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 단위로 알람이 울리도록 핸드폰을 맞춰놨다.
15분은 영어 문법 한 챕터를 마칠 수 있는 시간, 적당히 읽을만한 글을 10페이지 정도, 조금 어려운 글은 5페이지 정도 읽을만한 시간, 인물 두상 뼈대를 두개 정도 그릴 시간, 옥찌에게 쓰는 편지의 반절 정도를 채우는 시간이다. 15분은 간편한 식사를 차릴 시간이며, 설겆이를 해놓고 차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이고, 책 속의 좋아하는 구절을 다이어리 두페이지 정도에 써넣을 수 있는 시간이다.
다시 15분은 머리를 감고, 빠진 머리카락을 테이프로 모을 시간이며, 방안에 널린 빨래를 개우는 시간이고, 빨래를 하기에는 좀 빠듯한 시간이다. 15분은 비빔국수를 뚝딱 만들어낼 시간이고, 출근하기 전에 준비하기에 알맞는 시간이며, 맥주 반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며, 누군가의 통화를 계속할지 끊을지를 결정하는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15분은 얼음을 가득 채운 물에서 녹차가 몸을 바싹 조였다가 풀어질만한 시간이며, 영화를 볼 때 계속 볼지 말지를 결정하게 되는 영화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15분은 소주 한잔을 비워내기에 적당한 시간이고, 방 안에 있는 식물들의 물갈이와 물주기 말을 건네기에 안성맞춤인 시간이며, 옥찌들과 통화를 한 후 한참동안 여운을 즐기기에 알맞는 시간이다. 15분은 좋아하는 사람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서도 전혀 피곤함을 안 느끼게될 최대치의 시간이며, 그 눈을 돌려 다른 것을 바라볼 때 서로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게 만드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15분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모든 경우에 다 들어맞는건 아니다. 맥주 한병을 몇시간이고 붙들고 있을 때도 있고, 옥찌가 기분만 좋다면 15분 넘게 통화할 수도 있으며, 한없이 늘어지게 음식을 준비할 수도 있으니까. 편지를 쓰다가, 그림을 그리다가 멍하니 손을 놓고 있을 때도 있으니까. 누군가와의 통화는 시간과 관계없이 영원처럼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니까. 어느 날의 빨래는 오늘 다 끝마칠 수 있을까 싶게 버겁기도 하고, 가끔씩 녹차 티백마저 앙탈을 부려 쉽게 우러나지 않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굳이 15분이었던건 15분이 30분이나 1시간처럼 늘어지지 않고 10분처럼 촉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의 책 소개를 읽고선 막연한 예감으로 15분을 정해서 일과를 구성해봤다. 처음 두시간은 마치 이 시간들이 점점히 박히듯 촉박하거나 느슨했다. 그러다 점점 느슨해지다 다시 전처럼 무한정의 시간을 갖은 사람인양 굴어댔다. 15분에 맞춰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가다보니 좀 더 알차졌고, 전처럼 무계획을 모토로 시간낭비를 하는 느낌이 줄어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생각보다 내가 생각하는 시간 계획과 실재로 시간을 소모하는 일의 차이도 알게 되었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는 차라리 류비셰프의 시간 계획표와 그의 짧은 글들을 편집하는게 좋았겠다 싶을 정도로 조합한 사람의 사족이 재미없게 늘어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치밀하게 조직된 시간 관리와 통계에 허를 휘두를 정도였다. 내가 15분 어쩌고 한건 그야말로 사족의 사족이었다. 자신의 시간을 계획하고, 그대로 실행하며, 계획과 실행 사이의 오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 월말, 년말 단위와 몇년마다의 결산과 연구 성과들의 정리. 가능성의 최대치란 말을 무리없이 인정하게 만드는 그의 삶을 보고 있자니 새삼 나에게 시간은 어떤건가란 생각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노동할 일도 없고, 어떻게 보면 바라마지 않은 짧은 노동 시간과 그에 걸맞는 생계비를 계획하고 마음대로 유용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있음에도 난 터무니없이 낙관하거나 날 방치하는 쪽으로 내버려둔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성과가 있는 일을 한다거나 여행, 생각이 커가는 과정, 누군가와의 관계 변화, 지출입의 기입, 하루하루 하는 일은 매일 기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록은 분절되어 있고, 어렴풋하게나마 그래서 과연 내가 뭘 했던가에 대해선 아무런 답도 내주지 않았다. 하루하루 발전한다거나 몇분 단위로 나를 기획해야한다는 생각따위는 너무 터무니없지만, 적어도 나를 위한 시간을 허무맹랑하게 스친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류비셰프처럼 세심하게 시간을 조직할 수는 없겠지만, 좀 더 타이트하게 하루의 계획과 한달의 계획, 계획과 실행의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을 해봐야겠다.
오늘도 처음 두시간은 정말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로 잘해냈는데,
알라딘에 접속한 순간 알람이 계속 우는 것에도 아랑곳 안 하고 계속 남의 서재를 돌아다니고 글을 쓴다고 15분력은 까마득하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놈의 서재,
뭐뭐! 좋다고. 쓱쓱
예시사항:
누구누구의 서재에서 머문 시간, 머물면서 뭘 했는지, 페이퍼 작성에 든 시간, 리뷰 작성에 든 시간, 서지검색에 든 시간. 아아,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