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면 제목만 그럴듯 할 때가 많은데 오늘 역시 그 우려, 만만치 않다. 

 일도 제끼고, 꾸물거리는 굼뱅이처럼 침대 위에서 자세만 바꾸며 텔레비전을 시청하길 어언 4시간째. 머리도 무거워지고, 배도 고프고-배는 늘 고프다.-, 어깨가 결려서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때는 오후 4시. 한창 달아오른 해가 이제 돌아갈 때를 알아채곤 따스한 기운을 대지 위에 드리우고 있을만한 시간. 세수를 안 했지만 뒹굴대다가 떨어졌는지 눈꼽 하나 남지 않은 얼굴을 쓱 거울에 비춰보고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생각보다 더 기분좋게 따스했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봄을 지나 여름이 왔다며 속살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스타일인지라 달랑 손 밖에 노출 안 된 내 차림새가 쑥쓰럽기까지 했다.  

 밖에 나온 목적은 장보기였지만 부리나케 장만 보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제일기획 앞에서 이태원 역을 지나 우체국까지 쭉쭉 걸었다. 테라스에서 해를 쬐는 사람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새에서 서로 놓칠새라 손을 꼭 잡고 잇는 연인들, 벤치에 누워 사람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집없는 사람들, 이곳의 비둘기는 날개짓을 할 때 평화와 자유의 각질이라도 떨어뜨리는지 그들의 날개짓마저 멋져보였다. 그러니까 난 일요일, 아니 일요일이 아니어도 몸에서 자연 산화반응이 생길 정도로 해를 쬐고 싶은 날에 당신들에게 이태원으로 여행 올 것을 얘기하는거다.

 여기에서 살게 된데는 직장이 근방이란 이유가 다였지만 살면 살수록 이곳이 가져다주는 활력에 도취되고, 이곳이 심어주는 신선한 날것의 냄새들로 흥분된다. 다른것이 불러일으키는 불균형함은 어긋나는 패턴들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슷썰기가 쭉 이어지면 일정한 패턴이 되듯이 다양한 사람들이 뭉쳐있는 곳만으로도 그럴듯한 무늬가 그려지는데 이태원이 바로 그렇다. 

 케밥을 만드는 터키 아저씨들은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도 서두르는 기색없이 농담을 하면서 일을 하고, 마마처럼 보이는 두 여인은 우아하게 프린트 된 원피스를 입고 걸으면서 나로선 하나도 못알아들을만한 억양 센 영어를 구사하고, 가족끼리 나와서 나처럼 길 양쪽 끝을 그저 천천히 걷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알록달록한 팔찌들을 늘여놓고 파는 세네갈에서 온 처녀는 연신 예쁘단 소리를 하며 언니들 기분을 좋게 하고, 큼지막한 가방을 들고 걷는 여행객들, 사우나 앞에서 진을 치는 일본 사람들까지. 거리는 혼잡했지만 적당히 자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만큼만 복잡했으며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선언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많은 것들로 인해 활기가 넘쳐났다.  

 터무니없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맛도 별로 없는 음식점에 지나치게 상업화된 이태원의 색깔에 유감이 없는건 아니다. 하지만 모퉁이만 돌아서면 누구든 몇천원으로 멕시코 뷔페를 양껏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고, 자기들끼리 신나게 얘기하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hey pink'어쩌고 하는 느끼한 남미계 총각들이 있으며, 새침한척 책을 읽지만 누군가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면 금세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울 수 있는 여유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잘 웃을지 모르는 나도, 그리고 당신들도 이곳에서라면 썰렁한 말에도 히죽대며 자신은 더 썰렁한 말들을 생각하며 어깨를 들썩일테니까. 외국 사람 때문은 아니고 이태원의 분위기, 햇살이 쨍하고 내려쬐는 날엔 산책이 도리인 것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걷고 싶게 만드는 이태원의 풍경, 사람들, 이태원의 맛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막상 이태원에 오면 특별히 가볼만한데도, 화끈하게 재미있는 곳도 없을지 모르겠다. 내가 제시하는 여행은 단순히 이태원의 메인 스트리트를 왕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여행을 꼭 무언가를 구경하고, 무언가를 사고, 무언가를 해봐야 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내 제안이 싱겁기만 해서 할리피뇨를 자꾸 씹어대게 만드는 요리처럼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행을, 떠남과 시작함, 공간 안에서 자신의 숨소리마저 달라지는 느낌을 체험하는 것, 다르면서도 같은 것들을 깨닫고 볼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것 저것 아니어도 봄날의 끄트머리를 잡고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에 몸을 맡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니아니 그저 이태원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괜찮다.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볼 수 있을테니까. 이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기이하거나 특이한게 아니라 자신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의 문제란건 따로 말하지 않겠다. 어떻게 보면 무책임하게도 '이태원으로 놀러와'라고 해놓고선 못느끼면 네 책임이라고 못박는 것 같지만 결국 모든 여행서가 전제하는건 그런게 아니겠는가. 게다가 여행서는 따로 돈을 주고 사기라도 하지, 아치의 페이퍼는 공짜잖아. 

 가끔은, 

 조금만 짧은 스커트를 입고 약간 늦은 시간에 이태원 거리를 걷는다면 내가 일평생 받아볼 수 있는 예상 가능 헌팅수를 초과할만한 실적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보지만, 에이, 안 그래도 남자는 차고 넘치는걸, 이라고 써보고 싶은 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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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2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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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4 0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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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물었다.


- 너는 너의 글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다른 공간과 일기말고는 서재에 글을 쓰는게 다인 나로선 서재 글쓰기에 대해 평소에 느낀점을 얘기했다. 일기처럼 쓰고 싶지는 않은데 자꾸 일기화되고 있다고, 그러면 차라리 일기를 쓰는게 낫겠다란 생각도 가끔 한다고, 공감하고 싶다란 바람과는 별개로 그저 '쓰고 싶은 욕구' 때문에 말들을 지어내고 있는건 아닌지, 공적인 영역의 글쓰기로는 한참이나 모잘란다던지, 개인, 나에 대해 집중된걸 다른 누군가가 읽고 싶어진다는건 나란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기인하는건데 그런 사람이 있을까란 의문 등을 털어놓았다.


 그 사람은 '개인적인게 가장 정치적이다.'란 말을 해줬지만 글쎄, 개인적인면들의 비정치적인 것만 얘기하는 나로선 쉽게 공감가지 않았다. 모든 사안에 대한 나의 입장에 충실하다보니 나를 모르면 대체 이 사람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감이 안 잡히는데다 다른 사람들이 글을 읽는 욕구가 글을 쓰는 사람을 알고자하는 것보다 글 자체로 동의하고 싶은 측면이 크다면 분명히 별로 권할만한 방식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부랴부랴 쓴 리뷰에서도 성노동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난 이 책을 읽고 어떤 입장에 섰는가, 무엇을 느꼈는가, 내 개인적인 경험은 어땠는가도 중요하겠지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바와 내 생각의 차이를 좁히려는 시도와 성노동을 정치화하는 방식에서 좀 더 긴밀해질 필요성이 더 크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객관화와 요약이 부재한 글들에서 느껴지는 어거지와 참담한 결론, 비약을 일삼는 구조를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서재지수를 높이려는 수작도 아닌데 터무니없이 많은 글들을 써왔고, 글의 조악한 면면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쓴다. 마치 생각하기와 쓰기를 멈추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계속 쓴다. 여러 지점에서 문제가 많은 글임에도 계속 쓰는건 아무래도 지금 내 상황과 연관이 된지도 모르겠다. 일테면 존재증명.
 

 나는 직업이 없다.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는 직업이 없었으며,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을 때 나를 설명해줄 특정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20대의 초반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야하지 않느냐는식으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지닌 입장을 설명했고, 그 다음 시기에 모두들 자리를 잡아갈 때는 시기와 기회를(그게 있었다면) 놓치고 근근히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해왔다. 20대 초반에 해명하거나 회피하기만 한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노력을 했다면 난 지금보다 나은 상태였을까. 그런데 난 정말 무언가 되고 싶었던게 없었다. 오로지 자족적인 글쓰기와 생각하기,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일으키는 균열, 즐거움을 만끽하기, 비온 뒤 짜릿할 정도로 차가운 밤거리를 걷고 싶을 뿐이었다. 그 안에선 평생동안 뭘해서 먹고 살아야할지에 대한 고민은 부재했다. '성'의 말대로 그저 놀고먹겠다는 수작이었다. 
 

부재했거나 외면했거나.

 이젠, 아무도 공격하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에서야 나를 공격하는 누구보다 포악하고 사심 가득한 내가 있을 뿐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에 있다가 무직을 선택했다면 내게는 선택을 지지해줄 명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쫓기듯, 피해서 온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게 아니니까 그저 난 지금 상황을 선택했어, 라면. 그럴 듯한 직업을 바라기도 했고, 누구누구처럼 바빠서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통장에 넉넉한 잔고가 있는 삶을 부러워하기도 했으며 사실 이런 거창한 것보다 그저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으로 다음달이 불안하지 않은 삶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남들과 다른 패턴의 시간에 움직이길 원했음에도 난 점점 시간과 돈에 쫓기고 있어 도리어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며 이 모든게 다 내가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았다란 생각으로 귀결되고 있는 상황, 그런 와중의 도피(아무것도 도피가 될 수 없지만. 글을 쓰면서도 난 고민 중이니까)가 아마도 글쓰기였는지 모르겠다.


 나를 포장하거나 희화화시키거나 적나라하게 드러내도 상처받지 않는 수단, 혹은 긴밀하게 모른척할 수 있는 구조. 예전에 가장 두려웠던건 이 상태를 지속시켜 결국 노숙자가 된다거나 자포자기한 삶을 산다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내가 여자여서 비빌 언덕으로 결혼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려서인건 아닌가란 소름끼치는 상상도 해보긴 한다. (할 수는 있고? 다른 것보다 더더욱 상상 안 되면서.)그리고 글쓰기도 결국 날 구원해줄 수 없다란 지점에 도착하면 어떡하나란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지금 하는 일에서 난 같이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가끔씩 ' 저 사람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란 의심을 받고 있다. 일테면 알바 연식으로는 터무니없이 늙은 여자가 '하필 왜'란 눈초리 말이다. 지금 하는 일 자체가 저평가된건 둘째치고 너무 박봉이라 답답하지만 가끔, 어느 순간엔 재미있고 신날때도 있다. 물론 서비스직을 존중해주는 사람들이 많은 공간적인 특징이 있을 수 있고, 정말 '내 일'이 아니란 생각에 즐기는거란 예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이렇게 힘든 일을 할바엔 제대로 된걸 준비해야하지 않겠냐란 충동들로 맘한켠이 내내 불편해지기도 하고.  


 물질적인 것에 욕심이 없다기보다는 잉여로 인한 자원낭비와 버려지는 것들에 무조건적인 아까운 맘이 드는 나로선 적게 벌고, 적게 쓰는게 무리는 아닌데, 그래서 평생 이렇게 살면서 지내고 싶다란 생각을 했는데 루저란 자의식뿐 아니라 평생 이렇게 드문드문, 살아가기가 이렇게 팍팍해서 어떡하냐고 청승을 떨걸 생각하니 거 참.


혼자서 술을 시켜먹어서 그래, 혼자서 술을 더 먹은데나 가까스로 막,차,를 잡아타서.


그의 질문과 지지의 말들이 남겨준 따사로운 면들이 고마워서 오늘도 난, 일기를 쓰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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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0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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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1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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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0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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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0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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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1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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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0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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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0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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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0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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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2009-05-04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다 비밀이군요^^ 긴 목은 슬픈 짐승이라던데... 그래서인가... 글이 좀 울적하네요. 그래도 화이팅!?

Arch 2009-05-04 02:52   좋아요 0 | URL
울적하지 말라고 말미에 웃기려고 기를 써보기도 했는데, 별로였나보다.^^

비밀글은 말이죠, 나무처럼님만 아세요.
제가 아주아주 좋아하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제 사심을 눈치채시고 도배질을 해준거랍니다.
 

 새벽녘에 깨었다가 다시 잠들면 꼭 꿈을 꾸곤 하는데 오늘 꿈은 정말 다국적인데다 '대체 왜!'스러워서 한번 적어보려 한다. 물론 낮부터 꿈얘기를 한 미잘의 영향이 지대했다. 

 일이 끝난 후에 마트에 들렀다. 딱히 살 것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들어가서 얼마 안 있자 한무더기의 갱스터들이 마트 안으로 들어왔다. 현실에선 이런 상황이래도 늘 나와는 닿는점이 없었다. 풍경처럼 사람들이 있을 뿐이고, 말을 건네거나 나를 알아보는건 도인이나 종교인이 다였다. 그런데 그들은 어슬렁거리며 가게를 돌아다니다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동양 사람을 처음 보는걸까? 설마 내게 오는건 아니겠지. 내쪽에 있는 물건을 보려는거야. 한발짝 뒤로 주춤거리며 움직이자 그들이 다가오는 속도가 빨라졌다. 억양이 센 영어로 그들은 내게 뭐라고 말을 했다. 그 중 몇몇은 내 물건이나 옷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내 차림은 할리우드에서 저개발 나라의 사람을 등장시킬 때 고답적으로 코디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계속 영어를 못하니까 놔주라고,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저항을 하며 그들을 피했다. 그리곤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다음 장면으로 점프. 내 꿈은 대개의 경우 별다른 연관없이 다음 장면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 자려고 누웠는데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보니 좀 전 장면에서 나왔던 무리들 중 한명이 다정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왜 좀 전에 나를 괴롭혔냐고 묻고 싶었지만, 영어가 안 됐다. 그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연인 사이이고, 밤마다 그는 창을 넘고 있었던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섹스를 했던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외국인과 섹스를 해봤어야 꿈이라도 뭐가 좀 떠오르지. 어흥?) 잠자코 그의 까만 피부에 얼굴을 파묻고 몸이 참 따뜻하다며 좋아하고 있는데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기미를 살피니 아빠와 아빠의 친구들이 분명 여기에 그 녀석이 있을거라며 집을 들쑤시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 녀석이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인지는 확인 안 됐지만, 남자는 본능적으로 도망쳤다. 빛나는 까만 몸이 창문을 넘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빠가 찾는 사람이 누구냐에 상관없이 한밤중에 다른 무리들이 내 방을 침범해 들쑤실게 분명한데 남자를 태연하게 내 옆에 둘 배짱이 없었다. 아마 그가 튀지 않았다면 내가 그에게 도망치라고 말했을 것이다.  

 내 방에 들어선 아빠와 친구들이었던 사람들이 친척들로 바뀌고, 누구를 잡는게 아니라 사냥을 한다는식으로 분위기는 다시 점프. 두꺼운 이불을 덮어놓은 여러개의 무덤 모양의 구조물이 마당에 있고, 누군가 그 중 하나를 겨냥했다. 그가 어디로 숨었는지는 몰랐지만 난 그의 안위가 걱정돼 엉성한 말들로 방아쇠를 당기는 시간을 늦췄다. 옆에 사람은 긴장을 주려고 너무 감질나게 하는거 아니냐고 농담을 던졌다. 난 옆에 있던 총을 뺏어서 입을 나불댄 사람을 쏘고 싶을 정도로 그 사람이 얄미웠다.  

 방아쇠는 당겨졌다. 사람들은 느릿느릿하게 걸어가 이불을 걷어냈다. 내가 걱정했던 남자가 아니었다. 아무도 아닌 사람, 혹은 우리 중의 누군가를 좋아했으나 실연당한 여자가 피철갑된채로 죽어있었다. 사람들이 경악해하며 대체 여기에 왜 사람이 있냐는 식으로 떠드는 틈을 타서 남자는 이불을 걷어내고 까만 점을 남기며 도망쳤다. 남자가 살아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대체 이 여자는 이 늦은 밤 왜 이 청승을 떨다 결국 죽게되어버렸는지, 이불을 덮고 싶을 정도로 추운 날이었으면 그냥 집에 있지 싶어서 맘 한켠이 답답해졌다. 그런데 이 여자, 집은 있는거야?

 사람들은 시체를 숨긴다거나 죽음을 은폐해야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죽어서 싸다느니, 재수가 없었다느니 등등의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그녀 주위에서 웅성웅성거렸다. 그 소리는 꼭 내게 하는 소리인 것만 같았다. 

 꿈이 너무나도 버라이어티해서 늦잠을 잤고, 세수도 안 하고 일하러 나갔다. 세수야 가끔씩 안 한다지만, 대체 무슨 꿈이 이래. 개꿈이라면 개가 나와야하는게 아니냐고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프로이트, 거기 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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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04-27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쳇 따라쟁이.

Arch 2009-04-28 03:58   좋아요 0 | URL
남이사. 아, 이 말 해보고 싶어서 어찌나 애가 타던지.

뷰리풀말미잘 2009-04-27 23:16   좋아요 0 | URL
울컥
 

 나는 매일 엘의 블로그에 들어간다.  

 그녀의 일기는 몇개월째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들어간다의 시제가 일기를 쓰는 시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설레임의 강도가 클 경우에는 각각의 단어나 글자 뒤에 점이 깊게 새겨지기도 한다. 그녀는 까먹지않고 밥을 먹듯이 엘의 글을 탐독했고, 엘을 탐구했으며, 엘을 탐했다. 

 엘은 공공연히 자신은 게으르다고 글에 썼지만 매일 블로깅을 할 정도로 부지런하고, 대개의 언어에서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아끼고 좋아한다. 엘은 자신이 괜찮게 생겼다고 생각하는편은 아니지만 누군가로부터 잘생겼다란 소리를 들으면 부인하지 않는다. 엘은 혼자 고민하길 좋아하며, 고민하는 와중에 종종 번뜩이는 색채의 생각들을 풀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엘은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을 웃긴다. 

 그녀는 엘의 유머를 좋아하고, 엘이 짤막하게 다는 댓글을 아낀다. 엘이 어떤 사람인지 몇년간의 글을 읽어보며 알 수 있었고, 엘의 관심사, 엘의 취향, 엘의 옷스타일까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사실 스치듯이 몇번 본적이 있기도 하다.  

 늦은 밤, 그녀가 텅빈 방안에 몸을 뉘이면 문득 방안 구석에서 형광광물처럼 반짝이는 엘을 보기도 한다.  

 요즘 엘은 배가 나와서, 일이 너무 늦게 끝나서, 연애감각이 이토록 터무니없이 죽어버려서 속상하다고 해서 그녀의 맘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가 새로 나온 누군가의 신보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옆동네 살아서, 봄꽃들이 아우성치며 맘을 들뜨게 한다고 해서 그녀의 맘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녀는 엘에게 살짝 얘기해줬다. 

- 난 너보다 더 당신을 잘 알 것 같아요. 

 며칠 뒤에 엘은 자신도 그녀를 쭉 지켜봤다며 매화꽃이 지기 전에 보자는 말을 남겼다. 

 약속 당일, 그녀는 세상에저 제일 예쁜 드레스를 입고 향수를 통째로 들이부었다. 행여 엘이 감기라도 걸려 냄새를 못맡을까봐. 그녀는 작은 거울 사이로 어느때보다 빛나는 얼굴을 바라봤다.  

 조금 힘들게 약속 장소에 나가 그를 기다렸다. 그가 저만치 오고 있었다. 벤치에 단정하게 앉아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벤치에 앉았는데, 어, 어, 제 위에 앉으면 어, 

 엘은 벤치에서 한참동안 그녀를 기다렸다. 참다못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는다. 해가 지도록 그녀를 기다리다 지친 엘은 자리를 떴다. 벤치에는 먼지처럼 찌부러진 그녀의 잔해가 남았고, 바람이 불었던가, 먼지는 날아가버렸다. 

 난, 

 당신의 관심사, 당신이 즐거워하는 일, 당신이 분개하고 맘 아파하는 일들에 공감하고 당신의 글을 읽는걸 좋아해요. 아주 많이! 그 중에서도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가끔씩 적는 당신 얘기가 무엇보다 더 좋아요. 

그건 마치, 

사랑스럽달까. 

 그러니까 어디 도망가지 말고, 쭉 글을 써주세요. 전 호기심이 많고, 해보고 후회하는 스타일이지만, 우린 블로그 연애니까 그녀처럼 감히 만나자고 말하진 않을거예요. 게다가 저도 좀 작아요. SM이라고. (정말? 정말. 이렇게 사심을 툭 던지다니! 미련한 아치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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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24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도 봄이군요 ^^
 

 15분 단위로 알람이 울리도록 핸드폰을 맞춰놨다.  

 15분은 영어 문법 한 챕터를 마칠 수 있는 시간, 적당히 읽을만한 글을 10페이지 정도, 조금 어려운 글은 5페이지 정도 읽을만한 시간, 인물 두상 뼈대를 두개 정도 그릴 시간, 옥찌에게 쓰는 편지의 반절 정도를 채우는 시간이다. 15분은 간편한 식사를 차릴 시간이며, 설겆이를 해놓고 차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이고, 책 속의 좋아하는 구절을 다이어리 두페이지 정도에 써넣을 수 있는 시간이다. 

  다시 15분은 머리를 감고, 빠진 머리카락을 테이프로 모을 시간이며, 방안에 널린 빨래를 개우는 시간이고, 빨래를 하기에는 좀 빠듯한 시간이다. 15분은 비빔국수를 뚝딱 만들어낼 시간이고, 출근하기 전에 준비하기에 알맞는 시간이며, 맥주 반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며, 누군가의 통화를 계속할지 끊을지를 결정하는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15분은 얼음을 가득 채운 물에서 녹차가 몸을 바싹 조였다가 풀어질만한 시간이며, 영화를 볼 때 계속 볼지 말지를 결정하게 되는 영화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15분은 소주 한잔을 비워내기에 적당한 시간이고, 방 안에 있는 식물들의 물갈이와 물주기 말을 건네기에 안성맞춤인 시간이며, 옥찌들과 통화를 한 후 한참동안 여운을 즐기기에 알맞는 시간이다. 15분은 좋아하는 사람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서도 전혀 피곤함을 안 느끼게될 최대치의 시간이며, 그 눈을 돌려 다른 것을 바라볼 때 서로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게 만드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15분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모든 경우에 다 들어맞는건 아니다. 맥주 한병을 몇시간이고 붙들고 있을 때도 있고, 옥찌가 기분만 좋다면 15분 넘게 통화할 수도 있으며, 한없이 늘어지게 음식을 준비할 수도 있으니까. 편지를 쓰다가, 그림을 그리다가 멍하니 손을 놓고 있을 때도 있으니까. 누군가와의 통화는 시간과 관계없이 영원처럼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니까. 어느 날의 빨래는 오늘 다 끝마칠 수 있을까 싶게 버겁기도 하고, 가끔씩 녹차 티백마저 앙탈을 부려 쉽게 우러나지 않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굳이 15분이었던건 15분이 30분이나 1시간처럼 늘어지지 않고 10분처럼 촉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의 책 소개를 읽고선 막연한 예감으로 15분을 정해서 일과를 구성해봤다. 처음 두시간은 마치 이 시간들이 점점히 박히듯 촉박하거나 느슨했다. 그러다 점점 느슨해지다 다시 전처럼 무한정의 시간을 갖은 사람인양 굴어댔다. 15분에 맞춰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가다보니 좀 더 알차졌고, 전처럼 무계획을 모토로 시간낭비를 하는 느낌이 줄어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생각보다 내가 생각하는 시간 계획과 실재로 시간을 소모하는 일의 차이도 알게 되었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는 차라리 류비셰프의 시간 계획표와 그의 짧은 글들을 편집하는게 좋았겠다 싶을 정도로 조합한 사람의 사족이 재미없게 늘어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치밀하게 조직된 시간 관리와 통계에 허를 휘두를 정도였다. 내가 15분 어쩌고 한건 그야말로 사족의 사족이었다. 자신의 시간을 계획하고, 그대로 실행하며, 계획과 실행 사이의 오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 월말, 년말 단위와 몇년마다의 결산과 연구 성과들의 정리. 가능성의 최대치란 말을 무리없이 인정하게 만드는 그의 삶을 보고 있자니 새삼 나에게 시간은 어떤건가란 생각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노동할 일도 없고, 어떻게 보면 바라마지 않은 짧은 노동 시간과 그에 걸맞는 생계비를 계획하고 마음대로 유용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있음에도 난 터무니없이 낙관하거나 날 방치하는 쪽으로 내버려둔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성과가 있는 일을 한다거나 여행, 생각이 커가는 과정, 누군가와의 관계 변화, 지출입의 기입, 하루하루 하는 일은 매일 기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록은 분절되어 있고, 어렴풋하게나마 그래서 과연 내가 뭘 했던가에 대해선 아무런 답도 내주지 않았다. 하루하루 발전한다거나 몇분 단위로 나를 기획해야한다는 생각따위는 너무 터무니없지만, 적어도 나를 위한 시간을 허무맹랑하게 스친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류비셰프처럼 세심하게 시간을 조직할 수는 없겠지만, 좀 더 타이트하게 하루의 계획과 한달의 계획, 계획과 실행의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을 해봐야겠다.  

 오늘도 처음 두시간은 정말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로 잘해냈는데, 

 알라딘에 접속한 순간 알람이 계속 우는 것에도 아랑곳 안 하고 계속 남의 서재를 돌아다니고 글을 쓴다고 15분력은 까마득하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놈의 서재, 

뭐뭐! 좋다고. 쓱쓱

 예시사항: 

누구누구의 서재에서 머문 시간, 머물면서 뭘 했는지, 페이퍼 작성에 든 시간, 리뷰 작성에 든 시간, 서지검색에 든 시간. 아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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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4-2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오늘 [living on borrowed time]이란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에 대해서 잠깐 생각했는데,
이런걸 해보셨군하- 저는 아마 절대못할거에요 ㅠ 빌려온 시간에 사는 주제에 엄청 낭비에 사치 ㅋㅋㅋ
그나저나 4월이 다 가는군요...

Arch 2009-04-22 00:25   좋아요 0 | URL
히히, 그냥 알람만 맞추면 멋대로 시작이 돼요. '절대로'는 절대로 없어요.

그나저나 말입니다. 봄꽃은 다 지고, 막걸리는커녕 스치듯 얼굴 한번 못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