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전번에 성욕 어쩌고란 글을 썼더니 간신히 바득바득 몇십의 경지를 넘긴 즐찾 하나가 쏙 빠졌다.
이글루스에서 어떤 분이 자신은 어떤어떤 성적 취향이다란 글을 썼을 때 논란이 된적이 있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 글을 청소년들이 볼 수 있다란 이유로 반대를 했고, 다른 측면에선 타협점으로 밸리란 곳에 보내지 않는다면 문제될게 없다는 얘기를 했으며, 블로그에 어떤 글을 쓰든 그건 그 사람의 자유일 뿐이란 얘기도 나왔다. 그 중에서 블로그 주인의 눈에 띈 글이라며 링크해 놓은 글을 읽은적이 있다. 요지는 자신의 글을 올바른 성의식을 위한 것 운운은 낯뜨거울 뿐더러 그건 너무 쉽다란 얘기였다. 그렇다. 성에 대해서 말하고, 몇가지 생각을 써놓으면 제목 자체의 낯뜨거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다란 것에 동의한다. 그러니까 이건 너무 쉬운 방법.
이 책은 라주미힌님의 서재에서 봤다. 표지가 맘에 들었을 뿐인데 책소개는 더더욱 생기로웠다. 당장 책을 사서 읽어보며 정말? 당신들도 그랬어? 이건 몇십년 전 독일 이야기잖아라면서, 그런데 왜 이렇게 내가 머리통을 벽에 찧어대며 고민했던거랑 비슷하지 등등. 오만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여성적인 경험이나 여성의 성에 대해서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세상엔 성에 대한 담론천지이고, 대한민국은 365일 여름이다. 그런데 난 자꾸 궁금했다.
성기결합형 섹스가 정상적이란 기준, 내가 섹스를 하는건 성욕보다는 다른 차원의 친밀감을 확보하려는건데 그게 왜 어려운건지, 그렇다면 내가 섹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원하는대로 행동하지 못하며, 원하는 것을 발설하는 순간 다시 지난한 설명과 동의와 설득을 해야하는 과정을 반복해야할까.
책에는 방법론적인 해결책과 통렬한 사유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그 내용이 남성 타도, 여성이 세상을 전복하자란 단순한 이분법으로 점철된 것도 아니다. 내게 있어서 책은 모름지기 머리를 퉁퉁 쳐서 좀 더 자신을 북돋아줄 수 있는게 좋다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누군가 전화로 하소연을 하듯 그들 각자의 삶에 충실한 발언들로 채워진 이 책이 곧이곧대로 와닿진 않았다. 그런데도 무장해제된채로 공감되고, 그들 마음의 면면이 들여다보이는데다 나 역시 그랬어요를 연발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위로를 받은 순간 사유와 해결책보다 더 강력한 지지와 비장의 무기는 공감이란데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게다가 이 책은 또 어떤가. 내가 자꾸 허튼 소리를 하자 유지나씨가 읽어보라고 권했던 책.
난 늘 내가 못생긴 여자애라고 생각해왔다. 가끔 예쁘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예쁜데 촌스러워서 버려버렸단 생각을 많이 했다. 게다가 난 오지게 인기도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귀엽고 예쁜 친구들만 좋아했다. 나에게 뭐가 문제인걸까. 나는 왜 인기가 없을까. 그런데 웃긴게 난 남자들이 좋아할만한 여자가 될 생각이 별로 없었다. 몸매 관리에도, 잡티없는 화장에도, 대화시 적절하게 받아쳐주고 북돋아주는 화법에도, 고운 머릿결에도 관심이 없었다. 아주 최근에서야 몇몇 남자들은 머릿결이 좋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놀라운 사실에 그동안 푸석거리는 머리로 데이트에 임해놓고 인기없단 생각을 해서 살짝 민망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니란 것을 잘 안다. 그건 대체적인 흐름이지 전적으로 모든 것을 대변하는 입장은 아니란 것도 잘 안다. 그래도 난 좀 궁금했다.
이런 여자애가 알콩달콩 연애도 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란. 남자 아니면 죽는 것도 아니고, 꼭 연애를 해야한다도 아닌데 난 집착을 하고 있었다. 뭔가 여성스럽지 않다는 자의식은 부스럼처럼 가끔씩 날 간지럽게 했다. 오죽했으면 술취해서 기분이 좋아진 누군가가 '아치는 애교가 없어'를 흘러듣지 않을 정도였을까. 술먹고 무슨 소린들 못하겠냐는 상식 문제로도 출제되지 않을 정도의 상식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게 내 문제만은 아니란다. 베즈무아란 실감나서 도저히 탐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을 쓰고 성노동을 했으며 성폭력을 당한적이 있던 저자 비르지니 데팡트. 그녀 역시 경험을 통해 여성-되기에 대해 고민했으며 이론적인 페미니즘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험하고 깨달은 여성주의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다.
단비 같았다. 가랑비에 옷 젖듯 나는 그녀에게 젖어들었고, 국적도 나이도 다른 여성에게서 친밀감을 느꼈다. 단지 거대한 몸으로만 존재하는 킹콩처럼 어떤 성적인 자각도 없이 '못생김' 혹은 '여성답지 못함'으로 읽히는 여자들을 킹콩걸로 칭하는 데팡트의 시각에 얼마나 환호를 보냈던가. 물론 무리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부분에서 불편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이 글을 쓰면서 대략 두세번 정도의 '못생겼다'란 관용어를 쓰면서 혹 페미니즘은 원래 못생긴 여자애들이 하는 공부란 식상한 생각을 누군가 떠올리면 어떡하나란 걱정이 들었다, 라고 말하는건 사실 뻥이다. 대개의 식상한 생각은 쉬이 상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정희진 선생님을 만났다. 모든 책과 생각들이 연대기적인 순서로 늘어서 있는건 아니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세번쯤 읽고서야 '안다는건 상처받는거다'란 그녀의 말을 제대로 알았을 정도이니.
여자는 성적인 차별을 받고 있다란 말을 가부장제에서는 모두가 고통스럽다까지 닿는데 몇년, 여자만 억압받는다, 성적으로 도구화, 대상화 되었다.는 식상한 얘기만 나불댔던게 몇년,(이러니까 꽤 나이 먹은 사람 같은데, 맞다) 역차별의 문제, 여성의 나이, 태생적 외로움과 길들여진 외로움 등등. 정치적 올바름과 불관용의 틈. 등등 정희진 선생님은 단순하게 페미니즘은 이렇다란 얘기를 하지도, 정확한 이론의 틀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녀 역시 나와 다른 많은 여자들처럼 고민하고, 다시 고민하는 과정을 얘기했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감을 못잡겠다고 하는 분들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공감한다고 해놓고선 그 말 하는 당시엔 난 절대적으로 이 책을 믿는다 운운의 얘기를 내뱉었지만.)나 역시 명확하게 정희진 선생님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살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제기한 의문들과 성찰이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도식적인 구조는 무너지고, 왜 그럴까, 왜 난 이렇게 행동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여성이란 이유로 허용된 관용과 남자이기 때문에 불허용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점, 가학적인 장면이나 성적인 노출에 왜 나도 남자들처럼 흥분하는지, 김규항은 왜 온화하고 다수의 여성을 끌어안을 수 있는 페미니즘을 옹호하면서(김신명숙의 '선택'서평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70727163427&Section= ) 왜 자신은 순결, 순혈주의 좌파를 고집하는지, 여성주의에서 여성은 당사자인데 왜 도리어 의식있다는 다른 '성'에 비해 당사자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지 등등.
아마 정희진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난 어느 술자리나 모임 장소에서 혼자 게거품을 물다가 자폭하는 밉상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혹시?)고민도 성찰도 좌절도 없이 자기 것만이 다라고 믿는 아둔한 사람처럼. 혹은 그것마저 깨닫지 못하고 자족하는 배부른 아치처럼.
앞으로 섹스 얘기만 한다는 것도 아니고, 자극적인 소재로 알라디너의 호기심을 자극하겠다는 말도 아니다. 이건 몇권 밖에 안 되는 책이지만 혹시 여성주의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해서 작성한 페이퍼이다. 나름대로 우여곡절 많은 몇년 동안의 아치를 보여주는 페이퍼이기도 하고. 아주 오래 전에 성욕 어쩌고한 페이퍼를 써놓고 혼자 구상했던 글을 임시 저장함에 오랫동안 숙성시켜놨는데 맛은 없고 시어버려서 이건 뭐, 식초인지 발효 식품인지 분간이 되야 말이지. 여전히 '못생겼다'에서 목에 뭐가 걸린 듯 답답하지만 뭐, 알만한 사람들은 내 미모(미안, 미안!)를 알테니 상관하지 않으련다. 우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