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자면 난 영어를 싫어한다.  

 영어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영어로 말하는 것, 영어 단어가 나오는 것, 말을 하면서 영어 단어를 섞는 것, 영어를 배워야한다는 강박, 영어 몰입교육, 영어 공용화란 되먹지도 못한 주장, 영어 학원, 영어 유치원, 죄다 싫어한다. 내가 영어를 배우는 날이 있다면 떠밀리듯이 마지막 보루라는 심정으로 억지 춘향을 하거나, 오늘 '성'이 말한대로 비굴한 인생을 체득하는 비결쯤으로 생각하고 배울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성'과 얘기를 하다 정말 내게 영어는 뭘까란 생각을 다시 해볼 수 있었다. '성'은 요새 영어학원 기초반에서 회화를 배우고 있다. 자기 입에서 여태껏 입에 익은 한글이 아닌, 영어가 튀어나오고, 그게 썩 괜찮은 기분이란 것도 반가운데 오늘 본 예문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문에는 

 네 취미가 뭐냐란 단순한 질문에 대답 예문으로  

 My hobby is studying language.라고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이 예문이 틀린거라면 전적으로 몇번씩 입에 익게 발음을 했음에도 워낙에 짧고 가망없는 아치의 영어실력 탓이 되겠다.- 자신으로선 언어를 취미로 배운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는데 보란듯이 취미취미인 영어, 재미있는 영어, 내 입에서 다른 나라 말과 문화를 얘기할 수 있는 영어도 가능하단 생각이 들었단거다. 그러고보니 나의 영어반감 역시 공부해야한다는, 지리한 문법과 제대로 된 영어발음일까란 의문, 이 나이에 무슨 영어란 것의 범벅이었지, 새로운 문화에 능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언어, 좀 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언어인 영어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란 생각이 들었다. 유레카라고 외치기엔 경박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은 들었다. 

 그러면서 덧붙여지는 생각은 김어준이 어디에선가 했던 말처럼  

 영어 못해도 상관없다, 자기가 영어 할 필요 없을 정도로 멋진 사람이 돼서 통역을 붙이면 될 것 아니냐란 전혀 모르겠단 포즈의 말. 그 포즈와 비슷한 것으로 신해철이 고대 학생들한테 욕을 하며 젊으니 꿈을 갖아라, 자기계발서의 꿈을 품고 어쩌고 블라블라의 말들. 그런데 정말 꿈만으로 된다고 말하는 이들의 위치는 더 이상 꿈을 안 꿔도 되고, 꿈 접근치에 다달았으니 할 수 있는 말들 아닌가. 그들이 정말 평범한 삶을 견디는 일들에 알 수 있을까. 안다고 쳐도, 감히 욕까지 하며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 있을까? '성'과 얘기를 하다 꿈대로 산다는 사람들이 폄하하는 평범한 사람이 얼마나 되기 힘든지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았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의 비굴함과 고됨, 결혼이란 어마어마한 일로 직진할 수 있는 결단력, 혹은 미끄러지듯 들어서는 순간들. '성'의 경우는 직장과 집에 동시에 출근하는거라고 했지만, 난 여자라면 출근보다는 이중 노동의 부담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라고 말했다. 끊임없이 노동력을 팔아 돈을 만들어내고, 누군가를 부양하고, 부양이 보장 안 되는 노후를 기다리고. 헉헉. 그래, 이건 너무 비관적인 전망이지.

 내가 흔히 안락한 가정 생활의 표본이라고 막연하게 상정하는 기준은 '홈 플러스'에서 주말에 같이 카트를 밀며 장을 보는 것이다. 누구는 백화점일 수 있고, 누구는 시장일 수 있고, 다른 누구는 드러누워 배를 긁으며 홈쇼핑으로 물건을 사는 것일 수도 있다. '홈플러스'에서는 강박적으로 happy송을 틀어주며 사람들을 환각상태로 몰아가고, 사람들은 자신들 풍요의 상징으로 누가 누가 카트를 많이 채우나를 경쟁한다. 봐, 이런식으로 걸러내고 홈플러스니 마트니하는 사람 북적이는 곳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내겐 상징적으로나마 행복을 가장한 공간에 대한 환상이 조금 있다. 행여 홈플러스에 들어선다면 이 많은 포장지를 어떻게 처리할거냐며, 시장이 훨씬 쌀거라며 투덜투덜, 이런 묶음 상품이니 자사 상품은 다른 영세업체를 쥐어짠거라는둥, 매장 직원들은 비정규직일거라는 둥, 그들의 처우에 관심 없는 업체의 상품을 이용하는건 문제라는 둥 심통난 아치처럼 불퉁댈게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이런 환상을 가끔 퐁퐁 띄우는 것처럼 꿈 역시 마찬가지겠구나, 

 이걸, 이렇게 오래 산 내가 어렴풋이 느낀다. 경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늘 자신의 입장을 증명해야하고, 설명해야하며, 4차원으로 매도당하기 싫다면 배로 '일반 사람'처럼 굴어야한다. 꿈 나름의 층위상 하위권에 머문다면 왜 하위권인지, 상위권으로 가야지 않을까란, 상위권으로 가는게 꿈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지 등등, 그럴때마다 한번씩 홈플러스를 머릿 속에 그려보고. 다시 나름의 합리화와 별거없다란 것으로 위안을 삼고.  

 그래, 영어 얘기였는데 이런 황당무계한 범벅은 뭔지.  

로쟈님 말이 맞다. 전에 신학기 대학생 추천도서를 소개하면서 말미에 이런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걸 기억한다. 

 물론, 이 책들을 읽기 전에 자신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겠구요. 윽!

 자원이 없는 내게 날개일지, 겨드랑이 살일지 모를 아무튼 뭔가 다른걸 달아줄 것만 같은 꿈과 영어에 대한 이야기들은 좀 더 정리된 후 쓰는 날이 오긴할까? 그런데 정말 신기하지 않을까? 문법이나 단어가 아니라 나와 다른 나라의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건. 

 난 스무살처럼 조금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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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3-2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줄리엣 비노쉬와 아크람 칸의 무용 공연을 봤어요. 말 그대로 무용만 하는줄 알았는데 제길, 나래이션이 몇번이나 나오는거에요! 무용 보랴, 자막 보랴 신경질이 나서 결국자막을 포기하고 무용을 봤는데요, 그러면서 생각했어요. 이럴때 영어를 들을 수 있다면, 그랬다면 이 무용을 조금 더 잘 감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죠. 실제로 영어를 할 줄 알게 되면 할 수 있는 것도 더 많아지죠! 게다가 원서, 원서를 읽을 수 있잖아요! 원서를 읽는 것은 제게는 꿈같은 일인데 말예요. 그래서 오늘 저도 그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영어를 공부해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어요. 그러나 저는 공부를 싫어하기 때문에, 노력하는 건 더더욱 싫어하기 때문에, 또 그냥 생각에만 머무르겠죠.

그러니까 Arch님은 영어를 공부하겠다는 거죠? 다른 나라의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건 꽤 근사한 일일거에요. Arch님,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한번 해봐요. 전 공부하는 사람들이 좋아요.(저는 안하면서!!) 응원을 보내요!

Arch 2009-03-21 23:38   좋아요 0 | URL
이렇게 성실하고, 성실함만으로는 표현이 안 되는 댓글을 달아주는 다락방님을 제가 어떻게 오르골처럼만 좋아하겠어요. 나도 노력형 인간은 아니에요. 다만, 내가 뭔가를 배우는데 가로막고 있는 편견이나 방해물을 의욕적으로 제쳐두고 싶다란 생각이 든거죠.

다락방님이 공부하는 사람이 좋다고 하니까, 전에 왜 남자가 멋있어 보일 때처럼 막 수학문제 푸는 남자한테 호감을 느끼는건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런데 그건 비린게 아니잖아란 생각도 들고. 난 그래도 미간에 주름 잡아가며 문제푸는 남자 좋더라. 히.

오오, 무용 공연, 제가 아는 줄리엣 비노쉬가 연극을 하는건가요? 아니면 동명이인인가? 멋지다, 전 이렇게 공연보러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다락방님이 보는 공연이 참 좋다란 생각이 듭니다.

다락방 2009-03-21 23:50   좋아요 0 | URL
그 영화배우 줄리엣 비노쉬 맞아요. 마흔이 넘어서 글쎄, 무용도 한다잖아요! 각 나라마다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고 있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줄리엣 비노쉬가 그린 그림도 전시한다더군요. 배우도, 무용가도, 화가도, 엄마도, 으윽 멋져요. 그런데 저는 공연보다 좀 졸았어요 ( '')


아, 그리고 전 맷 데이먼이 굿윌헌팅에서 그랬던 것처럼 천재적으로 문제를 풀어내는 사람들에게 섹시함을 느껴요. 물론, 웃통벗고 노가다 뛰는 근육질의 남성들에게서도 섹시함을 느끼고요.
 

 아는 녀석이 술이나 한잔 하자며 불러냈다. 시국 걱정과 신자유주의의 해결방안을 고민할리 없는 나는, 선뜻 나가겠다고 했다. 물론 어떤식의 분위기가 될지는 살짝 걱정이 됐다. 오랜만의 술자리인데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고민 퍼레이드가 되지는 않을지, 함께 자리한 누군가로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진 않을런지... 에잇, 뭐 별로면 휙 오지.  

 술자리와 집은 가까울수록 좋은 법이다.


  녀석은 친구와 같이 있었다.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 그가 방금 여자친구랑 헤어져서 정신이 피폐해졌다는 정보를 흘린 녀석은 잘해보란 눈짓을 했다. 내가 무슨 잔반처리기도 아니고. 뭐, 요샌 아무나하고 갖다 붙인다. 나이 먹는게 이래서 약간 리들빗! 서러운건지도. 그런가보다 하고선 맥주를 홀짝이는데, 녀석의 친구라는 남자, 좀 수상했다. 혼자 기분이 업되더니 느닷없이 간다고 하는게 아닌가. 아무리 내가 천하의 썰렁한 인재라지만 이건 좀. 조금만 잘 생겼으면 더 있도록 억지를 부려봤을텐데, 나도 모르게 막 가라고 부추기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태는 참 아담하고 귀엽다던 소견은 붙이게 되고.
 

 녀석의 친구가 가고 녀석과 나는 좀 더 조용한 자리로 이동했다. 시답잖은 얘기만 하다가 여자 친구 만들고 싶네 어쩌네 해서 얼마나 굶었는지 물었다. 그리곤 시작되는 섹슈얼한 이야기라고 지칭되는 질펀한 이야기들. 이 녀석이 평소에도 제법 말을 웃기게 하는데 야한 얘기엔 물만난 고기처럼 신이나서 어찌나 방방 뛰어대던지. 하마터면 웃겨서 틀니 빠질뻔했다.
 

 그 중에서 재미있었던 얘기를 하나 옮기자면,
 노상방뇨 얘기가 나왔었는데,
 어느 날, 애인이랑 즐겁게 술을 마시고 모텔에 가려고 길을 걷는데 여자가 갑자기 요의를 호소했단다. 늦은 시간이고, 화장실 문을 다 닫아놓는지라 들릴 곳이 마땅치 않았단다. 그래서 자기가 망을 봐주고 여자는 골목으로 들어가 야심찬 노상방뇨를 하려고 했단다. 잠시 후 야심한 밤의 정적을 홀딱 깨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이 표현하기론 아스팔트가 깨지는줄 알았단다. 평소에 이미지 관리에 능했던 그녀인지라 충격이 컸고,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의 내외 없이 모든 소리를 서라운드로 탐닉했단 뭐 그런 얘기.
 

 그렇게 깔깔대며 놈의 재치에 나의 맞장구까지 덧붙여 시간가는줄 몰랐는데 녀석이 계속 머리가 아프네 속이 울렁거리네라며 한마디씩 해댔다. 그 통에 이제는 우리가 집으로 가서 발닦고 잘 시간이란걸 알게 되었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잡았다. 어서 타라는 손짓을 보냈는데 좀 있다가 간단다. 지금 택시를 타면 속이 안 좋아 세차비 물어줘야한다나 뭐라나. 별로 먹지도 않은 주제에 엄살은!
 

 그래, 겨울날씨치곤 포근해 우리는 좀 걸었다. 그 밤에 목적지도 없고, 괜히 공원을 돌다 형님들한테 쥐어터질지도 몰라 큰길가를 끼고 어영부영 밤거리를 헤맸다. 그래서 이제 괜찮으면 들어가라고 했더니


 녀석은 뜬금없이
-야, 자러 가자.
 이러는거다. 무슨 잘만한 분위기도 아니고, 평소에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녀석 말대로 쿨하게(이거 정말 웃겨!) 할만한 자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이 무슨 뜬금없는 발언?

 

 아휴, 애들 앞에선 숭늉도 못먹는다는 말이 정말 딱 맞다. 그러는 넌 어른이고?  

 그러게 말이다.  (머리통에 물을 주며) 얼른 얘가 자라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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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색 비닐 잠바에 가장자리에 털이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여자와 잿빛 외투에 정체불명의 요란한 목도리를 두른 여자가 해물떡찜을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한다는 집에 나란히 앉아 있다. 다른 테이블에서 광고의 한 장면처럼 북적대며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두 여자는 아무 말이 없다.

목도리녀가 힘겹게 한마디를 꺼낸다.

-핸드폰은 왜 그러냐.

-술 처먹다 잃어버렸어요.

- ......

음식도 안 나오고, 읽을만한 것도 없어 둘은 이 음식점이 얼마나 방송매체에 많이 나왔었는지를 보여주는 선전물을 한자도 놓치면 안 될 기세로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일주일동안 뭘 먹고 다녔고, 어디서 잤으며, 잘 때는 뭘 입고 잤는지를 빼곡이 보여주는 흰 패딩에 염소수염을 기른 남자가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 시켰어?

- 네

셋은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이럴 때는 직장인용 겉도는 얘기 실용 교본이라도 출판되어야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문득, 셋 중 하나는 예리한 감각으로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음식은 맵거나 달았다. 맛있는 해물 중에 굳이 맛이 살짝 간 오징어를 짚어내며 아쉽다면서 고사를 지내는 흰 패딩과 쿨피스를 먹어야는데 아무도 시키지 않자 조바심을 치는 목도리, 이게 웬 진수성찬이냐며 허겁지겁 먹는 털모자. 흰 패딩은 털모자와 목도리에게 연장자다운 위엄으로 게의 도톰한 살을 하사했고, 털모자는 그건 많이 먹었다며 안 먹겠다고 하고, 목도리는 그래도 준거니까 먹으라는 문제로 아주 잠깐 눈 부라림이 있었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지금은, 먹는 중이니까.

더치페이라는 합리적이나 살짝 어색한 방법을 놔두고 목도리가 계산을 했다. 털모자가 한번, 흰 패딩이 세 번 돈을 권했으나 목도리는 거절했다. 털모자는 돈을 주려고 할 때 목도리에게 무심코 팔짱을 끼었다가 그 추운 날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민망해지고 말았다. 흰 패딩은 주차 문제로 두서없이 전화를 걸어대기 시작했고, 목도리는 어디 구석에 박혀 담배를 피웠다.

길이 막혀 무려 40분이나 차 안에 갇혀 발을 동동 굴리다 결국 먹게 된 해물떡찜. 셋 중의 하나는 분명 맛의 비밀 어쩌고는 조미료 맛 때문일거야라며 거길 가자고 드러누웠던 목도리를 의심했을 것이다. 목도리는 맛과 상관없이 매운 맛이 땡겼을 뿐이라고 덧붙일테지만.


흰, 목, 털은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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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나, 내가 끼니를 거를 때가 있다니! 

  점심을 2시에 먹고, 9시가 다 되도록 사과 하나 먹은게 다였는데 배가 안 고팠다. 회사가 끝나고 노면에 살짝 눈이 낀 거리를 걸었다. 바닥의 물기가 맘까지 전염이 되는지 불현듯 예전에 알바 끝나고 애썼다며 늦게까지 잠을 안 자고선 기다렸다가 설렁탕을 같이 먹은 그 사람이 생각났다. 분명 보고싶은 마음에 울컥했는데 눈물도 안 나오고, 그가 저질렀던 만행이 기억폴더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바람에 그저 좋은 추억들 연필심 꾹꾹 눌러가며 적어내려가자란 생각을 해가며 씩씩하게 집으로 향했다. 씩씩하게 걷다보니 위도 갑자기 운동을 시작했는지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다...  

의욕적이고 기세등등하게 배가 고프다.

 그래, 뭘 원하지? 김치찌개? 아니. 라면? 윽 별로. 그럼 없는데. 그냥 율무차로 때워. 아니 넌 어떻게 먹을걸 때우는거라고해. 따라해봐, 먹을건 신성한거라고! 신성한... 먹거리. 

 떠오른다, 떠올라. 우선은 노란색. 잘 된 밥에 들척한 국물, 부드럽게 익은 감자에 동글동글 씹히는 당근. 보들거리는 고깃살에서 배어나오는 육즙과 독특한 향. 침이 꼴까닥 넘어갔다. 하지만 이렇게 왕성하게 배고픈데, 게다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걸 만들고(만들줄은 아냐고? 물론 안다. 알고만 있다. 왜, 조리예 다 나오잖아.) 앉아있을 수는 없어! 그래서 신성한 한끼를 위해 레토르트 카레를 샀다. 오~ 레토르트 만세, 만만세. 

 안 돼, 안 돼 너무 허겁지겁 먹다가 체할 수도 있어. 그래놓고 또 부대끼면 말짱 꽝이란 말이야. 허겁지겁은 안 돼. 안 돼. 하지만 내 손은 벌써 수저를 집고 미친듯이 카레 얹은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물론 상상했던 그 맛은 아니었다. 모든 알갱이들을 레토르트화 해버린 카레의 질감에, 전자렌지에 돌렸더니 푸실거리는 밥알갱이. 하지만 상관없었다. 왜냐면 난 배가 고프니까. 수저 가득 노란 카레밥을 담아 잘 익은 김치를 올려놨다. 보고만 있어도 침이 고여 침이 넘어가기 전에 잽싸게 한 입. 그리고 다시 또 한 입. 씹지도 않고, 입에서 한바퀴 카레를 돌린 다음에 미뢰 곳곳에 맛과 향만 살짝 간보이고 다시 한 입. 말 그대로 게 눈 감추듯이 한 그릇을 뚝딱. 

 어어. 그런데 배가 부르지 않다. 나는 다시 전자렌지를 향해 역전의 용사처럼 돌진했다. 다시 카레를 덥혀 처음과 마찬가지로 수저의 면적을 초과하도록 밥을 꾹 눌러 담은 채 입에 넣었다. 카레밥을 떠서 다시 입에 넣고, 김치를 아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씹고... 얼마쯤 그랬을까. 속도는 늦춰지고 슬슬 동공이 풀리고 문득, 아주아주 편안하고, 황홀하고, 나른해져서 그만 정말 딱 1.3초 정도 

 이거, 천사가 되는거 아냐? 

란 생각이 들었다. 뱃살 천사이거나 먹다 죽은 천사 이쯤이겠으나 이토록 허겁지겁에 걸맞는 식탐과 식욕 등등의 맹렬한 의지를 요근래 느껴본적이 없어, 천사라면 이렇게 짧고 찌릿하게 행복해요 하겠구나 싶어진거다. 맵고 흥분되는 맛을 좀 더 음미했다. 입에 콸콸콸 물을 들이붓는 상상, 얼음을 와직와직 씹는 상상, 그냥 계속 매운채로 놔두고 싶은 새디즘적인 욕망까지. 율무차를 걸죽하게 타서 호두며 잣 알갱이들을 성큼성큼 씹어댔다. 그리고 다시 짧게 거친 0.5초 동안 다시 행복한 기운이 몸 가득히 퍼져 딱 한모금만 자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오늘 밤은 다른 어느 때보다 앤의 이 구절에 동감과 지지를 보낼 것만 같다. 아울러 나는 침대에 쵸코 쿠키 따위는 가져오지 않을거야란 대범한 약속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왜냐면, 난 이제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배가 부르니까. 

서재 결혼시키기 139p 

키츠, 그의 친구 찰스 웬트워스 딜크에게 보낸 편지 

쾌락에 대한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 순간 나는 한 손으로는 글을 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숭도 복숭아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다네.  

정말 얼마나 맛이 있는지. 

부드럽고, 걸쭉하고, 질척거리고, 즙이 새어나오고. 

그 맛있는 살이 마치 축복받은 커다란 딸기처럼 내 목 안에서 녹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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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처음은 손잡기.


 섹스보다 손잡는 것에 더 의미를 두는건 이게 첫 접촉이기도 하지만 그 순간의 독특한 떨림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접촉면이 넓은 섹스가 전면적이라면 약간의 망설임 끝에 손을 잡는 건 그것대로 감질맛이 나니까. 사실 손잡는 것만큼 설레임을 주는 행위가 또 있을까.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있긴해. 왜 맛있는걸 눈 앞에 놓고 봤을 때가 있잖아.

 섹스는 설레임보다는 상징적으로 정욕에 바탕을 두고, 일체감도 사실 섹스에 담긴 함의만큼이나 다양해서 어느 지점의 행위인지를 정의내리기 어렵잖아. 하지만 손잡는건 그 자체로 유연한 시작을 의미해. 시작 후 뭘할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구강으로 모스 부호를 두드려대던 사이에서 '자, 이제 시작이에요'를 알리는 기호로서 손잡기만한게 있을까란 생각도 들어. 다만, '어쩌면 섹스'가 확정된 후 잡는 손은 좀 민망하지만.


 그런 다음엔 포옹이 있을테고. 포옹겸 키스, 살갗을 어루만짐. 손으로 톡톡 주물주물. 민감한 부위에 집중된 자극 행위. 인터코스가 최종은 아니겠지만 통상적인 성적인 행위에 비춰볼 때 제일 마지막을 차지하는걸로 볼 수도 있겠지. 처음에 한번도 섹스를 해보지 않았을 때는 수순의 개념도 없이 '어쩌면 섹스'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는데 지금은 아냐. 오히려 이렇게 순서를 밟는 것이 좀 어색해지더라.. 앞서 말했듯이 섹스를 하기로 한 후 이제껏 옷깃 한번 스치지도 않았는데 덥석, 이게 뭐야 싶게 손을 잡는 것 만큼이나.


 뻔하잖아.


 으슥한 곳을 찾는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차에 좀 더 있자고 한다, 볼만한 영화가 없는데도 굳이 DVD방을 가자고 한다, 멀쩡하게 잘 걷고 있는데 술에 취한 것 같다며 부축을 해준다, 그만 먹겠다는대도 굳이 또 술을 먹자 등등. 이런 행위 속에 담겨있는 스킨쉽의 의지는 사실 좀 낯 뜨거워. 정말, 순전히 부축과 별다른 의미 없는 영화감상에 불과할 경우도 물론 있지. 하지만 대개의 경우, 30살이 넘도록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한 쑥맥이 아니고서야 알게 모르게 체득해온 것들이 속속 배어나오는 상투성은 그냥 섹스나 하죠란 말만큼 충분히 멋이 없어.


 섹스가 아무것도 아닌건 아니란 물음 근처에서 그동안 꽤 여러 가지 생각을 해온게 사실이야.


 야야툰에 보면 많이들 하는 체위로 섹스를 하다가 여자가 위에서, 페티쉬를 강조하는 장면, SM 역할극, 2:1등등 소위 말하는 변태적인 것의 범위를 넘나들다 평범한 체위로 돌아오는 장면이 나와. 섹스보다는 손잡기, 쌉싸름한 키스, 가슴팍의 온도까지 전해지는 포옹.

 어쩌면 순서는 정하기 나름이고, 특별한 룰은 없는건지도 모르겠어. 모든건 그렇게 돌고 도는거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의 섹스가 너무 좋다고, 진도가 느리다고, 혹은 이런저런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직경을 포함한 감정 문제에 대해.


 한때 '그 포옹'이 너무 좋아 만나던 친구에게 으스러지게 안아봐란 부탁을 한적이 있어. 한동안 등뼈가 흐물거려 반쯤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실없이 웃어보일 정도로 그 느낌, 꽤 괜찮았어. 이젠 등뼈가 의자에 기댈 때나 '저, 여기 있어요.'라며 생각지도 않은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지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뽀뽀가 하고 싶은 당신에게 내 입술에선 츄파춥스 바닐라 냄새가 난단걸 알려주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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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2-07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뽀뽀가 하고 싶은 당신, 누구일까? ^^
어디를 가도 자가용 타고 휭~ 가는 세상이라, 어제밤 남편과 영화보고 내려오며 잡은 손은 황홀한 느낌이었어요.^^

무해한모리군 2009-02-0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인생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 첫사랑과 처음 손을 잡은 날인거 같아요.. 늘 친구로 있다 열몇이 서로 되어서 처음으로 남자로 여자로 손을 꼭 잡았을때.. 가슴이 터질 것 같았죠.. 아 연애를 해야할 거 같은데요 이포스트를 보니~

Arch 2009-02-07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비밀비밀^^!!
다들 스킨쉽의 추억이 있는거였어요. 게다가 황홀까지야~

휘모리님, 저도 굳이 최초의 짜릿을 대라면 손이라고 말하고 싶으나 구름다리할때였어요. 그건 아주 나중에 얘기할 것 같아요. 으음~ 꼬옥 연애를 하세요! 나한테 하는 소리였나? 잘 하고 있습니다.^^

다락방 2009-02-08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금 느렸어요.
사실 저는 뭐든 남들보다 느리긴 해요.
어쨌든.

스물두살때 처음으로 남자와 손을 잡아 보았어요. 아주 뻔하게. 저를 집으로 바래다주던 차 안에서.
떨리는 마음에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는데, 샤워를 하다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어요. 손 잡았던걸 생각하자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리고, 온 몸이 흐물흐물 녹아버리더라구요. 손을 잡는 행위에는 섹스보다 더 강한 떨림이 있는 것 같아요.


손 잡고 싶어지는 밤이에요. Arch님의 페이퍼 때문에.

Arch 2009-02-08 00:39   좋아요 0 | URL
덥석, 주물주물.
뻔한거 아닌데, 아차차 내가 뻔하다고 했구나. ㅋ 미안!
그런데 뻔한거 아니에요. 뻔하다고 쓴건 별 수 없는 거라서...

으응, 본격적인 처음같은 것? 손잡는건 아직 그래요.

다락방 2009-02-08 00:44   좋아요 0 | URL
Arch님이 뻔하다고 한게 아니라 제가 뻔하다고 생각한거예요. 그땐 내가 너무 순진해서 뻔한 수법에 넘어갔어, 하고 말이죠. 하핫.

어떻게 잡았냐고 하면 너무 뻔하고 뻔해서 말하기가 부끄럽거든요. ㅎㅎ

Arch 2009-02-08 01:03   좋아요 0 | URL
뭐 얼마나 특별한 방식이 있겠어요. 저는 여전히 순진해서 뻔한 수법을 즐겨 사용하며 즐거히 응한답니다. 제 자랑은 아니고 제가 좀 순진하다는게 흠이랄까.
아, 미안미안. 나 내일 후회할 댓글 달고 있어!!

그런데도 집요하게 과연 '어떻게' 잡았느냐가 궁금해지는 밤이어요.
실은 궁금하지 않았는데 굳이 말 안한다고 하니 금지가 금지를 낳는 태고적 얘기처럼 사정없이 급궁금해졌어요.

다락방 2009-02-09 08:41   좋아요 0 | URL
뒤늦게,

스물두살때 처음으로 남자와 손을 잡아보았다는 저 위의 제 고백(?)을 보니 급 부끄러워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