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절 기념대회에서 p를 도왔다. 지루한 식순과 내빈소개를 거쳐 절절한 선언문 낭독이 이어졌다. 일이 아니었다면 카달로그 하나 힐끗하지 않았을 행사였다. 순서 중에는 학생들이 준비한 연극공연이 있었다. 연극 스텝들이 오퍼레이터를 자처해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자리에 앉아 짤막한 극을 관람했다.
 리허설에선 까불대던 녀석들이 대사를 제대로 치는 건 물론이고 점점 연극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빈 소개 후 빠져나간 내빈들의 빈자리가 여럿 보였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눈에 띄었다. '빠가야루'라고 할 때마다 킥킥대는 웃음소리와 대사 하나하나마다 논평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좀 거슬렸다. 
 연극을 하는 학생들이 만세를 외칠 때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같이 만세를 외쳤다. 앞쪽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은 뭉툭했다. 독립운동을 하던 열사가 죽음에 이르자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자위를 꾹꾹 눌렀다. 이것은 재현일까, 신파일까, 감동일까.
  나를 이룬 건 목숨을 건 독립운동과 민주화, 투표권 투쟁 때문이었다.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아직 잘 모르면서 왠지 '민족'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어르신들 틈에서 쉬는 날이 아니라 독립운동한 날인 3.1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뉴스에선 보기 싫은 사람이 북한 보고 '네가 먼저 손 내밀면 나도 맘을 풀겠다'란 식의 연설을 했다. '그들만의 뉴스'는 여전히 지루했다.


* 박원순의 책에 나온 안덕 마을 찜질방을 다녀왔다. 계곡물 소리마저 적막할 정도로 한적한 마을이었다. 한증막에서 나와 g에게 예전에 금광이었던 곳을 가보자고 했다. 동굴 입구에서 발이 깨질 정도로 차가운 물에 겁을 내고 물러섰다. -이건 왠지 우리 둘이 어떤 일을 대할 때마다 겪는 감정의 은유 같았다.- 고온 한증막에서 발바닥을 익힌 다음 동굴로 뛰어갔다. 깊이가 얕은 동굴은 좀 묘했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동굴에 앉았다. 동굴 이곳저곳에서 물이 똑똑 떨어졌다. 동굴 안은 바깥보다 따뜻했다. 동굴 안쪽에서 바라본 바깥은 아득한 저 너머처럼 느껴졌다. 
 밥벌이를 제대로 못하는게 콤플렉스였다. 내가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지는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동안 나에게 기회를 줬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꿈이 아니라 얼마나 악착같이 그것을 붙잡고 놓지 않는건가란 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꿈보다 중요한건 어떻게 사느냐는건데 요즘처럼 권태와 의혹과 미련할 정도로 반복되는 짜증이 도처에 널려있을지 몰랐다. 많은 것들을 시도해보고 그 중에서 나랑 안 맞는건 지워나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겠다.
 나는 대충 이런 얘기를 했다. g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같지도 않은 얘기를 해줬다. 우린 어쩌면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확신과 불안감 사이에서 진동하다 나아가는 것만큼 제자리에서 맴돌 확률도 높다는걸. 그래서 내 곁엔 m이 그랬고 g가 그런 것처럼 오랜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 전에는 안 이랬다며 나는 점점 멍청해진다고 철푸덕 주저앉아 버릴 때 그전에도 그랬으며 그래도 전보다는 좀 나아진거라고 말해줄 친구들 말이다. 물론 한명은 달콤한 말로, 다른 한명은 뭉툭한 가시처럼 살짝 따끔한 말을 하겠지만.

 
*  a는 빨래를 널다 옷걸이가 모자란다며 화를 냈다. 다른 이유는 꿀꺽 삼키고 옷걸이 얘기만 해서 깜빡 속을 뻔 했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못내고 나에게 화를 내는 a에게 나도 같이 화를 냈다. 제정신인 연인이었다면 달래줬을텐데. 착한 a와 나는 전화로 싸우는 짓 따윈 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비교적 순탄한 사춘기를 보낸 a와 나는 요즘 30대 앓이 중이다. -이 말은 무척 낯간지럽다.- 우리 둘 다 뭘 해서 먹고사나만 생각했지, 그 후의 삶, 취미나 여가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둘이 앓아서인지 아픈줄도 모르겠다.
 쏙 들어맞는 옷처럼 편하고 따뜻한 a와 밤마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전라도닷컴의 사투리를 구성지게 읽어주면 밤잠 없다는 a는 쌔근쌔근 잠을 잔다. 나는 그게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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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04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무룩 졸고 있었는데 알라딘에 들어오니 아치의 새글이 있어요.
나도 요즘 삼십대앓이 중인가봐요. 아니면 뒤늦은 사춘기. 삼십대 중반엔 누구나 이런건가 싶기도 하고 어쩌면 개인적으로 일어난 자잘한 일들때문에 이런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불안하고 답답해요. 이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을 좀 해소하기 위해서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대체 뭐가 되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제는 앞으로 살아갈것을 대비해서 연금을 들어놔야 겠다는 사람들과 술을 마셨어요. 그런데 저는 제 손금을 보여주며 나는 명이 짧아 일찍 죽는다고 하니 연금 따위 들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노인되서 돈 받아쓸걸 왜 지금부터 저축해야 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런데 내 손금을 본 그들이 말했어요. 다락방은 남편복도 없고 자식복도 없다고. 그렇다면 내게 있는건 무슨복일까요?

둘이 앓아서 아픈줄 모르겠다면 나도 지금 누군가와 같이 고민하고 같이 아파해야 하는건가봐요.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을 찾을수가 없고, 또 설사 찾아도 같이 고민하자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2011-03-04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1-03-04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다행이에요, a님이 있어서. :)

Arch 2011-03-04 13:56   좋아요 0 | URL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Forgettable. 2011-03-04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어찌하여 다들 연애얘기만 하는가!!!!!!!!!!!!!!!

Arch 2011-03-04 13:57   좋아요 0 | URL
연애 얘기만 한건 아니라구!

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네.

무스탕 2011-03-0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대를 앓을수 있는것도 좋은거에요. 뭔가 하고 있는거거든요. 나 바바요. 멍~ 하니 세월만 쌓고 있지..

Arch 2011-03-04 16:06   좋아요 0 | URL
에이, 그런게 어딨어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잔근심만 늘어나요.

nada 2011-03-05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순탄한 사춘기를 보내셨어요?
조금 의외인데요.
한번쯤은 징하게 앓을 필요가 있나 봐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어려서 못 놀아봤다고, 실컷 놀고 싶다고 이혼하고 싶답니다.
남들이 보기엔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결혼생활인데 말이죠.

둘이 앓아서 아픈 줄도 모르겠다니, 후후.
아치님, 솔직히 말해바바요.
애교 작렬이죠?

Arch 2011-03-07 13:34   좋아요 0 | URL
꽃양배추님, 일찍 일어나셨네~ 저는 아침 내내 노동을 하고 이제야 등붙이고 앉았어요.

순탄하기보다는 이렇다할 반항없이(짜증은 많이 냈죠) 지냈죠. 저도 동감해요. 인생의 어느 시기든 한번 앓아봐야 될텐데, 저는 좀 아프다가도 '뭐 있겠어' 이러면서 훌훌 털어버려요. 그분은, 옆지기님과 얘기해서 놀 여건을 만드는게 더 낫지 않을까요. 물론 놀려고 이혼해서 잘 놀면 좋겠지만.

히~ 저는 무뚝뚝한 여자 사람이에요. a가 더 간드러져요^^

양철나무꾼 2011-03-0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 얘기는 배아파서 싫은데 말이죠.
3월 첫페이퍼라고 하여 인사드리러 왔어요~

Arch 2011-03-07 13:35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히~

반짝 따뜻해졌다가 다시 또 추워요. 감기 조심해요!
 

 

 M이 말했다. 아치가 ‘이 일이 내 일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댄 게 이번 뿐은 아니라고. 나는 쪽 찢어진 눈을 홉뜨며 대드는 대신 수화기에 대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한참 축구할 때도 그랬냐, 서울에서 바람처럼 동서남북 돌아다닐 때도 그랬느냐, 모여서 공부하는게 좋다고 할 때도 그랬느냐며 따지는 대신 휴하고 긴 숨을 뱉어냈다. M의 말이 맞았으니까.

 어제는 C가 인심 한번 쓴다며 자기가 아는 분에게 나를 소개시켜줬다. 사주 공부를 한다는 그분께 순순히 생년월일을 대며 ‘전 뭘하면 좋을까요’라고 여쭤봤다.
- 전기 통신 쪽 일을 해야겠네.
- 네? 전 전기랑 통신을 안 좋아해요.
- 그런데 그게 당신이랑 맞아요.
- 흠... 그럼 뭔가 만드는건요. 그러니까 글을 쓴다거나 이런건요? 아니면 국수 장사하는건요?
- ......
- 제 사주는 정말 안 좋은 것 같아요.
- 안 좋은 사주는 없어요. 사주가 좀 약할 뿐이지 운이 맞으면 더 나아질 수 있어요. 다만 이 사주는 뒷심이 약해서 저지르되 뒷감당을 못하는 수가 생기니까 지금처럼 지내면 좋은 운이 생길거에요. 근데 주위에 남자가 많네.
- ......(남자 구경 좀 하고 싶어요.)
- 지분거리는 남자가 많아, 당신이 차분하니 현모양처 타입이야.
- 예? 현모양처 같은거 안 하고 싶은데요,
 C에게 쪼르르 가서 그랬노라고 하니 사주는 해석하기 나름이라 주변에 ‘아치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라 생물학적 성별이 ‘남자’인 사람이 많은거라고 했다. 가만 보면 이 녀석도 똘똘하다.
 지적이고 자유로운 여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과는 별개로 난 고지식하고 잔걱정이 끊이지 않는 타입이다. 사주가 아니었어도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던거지.

 그 아저씨 생각도 난다. 아저씨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주유소와 석유공급업체 사이의 중간 도매업을 하게 됐다고 했다. 하다 보니 사람들 만나는 것도 즐겁고 그쪽 일이 꽤 재미있었단다. 그래서 열심히 하다가 괜찮은 승용차를 굴릴 정도의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고. 난 자꾸 물었다. 그럼 그림은요, 그림은 안 그리냐고, 그리지 못해서 후회하진 않냐고.

- 글쎄, 끝까지 그려봤음 좋았겠단 생각은 들어요. 그렇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아요.

 
 밥을 먹고 장에서 사온 떡을 사람들과 나눠먹었다. 빵 같기도 하고, 떡 같기도 한 보리수 떡 속엔 달지도 밍밍하지도 않은 앙금이 들어있다. 난 문득 그런 앙금이 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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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1-02-1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쁘네요. 앙금. 어쩐지 입안에서 돌고 도는 느낌의 단어에요. 앙금. 앙~~그~~음 :)

Arch 2011-02-17 09:48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의 이름도 부들부들거리고 좋아요. 무우~~스탕

다락방 2011-02-1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말이죠, 아치. [곰스크로 가는 기차] 책이 생각나는, 그런 페이퍼에요. 그 책 읽어보도록 해요, 아치.
그리고 주변에 남자가 많다니. 그게 '아치 좋아하는 남자' 가 아니라 설사 '생물학적 성별이 남자'여도 나는 부럽기만한걸요. 제 주변에는 여자만 바글바글거려요. 아 진짜 이놈의 여자들은 왜이렇게 들러붙나 몰라요. ㅠㅠ

무스탕 2011-02-16 17:12   좋아요 0 | URL
카하하핫~~ 다락방님. 여자여서 죄송해요. 캬캬캬캬캬~~~~

다락방 2011-02-16 17:15   좋아요 0 | URL
아 전 무슨 일상생활이 여탕에 들어와있는 것 같아요, 무스탕님.
남자를 언제 만났는지 생각도 안나네요. ㅎㅎㅎㅎㅎ

Arch 2011-02-17 09:50   좋아요 0 | URL
정말 비유의 다락방이군요. 여탕에 와있는거 같다니! 생물학적 성별이 남자인 사람들이 안 좋아하는 여자한테 얼마나 박하게 구는지 다락방이 알아야 한다니까요.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언젠가 읽어볼거에요.

nada 2011-02-18 17:10   좋아요 0 | URL
그래두 락방님이 몸 담은 여탕은 vvip 탕 아니에요?
주위에 좋은 여자사람들 많잖아요.
쓸데없는 남자들 바글거려봤자 인생에 아무 위로 안 돼요.
걍 피곤하고 안구 오염되고 주변 공기만 탁해지죠.
어차피 필요한 건 딱 하나, 하나뿐이에요.

끝까지 해봤음 좋았겠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치님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런 건강한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야 하는데.
제 주위엔 한 번의 좌절로 인생 전체가 망가진 사람들이 몇몇 있어요.
그들 때문에 간혹 마음이 많이 아파요.
그래서 저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요.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겠어요. (불끈!)

Arch 2011-02-19 10:21   좋아요 0 | URL
역시 꽃양배추님! 전 그걸 생각하지 못했어요. 다락방, 봤죠~

그 사람을 건강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는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꿈이란게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없어도 그렇게까지 이루고 싶은게 뭔지 몰라도 괜찮을 수 있잖아요. 왠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 같지만. 물론 잠 안 오는 어떤 날엔 내겐 왜 이렇게 열정이 없을까, 이래도 정말 괜찮을까란 생각으로 괴로울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전 머리만 대도 잠을 자는 여자 사람이라 이것도 나쁘지 않아'란 생각이 대부분이에요.

2011-02-16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7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6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7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1-02-1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나는 이 글이 참 좋아요!

Arch 2011-02-17 09:52   좋아요 0 | URL
와, 나는 치니님이 참 좋아요!

L.SHIN 2011-02-16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의 이미지 밑의 소개글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이 페이퍼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서성이다가.
현실에 적응하고 만족하며 사는 삶, 올바른 생활이긴 한데...그래도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꿈툴대고 있을
그 그림에 대한 소망은..끝내 죽는 건가,싶은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쉽네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은 스스로가 정한 게 아니라, 그림이 '그 사람이기에' 들어가 앉아서 소망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아치님도, 나중에, 아주 나중에라도 글을 쓴다던가 국수장사를 한다던가의 마음 속 소리를 따라가
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멋진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웃음) ^^

Arch 2011-02-17 09:54   좋아요 0 | URL
그럼요, 그래서 근육 좀 만들어놓구요. 제가 굶주리면서 뭔가를 할 정도로 뚝심있는 사람이 아니란걸 알았어요. 그래놓고 다 못견디겠다고 발악을 해대니까 좀 웃기더라구요. 혹시 알아요, 이러다 스트릭랜드(이름이 맞나)처럼 그림 그리려고 훌쩍 떠날지.

L.SHIN 2011-02-17 19:09   좋아요 0 | URL
멋진 그림을 남겨주셔야 해요. 꼭.
 

* 보고 싶었던 만화책을 드디어 봤다. <심야식당>과 <그녀의 완벽한 하루>. <심야식당>을 읽기 전엔 우동 한 그릇의 분위기와 비슷한걸 생각했다. 분위기는 ‘우동 한 그릇’이지만 도판은 화려하고 그림체는 야무질 것 같았다. 신주쿠의 심야식당은 내 기대와 달랐지만, 설렁설렁한 그림체와 마스터의 무심한 표정이며 말투는 썩 맘에 들었다. 단연 좋았던 점은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었다. 
  음식 이야기를 할 때 <미식견문록>에서 나온 ‘할바를 찾아서’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맛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좋다. <식객>에서처럼 음식의 역사와 만드는 방법을 세세하게 그려내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주문해놓은 음식 대신 옆 테이블의 음식이 더 맛있어보여 주문을 바꿀까 말까 고민하거나 안 먹겠다고 하고선 솔솔 풍기는 라면 냄새에 ‘한 입만’을 외쳐댈 때면 할바며 근사한 ‘한 상’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나로 말하자면 연예인들이 떼로 나와  입을 ‘아’ 벌리며 먹는 요리 프로그램보다 주인공이 불어터진 라면을 먹을 때 더 식욕이 샘솟는다. <심야식당>은 그 지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영리하게 사로잡는다.
 빙 둘러앉는 다찌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스터의 요리를 기다린다. 최고의 솜씨를 가진 마스터라면 아마도 자세한 조리법을 소개하느라 짤막한 만화가 한정 없이 길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심야식당>에선 그럴 틈이 없다. 툭툭 누군가의 얘기가 나오고, 사람들의 반응이 쏟아지고, 그새를 못참고 맛있게 먹는 누군가가 먹는 것을 똑같이 주문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마을 같다. 남일 참견하며 귀찮게 하는 마을 사람 대신 그저 심야에 같이 밥 먹을 동안 편안해지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 말이다.

마를린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정리가 안 된다. 성노동자를 다루는 시선이라니, 다룬다는 뭐고, 시선은 또 뭐란 말인가

* <오노 요코>를 느릿느릿 읽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니 클라우스 휘브너는 오노 요코를 기존의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주력하다보니 그녀를 미화하는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현대 예술이며 액션, 플럭서스, 존 케이지 등의 전위 예술가들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황에서 저자가 밝힌대로 선불교에 바탕을 둔 그녀의 예술 세계 운운은 잘 와 닿지 않는다. 좀 더 읽어봐야 답을 찾을 수 있을지, 아니면 이 책과 ‘현대 예술 길라잡이’ 뭐 이런 류의 책도 같이 읽어야할까. 그런데 관객이 감상이 아닌 참여를 통해 예술 작품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건 결국 해석하기 나름 아닐까. 그렇다면 애초의 상상력은 예술가 것이지만 결과물은 관객의 것이 되는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지만 우선은 딸 교코와 사회가 요구하는 모성보다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싶은 오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 <진보집권플랜> <100인의 책 마을> <마이클 무어의 대통령 길들이기> <삼성을 생각한다> <그 골목이 말을 걸다> <선술집 풍경-이건 알라딘에서 안 판다> <슬로시티를 가다> <몰락의 에티카> <원순씨를 빌려 드립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고 있다. 아니, 빌려놓고 감상하고 있다. 책 욕심은 새 책을 보고, 만지고, 들춰보는 것에 있는건지 그 무거운걸 낑낑대며 들고 다녀도 무겁지가 않다. 어쩌면 한번쯤 얘기 들어 알고 있던 책을 짧게나마 일면식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대출기간이 정해져 있어 서재가 무너진다거나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책이 쌓이지 않는건 다행이랄까.

* 시작은 <진심의 탐닉> 김태호PD 편에서였다. 어느 부분에서 그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마이클 잭슨 이야기가 나왔다. ‘아침 햇살을 음악에 비유해 가사를 쓴 사람’이라고 했던가. 한번도 마이클 잭슨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았는데 그 구절을 보고나서야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투어 리허설을 담은 ‘This is it'을 보고나서야 그를 알았다고 말하는건 우습지만 한뼘쯤 그를 좋아하게 됐다. 마이클은 자신이 원하는걸 차분하게 얘기하고, 자신이 큐를 주지 않아 댄서들과 호흡이 맞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것이 가장 좋은건지 분명하게 알고 자신의 공연을 최고로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를 보니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콘서트의 황제라며 거들먹거리고 얄팍하게 써제끼는 연예기사, 표피적인 것에 열광하는 사람들(나를 포함해서)을 보다가 마이클 잭슨을 보니 왠지 공연 주체의 성품뿐 아니라 어떤 문화를 공유하는 팬들조차 품격이 다른 것 같단 느낌도 들었다.

* 오늘은 비가 온다. A는 벌써부터 소주 생각에 몸이 달아올라 있다. A는 알탕 맛있기로 소문난 집에 냄비를 들고 간단다. 주인 아주머니께 눈웃음을 치며 인사를 건네고 육수를 더 달라고 하겠지. 얼큰한 알탕에 소주를 먹으면 참 달 것 같다. 방금 A에게서 문자가 왔다. 알탕 포장은 안 된대 ㅡ,.ㅜ;;, 알탕 대신 배드민턴 열심히 치고 고등어구이에 소주를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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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11-02-09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제목과 태그가 [심야식당]의 한 꼭지를 따라가는군요.

알탕에 소주, 캬~ 좋죠. 근데, 그렇게 술 먹으려면 같은 냄비에 숟가락을 나눠야 하잖아요. 학교 다닐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게 아쉬워요.

Arch 2011-02-09 10:28   좋아요 0 | URL
그걸 노렸는데, 그다지 호응되진 않는 것 같아요.

저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이 국자 없을 때는 종이컵 가지고 국물 뜬다고 하면 좀 그래요. 하긴 저도 지저분한 숟가락이 냄비 속에 들어오면 좀 그렇고.

마녀고양이 2011-02-09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이유도 없이 오노 요코를 싫어했었습니다. 아마 비틀즈의 불화 원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이제 오노 요코와 레논의 사랑 이야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건, 저 뿐은 아닐거 같아요. 부럽기도 하구요. ^^

먹는 만화는, 배고파서 가능하면 안 보는데... ㅎㅎ. 글만 읽어도 배고프네요.

즐거운 한주되세요.

Arch 2011-02-09 10:29   좋아요 0 | URL
전 책을 읽기 전에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의 사진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이 여자 때문에 비틀즈가 해체됐다는 얘긴 금시초문. 정말 그랬대요?

마녀고양이님도 멋진 일 가득한 수요일 되세ㅇ^^

다락방 2011-02-09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어 구이에 소주도 좋은걸요!
이십대 초반에는 알탕을 먹으며 참 지저분한 농담을 많이 했었는데(응?) 이제는 알탕을 술안주로 먹는일이 거의 없네요.

Arch 2011-02-09 10:31   좋아요 0 | URL
영험한 산의 막걸리 먹었어요. 막걸리 먹고 취해서 시티폰으로 사진 찍은 다음에 연쇄살인하는 남자 꿈도 꿨어요. 어찌나 심장이 벌렁거리던지. 알탕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그 집에 늘 손님이 북적이고, 또 포장은 안 된대니까 괜히 의욕이 솟고 그래요.

다락방, 알탕을 안 좋아하게 된거에요, 아님 지저분한 농담이 시시해진거에요~
 

* 페이퍼의 제목은 평론집답지 않은 멋진 표지와 제목과 소제목조차 시적으로 아름다웠던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 이기호 수식어에서 따왔다. 나는 이 평론가의 글은 좋았지만 평론집에서 보여준 섬세한 필력과 날카로운 관찰력과 별개로 '진심의 탐닉'에서 인터뷰어 진 빠질 정도로 문학권력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방식은 맘에 안 들었다. 물론 누군가가 자신과 관련된 모든 쟁점이나 사안에 대해서 일일이 발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소신껏 발언을 해줬으면 하는 기대를 갖는건 무리인걸까. 하긴 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취향에 맞지 않은 발언 하나 가지고도 말들이 많은 세상이니 그 스스로 알아서 타협점을 찾은것이겠지만.

* 여성의 전화 인권강사 양성 과정 교육을 받을 때였다. 성폭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준 강사님이 강의를 여는 주제어로 성(性)을 들고 나왔다. '성'하면 무엇이 떠오르냐란 질문에 여러 가지 얘기들이 쏟아졌다. 섹스, 사랑, 은밀한 것, 성교육, 야하다 등등의 얘기가 나왔고 나도 뭔가 거들고 싶은 생각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뱉었다. 지금와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런 대답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말한 것은 '귀찮다'는 거였다.

*  원래 이 페이퍼에는 오르가즘은 계획은 커녕(아, 치니님! 저도 그 영화 정말 보고 싶어요) 내가 왜 섹스를 귀찮다고 했는지 밝히는 내용을 적으려 했다. 그런데 기존의 남성위주의 성관습을 답습한 생각과 소모적이고 편향된 시각을 객관적인 데이터는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은 채 털어놓을 것 같아 망설여진다. 그럼 지금까지 쓴 페이퍼는 뭐 안 그랬을까 싶다. 그걸 변명하자면 그래도 성차를 고정하는게 싫다고 했으니 생물학적 차이인지 관습 때문인지 모를 사안을 두고 어떤 집단을 비난하는건 아닌 것 같다 정도로 해둬야할까.

* 내가 사는 곳으로 옥찌들이 놀러 왔다. 잠시 쉬는 A가 옥찌들을 돌봐주고 있다. 옥찌와 A가 번갈아가며 전화를 해서 A가 이러네, 옥찌가 이러네 하면서 나한테 고자질을 하고 있다. 나로 말하자면 문 소리만 들려도 아이들을 바퀴벌레가 숨는 것처럼 사사삭 소리나게 하는(이모에게 꼬투리 잡힐만한건 숨겨, 놀고 있는거 대충 정리해 뭐 이런 사사삭) 여자 어른이라 고자질이 먹히는줄 아나보다. A가 차려준 점심과 저녁을 맛나게 먹고 옥찌에게 자신이 아는 여자 사람 중에 내가 제일 날씬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이렇게 살아도 좋지 않을까. 나는 한가롭게 일을 하고 A는 맛있는걸 만들고, 아이들은 쑥쑥 크기만 하면 되는 삶. 이렇게 써놓고보니 아이들이 꼭 옥수수 같다. 

* <거꾸로, 희망이다>를 읽고 있다. 어떻게 살면 좋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책에선 농촌이 답이고, 기존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한다. 하긴 책을 읽다보면 별놈의 생각이 다 든다. 트럭을 한대 사서 커피를 팔까 아니면 초밥이랑 국수를 팔까, 부침개를 잘 만들고 막걸리를 좋아하니까 막걸리집을 하면 어떨까, 시골에서 된장을 담그는건. 지금 하는 일이 나쁘진 않은데 뭔가 생산적이고 신나는 일을 하고 싶다. 문제는 한번 망하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 크게 실패해본적도 없으면서 시작도 하기 전에 이러고 앉아 있다.

* 다시 직장 동료들과의 문제로  L과 얘기를 나눴다. L이 말했다. 그 애들은 나를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잉?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화장도 안 하는 여자라니. 나도 맘 먹으면 일을 잘 한다고 항변했더니 여자는 일 잘해도 동료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수긍도 반박도 할 수 없는 소리였다. 요즘 세상에 여자라고 어쩐다는게 가당키나 하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딱히 안 그런 것도 아닌지라 잠자코 있을 수 밖에. 감정적인 소모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들이 왜 화를 내는지, 나 때문인지, 나 때문이라면 뭘 잘못했는지 신경을 쓰느라 너무 피곤하다고 했다. L은 미친년이 되거나 계속 그렇게 지내야한다고 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말고, 나도 내가 내키는대로 해버리라고. 화를 내면 같이 내고, 꼬투리를 잡아서 꼼짝도 못하게 하라고.
 사회생활을 그렇게 전략적으로 하는건 더 피곤할거라고 했더니 내 문제니 나보고 알아서 하란다. 작전을 세울 수야 없지만,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스눕>을 보니 난 분명 신경증적인 성격이던데, 그래서 이러나. 동조적인 사람들 덕분에 여태껏 별일 없이 지내온건가.

* <오노 요코>와 <말하기의 다른 방법>을 읽으며 짜릿할 정도로 좋았다. 어느 정도냐면 남들 돼지 먹을 때 옆에서 버섯이랑 눈사람 모양 떡을 구워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좋았다. 사진의 모호성에 대한 존 버거와 장 모르의 이야기는 내게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는 느낌이었다. 존 레논의 여자가 아니라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며 예술가인 오노 요코의 이야기도 결단력과 확신에 대한 부분에서 내 눈을 환하게 했다.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들의 건조한 문체와 무심함이 좋았다. 무심함이 '척'이거나 어떤 단계를 한번쯤 거쳐본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포즈라 하더라도.

 어쩌면 우리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전전긍긍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지리멸렬 라이프와는 다른 어떤 삶을 동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올드독의 TV살롱 중)

* 지금 이곳엔 나와 사무실 왕따 아저씨가 있다. 나는 콜드플레이와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을 켜놓고 페이퍼를 쓴다. 사무실 왕따 아저씨는 한숨 주무시고 일어나더니 나보고 왜 안 자고 있냐고 큰소리를 친다. 그건 나를 생각해주는게 아니라고 나 역시 큰소리로 대꾸를 했다. 아저씨는 자신이 나를 생각하는 맘이 엄마와 같다며 수그러든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은행에서 가져왔다며 쭈굴쭈굴한 알사탕을 내 자리에 놓고 가는 아저씨. 분명 저 아저씨도 어딘가에선 존경받는 사람일텐데. 아이스 커피의 얼음이 다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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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1-31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을 다 알겠어요, 아니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에요.

저는 어떤 단계를 거쳐본 적이 있는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심함이 쫌 부러워요.^^
그런 의미에서 사무실의 왕따 아저씨야말로 진짜 달인이 아닐까여?ㅋ~.

Arch 2011-01-31 14:13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이랑 전 비슷한 책을 읽나봐요. 전 나무꾼님 서재에서 본 책들이 낯설었는데, 일테면 밴다이어 그램의 무슨 모양이 생각나는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요. 합집합도 아니고 여집합도 아닌데...

왕따 아저씨는 무심하지 않아요, 오만간데 다 참견하고, 논평하고 그래요.

무해한모리군 2011-01-31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내가 좋아하는 책들 제목이 잔뜩 나오네요 ㅎㅎㅎ 오노요코를 읽어봐야겠어요.
저는 사회생활에 모든 국면에 각을 세우다가는 제가 칼이 될것같아서 걍 동그랗게 사는거 같은데 정말 백번에 한번만 날리는데도 무서워들해요.. 무심의 경지는 참으로 높아요.. --

Arch 2011-01-31 14:16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도? <거꾸로, 희망이다>가 좋았던거 아니에요? <오노요코>는 아직 많이 읽지 않았지만, 그래서 이 전기 작가가 가감없이 얼마나 서술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더라구요. 나중에 딴소리 할지도 모르겠지만.
은근히 포스가 풍기는데요.

마녀고양이 2011-01-3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 아, 아. - 할말이 너무 많기도 하고 할말이 너무 없기도 해서....

아치님, 좋은 연휴 보내세요. 참 좋은 페이퍼네요. 생각을 마니마니 하게 만드는. ^^

Arch 2011-01-31 14:18   좋아요 0 | URL
제가 잡생각이 많아서 그럴거에요. 마녀님도 좋은 연휴 보내세요. 칭찬은 꿀꺽 삼킬게요. 히~

치니 2011-01-31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촌이 답이라고, 이런저런 책을 읽다보면 저도 그렇게 결론이 나오기는 하는데, 아우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생활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답이란다고 농촌생활을 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들어요. 훔, 앞으로 한 5년간 최대 고민거리 중 하나가 될 듯.
(그치만 궁금하다고요 ~ 왜 성은 귀찮다, 가 되었는지. 헤 -)

Arch 2011-01-31 16:04   좋아요 0 | URL
도시에서 산다고 사람들이랑 교류가 활발하거나 문화생활을 많이 누리는 것도 아니거든요. 저는 좀 불편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구요. 그런데 왠지 농촌에 살면 데이트도 못할 것 같고(인기 많은 것도 아닌 주제에)얼굴에 잡티가 많이 생길 것 같은 생각도 들고 그래요. 뭘 해먹고 살아야할지도 모르겠고.

그건... 좀 더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를 해봐야할 것 같아요. 저만 그런걸 수도 있으니까.

다락방 2011-01-31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나 진짜 완전 옥수수 보고 생각나는 글귀가 있는데 그 책이 지금 나한테 없어요. 여기는 회사고 나는 야근중이니깐요. (읭?)
내가 집에 가면 그 부분 댓글로 올려줄게요.
옥수수와 섹스에 관한거에요. 기대되죠, 기대되죠?

Arch 2011-02-07 10:10   좋아요 0 | URL
내가 옥수수 얘기를 했던가 싶었는데, 다락방 페이퍼 보니까 아항, 그렇구나 싶어져요.

무려 일주일만의 댓댓글이네^^

2011-02-01 0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7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을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하지만 나는 여행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지를 돌아다니는 탐험가의 용기도 없고, 남들에게 자랑할 만큼 그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서 알차게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부지런함도 없다. ...... 다닌 곳의 면면을 꼼꼼히 적고 분류해서 기록에 남기는 철저함도 없다.

 내가 하는 여행은 게으른 자의 어슬렁거림에 가깝다.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그러나 체계적인 계획과는 거리가 멀고 달랑 방랑벽 하나만 있는 게으른 자의 여행 말이다. ......일주일, 보름, 혹은 한 달, 길게는 석 달 동안 한 곳에 짐을 부려 놓고 마치 그곳에서 계속 살 것처럼 뭉개다가 심심하면 주위를 둘러보는 그런 식이다. 떠나기 전에 여행기를 읽거나 여행 정보를 찾아 인터넷을 뒤지는 일도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그건 순전히 게으름의 결과인 듯 싶지만 마음 고쳐먹고 부지런 떨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런 게으른 자의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는 근사한 건물과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친절하고도 멋진 사람들, 일정 없이 슬렁슬렁 다니다가 들어간 예쁜 까페,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 긴장감과 호기심...... 그건 나처럼 여행하는 사람들이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즐거움이다. 물론 놓치는 것도 많다. 기껏 돈 들여 다녀왔는데 정말 중요한 것을 지나쳤다든가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하도 많이 읽거나 보아서 이미 익숙해진 눈으로 해당 장소에 가서 남들의 감상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일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별로 재미없다. 산에 올라가도 정상을 정복한 일이 한번도 없고 길 찾기에는 젬병이어서 간혹 자기 집도 못 찾아 헤매는 믿을 수 없는 방향치인 내가 여행기를 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중략)...... 

  베를린, 젊은예술가들의 천국 서문 중 

  내 맘을 쏙 빼닮은 여행'관'을 만났다. 누군가의 여행책을 볼 때마다 왜 나는 이렇게 바지런하지 못하지, 왜 나는 이렇게 열정이 없지하며 한탄을 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이 도시를 어슬렁거리는건 '돈 많이 드는 여행'을 하기보다 두 다리면 되는 동네 여행이 더 적성에 맞아서라고 굳게 믿었다. 물론 지금은 새벽부터 노려온 아침잠 없는 부지런한 잡범이 자전거를 훔쳐가 그나마 해오던 어슬렁질도 못하고 있지만. 생각해보니 여행 노래를 부르면서도 막상 떠나지 못한건 귀찮음 때문이었다. 훌쩍 떠나기엔 배시간을 맞추고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짜는게 번거로웠다. 그래도 여행을 꿈꾼다. 특히 말보다 제스처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시칠리아로 떠나는 꿈을. 

 시칠리아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상상해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러스 그리고 유쾌하고 친절한 사내들, 거대한 유적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들, 파랗고 잔잔한 지중해와 그것을 굽어보는 언덕 위의 올리브나무, 싸고 신선한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 검은 머리의 처녀들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 예전에 나는 로마와 피렌체, 베니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 장사치들, 약삭빠른 도시인들과 척박한 삶, 테마파크를 닮은 번드르르한 대리적 건물들만 보았던 것이다. 내가 꿈구던 이탈리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저 영화나 관광엽서, 여행사의 팸플릿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니, 그것들은 모두 시칠리아에 있었다.

<김영하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중>

 시칠리아는 먼 꿈 같아 맘 먹으면 차표 하나로 다다를 수 있는 곳도 생각해놨다. 청산도, 유치, 증도, 창평... 슬로시티란 타이틀로 어느 지명의 성격을 고정시킨 것 같지만 사진으로나마 접한 청산도 청보리 밭은 참 아름다웠다. 지도를 검색하고 차편을 알아보면서 가벼운 차림으로 청산도의 곳곳을 돌아다니는 상상을 했다. 이 책의 이 구절을 만나기 전까지는

 노인과 나란히 들판을 걷는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고 달아난다. 노인은 호미가 든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있다.
"근디, 왜 혼자 댕겨? 일행을 놓쳤어?'
노인이 묻는다. 혼자 왔다고 하자,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을 텐디, 왜 혼자 다니냐며 나무란다.
"같이 다녀. 어차피 난중에 혼자 될 텐디......"


 여행을 떠나고 싶은건 혼자 있는 시간,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아침에 혼자 눈을 뜨며 내 몸과 느낌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서였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누군가의 찬사가 섞인 장소를 내 나름대로 느끼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로 여행을 가려고한 것 같진 않다. 그런데 할머니 말씀을 들어보니 (내가 귀가 한참이나 얇아서겠지만) 혼자 되고 싶은 막연한 동경을 재고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 좋았던건 우루루 몰려다니며 소란했던 여행객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날이 따뜻해지면 같이 또는 혼자 여행 다녀야지. 낯선 사람들에게 괜히 말을 걸어보고, 꼬마들에게 인사를 건네야지. 동네 개들에게 멍멍 짖는 장난을 치고 봄이 피어나는 소리를 온몸으로 느껴야지. 선술집에서 대접에 따른 막걸리를 쭉 들이켜야지. 그렇게 여행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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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1-2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네요......... 아아, 떠나고 싶어요.

요즘 너무 추워서, 정말 코 끝도 집 밖에 내놓기 싫은, 그런 날들에..
어쩐지 해맑은 햇님을 찾아 정처없이 떠나고픈, 최소한의 계획만 세우고 나머지는 인연에 맡기는 그런.
동네 빙빙 돌기........ 하고 싶어요, 아치님. 그런데 너어어무 추워요~

감기 조심하세요!

Arch 2011-01-29 09:24   좋아요 0 | URL
날이 좀 따뜻해지면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계획없이 훌쩍 떠나 발길 닳는대로 걷고 말이죠~ 마녀고양이님도 감기 조심해요!

치니 2011-01-2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겨울엔 유독 따뜻한 봄을 만날 기다리게 되네요.
따로 또 같이, 여행할 아치님의 봄날도 덩달아 기다립니다. :)

Arch 2011-01-29 09:2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너무 추워요. 봄은 소리 소문없이 왔다 갈 것 같지만 그래도 봄이 기다려져요.
봄날의 치니님에겐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해요.

섬사이 2011-01-28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못 마시는 술을 마시고 동네 개 앞에 마주 앉아
같이 '멍멍멍!' 짖으며 대화한 추억이~~ ^^
요즘은 혼자 영화보러 다니는 재미에 맛들이고 있는 중이에요.

Arch 2011-01-29 09:35   좋아요 0 | URL
'멍멍'은 대화라고 우기지만 자족적인 혼잣말 같아요. 가끔 개가 짖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를 쳐다볼 때는 그런 느낌이 더 들고 말이죠.
취해서 멍멍이라니, 섬사이님 귀여우셨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