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17세기(지도)의 회화, 조각, 건축을 일컬어 '바로크' 시대의 미술이라고 합니다. '바로크'라는 용어의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 다른 설명이 있겠지만, 스페인의 금세공사들이 형태가 비틀어진 큰 진주를 부르던 데서 연유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말의 속뜻은, 무엇인가 귀한 것이 과장되고 왜곡되어 그 원래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기 두 개의 작품이 있습니다. 하나는 16세기 라파엘로의 <성가족>(도1)이고, 나란히 있는 것은 17세기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작품입니다(도2). 더 없이 고요한 르네상스기의 그림과 비교해 볼 때 루벤스의 작품은 대단히 격렬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균형과 조화를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평가하였던 고전주의 미학의 관점에서 볼 때 루벤스의 그림은 지나치게 과장되고 소란스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는 17세기 회화 뿐 아니라 조각이나, 건축에도 적용되었으며, 그래서 후대의 감식가들은 17세기의 미술을 경멸하는 의미로 바로크라 불렀습니다.

 

도1 라파엘로 <성모자>
1507년, 캔바스에 유채, 122*80cm
 
 
도2 루벤스 <뤼시퍼스 딸들의 납치>
1618년 경, 캔바스에 유채, 224*211cm
 
 

이러한 17세기의 미술을 르네상스의 고전문화의 쇠퇴가 아닌 독자적인 미술로 인정하고 이시기의 다양성이 새롭게 발견된 것은 근래에 와서입니다. 20세기초 뵐플린과 같은 미술사가의 연구는 바로크 미술을 다시 보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미술의 대가로 의심치 않는 벨라스케스 램브란트의 명성도 사실 현대에 와서 새롭게 조명된 결과인 것입니다

유럽의 17세기 미술은 지역과 종교, 장르에 따라 매우 다채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 세계와 종교개혁이후 교황으로부터 독립한 독일, 네덜란드의 신교세계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손상되었던 교황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하늘의 무한한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 그 어떤 시대보다도 미술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이러한 반종교개혁 시기의 미술은 단순히 문맹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대신 설명하고자 하였던 중세 종교미술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아래 왼쪽그림은 반종교개혁에 앞장섰던 예수회의 본부 교회인 로마, 일제수 교회의 천장화입니다(도3). 속세의 죄로 추락하는 인간군상들 사이로 영광을 한몸에 받으며 천상의 세계를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꾸며져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천장의 건축물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조각이고 그림인지 구분할 수 없는 아찔한 천장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천국을 미리 맛보았으며, 신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받았을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이처럼 호사스럽고 연극적인 미술은 독일 로르지방 교회의 제단 장식에서 더욱 놀라운 장면을 연출하기에 이릅니다. 제단에서 벌어지는 성모의 날렵하고 화려한 승천의 모습은 물질감이 느껴지지 않아 마치 눈앞에서 환영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도4).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효과를 위해서 모든 시각적인 표현 기법들을 총동원하였던 것입니다.

 

도3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그리스도의 승천 >
1672-1672년,프레스코, 로마 일제수 교회의 천정화
 
 
 
도4 퀴린 아잠 <성모승천>, 1717-25년
바르바리아 로르 순례자교회, 대리석과 치장벽토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신교 국가들, 즉 북부독일이나 네덜란드인들은 교회의 제도나 교리보다는 성서의 말씀에 더 의지하였으며, 신의 소명을 받들어 청빈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구원의 열쇠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또한 교회에 하느님의 모습을 본뜬 그림이나 조각을 안치하는 것을 우상숭배라 여겼습니다. 17세기 신교지역에는 로마의 교황이나 프랑스의 군주처럼 절대적인 권력과 부를 지닌 미술의 후원자도 없었으며, 우상숭배 논쟁이 있은 뒤로는 더 이상 제단화나 교회의 장식 주문도 없었습니다. 피터 산레담(Peter Janse Sanredam)이 그린 유트레히트의 교회모습과(도5) 하를렘 <성 바보교회의 실내>(도6)는 검소하고 아무 장식도 없이 밋밋한 네덜란드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교회와는 매우 대조된 모습이죠. 대신 이 지역의 미술가들은 새롭게 부상한 소상인들의 취향에 알맞은 작은 풍경화나 정물화, 그리고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것들을 미술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판매해야 했습니다(도7,8). 우리는 신교세계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미술체제가 탄생하게 됨을 목격하게 됩니다.

 

도5 산레담 <유트레히트 성 마리아교회>
1662년, 캔바스에 유채, 109.5*1395,cm
 
 
 
도6 산레담 <하를렘의 성 바보 교회의 실내>
1660년, 나무패널에 유채
 
 
도7 호베마 < 미들하니스의 오솔길 >
1689년, 캔바스에 유채, 103.5*141cm
 
 
도8 아버캄프 < 겨울 >
1610년 경, 캔바스에 유채
 
 
 
 

북유럽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교황에 버금가는 막강한 힘을 지닌 세속 군주가 등장합니다. '짐이 곧 태양'이라 했던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가장 먼저 절대왕정을 확립하였으며,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군주들은 그러한 프랑스를 뒤쫓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왕궁들을 건설하는데,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은 그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과시적인 초상화나 기마상을 제작하기를 즐겼습니다(도9,10).

 

도9 프이 르 보, 망사르 < 베르사이유 전경 >, 1669-1685년
 
 
 
도10 리고 <루이 14세의 초상 >
1701년, 캔바스에 유채, 279×190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당시 최고의 솜씨를 자랑하던 루벤스는 프랑스 왕실의 사건들을 신들의 이미지에 뒤섞어 그림으로써 권력자들을 미화하는 궁정장식의 그림을 수없이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출신의 프랑스 왕비가 마르세이유 항구에 도착하는 장면을 그린 루벤스의 아래 기록화는 바로크 시대 미술이 권력자들을 미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습니다(도11). 19세기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왕과 귀족들의 무제한의 사치와 영광의 뒤에서 점차 계몽의식이 싹트고 근대적 개인들의 자각이 준비되었을 것입니다.

 

도11 피터 파울 루벤스 < 마르세이유 항의 도착>
1621-25년, 캔바스에 유채, 394×295cm
 
 
 
 

우리는 로마 교회의 장중하며 사치스러운 장식과 프랑스의 궁정미술 그리고 네덜란드의 소박하지만 그들의 생활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담긴 회화들을 17세기 미술에서 동시에 만나게 됩니다. 바로크 미술이 펼쳐 보이는 이러한 다양성이야말로 미술이 당대의 사회, 정치와 어떻게 맞물려 이루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일 것입니다.

바로크 미술의 새로운 분위기는 16세기 말 로마에서 시작됩니다. 1520년대 이후 유럽을 풍미하였던 매너리즘은 점차 기발한 효과와 세련된 솜씨를 뽐내며 자연과 고전적인 미의 이상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16세기가 끝나갈 무렵 일부 미술가들은 이러한 미술에 싫증을 느끼고 이전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적 이상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 출신의 아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는 당시 이러한 경향을 대변합니다. 그는 한세기 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그리고 코레지오의 미술을 완벽한 고전미술의 정수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옛 대가들의 장점들을 잘 섭취하여 재구성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한 목적을 위해 그는 일찍이 동생, 아고스티노 카라치, 조카, 루도비코 카라치와 함께 볼로냐에 아카데미를 세우고 제자들을 키웠습니다. 카라치의 명성이 높아지자 로마의 파르네제 추기경은 자신의 아름다운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그를 로마로 불러들입니다. 아래 보시는 왼쪽 파르네제 궁전의 천장화가 바로 그것입니다(도12).

 

도12 아니발레 카라치, 로마 팔라초 파르네제 궁 천장화
1557-1601년
 
 
도13 미켈란젤로, 로마 바티칸 시스틴 예배당 천장화
1508-1512년, 프레스코
 
 
 
 

카라치는 20미터에 이르는 회랑의 반원형 천장(배럴 볼트)을 신들의 사랑의 이야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는 길게 천장을 삼등분하고, 거인족(아틀란티드)은 건축물처럼 회색으로 그리고 그 앞에 미덕을 의인화한 알레고리들을 실제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렸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벽화를 연상하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카라치가 제작한 파르네제 가문의 천장화를 90년전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여겼습니다(도12,13,14,15).

도14 카라치 < 비너스와 안티시스 >
1577-1601년, 로마, 팔라초 파르네제 천장화
 
 
도15 미켈란젤로 <낙원추방>, 바티칸, 시스틴 예배당 천장부분
 
 
 
 
 

카라치는 미켈란젤로를 모범으로 삼았는가 하면, 티치아노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들도 염두에 두었습니다. 천장의 가장 중심을 차지하는 그림인 <바커스와 아리아드네의 승리>가 보여주는 밝은 색채와 활기찬 움직임의 흥분된 분위기는 베네치아 대가들의 솜씨와 흡사합니다(도16,17).

 

도16 아니발레 카라치, <바커스와 아리아드네의 승리>
1600년경, 로마 파르네제 궁 천장화
 
 
도17 티치아노 <바커스와 아리아드네 >
1528-24년, 캔버스에 유채, 175*190cm
 
 

당시 카라치의 미술은 로마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으며 그를 따르는 게르치노, 귀도 레니 같은 화가들이 속속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미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독창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전기의 미술을 모범으로 삼아 그것을 끊임없이 모방하며, 다른 대가들의 양식을 절충하는 카라치의 방식을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교훈을 중시하는 고전미술은 17세기 이탈리아 미술에 새로움을 불어 넣으며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처럼 보였던 매너리즘 미술을 다시 한 걸음 진행할 수 있게 하였던 큰 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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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8주부터 지금까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이러한 미술품을 제작한 화가나 조각가 또는 건축가들은 어떻게 미술을 배우고 사회적으로는 어떤 지위에 있었을까요. 14세기 초에서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250여 년 사이에 미술인들의 지위는 장인에서 예술가로 승격되었습니다. 14세기 중엽의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 1290년경-1348)가 지오토의 종탑에 새긴 <조각>(도1)을 보면 조각가의 모습을 돌을 쪼아 인물상을 만들고 있는 수작업 광경으로 나타낸데 반해 16세기 중엽의 조각가 바치오 반디넬리(Baccio Bandinelli: 1493-1560)는 자신을 깨끗한 스튜디오에서 작품구상의 데생을 가리키고 있는 귀족적인 모습의 작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도2). 화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안드레아 피사노의 <회화>(도3)에서는 제단화를 그리고 있는 제작실의 화가인 반면 16세기 중엽의 조르지오 바자리(Giorgio Vasari: 1511-1574)는 <자화상>(도4)에서 붓을 들고 있는 것으로 화가임을 암시할 뿐, 품위 있는 의상에 금목걸이를 하고있는 귀족의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50여 년 동안 미술가는 장이에서 귀족적인 예술가로 변모한 것입니다.

 

도1 안드레아 피사노, <조각>
1334-1342년, 부조
피렌체. 델오페라 델 두오모박물관
 
도2 바치오 반디넬리, <자화상>
1530년, 유화
보스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도3 안드레아 피사노 <회화>
1334-1342년, 부조
피렌체, 오페라 델 두오모박물관
 
도4 조르지오 바자리 <자화상>
유화, 피렌체, 우피치
 
 
 
 

 

도5의 그림은 공방들을 나타낸 필사본 삽화입니다. 왼쪽 위부터 필사본의 필경실, 시계제조공방, 갑옷을 만드는 공방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제단화를 그리는 화가의 공방, 사람형상을 만드는 조각가의 공방, 오르간 제작자의 공방입니다. 당시의 화가나 조각가는 시계를 만드는 기술자나 갑옷을 만드는 장인들과 같은 기능공이었던 것입니다. 14세기의 기술직이나 상인들은 일종의 동업자 조합인 아르티(arti, 영어로는 guild)를 형성하였는데 조각가와 건축가는 석수장이와 목수 길드에 속해 있었으며 화가는 약재상 길드에 속해 있었습니다. 조각가와 건축가는 모두 돌이나 나무를 다루는 기술자이며, 화가는 약재상 같이 식물이나 광물질로 된 안료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도5 필사본, 1450년경. 모데나, 비블리오테카 에스텐세,
이 미니어처는 水星의 영향아래 있는 작업들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화가나 조각가들은 공방(이탈리아어로 보테가 bottega, 영어로는 work shop)을 운영하면서 조수와 견습공들을 두었습니다. 공방의 주인을 마에스트로(이탈리아어 maestro, 영어 master)라고 하였죠. 화가나 조각가가 되기 위하여는 마에스트로 밑에 들어가 3-4년은 청소와 안료제작, 공구관리들을 하면서 눈으로 익히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차츰 마에스트로의 기술을 익혀 배경이나 덜 중요한 부분들을 그리고, 점차 옷이나 사물들을 그릴 수 있는 조수가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자기의 공방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마에스트로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10-12년의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14세기 후반 조합이 커지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원래 모두가 수공예가에 속했던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세계도 기능공과 예술가로 분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능공이나 예술가들의 대부분의 활동은 여전히 공방에서 이루어졌으나 공방, 즉 보테가의 규모와 성격은 모두 달라서 작은 방 하나짜리부터 주문 없이 그린 그림을 상설 전시하는 전시실을 갖출 정도까지, 보테가 주인의 예술적인 능력과 재력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습니다. 물론 작가의 유명세나 작품의 수준에 따라 가격차이도 많아서 거의 자유시장에 가까웠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접어 들면서 조합을 통해 주문 받는 예는 현격히 줄어들고, 이름을 얻은 예술가들은 귀족이나 공공기관으로부터 직접 개인적으로 주문을 받았습니다.

 

 
 

 

회화와 조각, 건축이 기능적인 수준에서 지성을 갖춘 예술의 수준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론의 뒷받침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가능케 한 사람은 단연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입니다. 15세기 전반에 알베르티는 미술을 자유인문학(liberal arts)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실로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알베르티는 그의 『회화론De pictura』(1436)에서 '현대 미술가'는 기하학과 원근법 그리고 구성의 법칙에 능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영혼의 움직임'은 '몸의 움직임'에 의해 나타나므로 인체 해부학의 필요성도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기하학을 이용한 線원근법을 발달시킴으로써 공간을 과학적으로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미술을 수학과 기하학에 접근시킴으로써 미술은 더 이상 기능이 아니고 자유 인문 영역에 속하게 한 것입니다.

 

 
 

 

화가나 조각가가 장이로 취급되었던 것은 손과 육체를 사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미술의 格이 높아지기 위하여는 육체노동임을 부정하고 고도의 정신노동임을 증명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16세기까지 진행된 미술이론의 과정은 이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은 논의들 가운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미술이론은 이러한 과정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는 『회화론』에서 회화와 과학, 회화와 詩, 더 나아가 회화와 조각을 비교하면서 회화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비교는 매우 구체적이고 논리적이었지만 언제나 회화의 우위를 증명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구체적인 경험과학의 하나로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회화를 특징짓는 공기 원근법, 스푸마토(sfumato)등의 기법은 모두 회화를 구체적인 과학탐구로서 지향한데서 얻은 회화적인 기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회화를 과학의 수준에 놓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이를 넘어 회화의 우수성을 논합니다. 즉 과학은 量의 문제를 다룰 뿐 회화가 나타내는 質의 문제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또한 회화는 詩와 인문학보다 우수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회화는 말이 없는 詩이며, 詩는 보지 못하는 회화이다." 다시 말해 회화는 視覺을 통한 예술이요, 詩는 언어와 청각을 통한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다시 "장님과 벙어리 중 누가 더 버림받은 괴물(dannoso monstro)이겠느냐?"라고 물으면서 매우 집요하게 회화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중엽엔 미술의 이론적인 논의가 어느 때보다 왕성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회화와 조각의 비교 우위론은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우열의 기준을 어느 것이 정신노동에 가까운가에 놓던 지금까지의 쟁점을 새로운 관점으로 전환시켰습니다. "내 생각엔 회화는 부조에 가까울수록 좋은 것 같고, 부조는 회화에 가까울수록 나쁜 것 같다고 말하겠다. 그러나 내 생각엔 조각은 회화의 등불 같으며 서로 해와 달의 차이 같다. 만약 정확한 판단력(maggioregiudizio)과 제작의 어려움(difficulta)때문에, 여러 장애요인(impedimento)과 힘든 노동(fatica) 때문에 훌륭한 품격(maggiore nobilta)을 지닐 수 없다면 회화나 조각은 마찬가지 입장이다. 둘 다 같은 知性(intelligenza)에서 나오므로 둘이 평화로이 지낼 수 있으니 논쟁들은 이제 그만두자."

 

 
 

 

미켈란젤로는 제작의 어려움이나 장애요인, 힘든 노동들은 회화나 조각이 품격을 지니는데 하등 방해요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천함과 고귀함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궁극의 목적이 천하면 노동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며, 궁극의 목적이 품위 있으면 반대로 노동 또한 품격이 높아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물체를 초월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知性(intellettuale)의 비전에 따라 움직이는 손에 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유명한 詩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도…」는 육체노동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매우 정확하게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도 관념을 가질 수는 없으며, 대리석 또한 덩어리가 충만해도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으니 知性을 따르는 손에 의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미켈란젤로에게 있어서 손노동은 더 이상 추한 것이 아니고 지성의 모습을 구체화하는 구현자인 것입니다.

 
 

 

16세기 중엽 그림, 조각, 공예 등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미술가는 아직 보테가에서 일하며 길드에 소속되어 옛 방식의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강의에서 거론한 소수의 예술가들은 '기능인'과 자신들이 속하는 '지성적인 예술가'를 구분하였습니다. 그러면 기능인과 예술가를 차별 짓는 '지성'은 어떠한 과정으로 작품에 나타날까요.

 
 

 

16세기 미술이론을 주도한 바자리는 이를 '디세뇨(disegno)'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디세뇨'는 현대에서 쓰고 있는 소묘라는 의미의 데생(dissin)과 상업미술계에서 사용하는 디자인(design)이라는 용어의 어원이지만 그 뜻과 사용에는 현재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 이탈리아語에서의 디세뇨(disegno)는 '그리다', '구상하다', '계획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disegnare'의 명사형이며 지금도 '소묘', '도안', '설계도'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자리가 사용한 '디세뇨'는 이 의미들을 모두 함축하고 있습니다. 개념이 손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을 '디세뇨'라 이름한 것으로 건축의 도면, 조각을 위한 스케치나 소묘, 회화의 밑그림 등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그는 건축, 조각, 회화, 모두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다 사용하는데 정신작용은 디세뇨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구체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디세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미술을 지성적인 미술(arte intellettuale)이라고 부르며 반대로 디세뇨의 과정 없이 기능적인 재주로만 만들어지는 미술을 기능적인 미술(arte meccanico)이라고 구분 지웠습니다.

 
 

 

미술가는 이렇게 미술을 이론화시킴으로써 노동자 계급임을 거부하고 장이에서 지성적인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물론 소수의 미술가만이 이론을 論하며 엘리트층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1562년 설립된 디세뇨 아카데미아(Accademia del Disegno)는 그들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디세뇨 아카데미아는 바자리의 디세뇨論을 교육의 場으로 제도화한 것이었습니다. 해마다 명성 있는 건축가, 조각가, 화가 한 명씩을 초청하여 재능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던 이 아카데미아는 현재와 같은 정규 교과과정을 가진 교육체제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15-16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미술의 변화를 확인시키고 제도화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큰 의의는 작가들의 사회적 소속의 문제입니다. 길드는 같은 직업인이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사회적인 보호를 받고자 하는 직업인의 이익단체이지만, 아카데미아는 엘리트를 교육하고, 문화활동을 주관하는 일종의 문화단체였으니 그 차이는 참으로 큰 것입니다.

 
 

 

주제3의 시작부분에서 예로 든 반디넬리의 <자화상>(도2)과 바자리의 <자화상>(도4)을 다시 보면 많은 내용이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반디넬리는 검은 옷에 그의 작위, 산티아고 수도회 기사(Cavaliere dell' Ordine di Santiago)의 마크인 조개 형태 안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 귀족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른쪽 아래에 깨다 만 대리석 덩어리로 자신이 조각가임을 암시할 뿐 그가 자랑스럽게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준비 작업인 소묘입니다. 그를 귀족이게끔 한 것은 그의 본업인 조각이 아니라 돌에 옮기기 위한 구상인 소묘, 즉 디세뇨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바자리의 <자화상>또한 오른손에 붓을 집어 화가임을 나타내었을 뿐 궁정인의 옷에 금목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붓을 들고 작업하고 있는 화가라면 어깨와 소매가 넓은 귀족의 옷을 입고 있을 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바자리 또한 왼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건축의 도면, 즉 디세뇨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14세기까지만 해도 장이의 신분이었던 화가와 조각가가 16세기 중엽에는 지성적인 예술가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위하여 손노동임을 부정하고 정신노동임을 강조하는 화가와 조각가의 이론화 작업은 실로 끊임없는 투쟁이었습니다. 그 결과 미술은 자유 인문학과 같이 고상한 수준으로 상승하고, 미술가는 궁정인에 이르는 신분상승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소속도 직업조합인 길드에서 엘리트들의 문화, 교육기관인 아카데미아에 속하는 변화를 갖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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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 생각이 나서 퍼 왔습니다. 조금 닮지 않았나요? 아주 쪼끔이라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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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1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주하가 저렇게 예쁘게 커주면 좋으련만.....
고슴도치 엄마 눈에는 닮은 것 같은데요.
판다님, 너무 고마워요. 히히 퍼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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