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고 싶어요- 온통 모래색의 풍경!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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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 2004-10-1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 폭탄테러가 계속 되고 있다는데...
시나이 반도가 이집트 어디냐?-_-a

딸기 2005-01-04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모래색입니다. 드러운 것이... ^^

올여름에 카이로에 갔었거든요.
 


연습 중.... 곡예다, 곡예 @ㅂ@

 

 

 

 

 

 

 

 

 

 

 

모두 2001년 사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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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서는 1520년경부터 1600년경까지, 즉 16세기 중·후반의 미술을 매너리즘(Mannerism)이라는 용어로 부릅니다. 이는 이탈리아어 Maniera 즉 '방식'이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특정한 '방식', '형식'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개인 화가가 자기의 '방식'에 빠져 창의성 없이 그 형식을 반복할 때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말하는데 이탈리아 16세기 중엽의 미술에 대해서도 그러한 부정적인 의미에서 매너리즘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16세기 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 등 소위 거장들의 미술이 절정에 달하자, 이후 미술가들은 그들의 '좋은 방식'(buon maniera)을 본 받아 따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의 방식이 오랫동안 유행하고, 라파엘로 그림을 모방한 판화들은 화가들의 화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화가들은 곧 자기 방식들을 만들어갔으며, 이전의 고전주의 잣대로는 평가할 수 없는 일탈과 변형의 미술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작품들을 봅시다.

암마나티(Bantolomeo Ammanati: 1511-1592)의 조각(도1)은 레다가 백조로 변한 제우스와 입을 맞추는 모습입니다. 주제는 다르지만 형태는 미켈란젤로의 조각(도2)과 똑같죠? 방식 즉 maniera를 따라한 모습입니다. 이들에게 미술은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품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아름다운 형식 자체가 미술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도1 바르톨로메오 암마니티<레다>, 대리석
 
 
 
 
도2 미켈란젤로 <줄리아노의 무덤>부분
1526-33년, 대리석
피렌체, 산 로렌조, 사크레스티아 누오바
 
 
 

 

이번엔 파르미쟈니노(Parmigianino: 1503-1540)의 <목이 긴 성모>(도3)를 봅시다. 정말 목이 길죠? 얼굴도 작아서 아마 10등신 정도는 되어 보입니다.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전형이 형성되자 이를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한 과장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장은 어느덧 변형의 미(美)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성모자와 성인 또는 천사들이 같이 있는 것 같지 않고 마치 채색된 성모자 조각상에 천사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모자의 묘사가 너무 인위적이며, 좌대 위에 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 인간보다 훨씬 거대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바로 마리아의 뒤에 놓인 큰 기둥 때문입니다. 그 앞에 있는 수도자는 오히려 너무 작습니다. 이제 미술가들은 더 이상 실제같이 보이게 하려는 재현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특정한 효과가 더 중요하지요.

도3 파르미자니노 <목이 긴 성모>
1534-40년, 나무 패널에 유채, 216×132cm
피렌체, 우피치
 
 
 

로쏘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 1494-1540)는 중앙집중식의 구도도 와해시켰습니다. 그가 그린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그림(도4)을 보십시오. 예수의 모습을 찾으려면 우리는 땅에 쓰러질 듯 슬퍼하는 막달라 마리아부터 마리아를 부축이고 있는 여자와 예수의 발을 붙잡고 있는 왼쪽의 남자, 잘 붙들고 있으라고 소리치는 왼쪽 위의 남자들까지 한 바퀴를 돌아야 합니다. 같은 주제를 그린 15세기 그림(도5)과 비교하면 이러한 일탈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주인공인 예수와 성모, 요한은 중앙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늘에 가려있습니다. 조연들의 행동들만이 번잡할 뿐입니다. 이제 중심은 해체된 것입니다.

 

도4 로쏘 피오렌티노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
1521년, 나무패널에 유채, 375×196cm
볼테라 대성당
 
 
도5 프라 안젤리코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부분
1437-40년, 나무패널에 템페라, 전체 176×185cm
피렌체, 산 마르코 박물관
 
 
 

여러분들은 아마 제가 로쏘 피오렌티노의 위 그림을 설명하는 동안 색채와 빛의 작용도 유심히 보았을 것입니다. 푸른 보라빛을 배경으로 한 붉은 색의 난무와 같은 이미지였지요. 고유색을 부정한 이러한 인위적인 색채와 빛의 효과는 로쏘의 동료인 폰토르모(Jacopo Pontormo: 1494-1557)의 그림(도6)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가 그린 예수의 시신을 눕히는 장면은 보라빛이 감도는 연한 푸른색과 연한 주황, 연분홍, 연한 살색의 배치 같습니다. 이러한 탈색된 듯한 색들은 그림에서의 색채가 이제는 사물의 묘사를 위한 색채이기보다 색들 자체의 유희임을 잘 보여줍니다(도7).

 

도6 야코포 폰토르모 <예수의 시신을 눕힘>
1528년, 나무 패널에 유채, 313×192cm
피렌체, 산타 펠리치타
 
 
도7 도6의 부분
 
 
 
 
 

 

역시 폰토르모가 그린 <마리아의 엘리자벳 방문>(도8)은 매너리즘의 여러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작품입니다. 화면 가득히 차지하고 있는 네 사람의 머리와 발은 작고 몸체 중앙만 부풀린 채 커서 마치 공중에 약간 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자벳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나 뒤의 두 사람은 관람자를 쳐다 보아 네 사람의 관계는 서로 불일치하며, 그들에게 비추는 광선 또한 마리아는 화면 왼쪽에서, 엘리자벳은 화면 정면에서 오는 빛을 받아 분산된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이 광선들은 한쪽에서 오는 자연광이 아니며 화가가 임의로 정한 인위적인 국부 조명인 것입니다. 이 그림이 더욱 괴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배경과 인물들 간의 비례 때문일 것입니다. 인물들은 건물의 3층까지 차지할 정도로 거대하여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들은 왼쪽 건물 아래에 있는 아주 작은 인물들과 대비되어 더욱 모뉴멘탈하게 보입니다. 화가 폰토르모는 성경의 주제나 사물의 재현에는 관심 없이 비례나 색채, 빛의 변형된 효과들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도8 야코포 폰토르모 <마리아의 엘리자벳 방문>
1528-29년, 나무 패널에 유채, 202×156cm
피렌체(카르미냐노), 산 미켈레
 
 
 

이 시대의 초상화를 한 점 봅시다. 브론지노(Agnolo Bronzino: 1503-72)가 그린 <톨레도의 엘레오노라와 그의 아들>(도9)을 이전의<모나리자>(9주 주제2 도11)나 티치아노가 그린 <벨라>(10주 주제1 도10) 등과 비교하면서 이 그림의 특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물의 얼굴은 마네킹 같이 차갑고, 부인이 입은 옷은 마치 의상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듯이 옷의 특징 만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물들은 마치 박제된 듯 고정되어서 주인공의 성격이나 감정을 읽어내기 어려우며 인물이 그림으로부터 소외된 듯이 느껴집니다.

 

도9 아뇰로 브론지노 <톨레도의 엘레오노라와 그의 아들>
1550년, 나무패널에 유채, 115×96cm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도10 죠르지오 바자리 <코지모 1세의 신격화>
1555-65년, 프레스코화, 피렌체, 베키오궁 천장화
 
 
 

엘레오노라는 메디치가의 피렌체 공작 코지모 1세의 부인입니다. 16세기 중엽 피렌체 정치는 여러 면에서 이전 르네상스시대와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공작은 곧 이 지방의 주인이었으며 정치면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 모든 것을 지배하여서 도10에서 보듯이 자신을 신격화 할 수도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국제 정세에서의 피렌체는 오히려 약세였으니 이러한 신격화는 과시에 불과했습니다. <코지모 1세의 신격화>(도10)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가 주문한 미술들은 대부분 정치 선전의 도구였습니다. 사회는 경직되고, 이에 따라 미술은 겉과 속이 다른 괴리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매너리즘을 연구한 아놀드 하우저는 이 시대의 미술을 사회적인 정신분열의 증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회화에서 본 바와 같은 변형과 해체의 현상은 건축과 공예부분에서도 많이 보입니다.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9-1546)가 설계한 팔라쪼 두칼레 (Palazzo Ducale)(도11)를 보면 기둥 양식은 나선형으로 변형되고 팀파늄 또한 해체된 모습입니다. 건축가이자 미술에 관한 글을 많이 쓴 주카리(Federico Zuccari: 1540-1609)는 미술에서 환상(fantasy)을 강조하였는데 실제로 그가 설계한 주카리 궁(宮)의 문과 창문은 거대한 괴물의 입 모양으로 되어있습니다(도12). 도13에서 보는 이미지는 어떻습니까?(도13,14) 옆으로 길게 늘어진 변형된 인물 형상이죠. 정상적인 비례의 형상이 되게 하려면 옆으로 비스듬히 놓아야 합니다.

 

도11 줄리오 로마노 <팔라조 두칼레>
 
 
 
도12 페데리코 주카리, <팔라제토 주카리>의 창문 부분
1593년, 로마
 
 
 
 
 
 
 
 
도13 윌리엄 스크로츠 <에드와르도 6세의 초상>
1546년, 나무에 유채, 54.2×160㎝, 런던, 내셔널 갤러리
 
 
도14 도13을 비스듬히 본 모습
 
 
 
 

 

매너리즘 현상은 이 시대의 베네치아와 스페인 미술에서도 두드러집니다. 틴토레토(Tintoretto(일명, Jacopo Robusti:본명): 1518-94)가 그린 <최후의 만찬>(도15)은 베네치아의 산 조르지오 마조레(San Giogio Maggiore) 교회에 걸려있는 거대한 캔버스화 입니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9주 주제2 도9)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틴토레토의 작품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식탁은 대각선으로 놓여있고, 예수와 사도들 보다 이들의 식사를 시중들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번잡스러움이 화면을 지배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임을 알아보게 하는 요소는 번쩍이는 두광의 빛입니다. 예수의 두광은 마치 자체가 빛을 발하는 힘이 있는 듯 하며, 제자들의 두광은 화면 왼쪽 위의 등불에서 발하는 빛의 역광인 듯 처리하였습니다. 빛의 원천이 뒤에 있기 때문에 인물들은 모두 어둡고, 따라서 표정을 알기 어렵습니다. 인물의 역할보다는 빛이 화면의 효과를 좌우합니다. 어두운 부분은 거의 색채가 없는 듯 검은 색이며 밝은 부분은 섬광이 빛나듯 즉흥성이 번뜩이고, 등불의 빛이 번져 나가면서 형성하는 천사들의 환영은 초자연적인 신비감마저 조성합니다.

 

도15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1592-94년, 캔버스에 유채, 363×568cm
베네치아, 산 조르지오 마죠레
 
 
 

틴토레토는 잠시 티치아노의 제자였지만 일찍 헤어졌으며, 그들의 불화는 오래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보면 티치아노의 전통이 역력하며, 자신 또한 티치아노의 색과 미켈란젤로의 드로잉을 결합하겠다고 공언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16세기 화가들은 인체묘사력을 중요시한 피렌체 회화의 장점과 색채와 빛을 중요시한 베네치아 회화의 장점을 적극 수용하고, 융화시키고, 또 변형시킨 것입니다.

 

 

 

스페인의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또한 당시 화가들의 이러한 의식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스의 크레타 섬 출생으로 베네치아(1566-70 체류)와 로마(1570-76 체류)에서의 체류는 그의 화업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576년 로마에서 아마도 그림 주문을 계기로 스페인의 톨레도(Toledo)에 간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곳에서 제작하면서 실로 획기적인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게쎄마니에서의 기도>(도16)와 <톨레도 풍경>(도17)을 보겠습니다. <게쎄마니에서의 기도>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예수가 공포와 번민에 싸여있는 순간의 기도입니다. 데리고 간 세 제자는 잠에 빠져 예수와 함께 깨어있지 못하였으며 이때 이미 유다는 로마인들에게 예수가 있는 곳을 알려준 순간이었습니다. 엘 그레코는 기도하는 예수에게 붉은 옷을 입혀 크게 중앙에 놓고, 왼쪽엔 잠에 빠진 제자들, 오른쪽엔 로마 군인들을 희미하게 암시하였습니다. 길게 늘어트린 인물의 비례와 명암의 강한 대비, 마치 초점이 없는 듯 흐릿하고 어긋난 윤곽선들, 빠른 필체 등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매너리스트들의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엘 그레코는 더욱 혁신적입니다. 그는 사물을 배치하는데 있어서 현실의 고정관념을 거의 무시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천사의 관계는 공간적으로 매우 애매하며, 잠든 세 제자가 있는 곳은 마치 동굴 속 같기도 하고 공기의 막에 싸여있는 듯 비현실적입니다. 그리고 푸른 달무리와 밤하늘의 구름은 환상적인 느낌을 배가시키고 있습니다.

 

도16 엘 그레코 <게쎄마니에서의 기도>, 1588년경
캔버스에 유채, 104×117㎝, 오하이오, 톨레도, 톨레도 박물관
 
 
 
 

 

<톨레도 풍경>(도17)은 인물 형상이 없어서 표현력이 더욱 큰 것 같습니다. 엘 그레코가 이미 이전 그림들의 배경으로 여러 번 사용한 (예를 들면 암스텔담 왕립 박물관 소장의 <십자가에 고통받는 예수> 1585-90) 이 모티브를 독립된 풍경화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 풍경의 종말론적인 분위기에 애착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짙은 먹구름 아래에서 번개 빛에 실루엣을 드러내는 음산한 언덕과 건물들, 빛의 흐름만이 번쩍이는 검은 하늘은 거의 추상화 같습니다. 중세 종교화가 지닌 영적인 힘과 현대의 추상회화가 만난 듯한 표현력이지요.

 

도17 엘 그레코 <톨레도 풍경>
1600-10, 캔버스위에 유채,
뉴욕,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지금까지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매너리즘 미술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지금부터 400-500년 전의 그림들이 이렇게 혁신적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 시대 미술들이 지닌 변형, 왜곡, 일탈의 특성들은 20세기 말 현대 미술의 특성이기도 하여서 이들을 낳은 현대 사회와 16세기 사회의 공통성을 찾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당연히 매너리즘의 근본 원인은 16세기 사회의 변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1000년이 넘게 확고한 틀을 유지해 온 카톨릭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정통성을 도전 받았으며, 지리상의 발견과 지동설의 학설은 유럽인들이 믿고 있었던 정신적 기반을 뿌리 채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이 믿던 중심은 해체되고, 이제 이 시대의 새로운 언어를 찾게 된 것입니다. 매너리즘은 그 소산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원동력으로 17세기 바로크미술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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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주의 주제3에서 15세기 플랑드르 회화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의 주제1에서는 16세기의 플랑드르 회화와 현재의 독일지역 그림들, 그리고 1520년대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미술의 변화들을 살펴보겠습니다(지도). 보쉬와 그뤼네발트는 각각 플랑드르미술의 영향권지역에서 활동하였지만 반 아이크를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회화와는 매우 다른 독창적인 종교화들을 제작했습니다. 보쉬(Hieronimus Bosch: 1450년경-1516년경)는 현재의 네덜란드 남부지역인 헤르토겐쉬(Hertogenbosch)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반 아이크 전통의 리얼리즘과는 매우 다른 환상적인 그림을 남겼습니다. 그가 그린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은 소름끼치도록 끔찍하여서 그는 '악마의 화가' '지옥의 화가' 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의 창의력은 오히려 인간에 대한 냉철한 관찰에서 나온 교훈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의 그림 중 대표작인 <쾌락의 동산>(도2)은 플랑드르 전통의 세 폭 제단화입니다. 그림은 흑백의 그리자이유로 그린 우주의 창조로부터 시작합니다(도1). 그리고 양쪽 패널을 열면 <쾌락의 동산>(도2)이 펼쳐집니다. 닫았을 때의 태초의 모습은 안쪽의 왼쪽 날개인 낙원으로 이동하며, 낙원은 인간의 갖가지 탐욕이 그려진 가운데 패널을 지나 오른쪽의 지옥으로 이어집니다. 아담과 이브의 창조는 질서 있고 평화로운데 비해 탐욕과 지옥의 세계는 무질서하고 기괴합니다.


도1 히에로니무스 보쉬 <쾌락의 동산> 제단화를 닫았을 때 모습
1505-10년경, 220×194㎝, 패널에 유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도2 히에로니무스 보쉬 <쾌락의 동산> 펼쳤을 때 모습
1505-10년경, 패널에 유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가운데 패널, 220×195㎝, 양쪽 날개 패널 각각 220×97㎝
 
 
 
 

 

벌거벗은 인간들은 괴상하게 변형된 파충류나 거대한 식물들에게 갇히거나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며, 쾌락을 즐기는 남녀를 바라보면 거의 관음증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운데 패널의 오른쪽 중간과 아래쪽을 보면 사과를 따먹으며 즐기는 남녀가 있으며 사과를 들고 춤추는 두 여자의 머리는 지혜의 상징인 올빼미로 덮혀있습니다(도3). 여기에 그려진 수많은 탐욕은 분명 아담과 이브의 유혹이며, 타락한 인간들은 오른쪽 패널에서 벌을 받게 됩니다. 음악에 지나치게 탐닉한 사람들은 하프에 매달려죽고(도4), 어떤 이는 머리가 새인 옥좌의 왕(?)에게 통째로 먹히고 맙니다(도5). 멀리 유황불이 터지는 지옥 아래엔 커다란 귀에 눌린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꿈틀대고 인간의 영혼들은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정상적인 모습은 화면 가운데서 조금 위에 그려진 한 인간의 얼굴뿐입니다(도6). 화가 자신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인물은 마치 방관자처럼 이 모든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보쉬의 그림은 아마 인류가 상상한 지옥의 모습 중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이미지들입니다. 그러나 보쉬의 지옥은 중세의 지옥을 연상시키는 강박증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모호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성에 대한 통찰로 얻어진 교훈적인 이야기들 같습니다.

 

도3 도2의 중앙패널의 부분
 
 
 
도4 도2의 오른쪽 패널의 부분
 
 
 
도5 도2의 오른쪽 패널의 부분
 
 
 
도6 도2의 오른쪽 패널의 부분
 
 
 
 
 

 

이 그림은 제단화라는 형식 때문에 교회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어서, 이렇게 성적이고 기괴한 그림이 어떻게 교회에 놓여 있었을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곤 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의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이 그림이 1517년에 나사우의 앙리 3세(Henry Ⅲ of Nassau)의 브루셀 궁전에서 발견되었음을 상기해 볼때 1568년 스페인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기까지 왕의 개인 소장품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욕망을 절제하라는 교훈을 담은, 개인의 결혼과 관계된 작품이라고 유추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뤼네발트(Mattias Grunewaltl: 1470/80-1528)는 독일 남부출생으로 그의 <이젠하임 제단화>는 이 시대 미술의 또 다른 특성을 보여줍니다. 이젠하임(Isenheim)의 안토니오 수도원 병원 예배실에 놓여 있었던 제단화이며 양쪽 날개가 두 쌍인 다소 복잡한 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일 표면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도7.8)가 있습니다. 그림을 먼저 한번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이 너무도 처절하죠? 피부병이 돋아있는 몸과, 고통에 뒤틀린 손가락의 표정을 보면 보는 이까지도 아픔을 느낄 듯합니다. 그의 왼쪽에는 실신할 듯 슬퍼하는 마리아를 요한이 부축하고 있으며, 그 아래엔 막달라 마리아가 오열하고 있습니다. 막달라의 붉은 옷과 흩날리는 금발머리, 그리고 그의 연극적인 제스춰는 우리까지도 전율하게 합니다.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오른쪽 세례요한의 붉은 색들은 검은 바탕을 배경으로 매우 표현주의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킵니다.

 

도7 그뤼네발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이젠하임제단화 부분
, 1515년경, 나무에 유채, 269×307㎝
콜마르, 운테르린덴박물관
 
 
도8 도7의 부분
 
 
 
 
 

 

반으로 나뉘어 그려진 위 그림을 양쪽으로 열면 도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일 왼쪽부터 수태고지, 예수 탄생, 예수 부활로 이어집니다.

 

도9 도7을 양쪽으로 펼쳤을 때 모습
 
 
 

 

이 중에서 <예수의 부활>(도10)을 자세히 보도록 합시다. 환영을 보는 듯하죠?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며 부활하는 예수는 마치 무게가 없는 듯 가볍게 떠올라 이 세상을 빛으로 밝힙니다. 같은 주제를 그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도11)과 비교해보면 그림의 접근 방법과 보는 이에게 주는 효과가 얼마나 다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화가 피에로가 그린 부활한 예수는 실제 살아 있는 듯 서있습니다. 거기엔 아무런 신비도 없고, 놀라움도 없습니다. 성경의 설명과 확실한 물체의 증거가 있을 뿐입니다. 반면 독일지역의 작가 그뤼네발트는 같은 주제를 기적으로, 신비함으로, 그리고 환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도10 그뤼네발트 <예수의 부활>
이젠하임제단화 부분, 269×141㎝
 
 
 
도11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예수의 부활>
 
 
 
 
 

 

도9의 가운데 패널을 다시 열면 오른쪽 패널에 <성 안토니오의 유혹>(도12)이 그려져 있습니다. 수도하고 있는 안토니오에게 온갖 마귀가 그를 괴롭힙니다. 용머리의 괴물은 머리칼을 잡아 당기고, 올빼미 형상의 괴물은 몽둥이를 내리칩니다. 음산하고 파괴적인 배경에 무너진 건물 위를 날아다니는 기괴한 동물들, 보쉬를 '지옥의 화가'라고 한다면, 그뤼네발트는 '마귀의 화가'라고 불러야 적합할 것 같습니다.

 

도12 그뤼네발트 <안토니오의 유혹>
이젠하임제단화 부분
265×141㎝
 
 
 

 

이 끔찍한 장면의 그림들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요. 이 제단화가 병원 예배실에 있었다는 사실은 해답의 열쇠가 될 듯합니다. 이 그림을 보는 환자들에게 특정한 효과를 기대한 것 같습니다. <안토니오의 유혹>(도12)의 아래 왼쪽 구석엔 피부병으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이가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도7,8) 또한 온 몸이 상해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도10)의 살갗은 우유같이 희고 곱습니다. 아마도 이 그림은 전염병이 만연했던 이 지역에서 병의 고통을 이겨내는데 심리적인 도움을 주려한 것 같습니다.

 

 

 

현재의 독일 뉴렘베르그(Nuremberg)에서 태어난 뒤러(Albrech Durer: 1471-1528)는 15세기까지도 후기 고딕식이 지속되었던 독일 지역 미술에 르네상스를 일으킨 화가입니다. 금은세공사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그 자신도 금은세공과 목판, 필사본 화가로 일하였으나 1494년과 1505년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는 미술을 통하여 인문주의적 세계를 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린 <아담>(도13)과 <이브>(도14)는 더 이상 원죄를 지은 성경의 인물이 아닙니다. 등신에 가까운 크기로 그려진 아담과 이브는 조화로운 비례와 경쾌함을 지닌,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델입니다.

도13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
1507년, 나무패널에 유화, 209×81㎝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도14 알브레히트 뒤러 <이브>
1507년, 나무패널에 유화, 209×81㎝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그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의 드로잉과 판화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매체들을 통해 그는 자연과 미술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탐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수채화로 그린 들풀을 보십시오(도15). 그는 북유럽의 전통이 깊은 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그가 그린 자연은 아무런 상징도 없이, 마치 하찮은 풀에서 자연의 섭리를 보는 듯 섬세합니다. 무성히 자란 풀들은 서로 엉켜있는 듯 하지만 오히려 아름다운 질서를 보여줍니다. 질경이, 민들레, 잡풀들에 대한 그의 관찰은 경이롭습니다. 그는 경험적인 태도로 자연을 관찰하고 있으며, 그에게 그리는 행위는 바로 이러한 탐구의 과정이었습니다.

 

도15 알브레히트 뒤러 <들풀>, 1503년
종이 위에 수채와 과슈, 41×32cm
빈, 알베르티나 그래픽 미술관
 
 
 

 

그가 남긴 수많은 드로잉과 판화 중에는 인체 비례와 원근법에 대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16의 판화는 비스듬히 놓여있는 류트를 손잡이 쪽에서 보면 화면에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입니다. 화가와 사물 사이엔 한쪽을 움직일 수 있는 화폭이 놓여있고, 화면에서의 사물의 형상을 정하기 위하여 화가의 눈과 사물을 잇는 선이 화면 위치에서 만나는 점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배운 미술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방법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도16 알브레히트 뒤러 <원근법 연구>, 1525년, 목판화
 
 
 
 
 

 

그는 베네치아 체류 중 독일의 인문학자 친구인 피르크이머(Pirckheim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기에서 나는 신사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뉴렘베르그에서의 화가는 아직도 목수나 양복쟁이와 다름없는 장인이지만 베네치아에서의 화가는 대우받는 신사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의식이 강한 화가였습니다. 그의 나이 26살 때 그린 자화상에서 그는 자신을 잘 차려입은 신사로 나타내더니 2년 후 28살 때의 자화상에서는 자신을 예수의 형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도17). 왕이나 예수의 상에 주로 사용하는 정면 자세에 손가락으로 바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1512년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회화예술은 수 백년 전의 전능한 왕들에 의해 존중되었다. 그들은 뛰어난 예술가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고, 특별히 대우하였다. 위대한 거장은 하느님과도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도17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1500년, 나무 패널에 유채, 67×49cm
뮌헨, 알타피나코테카
 
 
 

 

그의 생애 말년에 그린 <네 사도들>(도18)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결산 같습니다. 좁고 긴 두 폭의 화면은 두 사도의 긴 옷이 가득 차지하고, 나머지 두 사도는 거의 얼굴만 그려졌습니다. 단색의 옷은 거대하고 단순하며, 명암처리에 의해 입체감이 풍부합니다. 옷은 이렇게 이탈리아 르네상스전통의 화법으로 그려졌으나 얼굴의 사실적인 묘사는 미화시키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북구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붉은 옷의 요한과 열쇠를 들고있는 베드로, 복음사가 마르코, 그리고 칼을 들고 있는 바오로입니다. 그러니까 그림은 요한과 바오로를 중심으로 그려졌습니다.

 

도18 알브레히트 뒤러, <네 사도>
1526년, 나무패널에 유채, 각각 215×76㎝
뮌헨, 알타 피나코테카
 

 

그런데 이러한 네 명의 구성은 종래의 종교화에서는 거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그림은 교회를 위해 그린 것이 아니고, 그가 주문 없이 스스로 제작하여 뉴렘베르그의 시청 위원회에 선물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독일지역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휩싸였고, 뉴렘베르그시는 막 루터주의를 인정하였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분위기와 관계된 것은 아닐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뒤러는 루터를 '참으로 큰 고뇌에서 자신을 구해 준 크리스챤'이라고 존경해 왔으며 프로테스탄트가 거론한 성상 숭배의 금지에 대해서도 마음속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루터가 가장 좋아하는 사도이며, 용감한 바오로는 프로테스탄트의 영적인 아버지임을 고려하면 루터주의적인 주제의 선택이며, 이를 시청에 선물하였음은 시와 루터교의 평화로운 해결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 일수도 있겠습니다.

 
 

 

한편 북유럽에서는 성상제작을 금지한 종교개혁의 확산으로 그림의 주문이 줄어들고, 화가들은 생계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화가들은 종교화가 아닌 다른 장르를 찾아야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북유럽의 미술세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버지부터 종교화 화가였던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이 초상화가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스위스의 바젤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홀바인은 그 곳에서 책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그 중엔 카톨릭 교회의 타락을 맹렬히 비판한 에라스무스(Erasmus)의 『우산 예찬』(1509)도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에라스무스의 초상>도 여러 점 제작하였습니다. 그 중 1523년에 제작한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도19)는 사실적인 얼굴묘사와 모피코트의 질감묘사 등 북유럽 회화의 방식을 전수 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상화의 중요 요인은 배경의 기둥이나 책꽂이 선반에 적용한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와 함께 어울려 품위 있고 침착하며 정확한 초상화로 완성되었습니다.

 

도19 한스 홀바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1523년경, 나무패널에 유채, 76×51.4cm
개인소장
 
 
 

 

1520년대의 종교개혁으로 그림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자 홀바인은 그림 주문을 찾아 영국에 가게 됩니다. 1526년 에라스무스의 편지를 들고 영국에 건너 간 그는 그 곳에서 역시 에라스무스의 소개로 캔터베리 주교 토마스 모어(Thomas More) 등 인문학자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 그림들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1532년부터 영국에 정착한 그는 1536년 영국 왕 헨리 8세(Henry Ⅷ)의 초상화가가 되었습니다. 1540년에 그린 <헨리 8세>(도20)는 왕실 초상화가로서의 홀바인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왕은 1539년 앤 클레브(Ann of Cleves)와의 결혼식에서 입었던 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보석이 달린 수놓인 모직 옷과 비단 겉옷, 그리고 모피 등걸이 등의 묘사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섬세한 사물 묘사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홀바인의 역량은 단순히 사실적인 묘사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택한 인물의 자세와 표정은 언제나 초상화 주인공의 성격과 초상화의 제작목적에 적합했습니다. 헨리8세는 정면으로 당당히 서 있고, 과장되게 넓은 어깨는 그의 과감한 정치력을 나타내기 위한 홀바인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도20 한스 홀바인 <헨리8세>, 1540년
나무 패널에 유채, 88.5×74,5cm
로마, 국립고대미술관
 
 
 

 

홀바인의 진정한 수작은 <외교관들>(도21)입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주영 프랑스 대사 쟝 드 딩테빌(Jean de Dinteville)과 죠르쥬 드 셀브(George de Selve) 주교이지만 두 인물 사이에 있는 정물들이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제일 위칸엔 지구본을 비롯한 당시의 첨단과학 도구들이 정연하게 놓여있는 데 반해 그 아래 칸엔 루트와 피리종류의 악기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루트의 끈은 끊어진 채입니다. 그 아래 바닥의 중앙엔 알 수 없는 물체가 애매하게 떠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을 오른쪽 인물의 아래 손 부근에 바짝 가져다 대고 이 형상을 한 번 보십시오. 이 것은 인간의 해골입니다. 글쎄요 홀바인은 이 해골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 해골은 전통적으로 인생의 무상을 상징하는 정물입니다. 외교관의 화려한 명예, 첨단의 과학, 음악의 즐거움, 이 모든 것 무상함을 말하려 한 것일까요.

 

도21 한스 홀바인 <외교관들>, 1533년,
나무패널에 유채, 207×209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종교화의 주문이 끊기고 등장한 새로운 장르는 풍속화와 풍경화였습니다. 플랑드르의 화가 브뤼겔(Pieter Bruegel: 1528(-30)년경-1569)이 그린 <농부의 결혼>(도22)을 보십시오. 아마 농민들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 것은 미술의 역사상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벽에 검은 천을 걸고 그 앞에 눈을 내리깔고 앉아있는 여자가 신부인 것 같습니다. 그녀로부터 왼쪽 두 번째에 앉아서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이가 신랑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대각선으로 놓인 식탁을 따라 한 가운데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을 지나 왼쪽 구석의 문으로 향하게 됩니다. 작은 문에서는 하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왼쪽 아래에서 술 따르는 이, 빈대떡을 받아들고 손가락까지 빠는 어린아이, 그리고 문짝을 떼어 받침으로 사용하여 음식을 나르는 이, 식탁에 옮기는 이들을 지나 다시 신부에게 닫습니다. 브뤼겔이 농부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들에 대한 진솔하고, 깊은 애정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묘사한 농부들의 표정과 다소 퉁퉁하게 부풀린 옷은 그들을 어리석게 보이게도 합니다.

 

도22 피터 브뤼겔 <농부의 결혼>, 1568년경,
나무패널에 유채, 114×164cm, 빈, 미술사 박물관
 
 
 
 

 

그의 그림은 유머러스하고 웃음을 자아냅니다. <장님들의 우화>(도23)를 봅시다. 장님들이 장대로 서로를 의존하며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맨 앞의 장님이 개울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자 그 다음 사람은 함께 넘어지려 하고, 그 다음 사람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맨 뒤의 사람은 넋 놓고 쫓아오기만 합니다. 맹인들의 이 멍청한 행동에 우리는 웃음이 나오지만 이러한 멍청함이 맹인들뿐이겠습니까. 브뤼겔은 아마 아무 판단을 못한 채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로 쫓아만 가는 우매한 인간사를 비유했는지도 모릅니다. 웃음의 화살은 우리에게 되돌아와 인간사에 대한 비유로 변하게 됩니다. 그의 유머는 오히려 교훈적입니다.

도23 피터 브뤼겔 <장님들의 우화>, 1568년, 캔버스에 템페라
86×154cm, 나폴리, 국립미술관
 
 
 
 

 

마지막으로 풍경화 한 점을 보겠습니다. 그의 그림 <겨울 사냥꾼>(도24)은 눈 덮인 겨울, 사냥을 끝내고 마을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온 세상은 눈으로 덮인 스산한 겨울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바쁩니다. 불을 지피고, 멀리 언 밭에서는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습니다. 흰눈과 대조되는 짙은 밤색 실루엣의 인간 형상들은 뒷면으로 그려지고, 멀리 보이는 사람들은 개미 같습니다. 브뤼겔이 조감도의 방법으로 풍경화를 그리는 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 같습니다. 이 방법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보이게 하기 보다 무수한 자연물 속의 피조물로 객관화시키고 있으니까요.

도24 피터 브뤼겔 <겨울 사냥꾼>, 1565년
나무패널에 유채, 117×162cm, 빈, 미술사 박물관
 
 
 
 

 

브뤼겔의 출생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에 대한 초기의 연구에서는 농촌의 삶을 많이 그린 점에서 그도 농부출신일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위 세 작품의 설명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농부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민에 대한 슬프기까지 한 이러한 성찰은 높은 지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는 아마 당시 지성인들과 교류한 도시 출생의 화가일 것이라는 요즘의 학설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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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르네상스미술에서 북유럽(지도)이라고 일컫는 지역은 알프스 산맥 북쪽을 말합니다. 현대의 벨기에와 네델란드 지역인 플랑드르와 독일지방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번 주제3에서는 플랑드르 지역의 15세기 미술을 살펴보겠습니다. 플랑드르 지방은 모직공업과 국제 무역으로 경제활동이 크게 부흥하였고 이와 함께 부유한 시민계급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의 주문으로 이루어진 미술은 이전 귀족 계급의 미술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면서 종교화임에도 현실이 사실적으로 반영된 새로운 미술을 발달시켰습니다. 이 시대의 이탈리아 회화는 원근법이나 명암법, 고전의 발견 등 이론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회화의 가치를 높인 반면 플랑드르 회화는 여전히 고딕전통을 오래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사회는 신흥 시민계급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분이 중요한 정치구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나 광장과 같은 대중공간을 위한 거대한 규모의 미술품이 제작된 데 반해 정치적인 힘보다는 실질적인 경제력이 우선하였던 플랑드르 지역의 미술은 비교적 소품이며, 사적이고, 친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15세기 초 귀족미술의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는 것은 이 시대 미술을 아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지만 이후 시민계급미술이 얼마나 혁신적인지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플랑드르 출신의 필사본 화가 랭브르 형제(Limbourg Brothers, Herman, Jean, Paul: 1370/80년경-1416년)는 베리 공작(Duc de Berry)의 미술품 제작에 종사했습니다. 그들이 공작을 위해 그린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도1,2)는 크기가 22.5×13.6cm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기도서로써 12달의 생활을 글과 그림으로 나타낸 책입니다. 그 중 5월은 사랑의 축제로 그려졌습니다(도1,2). 5월의 색채인 녹색 옷을 입은 여인들과 호화로운 옷을 입은 남자들이 야외로 나가고 있으며 그들의 앞에는 음악대들이 축제의 흥을 돋우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 1400년과 1410년에 결혼한 베리공작의 딸과 아들인 듯하여, 멀리 보이는 城은 그들이 결혼식을 행하였던 파리의 시테궁(Palais de la Cite) 이라고 짐작됩니다.

 

도1 랭브르 형제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 5월
1412-16년, 필사본 그림, 22.5×13.6cm
샹틸리, 콩데 박물관
 
도2 도1의 부분
 
 
 
도3 랭브르 형제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 9월
1412-16년, 필사본 그림, 22.5×13.6cm
샹틸리, 콩데 박물관
 
도4 도3의 부분
 
 
 

9월은 포도수확이 한창인 과수원과 그들의 주인이 살고 있는 하얀 성(城)으로 그려졌습니다(도3,4). 포도를 따고, 게걸스럽게 먹으며, 마차에 실어 나르는 농노들의 모습은 그로테스크 할 정도여서 5월에 묘사한 아름다운 궁정인들과 너무나 큰 대조를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둬들인 수확물은 모두 城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성벽으로 굳게 둘러싸인 하얀 성은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귀족과 농노계급으로 대변되는 중세 말의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지요. 5월의 장면에서 본 바와 같은 이 시대의 화려한 궁정미술을 우리는 국제 고딕양식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플랑드르 지역의 새로운 종교화로 들어가 봅시다. <메로데 제단화>(도5)는 1427년경에 제작되었으니, 앞에서 본 기도서 그림과는 15년 정도 밖에 차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부유한 시민이 주문한 이 그림은 비현실적으로 미화된 귀족 주문의 필사본 그림과는 달리 매우 생생한 도시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플랑드르 화풍을 연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년경-1444)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세 폭의 제단화 중에서 가운데 수태고지 장면부터 보도록 합시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를 낳을 것을 알리고 있는 장면이죠. 마리아가 있는 방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창문은 위 아래를 따로 열 수 있는 방식이며, 나무로 된 천장은 격자로 엮어져 있습니다. 물을 담는 커다란 포트 옆엔 면 수건이 걸려 있고 마리아 앞의 테이블엔 화병에 꽃이 꽂혀 있습니다. 마치 이 시대 가정집의 내부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치 집안 살림도구와 같은 이들 소품들은 또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청동제 그릇에 담긴 물과 화병에 꽂힌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지요.

도5 로베르 캉팽 <메로데 제단화>, 1427년경, 나무패널에 유채, 64.1×117.8cm
뉴욕,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
도6 도5의 부분
 

 

오른쪽 패널엔 목수일에 열중하고 있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그려져 있습니다. 수태고지에 요셉을 넣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요셉과 함께 있는 여러 공구들은 예수 수난에 많이 등장하는 도구들이어서 오른쪽 패널은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이 광경 또한 당시의 목공작업실 같습니다. 그리고 창 너머엔 꼭대기 층을 삼각형으로 한 북유럽 특유의 집들이 빽빽한, 바쁜 도시의 풍경이 참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었습니다(도7,8).

 

도7 도5의 오른쪽패널 부분
도8 도7의 부분
 
 

왼쪽에서 무릎꿇고 있는 이들은 이 그림의 주문자 잉겔브레히트(Peter Engelbrecht)부부입니다. 당시의 부유한 시민계급들은 귀족들을 모방해서 미술품들을 주문하였는데, 귀족들은 필사본이나, 금속공예품과 같은 값비싼 매체들을 주로 주문한데 반해서 이들은 제단화라는 매체를 선호했습니다. 제단화는 값이 쌀 뿐 만 아니라 그림의 장면에 자신들의 실제 모습을 넣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림에 자신들의 집이나 생활도구들을 넣을 것을 계약서에 명시하였다고 합니다. 제단화는 신흥 브루주아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매체였으며, 이들의 요구는 마치 현장을 그대로 살린 듯한 사실적인 회화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캉팽의 제자인 얀 반 아이크(Jean Van Eyck: 1395-1441)는 캉팽의 회화방식을 이어받아 플랑드르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린 <롤랭 수상의 성모상>(도9)에서는 주문자가 아예 그림의 안으로 들어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니콜라 롤랭(Nicolas Rolin: 1376-1462)은 브르고뉴 공국의 3대 공작인 선량공 필립(Philippe de Bon)의 수상으로 부르고뉴 공국의 정치, 경제, 외교의 권력을 거머쥐었던 권력자였지만 그는 부유한 시민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얀 반 아이크의 이 그림을 X-레이로 촬영한 결과 롤랭수상은 돈주머니를 차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림이 진행되는 동안 이 돈주머니는 지워졌지만 그러나 그의 부(富)는 그림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도9 얀 반 아이크 <롤랭수상의 성모상>
1436년,나무패널에 유채, 66×6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0 도9의 부분
 
 
 
 

롤랭수상은 보관을 받고 있는 성모에게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으며 아기 예수는 그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있는 방은 세 개의 아취로 이루어진 아케이드로 열려있으며 바닥엔 대리석 타르시에가 깔려있고 기둥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는 담비털을 가장자기에 두른, 다마스커스산 모직 외투를 입고 있는데 이러한 외투는 당시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고 합니다. 부의 과시는 정원으로 이어집니다. 정원엔 백합과 아이리스 그리고 중국산 작약이 심겨있고 희귀한 공작까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소품들은 종교적인 상징이기도 하였습니다. 백합은 순결을, 아이리스는 고통을, 가시 없는 장미인 작약은 원죄 없이 잉태한 성모를, 공작은 부활을 나타내던 도상이니까요. 그리고 중경이 거의 없이 이어지는 원경은 강 양쪽의 도시와 롤랭의 영지를 연상시키는 포도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제단화에서는 주문자가 아직 작은 크기로 묘사되었던 시대에 플랑드르에서는 이렇게 주문자를 그림의 주역으로 크게 등장시키는 것은 참으로 대담한 개인의 선전이었습니다.

 

 

 

부유한 상인들은 독립된 초상화도 주문하였습니다. 반 아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도11)의 주인공 죠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와 그의 부인 죠반나 체나미(Giovanna Canami)는 모두 이탈리아의 루카(Lucca)출신으로 브루주(Bruges)에 정착한 이후 가장 성공한 은행가였습니다. 아마 이러한 신흥시민들은 자신들의 고상함이나 신비감, 그리고 신앙심을 보여주기 위해 초상화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단정한 자세의 부부는 갈색톤을 배경으로, 매우 성실하게 그려져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그림은 세속적인 관심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선 아르놀피니는 값비싼 모피코트를 입고 있으며 창가엔 수입산 오렌지가 놓여있고, 침대 밑엔 아나톨리아(현재의 터키)산 융단이 깔려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소품들은 물론 상징의 역할을 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강아지는 믿음을 상징하며 하나만 남은 샹들리에의 불빛은 이들의 결혼을, 그리고 침대의 붉은 색은 사랑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도11 얀 반 아이크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
1434년, 나무패널에 유화, 82×60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도12 도11의 부분
 
 
 
 
 
 

이 그림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배경에 볼록거울을 배치한 반 아이크의 창조성이었습니다(도12). 두 인물이 있는 방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공간적인 제약을 받게 되어있는데 반 아이크는 배경에 볼록거울을 놓음으로써 천장과 바닥, 창문 밖의 풍경에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습니다. 거울의 더욱 중요한 역할은 이 두 부부 앞에 있었을 화가 자신을 넣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거울 위 벽면에 "얀 반 아이크가 여기에 있었노라. 1434년"이라고 서명함으로써 반 아이크는 자신의 존재를 그림 속에 확실히 하였습니다.

 

 
 

이 거울 속의 화가 이미지와 서명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을 증명하는 증인으로서의 화가라는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회화 안에 자신을 넣으려는 화가 자신의 존재증명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시대에 부각되고 있던 화가의 자의식의 발달을 염두에 둔다면 두 번째 의미가 더 잘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시대 화가들은 회화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참으로 많은 노력을 하고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는 북유럽의 회화, 특히 반 아이크의 그림을 보면 항상 감탄하는 점이 있습니다. 모피의 털은 만지면 미끄러질 듯 윤기 있고 부드러우며, 샹들리에는 진짜 금속을 반짝이게 닦아 놓은 것 같으며, 거울 왼쪽의 묵주는 투명한 보석처럼 영롱합니다. 이렇게 물질의 질감을 그대로 묘사하려는 사실주의는 아마도 새롭게 태어난 시민계급의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에 크게 호응하는 취향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상징의 이중성, 그리고 주문자의 강조는 15세기 후반 후고 반 데르 고스(Hugo van der Goes: 1440-82)의 그림에서도 더욱 매력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놓여있던 세 폭 제단화는 평소에는 양 날개패널을 닫아놓았다가 미사나 특별한 행사 때 열게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엔 마치 대리석 조각 같은 도13의 모습으로 놓여 있다가 행사 때는 도14의 화려하고 장대한 광경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의 전개는 성경이야기의 전개와 맞물립니다. 즉 수태고지를 바라보고 있다가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이를 바라보는 관람자는 주변의 목동과 주문자 가족, 그들의 수호 성인과 모두 함께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13 후고 반 데르 구스 <포르티나리 제단화> 양쪽 패널을 닫았을 때의 모습
1475-76년경, 253×282cm, 피렌체, 우피치
 
 
 
 

펼쳤을 때의 모습(도14)을 봅시다. 원근법적인 회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일관성 없는 인물의 비례에 당혹감을 느낄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거대한데 앞에 있는 천사는 작으며, 이들의 뒤에 있는 목동은 또 다시 크게 그려졌습니다. 양 옆 날개 패널의 앞 부분에 그려진, 이 그림의 주문자 포르티나리 가족은 작고 그들 뒤에 그려진 이들의 수호성인들은 거대합니다. 그리고 원경으로 이어지는 배경의 인물들은 또 다시 아주 작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보다 반세기 전에 그려진 얀 반아이크의 <롤랭수상의 성모상>(10주 주제3, 도9)에서 후원자가 크게 그려진 것과 비교한다면 이 그림은 마치 중세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줍니다.

도14 후고 반 데르 구스 <포르티나리 제단화> 양쪽 패널을 펼쳤을 때의 모습
1475-76년경, 나무패널에 유채, 가운데 패널 253×304cm, 양쪽 패널253×141cm, 피렌체, 우피치
 
 

그러나 대상의 묘사는 놀랍도록 사실적입니다. 배경의 쓸쓸한 풍경은 플랑드르의 늦가을을 연상케 하며 수호성인과 주문자 가족은 부유한 시민계급의 세련된 차림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 그림에서 우리의 눈을 경이롭게 하는 부분은 아마 목동들의 모습일 것입니다(도15).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다 단정히 경배하는데 그들만은 거친 들판에서 일하다가 막 뛰어온 듯한 순간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의 자세는 엉거주춤하며 손은 투박하고 입을 벌리며 예수를 바라보는 표정은 어리석기까지 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성인들과 주문자의 묘사와 비교할 때 이러한 서민성은 명백한 계급의 구분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우아하게 묘사한 이 특권층의 표정은 성인들마저도 모두 차갑게 굳어있는데 목동들의 표정만은 살아있는 듯 생기가 넘칩니다.

 

 

 

이 그림을 주문한 토마소 포르티나리(Tomaso Portinari)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메디치 은행의 브루주(Bruges)지점장이었습니다. 그는 플랑드르 회화에 큰 매력을 지니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이 제단화를 피렌체에 있는 싼타 마리아 누오바 교회(Santa Maria Nuova)의 성 에지디오(Sant'Egidio)제단에 놓으려고 주문하였는데 완성된 해에 바로 피렌체로 옮겨갔으니까요. 이 그림은 곧 피렌체 화단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는 우리가 8주의 주제2에서 살펴 본 사세티 예배실(8주 주제2, 도11,12)을 제작하면서 플랑드르의 3폭 제단화에서와 같이 주문자를 대담하게 양쪽에 배치하고, 목동들의 모습을 그리는데 후고 반 데르 구스의 방법을 적극 응용하였습니다. 인물의 형태에 이상적인 유형을 추구하던 피렌체 화단에서 후고의 이러한 리얼리즘은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도15,16).

 

도15 도14의 목동부분
 
 
 
도16 기를란다이오 <목동들의 경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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