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하나 뿐인 자동차를 아이들과 옆지기에게 양보한 남자는 오토바이를 몰고 다닌다. 야타족도 아닌데 '타실래요'라고 묻길래 어설프게 뒷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여름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한남대교의 강바람은 끝내준다는 감상과는 별개로 나는 더운 날 차를 못갖고 다녀 좀 억울하단 남자의 엄살이 얄미웠다. 단지 돈을 번다는 이유로 양육에서 한 발짝 떨어져 '여가'란걸 갖는 남자에 비해 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며 병원과 학원, 그 밖의 장소로 움직이는 엄마들의 노곤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엄마들처럼 힘들진 않지만 낮 시간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학 중인 조카를 돌보는 내 입장도 그리 녹록치는 않다. 아이의 등하교 시간과 학원 가는 시간에 딱딱 맞춰서 뒷바라지를 하다보면 내 시간을 갖는 게 얼마나 큰 사치인지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양육을 등한시하는 집 밖의 남자들이 늘상 즐겁다는건 아니다. 집 안과 밖을 벗어나 누군가의 일과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긴 싫은 정도랄까.

 얼마 전에 일하는 곳에 꼬마 손님이 왔다. 부모들이 사장님과 얘기하는 동안 나는 요 꼬마 손님이랑 얘기를 했다. 내가 이렇게 아이들과 잘 노는 사람이었던가. 아이의 티셔츠에 있는 소니 캐릭터를 보고, 있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소니에게 전화를 한다고 설레발을 쳤다. 과자를 가지고는 글자를 만들고, 집을 만들었다. 얼음을 좋아하는 아이와 제빙기 옆에서 얼음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지켜봤다. 나는 덩치 큰 호랑이가 돼서 어슬렁거렸으며 이빨 빠진 호랑이 할머니가 돼서 아이에게 익살맞은 웃음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간혹 조카들은 내게 말실수처럼 선생님이라고 한다. '친구 같은 이모'보다는 잔소리 많고, 잔소리의 대부분을 '조용히 좀 해'에 할애하는 이모. 언젠가 아이들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없는걸 확인하고서 자신도 모르게, 채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생진심을 담아

-와, 짱이다.

라고 했단다. 흑

 그리고 가끔씩 민은 날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아동 전문가에 의하면 양육자를 선생님으로 부르는건 뭔가를 지속적으로 지시하고, 강제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런 말 하나도 안 믿는다고 뻥쳐도 소용없게 됐다.











 곰 말고 이모가 되고 싶다. 아이를 갖을지, 결혼을 할지, 제대로 살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이모만은 되고 싶다. 그 주문이 때론 이기적이고, 언제든 발을 빼려는 수작이고, 내가 이모로서의 자질이 썩 훌륭한게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모는 이모대로 자기 노릇을 할 일이지만, 아이를 낳는 문제는 세계관에 따른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아이를 안 낳는다는 말에 무조건 모든 생물에겐 종족번식의 본능이 있다고 우격다짐으로 밀어부치던 '아는 사람1'에게는 다음과 같은 책을 권할 요량이다. 해석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윤, 절대 아이를 갖지 않겠다던 남자. 난, 내 아이가 자라난 후의 세계를 결코 낙관할 수 없어. 스스로는 낙관할 수 없으면서, 힘들겠지만, 넌 여기서 한번 살아볼래. 물어보지도 않고 아이를 낳는다는 거, 황당하도록 무책임한 거지. 방긋거리며 웃으면 예쁘겠지. 서툰 걸음걸이를 보면 왈칵 연민이 솟겠지. 처음 아빠, 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엔 삶이 고해라는 걸 잊을 수 있을 테고. 그런 순간적이고 이기적인 즐거움을 위해 한 생명을 세상에 던져놓는다는 거, 그거 너무 무책임한 거야. 

 소설 속 윤은 아이를 낳았다. 그렇다면 윤의 세계관은 믿을 수 없는 게 되는걸까. 내가 만나왔던 연인의 변화를 바라는 지점은 꼭 이런 것과 닮았단 생각이 든다. 세계관이고 뭐고 어떤 상대를 만나냐에 따라 달라지는거면 왜 지금 달라지지 못하느냔 우격다짐. 결국 누구든 가능하지만 나한테는 안 된다는 그 세계관의 문제가 연애의 걸림돌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어떨까.

 예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가 저런 아이들을 낳아서 흠 없이 티 없이 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후손 친화적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후손을 낳는다는 문제는 유전자만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전망'을 같이 물려주는 것이다. 내가 보는 이 세계의 전망이 불확실하고 심란한데 어떻게 내 아이에게 무리한 희망을 선전 하겠는가. 희망이 아니라면 점잖게 냉소하는 법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 

 나는 또 한 명의 냉소주의자를 길러내고 싶지 않다. 나까지 거들지 않아도 이미 우리 사회에는 누군가가 키워야 할 아이들이 많다. 정부는 출산율 저하의 심각성을 교조적으로 떠벌리고 있는데, 그들이 계산한 출산율이 청소년 출산이나 비혼모 출산도 포함되는지 궁금하다. 혹시라도 살다 살다 이제는 사는 게 너무 재미없어서 아이 키우는 재미라도 있어야겠다 싶어진다면, 늙어감에 대한 공포와 권태를 잊게 해줄 뭔가가 절실해진다면, 그때는 태어나버렸지만 갈 곳 없는 아이를 데려다 키우고 싶다.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이모 혹은 고모가 되고 싶다. 끈끈한 건 됐고, 말이나 통하면 좋겠다. 의무로 묶이기보다 우정으로 엮일 수 있는 사이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은 이모 고모와 사촌들이 꼭 있어야 한다. 당근과 순무를 사야하고 헛간과 창고가 있어야 한다. 시장에 가고 대장간에 가야한다. 어슬렁거리고 잠을 자야 하고 좀 모자라고 바보 같아야 한다.

 에머슨도 그랬다잖은가. 이모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굴라쉬 브런치의 작가쪽으로 맘이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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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8-2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하거나 아이들이 잘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님도 그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보네요.
울 아들이 아이들을 참 잘데리고 놀더라구요.ㅋ

Arch 2010-08-20 16:49   좋아요 0 | URL
전 아이랑 잘 노는 남자 사람이 참 좋아요. 조카들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건 절~ 대 아니고(강한 부정은 급긍정의 다른 말)^^

전호인님 따님의 미모만 접해봐서 아들은 과연 어떤 미모일지 궁금해져요.

다락방 2010-08-2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짱이다, 라니. 철푸덕.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아이들이 결코 밉지 않은데요? :)


나는 이모도 되고 싶고 고모도 되고 싶어요. 그리고 이모도 될 수 있고 고모도 될 수 있어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해요. 그렇지만 엄마가 되는 것은 이모나 고모가 되는 것보다는 천배 만배쯤 더 무섭고 힘든 일인것 같아요. 그래거 엄마 만큼은 잘 해낼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Arch 는 어떻게 그렇게 아이들하고 잘 어울려요? 조카들하고 시간을 많이 보냈었기 때문에 이젠 방법을 아는 걸까요? 그들만의 규칙이나 룰 같은거?

Arch 2010-08-20 16:55   좋아요 0 | URL
네, 밉진 않은데 좀 머쓱하달까.

뭐가 되든 다락방님은 다락방님답게 잘 할 것 같아요. 인셉션에서 다락방님이 봤던거 있잖아요. 웬디양님이 잘 짚어준 것처럼 뭐랄까, 다락방은 다락방식으로 잘 소화하는 것 같아요. 조카한테 어떤 다락방 이모가 되어줄지 안 봐도 왠지 알 것 같아요.

확실히 아이랑 잘 노는 방법은 잘 모르겠어요. 꼬마 손님이랑 저렇게 할 수 있었던건 일하는 시간 안에 노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어서였던 것 같아요. 조카들이랑 그럴 수 없었던건 마찬가지 이유로 내 시간을 뺐긴단 생각이 너무 커서였고. 아이와의 놀이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봐야겠는데요. 히~

pjy 2010-08-20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둘리면 이모도 되고, 고모도 되겠지만 엄마는 모르겠습니다~~
현재 사촌조카들을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는데, 보통 니들은 놀아라 문제있으면 불러라입니다~
문제있다고 부르면 니들책임이다 요러는ㅋ 대부분 99.9% 방치버젼이죠~
아주 가끔 완죤 1:1로 동등하게 치고받고 놀기도 합니다ㅋ

Arch 2010-08-21 00:21   좋아요 0 | URL
조카들을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다고 하니까 말예요. 자산 같고, 저축 같고 그래요^^
가장 괜찮은 양육 혹은 놀이는 큰 범위만 정해주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만 놀 수 있게 하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면에서 pjy님은 잘하시는 것 같은데요.
귀여운 이모, 고모 같아요~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431401.html

 “나는 그때 변변찮은 소설을 쓰고 있었고, 몇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 편지를 받았고, 문학상 응모에는 매번 떨어졌다. 책을 사면 늘 저자의 나이를 계산해봤다. 몇 년생인지, 첫 번째 책은 몇 살에 펴냈는지 늘 확인하곤 했다. ‘이 사람은 서른두 살에 첫 책을 냈군. 아직 내겐 7년이 남았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스물두 살에 데뷔하다니, 천재네, 천재. 부럽군’이라며 나의 재능 없음을 한탄했다.”  

 한겨레 ESC 섹션에서 <씨네21>기자 이다혜씨의 '책에서 배우는 위로의 기술' 코너를 좋아한다. 정말 딱 내 맘 같은 글을 발견해서 옮겨본다.

 되고 싶고 하고 싶은건 많은데 뭐 하나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을 때가 있었다. 방바닥에서 배밀이를 하며 대체 나는 왜 태어나서 아무 쓸모도 없이 사는가 싶은 생각이 꾸역꾸역 들 정도로 한심할 때였다. 살아오면서 내가 꾸준이 해왔던 일은 뭐였고, 뭘 할 때 즐거웠나를 떠올려봤다. 일기 쓸 때, 방에서 혼자 끙끙대며 말들을 지어낼 때, 밤바람 쐬며 걸어다닐 때, 누군가와 서로의 말 꼬투리를 잡고 잡으며 얘기하는 것, 그리고 또 뭐가 있었지?

 그때 문득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서 상 한번 받은 것 말고는 누가 인정해준적도 없는 재능이었지만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글이든 쓰고 싶었다. 꿈은 꿈대로 나이를 먹어가고, '작가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끈기나 집념은 내 성향과 맞지 않다는 생각도 하고, 아직은 사는게 힘들어서 그렇지 조금만 나아지면 제대로 써보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때 나도 누구처럼 멋진 글의 작가 나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다녔다.

 그러다 정말 맘껏 쓸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쓸 말이 없었다. 내가 쓰려고 했던건 그냥 나에 대한 것인데 그건 일기로도 족했다. 굳이 여러 그루의 나무를 베어가며 누군가에게 읽힐만한 글을 쓸 재주는 없었다. 게다가 김어준의 말처럼 그건 단지 꿈이란 단어 속으로 숨어버린 20대의 알리바이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아는 분이 자신이 가장 후회스러운건 어렸을 때 공무원 시험 준비를 안 한거란 얘기를 했다. 밤낮으로 일하고, 잠이 늘 부족해 기운이 없다고 호소하는 그분을 볼 때마다 그에게 필요한건 후회가 아니라 지금 도전하는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었다. P에게 그 얘기를 하자, P는 '그럼, 아치는 뭘 하고 싶어요'라고 되물었다. 글쎄, 나는 이제 뭘 하고 싶은걸까. 남에 대해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과연 나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을까.

 책 보고, 음악 들으며 놀고 싶다고 했고, 수영을 배우고 싶고, 또 다른 뭔가에 대해서 얘기를 했지만 P는 흡족해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결국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이랬노라고, 나의 알리바이가 나를 사로잡게 된 일이 있었노라고. P는 예쁜 말을 할줄 아는 사람이기에 서슴없이 아치는 잘 할거라고 말해줬다. 내가 아무리 핑계를 대고, 그렇게 하고 싶은건 아니라고 돌려 말해도, 내 속에 박힌 이야기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 아치, 지금은 말고 나중에라도 꼭 써요. 그리고 내가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이 온다면 참 좋겠어요.

 나는 나 때문에 글을 쓰고, P 때문에 글을 쓴다. 남들 다 노력할 때 뒷짐 지고 '정말 하고 싶은 일' 운운하던 나의 어렸던 알리바이를 위해 글을 쓰고, 그때 그 단언들을 믿어준 친구를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나는 부족하기 이를데 없는 곳이지만 가끔씩 내 서재를 찾아주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쓴다. 큰 목소리는 어림없겠지만, 지금처럼 앞으로도 조용하고 꾸준한 목소리로 속삭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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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8-18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하고 꾸준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Arch의 말을 내가 계속 듣고 있어요. 그러니 나중에 P가 누리게 될 행운을 저도 좀 주세요.

Arch 2010-08-19 22:28   좋아요 0 | URL
알고 있어요. 제가 이만큼이나 쓸 수 있는건 다 다락방 때문이에요. 다락방은 P만큼이나 친절하군요!

hnine 2010-08-1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꿈을 이루세요!

Arch 2010-08-19 22:28   좋아요 0 | URL
늘 고마워요. hnine님

2010-08-18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9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8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9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8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0-08-19 22:39   좋아요 0 | URL
설마요^^

차좋아 2010-08-18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내 서재를 찾아주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쓴다. (저도 포함 되는거 같은 말이라 기분이 좋아요)

가끔식 오지만 아치님도 가끔씩 올리는 바람에 아치님의 글은 다 볼 수 있어요 ㅎㅎ
나중에 아치님을 책으로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 봅니다. ^^

Arch 2010-08-19 22:41   좋아요 0 | URL
차좋아님이 찾아주시는구나~

아, 괜히 말했어. 괜히... 전 감히 제 글을 책으로 낼 수 없을 것 같아요. 컨셉 자체가 없으니까. 히~
 


* 준비하는 시험이 있다. 시험 필기를 합격하고 실기 준비를 하는데 과정 중 하나가 케이블을 만드는거다. 잭의 암놈 수놈에 케이블을 연결한다. 이때 납땜을 하는데 이게 꽤 재미있다. 건강염려증이 있어 연기를 들이마시면 몸에 안 좋은거 아니냐, 중금속 오염 아니냐 떠들어대지만 할 때는 내가 봐도 꽤 열심히 잘 한다. 특히 같이 하는 분과 경쟁을 하면서 조금 더 이겨보려고 아등바등거리는건 꽤 짜릿하다. 전선의 피복을 벗겨서 끝부분에 납을 묻힌 후 잭과 연결한다. 인두에 납이 녹고 마술처럼 전선과 잭이 붙는다. 가끔 전선이나 잭의 앞쪽이 뜨거워지긴 하지만 이젠 제법 요령을 익혀서 손을 데지 않는다. 

 물건의 기원과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선을 꽂으니 전원이 들어왔다' 말고 얘는 어떻게 전기가 통하는지, 속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었다. 궁금증은 막연하기만 했다. 피복을 벗겨보고, 시계를 분해해보고, 컴퓨터를 뜯어볼 정도로 부지런한건 아니었다. 물건의 기원이 궁금한 것처럼 사람도 궁금했다. 그래서 서머싯 몸의 책을 읽는게 흥미진진하다. 요즘 읽는 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은 그런 면에서 최고다.

* 즐거운게 고민이다. 요가를 배우다가 수련생으로 키우고 싶다며 -배가 나와서 못쓰겠다는 말은 빼고- 팔과 다리가 길어서 일단 신체적 조건은 좋다고 하는 선생님이 있는가하면 내 손을 만지고 싶다고 끈적하게 구는 밉지 않은 친구가 있고, 치과 갔다가 치료 안 하고 그냥 와서 너무 행복하고 좋다는 그래서 결론으로 나를 더 사랑하게 됐다는 옥찌가 있다.

 전화기 뜨거울 때까지 수다를 떨며 아치 어쩌고 하다가, 그래도 아치니까 괜찮다고 하는 친구가 있는가하면 언니는 나만 믿고 하고 싶은거 다 하라고 하는 동생이 있다. 한낮에 갈증나면 맥주라도 훔쳐 줄 수 있다고 막말하다 '아, 아치는 막걸리지' 하는 A가 있는가 하면, 직접 맥주를 사와서 한상 차려주는 B도 있다. 괜히 카드를 갖고 와서 이거 영어로 아냐며 물어보고선 가만히 내 발음을 듣어보곤 합격 불합격이라고 말해주고, 시험 본거 합격했다니까 그건 이긴거냐고, 진거냐고 계속 물어보는 지민이가 있다. 같이 하고 싶은 공부를 정말 제대로 할 수 있게 한 공간이 있고, 운동장처럼 넓고 시원한 도서관이 지척에 있다.

 중국 사람들은 너무 행복하면 하늘을 보고 찡그린다고 한다. 하늘이 자신의 행복을 질투하지 못하게 거짓 표정을 짓는다나. 정확히 그런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왠지 어두컴컴한 베란다에 나가서 달을 보고 좀 찡그려줘야겠다.

* 남들이 보면 검지를 곧게 세워 머리통 옆에 놓고 몇바퀴 돌리며 고개를 흔들만한 짓이겠지만 해보면 꽤 재미진 놀이가 있다. 공원 같은데서 소리 안 나는 이어폰을 끼고 약간 크게 노래 부르기, 횡단 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고무줄을 상상하며 고무줄 놀이 하기, 사각의 자동차 주차선 주위를 자전거로 돌기. 이때는 되도록 선 근처를 돌아서 코너링 기술을 익히도록 한다. 기어가 없는 자전거를 갖고 오르막길 오르기-한낮에 땀 뻘뻘 흘리며 해야 제 맛-, 또 뭐가 있을까.

* 결론부터 말하자면 뱃살은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었다. 잠깐 주춤하며 몸무게가 준걸 가지고 동네방네 떠들며 복근을 만들겠다고 말하고 다녔으니, 배 그림자라도 올려야 마땅하겠으나 뱃살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M에게 푸념을 했더니 나중에 만나면 배를 까본다고 했는데 이를 어쩌나. 근육 무늬라도 그려넣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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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lei 2010-07-22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기는 납이 아니라 납속에 들어있는 페이스트(송진)가 증발한 것입니다. (물론 극미량의 납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요)

Arch 2010-07-22 10:02   좋아요 0 | URL
아하, 레이시즌님이 모르는건 뭔가요?

Forgettable. 2010-07-22 0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가 배워요? 두근두근 나도 요가 배우고 싶다.
일단 운동을 좀 해야겠어요. 나 요새 너무 게을러서 걱정 ㅠㅠ [면도날] 읽어요? 난 그거 세상에 그 두꺼운걸 한나절만에 다 읽은거 있죠. ㅠㅠ 왠지 아까워.

있죠. 여기서 만난 어떤 분 집에서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을 발견하고는 너무너무 신나갖고 이 책 읽었냐고 호들갑을 막 떨었더니 '그거 너무 삼류소설 같잖아요.' 이러는거.. 털썩.....

다 좋은데 친구가 없어서 그게 딱 안좋아요 난.

Arch 2010-07-22 10:05   좋아요 0 | URL
짧게 배워요. 명상하고, 몸의 감각을 느끼고 막 이러는거 신기해요.
아니, 면도날은 다 읽었고(나도 아까웠음) 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이란 책을 읽어요. 서머싯 몸이 다른 작가들 생애와 작품 얘기를 하는건데 정말, 정말 웃기고 예리해요. 전에 블랑카님 페이퍼 보고 찜해뒀다가 야금야금 읽고 있는 중이에요.

나도 나도. K작가에 대해 입장 보류를 했는데 누군가 단번에 '그 사람 소설 싸구려 같아'이러는거 있죠. 뭐랄까, 너무 명확해진달까.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별다른 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런 사람들이 곳곳에 있는 것 같아요.

인기뽀가 왜 친구가 없어요!

2010-07-22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10-07-22 14:07   좋아요 0 | URL
그책 안읽어봤지만 원래 책은 삼류가 진정한 유치찬란 묘미가 있는거 아닌가요?^^
원래 친구들끼리 넘 취향 맞으면 재수없어요ㅋ 서로 달라야 뻘쭘하니 재밌는거죠~~
전 친구들이랑 책 취향 정말 안맞아도 친하거든요~

2010-07-22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4 0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0-07-24 03:35   좋아요 0 | URL
그럼요, 취향은 서로 다르라고 있는걸요. 반가워요! pjy3926님!

다락방 2010-07-22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나올 것 같은 글이에요, Arch.

다락방 2010-07-22 08:51   좋아요 0 | URL
그리고 손을 만지고 싶다고 끈적하게 구는 친구, 라니까 말인데요,
손을 만지고 싶다고 하면 대체적으로 자 만져봐, 하지는 않게 되지 않나요?
내 경우엔 손을 만지는(잡는)것을 기습적으로 하면 어쩔줄을 모르게 되는데(그냥 잡혀있죠), 일단 먼저 요구를 하면 싫다고 하게 되더라구요. 호락호락해지지 않는달까요. Arch는 달라요? Arch는 요구하는 쪽을 더 좋아해요?

Arch 2010-07-22 10:13   좋아요 0 | URL
다락방은 참^^

손 말예요. 성폭력 얘기 하다가 나온 소리라... 그랬어요.
"잘 모르겠으면 물어봐라. 물어봐서 아닌 것 같으면 액션을 취해선 안 된다" 제가 막 강조했거든요. 장난처럼 잡아도 되냐고 물어서 역시 장난처럼 그건 안 되지, 뭐 이렇게 된거에요.

어느 날엔가 얘가 길이가 좀 짧은 셔츠를 입고 왔어요. 손을 올리니까 배가 보이잖아요. 섹시한건 아닌데 괜히 만져보고 싶더라구요. 아니면 어어, 배 보여주고 다닌다라며 농담이라도 하고 싶고. 그렇지만 꾹 참았어요. 뭔가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흐흐, 아침부터 야릇해~

다락방 2010-07-22 10:18   좋아요 0 | URL
나 그거 알아요, 알아!

그렇지만 꾹 참았어요. 뭔가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이거 뭔지 알아요, 안다구요! 나도 참아요, 아니 참았어요. 아 아침부터 죽겠네, 정말. ㅠㅠ

Arch 2010-07-22 10:25   좋아요 0 | URL
다락방 사무실은 에어컨 있지만, 우리 집은 에어컨을 전시해두고 있어요.
아침부터 더운데 참 죽겠어요. 하악하악 ^^

무해한모리군 2010-07-22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는 못하는게 없군요.. 오호..
게다가 산도 타고 요가도 하는군요!
저는 집에만 들어오면 나가기가 싫어요.(원룸이라 삶겨지기 직전인 상황인데도!)
아.. 배그림자를 올려주세요 ㅎㅎㅎ

다락방 2010-07-22 08:54   좋아요 0 | URL
배그림자를 올려주세요 ㅎㅎㅎ 2

Arch 2010-07-22 10:15   좋아요 0 | URL
한가지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이것저것 찔러보는거죠. 요가는 그냥 따라만 하는건데요 뭘^^
보라매 공원 좋잖아요. 전 자주 갔었는데.

배그림자 봐서 뭐하게요, 응?

무해한모리군 2010-07-22 13:15   좋아요 0 | URL
예쁘지 않을까요? ㅎㅎㅎ
아름다운건 함께 봐야죠 암암암

비로그인 2010-07-23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몸이 정말 많이 굳었더라구요'


요가 선생님이 제게 직접 하신 말씀.ㅠㅠ
그런데 저도 단박에 수긍했던 한마디.

부러워요.

Arch 2010-07-24 03:30   좋아요 0 | URL
아 쥬드님, 절대 몸이 유연하다거나 그런건 아니고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씀 같아요.
쥬드님, 감정 노동 읽었잖아요~ 요가 선생님은 저를 위해 기꺼이 감정 노동을 하신거죠.

2010-07-25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5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0-07-26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이 찌면서 팔다리가 길 수도 있을까요? 날씬하신데 괜히 그러시는 건 아닌지, 불쑥 의심이 됩니다.

Arch 2010-07-26 18:15   좋아요 0 | URL
배만 나오는거고, 팔다리가 길다기보단 뭐랄까 몸의 다른 부분보다 상대적으로 얇달까^^
 


1. 성폭력에서 왜 남자들만 가해자 취급하는가.
 
Sex-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성별을 의미했으나 18세기부터 그 의미가 확대되어 성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Gender- 개인이 출생한 이후에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인 환경에 의해 학습되어진 후천척으로 주어진 남녀의 특성
 Sexuality- 개인의 성격, 감정, 행동뿐 아니라 성적인 존재 및 성별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의미. 성이란 성에 대한 신념, 태도, 가치관, 지식, 그리고 개인의 성행태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남자들이란 생물학적인 남성이라기보다는 남성스러운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집단을 말한다. 그 속에는 생물학적인 성에 남성이 많을 뿐, 소수의 여자도 있을 수 있다.

2. 성폭력에서 원하지 않을 때란? 의사표현은? 저항은 어느 정도로 해야하나? (법적인 부분은 좀 더 공부를 해야 정리가 될 것 같고,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폭력이란 힘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가하는 위해이다. 그렇다면 힘, 혹은 권력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 미디어나 사회는 누가 남자답고 여자다운지를 사회화시킨다. 예컨대 남편보다 돈을 많이 버는 아내는 남편을 기죽이지 않으려고, 돈 많이 번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남자의 자격지심을 자극하지 않고 힘이 경제력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반영된 행동이다. 섹스를 요구하는 경우는 남자가 많다. 남성은 성을 누려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환경은 남성이 상황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한다.
 만약에 남자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남자가 여성에게 성행위를 요구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물리적인 힘뿐 아니라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고, 상대방을 불쾌하지 않게 하려고, 혹은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해 여성은 별다른 의사표시나 저항 없이 남자의 요구에 응할 수 있다. 그럼 이때는 성폭행으로 볼 수 있을까?

 사람들이 성폭력을 당한 여성에게 늘 궁금해하는게 있다. 그건 얼마나 저항했는지,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했는지다. 먼저 의사표현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생물학적인 여성은 사회적으로 자기 주장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지지를 받은적이 없다. 도리어 공감하고, 이해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일 것을 주문 받아왔다. 그런 여성이 억압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성행위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밝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성폭력에서는 의사표현보다 여자가 '자발적으로 그 상황을 즐겼는가'에 초점을 둬야한다. 침묵은 동의가 아니고 웃는 것도 좋아서가 아니다.

 남자 학교에서 남학생들이 서로 치고 받는 경우는 단순한 싸움으로 끝난다. 하지만 여학생들이 몸싸움을 하는 것은 학교 폭력으로 받아들인다. 사회는 여성의 폭력에 관용적이지 않다. 성폭력에서 여성이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는지의 여부 역시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여성의 생애에서 몸으로 저항하고 누군가의 의사에 격렬하게 반하는 행동을 해본적이 없다. 그런데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위협적인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면 가해자는 여자의 의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폭력 가해자에게 주로 시키는 교육의 내용은 공감 훈련이라고 한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성행위에 동참하는게 아니라면 성폭력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걸 잘 모르겠다면 아예 섹스할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3. 자발적인 성행위를 하고선 상대방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한다면?
 선의의 피해자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그렇지만 무척 드물다. 사회적인 시선과 여전히 가부장적인 법 감정, 입증하는 지난한 재판 과정까지 감내하면서 합의금 때문에 성폭력을 당했다는 주장을 펴기란 어렵다.

4. 추행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시선에 담긴 내용이 다르다. 같은 여성이라도 오랫동안 자신을 보는건 별로다.

5.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정말 심각한 피해에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바뀌는가.
 성폭력을 당한 사람은 엄청난 고통을 겪을까? 어떤 상황이든 개인이 가진 역량, 힘의 문제에 따라 감정과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다. 성폭력인줄 몰랐다가 나중에 생각해보니 성폭력이었다는 것을 알기도 하고, 자신이 당한 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볼 수도 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건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이럴 것이다'라는 사회적인 시선이다. 피해자 유발론은 그 중 끈질기게 피해자를 자책하게 하는 논리다. 도둑 맞았다고 문단속을 안 한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순결을 상실했다는 상실감도 여성을 피해자화하는 기제 중의 하나이다.

6. 아동 성폭력은 요새 더 일어나는 일인가.
 15년 전까지는 언론에 강간이란 표현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 단순 폭력으로 넘겼던 성폭력을 의제화시키고 인식하는 과정에서 아동 성폭력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 아동 성폭력이 문제가 되는건 성적인 학대 뿐 아니라 아동이 그 나이에 해나가야할 발달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혼자 해나가기엔 벅찬 공부였다. 수업 내내 감동을 받고 정리를 했지만 투박하고 거칠다. 여성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멀었다. 성폭력에서 의사표현과 저항은 중요하지 않다는걸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성의 전화에서 진행하는 인권강사 양성교육은 정말 진짜다. 강사가 안 돼도 좋다. 궁금했던걸 물어볼 수 있고,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알 수 있으니 일석 오십만조다.

 선생님께 교재 외의 참고 자료를 여쭸더니 자기 머릿속에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스스로 자기가 길을 찾아서 걸어가야하는거라니, 여행이 따로 없다.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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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07-1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서 추천하고....아~ 골머리를 싸고 있어요...--;

Arch 2010-07-19 23:24   좋아요 0 | URL
기운나요! 머큐리님 추천 받아서~

제가 너무 횡설수설해서 그래요. 공부 좀 더 해서 쉽고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음 좋겠어요.

빵가게재습격 2010-07-19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안녕하세요. 처음 댓글 남깁니다. 약간의 농을 섞어서 질문을 해보자면...결국 성폭력은 어떻게 정의된다는 것인가요? ^^;;;

Arch 2010-07-19 23:23   좋아요 0 | URL
형광펜으로 그어놨는데, '자발적으로 그 상황을 즐겼느냐의 여부'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극적으로 저항하고 거부했느냐가 아니라 피해자, 즉 생존자의 자발성( 2008년에 정부 차원의 최초 조사에서 85%가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이란 점에서 나온 결론이라고 생각해요.)에 초점을 둔거죠.
농인데 제가 정색을 한건가요? 왠지 그런 것 같은데 ㅡ,.ㅡ;;

그래서 제가 선생님께 여쭸죠. 어떨 때 내가 즐겼는지, 그냥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싫었는지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떤게 성폭력이냐고. 그건 성관계를 한 본인이 판단할 문제라고 했어요.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폭력이 없어도 성폭력일 수 있는게 피해자가 내숭을 떤다거나, 튕기는거란 인식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가해자는 아직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요즘 아동 성폭력 때문에 (너무 극악스럽고 비참한 방식이지만) 성폭력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지만 아직도 피해자의 저항 여부에 따라 성폭력을 보는 경향이 너무 많은거죠.

결국 가장 중요한건 상대방이 보내는 언어적, 비언어적 신호들에 귀를 기울이는 수 밖에 없는거죠.

반가워요. 빵가게재습격님^^

무스탕 2010-07-19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을 '괴물'이라는 3권짜리 로설을 읽었어요. 여주인공이 17세의 아역배우였는데 어느날 3명에게 납치가 되어 성폭행을 당하고 아이까지 낳지만 사회는 그걸 모르죠. 갑자기 유학길에 올라 불현듯 나타나서 방송국 연출가가 되면서 다시 사회에 복귀하지만 그 속은 완전히 뒤바뀌어져 있어요.
성폭력에 관한 영화를 찍으면서 만난 배우와 스스로 죽여버린 자신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은 정말 소설임에도 가슴이 아프고 손이 떨리는거에요.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여주인공은 과거의 본인이고 19년을 숨겨왔던 자신을 세상에 까발기면서 풀어놓지 못했던 속내를 털어내는 과정은 픽션이지만 논픽션이지요.
여성주의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 않더라도 모두가 알아야 하고 지켜내고 존중해야할 사안이지요.

Arch 2010-07-19 23:32   좋아요 0 | URL
여주인공은 기존의 '피해자 되기'와는 좀 거리를 둔 것 같네요. 도둑맞거나, 폭행을 당하면 충격을 받긴 하지만 그게 그 사람의 인생 전부를 송두리째 흔든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성폭력도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페이퍼에 썼듯이 영영 헤어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졌다는 식으로 생각하는건 문제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꽤 오랫동안 통념처럼 굳어졌던 것 같아요. 여주인공은 영화를 찍으며 자신을 치유하기 보다는 더 고립되고 괴로웠을 것 같아요.

그 소설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도넛공주 2010-07-20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력은 아니지만 얼마전 정말 '제 힘으로는 제압할 수 없는 남성의 폭력'을 당하고 나니
폭력에 대해 제 자신이 얼마나 무감했었나 절절히 깨닫게 되더군요.
정말 정신적인 충격이 얼마나 클지...성폭력은 더더욱(성적 폭력+폭력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요) 끔찍하게 여겨집니다.
갑자기 포르노필름의 인기 장르가 강간포르노라는 말을 떠올리니 더욱 슬퍼지네요. 대체 어떤 점이 즐거운 걸까?

Arch 2010-07-20 23:50   좋아요 0 | URL
대부분의 여성은 폭력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낄 수 밖에 없을거에요. 전 도넛공주님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는걸요.
자신들의 판타지겠죠. 젠더화된 여성도 강간 당하는걸 상상하거나 강간 해보는걸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걸 직접 겪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요.

쟈니 2010-07-20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몇년 전에 성폭력 상담소에서 주최한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에 참가하여 진행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습니다.

성폭력, 성희롱.. 등을 어떻게 정의내릴 것인가.. 부터도 참 어려운거 같아요. 아무래도, 오랜 세월동안 드러나지 않고, 언어화 되지 않은 부분이라 그렇다는 생각이..
여성주의에 많은 애정이 있어서, 이 글 너무 반갑네요. ^^


Arch 2010-07-20 23:52   좋아요 0 | URL
저는 늘 쟈니님 글을 잘 읽고, 좋아하고 (에 또~) 그러는걸요^^

이 글을 쓰고, 주변에 이런 얘기가 있더란 말을 나누면서 제가 생각지 못한 얘기들도 많다는걸 느꼈어요. 결국은 친구 말처럼 상황에 따라 다른건데 어떤 법칙처럼 정해놓는다면 예외의 경우를 설명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모든걸 각개약진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고. 어떤게 제대로인지 잘 모르겠어요.

마태우스 2010-07-20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력에 관한 책을 얼마 전에 읽었던지라 댓글을 답니다.
[만약에 남자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남자가 여성에게 성행위를 요구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물리적인 힘뿐 아니라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고, 상대방을 불쾌하지 않게 하려고, 혹은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해 여성은 별다른 의사표시나 저항 없이 남자의 요구에 응할 수 있다. 그럼 이때는 성폭행으로 볼 수 있을까?]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받는 거라네요. 즉 하고 싶지 않을 때 하지 않을 권리가 성적 자기결정권인데, 위에서 드신 예는 그걸 분명히 침해합니다. 어찌되었건 둘간의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그 권력이 여자에게 압력으로 작용하니 말입니다. 제가 얼마전 책을 읽고 꺠달은 내용이었구요, 추천하신 책 감사드립니다.

Arch 2010-07-20 23:54   좋아요 0 | URL
저는 마태우스님 덕분에 좋은 책을 많이 알았는걸요.

성폭력도 결국 인권의 문제라고 하더라구요. 내 몸을 내가 지킬 수 있는 권리, 내 인격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 말이죠.
 

 그와 술을 마시러 갔다. 주전자 한통 가득한 막걸리를 먹을 때마다 안주를 푸짐하게 내주는 옛촌 막걸리집. 족발, 게찜, 삼합, 새우소금구이, 삼계탕은 다 그림의 떡이었지만 김치찜과 야채 부침개, 꽁치 구이는 정말 맛있었다. 김치찜의 야들거리는 맛하며 과하지 않은 신맛이 아직도 혀끝에서 맴돈다. 그에게 이 집 김치찜은 너무 부드러워서 최고라고 말했더니, 할머니처럼 이 쓰기가 싫나보다란 말을 해준다. 예리하긴.

 그의 후배들이 왔다. 친근한 농담과 막말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말들이 오고 갔다. 단둘이 갖는 술자리를 좋아하는 나로선 꽃남 하나 없이 여럿이서 함께 먹는 자리가 내키지 않았다. 술을 먹으면 관대해지는 분위기를 틈타 지 꼴리는대로 술을 권하거나 억지를 부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멀쩡한 편이었지만 지들끼리만 얘기를 한다고 해서야.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끼지도 빠지지도 못한채 멀뚱하게 술만 들이키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갑자기 '황말자'가 됐다. 분명히 서로 통성명도 했고, 처음 몇번은 누구씨 어쩌고 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갑자기 황말자라니. 처음 보는 사이에 무례하단 생각을 했지만 그걸 따질만큼 내 정신이 온전치는 못했다. 게다가 거짓말 안 하고 엄지 손톱만한 모기들이 아치의 야윈 다리-하악하악-를 물어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꽤 관대한 표정으로 '나는 황말자니까 모두들 편하게 생각해줘요.'란 웃음을 지었다. 따지고 물고 늘어지던 아치는 안녕, 금요일의 아치는 황말자가 되었다.

 황말자란 이름이 어때서!  
 황정자란 언니와 황순자란 동생을 둔 황말자는 꽤 씩씩하고 기운이 넘친 여자인가보다. 나를 황말자로 부르기 시작한 후배는 꽤 세게 나를 밀어부쳤다. 아니 처음 만나서, 오랜만에 마실 나온 사람한테 이 사람이 별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다니! 아치라면 삐지거나 무시했을 상황을 우리 말자씨는 어림없다는 식으로 넘겼다. 황말자가 된 아치는 꽤 말발이 세지고 세진 말발에 유머도 간간히 섞어가며 기세등등 막걸리 잔을 비워내고 있었다. 늘 내가 바라마지 않았던 사람. 대범하고 융통성 있지만 정도를 지킬 수 있는 사람. 나는 황말자씨가 좋아졌다.

 물론 황말자가 된 아치가 억울하지 않은건 아니었다. 모처럼 샤랄라 치마도 입고 굽 있는 구두도 신었다. 눈매를 또렷하게 한다며 나오기 3분 전에 속성으로 쓱쓱 칠한 아이 쉐도우와 마스카라까지, 아치 오늘 멋 좀 냈는데 싶은 차림이었다. 무슨 말을 하면 고개를 외로 꼬로 흥하며 코웃음을 치거나 막걸리 잔에 든 술을 두 손으로 받쳐서 조심스럽게 먹어야할 것 같은 차림새 말이다. 막걸리랑 그런 차림이 어울릴지와 내가 부리는 교태 내지는 다소곳함이 코믹스러울거란 예상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황말자가 되어 억센 말들을 쏟아내려니 배알이 꼬일 수 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P때문에 환경주의자에 뭐에 뭐에 온갖 주의가 붙은 아치였을 때보다 이름의 포스만으로 모든걸 다 설명해줄 수 있는 황말자가 됐을 때가 더 편했다. 황말자씨는 뭐가 옳고,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황말자씨는 실수를 했을 때 변명을 하기보다, 미안하다고 제대로 말한 후에 다시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사람이다. 황말자씨는 술값 계산을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해버리고-이건 꼭 누구랑 닮았어요!-, 왜 술값을 냈냐는 소리에 내가 너랑 만나는거 좋으니까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다. 황말자씨는 짖궂은 농담에 얼굴을 붉히는 대신 더 짖궂고 못되고 야릇한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길줄 아는 사람이다. 
 
 
 느즈막히 연두색 모기장에서 일어났다. 어지럽고 기분이 과히 좋지만은 않았다. 언제쯤 말자씨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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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7-1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요일에 Arch 도 술마셨구먼! ㅎㅎ 그러면서 무슨 나를 질투한다고! ㅎㅎ
내가 문자보내고 나한테 문자했던 사람은 Arch 였어요, 황말자였어요?

샤랄라 치마와 굽 있는 구두는 뱃살이 들어간 Arch 에게 찬란한 아름다움을 주었겠군요! 모기들도 질투해서 다리를 물어뜯을 만큼 말이지요. 모기는 암컷만 피를 빤다잖아요. 암컷들이 다다다닥 들러붙어서 Arch를 질투한거야.

마지막은 멋진데요. 내가 너랑 만나는거 좋으니까,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술값을 계산해주다니!

Arch 2010-07-18 11:13   좋아요 0 | URL
그건, 그건 나가기 전이었거든요. 잘까 나갈까 고민하고 있을 타임, 물론 아치여서 맘껏 부러워했죠 ^^
뱃살은 원상복귀에요. 복근 욕심은 좀 과한 듯. 간지러워 죽겠어요. 모기 침 때문에 간지러운건가요? 모기가 나한테 침 발라놓은거야? (뭐야?)
아니아니, 그건 D모시기 님이라고, 술값을 막 자기가 내고 그러는 사람이 있어요. 아치가 소읍에선 방귀 꽤나 뀌는 사람이란걸 모르는거죠. ㅋㅋ

다락방 2010-07-19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산에 여자 혼자 잘 만한 호텔 있어요?

Arch 2010-07-19 15:59   좋아요 0 | URL
호텔은 있는데 여자 혼자 호텔에서 자게요? 아치집 놔두고?

다락방 2010-07-19 16:15   좋아요 0 | URL
나 남의 집에서 못자는 여자사람 ㅎㅎ

Arch 만나러 가고 싶지 뭐에요. 만나서 술 마시면 나는 당일날 못 올라올 것 같고 자고 와야 할 것 같은데, 여자니까 아무래도 허름한 여관 보다는 호텔에서 자는게 좀 더 안전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훗 :)


2010-07-19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07-19 17:09   좋아요 0 | URL
어머. 내가 새침해요?
나 털털 캐릭턴데? ㅋㅋ

Forgettable. 2010-07-22 04:21   좋아요 0 | URL
아치집 완전 좋음 ㅋㅋ 숙면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