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 갔다온 얘기나할까 하고 느즈막히 알라딘에 들어왔는데 구속, 체포, 침묵 등 한차례 난리가 난 것 같다. 슬그머니 로그아웃을 하고 빠져나가고 싶었다. 혹은 몇개의 댓글을 달고, '이 정도 했는걸' 하면서 자위하고 싶었다. 불편한 느낌, 어떻게 해야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모르는게 약이다는식으로 넘겨버리고 조금 속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 곧 어떤식으로든 내 얘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난 엄살이지만, 그들은 절박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 살기도 퍽퍽한데 잘 알지도 못하는 일로 나서는게 의미있을까란 회의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해야한단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서명하기도 지치고, 시위에 못나가는 죄책감이 맘에 묵직하게 가라앉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맘으로 응원 밖에 없을까? 

 마냐님의 페이퍼를 보다가 '부끄러움 없는 정부는 따로 대기업에 전화를 해서 광고를 싣지 않도록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고 하는데'에 눈길이 갔다. 예전 촛불집회때 경향신문에 광고를 낸걸 기억은 하고 있을런지. 그때처럼 알라디너들이 광고를 내보는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무기력하게 '다 이명박 때문이야.'라고 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남은데다 정치적으로도 정씨의 삽질로 인해 딴나라당의 기세가 수그러들 기미조차 안 보이니. 가만히 앉아서 화난다고 할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기획하고 실천하는건 어떨까? 

 지금은 촛불집회때처럼 뭔가 들끓을때도 아니고, 알라디너가 나설 경우 사이버 모욕죄 일순위게 들 수 있는 위험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건 아니잖아.'라고 말해주는 언론에 힘을 보태줄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광고를 낼때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르고, 그때처럼 세부적인 안을 짜서 추진할 능력도 안 된다. 이런게 있어요, 수준이지만 뜻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이다. 촛불집회때처럼 명확한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당신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힘을 보태요.'가 다겠지만.

 살기 어렵다.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럴때일수록 자신 안의 분노와 좌절감을 무력감으로 팽개치지 말고, 잘 다스려서 멋지고 재미있는 발상으로 전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알라디너가 시작이 된다면 다른 매체들도 앞다투어 경향과 한겨레에 광고를 싣지 않을까란 예상도 해볼 수 있겠다. 

 어쩌면 지금 다른 사람들은 그러고 있는데 이건 순전히 뒷북일지 모르겠고 개인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괜히 설레발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건,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야 만족하는 습성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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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줄게요.
    from 기우뚱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2010-01-27 15:11 
     나는 혼자 들떠 일벌이는걸 즐, 아니 잘 한다. 맨날 긁어부스럼인데 즐거울리가 없잖은가. 일년 전쯤에 경향과 한겨레에 광고를 실어주면 어떨까란 제안을 한적이 있다. 굳이 광고를 실어야할까, 내가 신문을 보면 되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있었지만 같이 할 수 있고 가시적인 내용물로 자극을 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 추진했던 터였다. 신문사에 전화를 해보고, 의견을 모은다고 했지만 실행은 커녕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은 가끔씩 나
 
 
웽스북스 2009-03-2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히 보내는 지지.
힘이 없음이 무기력으로 이어지지는 말아야할텐데, 싶은 요즘이에요!

무해한모리군 2009-03-2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요한게 있으면 연락 ^^

Arch 2009-03-2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웹디양이라고 쓸뻔, 웬디양님, 자기가 전에 지식채널 PD가 써준 글 올린거 기억해요? 난 그거 하나 믿어요. 내가 대단한 일 하는 것도 아니고, 불편한 맘을 가지고 자꾸 우와 좌로 부딪혀보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웬디양님이 나보다 더 잘 알거라 믿어요.

휘모리님의 조직이 필요해요.

Arch 2009-03-27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은 없으시고, 추천만 날려주시니, 호응인 거겠죠?
음... 한겨레측에 어떻게하면 광고를 낼 수 있는지 문의했어요.
추천 다섯명과 저 위에 W양과 F양의 적극 동참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중에 나 몰라라 하면, 아치는 민망해서 점이 될지도 몰라요.
메일이 없네요. 다시 연락을 해봐야겠어요. 어러다 흐지부지 될까, 흐흠.
 

산의 자리에 정원을 넣으면 책 이름, 패러디는 아니고 문득 그 제목이 생각나서 적어봤다. 

 승주나무님 말대로 F/A(free agency)가 아닌 그저 청년백수가 된지 5일 정도 됐다. 날백수가 됐으니 남들과 다른 패턴으로 살아보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여행을 생각해봤는데 딱히 가고 싶은데가 없었다. 여행, 여행하지만 실은 가라고하면 괜히 발을 빼게되는 여행이랄까. 워밍업 차원에서 경춘선을 생각해냈고, 전에 대성리와 춘천은 가봤으니 가평이나 청평을 가볼까하고 이리저리 검색을 해봤다. 당연히 재기발랄하며, 맘을 동하게 하는, 꼭 가보고싶게 만드는 내용의 블로깅이나 글은 없었다. 죄다 애인과 펜션에 가려는데 어디가 좋냐, 뭐가 맛있냐, 뭐하고 놀지 등등. 계획을 세워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지만 일단 열차 시간표만 보고선 어떻게 되겠지란 심정으로 길을 떠났다. 애인없이 펜션이 우글거리는 동네로 여행을 하기 때문에 부아가 치민게 절대로 아니다. 절대로에 방점이 찍힐거란거 아는데도 절대로 아니랜다. 

 길을 떠난다, 떠난다란 말, 참 좋다. 내 맘엔 어쩌면 나그네가 되고 싶은, 길 위에서 정처없이 걷고싶은 로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등산객 할머니 할아버지 틈바구니에서 '한 아이'를 읽다 졸다 덜컹거리다보니 어느새 청평이다. 역은 모름지기 이래야한달까, 청평역은 소박하고 정겹운 모양새로 나를 맞아주었다. 휘둥그레하게 크기만한 역보다 작고, 낡은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역이 좋다. 고속철 사업으로 몇몇 역들이 헐린다는데, 그런거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물론 매일 그 길을 지나는 통근자의 입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주자의 입장이 아니니 내가 사는 곳은 편리하게, 남이 사는 곳은 보존이란 식은 아니다. 역사니, 유적이니 이런 차원이 아니라 내가 예전에 갔던 그 곳, 누군가의 숨결이 스민 곳이 한두개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밀고 새로'보다는 아취가 느껴지게 보존하는 방법도 있으니 말이다. 

 밀리오레와 영화관의 틈바구니에서 애닮프게 끼어있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신촌역. 그곳에서 어느 여름 날, 선풍기 바람을 쐬며 지린내가 나는 역사에서 머물던 기억은 여전히 애잔하다. 더위를 달랜다며 입에 대었던 폴라포의 달짝지근한 맛과 끈적거리는 여름의 냄새, 내 옆에서 한발짝 멀리 앉아있던 상대방의 표정까지. 깨끗하고, 정숙한 요즘의 건물에선 느낄 수 없는 맛이었다.

 청평역을 나와보니, 옳거니, 청평 관광안내 표지판이 있다. 호명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호명산 가는 길을 자세히 안내를 해놨다. 600m남짓. 만만해보였다. 정상을 지나, 호수까지 가서 다른 역으로 내려오는데 5시간까지 걸린다는데 그 정도까지야 싶었다.(대체 이런 섣부른 판단력은 어디서 주워온건지.) 그래, 여기로 가야겠군.  

 호명산은 옛날 산림이 우거지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었을 때 호랑이들이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했다는데서 명명되었다. 산의 남쪽 아래로는 청평 호반, 서쪽 아래로는 조종천이 흐르고 있어 정산에 올라서면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듯한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다. 국내 최초로 건설된 양수식 발전소의 상부 저수지로 호명산의 수려한 산세화 더불어 저수지는 백두산 천지를 연상시킨다는데 안 갈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600m남짓. 콧방귀를 뀐게 나중에 얼마나 큰 실수인지 깨닫긴 했지만 처음엔 문제 없었다. 잠도 푹 잤겠다, 돌도 씹어먹을 것처럼 의욕도 넘쳤으니까.  

 주위에 동네분들이 쌀쌀한 봄볕을 맞으며 역사 근처에 앉아 계시길래 여쭤보았다. 일종의 확인 차원. 

- 저기, 호명산에 가려고 하는데 갈만 하겠죠? 

- 으응, 갈 수야 있지. 그런데 작년인가 거기서 어떤 남자가 죽어가지고 헬리콥터로 실어나르고 난리도 아니었지. 

- 네? 저, 가고 싶은데. 

- 그럼, 갈 수야 있지. 그런데 시체를 사람이 못 들고 나오니까 헬리콥터가 끌어내리더라고. 

- ...... 

 아주머니가 호명산과 원수 졌거나 헬리콥터 이미지가 너무 박혀서 그러려니 싶어 그 옆에 분에게 다시 여쭤봤다. 

- 괜찮겠죠? 

- 응, 그럼 좀 힘들어서 그렇지. 갈 수야 있지. 그런데 요새 멧돼지들이 배가 고프니까 자꾸 나오나봐. 

- 네? 멧돼지가 있어요? 

- 있지.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데 낮이라 괜찮을거야. 낮에는 멧돼지가 보이니까 도망가면 되잖아. 

- 아, 네. (정말, 내가 도망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겠지?)

 가지말까? 그래, 다른 곳에 청평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있을거야. 너 산도 못타잖아, 날도 추운데 산에서 멧돼지를 만나거나 갑작스런 산타기로 숨차면 어떻게해. 게다가 거기엔 사람도 없다는데. 머릿 속에선 오만가지 생각이 튀어나오려고 난리인데 나는 태연하게 호사모(호명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분들이 안내해준 약도를 보며 산을 향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내가 어리버리해보이니까 괜히 놀리는걸 수도 있겠다 싶었고, 정상에 올라서서 청평과 인근 지역을 내려다보고 싶기도 했다. 사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호명산 말고는 이곳, 청평에서 딱히 가볼만한데, 겪을만한데가 없었다. 골목길을 돌고, 아이들이 노는 운동장을 구경하는건 산에 갔다와서 해야지. 그리고 크게는 아니었지만 뭔가 해내보고 싶다란 생각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겨울이라 인적 드문 을씨년스러운 유원지를 지나 산의 초입에 들어섰다. 경사가 만만치 않다. 하늘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면 꼭 이렇게 생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수직이다. 그냥 돌아갈까? 바람도 너무 차갑고, 가다가 포기하느니 지금 그만두는게 낮지 않을까? 아예 없었던 일처럼 말야.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산을 인생살이와 비유한 예시들이 떠오르자 더더욱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한발 내딛고, 다시 다음 발을 내딛었다. 15계단 정도였는데 계단 위에 오르자, 벌써부터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쿵쾅쿵쾅댔다.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고, 무릎 부근이 땡기기도 했다. 저질 몸이 실력발휘를 하는 중이었다. 

 어, 그런데 넌 누구니? 

 옥찌들과 월명산을 오를 때 가끔 청솔모를 보긴 했지만, 얘는 다람쥐였다. 

 털이 민들레 홑씨처럼 보들거리고 책에서 본것처럼 줄무늬가 있는 다람쥐. 작고 귀여운 녀석이 인기척을 느끼고 산 위쪽으로 물결치듯이 튀어오르는데, 민들레 홑씨 꼬리가 바람에 흩어지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 다람쥐라니. 

 잠깐, 평소에 못보던 다람쥐가 사는 산이라면 정말 멧돼지도 있는거 아냐? 그런데 쉴데는 없는거야?  심장이 계속 뛰는데, (심장은 원래 계속 뛰고 있었다고.) 호사모 전화번호라도 저장해놔야하는거 아냐? 죽어서 헬리콥터 타면 그래도 헬리콥터 타봤으니 괜찮게 죽었네라고 자위해야하는거야?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리 있나, 아냐아냐.

바람이 솨하며 불자, 호명산이 금세라도 호랑이 소리를 들려줄 것처럼 들썩였다. 이봐,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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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3-2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흥미진진한데요~

Arch 2009-03-25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휘모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진진은 아니고 진지해질지 몰라요. 뭐래.
바람구두님, 잘 이해 안 되는 말이라, 그러니까 바람구두님 등산과 관련되었단 건가요? 아니면... 어흠어흠

무해한모리군 2009-03-26 08:46   좋아요 0 | URL
전 당신의 진지도 좋아할거 같아요 ^^*

Arch 2009-03-26 11:37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음... 제게 너무 반하신거 같아요. 조금만 반해주세요. ^^

바람구두님, 아항, 제가 좀 느리답니다. 그런데 각오 단단히 하셔야해요. 요근래 캠핑 코스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장난 아니게 힘들어요. 제가 이렇게 말했는데 바람구두님이 산행 갔다온 후, 별거 아니었다 이러면 공식적으로 즈질 체력인게 드러나는거지만, 헬리콥터와 멧돼지를 기억해주세요.^^
 


 진실게임의 묘미는 별거 아닌 질문에도 뜸을 들이기가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벌칙과 진실을 말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며 지켜보는 눈들을 감질나게 하면서, 질문자체가 그다지 파격적이지 않음을 사람들이 깨닫고 눈을 돌리기 전에는 말을 해주는 센스 말이다.

 진실게임 시뮬라시옹일 수도 있겠으나 사람들은 진실게임을 통해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적당한 재치와 살짝살짝 분위기를 데쳐주는 거짓말, 리듬을 타는 용어사용과 과장되지 않으나 조금 민망해하는 표정을 구사해줘야 '게임'으로서의 진실게임은 모두를 만족시킨다. 그런면에서 곧이곧대로 진실을 말하거나(나처럼) 요령있게 넘길줄 모르거나 부득불 어떤 주제의 질문에서는 자포자기해버려 딜을 못하는 사람은 '게임'의 재미뿐 아니라 진실을 알기보다는 진실인척하는 얘기들 속에서 빛을 바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게임이 아닌 형태에서의 진실은 유효할까.

 취중진담은 숨겨진 맘을 들어내게 하는데 효과적이나 악용하는 사례와 술먹고 개되는 상황들이 속출하니 제쳐두고, '사실은'. '진짜로', '정말'을 빈번하게 쓰는 언어습관을 가진이의 경우, 거짓말로 의심을 받아본적이 있거나 말하는 자신도 본인의 말에 굳이 부사를 붙여야 안심이 되는 경우로 볼 수 있겠지. 연인 사이에선 바람을 피웠는지의 여부, 정치인들 사이에선 팩트 놀음으로 전락해버린 진실의 실체, 장사꾼의 거짓말, 언론에서 기사의 배치와 사실보도란 함정, 결혼 안 한다는건 3대 거짓말 중의 하나라는 것 등등.

 취중진담의 아류라고 할 수 있는 KTF의 부가서비스 중 콜중진담이란게 있다. 전화통화를 하면서 이 기능을 켜놓으면 상대방 억양의 고저, 머뭇거림 등을 체크해 평소와 다를 경우를 선별, 거짓말을 판단한다고 한다. 실효성이나 그렇게까지 해야할 정도면 차라리 믿지 않는게 낫지 않을까란 것은 둘째치고, 그게 과연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다시 진실게임으로 돌아가보면, 어제 어쩌다가 진실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난 내가 이런 게임을 굉장히 만만하게 본다고 서슴없이 지껄였었다. 난년이예요까지는 아니고, 숨기거나 꺼려지는게 없을 수도 있고, 물타기나 분위기 맞추는게 재능이 없으니 이실직고 말하는 것 밖에 수가 없단 고백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질문들이 이상했다. 허를 찔렸다고 할까.

 '알라딘에 정이 떨어져도 남고 싶게 만들 정도로 믿는 사람이 누구예요', '알라딘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예요.' 주위에선 왜 그런걸 물어서 질문을 낭비하냐는 분위기였지만, 난 난감해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라고 해야할지, 머릿 속에서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사람을 얘기해야할지, 아니면 한참 고민하는척 하다가 향후 별 문제가 없을만한 이성을 언급했어야할지(다분히 작위적으로) 답이 안 나왔다. 잠시 머뭇거리다 믿는 사람은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누구라고 말을 했다.

 순간, 멍텅구리같은 대답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 가져다준 진실이 섬뜩하기도 했고, 이러니저러니해도 내 껍데기는 여전히 단단하게 날 둘러싸고 있다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열려있고, 당신을 알고 싶어요, 세상은 봄날처럼 싱그러운 순간들로 이뤄져있다라며 어쩔줄 모르겠는 언어를 쓰던 내가, 진실을 말하지 말아야할 시점에서 '어쩌면 진실'을 발설해버린 것만 같았다.

 서재가 내 삶의 중심도 아니고, 발을 동동 굴리며 서재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아니라고 믿고 싶은건지도.- 글을 쓰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고는 있지만 이건 전에 라주미힌님이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서로간에는 불통이 되어버린다.

 요점이 불통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인지, 으레 그렇듯이 '아무도 믿지않아.'모드인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말들은 진실이었다고 생각하는건 위악의 증거인지, 당혹스러우면 아무거나 튀어나오는 습관탓인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조금 선명해지는건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말할 때 꽤 겁이 났고,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 그 느낌에서 시작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불편한 진실, 진실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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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3-23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를 찔린 진실게임이었군요. 그리고 저도 잠깐 생각해봤어요. 알라딘에 정이 떨어져도 남고 싶은 사람은 누구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지?
그런데 온라인상에서 '믿음'이라는게 그 실체가 있는건지 좀 불안해요.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그토록 설레임을 주던 레오와 에미가 결국은 어떤 결말에 이르렀는지.

알라딘을 좋아하고, 알라딘의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 때문에 머무른다고 하더라도
그사람이 만약 갑작스레 난 알라딘이 싫어, 하고 이곳을 떠나버린다면 혹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랜 시간 잠수를 탄다거나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공중에 붕- 뜨게 되잖아요.

결국 중심을 잡아야 하는 건, 주체가 되야 하는 건, 나예요.
라고 쓰면서 결론이 나오네요.


그래도 여전히 좋은 사람 몇몇은 존재하지만.

뷰리풀말미잘 2009-03-2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니터를 바싹 끌어당겨서 읽었어요. ㅎㅎ 진실게임이 그런 것이었군요, 아치님은 그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들을 하시는군요.. 으음, 으음.. 재미있어요. 내일 또 읽어봐야겠어요.

조선인 2009-03-24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이라는 인터넷서점에 정이 떨어져도 남게 할 만한 서재지인이라...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한데요? 우리가 정을 가지고 있는 건 서재지인이지, 알라딘 서점 그 자체는 아니잖아요? 알라딘에서 더 이상 책을 사지 않는다 해도 서재를 유지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질문일 듯. 굳이 서재지인을 믿느냐 안 믿느냐라는 질문으로 비약하실 필요는 없다고생각해요. ㅎㅎ

웽스북스 2009-03-24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 정도로 좋은 사람은 알라딘이라는 매개를 통하지 않고도 계속 볼 수 있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라는, 말을 꼭 남말처럼 한번 해봅니다. ㅋㅋㅋㅋ (나는 그럴 수 있냐고. -_- ㅎㅎㅎㅎㅎㅎ)

Arch 2009-03-24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그래요. 여전히 좋은 사람 몇몇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둥지를 트는 내가 있는거겠죠. 제가 좋아하는 분들은 개인적인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간간히 글을 올리는 분들도 있는바, 역시 제가 중심을 잘 잡고 있어야겠다란 생각이 문득 또 드네요.온라인 관계라 지칭되는 관계들이 왜 그런지에 대해 심도있게 분석해서 다음에 페이퍼로 써보아요. (남 얘기처럼 말한다. 흐흐)

미잘님, 눈 나빠지는데. 난 자꾸 쉴라가 남같지가 않아져요.

조선인님, 서재를 알라딘이라고 한거예요. 알라딘에서 더 이상 책을 안 살 일은 없을 것 같고, 제겐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며 서로 뭔가를 주고받았다고 생각했던 공간인데 일테면 '부루투스 너마저!'이런 느낌? 비약인가요. 흐음.

웬디양님 자기말 맞아요^^ 민의 페이퍼가 뜸해지니 웬디양님을 어떻게 붙들어놓을지 궁리궁리.

hnine 2009-03-24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알라딘을 많이 좋아하시나보다... 이 페이퍼를 읽으며 전 그 생각부터 드는걸요. 알라딘 사람들인가? ^^
이곳에 멋진 분들 꽤 있으시지요. 정이 떨어진다는 것은 떨어질 정이 있었다는 것이니까, 그것을 전제로 하고 한 질문이겠지요.
옥찌랑 민이, 잘 있지요? ^^

Arch 2009-03-24 19:42   좋아요 0 | URL
hnine님 오랜만이에요^^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질문에 답을 개떡으로 해놓은걸 보면서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아, 정말 내 맘은 뭘까란 생각이 들었었죠.

네, 잘 있죠. 웬디양님과 hnine님의 소소한 궁금증에 힘입어 옥찌들 페이퍼를 하나 물밑 작업할까 생각중이어요.
 


 그는 내게 몇개의 처음을 선물한 남자다. 추파춥스 한통이 얼마나 무거운지, 받을땐 꽃처럼 미소지을 수 있지만, 몇개월에 걸쳐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은 얼마나 버거운지 알게한 남자이며, 나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똑똑한 녀석이라고 했던 사람이며, 노을을 바라보며 밝았던 하늘이 이렇게 소리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자신도 그러면 어떨까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있다고 말한 사람이며, 처음으로 마술같은 모항을 알려준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처음으로 내게 'NO'라고 말한 남자다.


 바래다준다며 차를 끌고 나온 그는, 잠옷 바람이었다. 잠옷을 보자 난 단박에 잠이 생각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책없이 무모했던지라

-같이 자고 싶어.

란 말을 내뱉었고 그는,

-다음에 같이 있자.

라고 말해줬다.

 피곤하다거나 귀찮음, 쿨한체 하거나 거절당한 내가 자동차에 머릴 찧어대며 거절당한 여인네 연기를 펼칠까 에둘러 건넨 'NO'가 아니었다. 그냥 담백하게 지금은 아니야.

난 그게 참 산뜻했다.

거절은 은밀하게 과즙이 배어나오는 자두 씨앗을 핥듯 입맛을 동하게 한다. 그게 꼭 지금 자지 말고 나중에 연애 비스무레한거 하면서 단계를 밟잔식이거나 지금은 꼴리지 않는단 원초적인 감각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자야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긴 어렵다. 결국은 타이밍의 문제.

그때의 타이밍이 적확했음은 마술처럼 그가 내 맘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혹은 떠보거나, 행여나 피곤한데, 그럼에도 부리는 억지.

나보다 그가 더 내 마음에 닿아있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그때의 그 분위기가 나를 사로잡았지만, 그렇다고 명백하게 모든 상황에서 흡족한 행태를 보인건 아니었다. 무려 몇 번씩이나 잘거냐고 물으며 구질구질하게 몸을 비틀어댄적도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상황모면의 발작이었거나 그야말로 저질스러운 짓이었다란 후회가 들기도 한다.  

 가슴이 뛰고 싶다면, 섹스를 지루한 의식으로 처박지 않으려면 환상범벅 사랑 사탕을 조금 더 입안에서 굴리고 싶다면 지금 여기에서 좀 더 멀어질 것.


 존재의 품격은 적당한 외면에서 나온다. 예술계에 센세이셔널하게 데뷔했지만 체스에 빠져 지냈던 뒤샹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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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Arch > 눈 오는 날, 옛 친구를 찾다. -할매꽃 후기


 

 

 

 

 


 


김연수 -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란 생각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진행자 - 어떻게 봤나.

김연수 -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봤다란 얘기를 하는게 걱정됨. 내가 계속 얘기를 하다가 딴소리를 하고 있지 않을까란 우려도 있음.(웃음) 다큐를 좋아한다. 감정이입이 잘 되고, 실존해 있는 사람들의 말이기 때문에 작가들의 상상의 여지가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스크린 밖의 일까지, 말하지 않는 것까지 상상하게 된다. 이야기와 개인사, 극히 일부분만 다뤄졌는데 영상으로만은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다. 화면 밖의 이야기들이 나를 끌어당긴다. 작은 할아버지의 경우, 단편적인 기억이 아닌, 일상, 하루가 백년 같다란 느낌을 상상한다면 영상으로는 온갖 일을 다 담을 수 없다. 말하지 못한 부분들을 생각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감독님이 힘들었을 것이다. 글로 쓰기도 어려운게 가족사는 객관적 위치가 확보되지 않아 자꾸 반신반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려되는건 한쪽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하진 않을까란 점이었는데 균형에 대해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열린 결말이었고, 지금 세대(자신과 감독을 쳐다보며, 우리 같은 세대죠란 눈빛을 보내는)가 접근하는 방식이란 점이 인상적이었다.

진행자 - 가족의 이야기라 고민을 계속했을 것이다. 객관화하거나 갈등을 도출시키는 부분, 연출 기준은 어떤거였는가.

문정현 - 만들고나서 든 생각은 만들기 쉬웠단, 다큐멘터리가 사람과의 관계를 다루기 때문에 전혀 낯선 사람이 아닌, 친하니까 말해달라고 부탁드리면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시작은 쉬웠지만 끝나고나서 생각해보니 좋은걸 만들긴 힘들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다신 안 만들 것 같다. 객관화하는 문제, 시선을 어디다 둬야할지, 내가 한쪽만 다루고 있고 한풀이지 않을까란 고민을 줄곧 해왔다. 결국은 솔직해지자란 결론을 내렸고, 내 감정에 충실하자란 기준을 정했다. 내 감정에 충실하되 지긋하게 눌러 객관적이고 솔직하게 바라보자란 생각을 했다.

진행자 - 김연수의 작품, 밤은 노래한다 중 작가의 말에 보면 극중 인물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연수 - 소설 마지막에 친구들이 이념 때문에 죽이는걸 다뤘다. 해결 안 되는 문제들인데 나같은 경우는 상식주의 안면주의(웃음)인지라 친분을 중시한다. 내 세계관(웃음) 아니, 가까운 사람에게 잘하는게 내 처세관인데 그 입장을 송두리째 박살내는 일이 현대사에서 많이 일어났다. 상상 안 된다고, 윤리적으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룰 수 없다고, 분노나 배신감 등을 모른척할 수 없고,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모르겠다. 삶에 대한 교훈이기도한데 모든게 적과 우리편으로 명쾌해지지 않는다. 찝찝한 상태를 견디는 것, 화해는 아니고, 어정쩡한 상태로 있는 것, 소설이고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해하려고한 것이지, 직접적인 사람에게 화해를 종용하는것 자체가 폭력적일 수 있다. 소설에선 죽여야할 사람을 안 죽인건 바라본다는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진행자 - VIP 시사 때 어머니 반응은 어땠는가.

문정현 - 그 전에 미리 보셨고, 박수 한번 받아보시라고 올라오라고 말씀을 드렸다. 처음에 어머니는 내가 다큐를 찍는걸 반대했다. 돈이 안 된다거나 불안정해서가 아니라 끼가 없어서 안 된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번 영화를 준비한다고 하니까 '여봐라, 이 정도 가지고 얘기를 한다.'며 그럴줄 알았단 반응을 보이셨다.(웃음) 그래도 고생했다고 말씀해주셨고, 열광적이진 않았어도 은근히 좋아하셨다.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진행자 - 어머니가 끼가 굉장히 많으신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문정현 - 어머니는 한국무용, 가야금도 배우시고, 득음을 한다고 돌아다니시기도 했다. 어렸을때는 날 끌고 탈춤을 배우기도 했다. 어머니가 당신께서 이 다큐를 연출했다면 워낭소리처럼 대박낼 수 있었겠구나라고 말씀을 하셨다.(웃음)


관객질문


승주나무 - 영화를 보면서 참 부럽다란 생각을 많이 했다. 고향이 제주도인데 제주도 역시 인구의 1/3이 죽임을 당했다. 외가쪽에도 사연이 있는데, 피해를 승화시키고 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현기영씨도 제주도에서 도망나와야 쓸 수 있다고 할 정도였는데. 현대사의 다큐가 심부까지 깊게 들어와 놀랐고, 준비하는데 어떤 과정이었는지 궁금했다. 불만이나 해소되지 않은 부분 중에 가족사로 녹여도 승화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어떤건지 궁금하다.

문정현 - 영화는 2003년에 시작했고, 영화에서처럼 일기장을 보면서 가족사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기획이 됐다. 이 작품만 매진할 수 없어서 2003년에서 2007년까지 준비를 했지만 할매꽃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영화가 근현대사 이야기냐는 지점보다는 대화하고 알아가는 시간이라 좋았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나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할머니에게 보여주려고 만들려는 영화였기에 방향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만들어가면서 치유된게 많았다. 해소되지 않은 나만의 문제라면 다큐멘터리의 의미, 존재, 현장감을 드러내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나의 경우는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 고민을 던지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철학이라고 봐왔다. 내가 생각했던게 변해가며 영화, 가족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불만스럽지 않았다. 사실성을 기반으로 했다는, 객관적일거란 선입견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드라마타이징이란 방식으로 집착하며 과도한 열등감으로 만들어낸게 아닐까란, 이야기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곡선들 만들어내려고 한건 아닌까란 고민은 했다.

관객 - 다큐를 많이 보는 사람이 아니다. 정확한 내용을 모르고 보기 시작했는데 주제가 영화가 진행되면서 절충되는 느낌이었다. 이념- 인간성- 경험, 그리고 겸허함에 이르는 것 같았는데 김연수 작가가 책으로 쓴다면, 처단은 어떻게 다뤘을지가 궁금하다.

진행자 - 교묘하게 틀어서 작가에게 질문을 한다.(웃음)

김연수 - 아마 좀 더 기승전결이 뚜렷해지겠으나 정말 다를 것이다. 작은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미스테리적으로 도입부에서 가져가 이야기 끝에 해소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갖고 스토리를 만든 경우라면 소설의 허구에서 시작해 스토리를 갖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작업하는 분들은 사실 그대로 보여줘야된다는 강박들이 드라마타이징 형식을 도입하는 것에 부담을 갖게 하기 마련인데 어쨌든 다큐에는 흐름이 중요하다. 내 작업은 이념적이며 다른 것을 재배치하는 과정이다. 잘 모르겠으나 처단이나 단죄에는 관심이 없다. 큰 얘기를 하더라도 난 개인적인 문제로 돌아간다. 국가와 개인의 대립이란 것 안에서 처단, 단죄는 국가적인 관점일 따름이란 생각이다. 개인적인 관점으로 돌아가면, 영화에서 자살한 사람도 나오듯이 우리가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어머니, 가지 말라고, 만나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란 생각을 했는데 그냥 끝나서 안심했다. 내 결말도 다르지 않을 듯하다. 결말 자체가 오묘했고, 내 성향이랑 비슷하나, 다큐멘터리의 경우 그 후를 쫓아간다는 것에 비춰볼 때, 보는 입장에선 그런 결말의 의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됐는지가 궁금해진다.

문정현 - 어떻게 됐는지를 많이 궁금해한다. 커다란 의도는 없고, 솔직한 맘이었다.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배경에는 국가란 제도,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란 얘기를 하고 싶었다. 비정규직, MB악법으로 또 다른 곳에 희생자가 있다란. 반성이나 성찰이 없다면 할머니가 겪은 일들은 똑같이 반복되고 있고, 반복될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왜 우리 역사는 이랬을까, 우린 이런 시대가 있었고, 희생자였구나, 이런 질문 안에서 현재를 바라보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끝난 것은 과거를 바라볼 수 있는 바탕과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질문을 던지려는 의도였고, 한풀이나 값싼 구도가 될까 우려했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 - 반성하지 않은 과거는 되풀이 될 것이란건 낙관적인 얘기라고 생각된다. (...)역사청산이 가능하냐란 질문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회색인간들이 흔들거리며 그들 각자의 모순에 부딪히며 흘러온게 역사인데 어떻게 청산이 될지도 의문이 든다. 그런 면에서 엄마에게 왜 그렇게 강요를 했는지 궁금했다.

문정현 - 다큐는 재현을 토대로 하지만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철거촌에서 울고있는 아이를 찍을 수 있을까, 죽어가는 사람을 찍을 수 있을까. 윤리적으로 올바른가란 고민이 있을 수 있고, 단순히 적과 아를 구분하는 선에서 끝날 우려가 있기도 하다. 가해자를 징벌하잔 의도로 보였다면 내 실수이다. 그건 내 한계만은 아닌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한테 그 당시의 가해자의 자식들을 만나길 강요하면서 -물론 아주 잔인했지만- 내 안의 실마리를 찾았다.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란 생각을 안 한건 아니다. 어머니가 가서 만나보시겠다고 했다가 점점 변모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란 생각도 들었고, 당사자들은 어렵겠지만 어머니 세대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란 바람도 있었다. 그래서 잘못된 모습으로 강요한 부분이 있었다. 역사란건, 회색의 사람이 그려온 선이 아닌 민초, 작은 그룹인 역사가 합쳐진 거대한 집합체란 생각을 한다. 역사인식의 차이일 수 있다.

관객 - 바라보는 입장이 아닌, 어떻게보면 조금 잔인한 질문일 수 있겠지만, 너라면, 네가 경찰이라면 어떻게 하겠냐란 질문이 나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문정현 - 그런 질문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당신 같으면 이렇게 찍을 수 있었겠느냐, 되돌아보는 역사적 사건이 성찰의 바탕이 될 수 있겠는가란게 더 유의미하다고 본다.(...)

Arch - 영화, 정말 잘 봤다. 예고편을 보면서 역사 속에서 상처받은 인물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그런 위로나 치유의 방식이 유효할까란 의문을 갖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내 맘조차 위안을 받을 정도로 괜찮았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너무 숱한 어려움에도 남에게 베풀기 좋아한 할머니와 항상 긍정적인데다 에너지 넘치는 어머니란 캐릭터- 캐릭터라 말하기는 어폐가 있으나-에 대해 정말이지 빠져들고 말았다. 내가 나중에 나이가 든다면 꼭 본받고 싶은 인물상일 정도로 인상 깊었다. 혹시라도 옆에서 지켜봤을 때 그들이 당신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긍정적이고 배려할 수 있는 지점들을 마련한 계기나 에너지가 있다면 뭘지 정말 궁금하다.

문정현 -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가족들이 일부러 숨겼다거나, 혹은 특별히 내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체화된 삶의 이유가 있었고, 발화된 경우 아프긴 하지만 이 정도 역사 없는 집이 없을 것이란, 각자의 집마다 많은 사연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적용된 측면이 크다. 그렇다면 그런 아픔을 왜 끄집어냈냐란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시사회 후에 그런 질문을 준 사람이 있었는데 인상 깊었다. 재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에 대해선 아직 똑같은 폭력이 난무하며 이것에 대해 말해야할 책임감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가 현실을 바라보는 거울, 틀이 되길 바란 마음이었고, 가족들이 바라는 것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보면 한나라당이 되면 다들 숨도 못쉬고 살아간다라고한-다큐가 만들어진 당시는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기 전이었음.- 할머니 말씀이 그냥 허투로 뱉어낸 말이 아니란 것도 지금 상황을 보면 짐작가기 마련이니까. 그분들은 그렇게 체화되었단 생각이다.

진행자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김연수 - 연재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다. 창비에서 대단위 프로젝트, 올로케 3권짜리 소설인데 중간에 잘라라, 이래서 중단되는 연재를 하는 중이고(웃음), 연재가 끝나가고 있는 것도 하나 있다. 올해 하반기에 단편소설집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문정현 - 편집중인 영화가 있다. YMCA남성의 기만적인 이야기, 2편을 편집중이다. 남한 사회의 시민운동이 유효한지, 친자본, 기층 운동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고민 중이다. 또 다른건 개인사적인 다큐멘터리를 기획중이다. 91년도 분신 사건이 다큐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내가 광주 출신이라 광주 5.18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개인사와 시대의 모습, 이제는 더 이상 운동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제목은 '내가 문근영을 만나야 하는 이유'이다.

진행자 - 아주 선정적인 대한민국 좌익 감독의 얘기였다. (웃음)



 한글 문서로 10포인트인데도 4페이지가 넘어서는 분량을 적어나가면서 애초에 성실한 기록자이며 객관적인 내용을 전해주고자했던 의도와는 다르게 이건 단순한 사실 전달만이 아닌, 말이 발화되고 내가 적어가는 순간들의 감정과 중요도의 차이에 따라 조사 하나, 단어 하나에도 많은 고려가 있어야할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꼭 해야할 일도 아니기에 내가 하던식대로 감상을 남기는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안 한건 아니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고, 처음으로 '무려 김연수' - 웬디양님과 대화하다 내가 인용을 하자 그녀가 동의해준 무려 김연수란, 단순히 소설가나 김연수가 아닌 황송하지만 아주 많이 황송할 정도는 아닌 약간 놀랍고, 만나면 반가운 의미의 '무려'란 말이 나온 것이다. -를 본 소감에 대해서 할 말이 없었던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든 감독님과 감독님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드는 것의 시선에 대해서도 물론, 할 말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도 난 왜 이 긴 후기의 대부분을 작가, 감독, 관객과의 대화로 채웠을까. 내가 주효하게 바라보는 시선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은 욕구와 '좋았어요'로 끝내기엔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다란 욕심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욕심은 욕심대로 유효할지 모르겠으나, 메모한 내용을 보면서 그들과 관객들이 나눈 대화의 공백을 메꾸는게 얼마나 힘든건지 절감했다. 다큐멘터리나 뉴스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란게 어떤건지, 내가 녹음기가 있었다면 있는 그대로가 될런지, 의사사건처럼 내가 좀 더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 방점이 찍히진 않았을런지, 게다가 아, 난 너무나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등등, 오만가지 생각이 수면 위에서 투닥거리고 있었다. 새삼 '객관화된 사실'에 대해 쓴다는 것의 위력과 조심스러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부정확한 내용과 언어를 글로 기록하는 것에서 삐져나오는 적절치 못한 뉘앙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록했던 내용을 후기에 올린건 객관화되지 않은 얘기를 쏟아낸데에 대한 비난을 달게 받겠단 각오가 있어서라기보다는 Arch의 생각은 이렇지만 난 이렇게 읽었다란 코멘트나 다른 시각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은, 역시 욕심 때문이다. 좀 더 여지를 두려는 의미에서 적어도 적절한 거리를 두고 전달할려고 노력했단, 나름의 변명을 다시 스크롤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끼적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이런 글을 쓸 때 어느 정도의 준비와 각성이 필요할지 절실하게 느끼기도 했고.


 영화를 보고나서 잔상처럼 남은 장면은 할머니가 맨발로 자신의 옛 땅들을 돌아다녔던 모습이었다. 애니메이션으로 잠깐 소개되기도 했지만, 난 좀 더 생생하게 그 장면이 떠올랐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끙끙, 자기 안으로 삭이는 고통이 자꾸 발로,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할머니도 알았을텐데, 얼마나 암담했을까. 모두의 죽음 앞에서 그저 묵묵히 견디는 것만을 택했어야하는, 그게 자신만이 아닌 시대의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일거란 단순한 희망에 온 몸이 바스러지는 것도 모르며 베풀고, 인자하게 웃어주셨던 분. 늙고 노쇠한 몸으로 다가올 죽음에 몸을 맡기며 고생하셨다란 말에 나뭇잎처럼 몸을 바르르 떨던 분.

'나의 외할머니는 당신 장례식에 오시는 분들, 음식 많이 드려 따뜻하고 배부르게 대접하라고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질문했던 것처럼 에너지나 긍정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한, 그 힘. 그렇게 견딜 수 있고 살아가게하는 힘 앞에서 맘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그들, 견디는 민초나 민중이 아니라 내가 다다를 수 없는 경지를 지닌 누군가, 닮아가고 싶고, 조금 덜 아프셨더라면 좋았을 할머니의 힘이었고, 할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공포탄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남편을 바라보며 백가지 맘을 먹었다가도 내 인생 하나만 희생하면 된다란 생각에 백년같은 하루를 지키고 견디어내었던 작은 외할머니. 할머니는 그런 남편이 죽기 전에 '자넨 어쩔랑가 소리 한마디 안 하니 서운했다'고 하셨다. 난 그 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말 모르겠다. 바보 같고, 순하신 이분들이 어떻게 그 삶을 견디고 어떻게 지내왔는지 정말 모르겠다. 체화된 삶이라고, 모두가 다 그러니까 자기가 겪는건 별거 아니란게 어떻게 가능한지, 무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지점을 정말 잘 모르겠다.

 쉽게 복기 이모의 아버지를 총살한 사람의 자식을 만나겠다라고 허락했던 어머니가 한 발자국 물러서게 되면서 한 말, '옳고 그름을 어떻게 알겠니, 인간 자체가 모순이지'란 말에서 어쩌면 나 역시 실마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적인 고통의 반복을 알아야하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하기 위해, 사람들이 좀 더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란 의미에서 감독은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난 비록 외할머니는 이 영화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남은 사람들에게 난 이 영화가 작은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란 것을 느꼈다.

 모두가 겪는 일일지라도, 당신들, 그리고 앞으로의 우리들은 녹록치만은 않을거란걸. 직설적인 화법으로 감독은 할머니 얘기를 통해 들려줬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진정성의 힘이란 구태의연한 감상으로서가 아니라 맘으로 영화를 받아들일 것 같다란 생각이 들었다.

외할머니를 위해 만든 영화였지만, 우리 모두가 배우고 위로를 받게 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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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3-24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와. 아치님 질문도 했어요? 후훗 나 너무 좋은 사람에게 양도했어요 (아 그런데 뮤지컬은 디게 재미없었어요 -_- 흑흑) 이 글은 나중에 영화보고와서 읽을 거에요. 선리플 중관람 후감상 쯤 되나? ㅋ

Arch 2009-03-24 17:39   좋아요 0 | URL
네엡^^ 갑자기 튀어나와서 몇개의 댓글을 슝슝 보내준 웬디양님~ 뮤지컬도 재미없었다고하니, 할매꽃 후기 2탄- 김연수의 행동과 표정, 언어습관과 미소에 관한 심층적인 분석을 통한 웬디양 약올리기를 써볼까 궁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