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홍대의 여느 까페와 다르지 않다. 좀 다른게 있다면 군산에 있다는 것 정도? 그저그런 비슷한 까페의 재탕 인테리어라고 생각해봄직한


창가의 의자, 조박사 백반이며 가정식 백반은 까페 분위기가 어슷거리는 바깥 풍경이겠지만.


아이팟으로 틀어주는 음악, 음향기기도 스테레오 타입이다.


인공 나무며 그 아래로 흩어진 책까지, 어쩜 이리 익숙하단 말인가.



오픈된 주방도 이젠 더이상 새로울게 없는, 디테일 빼고는 다른 곳과 그다지 차이가 없는 이 곳, 러블리


홍차며 커피가 아주 특별하게 맛있는 것도 아니다. 쿠키가 살짝 맛있긴 하지만 홀딱 반할 정도는 아니다.

 의자가 아주 편한 것도 아니고, 북까페처럼 읽고싶은 책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다. 칫릭까지는 기대 안 해도 총, 균, 쇠를 여기서 볼줄이야. 아니, 제목은 이토록까지 넣어서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목소리로 조잘대놓고는 왜이리 반감있단 소리만 하는걸까. 이 모든 부정문은 곧이어 펼쳐질  반전을 보여줄 것처럼 집요하다. 그러니까 이건 처음 몇번, 러블리에 대해서 잘 몰랐을 때 갖게된 산발적인 느낌이었다. 사장님이 나를 알아보고선 컬린스잔에 얼음을 가득 담아올때쯤이 되어서야 나의 러블리는 총총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러블리, 이곳은 정말 까페를 하고 싶은 누군가의 손길이 곳곳에 스며든 곳이며 번거로운 드립커피며, 증기식 커피까지, 자그마한 소도구까지 고르고 골랐을 누군가의 맘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누구나 꿈꿨겠지만 잘할 수 없었을 까페를 섬세하게 단장하고, 쿠키를 굽는 이 남자, 러블리의 사장을 볼때면  자신이 정말 좋아서 하는 일에 애정을 갖으면 바라보는 사람의 취향과는 별개로 감동을 줄 수 있다는걸 알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다찌마와 리가 내 취향과는 한뼘쯤 거리를 두면서도 감독이 이 영화, 정말 하고 싶어했구나 신나하면서 만들었겠다란 생각이 들자 혼자 키득대며 어깨를 들썩이며 영화를 보게됐던 것처럼. 

 그러자 이곳의 틈새와 일반적이라고 생각한 풍경마저 사랑스러워졌다. 좀 더 눈길을 준다면 곳곳에 숨겨진 아기자기한 소품과 차곡차곡 정리된 식기들이 보이고, 그러다 컵받침에마저 정감어린 시선을 주고야 말것만 같았다. 나는 이곳에 자주 드나들어 사장님이 직접 그렸을법한 귀여운 캐릭터 쿠폰에 도장을 쾅쾅 찍었고, 아마도 곧 달콤한 치즈케잌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웃는게 약간 어색한 이곳 사장님은 어떤 멘트를 날리며 (살갑게 대하는 타입은 전혀 아니다.)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맛있는, 러블리만의 느낌을 전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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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1-1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카페를 꿈꾸는 이들이 종종 있더만, 난 절대 노우~~~
누군가 카페를 한다면 난 가끔 즐기러 가고 싶을 뿐!
왜냐면 손님이 있든 없든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게 싫어서 절대 못할 거 같거든요.ㅜㅜ

다락방 2008-11-17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니에님. 혹시 러블리의 사장님은 알라디너가 아닐까요? 막 알라디너였으면 좋겠어요. 흣.
저는 가끔 타인을 만나게 될 때 이사람은 알라디너일까 아닐까를 혼자 생각해보곤 하거든요. 그래서 "인터넷 서점은 어딜 이용하세요?" 를 묻기도 해요.

Arch 2008-11-1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피속엔 자유분방함이 흐르고 있을 것 같아요. 지키는거 말고, 막 재미있게 노는거라고 생각하면 누군가 내 공간에 놀러왔다가 재미있게 놀다가는거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다락방님, 그분, 책 안 읽게 생겼는데. 책 읽게 생긴 얼굴은 뭔지 말해보라고하면 말도 못할거면서. 그래도 제가 슬쩍 한번 물어볼게요. 만약 정말 알라디너면 히히...(웃음의 의미를 다락방님이 자주 생각하는 '그쪽'하고 연관시켜도 무방함)

다락방 2008-11-17 13:02   좋아요 0 | URL
(덩달아) 히히..

Arch 2008-11-17 13:41   좋아요 0 | URL
(덩달아) 으 음...(그쪽의 소리로 상상해도 됨. ㅋㅋ 자꾸 이런다. 맛들였어요.)

다락방 2008-11-17 14:37   좋아요 0 | URL
아잉~ 난 몰라욧! >.<
 

 달콤한 나의 도시 이후로 정이 붙을만한 드라마가 없었다. 베바(무스탕님 고마워요^^)는 다른 사람들의 버닝 모드에 달아올라 첫회부터 봤다가 극이 진행되는게 좀 억지스럽고 여배우로 나오는 분의 오바스런 연기가 눈에 거슬려 봐지지가 않았다. 물론 강마에의 일면은 얼핏 지나치다 보긴 했는데 이게 그렇게 카리스마가 있나(아, 웬디양님 미안해요^^)싶기도 했다. 특히 중반에 철거민들 앞에서 합창 연주하기까지의 과정이 개연성을 떠나 웬지 억지스러웠고 그 과정에서 철거민의 아들에게 자존심 운운하는게 눈에 거슬리고 말았다. 자존심보다는 당장의 배고픔이 우선일 수 있고, 아이의 굶주림이란 민감한 부분이긴 하지만 웬지 저렇게 다루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드는거다. 미안하지만 이걸 논리적으로까지 설명할만한 능력은 안 된다.

 그 다음으로 본게 바람의 화원인데 신영복과 김홍도의 생애를 픽션으로 재구성한데다 화면에 똑 떨어지는 그림이 정말 예뻐서 첫회부터 몰입모드였는데 너무 극을 질질 끄는데다 박신양의 어깨 힘! 연기와 뻔한 결론으로 흐르는게 보여서 안 봐지게 됐다. 타짜란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는 것이 영화보다 감이 떨어지는건 물론이고 긴장감 고조하려는 음악까지 별로였으니 뭐.

 그리하여 달짝지근하게 볼만한 드라마는 포기하고 영화나 볼까하다 그냥 속는셈치고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게 되었다. 노희경, 표민수 콤비라 원래부터 볼까말까 망설이긴 했는데 그건 전에 '굿바이 솔로'가 그 틀과 관계의 남다름에도 불구하고 결론이 억지스러워 실망했던걸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회부터 지금까지 방영된 분량을 다 보고서야 이 드라마에 반하게 되었고, 곧 버닝 모드로 돌입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 아, 난 최근들어 버닝 모드란게 타오르다가 아니라 날아오른다, 잠수탄다란 말인줄 알았다. 버닝에서 새가 난다를 떠올린건 뮝미. 버닝이며 뮝미며 인터넷 용어들이 좀 귀엽다.

 각설하고,

 초반의 시청률 부진인지 그간 드라마와 다른틀 때문인지 이 드라마를 많이들 안 보는거 같아서 알라딘에서 팬질 좀 하려고 한다.

 앞서도 자꾸 다른틀 얘기를 했지만 이 드라마는 매회가 옴니버스식으로 제목이 달리며(설레임과 권력관계, 적, 아킬레스건 등으로) 방송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온에어와는 차원이 다른게 극적인 긴장감을 위해서 환경을 밀어부치는게 아니라 환경 속에 사람이 녹아있고, 사람들이 그 환경을 기반으로 알아서 연기를 해나간다. 시나리오나 드라마 작법에서 누누히 나오는 작가가 만든 캐릭터들이 알아서 연기를 하는 것이다. 드라마 속에 작가나 PD가 보이는게 아니라 연기자들, 각자의 삶에 대한 시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처럼 다양한 성격을 갖고 가진 인간이 등장한다. 누구에게는 멋진 PD가 동료들에게는 시청률만 잘 나온다고 잘난척하는 PD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재능있는 직장동료가 다른 사람에게는 '쉬운 여자'가 되기도 한다. 쉽다고 지칭받아 속상한 그 누군가는 자꾸 자신이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하는지 묻고 다니다 한뼘 정도 성숙하기도 하고. 그런틀을 넘어서서 노희경은 전작 '굿바이 솔로'에서 보여준 다층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엔 현빈과 송혜교가 주인공이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촘촘히 전개되기 때문이다.

 자기는 작가니까 뭐든 자기 맘대로 해야만 한다고 고집하지 않고 작가와 PD와의 권력관계를 반전시키는 작가가 있고, 나이가 있지만 노처녀나 주인공의 배후세력으로 밀려나지 않고 주인공을 꿰차지만 삶은 열심히 살만한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연기자가 있다. 능력있고 유들유들한 성격이지만 자신의 성격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은 신인 배우 때문에 골치를 앓는 PD와 그 PD에게 꼼짝없이 찍혀버린 문제 조연출.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김군과 다른 곳에는 그토록 쿨하면서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게는 여전히 감정조절이 안 되는 국장과 국장의 가슴을 덥석 안으며 애교를 부리는 부장. 예전에 사귀었지만 서로의 연애사를 존중한다며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시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들은 지금껏 우리가 봐온 드라마 속 인물들과 좀 다르고, 다름에도 쉽게 공감할 수 있게 생생하다. 생생함은 우선 그들의 입장이 이해되는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쯤은 기본이다.

 그리고 송혜교와 현빈. 먼산을 바라보며 청순한 연기를 하던 송혜교보다 풀하우스의 송혜교가 더 좋았던 나는 이 드라마에서 그녀가 연기자로서 가진 매력을 백분 발휘하는걸 볼 수 있다. 정의감으로 똘똘 뭉쳤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전혀 무관한 입장을 보여주는 스타일도 아니고, 영악하지만 일반적인 감정선의 결핍이 보이기도 한다. 일에 대한 열정과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한 고집도 대단해 뭔가에 빠져든 사람에게서만 보이는 밝은 빛이 가끔 눈에 띄기도 한다. 직장의 여성을 보여준답시고 '커리어우먼복'이란 것을 걸치고 돌아다니는 것만 보여줘선 안 된다는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아프락사스님이 송혜교를 좋아한다면서 연예인 같지 않다는 소리를 한적이 있는데 나 역시 동감한다. 연예인처럼 예쁘긴 하지만 연예인같지는 않다. 난 이 작품에서 그녀의 욕심을 봤고, 그 욕심이 어떻게 하면 화면에 예쁘게 나오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이 '주준영'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가에 닿아있다는 것에 점수를 주고 싶다. 물론 송혜교, 단발머리가 썩 잘 어울린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줄곧 까칠해 드라마 흐름과는 상관없이 별로 느낌이 안 좋았던 현빈은 이 드라마의 초반에 전작의 느낌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연기를 해서 조마조마하게 만들더니 곧 본색을 드러냈다. 현빈 아니 정지오는 까칠한게 아니라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할 뿐이란 것. 예민한 정지오는 주준영과 다시 관계를 시작하며 점점 본래의 정지오 안에 감춰진 부드럽고 자상한 면모가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아, 이런저런 얘기로 글이 길어졌지만 정말 이 드라마가 좋다.

 뭔가가 이렇게 좋아라고 한게 정말 오랜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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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11-12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 저한테 미안해할것 있나요. ㅋㅋㅋ 제가 합창신 보면서 좀 많이 울긴 했지만. ㅋㅋㅋㅋ

나도 이 드라마 좋아해요. 이번주건 아직 못봤는데..
송혜교가 얼굴 내밀고 손 턱 아래로 갔다대면서 '주준영' 할 때 정말 넘 예쁘죠.

아는 언니가 이 드라마 마케팅하는데, 시청률 안나와서 걱정인가보아요.
시니에님이 알라딘 지부 맡아주세요. ㅋㅋㅋ

Arch 2008-11-12 10:30   좋아요 0 | URL
그런거라면 자신있죠. 열심히 입소문 내겠습니다.

캬악!! 나도 그 표정이며 그 말투며 정말 예뻤어요. 현빈이 어디서 여우짓이냐고 물어보는 것도 물론 귀여웠지만.

그리고 바베(진짜네 ㅋㅋ 베바 맞아요. 바베는 또 뭘까. 바베큐 이런거 같은데..)는 그럼에도 좀 미안해요. 그러고보니 거꾸로 댓글을 다는 것 같네요.

조선인 2008-11-12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러니까 이런 드라마가 있다는 거군요. 10시면 자는 사람이라...긁적긁적.

Arch 2008-11-12 10:2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더랬죠. 본방 말고 재방으로 봐도 재미있으실거예요.

마늘빵 2008-11-12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교혜교! 혜교 얼굴을 한 번도 못보다니. 바쁜 일 끝나면 몰아서 볼테닷.

Arch 2008-11-12 10:29   좋아요 0 | URL
알아요. 알아. 아프님 혜교 사랑은!

무스탕 2008-11-12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닥속닥.. 시니에님. 바베가 아니고 베바 아닌가요? +_+ 본문에도 댓글에도 다 바베에요)
울 신랑한테 리모컨 넘기고 전 딴짓 하느라 티비 안봐요. 근데요, 뭐 하는지는 다 알아요..
어제도 신랑은 '에덴의 동쪽' 이랑 '타짜' 랑 '그들이 사는 세상'을 번갈아 가며 보더군요.
김갑수가 그들세상에도 나오고 타짜에도 나온다고 같은시간에 나오면 어쩌냐고 투덜거리며 보더군요 --;;

Arch 2008-11-12 10:3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모름지기 드라마는 몰입인데.. 대단한 옆지기님이시네. 바베 부분은 다 고쳤어요. 아닌가? 다시 한번 봐야겠다. 김갑수는 해신에서 좀 어색했는데 자꾸 보면 이 사람이 연기의 동선과 표정까지 다 연구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두군데 드라마에서 분위기가 다 다를 것 같은데...
 

 체육대회를 끝나고 교장이 준 반비가 있었다. 이 돈을 회식에 쓸 것이냐 곧 있을 시험을 보러가는데 교통비로 쓸 것이냔 것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애초에는 교통비로 쓰고 나머지는 반비로 하자는데 의견이 모였지만 갑자기 회식을 하자는둥, 교통비를 쓴 후 남은 돈을 시험 안 보러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둥,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게다가 걔중에는 시험 안 보러가는 사람에게 주는 돈이 교통비 대비 사람수에게 지급되는 돈액수와 맞지 않다는걸 문제제기한 사람도 있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반장이 시험을 안 보러가는 자신과 소수의 입장에 맞는 형평성을 맞춘다며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려버리자 서로 목소리가 높아지고야 말았다.

 언성이 높아지다 곧 모두가 동의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어차피 시험을 모두 보기로 했는데 개인 사정으로 빠진 사람이 있는거니까 회식을 할 때처럼 교통비로 쓰고 나머지는 반비로 하자는 쪽으로 얘기가 정리가 된거다. 그 과정에서 난 사람들이 무슨 문제가 생길 때 어떤식으로 해결하는지에 대한 단면을 봤다. 어떤분은 이런저런 이야기 필요없이 그 돈은 기부하고 그냥 돈 걷어서 교통비를 하자고 했고(이건 전혀 문제에 근접한 해결방법이 아니었다.) 다른 분은 회식할 때 빠진 사람에게 돈을 따로 나눠주지 않는단 말을 뱉어내며 의기양양해 했고, 또 다른분은 이렇게 싸우지말고 잘 지내자며 좀 뻔한 얘기만 늘어놨다. 나로 말하자면 이건 싸우는게 아니라, 공금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의견을 모으는거라고 말은 했지만 나 역시 그 돈으로 교통비를 하고 나머진 통닭이나 같이 먹자란 의견이 있었다. 나 역시 입장표명이 불분명했다. 내 경우는 분위기 봐가며였고, 대부분의 사람도 그런식이었다. 그 과정에서 반장은 질려버렸다며 집에 가버렸고, 개인사정으로 시험 안 보는 친구들은 소외당하는게 아닌가란 의견이 불거지기도 했고, 자기돈 안 들이고 반비로 교통비를 충당한 다수의 사람들은 뒤끝이 찜찜해지고 말았다.

 어디서든 사람 사이에선 논쟁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난다지만 돈과 관련해선 무척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여지기 쉽상이다. 자신의 대범함을 강조하려고 선을 넘는 한턱을 쏘기도 하고, 쪼잔한 면모를 들키지 않으려고 무리한 제안을 해버린다든지 아니면 작은 소비에는 너그럽다가 자기가 정해놓은 선을 넘어서면 경직되는 면이 있다던가. 얼마 전 읽은 최순덕 성령충만기(이기호 작)의 한 단편에선 어떤 연출자에 대해 설명하면서 '작은 소비에는 집착하지만 큰 액수에는 자신이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는걸 보여주려고 부러 대범하게 처리해 실속이 없는' 얘기가 나왔다. 난 이 부분을 보면서 큰 돈을 쓸일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데 부러 통 큰 척을 하다가 빈곳에선 푼돈에 연연하는 내 입장이 느껴져서 뜨끔했다.

 요는 속내를 누가 얼마나 세련되고 상식적으로 감추느냐의 문제인데 웬일인지 나이 들수록, 잃을게 없다고 자인할수록 바닥을 드러내는건 시간문제가 되고마니 잃을게 어느 정도 있는 삶이 인간답다고나 해야할까? 사실 이건 터무니없는 궤변이다. 어쩌면 합리적인 소비를 할만한 토대가 안 된 상태에서 계속 선택을 해야한다는 문제이거나 이도저도 아닌 그저 한 사람만 상처받아 떠나버린 후의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반장은 집에 가서 자신의 의견과 반대된 사람들을 욕하고 있을까. 나는 지금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막무가내로 떠들던 입을 자책하는 대신 이렇게 두리뭉실하게 얘기를 끝내버리려고 하는걸까?

 모두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단 주문은 사실 나는 좀 덜 상처받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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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것 타령이 아니었어도 읽고 싶은 소설이었다. 가을이었고, 가끔씩 베갯머리에서 내 냄새뿐 아니라 묵은 바람 냄새가 나기도 했으니까. 후각으로까지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는 적절했다. 책을 읽으면서 서재에 올리려고 에미와 레오의 유머를 메모하고, 책 귀퉁이를 접어놨다. 이거 정말 웃기지 않았냐며 당신도 거기서 에미의 신랄하고 예리한 재치에 웃지 않았냐고 공감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 지점에서 한참이나 빗나가버렸다.

자전거를 굴리며 산의 바람을 가득 얼굴에 품었다. 추웠지만 움츠려지지 않았고, 한달 전의 그 바람보다 배는 차가워진 바람에도 마냥 신나 있었다. 집에 가서 얼른 읽어야지, 에미가 이번엔 무슨 얘기를 할까, 레오는 어떤식으로 대응을 할까. 그러다 문득 바람처럼 맘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아버렸다. 그건 조빔의 속삭임 때문도 아니고,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에미와 레오가 곧 150페이지를 넘어서는 어딘가에서 분명 자판을 치며 이거 어떡하면 좋지라는 차마 칠 수 없는 말들을 주워삼키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건은 생각나지 않았다. 꼭 그쯤에서 얘기가 진전된다는 것도 아니다. 둘은 지금처럼 씩씩하게 아웅다웅하면서 친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제목에서, 귓가에서 씽씽대는 바람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마음 속에선 작은 목소리로 해피엔딩을 바라면서도 그들이 너무 쉽게 행복해져버리면 좀 허탈할 것 같단 생각이 떠올랐다. 드라마의 다음회를 기다리는 심정이랄까. 그저 책장만 펴놓고 가만히 등받이에 기대어선 읽기만하면 되는데도 마음은 벌써 다른 곳에 홀려버린 듯 홀리고 싶은 듯.

빠져든다거나 몰입하고 싶다는 수사는 너무 반복적이다. 나는 좀 재잘거리고 싶고, 좀 더 벅차오르고 싶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이토록 남의 연애사를 흘끔거리며 벌써 쓸쓸함의 기운을 눈치채는 청승을 떨게 아니라 처음에 그들 이야기의 따사로운면들을 발견하고 폴짝대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길고 길게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내게 있다면 좋겠단 생각도 떠올랐다.





김수영(金秀映)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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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11-05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잘재잘 벅차오르고 싶었던 마음. 완전 공감이요/

다락방 2008-11-05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은 목소리로 해피엔딩을 바라면서도 그들이 너무 쉽게 행복해져버리면 좀 허탈할 것 같단 생각, 이 뭔지 알것 같아요. 그리고 올려주신 [책]이란 시도 너무 좋아요.

Arch 2008-11-05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었다는(읽고있는) 이력이 이렇게 기분 좋을 때가 없었어요. 웬디양님은 아실거라고 생각했어요. 다락방님, 우린 다 조금씩들 알고 있나봐요. 저도 봄눈이란 말마저 좋아졌는걸요.

다락방 2008-11-05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새벽세시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어요. 알라디너가 죄다 읽었으면 좋겠어요. 저 정말 친구들에게 선물한다고 몇권을 샀는지 몰라요. 저때문에 2쇄 찍었을거예요. ㅎㅎ

Arch 2008-11-05 14:2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에미같애.^^

다락방 2008-11-06 08:37   좋아요 0 | URL
그럼 저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가슴 큰 금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rch 2008-11-07 09:23   좋아요 0 | URL
생긴건 생각 안 해봤는데, 뭐 그걸 원한다면야^^ 안젤리나 졸리를 괜히 좋아하는게 아니었어.ㅋㅋ

무스탕 2008-11-05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

형식보다 진행 내용이나 결말이 맘에 들은 책.
메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책에는 에미와 레오만이 등장한다. 진행을 돕기위해(?) 에미의 친구 미오와 마무리를 위해 에미의 남편이 나온다.
얼굴 한번 본적없이 사랑이 키워지고 사랑이 사그러드는 연인이 될수 없는 연인들..
우연이 이렇게 발전될수도 있겠구나 싶고..
자동응답에 남긴 서로의 짧은 목소리로 느끼는 감정은 '양들의 침묵'에서 죄수(이름이 생각 안나..)와 변호사의 찰나의 맞닿음을 연상시킨다.
둘이 만났으면 어찌 됐을까를 무한히 상상하게 만들며 마무리 지은 책은 정말 우수한 결말이라 말하겠다.
책을 알게해준 다락방님, 감사~☆

이 책을 전 7월에 읽었네요. 읽고나서 적은 초간단 감상문.
언젠가 제가 웬디양님의 페이퍼에 남긴 사이트 관리자 모강지를 흔들어 둘을 만나게 하라는 감상도 본심이고 이렇게 난 결말도 본심이고요..
어떻게 결말이 났어도 훌륭했고 아쉬웠을거라 생각해요.

Arch 2008-11-05 14:28   좋아요 0 | URL
^^ 막 우리가 화제의 책으로 펌프질하게 하는건 아닐지, 언젠가 제가 한번 써보고 싶었던 형식의 책이었어요. 무스탕님 역시~

다락방 2008-11-06 08:37   좋아요 0 | URL
막 뿌듯하네요 ㅎㅎ

^^v

순오기 2008-11-05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세시, 바람이 불면 난 하마같은 남편 품으로 기어드는뎅~~~ㅎㅎㅎ 메롱!!
 

 예전에 부지런히 녹화하던 sex and the city와 friends테잎을 다른 방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옥찌들 물건을 넣을 수 있게 하는 대대적인 정리를 하느라 몸이 녹초가 되어버렸다. 하는김에 양말 정리며 기타 등등 정리로 정리 의욕을 고조시키다 그만 한밤의 청소까지 손을 뻗친 상태. 엄마가 너무 힘들다며 전기구이 통닭에 맥주 한잔을 제안하셨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집 근처에 있는 신토불이에 가서 닭을 사가지고 오는데 닭구이에서 풍기는 역한 냄새에 '어, 오늘 닭이 안 땡기나'했는데 안 땡기기는!  앉은 자리에서 모두들 배부르다며 물어날 때까지 가슴살을 맥주에 살살 녹여가며 먹어댔다. 이러면서 볼록 솟은 배를 귀여워해줄 누군가가 안드로메다에서 날아올거란 앙큼한 생각을 하다니!

 울산에서 일하시던 아빠도 돌아오고, 옥찌들도 안 자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던지라 온가족이 맛있게 통닭을 먹는  자리려니 했는데 웬걸, 다 먹고 난 뒤에 안 자고 계속 장난만 치는 옥찌들에게 양치질을 시키느라 알딸딸한게 깬데다 민이가 비데 리모컨을 자기도 갖고 놀아야하는데 못갖고 놀았다며 울어버리는 바람에 고함과 협박이 오가는 험악한 분위기가 됐다. 그래도 이를 닦다가 화해를 하는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 웬걸. 요새 밤에 쉬아를 가리고 있어서 웬만하면 밤에 물을 안 먹는 민이가 양칫물을 먹는 바람에 다시 상황이 악화됐고, 민은 고함을 지르며 울고, 옥찌는 옥찌대로 왜 비데 리모컨을(여기서 노래가 나온단다) 선반 위에 뒀냐며, 그러면 자기가 의자를 받치고 올라가야하는데 그 불편함을 이모가 아냐며 나를 윽박질렀다. 정신 상태가 좀 온전했다면 사정 얘기를 했을텐데 취한데다 다른때와 다르게 할아버지 할머니 빽 믿고 더 말을 안 듣는 옥찌들이 미워서 그만 소리를 빽지르고 말았다.

 아빠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벼르고 있던 옥찌들이 단번에 달려들어 나의 죄상을 낱낱히 조아리기 시작했고, 아빠는 시늉으로나마 절대악인 나를 때리는척 했다. 솜방망이 주먹이 아플리야 없겠지만 서운한 맘도 있었고, 억울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그만 맥주가 점점 몸의 곳곳을 휘돌 즈음엔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고 말았다. 내가 옥찌들의 맘의 모든 부분을 아우를 수 없음에도 아우를 수 있다는 자만이, 내가 온전히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의 답답함이 좀 해소되었다고나 할까. 전처럼 민이랑 싸우시기만 하지 않는 아빠며, 든든히 옥찌들의 서포트가 되어줄 엄마를 보며 책임감이 덜해서라기 보다는 옥찌들이 편향되지 않고 두루두루 맘을 줄 대상이 있다는게 맘에 들었다. 아, 무슨 말을 하는거지. 제이드님이 가끔 하시곤 하던 음주 페이퍼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딱 한잔 반이면 충분할 알딸딸한 느낌. 조금 서둘러 먹었던가? 알 수가 없다. 2PAC의 changes를 듣고 있다. 뜬금없이 즐겁다가 불현듯 침체되기도 했다가 다시 다른 음악에 업되고. 아 짜릿해. 나름 자족하는 음주의 맛을 점점 알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오늘의 말미는 개선문.

그들의 여행 중에 라빅의 말,

-당신은 나의 뿌리가 없는 행복이 아니었던가. 구름 속에 있는 나의 행복, 서치라이트의 행복이 아닐까? 자, 키스라도 한번 해주지. 생명이 오늘처럼 귀중했던 때는 한번도 없었지. 생명같은 것은 조금도 가치가 없는 시대이긴 하지만.

 나의 하루를 그야말로 뜬금없이 들뜨게 하는 것들을 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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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8-10-2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술을 마시면 시니에님 같은 그런 '짜릿한' 느낌의 단계는 그냥 뛰어 넘어 바로 인사불성 단계로 가는 것일까요. 그래서 저는 음주페이퍼도 못쓴답니다.
개선문, 라비크 (제가 읽었던 책에는 라비크라고 써있었거든요 ^^), 그 책을 고등학교때 읽고서 얼마나 좋았던지, 그리고 또 얼마나 뭔가 아는 체 하고 다녔던지~ 오랜만에 기억을 불러일으키시네요.

Arch 2008-10-24 10:02   좋아요 0 | URL
hnine님! 그러니까 막 허겁지겁 먹은 다음에 페이퍼를 쓰기 시작하는거죠. 페이퍼 말미엔 사실 눈도 침침해 뭔소리 썼는지도 잘 몰라버린답니다. hnine님도 그 맛을 아시는군요. 라빅의 독백과 조앙을! 라비크란 이름도 좋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