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 신문에서 지오가 '나쁜 남자'로 변해서 어쩌고 하길래 설마 했는데 역시나 설마였다. 대체 나쁜 남자, 좋은 여자, 착한 사랑, 운명적인 것, 갈등의 단순화란건 어떤 머리로 개발한걸까. 갑자기 교육정책까지 떠오른건 좀 오바긴 하지만 그전의 독법으로 그사세를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한 것도 어쩔 수가 없다. 지오는 나쁜 남자가 아니라 그저 초라하기 싫었고, 젊었을 뿐이다.

내가 예고편과 몇 가지 힌트를 얻어서 추측을 해본건 지오가 자신과는 다른 준영에게 거리감을 느껴선 헤어지자고 하는 것까지. 그러다 녹내장에 걸린걸 준영도 알게 되어 유야무야 화해하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나 역시 기존의 드라마 독법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노희경에 미칠려면 한참이나 멀었다.

11, 12회에선 자꾸 IP박스를 툭툭 치고서 멈춤으로 놓고선 기록하고 싶은 대사들이 많았다. 지오가 헤어짐의 이유는 사실없다란 말을 한 것에서부터 자신이 이러는걸 엄마가 보면 젊어서 힘이 남아돌아 어쩔줄 몰라 그러는거라고 말할거란 나레이션 뒤에 그만, 어쩌겠는가 젊은데란 말을 하는 것, 괜찮아질거란 말에 전혀 괜찮지 않고, 엄살 아니라고, 자꾸 몸에서 열이난다는 준영의 말까지. 나는 그사세가 드라마인데 드라마같지 않아서 점점 좋아진다.

다시 신문은 말한다. 지난주 대비 0.2%의 시청률 상승으로 인기몰이를 한다며 호들갑을 떨면서 현빈의 오열 연기와 송혜교의 눈물 연기에 호평이 쏟아진다고. 솔깃한 기사이긴 한데 그다지 와닿진 않은게 그사세의 시청률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게 살짝 뻥이 아닌 대단한 뻥이란 느낌이 오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게 시청률로 결정되는건 아니다. 그리고 분명 그들의 연기에 찬탄하는 사람들과 열광하는 무리가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그사세의 PD들만큼 시청자며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도 시청률에 연연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청률은 광고수입과 연결되고 이건 나중에 또 드라마 작업을 할 수 있는가까지 이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호들갑 이면에 있는 안간힘을 더 일찍 봐버린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몇천 가구를 대상으로 한다는 시청률 조사가 정말 광고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걸까? 그토록 많은 돈을 들이는 광고인데 효과와 비용을 따져서 안배를 한다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엔 그사세 열혈 팬들이라면 광고주가 그사세이기 때문에 광고를 붙인다는식으로 홍보를 한다면 충성 고객 선언을 할지도 모르는데. 이건 그쪽 사정 모르는 어느 그사세 광팬이 되어버린 자의 푸념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그사세가 기존의 드라마 독법에서 비껴선 것처럼 시청률에 조금만 연연했으면 하는 맘에서, 언론에서도 다른식으로 접근했음 하는 맘에서 막 얘기해보는거다.

오늘 고속 버스 안에서 본 에덴의 동쪽 광고에서 '애증이 엮인 관계, 지독한 복수와 거침없는 사랑, 대단원의 화해'란 문구가 눈이 띄었다. 이런 식인데 어떻게 게임이 되겠어. 어떻게 보면 밋밋하고 다른 쪽으로 보자면 사정없이 몸달도록 재미있는데.

그나저나 난 난데없이 헤어지자는 지오 때문에 준영이 울 때마다 맘이 너무 아파서 자꾸 준영아, 울지마.라고 중얼거렸다. (송혜교야 어찌됐든 말이다. 그럼에도 송혜교 재발견 중이다.)베개에 얼굴을 붙이고 누워선 준영아 울지마라고 하는데 이 친구는 작정이라도 한 듯이 친구들까지 불러와서 운다. 그러면서 그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갖게 한 자기 얘기를 한다. '설레여서 어쩔줄 모르고 만지고싶고 보고싶은 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준 따뜻함은 그가 보듬어준 부분들은 참아지지가 않는다. 그는 내게 아빠였고, 선배였으며 멘토였고, 애인이었으며 친구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펑펑 울고 싶을 때 친구들 앞에서 무너지는 법을 알려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많은 부분을 생략한데다 입에 착 달라붙지 않게 읽히는건 받아쓰기 대신 순전히 내 기억에 의지해 휘갈긴 탓이다.)

앞으로 둘은 쿨하게까지는 아니지만 차마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던 헤어짐의 이유에 대해서도 서로 이해하고 넘길 것이고, 그러다 문득 누군가 차가운 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쥐듯이 서로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날이 오겠지.

그러니까 준영아, 그만 울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해한모리군 2008-12-08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여성스러운 연애담이고 사실적인거 같아요.

Arch 2008-12-08 09:46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반갑습니다. 그렇죠? 여성스럽다는 것에 씌워진 이미지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편이 더 맘에 와닿아요.
 

 화락화락 버닝해야하건만 사실 그사세 시청에도 굴곡이 있었다. 나는 충성을 지키기 위해 시청률이 안 나오니 닥본사를 해야할까 싶었던걸 시청률 조사 대상이 아니란걸로 위로 삼으며 IPTV로 줄곧 시청을 해왔다. 그러다 지난주엔가 어어, 아니 감히 내가 빨리감기를 할줄이야 하는 순간이 왔는데 정지오의 아버지가 방송사로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대목에서였다. 아버지와의 관계,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인 지오와 잘 살지만 약간 천박한 엄마를 둔 준영의 대비를 보여주려는 장치이며 곧이어 아버지와 지오의 화해를 위한 발판인건 알았지만 장면장면이 참 재미없고 소모적이란 느낌만 들었다. 준영이 규호의 B팀을 맡는 것도 일이 그렇게 되려고 하려는건 알겠는데 지오의 '얼른 돈 벌어서 너네 엄마맘에 들었으면 좋겠다'란 말 때문이란 것도 선뜻 이해가 안 갔다. 연애나 결혼에 대한 다른 시각을 지상파에서 기대하는건 무리겠지만 그런 기운을 풍겼는데 대뜸 '집안'이라니. 작품에 나온대로 PD는 갈등을 만들면 일이 쉽게 풀린다는걸 위해 부러 설정한 상황이 아닐까 싶은, 튀는 몇몇 장면 때문에 극의 몰입도가 좀 떨어졌다.

 전에 굿바이 솔로를 볼때도 그랬다. 다른 이야기,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 이제껏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를 죄다 쏟아놓았던 초반의 속도와 감각이 뒤로 갈수록 용두사미. 갈등은 효과적이지 않고, 등장인물의 감정선도 설득력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다시 이번회차를 볼까말까하다가 이왕 빨래도 개울겸 틀어놨다.

 이번회에선 (9회던가) 이혼한다는 엄마의 전화를 무시하는 준영과 그런 준영을 이해 못하는데다 자꾸 긁어부스럼 만드는 지오의 얘기가 주축을 이룬다. 지오는 그림 좋다고 드라마인게 아닌 것처럼 자신과 가장 가까운 엄마도 이해 못하면서 무슨 드라마를 하냐고 준영을 몰아세운다. 준영은 모든게 심각한데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죽었다 깨나도 자신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선배는 그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에 철저하냐고 쏘아붙인다. 준영은 엄마의 손길을 그리워하면서도 엄마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지긋지긋한 순간들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데 안도한다. 갈 곳이 없어 방황하던 준영은 이석우 작가집에서 윤영과 김군이랑 진실게임을 하게 된다. 이런 유치한걸 왜하냐며 툴툴대던 준영은 곧 서로 친해지게 되면서 털어놓는 비밀이나 치부에서 힌트를 얻는다. 처음 말하는게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쉬운거라는, 가까워지려면 정말 비밀을 말해야할까는 여전히 보류 중.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되지않고, 세상이 작당한 듯이 자신을 따돌린다고 느낀 날, 준영은 누군가를 붙잡고 엉엉 울고싶어 아빠를 찾는다. 지오가 엄마가 아닌 아빠를 처음 봤다면 참 좋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준영이 사랑하는 아빠, 어린 딸에게 보들레르의 시를 읽어줬던 자상하고 멋진 아빠. 잠시 울고나면 괜찮을줄 알고 찾아간 아빠의 집에서 준영은 다른 여자 목소리를 듣는다. 그 길로 다른 PD의 환송회를 하는 자리로 온 준영. 모두들 웃고 떠들며 신이나 있는데 준영 눈에 눈물이 고인다. 입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것처럼 웃고 있는데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다. 지오는 준영에게 마음으로 묻는다.

-준영아, 무슨 일 있는거야?

 몇개의 복선으로 미루어볼 때 난 준영의 엄마가 불륜을 저지른줄 알았다. 그런데 원망해야할 대상이 아빠로 바뀐 순간 그녀의 마음의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가장 믿고, 사랑했던 것에서 밀쳐진 기분, 그녀가 조금씩 이제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굳이 준영이 너를 사랑한다거나 스스로에게 묻는 씬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이토록 그야말로 드라마같은 드라마라면 끝이 용두사미든 계속 탁탁 튀는 소리가 나든 상관없어지고 말았다. 앞으로 아마도 준영과 지오는 이 문제로 어쩌면 내가 원하는 갈등국면에 접어들고, 그러면서 서로 좀 더 그들이 아닌 서로의 삶에 젖어들어가겠지. 그러다 어느 날엔가는 서로의 키가 한뼘쯤 자란걸 느낄 수 있을테고.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시장미 2008-11-2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사세.. 이번주 까지 저는 재미있게 보았는데, 예고편보니 너무 뻔한 내용으로 전개될까봐 좀 불안한데요? ^^;;;
설마 지오가 불치병에 걸리는 건 아니겠죠? 그런 스토리는 아니길 바랬는데.. 흐...

Arch 2008-11-27 09:49   좋아요 0 | URL
불치병은 아니고 눈 때문에 일하는데 지장이 생기는 것 정도, 그래서 아무데서나 나서는 지오의 성격과 조금 얌체같은 준영의 성격이 부딪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불치병은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식상함의 문제같아요. 가시장미님도 보시는군요. 히~

웽스북스 2008-11-28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현빈이, 얼른 돈 벌어서 너네 엄마맘에 들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 건 정말 지극히 현실적이지 않나요. 얼마나 초라하겠어요. 자기 자신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데 공중에서 연애모드로 안내려올 수는 없으니까. 나는 그부분 정말 마음 아프던데 ㅜㅜ 제 그사세 시청은 요즘 물이 오르고 있어요.

Arch 2008-11-28 22:56   좋아요 0 | URL
근데 난 부러 갈등을 만드는 느낌이 든게 10회에서 아버지가 현빈을 바깥에 세워두고 소똥 냄새 안 나게 막 씻기는 장면 있잖아요. 이거랑 맥락을 같이 하는데 뭐라고 할까. 좀 오바스러운 느낌 있잖아요. 그리고 이제 좀 가족에서 벗어나는 연애를 해도 되지 않을까란, 지극히 드라마적인 생각도 들었구요. 오늘 10회에 예고 보니까 가시장미님 말씀대로 불치병 맥락일 것 같은데... 뻔한 내용 안 나올거라고 생각해요. 노희경에 표민수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간의 캐릭터 때문에 함부로 식상해지진 못할 것 같아요.
 

 그 밤에 큰편인 내 머리보다 더 큰 배추 50포기를 차에서 내려 집까지 실어나를 때까지만 해도 '그깟 김장쯤이야' 였다. 금세 하고 엄마랑 찜질방이나 가야겠다란 당찬 생각까지 하기도 했다.

 시작은 토요일부터였다. 배추의 밑둥을 자르고 반으로 갈랐다. 엄마가 한대로 소금 몇번 뿌리고 물에 담그면 소금간은 끝인줄 알았다. -알았다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긴 했지만 저것만 하고 좀 놀아야지 싶었다. '저것만'은 '저거라도'에서 '내가 이 정도인가'란 자괴감의 끝에 끝을 치달으며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되었다. 처음은 물론 간단했다. 밑둥을 자를 때면 슥삭대는 칼소리마저 정겨웠고, 배추를 반으로 가를 때의 느낌도 꽤 괜찮았다. 두부를 가르는 것만큼이나 간단해보였다. 이게 한 10개까지 그랬단 소리고 그다음부터는 전쟁이었다. 칼은 천근보다 더 무거웠고, 배추들은 속이 꽉차가지고선 칼이 잘 들어가지지도 않았다. 옥찌들이 베란다에 있는 배추를 욕실로 날랐다. 모처럼 신나는 놀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흥분한 아이들을 보면서 이단계로 소금을 잡았다. 배추 사이를 간신히 벌려 소금을 넣은 다음 욕조에 풍덩. 중간점검 나온 엄마는 배추를 물에 담궈놓으면 맛이 없으니까 우선 물에 적신 다음에 사이사이에 소금을 다 채워야한다고 했다. 욕조에 입수해있던 배추를 다 건져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어쩐지 엄마 말대로라면 소금간하고 조금 있으면 풀이 죽는다는데 얘네들은 더 팔팔한 상태였다. 밤10시가 넘어서야 배추 소금간이 끝났다. 500포기가 아니라 50포기 담는건데 벌써 퍼져버리고 말았다.

 일요일, 욕조에 얌전히 있는 배추를 씻는 작업을 했다. 욕실이 작아서 양동이 두개를 간신히 들여놓은 다음에 흙과 이물질을 물로 씻어냈다. 다행히 구원투수가 온 덕에 좀 더 수월하게 쓱쓱싹싹 씻어냈다.(평소 나의 대충대충을 아는 엄마는 차마 내겐 못맡기겠다고 만류하긴 하셨지만) 아침을 먹자마자 바로 시작했는데도 3시간 넘게 걸렸다. 하염없이 배추를 물에 씻고, 배추를 옮기고, 배추가 줄어들기는 커녕 욕조 화수분처럼 점점 늘어만가는걸 보자 가사를 여자에게 분담하게 한건 정말 탁월했단 생각마저 떠올랐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일거리, 현상유지로는 폼 안 나는 잡무, 끝이 보이지 않는 집안일을 생각할 때면 스스로 운명에 순응하게 만들고 수동적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게 하는 가사의 힘이 느껴져버린다. 물론 이건 권력을 쥐고 있는 다른 성이나 다른 계층이 혁명적으로 가사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면 '알아서 해야하는' 시스템과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분위기가 일식될 것 같기도 하다. 과연 그런 날이 올까, 문득 김장 휴무나 김장 연휴같은 문구가 떠올랐다. 

 이어서 양념 재료를 믹서에 갈았다. 새우, 양파, 생강을 믹서기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되는데 믹서는 왜 또 말을 안 듣고, 허리며 다리며 벌써부터 쑤셔대니. 아, 눈까지 침침하다. 믹서를 잡고 있는 손이 믹서를 끄고 나서도 덜덜 떨리는걸 넘어 저리기까지하자 김장 참여자 중 그나마 최연소인 나이가 무색해지고 말았다.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버무리는 작업을 했다. 그 전에 고모랑 엄마가 양념을 다 준비해놨다. 그러니까 그동안 내가 한건 세발의 피도 안 됐다. 내 하는 폼을 보고선 성격 급한 고모가 저리 나오라며 협박을 했다. 아, 나 버무리고 싶다고! 김장 초보란 너스레를 떨며 계속 자리를 꿰차고 눈짐작, 어깨너머 염탐으로 배추에 양념 묻히기를 착실히 해나갔다. 나의 남다른 착실함과는 별개로 어떤 때는 양념을 너무 많이 묻혀서, 어떤 때는 너무 하얘서 결국은 '애가 안 해봐서 그래.'란 안 하는게 도와주는거란 말을 착실하게 들어먹었다. 처음에는 정말 재미있었다. 오, 내 손으로 지금 김치를 담근다는 사실에 흥분한 것도 잠시였다. 곧, 허리며 어깨며 누가 두드려 팬것처럼 아리고 저려왔다. 내가 어깨를 뒤틀고 허리를 배배 꼬는 동안 어른들은 묵묵히 통에 김치를 담고, 간을 보고 다시 배추에 양념을 묻히셨다. 아, 저래서 어른이구나. 나는 백날 떠들어봐야 발치에도 못닿을 경지가 있는거구나. 마지막 배추까지 다 버무려지고 나서야 허리를 피면서 아구구 하시는 어른들을 보면서 나는 정말 언제쯤 어른이 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햇다.

 사실, 도망칠 수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김치 얻어먹는 근천 떨기 싫다고 엄마가 무려 50포기까지 욕심을 부렸을 때 어딘가로 나가서 며칠 안 들어왔다가 김장 다 끝나면 들어와 맛이 어쩌네 저쩌네로 품평을 늘어놓을 수도 있었다. 매년 하는 행사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도 있는데 꼭 나까지 해야해란 생각, 조금 하긴 했다. 여전히 가사는 내가 한다고 하는데도 늘 내 일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토끼면 분명 노인네 혼자서 배추 절이고, 고생할게 눈에 보이는데, 나야 하자 많은 몸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보다 젊고 늘 초반 의욕이 넘치니 괜찮을줄 알았다. 하지만 김장은 보통이 아니었다. 보통 이상이었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강도를 보여주고야마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집에서 일을 많이 해야할때면 잠적했던 짓은 이제 지양해야겠다.

 나는 아마도 앞으로 '우리 엄마 손맛'이라며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곱지않은 눈으로 볼 것만 같다. 특히 김치 맛 운운은 정말. 백김치든 정말 맛이 없는 김치든 김치를 먹을 수 있는 사실에 대해서, 자신의 노고가 눈꼽만큼도 안 들어간 것을 무상으로 제공받는다는 당연하지 않은 사실에서 사람들이 고마움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꼈으면 좋겠다.

 아, 너무 피곤해서 잠도 안 온다. 계속 이렇게 페이퍼만 쓸 것 같다. 고작 김장 한번에 이 난리니 내년에 김장 한번 더 하면 페이퍼 두개는 쓸 것 같다. 이러다 김장 관련 리뷰 하나 올리는게 아닐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김장하느라, 앞으로 하시느라 애쓰셨고, 애쓰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생물학적인 나이와는 별개로 -이젠 더 이상 별개라고 구분지을 수 없는 나이다.- 나는 지지는 것을 좋아한다. 잔가지와 나무로 불을 지피는 예인촌에 요새들어 자주 드나드는 것도 그 때문이고, 틈만 나면 지질 곳을 찾아 찜질방을 찾아 지지는 소기의 목적보다 식혜와 달걀을 '먹어대'는 것도 반쯤은 그 때문이다. 몇번 지져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전기장판에선 이 맛이 안 난다. 따뜻하고 좋긴한데 이게 전기를 통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인지 정말 몸이 뭔가를 느껴선지 전혀 지지는 맛이 안 난다. 지질때는 자고로 뜨끈한 온돌이 최고요, 그 중 으뜸은 아랫목이더라. 지지다란 말은 부침개를 부칠 때, 몸을 따뜻하게 해서 피로를 풀어줄 때도 쓰는 말인데 뎁힌다라거나 따뜻하게 한다는 말보다 훨씬 정감이 간다.

 어제, 생리 징후가 오는데다 한번쯤 지질때가 된 것 같아 혼자 찜질방에 갔다. 황토불가마며 보석방에서 뒹글대다 땀이 조금 나면 나와선 물을 마시며 책을 봤다. 그리고 몸이 좀 식으면 다시 불가마에 들어가 지지기를 반복. 원래는 식혜와 달걀이 필수인데 요새 너무 '먹어대'서 내내 속이 불편했던터라 꾹 참았다. 몇번 들락날락하다 잠이 와서 여자 수면실에 들어갔다. 아파트 근처라 잠까지 자는 분은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코를 곯아주시는 분은 계셨다.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잤는데 자다깨보니 자기 전과는 다른 배치로 몇몇 분이 보이고, 그 중 구석에 있는 분이 앓는 소리를 내는게 들렸다. 아니, 앓는 소리라니. 가만히 들어보면 꼭 신음소리처럼, 누군가를 희롱하기 위해 고안해놓은 소리처럼 야릇한 맛이 있기도 했다. 술취한 남잔가? 아줌마한테 일러야하나? 그러다 행여 시비가 붙을까봐 모른체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와서 다시 몇번 들락날락하다 책보다 뒹글대다 밖에서 자려고 했다. 그 와중에 의식은 안 했지만 불가마에서부터 괜히 나를 따라다니는 남자가 눈에 띄긴 했다. 우연의 일치겠지라고 생각하고선 셀프 팔베개를 하고선 다시 잠을 잤다. 얼마나 잤을까. 어떤 여자분이 나를 깨웠다. 그러잖아도 부시시한 머리를 하고 눈만 껌뻑이는데다 손이 저려  못움직이자 그 꼴 볼만했겠단 생각이 든건 나중. 왜 날 깨웠을까. 여자는 나보고 오란 손짓을 하면서 내 옆에 자는 남자가 좀 이상하다고, 좀 전에는 자기 옆에서 잤다고. 이상하니까 다른데서 자란 말을 해줬다. 그러마하고선 생각해보니 뭔가 수상한 것도 같은데 딱히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고, 자는 남자를 깨워선 뭐냐고 묻기도 참 '거시기'했다.

 결국 다시 여자 수면실에 와서 자는데 아까의 신음소리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달게 자고 있는데 또 누군가의 앓는 소리. 눈을 번쩍 뜨자 다른 몇몇도 그 소리에 잠을 깼는지 뒤척이는게 눈에 보였다. 예열작용을 충분히 거친 오지랖은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결단을 생기게 했고, 난 소리의 근원지인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겉모양은 분명 남자 같았다. 다리는 거칠했고, 가슴팍 부근도 남자 같았다. 그럼 간단하군. 여기서 나가달라고 하면 되겠어. 그래서 깨웠다. 

 저기요, 저기요.

 몇번 깨우자 그 아니 그녀 아니 그가 일어났는데 네? 이러면서 말하는 억양이나 폼 음색이 영락없는 여자인거다. 이런이런. 갸우뚱하며 나를 쳐다보는 그녀에게 남자인줄 알았다는 말만 계속 해대며 미안하단 말을 하면서 황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방을 빠져나오면서도 남자인데 일부러 안 들킬려고 여자 목소리 낸거 아냐? 방 불빛만 좀 환했다면. 진짜 여자라면 나 때문에 정말 불쾌하겠다. 그런데 난 왜 이 새벽에 대체 왜 이러고 있을까까지. 온갖 생각이 난무하는데 급기야 생리까지 오고.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한 지짐 현장이었다.

 친구는 찜질방에 여자 혼자 자는 문제에 대해 걱정을 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어떤 면에선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할만한 일은 아닐 수도 있지만 '어쩌면 위험' 때문에 행동반경과 사고까지 단속하고 싶진 않다. 그리고 이미 밝혀졌듯이 이토록 무모한데다 가끔은 나보다 먼저 낌새를 알아채는 눈치빠른 눈들이 있으니 다행이랄까. 게다가 난 점점 아줌마 감수성에 가까워져 이제는 한숨 돌려도 될만한 근성있는 존재로 탈바꿈해가고 있으니 뭐.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스탕 2008-11-21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니시는 찜방은 여자남자 옷을 다르게 주지 않나요? 제가 가는 곳은 여자는 주황색 남자는 회색을 줘서 옷만봐여 남녀가 구분이 가능하지요. 혹시 구분 없다면 이야기 하세요.
편히 쉬고자 간 곳에서 그렇게 씨잘때기 없는걸로 신경쓰면 피곤하잖아요.
저도 찜방가서 땀 쭉 빼는거 좋아해요 ^^

Arch 2008-11-21 14:32   좋아요 0 | URL
네, 그냥 다 흰옷 주더라구요. 별로 피곤하지 않았어요. 저 이런거 은근 즐기고 다니는 타입이라.
자꾸 저를 펌프질 하시는 것 같아요. 찜질방이라...
날 좀 풀리면 옥찌들 떼로 데리고 놀러갈게요^^

2008-11-21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지 않았다. 물기를 수증기화해서(왠지 어마어마하다) 자연스럽게 몸을 말리려는건 아니었다. 숨어있는 살의 행방을 애타게 찾아내 인사라도 건네야겠다는 생각이 든건 벗고 돌아다닌 다음에야 떠올랐다. 그러니까 별다른 이유없이 한번 그래본거다.

거실을 어슬렁거리는 나를 본 엄마가,

-너 엉덩이에 그게 뭐니?

라고 물으실 때 살짝 민망했던걸 보면 확실히 작정한건 아니었던 것 같다. 눈을 반짝이며 엄마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댄 후 다시 뒤돌아 넓은 면적의 엉덩이를 손끝으로 콕콕 찍어대며

-엄마 이건 그러니까 좀 야한건데, 울 엄마가 감당할 수 있으려나? 그러니까 이게 말야, 섹스할 때 물고 뜯고 할퀸 자국이야.

이랬다면 상당히 깨고 재미있을테지만 실상은 단순 멍자국에 불과했다. 여기, 굶는 인간 1인(그래봤자, 며칠, 몇주) 추가요.

어제까지만해도 한 개였던 멍이 오늘 보니 양쪽에 각각 하나씩 shift를 꾹 누르고 옮긴 것마냥 나란히 자리해있다.



그렇다. 요즘 인라인을 타고 있다.


완전 짠짜라한 뒷북 고지서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겠지만 기회가 잘 닿지 않았다. 뭔가를 시작하려면 의지와 애초의 의욕을 뒷받침해야 간신히가 됐고, 남들 다 한다고 하고 싶어지는거라면 애초에 난 뭘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단 느낌까지 들었다. 해서 단물 쪽 빠지고 그야말로 뒷북일 즈음에 인라인을 타기 시작했다.

걸을 때는 차 소리가 별로 안 들리는 곳이 좋고, 자전거를 탈 때는 울퉁불퉁 하지 않고 경사가 너무 심하지 않는 곳이 좋다. 걸음이라도 제대로 옮길 수만 있다면 다행인 며칠 전까지만해도 차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않는 공간만으로도 인라인타기에는 땡큐였다. 굳이 며칠 전이라고 한건 V자로 걷기 시작하던 실력이 며칠 사이에 좋아져서 이젠 조금씩 구를줄 알기 때문이다. 구를 수 있게 되면서 바닥의 굴곡이 느껴졌다. 단순하게 매끈한 아스팔트가 아니라 몸을 울렁이게 하고 다시 대오를 정비하게 하는 굴곡. 굴곡은 아직까지 부자연스럽고 종종 알아서 기게 만드는 착지법을 찾게 하지만 발바닥 아니 인라인 바퀴가 바닥에 닿는 느낌이 좋다. 발바닥의 모든 면적으로 바닥을 딛는게 아니라 쭈욱 미끌어지고 다시 다른쪽 발을 구른다. 지면을 발로 디디고 있다는 느낌이 생경해지는 순간 다른쪽 발이 다시 미끄러진다. 순환과 부드럽게 연결되는게 관건인데 발은 풍맞은 것마냥 떨리다가 혼자 갈지자로 뻗어대기 일쑤고, 다른발도 행여 질세라 정신없이 헤맨다. 그래도 이게 어디더냐. 앞으로 나가긴 하는거잖아.

아파트에서 인라인을 탄다고 돌아다니다보면 붐은 사라졌지만 고수는 죽지 않는단 말이 떠오른다. 과연 나보다야 낫지 싶은 정도가 아니라 월등한 숨은 인재들(거의가 어린 친구들)이 가끔씩 아파트의 코너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난 인도로 걷기만 해도 황송할텐데 인도 위, 하수구 창 위에서 바퀴를 굴리다니! 게다가 턴과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한 몇가지 동작들. 내가 쩔쩔매는걸 확인하는 그들의 얼굴엔 번뜩이는 자랑스러움이나 왜 못할까 싶은 표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무심함. 그들은 한없이 무심하게 방향을 틀어 겨울 바람처럼 쌩하고 사라진다. 같은 분야라도 레벨은 있고, 레벨의 상하에서 하수는 늘 고수의 뒤꽁무니만 바라볼 뿐이다.

내가 고수가 되는 날, 나는 슬쩍 웃어주는 여유를 보여줄 생각이다. 초보자여, 그대 갈길 퍽 멀지만 꾸준히만 한다면 까짓 인라인 정도야. 뭐 이런 메시지의 웃음일텐데 과연 상대방은 그렇게 읽을지, 과연 그런 날이 오긴할지. 그나저나 넘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 인라인 진도가 팍팍 나간다는데 네이버 동영상 강의 아저씨는 인라인 타기의 정신은 안 알려주니 초보자,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돌이 2008-11-17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하셈~~ 전 응원만... 같이 하자는 소리는 죽어도 안나와요.
그나저나 요새 우리집 애들 드디어 8살됐다고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가 인라인을 보내줬으면 좋겠다는데 참 고민중입니다. ㅎㅎ

다락방 2008-11-17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깜짝이야. 전 시니에님이 정말로 어머님께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줄 알고, 악, 어떻게 저런 말을!! 하고 완전 놀랐잖아요. ㅎㅎ


음..역시 시니에님이 무슨 글을 쓰셔도 저는 '이런쪽'으로만 키포인트를 잡아내는 것 같아요. -.-

순오기 2008-11-17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아가씨~ 글발만 그럴거라고 생각하지만.^^
인라인 응원할테니 열심히 타세요. 같이 하자는 소리 죽어도 안나오는 2인.ㅋㅋㅋ

무스탕 2008-11-1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라인.. 타고 싶었지만 기회가 요상하게 안 닿아 못타고 있는 1인입니다.
몇년전에요, 아는 동생 하나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하는 하키를 한다는거에요 @.@
신고 서 있기도 불편한 바퀴달린 그것을 타고 하키씩이나?!
부러웠지요.. ㅠ_ㅠ
열쒸미 갈고 닦으셔서 어린 친구들 부럽지 않게 타세요. 꼭!!

Arch 2008-11-17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들~의 공통된 의견은 같이 하자고는 못하겠다는건데 '절대 못하는게' 정말 있을까요? 제가 어설픈 초보라 저 역시 같이 하자고 말은 못하지만 은근 인라인 충동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으실 것 같은데. 겨울 지나고 날이 따뜻해지면 한번 도전해보면 좋을 것같아요. 바람돌이님은 해아한테 배우시고, 순오기님도 순오기님의 부지런함을 인라인에 막 쏟고, 무스탕님은 (아, 이렇게 부르면 자꾸 부비고 싶어서 몸이 간질거려요.) 기회를 만들면 되겠군요. 아아! 하키인데 하기라고 했어요. 어어머!(속닥속닥)

다락방님, 인라인 얘기하는데 첫머리를 저렇게 잡아대는 저는 어쩌구요. 다락방님 아직 양호하신거예요^^ 저는 그런쪽 전문입니다. 그런 얘기 안 들어있어도 '막' 잡아내요.

무스탕 2008-11-17 10:26   좋아요 0 | URL
어므낫~! 하기랑 하키랑 무슨 사이일까용~~ *_*

자, 오시구랴!! 내 비록 물질적 품이 넓진 못하지만 환상적 '바담 품(바람 풍이 아님. 혀 짧은 소리로 꼭 읽으셔야 함)' 이니 얼마든지 품어드릴수 있습니다. 오실때 옥찌들은 필수요원!! :)

Arch 2008-11-17 10:35   좋아요 0 | URL
뭐예요. 옥찌들이 필수 아니던가요? 그런데 옥찌들에다 정성이까지 무스탕님 집 한번 들었다 내려놔야할걸요~^^ 크크 고치셨네^^ 바담품은 최지우 발음 맞죠? 아, 난 혀가 너무 길어서 원, 되야 말이지^^(아침부터 죄송해요. 우리 선생님 말로는 쥐약 먹은 증상이라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