려 이 방법을 즐긴 것 같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이러한 효과를 살리고 그와 함께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한 초상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우리가 지난 7, 8, 9주에 걸쳐서 살펴본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어온 르네상스의 전통은 많은 부분이 피렌체와 로마에 치우쳐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10주에서 살펴보고 있는 베네치아와 북유럽의 회화 또한 그와 비견되는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티치아노의 <박카스 축제>(도9)에 묘사된 남성근육을 보면 미켈란젤로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으며 다음 주에 다룰 매너리즘회화는 티치아노의 빛과 색을 과감히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전통의 화법은 이후 17세기 바로크시대의 회화에서 함께 융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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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4-10-1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죠르지오네作 <잠자는 비너스> 그림이 어디 갔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일본판 미술전집에서 저 그림 액자로 만들어 놓고 방에 걸어 논 적이 있었는데, <모나리자의 미소>와 함께. 여기서 보니 너무 반갑군요. 판다님, 고마워요. 퍼 갈께요.

panda78 2004-10-10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는 매달 1일 피카소 달력 넘기는 것이 큰 기쁨이랍니다, 수암님. ^ㅡ^
얼마든지 퍼 가 주세요. 그리구 혹시 또 보시고 싶으신 그림 있으시면 알려주시구요. ^^
 

르네상스 도입부에서 말한 바와 같이 15-16세기의 이탈리아(지도)는 작은 도시들이 독립된 하나의 국가였습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살펴 본 피렌체와 로마는 그 중 중심이 되었지만 주변의 국가들 또한 그들과의 영향 속에서 독창성을 지니면서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 중앙에 위치한 만토바는 곤자가가문이 이끄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루도비코 곤자가(Ludivico Gonzaga)는 건축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1404-72)에게 그들의 교회 설계를 의뢰하고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를 궁정화가로 기용함으로써 고대에 대한 관심을 현실의 시각이미지로 구현시켰습니다.

 

 

인문주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알베르티는 만토바의 산 안드레아(St.Andrea) 교회를 짓는데 고대건축의 방식을 응용하였습니다(도1,2). 정면의 지붕엔 그리스식 삼각형 팀파늄을 얹고 아래엔 로마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아치를 적용한 것입니다. 내부는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위하여 넓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로마 건축에서 사용하던 넓은 폭의 베럴 볼트로 천장을 처리함으로써 제단까지 확 트인 시야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도1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산 안드레아>
1472년 만토바
 
 
 
도2 도1의 내부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루도비코 곤자가는 고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그 이미지를 자신의 궁에 적용하였습니다. 그가 고대 유적에 관심이 많던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를 궁정화가로 채용한 것은 이전의 국제 고딕 양식으로부터 과감히 단절하고 고전주의를 택하는 모험을 의미합니다. 그는 2년이 넘는 기간동안 만테냐를 설득하고, 화가가 만토바에 체류하는 동안 큰집과 충분한 재정을 약속했습니다. 1460년에 궁정화가가 된 만테냐가 46년 동안이나 곤자가 가문을 위해 일하였음은 주문의 성격과 화가의 관심이 어느 정도 일치되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일 것입니다.

 
 

만테냐가 이 곳에 남긴 가장 큰 성과는 현재 <신혼의 방>이라 불리는 방의 벽화입니다. 당시에 일종의 접견실이었다고 짐작되는 이 방은 도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방과 천장에 모두 벽화가 그려져서 '그림이 그려진 방'(Camera Picta)라고도 불렸습니다. 벽면의 그림들은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오른쪽 벽의 벽난로 위엔 루도비코와 부인이 앉아 있고 그의 아들, 딸, 궁정인, 시종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 벽엔 추기경이 된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가 편지를 받아 든 장면입니다(도4). 어떤 사건을 나타낸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림 전체의 주제는 가문의 번영과 영광을 나타낸 것입니다. 만테냐는 많은 인물들을 옆면으로 배치하여 그림의 기념비적인 성격을 높였으며, 멀리 배경엔 로마의 상징적인 건물들을 넣음으로써 고전의 이미지를 주고 있습니다.

 

도3 안드레아 만테냐, <신혼의 방>, 1465-74년
프레스코 벽화, 만토바, 성 죠르지오 城
 
 
 

 

도4 도3의 부분, 루도비코 곤자가(화면왼쪽)와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화면 중앙)
 
도5 도3의 천장부분
 
 

이 방을 특별히 유명하게 만든 것은 천장부분입니다. 만테냐는 아래서부터 위로 쳐다 본 원근법을 처음으로 적용함으로써 마치 하늘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이 방의 장면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효과를 낸 것입니다(도5). 이러한 획기적인 회화기법은 화가를 유명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작은 도시 만토바의 문화적 수준, 즉 가문의 위상을 높여주었습니다.

 

 
 

1478년 루도비코가 죽은 후에도 만테냐는 그의 후손들이 이끄는 궁정의 화가로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그 중 미술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루도비코의 손자인 프란체스코의 부인, 이사벨라 데스테(Isabella d'Este)였습니다. 이사벨라는 라틴어를 구사하고 문인들과 논의할 정도로 출중한 여성으로 궁 안에 자신의 서재를 만들어 고대조각을 전시하고 만테냐에게 고대신화 그림을 주문하였습니다. 장신구나 종교화 주문에 제한되었던 당시 여성들의 주문과 비교하면 이사벨라는 대단히 지적인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테냐가 그녀의 주문으로 그린 <파르나소스>(도6)는 과도할 정도로 사실적이던 만테냐의 이전 그림과 비교할 때 매우 우아한 모습이어서 주문자의 성향이 반영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비너스와 마르스의 사랑이 그림의 주제이지만 이사벨라의 남편이 용병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주제는 단순히 고대 신화에의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자신을 미화시키는 방편이었음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도6 안드레아 만테냐 <파르나 소스>, 1497년, 캔버스에 유채
160×192cm, 원래 이사벨라의 서재에 있었으며 현재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됨
 
 

이제 잠시 이사벨라의 초상화주문을 통해서 르세상스시대의 여성초상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사벨라의 주문은 매우 격이 높아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도 닿았습니다. 그가 그린 이사벨라의 초상화는 완성되지 못한 채 드로잉으로 남아있지만 초상화의 의도를 짐작하게 합니다(도7). 우선 옆면의 얼굴은 특정인의 얼굴이기보다 레오나르도의 아름다운 마돈나 상들과 매우 비슷한 유형입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는데, 현재는 아랫부분이 잘려있지만 이 그림을 보고 그린 다른 드로잉을 참고해보면 그녀는 책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도8). 즉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으로 그려지기를 바란 것이지요.

 

도7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사벨라 데 스테의 초상>
1499년, 63×46㎝,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작가미상, 도7을 보고 그린그림
1499년 이후 옥스퍼드, 에쉬몰린 박물관
 
 
 
 
 

르네상스시대엔 특히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습니다. 자신만 주문한 것이 아니라, 남이 주문하여 선물하기도 하였고, 외교적으로 다른 나라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의 사진과 같은 역할이라 할 수 있지만 화가가 그린 것이기 때문에 사실과 다르게 그릴 가능성이 아주 높지요. 특히 여성초상의 경우엔 특정인을 닮기 보다 아름다운 유형으로 그려지는 예가 아주 많았습니다. 티치아노가 그린 도9의 <이사벨라 초상>은 그녀가 60세 때에 주문한 것이어서 매우 충격적입니다(도9). 티치아노는 물론 그녀를 보지도 않고 그렸으며 일명 <벨라>(도10) 즉 '아름다운 여자'라는 유형의 여성초상화에 옷 만 이사벨라의 것을 입힌 것 같습니다. 마치 나이 많은 여배우가 젊은 때 사진만 내보이는 것 같은 셈이니 당시 초상화는 인상관리 품목이었던 것입니다.

 

도9 티치아노 <이사벨라 초상>
1534-36년, 캔바스에 유채
빈, 미술사 박물관
 
 
도10 티치아노 <벨라>
1536년, 피렌체, 피티궁
 
 
 
 
 

이탈리아 중부도시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는 미술을 통하여 지배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남성 초상화의 예를 보여줍니다. 르네상스 당시 궁 안에서의 서재는 거의 외교적인 공간이었는데, 페데리코는 그 곳에 시저와 한니발 등 역사적인 영웅들의 초상을 걸어놓았고 자신과 아들이 함께 있는 초상도 그 중 한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자신을 역사적인 인물과 동일시하였습니다(도11,12)

도11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서재, 우르비노 공작궁,
초상화들이 있었던 이 서재엔 현재 복사본들이 전시되었고,
원본 초상화는 파리, 루브르에 소장되어있다.
 
 
도12 후스반 겐트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그의 아들 구이도발도>, 1474-76년경
우르비노, 마르케 국립 미술관
 
 
 
 
 

아들과 함께 있는 도12의 초상화를 보면, 페데리코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천장을 뚫을 듯이 거대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그는 무거운 갑옷 위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책을 읽고 있으며, 옆에 서있는 아들은 홀을 들고 있습니다. 물론 자연스러운 장면은 아니지요. 용병장이었던 그는 갑옷을 입어 무인이었음을 나타내고, 책을 읽는 자세로서 문무를 겸비한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홀을 들려, 후계자임을 이미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 등장하는 갑옷, 책, 홀 등은 모두 메시지 전달을 위한 도상이며 초상은 지도자 이미지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1415-1492)가 그린 몬테펠트로 부부초상은 르네상스 초상화 중 아주 중요한 작품입니다. 마주하고 있는 두 개의 초상과 함께 뒷면엔 이들의 덕성을 나타내는 양면초상입니다(도13,14,15,16,17). 우선 페데리코는 정 옆면이며, 작은 초상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거대하다는 느낌을 줍니다(도15).

배경이 이렇게 멀리 보이게 하려면 아마 높은 건물의 발코니에서 주인공을 아주 가까이 놓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또한 실제 장면이기보다는 일종의 세팅이죠. 배경이 멀리 있음으로써 주인공이 기념비적으로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고대의 메달에 그 근원을 두고있는 옆면 얼굴은 정치가들이 즐겨 사용하였는데, 3/4각도의 초상이 많이 그려지던 15세기 후반에 페데리코만이 정 옆면을 사용한 것은 전투에서 잃은 한쪽 눈의 흉한 모습을 보완하기 위함입니다. 눈 사이가 푹 들어가고 메부리 같이 강하고 큰 코의 묘사에서 우리는 이 초상을 사실적이라고 판단하기 쉽지만, 이렇게 특정부분을 사실적으로 한 반면 전체가 전달하는 이미지는 매우 치밀하게 이상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13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부부초상>
1474년 이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도14 도13중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 초상>부분
도15 도13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초상>부분
 
 

남자의 초상은 단순하고 강한 반면 여자의 초상은 같은 옆면이라도 마네킹같이 유형화되어 있으며,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머리장식과, 목걸이, 옷 무늬 등의 장식들입니다(도14,15). 이렇게 남자의 미덕과 여자의 미덕은 서로 구분되었으며 이는 뒷면에 그려진 덕성의 상징들에서 잘 나타나있습니다(도16,17). 즉 페데리코는 정의와 신중함, 꿋꿋함과 절제의 상징과 함께 하고 있는 마차에서 명예의 여신으로부터 승리의 관을 받고 있습니다(도16). 반면 부인 스포르차는 순결을 상징하는 일각수가 이끄는 마차에서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세 덕성이 부인을 승리로 이끌고 있습니다(도17). 뒷면의 도상을 알고 나면 이제 앞면 초상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도16 도15의 뒷면
 
 
 
 
도17 도14의 뒷면
 
 
 
 
옆면 초상과 세부묘사, 원경의 배경 등의 조화로운 절충은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창의력에 의한 것이지만 이는 바로 주문자의 여러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현존했던 실제 부부의 초상이면서 이상화되어야 했으며 우르비노 지방을 통치하는 군주의 초상으로 부각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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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의 로마(지도) 교황청은 종교만을 주관하는 기관이 아니라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중부와 북동부에 이르는 큰 영토를 지닌 교황청국가였습니다. 또한 로마는 카톨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제국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카톨릭과 고대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야심이 있는 교황들은 언제나 '세계의 머리'(Caput mundi)로서의 로마를 재건하려 하였고 그때마다 고대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 경향의 미술이 적용 또는 이용되었습니다.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Ⅳ: 재임 1471-84)는 로마의 도시계획을 정비하고, 옛 문서를 모아 도서관을 설립하였으며, 고대 조각들을 모아 박물관을 지었습니다. 바티칸 도서관의 벽면에 그려졌던 <플라티나를 도서관장으로 임명하는 식스투스 4세>(도1)는 도서관과 고대가 교황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말해줍니다.

 

도1 멜로초 다 포를리 <플라티나를 도서관장으로 임명하는 식스투스4세>
1476-77년, 프레스코, 370×315cm,
원래는 바티칸 도서관에 벽화로 있었으나 현재는
캔버스에 옮겨져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황은 로마의 황제같이 옥좌에 앉아 있고 관장은 무릎을 꿇고 임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화면 가운데에는 관장보다 더 중요하게 차지한 인물이 있습니다. 교황의 조카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으로 훗날 교황 줄리오 2세가 될 인물입니다. 줄리오 2세가 이 도서관을 증축하였을 때 한 설교자는 "(당신의 삼촌 식스투스 4세가)배움의 전당을 세우고, 당신은 이에 액자를 끼웠다. 그가 교황청 도서관을 세웠으니 여기에 아테네를 가져온 것이다." 라고 칭송하였습니다. 교황이 고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고대의 영광을 현재에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줄리오 2세는 교황이 되자 로마가 고대의 위용을 다시 갖추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을 계획하고, 고대 조각들을 열성적으로 모아 바티칸박물관을 만들었으며, 조각전시를 위한 정원도 조성했습니다. 또한 궁 안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의뢰하고, 라파엘에게는 <서명실>의 벽화를 주문했습니다. 교황의 이 왕성한 미술사업은 로마제국을 되살리고, 자신이 줄리우스 시저의 이미지를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줄리오 2세가 브라만테에게 설계를 의뢰한 <벨베데레>정원은 실로 기념비적이었습니다(도2,3,4). 8각형의 정원에 고전적인 건축방식의 감실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배치된 조각의 전시방법은 실로 쾌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어서 이 후에도 조각 전시방법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도2 빈첸초 페올리 <벨베데레 정원>, 18세기
 
 
 
 
도3 <아폴로 디 벨베데레>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원작의 로마시대 모작
바티칸, 벨베데레 정원
 
도4 <라오콘>
기원전 2세기
바티칸, 벨베데레 정원
 
고대조각을 공부할 때 언제나 언급되는 <아폴로 디 벨베데레>(도3)와 <라오콘>(도4)도 이때 수집, 전시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대조각의 수집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발굴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지닌 로마는 이 시대의 관심을 리드하였습니다. 부와 종교권력을 지닌 교황청은 도서관과 박물관을 조성함으로써 문화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매우 정치적이었던 교황 줄리오 2세는 이미지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1506년엔 4세기에 세워진 바실리카 형태의 <베드로 성당>을 완전히 다시 지을 계획에 착수하고, 1508년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주문하여 그의 삼촌인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시작한 시스틴 예배실을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엔 라파엘에게 현재의 서명실벽화를 주문하였습니다. <아테네 학당>(도6)과 <성체에 대한 논쟁> 등의 주제로 그려진 소위 <서명실> 벽화는 라파엘 회화의 가장 완숙한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줄리오 2세의 고전주의 정책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문자의 정책과 화가의 스타일이 일치되었기 때문이죠.

 
 

현재 <서명실>이라 부르는 바티칸의 이 방은 줄리오 2세 당시엔 개인 도서실이었습니다. 당시의 서재는 외교적인 공간이었고, 이 그림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물이었습니다. 그럼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어떻게 이교의 학문인 <아테네 학당>을 이러한 공간에 그리게 되었을까요. 교황 줄리오 2세는 군사원정도 마다하지 않던 정치적인 인물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가 단순히 그리스 철학에 대한 관심에서 이 그림을 주문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듯 합니다.

도5 교황청의 <서명실>
 
 
 
 
 

네 벽면에 그려진 이 방의 회화는 각기 신학을 나타내는 <성체에 대한 논쟁>, 詩를 나타내는 <파르나소스>, 법학을 나타내는 <세 덕성>, 그리고 철학을 나타내는 <아테네 학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학, 철학, 문학, 법학 등의 이들 네 주제는 당시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분류이기도 하며 대학의 전공분류이기도 하였으니 학문의 네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6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11년, 프레스코
폭770cm, 바티칸, 서명실
 
 
도7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
도6의 중앙부분
 
 
도8 피타고라스

도6의 왼쪽 부분

 
 
 
도9 유클리드
도6의 오른쪽 부분
 
 
 
도10 톨로메오와 조로아스터
도6의 오른쪽 끝부분
 
 
 
브라만테가 설계한 베드로 대성당의 르네상스식 건축물 아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7)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서로 토론하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도8)는 제자가 받쳐주고 있는 작은 판에 그려진 도형을 보며 음악의 조화에 대하여 쓰고 있으며 유클리드(도9)는 컴파스로 두 개의 삼각형을 그려 보이며 그의 기하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법칙에 몰두한 어린 학생들의 놀라워하는 표정은 진지한 배움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밖에도 그 오른쪽에서 지구를 들고 있는 톨로메오, 천계를 들고 있는 조로아스터(도10) 등 서로 다른 시대의 철학자, 수학자와 천문학자들이 모두 모여 <아테네 학당>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라파엘로는 이 두 철학자를 원근법의 소실점에 배치함으로써 시선의 중심에 놓이게 하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로 그려진 플라톤은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에는 자연에 대한 그의 저서 『티마우스』를 들고 있음으로써 자연의 근원은 하늘에 있음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왼손에 그의 저서 『윤리학』을 들고 오른손 바닥을 펴 땅을 가리킴으로써 인간행동에 대한 도덕적 철학자임을 나타내는 등 라파엘로는 각각의 철학자를 나타내는 도상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것에 대한 지식'인 철학은 맞은편에 그려진 '신성한 것에 대한 지식'인 신학과 함께 인간의 지식은 모두 신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파엘로의 조화로운 화풍은 이들이 이룬 질서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같이 느끼게 하는 사실적인 기법과 관객을 끌어들이는 연극적인 제스춰들은 보는 이를 그림에 참여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림에 있는 고대의 인물과 이를 보고 있는 현대의 인물이 함께 있는 고대와 현대의 공존은 '다시 태어난 로마'를 이루고자 했던 교황 줄리오 2세의 정책에 부합되는 이미지였던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 로마'라는 이미지는 로마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자하는 교황의 정책이었습니다. 15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이탈리아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왕정의 세력 확장 속에 힘이 약화되었으며, 교황청은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교황 줄리오 2세는 비록 자신이 직접 갑옷을 입지는 않았으나 군사원정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를 지키고자 했던 교황의 의지는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의 초상화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도11).

 

도11 라파엘로 <교황 줄리오 2세>
1511-12년, 런던, 국립미술관
 
 
교황은 151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볼로냐에서 중병을 앓았는데 그때부터 수염을 길렀으며 교황은 "프랑스 왕 루이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때까지는 수염을 깍지 않겠다"고 공언하였습니다. 그리고 1512년 4월 라벤나에서 프랑스를 몰아낸 후 수염을 깎고 공식석상에 나타났습니다. 1512년에 제작된 교황의 초상은 흰 수염이 그득하며 고심에 찬 표정입니다. 교황의 정치성을 비판한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낙원으로부터 추방하였으며, '군인왕', '새로운 시저'라고 풍자하였습니다. 실제로 교황은 기독교의 수장이었으나 정치가 시저의 야망을 지녔으며, 위기의 로마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부르며 로마 시대 이후 가장 큰 제국으로 발전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이후의 교황들도 끊임없이 지속하였습니다. 베드로 대 성당의 개축은 브라만테, 라파엘로를 거쳐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져 오늘의 위용을 낳았으며, 교황 파올로 3세가 주문하고 역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 또한 16세기 로마에 고대 로마의 유적을 되살린 사업이었습니다.
 
 

'미술을 동원한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로마를 예술의 중심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정치적인 목적은 쉽게 달성되지 못하였습니다. 프로테스탄트 혁명이라는 카톨릭 역사상 최악의 현실에 부딪힌 것입니다. 현실을 개혁하기보다 고전적인 이미지로 미화시킨 정책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이지요. 라파엘로의 아름다운 양식도 곧 매너리즘을 맞아 붕괴되었으니 이 시대 고전주의는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의 추구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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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단종


피부타입 : 복합성

나이가 들어 이제는 좀 피지가 덜 나오려나 했건만 찬바람 쌩쌩 부는 지금에도 변함없이 T존은 번들거린다. 기름종이도 한동안 안 쓰다가 요즘들어 다시 필름형 기름종이를 쓰기 시작했다. 피부 트러블도 늘었다. 20대도 후반이 가까워오니 뾰루지도 안나길 바랬지만, 여지없이 이마와 턱, 볼 가리지 않고 벌겋게 돋아나는 이 나쁜 것들.

그래서 오랜만에 진흙팩을 하기로 결정했다. 최근들어서는 간편한 일회용 마스크를 주로 썼는데, 반짝 효과는 있지만 그때뿐인 듯 했다.  '세안하고 팩을 고루 펴 바르고 마를 떄까지 기다린 다음 다시 세안한다'는 귀찮기 짝이 없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워시오프 타입이라, 꽤 오랫동안 묵혀두고 있었던 팩을 꺼내 살살 펴 발랐다. 이 에스티 로더의 소 클린 딮 포어(so clean deep pore) 마스크는 꽤 묽은 편이라 펴 바르기가 참 쉽다. 이마와 눈썹 사이, 코 부분은 약간 두텁게, 볼 부분은 약간 얇게 펴 바른 뒤, 마를 떄 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씻어내는데, 씻을 때의 감촉도 꽤 좋은 편이다. 부드럽게 잘 씻겨 나가고, 진흙팩임에도 불구하고 피부가 건조해지거나 하지 않고 부들부들 촉촉하다.  마를 때도 당기는 정도가 다른 팩에 비해 좀 덜한 것 같다. 팩제가 마르면서 가뭄때 논바닥처럼, 혹은 거북등껍질처럼 쫘악 쫙 갈라지는 정도도 덜 하다.

팩을 한 다음날은 아무래도 좀 피부가 덜 번들거리고 화장도 잘 받는다. 복잡한 과정이 번거롭기는 하지만 요즘처럼 유난히 기름이 줄줄 흐를 때 쓰기엔 꽤 괜찮은 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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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10-24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 제품도 눈독을 드리게 만드는군요.^^ 저도 진흙팩 좋은건 알지만 바르면 쫙쫙 갈라지는 그느낌이 너무 싫어서 피부 좋아지려다 잔주름 생기겠다 싶어 잘 안했거든요.

panda78 2004-10-2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김영애의 황토팩이 너무나 궁금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