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바로크시대(지도) 회화의 놀라운 변화는 이탈리아 북부 출신의 화가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1609)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아니발레 카라치와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지만 고전주의의 고상함을 따르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본 것에 의지하여 추하더라도 현실을 그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카라바지오의 리얼리즘을 일반적으로 '자연주의'라 부릅니다.

카라바지오는 밀라노 근처의 롬바르디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이 곳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보다 북유럽 사실주의의 영향이 강했던 곳이었습니다. 초기에 카라바지오는 이곳에서 정물화나 장르화를 주로 그렸습니다(도1).

 

도1 카라바지오 < 과일바구니 >, 31x47 cm
밀라노, 피나코데카 암브로지아나도
 
 
도2 카라바지오 < 바커스 >, 1596년 경
캔버스에 유채, 95x85cm
피렌체, 우피치박물관
 

포도넝쿨로 관을 만들어 쓰고 포도주 잔을 건네는 그림의 주인공은 고대와 르네상스시대에 즐겨 다루어졌던 주신 바커스가 분명합니다(도2). 그러나 볼이 발그레한 이 이탈리아의 소년은 어쩐지 신화 속의 불멸의 신이기보다는 분장한 어린 모델 같습니다. 게다가 소년은 우리의 응시를 의식하고는 미묘한 눈길을 던지며 넘칠 듯한 포도주를 권하기까지 합니다. 소년이 조심성 없이 받쳐든 투명한 잔이 떨어진다면 아마도 포도주가 관객들에게 쏟아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화면에 바짝 다가앉은 주인공의 시선과 내민 팔은 관객의 공간을 침범하기 때문에 보는 이들은 이 그림을 편안하게 감상하기 어렵습니다. 이같은 세밀한 관찰에 바탕을 둔 카라바지오의 자연주의는 압축된 공간과 강렬한 빛으로 보는 이들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획기적인 표현방식을 구사하였습니다.

 

 

아래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장면을 그린 <엠마우스의 저녁식사>는 카라바지오의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한 제자는 경이로움에 우리쪽으로 의자를 반쯤 밀치며 일어나고 있으며, 베드로의 뻗친 팔은 화면을 뚫고 나오는 것 같습니다. 식탁의 모서리에 비죽 나온 접시는 이러한 극적인 장면을 더욱 긴박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화면의 긴장감은 강렬한 빛의 사용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어둠속에서 예수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듯한 빛은 어떠한 소란한 설명보다도 훨씬 웅변적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자연의 빛이 아니라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3 카라바지오 <엠마우스에서의 식사 >, 1601-02년
139x195cm, 런던, 국립박물관
 
 
도4 카라바지오 < 엠마우스에서의 식사 > 도3의 부분
 
 
 
 
 

카라바지오는 성격이 난폭하고 다혈질이어서 늘 다툼을 일으켰지만 그의 종교화는 인기를 끌었습니다. 밀라노를 떠나 로마에 온 카라바지오는 성 프란체지 교회의 콘타렐리 가족예배실 제단화(도5)를 주문 받아 본격적인 종교화를 그리게 됩니다. 아래 사진은 콘타렐리 예배실의 광경입니다.

 

도5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교회
콘타렐리 예배당 실내
 
 
 
 
 

카라바지오는 이곳에 복음서가 마태의 세가지 사건, 즉 예수의 부름을 받고, 천사의 인도로 복음을 남겼으며, 마지막에 순교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기독교에서 성인들을 고귀하고 품위 있게 묘사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라바지오는 성인들을 그리는데 앞시대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맨발을 드러낸 채 의자에 엉거주춤 걸쳐 앉아 천사의 목소리를 받아 기록하는 마태는 매우 당황한 모습니다(도6). 그의 두 손은 너무 어색해서 이전에 사도들이 학식 높은 철학자로 그려졌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러나 벽화로 걸린 이 그림도 카라바지오에게는 한껏 미화시킨 결과였습니다. 주문자로부터 거절당한 첫 번째 작품에서 성인 마태는 그야말로 고집 세고 무식한 당시의 하층민처럼 묘사되었던 것입니다.

 

도6 카라바지오 < 마태의 부름 >, 1602년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교회 콘타넬리 예배당
 
 
도7 카라바지오 < 성마태와 천사 >
1602년, 2차대전에 소실
베를린 프리드리히황제 박물관
 
 
 

반종교개혁시기의 다른 벽화들처럼 화려하게 교회를 장식하는 종교화를 과감하게 거부한 또 다른 작품은 <성모의 죽음>(도8)입니다. 카라바지오는 로마의 강변에서 건진 여자의 시체를 모델로 삼아서 그렸다고 하는데, 흐트러진 머리와 옷 매무새, 퉁퉁 부은 몸과 푸르뎅뎅한 피부색까지 그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원죄 없이 태어난 천상의 여인을 이렇게 속되고 비천하게 그린 예는 미술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도8 카라바지오 <성모의 죽음>, 1606년
369x245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이 그림역시 주문자에게 거절당했는데 그러나 카라바지오가 그린 신앙인들의 모습이 비천하다해서 그가 당시 카톨릭 교회의 이념을 왜곡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생존 당시 그를 따른 가난한 무리들을 상상한다면 아마 카라바지오의 그림이 오히려 성경에 더 가까운 전달일 것입니다. 이처럼 순진한 사람들에게 체험적으로 다가오는 종교를 강조하는 것은 당시 교회의 대중화를 추구하였던 반종교 개혁의 반영이기도 하였습니다.

 

 

동성애 성향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사소한 놀이 끝에 동료를 살해한 경력과 잦은 투옥 등 곡절 많은 생애를 살았던 카라바지오는 평생 제자를 두거나 일가를 이루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도하였던 혁신은 이탈리아에서 많은 추종자를 낳았으며, 스페인, 프랑스, 플랑드르 등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래 보이는 프랑스의 지방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나, 네덜란드 유트레히트지방의 혼트호스트 작품은 카라바지오 화풍이 전 유럽으로 속속들이 퍼져나갔음을 잘 보여줍니다.

 

도9 조르즈 드 라 투르
< 성 세바스티안을 돌보는 성녀 이렌느 >
1649년 경, 파리 루브르박물관
 
도10 혼트호스트 < 재판관 앞에 선 그리스도 >
 
 
 
 
 

카라바지오 화풍을 따랐던 이탈리아의 아르테미지나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3년 경)는 여성화가라는 점과 작품이 그녀의 생애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성주의 미술사'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적장을 유인하여 목을 베는 유대의 여걸 유디트의 이야기는 잔혹한 그림을 선호하였던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졌습니다(도11). 그러나 억센 여자들의 손놀림과 화면을 뚫고 나오는 홀로페르네스의 반쯤 잘린 머리 때문에 젠틸레스키의 이 그림은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더욱 끔찍합니다. 이는 카라바지오의 유디트와 비교해 볼 때 더욱 분명한데, 젠틸레스키가 그린 여자들이 사건에 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도11,12). 아버지의 조수에게 추행 당했던 젠틸레스키의 생애와 이 그림이 얼마나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질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화가들의 시선의 대상으로 재현된 유디트의 모습과 여성화가인 젠틸레스키의 유디트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도11 젠틸레스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
1612-21년, 199x162cm,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
 
 
도12 카라바지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 1598년경
캔바스에 유채, 145x195 cm, 로마, 도리아 팜필리미술관
 
 
 
 

17세기는 스페인에서는 신비주의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리발타의 <예수의 품에 안긴 성 베르나르>(도13)는 종교적인 체험을 주로 다루었던 17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른쪽의 코탕의 작품과 같은 매우 사실적이며, 동시에 함축적인 정물화도 자주 그려졌습니다(도14).

 

도13 프란치스코 리발타
< 예수의 품에 안긴 성 베르나르 >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도14 후안 산체스 코탕 < 정물 >, 1600년경, 69x85cm
샌디아고 박물관
 
 
 
 

그러나 흔히 17세기를 스페인 회화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놀라운 회화의 솜씨를 발휘한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래의 <세비야의 물장수>(도15)는 그의 나이 스물살에 그려진 것입니다. 투박한 느낌을 주는 커다란 항아리와 헤진 망토를 입은 남자의 옆모습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이 그림은 화면 뒤쪽으로 인물들이 엇갈려 있습니다. 당시의 정물화들이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던 점을 생각하면 그가 그린 큰 질그릇과 물컵, 그리고 작은 항아리도 역시 상징으로 보입니다. 세사람의 연배가 서로 다르다는 점, 그들이 서로 지그재그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생의 세 단계를 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그림의 의미가 어찌되었든지 놀라운 것은 벨라스케스가 젊은 나이에 이미 다양한 질감들을 묘사해내는 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15 디에고 벨라스케스 < 세비야의 물장수 >
1623년, 106.7x81cm, 런던 웰링턴미술관
 
 
 
 
 

마드리드는 16세기 스페인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유럽 미술의 중심지의 하나로 부상하였습니다. 당시 펠리페 4세의 궁전에는 티치아노를 비롯한 수많은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루벤스와 같은 국제적인 화가도 이곳을 방문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왕실의 공적을 알리는 선전화나 왕가의 초상화를 제작하며 화가로서의 입신을 이루었습니다.

왼쪽의 올리바 공작의 초상화는 성난 말 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귀족의 위풍당당함을 잘 묘사하였습니다(도16). 이러한 그림은 권력자들을 위엄 있고 매력 있게 보이도록 하는 전형적인 이미지 표현법이었으며, 벨라스케스로서는 왕실화가로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한편으로 왕실의 노리개감이었던 난쟁이, 시종들 그리고 걸인들의 모습도 많이 남겼습니다(도17).

 

도16 벨라스케스 < 말을 탄 올리바 공작 >
1634년, 313x239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도17 벨라스케스 < 난장이 발레카스 >
1642-45년, 107x83cm, 마드리드, 프라도박물관
 
 
 
 

벨라스케스의 작품에는 왕실 주문자를 만족시켜 영예를 얻고자 하는 공적인 화가로서의 희망과, 대상을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화가의 시선이 공존합니다. 뒤늦게 로마의 교황청을 방문하여 제작한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에서 벨라스케스의 이 두가지 시선을 교묘하게 결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도18).

 

도18 벨라스케스 < 교황 이노센트 10세 >
1650년, 캔바스에 유채, 139.7x115cm
로마 도리아 팜필리아 미술관
 
 
 

그러나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한 회화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보다도 붓의 자유로운 흐름과 물감의 흔적을 통해 얻어지는 생생함일 것입니다.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은 한 권력자의 냉혹한 초상이지만, 동시에 붉은 빛의 공단과 사그락거리는 흰 레이스 대비가 눈부십니다. 아래 라스메니나스의 황녀의 빛나는 금발과 레이스를 표현한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이(도20), 벨라스케스는 단 몇번의 붓질로도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개의 보드라운 털, 그리고 화려한 의상의 반짝임을 표현해 낼 수 있었는데 이러한 시각적인 효과를 누구보다도 높이 샀던 이들은 근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이었습니다.

 

 

말년에 그려진 <시녀들>(도19)은 3m가 훌쩍 넘는 크기 뿐 아니라 흥미진진한 구성과 회화적인 솜씨로 인하여 이 화가의 화업을 결산하는 대표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도19, 20 21). 벨라스케스는 이렇게 큰 캔바스에 무엇을 그리고자 한 것일까요? 거울에 어슴프레 포즈를 취하고 선 왕과 왕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도19 디에고 벨라스케스 < 라스메니나스 >
1656년, 318x276cm, 마드리드 프라도박물관
 
 
 
도20 벨라스케스 < 라스메니나스 > 부분
 
 
 
 
도21 벨라스케스 < 라스메니나스 > 부분
화가의 초상
 
 
 
 

그러나 어쩌면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화가 자신일지 모릅니다(도21). 그는 자신을 이젤을 당당히 들고선 화가의 모습으로, 동시에 가슴에 붉은 기사훈장이 선명한 귀족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도21). 그는 이제 장이가 아닌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이 그림은 궁정화가로서 성공한, 자의식이 강한 화가가 자기 세계를 자랑스럽게 반추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17세기 로마에서 시작된 카라바지오의 회화는 인접한 카톨릭 지역이었던 스페인은 물론이고 플랑드르 회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도 카라바지오식의 명암대비법이 두드러집니다. 우리는 17세기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두 걸출한 화가 카라바지오와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대가다운 솜씨와 창조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림에서 절대적인 종교와 권력 이면의 어두운 부분이 드러나 있음을 보게 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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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신교의 도전으로 위기에 처했던 카톨릭 세계(지도)는 스스로 교회의 부패를 정화하고 새로운 교회체제를 마련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러한 반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로마는 다시 카톨릭세계의 중심이 되었으며, 교황의 권위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막강해졌습니다. 더 나아가 카톨릭 교회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미술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로마에 세워진 일제수교회는 하느님의 군대를 자처하였던 예수회의 본산으로, 반종교 개혁의 이념이 고스란히 적용된 새로운 형식의 교회였습니다(도1).

 

도1 피에로 델라 포르타, 1575-1584년,
로마 일제수 교회 전면
 
 
 
 
 

일제수 교회는 외관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와 그 느낌이 달랐습니다(도2). 알베르티가 100여년 전에 만토바에 지었던 교회와 비교하여 봅시다(도3). 알베르티의 성 세바스티안 교회는 엄격하게 보이는데 비해서 일제수 교회는 한결 장엄한 느낌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코린트식 기둥과 벽주를 이중으로 하였을 뿐 아니라, 위층에는 소용돌이 장식을 덧붙여 화려한 느낌과 움직임을 강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르네상스의 건축은 기본 구조를 반복하고 있는데 반해서 바로크의 건축물의 여러 부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도2 피에로 델라 포르타, 1575-1584년, 로마 일제수 교회전면
 
 
 
도3 알베르티, 성 세바스티안 교회, 만토바
 
 
 
 
 

교회의 내부도 이전 시기와는 달라졌습니다. 17세기에 카톨릭 교회는 성직자와 신도들이 모여 하늘의 영광을 성대히 찬양하는 예식의 공간이었습니다. 제단에서 신자들의 자리까지 탁 트인 일제수의 교회의 넓은 내부도 바로 이러한 목적에 알맞게 설계된 결과였습니다(도4). 안드레아 사치의 그림은 일제수 교회를 방문한 교황 우르반 8세 일행과 교회안에서 벌어지는 예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도5). 과장되게 많은 사람들이 그려진 것은 아마도 이 교회의 넓은 실내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을 강조한 결과일 것입니다. 이후에 그려진 가울리의 <그리스도의 승천>(12주 주제1, 도3)이 천장에 펼쳐진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실로 장대한 하느님의 영광을 마치 궁전같이 꾸민 것입니다.

 

도4 일제수 교회의 도면과 입면도
 
 
 
도5 안드레아 사치 < 교황 우르반 8세의 일제수 방문 >
1639-1641년, 캔바스에 유채
 
 
 
 

17세기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점차 이전시대의 엄격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무쌍하고 율동감 넘치는 교회를 고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건축가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였습니다. 그가 로마에 지은 작은 교회,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의 파사드는 들고 나는 곡선을 따라 출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도6, 7).

 
도6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64-67년,
로마 성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교회 파사드
 
 
도7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64-67년
로마 성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교회 파사드 옆면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 교회(도8)에서 보로미니는 더 기발한 디자인을 고안합니다. 교회의 내부는 직선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자유롭게 처리하였으며 천장에도 굴곡을 주어 독특한 모양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이처럼 바로크 교회건축은 풍부한 장식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미술의 무대였습니다(도8, 9, 10).

 

도8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42-44년(1646-65)
로마,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교회
 
 
도9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로마,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교회의 쿠폴라
 
 
 
도10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로마,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
교회의 랜턴
 
 
 
 

17세기 로마 카톨릭의 영광이 결집된 무대는 다름 아닌 카톨릭의 총본산,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이었습니다. 이곳은 기독교의 반석이 된 사도 베드로의 시신이 묻혀있는 곳으로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기독교인들의 순례지였습니다. 16세기까지 이곳은 크고 작은 교회 부속 건물들이 덧붙어진 볼품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기의 야심만만했던 교황들은 교회의 권위에 맞는 당당한 새 교회를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교황 줄리오 2세가 브라만테, 미켈란젤로에게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의뢰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6세기 말 한 화가가 만든 한동판화는 당시 베드로 교회의 광장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도11).

 

도11 도메니포 폰타나, <로마 라테라노 대성당>, 1585-1590년, 인그레이빙
 
 
 
 
 
 

그러나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거듭난 것은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여러분은 17세기의 신심이 두터운 한 평범한 신도가 이곳을 순례하면서 느끼게 되는 종교적인 체험을 마음속으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높게 선 오벨리스크를 이정표 삼아 산 안젤로 다리를 넘어 베르니니(Gianlorenzo Bernini: )의 열주에 들어설 때 아마 하느님이 내민 팔이 자신들을 영접하는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도12,13).

 

도12 로마 바티칸 대성당의 전경
 
 
 
도13 조반리 바티스타 팔다, 1667년
베르니니 성베드로 광장 열주를 위한 동판화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도움과 마데르노가 설계한 교회의 전면을 지나 교회 안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 멀리서 광채를 내뿜는 제단과 거대한 닫집, 발다키노를 보면서 천상의 권위를 실감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극적인 체험을 위해서 베르니니는 조각과 건축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편의 웅장한 드라마를 꾸미듯, 그렇게 교회를 장식하였습니다(도14, 15).

 

도.14 카를로 마데르노
1607-1626년, 로마 바티칸 대성당 정면
 
 
도15 조반리 바티스타 팔다, 1667년
성베드로 대성당 내부
베르니니 성베드로 광장 열주를 위한 동판화
 
 
 

베르니니는 17세기 이탈리아의 가장 탁월한 조각가이자, 교회 장식가였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교회의 코르나로 가족예배실 장식은 그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곳입니다(도16). 청동 빛줄기를 배경으로 테레사 수녀는 신의 은총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는 종교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수녀의 황홀함은 펄럭이는 옷자락을 타고 흐르는 빛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도17). 그리고 코르나로 가문의 사람들은 한편의 오페라를 구경하듯 제단에서 벌어지는 환상을 바라봅니다(도18). 그의 교회 장식이 신비한 체험을 중시하는 반종교개혁에 매우 알맞는 방식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베르니니는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서 화려한 색깔의 대리석, 석회벽토, 청동과 같은 다양한 재료를 자유자재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위에서 쏟아지는 자연채광도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16 베르니니 < 성녀 테레사의 환상>
1647-52년,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빅토리아 교회
 
 
 
도17 베르니니 < 성녀 테레사의 환상 >
 
 
 
 
도18 베르니니, 코르나로 가문 사람들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빅토리아교회
 
 
 
 
 

베르니니는 교회의 장식에서 뿐 아니라 단독 조각에서도 놀라운 기술을 발휘하여 역동적인 작품을 남겼습니다. <아폴로와 다프네>(도19)는 신화속의 안타까운 사랑의 순간을 묘사합니다. 달리는 아폴로와 막 나무로 변해가는 다프네, 옷자락에서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동작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편 그는 매우 사실적인 묘사와 심리가 표출된 초상 조각들을 남겼는데 이는 이전 로마시대 초상조각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도 20). 그러나 인물의 순간적인 표정을 포착하는 방식이나 옷주름, 머리카락을 동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고전조각, 미술과는 다른 바로크 시대의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도19 베르니니, <아폴로와 다프네>
1622-25년, 대리석, 높이 243cm
로마 보르게제 박물관
 
도20 베르니니 < 콘스탄차 보나넬리>
1636년경, 대리석, 높이 70cm
피렌체 국립 바르젤로 발물관
 
 
 

17세기 카톨릭 교회는 신교국가들의 성상타파에 대항이라도 하듯, 더욱 더 화려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교회를 장식하였습니다. 로마에서 이루어진 건축과 조각은 점차 하나의 국제적인 양식이 되어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변에 환영처럼 우뚝 솟은 멜크 수도원은 그 화려함과 규모에 있어서 장관을 이룹니다(도 21, 22).

 

도21 야곱 프란타우어 뭉그나스트, 1702-38 년
도나우 강에서 바라본 멜크 베네딕투스 수도원
 
 
도22 야곱 프란타우어 뭉그나스트,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내부
 
 
 
 
 

또한 스페인에서는 그곳 특유의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토착적인 장식들이 더해져 기괴한 느낌마저 드는 채색 목조각들과 제단들이 앞다투어 제작되었습니다. 마치 실제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스페인의 장인들은 목조조각에 사실적인 채색은 물론, 실제 옷을 만들어 입히기까지 하였습니다. 스페인의 반종교개혁 미술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으로 남미에 많은 유적들을 남기게 됩니다.

 

도23 페드로 룰단 < 십자가에서 내려짐 >
1670-72년, 세비야, 호스피탈 드 라 카리다드 제단
 
 
도24 페드로 데 메나 < 막달라 마리아 >
1664년, 채색 목조가, 높이 165cm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예에서 두드러지듯 17세기 바로크 교회미술은 지나치게 연극적이고 수사적이어서 과장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17세기 바로크 미술이 상당부분 로마 카톨릭 교회의 힘과 열정에 힘입어 피어났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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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책은 아니다.

 

 

 

 

 

소개글
가와이 하야오는 일본 융 학파의 선구자이자 세계적인 학자이다. 신화.문학.종교.과학.심리학을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을 수백 권의 저서로 풀어냈으며, '일본 지성계의 살아 있는 권위'로 추앙받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한 이래 숱한 베스트셀러를 펴낸, 설명이 필요없는 소설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각자 미국에서 생활하던 시절이었다. 하야오는 주위 사람 권유로 하루키의 소설들을 차례차례 읽어가면서, 그 안에 나타난 현대인의 심리적 문제에 깊이 공감한다. 하야오는 1994년 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에 가게 되는데, 이때 보스턴에 있던 하루키가 찾아와 첫 만남을 갖게 된다.

하루키는 "외국에 살다 보면 일본에 있을 때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분을 만날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라고 가와이 하야오를 만났을 때의 기쁨을 표현했다. 머릿속에 뒤엉켜 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듯한, 숨통이 트이는 듯한 '치유'의 느낌을 받았다고.

일본에 돌아온 후 하루키는 이틀 일정으로 교토에 사는 하야오를 만나러 가는데, 그때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담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격식을 갖춘 '대담' 형식이 아니라, 느긋하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솔직하게 풀어낸다.

때가 옴진리교 사건과 한신 대지진이 발생한 1995년이라, 이와 관련된 화제가 자주 등장한다. 하루키가 이야기하는 미국 생활과 1960년대의 학생운동, 옴진리교 사건, 한신 대지진의 충격을 가와이 하야오는 깊이 경청한 후, 한 사람 한 사람이 독자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다.

두 지성이 만나 개성과 보편성, 개인적 삶과 사회 참여, 소설의 본질, 일본 사회 속의 폭력성, 결혼 생활 등,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문제와 내면에 잠재한 고뇌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책.

 

차례

머리말_가와이 하야오 씨와 나눈 기적 같은 대화.무라카미 하루키

제1부 첫째 날 밤의 대화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속에 사는 것

사회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가?
한신 대지진과 정신의 상처
언어적 표현과 이미지로서의 투영
<인생 상담>란에 비친 미묘한 해답의 차이
소설가가 되고 나서 깜짝 놀란 것
개인과 개성, 그리고 개인주의
한국과 중국의 독자들이 원하는 디태치적인 삶
제1차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일본의 교활성과 애매성
내 최초의 장편 <상실의 시대>와 전환점이 된 <태엽감는 새>
소설이 자기 자신보다 앞서 가고 있다는 감각
결혼과 '우물 파기'
결혼은 고통을 자초하는 건가?

제2부 둘째 날 밤의 대화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소설을 쓰면서 갖기 시작한 내 몸에 대한 흥미
작가가 알고 만든 건 예술이 아니다
이야기 속에 담긴 결합하는 힘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평할 때
치유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
개성과 보편성의 차이
종교와 심리요법
오늘의 시각으로 본 노몬한에서 있었던 일
폭력서오가 작품 속의 표현 문제
일본 사회 속의 폭력의 심각성
고통과 자연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맺음말_개성 있는 작가와의 즐거운 만남.가와이 하야오
옮긴이의 말_일본을 대표하는 두 지성의 대화

 

새 수필집이나 새 소설은 언제쯤 나오려나...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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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 2004-10-1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하루키나 류나 참 책을 많이 내요;;
그러고도 잘 팔리는 거 보면 역시 천상 작가인가....;;

superfrog 2004-10-13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양을 쫓는 모험이나 세계의 끝과.., 댄스 댄스 댄스 류의 장편들과 티비 피플, 렉싱턴의 유령 류의 단편들은 만나기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나이가 나이니 만큼.. 슬픈일이지만 그래도 그동안 행복했던 걸로 위안을 삼고 이제는 재즈에세이나 이런 대담집 정도로 만족해야죠.. 헹헹.. 그래도 좀 슬퍼요..ㅠ.ㅜ

panda78 2004-10-13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치 넘치는 수필집이라도 내 준다면.... ㅜ_ㅜ

superfrog 2004-10-13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예요.. 세일러복이라던가 랑겔한스섬이라던가 코끼리공장 말씀이죠.. 흑흑..

panda78 2004-10-13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의 원숭이라던가 무라카미 라디오두 참 좋았는데.. ㅜ_ㅜ 일상의 여백도..
아, 정말 새로운 수필집이 읽고 싶어요----

하이드 2004-10-14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런책 좋아요. 게다가 하루키라니요! 당장 장바구니로! 슝~

찬타 2004-10-14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하루키는 소설보다 수필이 더 좋던데..^^
 
 전출처 : stella.K > 자취생을 위한 스피드 요리

출처블로그 :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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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침요리의 밀가루 반죽 만드는 방법(4인분) : 푼 달걀 1개에 물 2컵을 부어 섞은 다음
   밀가루를 조금씩 부어가면서 거품기로 잘 저어 반죽하고, 여기에 여러 재료들을 넣어 골고루
   섞어 다소 묽은 듯 하면서 걸쭉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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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전 김치전 깻잎부추전 맛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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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샐러드 사과감자샐러드 햄야채샐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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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젠 자야지.. 내일부터 많이 추워진다니 감기 조심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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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짱 2004-10-13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보낸 도록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전 못 살펴봤거든요. 다음에 또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도 판다님께 드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털짱입니다.^^

panda78 2004-10-13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리릭 넘겨 봤는데(눈에 띄는 그림은 자세히 보구요.. ^^) 다 모르는 그림이라 뭐라 평은 못하겠지만, 도판 질도 좋고 수도 많고 참 좋은 것 같아요. 마음에 쏙 들었어요! ^ㅡ^
그리구 털참많다님의 쪽지도 잘 받았구요- 히히히
사진 찍어서 올리려고 준비 중이에요. 받았을 때 경황이 없어서 페이퍼로 올리지도 못하고 지나갔네요. 털짱님, 정말 감사히 잘 받았구요, 저두 털참많다님께 뭔가 보답하고 싶은데 주소는 기밀입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