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벨 위페르에 대해 김혜리가 쓴 글을 봤다. 그녀의 얼굴 클로즈업만으로도 인물이 이해된다거나 자신이 맡은 역을 동정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는 이자벨 위페르의 얘기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식으로든 설명할 수 없는 경지를 상상하게 한다. 고현정의 맑은 얼굴빛을 볼 때면 ‘어떤 포즈’의 불편함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그게 어디가 그리 불편한지는 잘 모르겠는 답답함도 한몫. 나로선 영혼이나 기운 대신 ‘연기하는 방법’이라든가 뭔가에 대해 알려주는게 더 이해하기 쉽다. 이해하기 쉬운 방식은 종종 상투적이고 평이한 영화를 만들 위험을 안고 있다. 그 중간은 없을까.

 안티 크라이스트의 첫 장을 보며 토막 난 대화 대신 라스 폰 트리에가 보여주는 영상, 영화에 푹 빠져들었다.
 풀밭에 누워 숲에 녹아들어가라고 상상해보라는 주문에 따라 여자의 몸이 녹색으로 바뀌는 장면, 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첫 장면의 섬짓한 아름다움. 이동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창밖의 녹색컷. 남자가 보는 환상까지. 대사와 줄거리 위주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시선은 탐욕스럽다.

 정신병은 각각의 문화가 지닌 문제현상과 치료법을 갖고 있다. 안티크라이스트의 등장인물은 아이를 잃은걸 자책하며 정신분석을 진행한다. 서양식 방법이다. 그런 방식이 무의미하다기보다는 무의식 속의 정신을 분석하고 최면을 유도하는게 왠지 얄팍하게 느껴진다. 확고함,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자신만만함은 때때로 ‘그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방해하고 분석하는건 아닐까. 
 화가 나는 이유를 자신에게 묻고, 성찰할 수 있는 것은 득보다 ‘실’이 더 많지 않을까. 의사소통을 위해 노력을 해도 늘 불통이 되는건 분석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타협을 할 줄 몰라서는 아닐까.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다 본의 아니게 턴하고 돌아오는 사람의 흐름을 끊었다. 멈추면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물 밖으로 나온 사람이 대뜸 ‘이건 뭐야’ 한다. 뻘쭘하게 있는데 옆에 있던 a가 출동, ‘이건 뭐야’에게 가서 수영하는걸 제지하고 따지려 든다. ‘이건 뭐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수영만 한다. 보다 못해 a에게 그만두라고, 어쩌겠냐고 했더니, a는 잔뜩 화가 나서 뛰쳐나갔다. 남고생도 아닌데 말이다.

 생활의 서사에서 영혼을 마주하기는 힘들다. 이자벨 위페르의 위대함, 독창성은 영화 속 스크린만을 주의 깊게 들여봐야만 하는 종류의 것이다. 무명배우의 연기였다면 어땠을까. 아우라 없는 배우가 기운이나 독특한 감각을 표현하는 연기를 한다면 어떨까. 이자벨 위페르의 A와 Z를 포함한 연기를 접해보진 못했지만 이자벨 위페르인줄 모르고 봤다면? 이런 생각들이 어디서부터 시작한 줄 몰랐는데 구조주의 입문서를 보니 좀 알 것 같다. 위대한 영화의 위대한 배우, ‘와’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정말 위대할까, 위대하다는 기준은 어디서 나온걸까. 그쪽 업계 사람의 입을 통한 말들의 홍수는 어떻게 봐야할까 등등. 

 취향은 이렇게 탄생하는걸까. 나는 줄곧 취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자신감도 없었다. 남들이 내 취향을 촌스럽다고 할까봐 미리 내 취향을 촌스럽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이 없었던거다.

 일을 하면서 책을 읽는데 돌이켜보니 무슨 글을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는데 역시 문맥이며 말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문장은 번역투다.

 오늘 간식으로 라면을 같이 먹은 l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며칠만에 보니 밉상이네’라고 말한 즉시 자신은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했다. 그 순간, 살짝 흔들린 l의 눈동자를 보고 말았다. 두루뭉술한 어느 누군가가 아니라 l이 느껴졌다. 어쩌면 영화적인 순간은 말의 홍수가 아니라 관찰력과 무의식적인 어긋남에서 나오는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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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11-11-17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요.
배우의 아우라는 배우의 삶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고현정이 무척 영악하고 영특하게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연기에서 아우라를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아마 고현정의 삶이 저에겐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해서인 것 같아요.
(남자로 치면 설경구가 비슷한 느낌.)
극중 인물에게 완전히 몰입하고, 그 인물이 된다는 것.
메소드 연기라고 하던가요?
저는 그런 연기가 별로예요.
어차피 모든 연기에서 배우가 보이는걸요.
실제로도 괜찮은 사람일 것 같은 배우의 연기가 좋더라고요, 저는.


갱스부르를 무척 좋아하지만, 안티 크라이스트는 영원히 못 볼 것 같아요.ㅠㅠㅠ
용감한 여자사람, 아치님.

Arch 2011-11-17 17:46   좋아요 0 | URL
꽃양배추님이 뭔가 멋진 말을 해줄줄 알았어요.
배우의 삶... 그들의 삶을 알 수는 없고 내가 알아가면서 영화를 볼 정도로 부지런 떠는 사람은 아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아요. 빙의되거나 연기법을 배워서 하는 연기랑 진짜 그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연기랑은 다르니까요. 그런데 나는 아직 어떤 배우의 삶이 날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어요. 언제쯤 꽃양배추님처럼 알 수 있을까요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응시, 3초간 유지)
안티 크라이스트는 샬롯 갱스부르 때문에 보는 건데... 잘 몰라서 보는거지 용감해선 아니에요. 1장만 우선 봤는데, 와, 정말 좋았어요. 이런게 영화구나 싶고.

완득이 말예요. 틈 없이 잘 만들어진 그 느낌 때문에 글쎄란 생각이 들었어요. 예능 프로 같은 빈틈없는 편집에 탄탄한 만듦새가 영화 같지 않달까. 그래서 안티 크라이스트가 좋았어요.

치니 2011-11-1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양배추 님, 갱스부르를 좋아한다면 안티 크라이스트 봐도 돼요. 보다 보면 눈 감아야 할 순간이 언제인지 감이 오거든요. 그때만 딱 감으면 돼요. (이히, 나는 이미 봤다고 막 이래)

아치 님,
아치 님은 참으로 섬세하구나, 읽으면서 그런 생각했어요. 똑같은 걸 보고도 저는 전혀 느끼지 못한 걸 느끼시고, 똑같은 상황을 당해도 저는 생각지도 못한 걸 생각하시는구나, 그런.
아무튼 수영장의 '이게 뭐야' - 나쁜 넘.

Arch 2011-11-17 18:00   좋아요 0 | URL
치니님, 저는 이제 막 1장을 본 안티 크라이스트 새내기예요. 대체 언제 눈을 감아야 하나요. 꽃양배추님이 저래 겁내시고 치니님도 뉘앙스를 풍기시니 오후, 난 정말 무식해서 용감한거였어요.

생각이 그런건 알바보다 못한 직장 생활 때문이에요. 온갖 잡생각이 여봐란 듯 덤비거든요. 아마 생활이 복잡해지면 이런 생각들 못하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수영장의 이게 뭐야는 나쁜 ‘년’이랍니다.

치니 2011-11-18 10:59   좋아요 0 | URL
우잇, 년이었군요! 흥.

으음, 스포가 될까 싶어 자세히는 말 못하고요, 아무튼 보다 보면 어디서 눈 감을지는 직감적으로 알 수 밖에 없어요. 아흑.

Arch 2011-11-20 19:38   좋아요 0 | URL
알겠어요, 불끈!

고마워요, 치니님.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를 읽는데 한자 공부하려면 이이화의 한문 공부를 보면 좋다는거다. 고전강의를 다 읽지도 못하고 의욕이 넘쳐 한문책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래, 이두랑 향찰이 있었어. 이렇게 글씨가 변하고 이렇게 읽는구나. 열심히 들여다보고 연습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뭘 알아야 말이지. 결국 1장도 못 넘기고 지지부진. 그럼 혹시 한자의 기초적인걸 알려주는 책은 없을까 싶어 찾아봤는데 만화로 나온 이이화 선생님의 책이 있다. 오호, 내가 아는 글자다. 500자만 익혀도 다른 한자를 읽을 수 있단다. 열심히 해봐야지.

 그랬구나. 중학교 때 한문 선생님을 좋아해서 잠깐 한문 공부한거 말고는 관심도 안 보이더니 갑자기 500자 외운다고 설레발 치는구나. 스페인어 책 사놓고 2년이 지났는데 영어 익힌 다음에 공부한다고 첫 장도 들춰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한자 공부하는구나. 그랬구나.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체르노빌의 목소리로 변경함) 

 빵가게 재습격님이 도가니를 소설이 아니라 르포나 논픽션으로 썼으면 어땠을까란 얘기를 하면서 ‘언더그라운드’와 ‘체르노빌의 아이들’이란 책을 언급하셨다. 마치 오늘 그 책을 내 손에 넣지 않으면, 당장 읽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서둘러 검색을 하고 클릭 몇 번으로 구입해서 읽기 시작한 두 권의 책. 옴진리교의 사린 사건 피해자를 만난 하루키의 인터뷰집과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극화한 르포 소설이다. 언더그라운드는 반절 정도 읽다 정체됐고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소설이 안 읽히는 가을이라며 한쪽씩 근근히 읽고 있다. 


 그랬구나. 누가 읽어보라고, 누구 추천이라고, 이 책은 교양인들이 꼭 읽어야 한다고, 선정 도서라고 하면 사정없이 읽으려드는구나. 지적 허영심도 아니고 내가 왜 그러는지 나도 알 수가 없구나. 그랬구나. 책으로 공부하고 싶다면서 밑줄만 그었지, 체계를 잡아 정리하고 요약하고 내 나름의 생각을 글로 쓰는건 안 하는구나. 맨날 예능만 보고 바보처럼 웃는구나. 그랬구나.




  

 

 

 

 

 성 감수성 훈련이란게 있다. 예컨대 여자인 내가 남자처럼 섹스를 해보는거다. 발기된 상태로 결합이 풀리지 않게 유지하며 키스와 애무를 곁들이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기. 섹스에 대한 여러 담론이 있겠지만 기존의 어떤 틀 같은게 있다면 섹스를 하는 모든 여남, 인간, 생명체?는 힘들겠구나. 그런데 난 왜 굳이 여러 가지 많은 것들 가운데서 이런 얘기를 하는걸까.

 푸코에 의하면 나는 <왜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다’라고 말하기 위해 ‘그 정도의 정열’을 대가 없이 쏟는 것일까.> <성을 말하는 담론들을 근대를 관통하는 ‘지에 대한 의지’, 즉 온갖 인간적 군상을 ‘일람’할 수 있는 목록으로 정리하려는 터무니없는 야심의 흐름 속에 놓았다.> <제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우리의 ‘의심’까지도 ‘제도적인 지’로 의심받는 그 제도에 속한다.>는 건데 구조주의는 여전히 어렵지만 내가 왜 그런지에 대한 단초 같은걸 얻었다.

 그랬구나. 일상적 성적 실천은 마초적이면서 입으로만 진보적인 성담론 얘기를 했구나. 그랬구나. 단초만 얻었지 정확히 뭔 얘긴지는 아직 모르는구나.

뒤늦게 안 사실, 빵가게재습격님의 추천 책은 <체르노빌의 목소리>.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읽으며 이건 왜 인터뷰집이 아니라 소설일까, 르포 소설이래도 소설 같은데 이러면서 봤는데... 그랬구나 무슨 책을 추천했는지도 모르고 막 의욕부렸구나. 그랬구나. 쥐구멍은 몸뚱이가 커서 못들어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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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11-10-1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랬구나" 요거 유행어예요?
치니님에 이어, 아치님도 열공 중이군요.
저도 올 가을부터 시작하고픈 공부 아이템이 있는데,
또 "그랬구나~"가 돼버릴지 모르니까, 입 다물고 있어야겠어요.
일단 시작부터 하고.^^

성 감수성 훈련, 처음 들어봐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도 스밀라가 남자처럼 섹스하는 기묘한 장면이 나왔던 거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Arch 2011-10-18 20:54   좋아요 0 | URL
무한도전 무도상사편에서 '그랬구나'편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저는 그저 설레발 공부죠. 정말 그랬구나 될 수 있는데 전 이렇게 터무니없이 각오하고 다짐하고 맹세하고 이래요. 꽃양배추님은 공부를 야무지게 잘 할 것 같아요.

저도 베티 도슨 때문에 알았어요. 김연수가 추천해서 저도 그 책 봤는데 잘 안 읽혔어요. 꽃양배추님이 다시 말씀하시니 읽어볼까 싶지만 과연, 읽을까 싶어요. 감이 부족해선지 소설의 은유와 공간을 상상하기 힘들더라구요.

치니 2011-10-18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명수형처럼 독하게, 안 된 거 같은데요.

근데염, 아치님, 제가 말한 그 독서 토론 세미나에서 12월 책으로 하필(!!!) 라캉 책을 선정한다대요 ~ ㅎㅎㅎ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70071
이 책을 선택한 좌장 말로는, 라캉 책으로는 이 책이 입문서로 최고래요. 쉽고 재미있고.
(아치 님이 자꾸 책 들인다고 마구 괴로워하는데도, 나는 또 책 소개하는구나, 그랬구나....ㅋㅋㅋ)

Arch 2011-10-18 20:58   좋아요 0 | URL
그랬구나, 박명수처럼 하려면 우선 사람이 독해야는데 제가 좀 애매하게 생겨먹었어요.

그 책, 꼭 읽어봐야겠어요. 영화인문학도 보려고 찜해놨어요. 라캉은 저기 위에 있는 책에서 인용한거고 전 라캉을 잘 모르겠어요.

근데염, 치니님. 저 안 괴로워요. 정말 괴로우면 이런 페이퍼 못쓰죠. 오늘 막 책을 보고 뭘 읽나 이러면서 이놈의 바람은 언제 그치나 이러면서도 살짝 즐거웠어요. 이런 의욕 같은거라도 있어야지 싶어서.

비로그인 2011-10-1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구나... 이 말은 저의 독서기에도 아주 많이 써먹힐 말 같은데요? ㅎㅎ
책은 왕창 쌓아놓고 수박 겉핥기 신공을 펼치는구나. 그랬구나. 절반도 안 읽고 반납해버리는구나. 그랬구나.
그래도 아치님은 그 의지만큼은 대단하신 것 같아요. 추천 받으면 당장 사서 읽는 그 의지!
그게 끝까지 이어나가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겠지만요 ㅠ ㅠ

Arch 2011-10-18 21:03   좋아요 0 | URL
그랬구나, 말없는 수다쟁이님은 나랑 닮았구나.^^

막 다짐하거든요. 다 읽고 반납하자, 반납연기하자, 연체하더라도 다 읽자. 그런데도 한번에 수십권을 빌리고 산 책은 언젠가 읽을거라며 무한정 방치하고.
수다쟁이님! 제 의지, 너무 몹쓸 의지 아닌가요. 힝~ ㅜ,.ㅜ 책을 많이 읽어야 좋은게 아닌걸 아는데 이러는걸 보면 채워지지 않는 뭔가를 자꾸 책에다 쏟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좀 채워지면 좋으련만^^

2011-10-18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8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20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언젠가 강준만은 ‘여름 휴가 때 읽고 싶은 책’ 같은 기획이 좀 웃기다고 했다.(강준만이 웃기다고 하진 않았을테고 그 비슷한 뉘앙스였겠지만)굳이 평소에도 안 읽는 책을 휴가 때 챙겨가서 읽을 수 있냐는 것이다. 절반 정도 공감한다. 진득한 책을 읽기에 휴가는 너무 짧고 책 바깥의 유혹은 노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휴 첫날(묵은내가 나는 페이퍼) 옥찌들과 영화를 보고 곧바로 향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지금 있는 곳에선 비치할 의향이 없어 보이는 책을 읽으러. 그래서 뭔가를 읽기는 했다.  



   

  

 

  

 

 

 
 
 박상미가 옮긴 책은 놀랍게도 대부분 괜찮다(저자가 아니라 번역가의 책이 괜찮은건 우연이다. 번역하고 싶은 책을 기획한건지도.) 그녀가 쓴 <뉴요커>나 <취향>은 좋지만 그렇다고 아주 좋지 않다고 봤을 때 <사토리얼리스트>나 줌파 라히리, 예술에 관한 번역 책은 썩 괜찮았다. 번역을 잘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가 번역하는 책만 골라 봐도 재미있는 것이다. 그 중 <빈방의 빛>은 호퍼의 그림을 시적으로 해석했다는 마크 스트랜드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나는 아직 애기라 (요새 a랑 ‘아치 아직 애기라 배 나와있는거지’, 등등의 애기 놀이를 하고 있다. 남 부끄러워라. 연애할 때 여성의 애칭을 아이나 동물에 비유하는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없는건 아니지만 재미있는걸 어떡해.) 그림을 보는 눈이나 감성이 부족하다.

 예컨대 김혜리 기자의 말처럼 내가 감독은 아니지만 감상하는 입장에서도 기적 같은 일(나만의 감식안을 갖고 뭔가를 발견하거나 내 시각이 살아있는 것)은 더디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서 나보다 좀 더 잘 보고 잘 읽고 잘 쓰는 사람의 글을 보는 건 즐겁다. 마크 스트랜드가 바로 그 사람인지는 두고봐야겠지만.

 더 나은 화질이 범용한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좋은 영화의 위대한 모멘트 위에 덮인 더께를 걷어낼 수는 있다. 대만에서 디지털 복원한 허우샤오시엔의 <연연풍진>을 보러 갔다. 자, 그래서 기술은 우리에게 무엇을 돌려주었는가. 첫 장면의 기차가 터널로 들어갈 때 객차 안에 수묵처럼 번지는 어둠, 그것이 걷혔을 때 드러난 소녀의 얼굴에 눈물이 만들어놓은 얼룩, 소년 소녀들의 몸무게를 실은 구름다리의 미세한 출렁임. 때로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이 전부다. 거장들의 영화를 볼 때 종종 나는 혼란에 빠진다. 저런 이미지는 우연만이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옳은 방향을 알고 있다면 기적조차 그 감독을 돕는 것일까. 아마 기적은 모두에게 공평히 만연돼 있으나 그것을 볼 수 있는 밝은 눈과 찍을 수 있는 유연한 손, 찍힌 것 중 중요한 것과 불요한 것을 가려내는 지성은 선택된 자만의 몫이리라. - 씨네21 중에서

 김혜리 기자가 글을 잘 쓰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인터뷰집에서 느꼈던 어떤 갈증 같은게 그녀의 일기에선 보이지 않는 점이, 이렇게 어느 순간 마법처럼 그녀에게 반하는 구절을 만나는게 좋다.

  

 

 

 골목의 글을 읽고 싶은데 황인숙의 책은 자리에 없었다. 그러다 연휴 끝나고 서재를 돌아다니다 빔 밴더스의 사진집에서 추천 마법사가 소개한 이 책을 발견했다. 정말 이 골목을! 여기엔 또 어떤 골목들이 있을까. 그리고보니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의 사진을 김기찬씨가 찍었다. 오, (비틀즈 코드에서처럼 오, 춥다)

 
 홍대의 골목 이야기는 지금 읽고 있다. 이태원 주민일기에서 모자랐던 점을 보완한 기획도 아닐텐데 건축가며 음악하는 사람들이 털어놓는 홍대 이야기는 홍대가 아닌 '홍대 앞'의 공간을 차고 넘치는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결국 재미있고 잘 쓴 글이란 애정을 느끼는 대상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데에서 시작하는게 아닐까.

 너무 좋아서 넘침을 표현했다가는 과잉의 맛만 볼 수 있고 의무적으로 짓는 글은 읽는 사람도 재미없다. 이건 글의 맛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진작 알아채고 있었겠지. 역시 뒷북?


http://10.asiae.co.kr/Articles/new_view.htm?sec=news3&a_id=2011071304103072701

 혹시 이 기사를 본 사람이 있을까. 10아시아 김희주 기자의 글맛도 글맛이지만 정재형이란 사람을 새침하고 사랑스럽게 보여주는 행간의 느낌은 여간 간지러운게 아니다. 내처 그 유명하다는 유희열의 라천 정재형편까지 듣는데, 아 나는 라디오를 건성으로 들으며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프로그램은 전파를 공공의 목적으로 쓴다기보다는(말로만 그런다는거 다 안다만) 오로지 정재형을 위한 정재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방송이었다. 그것도 무척 이기적인 방식으로. 쿵짝을 맞추는 유희열이며 새침한 재형씨가 어쩜 그렇게 재미있던지. 적극 추천!

 이 기세를 몰아 정재형이 유영석이랑 피아노 배틀을 연-자신들도 쑥쓰러운 듯 자꾸 웃으며 대결한다고 막막 그러는-유투브 영상을 봤다. 거기서 소개된 정재형의 책. 김치 소포 얘기로 설렁설렁 이어지는 책에서 정재형의 어떤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다시 읽을 기회를 만들어야할 것 같다.





 연휴는 짧았고, 세 자매끼리 부침개를 부치는건 정다...ㅂ기보다 난장판-금지어를 만들고 농땡이 피우는 사람에게 벌금을 매기고 그랬다- 반가움과 시샘과 기깔난 우월감 같은게 뒤죽박죽 섞이는 느낌이었다. 모처럼 보는 친척들 목소리는 너무 컸고 나는 며느리도 아닌데 괜히 좀이 쑤셨다. 그러게, 연휴 때 무슨 책이란 말인가.

 연휴가 끝나고 내 책을 반납해준 옥찌는 이 한마디를 남겼다.

 “이모 내가 그 책 갖다주느라 힘들어 죽는줄 알았어.” 


옥찌들 페이퍼를 일년도 넘게 못썼지만, 나는 옥찌들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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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3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3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1-09-2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애긴가봐요. 배가... ( '')

Arch 2011-09-23 11:48   좋아요 0 | URL
많이 먹거나 살이 쪄서 그런게 아니에요.

애기라서 그런거에요
 

 *  비 콘서트에 다녀왔다. BEST SHOW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놀만하면 쉬어버리고, 노래 좀 들을라치면 중고음이 귀를 찌르듯 들려와서 그만 시큰둥해지고 말았다. 쉬러 온거면 집에 가서 쉬라는 말에 좀 겸연쩍어, 놀러 온거면 신나게 놀아야한다길래 무거운 엉덩이 들썩이며 놀라고 했더만 쳇. 과감하거나 섹시하지 않은, 뭔가 좀 우람한 비는 자꾸 운명이니 군대 얘기를 하며 맥을 톡톡 끊어먹었다. 김어준이 그랬던가. 누군가 기특하다고 봐주는데 그치면 좋은데 자기 자신이 너무 기특해 죽겠어하는 비는 별로라고. 나 역시 그랬다. 김어준의 말이 아니었어도 지루했다. 까진 연예인이 아니라 밤마다 도덕책을 머리맡에 두고 암송하는 것처럼 멘트는 식상했고 쇼는 딱 고만고만했다. 정지훈이란 사람은 귀엽고 자잘한 매력이 있었지만 내가 혹할만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관습적이랄까, 안전하달까. 어디 갔다왔네 정도로 그칠거면 비 콘서트가 아니어도 좋았으련만. 멋진 댄서들의 쇼 정도로, 우퍼 소리가 온 몸을 휘감는 사운드를 느끼고 싶어서 한 선택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드럼의 킥과 스네어 소리를 들으니 락페스티벌에 가보고 싶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자극적이고 발랑 까진 콘서트.

 * 파티랑 마리랑 운목이
'연예인도 하는데'까지는 아니어도 효진씨가 한대니까 나도 해보고 싶었다. 여러번 실패했지만 이번엔 식물들의 특성대로 잘 길러보고 싶었다. 로즈마리랑 스파티 필름은 물을 듬뿍 주고 각각 창가와 화장대 밑의 자리를 주니 내 배가 부를 정도로 쑥쑥 자란다. 운목이는 '쑥쑥과'는 아니지만 시들지 않고 꾸준해서 좋다. 나와 화초를 같이 기르는 a가 얼마 전에 칼라 아이비를 데리고 왔다. 포스트잇을 붙인 a의 맘이 참 예뻐서 이렇게 화초 주고받으며 오랫동안 같이 살면 좋겠단 생각을 했던가 말았던가.
  몇시간 전까지 그만 보네, 질렸네 대판 싸우고 나서 이런 페이퍼를 쓰는건 낯간지럽지만 한번 칼라 아이비를 보여주고 싶었다. (혹시 칼라 아이비 키우는 분 있나요. 얘는 좀 시름시름해요. 물은 조금만 주고 반그늘에서 키우는데.)

*  며칠 전까지 소셜 커머스에 빠져서 한동안 게스 파우치 타령을 해댔다.-파우치의 적정 가격과 한눈에 숑 갈 정도로 예쁜 그 파우치만의 가치(가치라기보다는 세일과 언젠가 한번쯤 나도 비싼 물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사람들이 공주풍이란 얘기를 해서 흥미 반감- 파우치뿐만 아니다. 하루에 두번씩이나 까페를 드나들고, 비싼 커피를 먹으면서 맛이 없다고 남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뿐인가. 비싼 요리집에 가서 이것저것 먹고 싶다며 시켜놓고 배부르다고 남겨버리고. 어디 놀러가선 이왕 노는거 잘 쓰면서 놀자며 정말 돈을 잘 써버린다. '예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할 짓들을 하고 있다.

 예전의 나라면 가끔씩 특별한 날에만 돈쓰기 한풀이를 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과감할 수가 있을까 싶다. 매달 통장에 월급이 찍히고, 이 월급을 위해서 이것저것을 감수하고까지는 이해된다지만 그게 막 쓸 수 있는 이유가 될까. 이토록 욕망이 생생해서 가끔씩 깜짝 깜짝 놀란다. 이 많은걸 가져서 뭐하게, 다 쓰지도 못할거잖아. 이걸 만들려면 환경이 파괴되고 어쩌고. 그런데 참, 얼마 전에 허지웅의 방처럼 꾸미고 싶어서 안달나는 심보는 또 뭐람. 돈이 없어서 소박한 사람이었지, 나는 원래 온갖 욕망의 아치 덩어리였을까. 남들 사는대로 한번 해보고 싶은걸까. 남들 사는게 어떤건데. 어떡해. 나 바람 났나봐. 


     

* a랑 디자인 체험하는 곳에 다녀왔다. 전시품이며 구동해보는 체험활동이 조악해 관람하는 대신 우리는 가방이랑 퍼즐을 만들었다. a는 도안을 잡고 한참 고민하더니 곰돌이를 안고 있는 미키 마우스를 그렸고 나는 미리 준비된 도형으로 본을 떠서 코끼리를 그렸다. 코끼리만 있는게 썰렁한 것 같아 글씨를 쓰다보니 팝아트 같아진건 아니고 (히히) 좀 조잡해졌지만 좋아하는 글씨가 잔뜩 써진 천주머니가 생겨서 기분이 좋아졌다.

 체험을 하고 돌아오는 길, 날은 더웠고 해를 가려줄 손바닥만한 그늘 하나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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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18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는 날에 저도 한 번쯤 직접 해보고 싶은 것들이네요. 비 콘서트는 뭔가 화끈하고 혼을 빼놓을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아니었나봐요? 물 좀 적셔주고 하지... ( '')~ 저도 화분을 키워볼까 해요. 제비꽃도 화분으로 나오려나요? 흠...

Arch 2011-09-19 09:53   좋아요 0 | URL
옌예인들이 너무 도덕적이에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화분 키우는거 추천해요. 제비꽃은 모르겠지만 로즈마리랑 스파티 필름은 정말 잘 자라요.

다락방 2011-09-18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는 a 랑 참 다양한걸 함께 즐기네요. 그런것들을 함께 즐기는게 둘에게 잘 맞는가봐요. 그러기도 힘들것 같은데. 포스트잇을 붙여 아이비를 준 a와 싸우다니. 관계란 참 묘해요, 그쵸? ㅎㅎ

Arch 2011-09-19 09:58   좋아요 0 | URL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잘 맞는줄 알았는데 지내다보면 이 사람이 이걸 좋아해서 같이하는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포스트잇은 섹스 앤 더 시티의 그 포스트잇과 비교되기도 하고 좀 뭉클하고 그랬어요. 어제 다시 화해했어요. 진짜, 묘하죠.

무스탕 2011-09-19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끼리 그림을 보곤 옥찌가 그린건가 했어요. 그 이모에 그 조카 맞아요. ㅎㅎㅎ

Arch 2011-09-19 09:59   좋아요 0 | URL
으히히. 그 조카에 그 이모가 아니구요? ^^
 

 

   며칠 전 면접을 봤다. ‘꺽’할만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횡설수설대다 시원섭섭하게 끝낸 면접이었다. 이런 질문에 답변 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을까 싶은 생각은 찰나, 열정 있고(보고 있나 면접관들) 성실한데다 능력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내가 그런 사람인지 나조차 알 수 없는데 면접관들이라고 알 수 있을까. 게다가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그런’ 노력을 한다고 ‘그렇게’ 볼 수 있을지는 또 별개의 문제.

 


그럼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m과 김경,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방 이론’을 촘촘히 적어내려간 이 책-방을 통해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시도며 몇가지 방법론은 재미있다.-에선 바람둥이 얘기가 나온다. 상대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하려는 바람둥이가 원래의 자기 모습이 아니라 좀 더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꾸며 상대를 대하는데 이 지점이 좀 웃기다. 이럴 경우 우리가 예상하는건 바람둥이가 부리는 수법에 상대방이 홀딱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책에선 상대방이 바람둥이의 어설픔을 알아챈다거나 꾸민 모습에 반감을 갖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다른 사람에게 나를 알릴 수 있는 묘안은 따로 없는걸까.

  스눕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상과 다른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 얘기도 나온다. 예컨대 ‘나는 이러하다’란 개념이 있을 경우 좀 더 긍정적이거나 나은 평가를 받더라도 쉽게 수긍할 수 없다고 한다. 이유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와 다르기 때문. 아마 면접에서 천지개벽할 일이 생겨 그들이 나를 뽑았다면 나 역시 이럴 수는 없는거라며 나도 모르는 뒷거래가 있다거나 조건이 생각보다 안 좋을 수도 있을거라며 의심 했을 것이다. 

 결국, 그런 것이다.



   새로운 사람이 왔다. 나는 선배가 됐다. 이제야 나의 어떤 점을 사람들이 그렇게 마뜩치 않았는지 짐작이 간다. 물론 짐작 간다고 해서 내가 확 변하거나 큰 깨달음을 얻어 같은 시행착오를 저지르지 않으리란 법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어쩌면 그보다 쉽게 변하기 마련이니까. 대신 짐작으로만 알고 있던 나의 문제점이 뭔지를 힐링캠프에서 이경규가 ‘눈치없는 편이죠’라고 옥주현에게 직접적으로 묻듯 주위 사람에게 물어봤다.


 J는 자기만 느꼈을 게 분명하지만 딱 한 가지 있다면서 말을 꺼냈다. 타부서의 업무를 도와주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좀 효율적일 것 같아 내가 건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담당자 표정이 소위 말하는대로 ‘썩었다’고 한다. 이 말을 하고선 J는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아치, 아까 내 얘기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마요. 난 아치가 그런 말한 게 나쁘단 게 아니라 상대가 그걸 받아 주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어요. ‘아치 잘못했어요.’ 라고 한 게 아닌걸 알아줬음 해요. 난 아치가 자기 의견 말하는거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나한텐 언제든지 말해요. 난 아치가 상대방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고 자기 일처럼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와, 정말 예쁘지 않나요? (막 자랑하고 싶음.) 그 말에 그렇게 신경 쓴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겠다(나도 단련됐다) 싶었는데 J 말을 들으니까 괜히 힘이 솟는다. 얼마 전에 오랜 친구는 언젠가에 대한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그때 아치도 힘들었을텐데 자기를 위로해줘서 고마웠다고. 분위기도 못 읽고 눈치도 없지만 어느 순간에 발휘되는 아치력 같은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a의 모임에 갔더니 다들 나보고 형수님이라고 한다. 괜찮은 호칭이 아니다. 남자들의 모임에서 그들이 서로를 호명하는 명칭의 여자형이라서, 독자적인 개인은 지우고 누구의 여자친구로 있는건 별로라, 형수라는 호칭 안에 박혀서 남자들의 다른 여자친구와 맺는 관계도 여러모로 불편하단 얘기는 안 하고 ‘그냥 좀 그래요’ 했다. 나는 아치씨란 말이 좋다고. 그래서 비로소 나는 아치가 됐다.



 

    나보다 내 취향을 잘 아는 친구는 내게 이 책을 선물해줬다. 그리곤 부탄에 가고, 부탄 남자랑 결혼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평소에 이 친구의 똑똑하고(헤헤) 사려 깊은 면을 좋아했는데 가끔씩 이렇게 엉뚱한 면도 있다니 ‘아주 놀랍다’까지는 아니고 누군가를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지어선 <절대> 안 되겠구나 싶다. 요즘 들어 사무실 사람들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실실 웃고 환하게 인사하는 나를 보면서 더더욱 그렇단 생각이 든다.




 의례적인 관계에서 보여줄건 진심이나 서툰 표현이 아니라 형식에 맞는 표정과 호응이다. (이분법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좀 더 얘기하자면) 그렇게 힘을 빼가며 형식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관계라면 상대가 어떤 사람일거란 예상 대신 모호한 어떤 느낌이 표현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와 관계를 맺는 상대방을 나름대로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에 관계가 갖는 특별한 힘 같은게 (아치력 이런거 말고) 발휘되지 않을까. 물론 오랜만에 책 선물을 받았다고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는 없지만.

 고마워요, 똑똑한 여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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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9-0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원래 제목이 더 좋다. 요래지내요 ㅋㅋㅋㅋㅋ 아치력에서 빵 터졌어요. 아치력이래. ㅋㅋㅋㅋㅋ

부탄 남자랑, 그래서, 결혼할 겁니까?

J의 장문메세지, 좋은데요. 사는데 매시간 매분 매초 의미를 부여할 순 없겠지만, 또 의미를 찾을수도 없겠지만, 가끔 어떤 사람들 때문에 살맛나는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나를 나로 봐주거나 혹은 내가 모르는 나를 일깨워주는 그런 사람들이요.

직장에서 후배로 지내는 것 만큼이나 선배로 지내는 것도 어려워요, 아치. 어떻게 해야 현명한 선배가 되는지는 시간이 흘러도 잘 모르겠어요. 잘해봐요, 우리.

Arch 2011-09-08 11:49   좋아요 0 | URL
진짜? 역시 유머란 의도하지 않을 때 더 재미있나봐요.

우선, 부탄을 가야겠죠? 책을 읽다보니 자꾸 <오래된 미래>가 떠올라요.

맞아요. 나도 그런 사람 되고 싶어요. 음... 그리고 정말 혼나고 배우는게 낫지 선배가 되어서 뭔가를 알려주고 충고하는건 체질상 안 맞는 것 같아요. 혹은 한번도 해본적 없어서 낯선건지도 모르겠고.^^ 암튼 우리 잘해봐요

nada 2011-09-07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치력, 빵 터졌어요.ㅋㅋ

부탄 남자 말고, a님이랑 결혼해요!
(결혼이 뭐 좋다고, 남들한텐 이리 떠밀고 싶은지.ㅋㅋ 그래도 결혼이란 단어, 예쁘고 설레요.)

아치님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네요.
J씨도 있고, 책 보내주는 똑똑한 여자 사람도 있고.
괜찮은 여자예요, 당신!

Arch 2011-09-08 13:10   좋아요 0 | URL
아치력이 웃겨서 기분 좋아요^^

저도 그런 생각해봤어요. a를 닮은 아이를 낳아서 키우면 어떨까. 아냐, 코는 내가 더 오똑하니까 나를 닮고 어쩌고. 이런 생각을 하다가 혼자 깜짝 놀라요. 맙소사, 저는 결혼할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는데 결혼이란 말은, 어쩌면 약간 낭만적인 분위기는 사람을 이렇게 훅가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동안은 결혼 일찍 안 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요샌 내가 누군가와 오랫동안 같이 산다면 정말 이것저것 다 봐서 서로 타협하고 양보할 수 있는지, 나는 어디까지 포기가 되는지 잘 봐야겠다란, 그러니까 결혼에 대해 좀 호의적이 됐달까. 그런 상태예요.

꽃양배추님, 고마워요. 오늘 누군가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서 기분이 별로였는데 꽃양배추님 덕분에 좀 나아졌어요.

pjy 2011-09-07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력! 괜찮은데요^^ 요래 선물받고 지내시는군요~

Arch 2011-09-08 13:11   좋아요 0 | URL
요래 지내고 있어, 에 방점이 찍혀야했는데 결국 제 자랑만 했나요~^^

비로그인 2011-09-08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력, 유행 예감인데요? ㅎㅎ

저도 놀러와봤어요 Arch님! 여기저기서 [부탄과 결혼하다]가 눈에 띄니까 막 읽어버리고 싶네요. 지금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만 7권이고, 문학동네에서 온 책도 있는데 말이에요. 어제는 새벽 3시까지 날밤 새다가 곯아 떨어지고... 독서도 체력으로 하는 건가... 요새 그런 생각이 드네요 ( '')~

Arch 2011-09-08 13:14   좋아요 0 | URL
히~

저도 10권 넘게 빌렸어요. 반납만 하고 올거라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이것저것 빌리고 싶은게 너무 많아요. 다 읽으면 문제없겠지만 또 그렇지도 않고. 히잉~ 맞아요, 독서는 체력이죠. 요새 눈이 자꾸 침침해져서 저도 이 말 절감하고 있어요. 누워있으면 책이 휘리릭 넘어가는 독서대가 있으면 좋겠어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