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두 노동자가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하고 있습니다(도1,지도). 해머를 두드리는 나이든 오른쪽 인물과 돌덩이들을 힘써 들어 올리는 젊은 남자는 시선을 돌린 채 묵묵히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화면을 꽉 채운 인물들의 단순한 윤곽선과 거친 듯한 무채색의 표면으로 인해 화면에 바짝 다가선 두 인물의 현장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보기에 이 그림에는 '건강한 노동의 모습'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사회적인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1850-51년 살롱에 출품되었을 당시에는 노동자의 모습을 화면에 당당하게 그렸다는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도1 쿠르베 <돌깨는 사람>, 1849년, 1850-51년 살롱 출품
캔바스에 유채, 2차 대전으로 파괴
 
 
도2 매독스 브라운 <노동>, 1852-63년, 캔바스에 유채
137×197.3cm, 맨체스터 미술관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가 일으킨 스캔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중반 서유럽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84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에서는 산업혁명의 결과가 눈에 띄게 분명해졌습니다. 그 결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지요. 노동자들은 프랑스 혁명때부터 봉건질서를 넘어뜨리기 위한 시민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들르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도3)에서 보듯이 1830년 공화정을 다시 세울 때에도 학생, 지식인과 함께 희생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러나 1830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루이 필립은 금융가나 사업가들의 이익을 중시하는 금권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노동자나 농민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시대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던 영국 역시 노농자의 문제가 중요했는데, 매독스 브라운(Ford Maox Broun, 1812-1893)의 <노동>(도2)은 바로 이러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것이 1848년 런던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이러한 갈등은 결국 1848년 혁명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메이소니에(Jean-Louis-Ernest Meissonier, 1815-1891)의 <바리케이트>(도4)는 1848년의 노동자 봉기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동자, 농민들의 불만이 점차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던 시기에 그려진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은 그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던 것입니다. 20세기 공산주의의 실험과 실패를 경험한 지금의 상황에서 되돌아볼 때 사회주의 사상이 형성되는 19세기 중반은 매우 중대한 역사적인 지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도3 들라크르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캔바스에 유채, 260×32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4 메이소니에 <바리케이드, 모르텔르거리 >
1849년, 1850-51년 살롱, 캔바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쿠르베가 자신의 고향 오르낭을 배경으로 그린 대작 <오르낭의 매장>(도5)은 발표 당시부터 너무나 혁신적인 작품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후로는 19세기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아 미술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르낭의 시골뜨기들을 이렇게 큰 화면에 그려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돌깨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던져볼 수 있겠지요.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에 등장하는 다양한 부류의 인간군상들을 보면 1842년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나오는 19세기 전반 부르조아혁명 시기 인간들의 파노라마를 접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좌우로 죽 늘어놓는 형식은 영웅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미술의 구성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부상하던 '인민의 미술 (art of the people)', '평등주의(egalitarism)'를 반영하는 것일까요? 이 그림을 의심하는 파리 부르조아 관객들은 시골사람 쿠르베가 부르조아들의 '매장'을 암시하였다고 여겼습니다.

도5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1849-50년, 캔바스에 유채
315×663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19세기 중반 농촌풍경을 즐겨 그렸던 프랑스와 밀레의 노동자상에 대해서도 쿠르베처럼 여러 가지 다른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앞 주제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밀레의 풍경화는 여러나라에서 매우 평화로운 전원풍의 복고양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한편에서 <씨뿌리는 사람>(도6)과 같은 인물화는 노동자, 농민의 힘을 부각시키는 그림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러시아와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밀레의 농민상이 찬미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농촌출신의 밀레나 쿠르베의 미술은 본질적으로 세련된 파리인들의 미술운동이었던 인상주의와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합니다.

도6 밀레 <씨뿌리는 사람>, 1850년
캔바스에 유채, 101.6×82.6 cm
보스톤 미술관
 
도7 밀레 <일하러 가는 길>, 1851년
캔바스에 유채, 55.5×46 cm
 
 
 
 
미술에 있어서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쿠르베가 1855년 파리 박람회에서 자신의 그림이 거부되자 전시관을 짓고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反官展을 열었던 데서 기인합니다. 쿠르베는 1861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그림은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추상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릴 수 없다.”

 

'자신의 시대에 존재하는 것'이 리얼리스트들의 구호였습니다. 쿠르베는 오랫동안 비현실적인 종교화나 신화화만을 중시하던 미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리얼리티란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점에서 그의 태도는 당시 콩트나 프루동처럼 실증적이며 유물론적입니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동시대'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사회비판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보다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미술가는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였습니다.고야를 연상시키는 풍자적인 힘을 지닌 도미에의 판화와 삽화는 당시의 신문이나 여러 잡지에 개재되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도8,9). 뿐만 아니라 그의 뛰어난 비판적인 시선은 점토로 만든 유명인들의 커리커춰에서 유쾌한 힘을 발휘합니다(도10,11).

도8 도미에 <메넬로사와 빅타>
『고대사』연작 중, 1841년
파리, 국립도서관
 
 
도9 도미에 <런던 회담>
1832년, 채색 석판화,
미시간대학 미술관
 
도10 도미에 <기조의 초상>
1833년, 채색 점토
파리, 오르세이미술관
 
도11 도미에 <기욤의 초상>
1832-33년, 채색 점토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시의 발달, 황폐한 농촌, 심화되어 가는 도시민간의 경제적인 격차는 근대사회가 안고 있는 깊은 모순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도12의 <삼등열차>에서처럼, 1860년대의 비좁고 열악한 열차 한켠을 묘사한 그림에서는 이러한 사회적인 갈등이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생 프랑스 근대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비판의 시각을 놓지 않았던 도미에는 사회적 사실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도12 도미에 <삼등열차>, 1860-63년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편으로 쿠르베는 미술사에 있어서 새로운 유형의 미술가상을 보여줍니다. 그는 1855년 사실주의 전시회에 자신의 미술을 회고하는 대작 <화가의 스튜디오, 알레고리>(도13)을 전시합니다. 고향 풍경을 그리는 자신을 중심으로, 진실을 상징하는 누드의 여인, 그리고 화가가 교류하였던 여러 동료들의 초상이 등장하는 커다란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림은 매우 우화적이어서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쿠르베가 리얼리즘을 주장했음에도 아직 그의 회화는 과거의 역사화와 '근대성의 기록' 사이의 경계에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쿠르베의 태도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미학적인 선택과 판단에 의해 작업하는 '전위화가(아방가르드)'의 출현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14의 자화상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반항정신으로 가득했으며, 파리 브르주아 예술관객의 엘리트 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기존의 예술에 저항하였습니다. 이러한 저항의지는 현대에 와서 매우 중요한 예술의 속성이 되었습니다. 쿠르베 이후로 예술의 역사는 사회의 '전위'로서 나름대로의 특권적인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도13 쿠르베 <화가의 스튜디오, 알레고리>
1855, 캔바스에 유채, 361×598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14 쿠르베 <검은개와 자화상>
1844년, 1842년 사인, 캔바스에 유채
파리 뮤제 드 프티 팔레
 
오늘날 예술가가 사회적인 관례에 앞서 금기의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예술가들의 의무이자 특권인 것이지요. 과거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가들이 인문학적인 식견을 가지고 자신들의 작업을 당당하게 생각했다지만, 교황이나 군주들의 후원을 벗어나 독자적인 기반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현대처럼 예술가의 자율성이 이처럼 강조된 시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쿠르베 이후의 인상주의, 추상회화로 이어지는 '전위미술'이 예술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도16과 같은 19세기 아카데미 미술은 한동안 키치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접은 17세기 푸생이래 다비드까지 이어지는 아카데미 화가에 대한 당시의 융숭한 존경과 접대에 비한다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 합니다. 왕실이나 귀족을 상대로 하는 미술은 시민사회의 부상으로 더 이상 환영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1830-40년대에 이르러 분명하게 나타났으며 관변미술은 이제 변화를 모색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점차 과거의 지나치게 장엄하고 교훈적인 양식보다는 풍속화적인 요소와 선정적인 장면을 섞어 절충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토마스 쿠튀르의 <타락한 로마>(도15)입니다. 이 작품은 아마도 19세기 살롱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내용은 로마인들이 방탕한 생활에 빠져 몰락하게 되었다는 다소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만, 작품의 중심에는 당시의 고급창부(마네의 올랭피아에서는 더욱 확연하게 나타나지만)가 그려져 있어 역사와 현실묘사의 절충을 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쿠튀르는 당시의 평가와는 상반되게 20세기에 와서 한때 잊혀졌지만, 그의 아틀리에서는 많은 미술가들이 배출되었으며 마네 역시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작품은 다시 오르세이 미술관의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걸려있어, 작품에 대한 평가와 관심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도15 토마스 쿠튀르 <타락한 로마>, 1847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16 부게로 <님프와 사티로스>
1873년, 캔바스에 유채, 260×180 cm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도1)이나 <오르낭의 매장>(도5)과 같은 작품들은 사회의 현실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점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비판의식이기보다는 주변을 대하는 미술가의 태도의 변화라 하겠습니다. 도15의 <송어>에서처럼 줄에 걸린 물고기를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고 그것을 화면에 꽉 차게 그려내는 미술가의 의도는 과거 역사화를 그리며 교훈을 찾던 미술가의 그것과는 판이합니다. 또한 도18의 <해변>을 보면 쿠르베가 붓보다는 나이프를 많이 사용하여 두툼하게 물감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돌깨는 사람들>이나 <오르낭의 매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두텁고 밀도 있는 캔바스위의 물감자국은 회화라는 장르 본연의 물질성을 크게 강화시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은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이 같은 노동을 다루면서도 매독스 브라운의 설명적인 작품과 달랐던 이유이기도 합니다(도1.2)

도17 쿠르베 <송어>, 1872년, 캔바스에 유채
52.5×87 cm,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도18 쿠르베 <해변>, 1865년, 캔바스에 유채
53.5×64 cm, 쾰른, 발라프 리카르츠 미술관
 
 
 
 

쿠르베에서 싹이 튼 현실과 사건을 들여다보는 냉정한 리얼리즘의 시선은 '죽음'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미술에 있어서 죽음은 이상화되고 영웅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15주 주제1과 2참조). 그러나 마네의 죽은 투우사(도19)는 보는 사람을 충격 속에 몰아넣는데, 이러한 이유는 숭고한 명분도 없이 죽음 그 자체만을 대면할 때 느끼는 전율과 같은 것입니다. 쿠르베의 미끼에 걸린 송어(도17)를 대할 때의 느낌과 비슷합니다. 쿠르베가 주장하였던 리얼리즘, 즉 '동시대성'과 캔바스의 '표면성'을 보다 현대적인 형태로 진전시킨 장본인은 바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였습니다. .

도19 마네 <죽은 투우사>, 1864년, 캔바스에 유채
76×153.3 cm, 워싱턴, 국립박물관
 
 
도20 마네 <황제 막시밀리앙의 처형>
1867년, 캔바스에 유채, 252×305 cm
만하임, 쿤스트할레
 
마네의 회화는 그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나 화면에 물감을 칠하는 형식에서 분명 '우리들의 시대'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보다 분명하게 합니다(마네에 대해서는 다음 주제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마네를 인상파로 여기지만 그는 모네, 르노와르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여는 것을 꺼렸으며 외광 풍경화를 주로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공화주의자로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에 대해 줄곧 냉소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는데, <황제 막시밀리앙의 처형>(도20)에서 보듯 그의 정치성과 화면의 표면성은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쿠르베에서 마네를 거치면서 미술은 바야흐로 현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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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rim > 내가 지켜줄께.

몽이 : 그래그래, 내가 지켜줄께. 나만 믿어~!
양군 : 형님~~~~
(행복한 세상의 족제비에서 제삐와 쪼롱이 버젼;;)

몽이 : 이봐이봐 일어나봐.. 사진 찍는다구..
양군 : 정말요? 아아.. 졸려요. 형님~~

그러나 사실... 양군은 몽이보다 몇달 먼저 태어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있는 것은 나뿐인가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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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 디올 소프트닝 클린징 밀크 - 200ml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평점 :
단종


피부타입 : 복합성

백화점 1층 매장에서 팔리는 클린징밀크치고는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정말 무난하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는 제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꽤나 비싸다. 향이 은은하고, 묽은 편이라 바른 직후에도 핸들링이 쉬워 불필요한 피부 자극이 적고, 물에도 그런대로 잘 씻겨 내려간다. 그렇지만 이 제품 값의 반도 안되는 가격에 용량은 더 많은 제품들 중에서도 위의 장점들을 모두 갖춘 제품이 많다. 같은 라인의 클린징 워터도 마찬가지. 향은 은은하고, 워터임에도 꽤 진한 화장도 깨끗이 잘 지워내지만 비슷한 질의 훨씬 저렴한 제품들이 여럿 있다. 

결론. 제 돈 주고 사기에는 아깝고, 2-3만원 선에서 겉보기에 멋져보이는 선물을 하려 할 때 고르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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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10-24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거 정품용량 절반인 비매품이 있는데 아직 안써봤어요. (쓰던 클렌징이 남아서^^) 가격이 꽤 하나봐요.^^ (하긴 디올이니깐. 샤넬이나 디올같은 화장품들은 실제 성능에 비해 가격이 무지 비싸죠. 원래 코스메틱 메이커도 아닌데 말이죠.)

panda78 2004-10-2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패키지는 이쁘지만.. 정품 절반 샘플이라니, @ㅂ@ 우와-

sweetrain 2004-10-28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예전에 카페 벼룩시장에서 다른 제품을 사고 이 제품 50미리 샘플을 덤으로 받았는데..이게 가격이 꽤 하는군요..클렌징 티슈 다 쓰고 써봐야겠어요.^^
 

풍경화는 다른 어떠한 그림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장르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시대의 벽화나 중세의 필사본에서 보면 고대인들은 벽에 장식 삼아 생명감 있는 정원풍경을 묘사하여 즐기기도 하고 성서적인 이야기 중에 배경으로 자연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등 자연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도1,2). 그러나 화가들이 화구를 메고 야외로 나가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 된 것은 19세기(지도) 이후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미술의 소재로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은 자연보다는 인간이었습니다. 특히 교훈적 가치를 중요시 여겼던 역사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인체묘사가 필수적이었는데, 17세기 푸생의 작품(도3)에서 보면 자연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한 인물에 비해 배경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모든 것의 기본으로 중시한 계몽주의 사상은 19세기 풍경화가 등장하는데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감정이 도덕적인 이상이나 교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면서 풍경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

도1 <리비아의 별장 정원그림>, 높이 2m, 기원전 20년경
로마, 테르메 국립박물관
 
 
 
도2 랭부르 형제 <10월>, 1409-15년
『베리 공의 호화로운 기도서』
상티에, 콩데 박물관
 
도3 푸생 <아르카디아 에고>, 1638-40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19세기 풍경화의 만개에 앞서 처음으로 독자적인 풍경화가 등장하였던 곳은 17세기 네덜란드였습니다(13주 주제2 참조). 청빈함을 중시하던 이 지역의 신교도들은 도4의 고이엔의 그림에서 보듯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와 낮은 구릉들을 소박하고 정감 있게 그린 풍경화를 애호하였습니다. 또한 18세기의 로마와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여행취미에 맞춰 유서 깊은 도시의 풍광을 많이 그렸는데(14주 주제3참조)(도5), 이러한 풍경화의 등장은 신흥 상인층이나 여행객들과 같은 수요계층의 형성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도4 얀 반 고이엔 <도르트레이트 풍경 >, 1644년
나무패널에 유채
 
 
도5 카날레토 <석조장>, 1726-30년
캔바스에 유채, 124×163 cm, 런던, 국립미술관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의 외적인 모습 이면에 신의 질서나 우주의 화합과 같은 진실이 숨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연에 초월적인 정신성을 투영하는 범신론적인 풍경화는 독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제작됩니다. 18세기 이후 독일은 고전주의 미학을 선도하였고 괴테나 쉴러와 같은 걸출한 낭만주의 문학가들을 배출하였지만 미술에서는 이렇다할 국제적인 조류를 만들어내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당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독일의 민족주의 정서와 결합한 종교성이 짙은 미술이 주를 이루었습니다(도6,7,8). 오토 룽게(Philipp Otto Runge, 1777-1810)의 <아침>(도6)은 당시 독일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다소 수수께끼 같은 종교화입니다. 종교적 순수함을 강조한 상징성이 강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도6 오토 룽게 <아침>, 1808년
캔바스에 유채, 10985.4 cm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도7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자작나무 숲의 성당>
1809-10년, 캔바스에 유채, 베를린, 슐로스 칼로트부르그
 
 
 
도8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승>, 1809-10년
캔바스에 유채, 110×171 cm, 베를린, 국립미술관
 
 

풍경화에 있어서 독일의 음울한 풍토를 인상깊게 반영한 화가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입니다. 폐허가 된 고딕성당을 찾는 순례자들을 그린 <자작나무 숲의 성당>(도7)은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넘어서 우주적인 고독까지 느끼게 하는 신비스런 그림입니다. 이처럼 그의 그림에는 자연과의 영적인 교감이 드러나는데 <바닷가의 수도승>(도8)은 그러한 독일 낭만주의 미학을 매우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탁트인 검은 바닷가의 수도승은 마치 점처럼 표현되어 있어 자연의 불가사의 한 힘과 인간의 유한함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한한 자연에 대한 경이감, 비극적인 슬픔, 고립감은 낭만주의 시대의 미학인 '숭고미'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신대륙인 미국에서도 광활한 자연을 바탕으로 한 낭만주의 풍경화가 활발하게 그려졌습니다. 이들 풍경화가들은 주로 허드슨 계곡의 개척지에서 작품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허드슨강 화파'라 부르지만 그들을 지역적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토마스 콜(Thomas Cole, 1801-1848)의 작품(도9)을 보면 미국의 자연은 경이의 대상으로, 그리고 세속을 넘어서는 진실을 담고 있는 신의 그릇처럼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압도당할 때 느껴지는 종교적인 신심과도 흡사합니다. 비어스타트 (Albert Bierstadt, 1830-1902)는 로키산이나 요세미티와 같은 서부를 직접 여행하고 그곳에서 받은 감동을 화폭에 담아낸 화가로 유명합니다(도10). 미국의 유명한 국립공원들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미국 낭만주의 풍경화는 서부 개척기의 미국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9 토마스 콜 <폭풍이 지나간 후 홀리요크 산에서 바라본 광경>
1836년, 캔바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도10 알버트 비어스타트 <로키산의 정경> 1863년
캔바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19세기 풍경화는 터너와 컨스터블 같은 걸출한 풍경화가들을 배출한 영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철학과 영국의 호반시인들의 활동은 이전의 버려 두었던 영국자연에 대해 다시금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부유한 농가출신이었던 콘스터블 (John Constable, 1776-1837)은 주로 자신의 영지주변을 성실한 눈으로 그려냅니다. 그는 직접 야외로 나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갖가지 표정을 담아내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변화가 심한 영국의 구름의 변화를 관찰한 그의 스케치를 대하자면 마치 기상관이 날씨를 관찰하는 듯합니다(도11). 스톤헨지의 인상을 수채화로 그려낸 습작(도12)에서는 자연에서 받은 첫 느낌과 인상을 중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11 컨스터블 <구름습작>, 1822년
종이에 유채, 30.5×49 cm, 런던, 코톨드 미술관
 
 
도12 컨스터블 <스톤헨지>
1820-31년사이, 수채, 윌트셔
 
 
 
 

그러나 컨스터블은 그림의 마지막 작업은 화가의 작업실에서 하였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대작의 풍경화에는 거친 나무둥치들의 질감과 바람에 따라 살랑거리는 작은 잎들의 반짝임이 그대로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그의 <건초마차>(도13)가 파리의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 갈색톤의 고전주의 풍경화에 익숙해 있던 프랑스 화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들르크르와가 컨스터블의 그림을 보고 이미 완성된 <키오스섬에서의 학살>에 붉은색의 덧칠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컨스터블은 자연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 안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컨스터블의 풍경화를 보면 화가의 관심이 눈에 포착되는 시각적인 표면 그 자체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컨스터블 이전의 어떤 화가도 실제 자연에서 풍기는 싱싱한 초록색의 느낌을 그렇게 풍부하게 그려내지는 못했습니다. 아카데미 화가들은 눈으로 보기보다는 관례적으로 가까운 곳에는 갈색톤을 사용하고 뒤로 멀어지는 배경에는 푸른색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도14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컨스터블은 그러한 공식을 따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대로의 원색들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빛이 반사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서로 초록색과 병치되는 붉은색과 흰색의 반점들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방식은 프랑스의 바르비종 화가와 훗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도13 컨스터블 <건초마차>, 1821년
캔바스에 유채, 130×185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4 컨스터블 <수문>, 1823-24년경
캔바스에 유채, 141.7×122 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영국의 또 다른 걸출한 풍경화가 윌리암 터너(Joseph William Turner, 1775-1851)는 보다 서사적이고 영웅적인 자연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자 하였습니다. 클로드 로렌을 연상시키는 초기의 작품 <카르타고 제국의 건설>(도15)을 보면 그가 전통적인 역사화를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터너는 주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의 장엄함이나 숭고함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바다는 인간을 한 순간에 파멸시키는 엄청난 힘을 지녔기 때문에 많은 낭만주의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주제였습니다. 도16의 <바다에 던져진 노예>는 몇 십년전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연상시키는 바다의 재난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보험을 노리고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버린 노예상들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주제로 다룬 것이지만, 이 같은 주제는 크게 원형을 이루며 소용돌이치는 색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혀 버린 것 같습니다. 즉 터너는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사건을 담아낼 전체적인 색채의 효과에 중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도15 터너 <카르타고 제국의 건설>, 1815년
캔바스에 유채, 155.5×232 cm, 런던, 영국미술관
 
 
도16 터너 <바다에 던져진 노예. 태풍의 전조>
1840년, 캔바스에 유채, 보스턴 미술관
 
 
 
 

유럽에서는 17세기 과학의 혁명이후 어느 때보다도 광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는데 터너는 특히, 색채는 빛과 어둠이 서로 경합하는 가운데 발현된다고 주장한 괴테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두움과 밝음, 서로 다른 색조들이 서로 부딪히며 녹아드는 형태를 통해 터너는 자연의 광폭함을 유감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터너의 풍경화는 <비, 증기, 속도>(도17)에서 보듯이 점차 형태를 무시하고 보이는 것의 인상 그 자체만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갑니다. 그 효과는 모네의 인상주의(도18)와 흡사합니다. 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색채추상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도17 터너 <비, 증기, 속도>, 1844년
캔바스에 유채, 90.8×121.9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8 모네 <인상. 해돋이>, 1872년
캔바스에 유채, 48×63 cm
파리 마즈몽탕 미술관
 
 

풍경화의 영역이 확장되어가던 영국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자연은 영웅적인 이야기를 위한 무대여야 한다는 고전주의 전통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신고전주의식의 도덕적 윤리나 정치적인 관심이 점차 후퇴하면서 자연주의적인 경향의 독립된 풍경화가 점차 독자적인 장르로 부상하게 됩니다.

파리 교회의 퐁텐블로 숲 근처에서는 루소나 코로와 같은 화가들이 모여 자연을 벗삼아 사실적인 풍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이들을 바르비종 화가들이라고 합니다.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자연의 모습은 그들 작품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 1796-1875)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교육을 받았지만 자연의 풍경 그 자체를 더 중시하였습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도중에 그린 도19와 같은 풍경화를 보면 그가 고대의 유적이나 거장을 묘사하기보다는 솔직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더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님프들의 춤>(도21)처럼 고대 전원시를 소재로 한 신화적인 풍경을 주로 그렸지만 도20에서 보듯, 말년에 그린 소박한 풍경화의 풍부한 대기의 느낌과 분방하고 가벼운 터치는 훗날 시슬리나 피사로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도19 코로 <로마 파르네제 정원풍경>, 1826년
캔바스에 유채, 25.1×40.6 cm, 워싱턴 D.C, 필립콜렉션
 
 
 
도20 코로 <망트 대성당>
1865-69, 캔바스에 유채
렝스, 생 드니 미술관
 
 
도21. 코로 <아침. 님프들의 춤>, 1850년
캔바스에 유채, 97.1×130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바르비종 화가들이 보여준 이러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의 발견은 19세기 중반의 사실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현실이나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풍경 속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세계가 당당하게 펼쳐진 밀레의 농촌풍경화는 현실적인 시각이 반영된 새로운 풍경화였습니다. 사실 밀레(Jean-Fransois Millet, 1814-1875)의 풍경화는 너무나 많은 복제품을 통해 잘 알려져 있어서 그림의 진면목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밀레의 농민그림은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서 목가적인 전원풍경으로 보이는가 하면, 혁명적인 노동자상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작가 자신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 기인한 결과였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컨스터블의 농촌풍경이나 밀레의 풍경화가 19세기 산업혁명으로 번창한 도회생활에 염증을 느낀 도시인들의 향수를 반영한 것임에 틀림이 없겠습니다.

도22 밀레 <만종>, 1857-59년
캔바스에 유채, 55.5×66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23 밀레 <이삭줍기>, 1855-57년, 캔바스에 유채
83.5×110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19세기 낭만주의 풍경화는 처음에는 인간의 상상력에 가치를 부여하는 서사적이고 범신론적인 풍경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눈에 보이는 것 경험할 수 있는 것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경향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컨스터블이나 바르비종화가들의 풍경화는 이처럼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사실주의가 도래하는 것을 예고합니다. 이제 다른 어떤 교훈적인 주제보다도 자연의 순간적인 느낌과 빛이 사물에 닿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다음 세대의 화가들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인상주의 미술은 바로 이러한 시각적인 실증성에 기반을 둔 풍경화였습니다. 부댕 (Eugene Boudin, 1824-98)이나 도비니 (Charles-Fransois Daubigny, 1817-1878)는 전환기의 시각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적인 풍경화의 부상 이면에는 현실적이고 비정치적인 주제를 선호하는 중간계급들의 문화층이 두터워지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24 도비니 <옵트보의 수문>, 1859년
캔바스에 유채, 49×73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25 부댕 <투르빌 해변>, 1865년경
캔바스에 유채, 67.3×104.1 cm, 미네아폴리스 인스티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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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장소와 지나가 버린 먼 과거는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지도). 이국적인 것에 대한 열렬한 호기심은 이처럼 상상력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여기 보시는 지로데-트리오종(Anne-Louis Girodet de Roncy, 1767-1824)의 <아탈라의 매장>(도1)은 아메리카의 황야를 배경으로 종족이 다른 인디안 청년과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샤토브리앙의 소설 『아탈라』는 미국에 가본 적이 없는 프랑스인들의 낭만적인 환상을 자극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연인은 한눈에 봐도 인디언의 생김새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사제복장의 노인이 등장하고 동굴 밖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서 여자의 순결한 죽음과 기독교적인 신성함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 실제 인디언들의 모습과 무관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도1 지로데 <아탈라의 매장>, 1808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언젠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미국 영화에서 농부들이 베트남식 모자를 쓰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는 단순한 외형적인 표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인들이 동양인을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타자로 대하는 인식과 관념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9세기는 유럽의 열강들이 일찍이 발전한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토와 시장을 확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영국은 아프리카 대부분과 인도를, 그리고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와 베트남과 같은 지역을 식민지로 경영합니다. 이번 주제에서는 이러한 팽창의 시대에 서구에서 생산된 시각이미지들이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타자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근동이나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문화적으로는 먼 이질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을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상정하여 자신들과의 문화적인 경계를 설정하여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한 만남은 이미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 서 있었다는 거대한 아테네상의 방패에는 아마존과의 전투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도2), 파르테논 신전을 포위한 아마존은 페르시아 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도3에서 보듯이, 아폴로 신전의 프리즈에도 그리스 병사와 싸우는 아마존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와 같은 동방의 적을 여전사인 아마존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동방의 문명이 위협적이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2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상의 방패모형복원
기원전 440년경, 토론토,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
 
 
도3 <아마존을 내리치는 그리스 병사> 바사이의 아폴론 신전 프리즈
기원전420-410년경, 대리석, 높이 64 cm, 런던, 대영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도4)는 동양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깊은 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자신의 제국이 멸망하는 마당에 후궁들을 모아놓고 살육의 축제를 벌이는 사르다나팔루스를 보면서 동양은 미개하고 잔인하다라는 통념을 무의식중에 다시 각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정말 앗시리아의 왕이 이 같은 가학적인 최후를 마쳤을까요? 서양사에서 마라톤 전투와 같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동방의 무자비한 전제정치에 대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는 것도 어찌 보면 매우 유럽인 중심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르다나팔루스』와 같은 희곡을 쓴 바이런이나 그림을 그린 들라크르와 역시 그러한 시각을 반영한 것이구요. 우리는 역사상의 명화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어떠한 입장과 생각을 대변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4 들라크르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 1827년
캔바스에 유채, 395×49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도4)은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동방취향'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동방취향'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부터 등장하여서 1832년 알제리 합병을 계기로 커다란 유행이 되었습니다. 미술에 있어서도 동방을 기행하거나 그곳을 소재로 한 작업이 증가하면서 오리엔탈리스트라는 화가집단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1832년 북아프리카 여행은 들라크르와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때 스케치북에 남긴 이국적이고 감각적인 형상들과 불타는 색채는 이후 그의 작품의 원천이 되어 <사자사냥>(도6)과 같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도5 들라크르와 모로코에서의 스케치
1832년, 수채물감, 19.3×12.7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6 들라크르와 <사자사냥>, 1861년
캔바스에 유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이때의 인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도7의 <알제리 여인들>은 회교여인들의 방인 할렘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붉은 계열의 따뜻한 색채와 느슨한 붓질로 나른한 분위기를 한껏 돋군 데다가 흑인 몸종까지 딸려 있어 이 곳이 알제리 가정의 실제 모습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렘'이라는 일상적인 용어가 점차 터어키 궁전의 여인들이 모여있는 관능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즉 '하렘'은 서구인들이 식민지를 대하는 관능적인 시선이 집중된 특별한 장소인 셈입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그림에서 식민지 남성들은 부재하거나 아니면 매우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롬(Jean Leon Gerome, 1824-1904)의 <뱀부리는 사람>(도8)에서는 전통의상을 입고 무기를 든 터어키의 군인들이 구경거리나 기웃거리는 좀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동양을 후진성, 게으름, 태만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문인인 라마르틴느는 "회교도들은 게으르고 그들의 정치는 변덕스러워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도7. 들라크르와 <알제리의 여인들>
1834년, 캔바스에 유채, 180×220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제롬 <뱀부리기>, 1870 년경, 캔바스에 유채,
83.8×122.1 cm, 매사추세츠, 클라크 안트 인스티튜트
 
 
 
 

들라크르와가 하렘을 그린 것에서 이미 보았지만, 서양인들의 동방에 대한 기억은 주로 관능적인 여인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는 그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제국의 남성들은 식민지의 이국적인 여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환상을 품어왔으며 미술가들은 이에 부응한 그림들을 계속 생산했습니다. 나중에는 주로 사진으로 이러한 수요를 채우게 되지만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매체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오랫동안 틀지워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반복하게 됩니다. 도10의 1910년대 제작된 프랑스의 식민지 관광엽서에서처럼 말입니다.

도9. 앵그르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1839년
캔바스에 유채, 캠브리지, 포그 미술관
 
 
도10. 프랑스 식민지 엽서, 1910년 경
 
 
 
 
 

유럽을 중심으로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문화적인 타자, 즉 남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인종이나 민족을 표상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에서는 공교롭게도 피부색이 다른 세여인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차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사랑을 받은 오달리스크는 백인으로, 그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여인은 황인으로, 그리고 하녀는 흑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 이 세 여인은 모두 아랍인이었는데 말입니다. 식민지 경영과 침략을 가능하게 하였던 바탕에는 지리, 풍토, 민속, 인종학적 분류학과 같은 실증주의 학문의 축적이 있었습니다. 지식이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침략길에 수많은 학자들과 미술가들을 동행시키고 이집트 학회를 구성하게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도11에서 제롬은 이국적인 색채가 풍부한 의상과 흑인 소년의 인상학적인 묘사를 대단히 세밀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말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어쩌면 분류학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많은 기록사진들과 같은 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도12). 그렇다면 흑인미술가가 자신들 스스로를 재현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13의 <감사기도>를 그린 헨리 타너(Henry Tanner, 1859-1937)는 필라델피아에서 토마스 어킨스에게서 그림을 배운 미국 흑인 1세대 미술가입니다. 그는 소박한 식사를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포착하였는데 화가의 시선이 관찰자의 시점에 있기보다는 따뜻한 분위기에 스스로 녹아들어 가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도11 제롬 <터어키 군인복장을 한 흑인 소년>, 1869년
 
 
 
도12 알퐁스 베르티옹 인종분류사진, 1893년
 
 
 
도13 헨리 타너 <감사기도>, 1894년
캔바스에 유채, William H and Camille Cosby 소장
 
 
 
 

미술가가 세상을 재현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 즉 어느 지역에 사는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떠한 계층에 속하는지 하는 것들의 관여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에 드러난 작가의 시선을 읽는 것은 미술의 양식을 분석하는 것 못지 않게 흥미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19세기 서구의 미술을 보면서 열강의 남성이 중심이 된 사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현재는 어떠할까요. 도14,15에서 보듯 우리가 현대미술의 대가로 주저 없이 손꼽는 고갱, 마티스의 그림에 분명히 이러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술관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다른 이미지들은 어떠할까요? 유감스럽지만 자연과 야만 그리고 여성을 동일화하는 오래된 방식은 출판물의 표지, 광고, 관광포스터 등등을 통해 지금도 이용되는 있는 것 같습니다.

도14. 폴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 죽음의 영이 지켜봄>
1892년버팔로, 알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도15. 마티스 <목련꽃이 있는 오달리스크>
1923년, 캔바스에 유채, 65 81 cm, 개인소장
 
 
 
도16.『내셔널지오그래피』표지
 
 
 
 
도17. 모로코 관광 포스터,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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