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을 빙자한 술자리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A가 담배를 꺼내며 순전히 예의상 펴도 되냐고 물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안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어, 저건 내가 해왔던 말인데. 대사를 다른 배우한테 빼앗겼을 때처럼 생뚱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애가 말하기 전에는 내가 말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말할 타이밍을 놓친걸 두고 막 안주가 들어오고, 맥주가 유난히 맛있었기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별나단 소리를 듣기 싫어서, 유난떨기 싫어서 가만히 있으려던 참이었으니까.

 언제부턴가 담배 연기에 대놓고 반응하지 않았다. 여전히 담배 연기는 싫다. 담배 연기가 싫다며 듣도 보도 못한 담배 알레르기가 있다고 뻥까지 친적도 있다. 뻥친거야 나를 뺀 흡연자 9명이 타고 있는 봉고차 운전을 해야했기에 궁여지책으로 떠오른거지만 어쨌든 대놓고, 혹은 돌려서 퍽 여러 번 '나는 싫어요'를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왜, 안주엔 그토록 활활 타올랐으면서 담배 연기엔 조금도 싫은 내색을 안 했을까. 연기를 조금만 맡아도 싫었지만 내가 나서서 나가서 펴라, 어쩌라 하기 귀찮았던 것 같다. 혹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들-술자리에서 담배를 핀다던가-을 굳이 사사건건 문제삼아 피곤해지기 싫었나보다.

 얼마 전에 만난 나이 지긋한 분은 느닷없이 자긴 사회 생활 잘하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낀다는 말을 했다. 그야 나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나이 들고 어느 정도 모난 것도 둥글어지면 나아질줄 알았는데 열등감을 느낄 정도로 사람 사이가 불편하다니. 이거 뭔가 좀 잘못 된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 한자는 다 알줄 알았는데 여전히 '하늘 천, 땅 지' 정도로 만족한다는 누구 말처럼 저절로 도달하는 경지란 없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땐 누군가 하지 못하는 말을 나서서 말하는걸 괜찮게 여긴적도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때의 어린 아치는 삼키고, 한 템포 지난 후에 말하는걸 모를 정도로 막무가내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은 좀 안다는 말도 아니다- 직설적이다, 솔직하고 까칠하다는 말만이 남과 나를 구별 지을 수 있는 것인줄 알았다. 그럼 지금은 아닐까. 생각 없이 하는 말에 누군가 상처를 받는다는걸 알면서, 나보다 더 센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중 최악은 하고 싶은 말 다 해놓고 뒤끝 없다고 손 탁탁 터는 유형의 사람-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게 훨씬 더 어렵다는걸 알면서 조금씩 변했다. 게다가 나처럼 속엣말을 다 하는 사람들 내면에 자리 잡은 소심함은 말도 못할 정도이다. 누군가의 지나치는 말 한마디에 온 세계를 다 담아 해석하려 드니 말이다. 별로 즐겁지 않은 일이다.

 사회성이 좋다는걸 결국 감정노동의 일종으로 본다면 누군가 회피한 감정 노동은 다른 누군가 대신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내가 성질대로 아빠랑 싸울 때 동생과 엄마가 그 빈틈을 메웠고, 틱틱대며 분위기를 망칠 때 다른 누군가는 웃거나 실없는 농담을 하며 사람들을 토닥였을 것이다. 자기계발서 읽는다고 사람이 단번에 변하는건 아니듯이 이 책 하나 읽었다고 따지고 툭툭 내뱉는 버릇을 금세 고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감할줄 알고 남과 부딪히지 않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게 맘처럼 쉽진 않다.

 
 얼마 전에 읽은 <천만 개의 세포가 짜릿짜릿>에선 사교성이 좋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그 친구에게 낯선 사람과 얘기하고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말을 했는데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 나도 그래.
자신도 어색하고 불편할 때가 많다고, 단지 그렇지 않은 척할 뿐이라고 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사람이면 정말 얼빠진 사람이지'

 남이 별다른 악의 없이 하는 말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 분석하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괜찮은 칭찬을 생각하는건 어떨까. 가끔씩 느끼한 멘트를 날리는 사람을 향해 '가식적으로 말하는걸 원하는건 아니죠'라고 의뭉 떨며 할 말 다 해보는건? '사회적인 나'와 '원래의 나' 사이에서 스위치를 누르듯이 표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민이 좀 더 명료해져서 남들이 자연스럽게 습득한 '사회성'이 저절로 발휘되면 좋겠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다. 다행히 사람 사이에선 정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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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2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슨 얘기 끝에 사람들이 호응을 한다. 그런데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이 아니었다. 의기소침하게 대꾸했다. 제가 하려던 얘기가 아닌데요. 다시 얘기해보라길래 좀 더 세심하게 설명을 하고, 예까지 들었다. 좀 전과는 다른 내용의 호응이었지만, 역시 내가 하려던 얘기는 아니었다. 이해가 부족한 게 아니었다. 결국 내가 무슨 얘기를 하든 자기들 편한대로, 자기들 원하는대로 듣고 말할 뿐이었다.

 개인적인 얘기를 어렵게 털어놓았다. 뭔가 따뜻하거나 괜찮은 지지를 받을거란 기대를 한건 아니었다. 신비주의로 일관하는 상대가 좀 꼴 보기 싫어서 보란 듯이 해보인 것이기도 했다. 맙소사. 말하다 중간에 잘려먹었다. 내가 남의 말을 자른 것 두 배쯤은 더 되게 요즘 내 말은 톡톡 잘려먹는다. 갈증이 안 날 수가 없다. 집 뒤에 있는 산에 올라가 고함이라도 질러야 할까.

 그녀가 묻는다.

- 아치는 어렸을 때 어땠어요.

어렸을 때라니. 이 음식이 맛있는지, 요즘 무슨 영화가 재미있냐라든지, 취미가 뭐냐고 묻질 않고 하필이면 어렸을 때라니.

- 그냥 좀 뚱했죠. 불만스럽고 답답한데 뭔가에 빠지지도 못하고 흐릿하게 뭉개져 보일 정도로 평범했어요. 평범한 게 싫어서 좀 나대다 애들이 좀 이상하게 보기도 했고, 도벽도 좀 있었고, 그리고 또 어땠더라.

어렸을 때 기억은 아주 까마득하다. 그 깊은 우물 속으로 손을 첨벙 담구더니 거리낌 없이 손을 휘젓는다. 가볍기보단 따사로웠다. 까마득한 곳에 있던 나를 참 오랜만에 떠올려봤다.

뭔가 자꾸 서운해서 끙끙 앓다가 난 정말 못난 사람 같다고 하니까 그는 이런 얘기를 했지, 아마.

- 아치는 이미 충분히 멋져요. 그러니까 나아지려고 너무 조바심내지 마요. 그건 몇 안 되는 감점 사항이에요.

 알고 있었다. 내가 무리 한다는걸. 괜히 한번 부려보는 치기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나보다 날 더 잘 알고 있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처럼, 화살 쏴놓고 과녁을 그리는 점쟁이처럼 그저 어쩌다 맞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어쩌다가 구체적이고 좀 더 그럴듯해질수록 정말 잘 알아서 그런 것 같은데, 그의 경우는 대부분 그랬다. 그래서 의심 많은 나지만 그의 말이라면 찰떡같이 믿는다.

 그녀는 가끔 내게 말을 건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도 말을 걸고 그 옆 사람에게도 말을 해서 희소성 없는 말쟁인 아닐까란 의심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녀의 스스럼없음이 난 좀 부럽다. 난 대놓고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말을 (진심으로) 한번도 해본적이 별로 없으니까. 그녀의 말은 상대를 아주 기분 좋은 우쭐함에 젖게 한다. 과식은 배 아프지만, 가끔씩 아주 바닥에서 기어다니다시피 우울할 땐 그녀의 무심한 듯 뱉어지는 말만큼 안심이 되는 게 또 있을까.

 그들을 만나면 내가 참 행복한 사람이고, 내 곁에 이렇게 근사한 사람들이 있다는걸 새삼 느낀다. 그래서 자꾸 갈증이 난다. 만나지 않고, 가끔씩 안부를 묻고,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 말이다. 누구에게도 내보이기 싫은 미운 맘까지 헐겁게 풀어놓다보면 내 바닥이 한심스러워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만 아무 말 없이 그래도 아치니까 괜찮다고 해주는 사람들이다.
 
 혼자인 것 같아, 그것도 아주 먼 곳에서 혼자된 것 같아 쓸쓸해질 때면 안부를 묻고, 자기 요새 뭘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들. 배가 고프고, 다리가 꺾이고, 그만 머리까지 무거워져 이러다 점처럼 되면 좋겠단 생각을 할 때면 재미있는거 알고 있는데 들어보겠냐며 말을 건네는 이들. 우울한 기분에 오랫동안 잠기지 못하기도 하지만, 이들이 내 곁에 있는 이상은 그리 오랫동안 슬퍼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힘내요,
그리고 얼굴 좀 봅시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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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0-1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올라온 페이퍼는 죄다 추천했어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추천할 만한 글만 씁니까, Arch?

아치는 이미 충분히 멋지다고 말해주는 '그'가 누군지는 짐작되는데 나머지는 짐작이 안되네요. 나도 아치 얼굴 보고 싶은데, 나도 아치 만나고 싶은데, 우리도 봐요, 응?

Arch 2010-10-12 18:05   좋아요 0 | URL
다락방이 싫어하는 '묵혔다 방출한 글'이라 그래요.

F와 D라고, 있어요. 그러게 봐야는데 10월은 공연의 달이라 짬이 안 나요. 놀고 있을 때 오시질 않고.

다락방 2010-10-13 08:45   좋아요 0 | URL
음, D는 어렸을때 어땠냐고 물은 적이 없으니 말을거는 여자쪽이겠군요.

앗 10월은 짬이 안나요? ㅎㅎ 언제 또 노는데요? 나는 23일까지는 못갈것 같아서(서울에 있어야 해요 ㅎㅎ) 달력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ㅎㅎ 다시 놀때 말해줘요. 그리고, 천명훈남 하고 조금 친해졌어요? 보고싶다, 그 사람.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히히

다락방 2010-10-1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

Arch 2010-10-17 19:53   좋아요 0 | URL
다락방~
 

* 연휴 동안 맹렬하게 집안일을 하는 A와 방관하는 B사이를 비켜 손이 아니면 발이라도 보태야할 C의 자리를 박차고 숨어있기 좋은 방으로 스며들었다. 동향인 그 방에서 아침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드라큘라가 말라죽 듯이 목이 바짝 마른채 깼다. D의 냄새를 없앤다며 자주 환기를 하다 옆집 누렁이랑 친해졌고 누렁이 친구 흰둥이에게 아는체 하다가 컹컹 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빨래를 돌리고, 틈틈이 요리를 했다. 심심하면 누워서 영화를 봤고, 움직이고 싶으면 걸레를 꼭 짜서 방바닥을 닦았다. 걸레질을 할 때면 '질투는 나의 힘'에서 박해일이 방을 훔치는 장면이 생각난다. 그 얘기를 D에게 해줬더니 아치는 자기 맘을 훔친게 아니냔 객쩍은 소리를 했다.

* D에 대해 말하자면
 아침에 먹으라며 식빵을 계란과 우유물에 담궜다 프라이팬에 구워 주고 내가 자는 틈에 두유를 사다주는 이다. 베이비 슈의 크림은 눈속임일 뿐, 진짜는 크림을 겹겹히 감싸고 있는 살살 녹는 빵에 있다고 보는 D. 지금 읽고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에서 케테 콜비츠가 칼 콜비츠에 대해 하는 말을 인용하자면,
 '그의 사랑과 선함은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기 때문에 그는 마음껏 낭비를 했다' 
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D는 곱고 예쁜 사람이다.

*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는 낮은산에서 나온 여성이 세상을 바꾸다 시리즈의 세번째 책이다. 전기나 자서전을 읽는건 '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하지만 나열식이나 자의식 과잉의 서술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한다. 누군가의 약력을 알고 싶은게 아니라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어떤 이유들이 있었는지, 시련은 어떻게 헤쳐나갔는지를 알고 싶었다. 다이앤 아버스 편을 보는데 그 짧은 글 안에서 다이앤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건 둘째로 하고, 그녀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저자의 시선을 느꼈다. 다른 인물들에 대한 서술이 객관적인 시선으로 인물에 대해 빠짐없이 기재하려는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약력 위주로 흐르는 것과 비교됐다.

 언젠가 다이앤 아버스와 케테 콜비츠에 대해 쓴 저자가 서재에서 자신의 다음 책에 대해 얘기한적이 있었다. 그땐 기억하지 못했다. 책이 나오면 서재에서 페이퍼로 다시 얘기해줄거라고 믿었으니까.

* 앞서 말한 저자는 서재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글을 쓸 때면'누군가 이 글을 봐줄거야'란 생각만으로도 힘이 날 때가 있다. 

 아치는 뭐, 성희롱이나 하고.

* 성희롱을 뭐라고 생각하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성적인 언동을 해서 상대방을 불쾌하는 것?
사전에선?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성과 관련된 언동으로 불쾌하고 굴욕적인 느낌을 갖게 하거나 불이익 등 유무형의 피해를 주는 행위
 라고 한다.
 상대방이 불쾌하거나 굴욕적인 느낌을 갖었나? 우스개 소리로, 남자가 뭐 그런 것에 예민하게란 식으로 넘겼을까. 지금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걸까. 나의 많은 문제점 중 하나는 이렇게 쿨하지 못하다는데 있다.

* 추석에 어영부영 하다 오랫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나보고 쿨하다고 했다. (그 나이에)일정한 직업 없이, 앞으로도 별로 가질 생각도 없이 사는걸 보면 내 안에 뭔가 큰 힘이 있단 식이었다. 이럴 때 쿨해보이고 싶었다면 아마도 씽긋 웃고선 건배를 해보였을 것이다. 쿨하기보다는 질척한 나는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에 이제 막 합격해놓고 앓는 소리를 하는 친구에게 엄살 피우지 말라고 했던가, 소맥은 머리가 아프다고 했던가, 일을 오래 안 한다 뿐이지 더더욱 일상에 구속되어 있다고 푸념을 했던가.

 그래도 녀석은 자꾸 물었다.

- 그래도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는거 아니냐고.

 조카들 치과를 데려가야하고, 뭘 하고 또 뭘 하는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합격한 주제에 안주가 뭐냐며 구박을 했다. 쿨하지 못해 미안했다.

* 가끔씩 보곤 했던 UV신드롬이 끝났다. 이젠 뭘 기다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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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0-05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곱고 예쁜 사람하고 연애하는구나, Arch.

이 쓸쓸하고 우울한 가을날에 보기 드물게 따뜻한 페이퍼네요. 자는 틈에 두유를 사다주는 사람이라니! 하긴, D자 들어가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좀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요.

좋다, 숨어들기 좋은 방.

Arch 2010-10-05 11:46   좋아요 0 | URL
웃기게도 아직 연애는 아니에요.

다락방도 D에요. 그러니까 다락방은 '좀 좋은 사람'인거죠.

다른 얘기 많이 했는데, 피이~

양철나무꾼 2010-10-0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숨어들기 좋은 방~

그 방을 가지기도 했고,들고 나고...가 자유로울 수 있는 arch님은 좀 부럽구요~^^

Arch 2010-10-05 11:48   좋아요 0 | URL
저 댓글 달고 있었는데, 찌찌뽕 ^^ (얼른 밀가루 반죽 해요~)

내 방이 아니라, 그렇다고 남 방도 아니라서 좋아요.
 


 살짝 심심했다. 병뚜껑을 갖고 노는 게 재미없어 앞에 있는 남자를 쭉 스캔해봤다. 조금만 크거나 작았으면 못났을 법한 이목구비가 아슬아슬하게 얼굴에 자리 잡은 남자가 거의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오래 나왔던 배는 아니고 지난 연말을 기점으로 술 때문에 찐 듯한 뱃살이 보이고, 타이트한 면바지 때문에 사타구니가 불룩했다. 그때 왜 그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술을 먹은 것도 아니고, 정말 꼭 얘기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단지 좀 심심했을 뿐. 아니면,

 남자가 뭘 자꾸 보냐고 물으며 나와 자신의 몸을 번갈아 봤다. 남자가 묻지만 않았어도 말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재차 확인만하지 않았어도 초면인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도 심심했다. 이 남자 사람, 자꾸 졸랐다. 배가 나와서라고 말하자, 남자는 폴로 티셔츠를 정리하며 요새 배 안 나온 남자도 있냐며 거드름을 피웠다. 목 뒤쪽에서 악랄한 목소리가 재촉했다. 배 때문이 아니라고 얼른 말해.

 - 그 자세가 좀 도드라져 보여요.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남자가 내 눈을 바라봤다. 1초간의 정적. 남자가 자신의 사타구니 부근을 내려다본 후 다시 짧은 정적. 남자는 황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주 아주 불편한 S라인 자세로. 상대의 반응이 좀 귀엽다고 생각 했던 걸까. 좀 더 나가봤다.

 - 상상해봤어요. 그 윤곽은 어떤 모양일지.

 남자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화를 내야할지, 웃으며 넘겨야할지, 나를 파렴치한으로 몰지. 재미있거나 대범한 성격은 아닌가보다. 이목구비가 아슬아슬한 남자는 내 몸의 흠집을 잡아내는 복수를 선택했다. 나로선 충분히 공감할만한 내용이라 적극적으로 수긍을 했다. 가슴은 작은 편이지만 예쁘다는 것만 살짝 고쳐주고. 김 빠지는 복수였다.

 술자리 농담을 빙자해 가슴 사이즈가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댈 때마다 '니 것보다 쓸 만하다'는 표정으로 넘겨왔다. 정색할 정도로 심각한 얘기가 아니란 분위기가 한 몫 했던 걸까. 크면 멍청해보이고, 작으면 섹시하지 않고. 가슴이 나와 봤어야 뭘 말해도 알아먹지. 정색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금 은밀하고 재미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재미있단 얘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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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4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5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5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10-03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는 남자사람 고추 상상쟁이.

2010-10-04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 키스를 잘 한다. 아님 말고

* 세상에서 제일 쓰기 싫은 글 중에서 다시 최고로 쓰기 싫은 글은 바로 자기 소개서이다. 마음 먹고 삶의 이력서를 쓴다면 문제가 없겠는데 팔릴만한 나로 포장하는 게 참 어렵다. 이 회사가 왜 나를 고용해야 하는지, 나는 이 회사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란 분명한 목표의식이 없는 것도 문제다. 낮은 사회적 지위와 저임금 비숙련 노동, 불안한 고용상태를 벗어나보겠다고 야심차게 취업 준비를 했는데 자기소개서란 복병이 있을 줄이야. 어쩌면 앞서의 불안한 상태에 길들여져서 극복해보려는 의지가 닳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한겨레21에 연재하던 노동 OTL을 엮은 4천원 인생을 읽다가 '대안 컴플렉스'- 쉬운 결론을 내려 위안 받으려는-에 눈길이 머물렀다. 어떤 문제를 접할 때면 손쉽게 나는 이런 행동을 한다거나, 이런 방법이 있다는 식의 대안 제시는 문제의 불편한 지점을 회피하는 게 아니었을까. 예전에 강준만 선생님의 책에서 본 행동하는 사람이 비양식적이다란 말처럼.

* 그러니까 난 지금 무슨 얘긴가를 하고 싶어 졸다 깨다 하면서 페이퍼질을 하고 있는데 애초에 하려던 이야기가 뭐였는지조차 감을 못잡겠다.

* 아침에 그와 구시가지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편의점에 앉아 조직이 단단한 얼음을 아작아작 씹으며 커피를 마신 후 그를 먼저 보냈다. 집까지 버스를 타고 가려다 볕이 좋길래 그냥 걸었다. 골목으로 문을 활짝 열어놓은 집을 보면서 그 속의 삶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닫힌 창문 너머의 일상은 어떨지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누군가는 가욋 애인과 골목길에 숨어든 시절을 얘기했고, 다른 누군가는 골목의 나이듦이 참 좋단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리고 난 내가 살 수 없지만 항상 동경해마지 않는 골목을 걷는 것으로 아침을 열었다.

* 작은 오해가 다툼을 만들었다. 사장님과 실장님이 날을 세우며 눈에서 칼침이라도 튀어나올 기세로 싸웠다. 한차례의 싸움이 끝나고 난 옆에서 사장의 '내 편 만들기의 일환인 상황전개 바꿔치기 시나리오'를 들었다. 사장이 잠시 자리를 비울라치면 실장님의 하소연을 들으며 무시해라, 모른척해라, 상관하지 말란 밑도 끝도 없는 대꾸만 해드렸다. 사장은 먼저 퇴근하고 속이 안 풀린 실장님은 누군가를 불러 재탕 하소연 중이다. 옆에서 보면 아주 분명해 보인다. 말을 좀 보태고 중재를 해볼까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을 두고 자꾸 다툼이 일어나는걸 보면 그들은 진위 여부를 제대로 밝혀내는 것보다 그냥, 무료한 어느 밤에 좀 다투고 싶은 것이 아닐까란 생각에 미치고 만다. 미친척 못알아듣는 체 할 수 밖에.

* 무슨 얘기를 했더니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한 얘기를 들먹이며 우스꽝스럽다는 듯이 떠들어댔다. 말하지 말걸 그랬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한 것 뿐인데,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았을까. 나는 그들처럼 생각하지 않는데 무리로 의견을 교환하는 그들은 내 생각과 다른 모양이었다. 뭐 별거 있냐는 투로 틱틱대며 다른 얘기로 화제를 전환했지만, 과연 뭐가 맞는지 종잡을 수 없게 됐다.

나만 아니면 되지,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에서 그치고 말았던적이 있었다. 그 속엔 은근한 무시와 배척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에 하나같이 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혹시 내가 어떤 부분을 놓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요새는 내 할 말과 상대의 반응 사이에서 '적절함'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재고 소진한다고 큰 소리 친 것처럼 부질없는 다짐이겠지만.

* 한 달에 한 번씩 생리 즈음엔 배가 부풀어 오른다. 달처럼 배가 부풀면 나는 야무지게 밥과 간식을 챙겨먹는다. 가끔 영문을 모르는 남자 사람에게 배가 부풀어 오르노라고 설명을 해주면 두 눈이 까마득한 공간을 헤매 듯 아련해진다. 간혹 그 즈음에 더 많이 먹어서 배가 커지는 게 아니냐고 소신 있게 말하는 남자 사람에겐 콧방귀를 뀌며 '치'하고 웃어준다.

자식, 예리하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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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9-14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해요, Arch!

(커피 사가지고 와서 추가) 제일 처음에 해당하는 건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좋아하지만 참으로 구리게 키스하는 남자를 알고 있었지요. 그는 그래서 더 나아가지 못하게(?) 했어요.

제일 마지막에 대해서는 나 역시 그래요. 그때는 힘을 줘도 배가 들어간다거나 하지도 않죠. 대학생때는 커다란 남방으로 배를 가리고 다녔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나 나온 배는 사실 뭘로 가려도 가려지진 않죠. 아흑 끔찍해.

Arch 2010-09-14 09:01   좋아요 0 | URL
물론, 그건 필요충분 이런건 아니지만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꽤 잘 하더라구요. 물론 이건 다 상대적인거지만. 그러니까 미흡한 제 키스 이력에 그전 사람과의 좋지 않았던 경험 뭐 이런걸로 더 좋아보이는거 말예요.

힘을 줘서 배가 들어갔을 때는 아주아주 옛날 이야기죠. 호랑이가 담배 가게에서 신분증 검사당하던 시절? ㅋㅋ 가만 보면 예쁜 배인데(뭐래)

다락방 2010-09-14 10:07   좋아요 0 | URL
내 배도 예뻐요.
너무 크고 너무 많아서 그렇지 ㅎㅎ

pjy 2010-09-16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짜릿했던 키스가 생각나요^^ 첨 만난 사람이었고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두고두고 아쉽네요~
그 뒤로 이렇게 키스운이 지지리도 없을줄 미리 알았다면 그남자 붙잡았을건데요!

양철나무꾼 2010-09-19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내리는 추석이 될것 같아요.
그래도 보름달 보면서 빌 소원 한가지 정도 준비해 놓으셨겠죠?

메리 베리 해피 추석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