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찌들은 아침 일찍 셀프로 잠에서 깬다. 둘이 집안을 두루 살피고, 냉장고에서 먹을만한걸 좀 추리고, 엄마며 할머니를 깨우는데 군기 반장인 날 제일 느즈막히 깨운다. 둘 다 여시인 것이다. 나도 좀 깨워주라고.

 어제 좀 피곤했는지 오늘은 7시가 넘었는데도 조용했다. 먼저 잠에서 깬 난 나른한 기분에 가만 누워 옥찌들 소리가 들리길 기다렸다. 누나보다 먼저 일어난 지민이가 아침에 먹으면 금메달인 사과를 할머니랑 사이좋게 나눠먹고있는듯 했다. 그러다 엄마가 주방에 가셨고, 민이가 거실에서 부지런히 사과가 몇개 남았나 셈하고 있다가 

-할머니, 할머니

라고 부르길래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던 내가 냉큼 '어'라고 대답했다.

 민이가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잽싸게 내 방을 활짝 열곤 이런 괘씸한 사람을 다 봤나 싶은 표정으로 말했다.

-니가 할머니냐.

-어? 민아. 이모한테 니가가 뭐냐 니가. 이모 삐짐이야.

  삐진척 이불 속으로 더 파고 들었더니  지민인 약간 느끼한 웃음을 짓더니 내 속으로 파고 들었다. 자고 일어난 애기 냄새. 보들거리고 부드러운 냄새. 관절이 뻐근하고, 눈이 부어 거울은 답답하다고 아우성 칠테지만 이렇게 맞는 아침이라면 그건 괜찮다구요.

- 그런데, 민. 오늘 기저귀에 쉬아 안 했어?

 지민인 다시 느끼 웃음을 한방 날리더니 잽싸게 이불을 박차고 나가 다시 사과 시식 모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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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12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의 무한에피소드~ 창작의 원재료군요! ^^
군산이면 가까운데 광주이벤트에 오실 수 없나요? 긁적긁적~~ ^^

hnine 2008-06-12 0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랑 지민이의 공통점. 저도 아침에 눈뜨면 사과부터 입에 물어야 잠이 깨는데... ^^

Arch 2008-06-12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페이퍼 확인하고 말씀드릴게요.//hnine님 사과 귀신이랍니다.
 

 엄마가 지희랑 지민이 아토피에 발라주신다며 화분에 기르던 알로에를 잘랐다. 저번에도 알로에를 바르긴 했는데 그땐 직접 자르는걸 못봤나보다. 옥찌가 흥분을 하며 할머니 바지를 잡고 끌며 따지기 시작했다.

-할머니, 알로에도 아프거든. 알로에 이렇게 자르면 안 되잖아.

-(영문을 모릇던 엄마는) 얘가 왜 그런다냐. 저기 가봐. 어이, 워.

 이러시면서 모르쇠로 일관하셨다. 옥찌들 방에서 뒹글대던 난 무슨 일인가하고 나가봤는데 거실에선 한창 알로에가 불쌍하단 옥찌와 엄마의 언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민인 둘의 주변을 맴돌며 언제 저 알로에를 먹을 수 있을지만 궁리하고 있었다. 그렇다. 지민은 먹보씨였다.

-할머니. 알로에를 자르면 아파.(옥찌는 어떤 주장을 할때면 왼손을 받쳐서 오른쪽으로 치며 말한다.) 개미도 아프고, 나무도 아파. 알로에도 아파.

 +++++++++++++++++++++++++++++++++++++++++++++++++++++++++++++++++++++++++++++++++++++++++++++++++++++++++++++

 어느 봄날, 지희랑 지민이랑 아파트 앞에서 놀고 있는데 지민이가 발을 콩콩 굴리기 시작했다.

-지민, 뭐하는거야.

-개미, 개미

 가만 보니까 개미를 발로 밟아 죽이는거였다.

-민. 이모가 민이를 발로 꽝하면 아프지.

-응

-개미도 마찬가지야. 개미 아파서 엄마, 아빠 못보면 어떡해.(이건 아빠 엄마 가정만을 염두해둔 것 같아서 말을 다시 바꿨다.) 개미가 친구들 보러 못가면 어떡해. 지민이도 그럼 속상하겠다. 그치?

 꽃을 잡아떼는 지희에게도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지희야. 꽃도 아픈줄 다 알아. 꽃이 너무 갖고 싶으면 떨어진 꽃송이를 모아보게.

 단순한 취지로 한 말이었는데. 이게 알로에 아파까지 연결되니 꽤 복잡해졌다.

-지희야, 이모가 할말 있는데

-이모, 잠깐 할머니랑 얘기 좀 하고.

 난감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엄마를 모른척하고, 옥찌를 간지럼 태워서 방으로 데리고 왔다.

- 지희야, 지희 말처럼 알로에도 아플거야.

-그러니까. 그런데 할머니가 칼로 알로에 잘랐어.

-응. 그런데 말야. 지희가 좋아하는 고기인 소랑 돼지도 다 아야해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거야. 지희가 좋아하는 감자랑, 사과도. 이거 안 먹으면 배고파서 지희랑 이모는 꼴까닥 할지도 몰라. 나무처럼 물하고 공기, 햇빛만 먹고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알로에는 안 먹는거잖아. 알로에도 아파.

-응, 그러니까.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한 정말 조금씩만 먹고, 필요한만큼만 쓰자고 하는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모가 옥찌한테 음식 남기지 말자고 하잖아. 꼭 먹을만큼만 요리하고. 물도 아껴쓰고, 지희가 갖고있는 물건 아껴쓰자고. 하나도 안 쓸 수는 없으니까 나무랑 식물들이 아프겠지만, 조금만 아프게 하는거야.

 지희는 수긍을 했는지 말하기 귀찮았는지 알았다며 다시 거실로 나갔다. 나는 나대로 그러는 우린 나무나 꽃에게, 물에게 뭘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일방적인 관계는 위험한데 그걸 너무 당연하게만 생각한건 아닐까? 지희에게 설명한 것들이 좀 비겁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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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람 너를 담을 수 있다면

 옥찌들이랑 월명산에 갔을때다. 지희랑 평상에 누워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지민인 개미들과 대화를 하고.

 -(기괴한 목소리를 내며) 옥찌야 사랑해.

-응? 이모가 낸 소리지?

-아냐. 바람이 지희한테 말한거라던데?

-아닌데, 나무 입은 가만히 있잖아. 이모 맞는데.

-아니야. 얜 나무가 속상해하겠다.

-뭐, 그럼. ( 조금 있다가 지희가 입을 가리며) 큰이모 사랑해.

-옥찌. 이건 옥찌가 한거 같은데. 나무가 어떻게 큰이모인줄 알아? (그러는 나는, 이름까지 말해놓고)

-(지희 혼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생각을 하더니) 시.니.에 이모 사랑해.

 품안에 쏙 들어오는 옥찌를 꼭 껴안아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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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07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의 순발력과 순수성은 따라 잡기 힘들어요.^^

Arch 2008-06-08 13:1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요즘에서야 제가 창의력 부재형 인간인줄 알았지 뭐에요.
 

 삼일 연휴 아닌가. 오늘은 방청소를 하고 군산 시민문화회관에서 열릴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것 말고는 할일도 없었어요. 그래서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난 옥찌들에게 간곡히 부탁했죠.

-옥찌, 딱 한시간만 더 자자.

-그럼 우린 뭐해? 나 심심해.

-응, 이모가 조금만 더 자고, 같이 놀이터도 가고 정말 재미있게 놀아줄게.

-알겠어. 시계 어디로 가면? (지희는 아직 작은 바늘하고 큰 바늘을 헷갈려한다.) 그러니까 작은 바늘 8에 가 있고, 큰바늘이 12에 가있으면 8시거든. 그때까지만 잘게. 이모가 맛있는 것도 해줄게.

- 알겠어. 내가 지민이 데리고 잘 놀게.

 쉽게 수긍하는게 미심쩍긴 했지만 잠도 오고, 아까 꾸던 꿈이 간만의 훈훈한 내용이라 다시 이어서 꾸고 싶기도해서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죠. 꿈은 커녕 기억도 안 나는 뒤숭숭한 장면을 모자이크처럼 구겨 넣다가 더이상은 잠이 안 와 주섬주섬 일어났죠. 집안은 괴기할 정도로 조용했어요. 한시간도 채 안 됐지만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죠.

 거실 곳곳에는 옥찌들의 흔적이 있었어요. 베란다는 엄마 아빠 놀이용 요리터로 변해 물이 흥건했고, 방바닥은 뭘 뿌려놨는지 까슬거렸어요. 그나저나 얘넨 뭘하길래 이렇게 조용한거지?

 옥찌들의 방에 들어섰죠.


현장 사진, 증거 자료1

 콩순이 인형은 발가벗긴채 다리가 의자에 깔려 있고, 온갖 물건들을 다 끄집어낸 그야말로 난장판이었죠. 옥찌들은 어디? 요 녀석들은 창문가에 가서 종이를 뿌려대는 중이었어요.


현장 사진. 증거 자료2

 막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며 뭐라고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무야 어쩌고.

-옥찌, 대체 이게 뭡니까. 이모가 정말 딱 1시간이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옥찌 방으로도 모자라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으면 대체 이모가  몸이 몇개도 아니고 이걸  다 치우란 말입니까? 그리고 지금 위험하게 창문 열어놓고 뭘 하는겁니까.

 내가 잔 잘못도 있고 해서 조근조근 얘기를 했더니 평소엔 말 많은 누나 덕분에 발언권이 없던 지민이가 한마디 했다.

지민 -이모, 편지.

잠꾸러기 이모 -무슨 편지

지희 - 이모 내가 나무한테 편지 써서 보냈거든. 나무한테 잘 받았냐고 물어본거야.

 범행 현장을 바로 잡아내긴 했으나 이거 혼내지도 못하고, 대충 후다닥 방을 정리하곤 나무가 반송시킨 편지를 회수하러 나갈 수 밖에요.

 사건 조사 결과 방바닥의 까끌거리던건 뛰어 다닐때 미끄럼 방지용으로 뻥튀기를 부숴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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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8-06-08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니에님 조카들 얘기 읽다보면, 동화작가도 아니면서 동화의 모티브가 불쑥불쑥 떠올라요 ^^

Arch 2008-06-08 13:17   좋아요 0 | URL
이참에 동화 한편^^ 잘 쓰실 것 같은데.

2008-06-08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배철수의 음악텐트 방송 중.

 오늘은 네버엔딩 팝스토리의 임진모씨와 함께 한 날.

대화 도중 IQ 얘기가 나왔다.

임- 제가 IQ가 좀 낮아요.

배- 아닙니다. 임진모씨 평소에 하시는 말씀이나 출신 학교 등등을 두루 보면 IQ높은 편입니다.

임- 아, 그런가요.

배- 그럼요. 대신 EQ가 좀 낮죠.

임- 그것보다 제가 자신있는게 MQ거든요.

배- 그게 뭔가요?

임- 도덕지수라고.

 이때 전파를 타고 확인불명의 흐느낌이 들렸다. 라디오에 귀를 바짝대자 소리는 굴곡을 거듭한 끝에 배철수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아저씨의 트레이드 마크인 껄껄거리는 웃음 소리.

배-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오바해서 웃었습니다. 임진모씨 간만에 큰웃음 주시는데요. 자기 입으로 MQ가 높다고 하시는건.

임- 아 그런가요?

 이 두분의 대화가 한쪽이 던지면 받고, 밀고 당기는 재미가 있는 만담처럼 찰진 맛을 지닌건 아니다. 하지만 묘하게 중독성이 있고, 정말 뜬금없이 재미있다. 내 얕은 필력으로 그 뉘앙스와 재미를 옮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하면 굳이 강하게 주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예사로 넘기지도 않는다. 느긋하지만 지겹지 않고, 성급하게 톡톡튀거나 막무가내로 구수하지도 않다.

 다만 분별력과 성실함으로 목요일 저녁을 촘촘하게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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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06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Arch 2008-06-06 14:44   좋아요 0 | URL
에헴^^

hnine 2008-06-06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 배 철수 씨의 목소리 자체가 어떤 위로와 힘이 될 때가 있어요.
차분한 여성 DJ의 멘트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고들 하던데 저는 이분의 목소리, 말투가 더 그렇던걸요.
IQ, EQ, MQ, 저도 하나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

Arch 2008-06-06 14:47   좋아요 0 | URL
그럼요. 제가 전에 사연으로도 쓴적이 있지만 가끔씩 사연 보낸 사람이 무안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몰아세우기도 하고, 힘내세요 이 한마디에 괜히 코끝이 시큰거리기도 하니까요. 아마 그래서 음악텐트가 오래가는게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