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8시 반에 일어난다. 고양이 세수를 가까스로 하고 아무 옷이나 주워 입는다. 방문을 박차고 도시락을 싼 다음 부리나케 계단을 내려간다. 일부러 시계를 안 보며 이 추운 날 관절이 덜그럭거릴 정도로 과격한 파워워킹을 한다. freetempo의 음악을 들으며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9시 되기 몇 초 전. 간신히 지각을 면한다.

 일년 전만 해도 7시 전에 일어나 (세상에나) 아침밥을 먹으며 활기차게 아침을 열었으며 수영을 했고 가끔 a와 어줍잖은 모닝 수다를 떨기도 했다. 편의점에서 가끔 음식 비슷한걸 먹긴 했지만 포장지 쓰레기가 장난 아니다, 음식 질이 떨어진다며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유지했다. 지금은 앞서의 다급함 뿐 아니라 ‘아침에 배가 고프지 않았음 좋겠어’ 정도로 만족하는터라 쓰레기가 나오든 말든 몸이 축나든 말든 거의 신경을 안 쓴다. 엄밀히 말하면 그마저도 굶을 때가 더 많다.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연말이라 일의 특성상 여유가 없는데다 수영을 안 했더니 아침 시간에 잠자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더 게을러지는건 당연지사. 게다가 한번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나오기 싫을 정도로 집이 춥다. 당연히 아침 여유 시간의 마지노선까지 개기는거다. 같이 살 공간을 찾다 해가 잘 드는 이 집으로 이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해가 잘 드는 집이 무조건 좋았으니까. 몇몇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 주택은 추울텐데란 말을 했지만 형편에 맞게 집을 구한다고, 기름 보일러라도 아껴 쓰면 된다고 했다.

대체로 내가 내리는 확신은 근거가 부족하다. 지난번에 집을 구할 때도 그랬다. 비교적 깔끔하고 공간 활용도 편리한 집이 있었는데도 창문 발코니 장식이 멋스럽고 해가 잘 든단 이유로 예전 집을 택했었다. 꽉 막힌 부엌에서 서식하는 곰팡이를 외면했고 여름에는 해 잘 드는 창문으로 쏟아진 열기가 밤까지 이어져 늦은 밤까지 바깥을 배회했었다. 가끔씩 실수로 낮에 집에 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처럼 태양에 타죽는 장면이 생각나 흠칫 놀라기도 했다.


 어쨌든 방이 아닌 집이 생겼으니 좋은건 좋은거다. 한밤중에 붕~ 혹은 웅하는 소리로 ‘나 지금 여기 있어’라고 말을 거는 냉장고는 부엌에 있다. 거실에는 지금은 추워서 도저히 앉을 수 없지만 가끔 늘어져 잉여 스타일을 완성시킬 수 있는 소파가 있다. 주택 살면 다들 텃밭 만드는 줄 알았고 나 역시 그럴거라고 생각해서 흙바닥 하나 없는 집에 공간이 있어 다행이라고 했지만 계단을 시원찮게 만들어놔 뭘 들고 갈래야 갈 수 없는 옥상도 생겼다. 방바닥이 빙판처럼 차가워 털실내화를 부르지만 어쨌든 집에서 사는거다.


 추운 것 빼고는 이사를 해서 참 좋다. 옥상에서 a의 머리를 잘라줬고 (a는 다음날 직장에서 레고 머리, 호섭이 머리라며 놀림을 당했지만 아치씨가 잘라준거라며 오히려 자랑했다고 한다. 지못미 a... 귀밑머리 자르는 기술을 배워서 다음엔,.. 불끈!) 옆집에 사는 백구와 친구가 됐다. 프랜차이즈나 기계적인 관계로 맺어진 곳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 상대하는 동네 단골 까페를 찾아냈고 밥 먹고 나서 무한도전 봐도 되냐고 했더니 그걸 말이라고 하냐란 표정으로 ‘아무렴’이라고 해주는 동네 밥집도 알아냈다. 당분간 머물다 떠나는 원룸촌의 생활 스타일이 아니라 한 동네의 거주민이 된 거다. b는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나는 장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겨울만 지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이런 집의 특징은 여름엔 지치도록 덥다는거란다. 앗흥.


 요즘 소원은 따뜻한 집에 사는거다. 기대치가 낮으니 삶이 단순해지고 사람도 좀 단순해진다. 그게 나쁘지만은 않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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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3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겨우 일 년 더 늙었다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요,
아 어차피 나이가 안들었을 때도 학교에 9시에 가고 막 그랬었죠..
지금 생각해도 그때 왜 그랬는지 황당하기만 합니다 ㅋㅋ

Arch님도 새해 복 무진장 많이 받으세요 ㅎㅎ

Arch 2012-01-02 10:30   좋아요 0 | URL
아휴, 소이진님 일 년 늙었다는 말을 번데기 앞에서 하는거에요? ^^
소이진님은 파릇파릇한걸요~

소이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쑝쑝~

카스피 2012-01-0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2012년 흑룡의 해,좋은일만 계시길 바라며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그리고 신년 새해 용꿈 꾸시라고 용 한마리 선물로 보냅니다
\▲▲/
( ^^ )
<(..)>
<(▶◀)>
<( = )>
<( = )>

━┛┗━

Arch 2012-01-02 10:31   좋아요 0 | URL
용이 너무 귀여운데요.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용꿈은 셀프입니다^^

2012-01-01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2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12-01-01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마음의 여유를 찾으셨군요. (몸은 아직 부족하다 아우성 치고 있지만요 ^^;)
쪼끔 더 따듯하면 좋을텐데 조금 아쉽네요. 그래도 내 몸 편히 뉘여 쉬게 해주는 집이잖아요.
그 집에서 여유와 만족과 행복을 오랫동안 누렸으면 좋겠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이 제일이구요!!

Arch 2012-01-02 10:35   좋아요 0 | URL
생활의 기술 같은걸 많이 터득하고 있어요. 모자를 쓰면 체감 온도가 높아진다거나 전기장판 아래 담요를 깔아놔야 금세 따뜻해진다거나 등등. 뭔가 좀 조악하죠?
네~ 집은 참 좋아요. 가끔 생각할게 있을 때 거실과 부엌을 오가며 걷는 것도 좋고~

무스탕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꼬옥!

뷰리풀말미잘 2012-01-0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용실 언니처럼 머리를 잘 잘라요. ㅎㅎ 이게 재능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처음 남의 머리를 잘라줬을때부터 잘 잘랐거든요. 같이 미용실 할래요? 내가 원장하고 아치는 미용사하고.

Arch 2012-01-02 10:37   좋아요 0 | URL
에휴~ 미잘이 못하는게 뭐에요!

지난번엔 동네 미용실에 가서 미용기술은 어떻게 배우고 어느 정도 하면 마스터할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제가 미용실을 한다면 박리다매형 미용실이 될 것 같아요. 미적 감각이 없으니 잘랐다, 펌했다, 염색했다 정도로 끝낼 것 같아서. 미잘 원장이라... 자긴 손톱 손질하면서 아치 미용사 막 부려먹는거 아니에요? ㅋㅋ 뭐든 같이할 수 있었음 좋겠다~

2012-01-02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2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개밥이란 친구랑 예의 혹은 ‘관계맺음’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너무 제멋대로다란 얘기 끝에 나온건데 그때 나는 능청맞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편하게 생각하는 b란 규율대신 나만의 것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나만의 것’은 a와 c로 변형이 가능하지만 일반적인 것으로 퉁치는 두루뭉술한게 아니었다. 그때 나는 내가 '나만의 것‘으로 사람들과 사귀는 이유로 의례적인 말, 하나마나한 말 대신 나만 할 수 있는 말을 한다는, 해서 진심으로 누군가를 알 수 있고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관계를 매끄럽게 하는 말 대신 그저 내가 편한대로 말하는걸 내 멋대로가 아닌 내 방식으로 굳게 믿은 그때의 어리석음은 자라서도 계속되었다.

 

 얼마 전까지 나는 누군가가 굉장히 얄미워서 공공연하게 그 사람이 밉다는 식의 행동과 말을 하고 다녔다. 사리분별을 하고 조직내 힘의 균형이 흔들리고나서 보니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한건 내가 그 관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비롯되었다는걸 깨달았다. 존재감 없이 병풍처럼 있는 지금, 별다른 셈속없이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그 사람을 보니 진즉 사라졌던 미운 맘이 이제는 호감으로 바뀐다는걸 알아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예전의 감정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긴 하지만.

 나보다 더 ‘지 멋대로’ 하는 에이미를 보고나서야, 에이미는 왜 자신이 나와의 관계를 틀어지게 했는지 짐작도 못한다는걸 알고나서야  깊은 관계란 바람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있었는지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뭔가 단박에 확 변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며칠 전 도배를 하면서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했다. 그 중엔 예전 일기도 있었는데-뭔가를 쟁여놓고 모으고 보관하길 좋아한다- 12살이었던 나는 아빠와의 일을 적어놨다. 아빠가 한밤중에 자고 있는 나를 깨워 예의없이 말하는걸 고치란 말을 했노라고. 5학년인 나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한 것 같고, 그런데 왜 아빠는 그 늦은 밤 나를 깨웠는지는 잘 모르겠어 어벙벙했노라고, 앞으로는 아빠 말씀대로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적었다. 아빠 말대로 착한 사람이 되었다면 지금 좀 괜찮았을까. 그렇다면 아치스러움은 어디로 가는걸까.

 

 아치스러움에 대해선 JJ도 할말이 있었다. 사람은 쉽게 바뀔 수 없고 바뀐다고 자신다움이 어디로 가는건 아니라고. 그런데 나는 아직 어디부터 바뀌어야하는지 감을 못잡고 있다. 요컨대 내가 보기에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것에 순응하는걸 배워야하는지, 그저 뭐든 좋게좋게 넘겨야할지, 좀 더 침묵해야할지. 김영민은 생각대신 공부라고 했는데 나는 공부보다 생각이라 여전히 자다 깬 5학년짜리 애처럼 어리버리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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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8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9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1-12-19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스러움, 완전 궁금해요! 알라딘 밖의 아치. ㅎㅎ
생각이 아니라 공부, 아유, 이 말만 `생각`하면 머리 아포요.

Arch 2011-12-19 18:15   좋아요 0 | URL
아우, 궁금해할게 못돼요. 오늘도 `왜 나는 생각없이 말할까`로 한참동안 고민했는걸요.
ㅋㅋ 나두 나도요!
 

 

 피아노를 닦는다. 피아노 외장에 묻은 지문을 닦아낸다. 안 지워진다. 면으로 만든 융은 얼룩 대신 시간과 노력을 지워나간다. 손이 나갈 것 같다. 한번씩 피아노를 닦을 때마다 힘이 빠져서 징징대던 아치에게 예고 없이 희소식이 들려왔다. 누구씨의 말에 따르면 자동차처럼 피아노에도 유리막 코팅을 하면 먼지는 물론 손자국까지 단번에 지워진다는 것. 아치는 초큼 흥분했다.
 
당장 달려가 누구누구에게 피아노 코팅이란게 있다. 흠집도 안 나고 닦기도 쉽다, 코팅해줘라, 얼마다. 따다다. 누구누구는 냉철한 직관력과 분석력, 탁월한 센스를 발휘한건 아니고 여지껏 아치하는 짓이 살짝 엉터리라 한번 운을 띄운다.

- 피아노 쓰는 곳마다 코팅을 하나요?
- 얼마 주기로 코팅을 해야는데, 요?
- 피아노 소리에 영향을 주진 않아?

 여시 같은 놈. 아무런 데이터도 없던 아치는 짐짓 그런 것 알아보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란 표정으로 의기양양 전화를 돌려대기 시작했다. 빙빙. 알고지낸 조율사님께 물어봤더니 피아노에 뭔가를 덧칠하면 안 좋고 면으로 된 융을 물기 제거해서 살살 닦으면 된다고 했다. 왁스를 바를 경우 자칫 건반도 미끄러울 수 있으며 피아노에 얼룩이 남을 수 있단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다음에 물어본건 스타인웨이 대리점 코스모스 악기점. 담당자는 50 평생 피아노에 코팅을 한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고 했고 정 뭔가를 바르고 싶다면 가구점에서 왁스를 사다 바르면 된다고 했다. 정말 코팅은 아닌 걸까.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서 피아노 업체나 조율사들에게 물었다. 무광 유광마다 관리 방법이 다르단 얘기도 있고, 코팅 얘기는 처음 듣지만 자동차 흠집 안 나게 하는거면 피아노에도 좋지 않겠냐는 의견도 나왔다.

점점 혼란스러워 처음 제안을 했던 분께 물어봤다.

- 피아노에 코팅을 안 한다는데 어디서 들은 말이냐.
- 나도 누구씨한테 들었다.
- 면으로 만든 융을 꼭 짜서 닦아도 된다던데.
- 그러냐. 나도 몰랐다.
- 코팅하자고 하신 분은 대체 왜 그런거냐.
- 나도 잘 모르지만 전례가 없는 것 같아 재차 괜찮은거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문제없다, 문제 생기면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고 장담했다. 그런데 나도 정말 확신은 안 된다. 그래서 다시 물었더니 괜찮다는거다. 완전 해맑은 분이다.

 마지막으로 국내 최초로 피아노 코팅을 한다는 분께 전화를 했다. 그분은

- 자동차에 코팅하면 먼지가 앉아도 잘 닦이잖아요. 그 원리예요.

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확인되거나 입증되지 않은 모험을, 인디아나존스도 아닌데 만만한 아치에게 적용해보려고 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앞서 코팅 얘기를 꺼냈던 분이 너무도 순진무구한 음성으로 ‘나도 몰라요’를 하는게 웃겨서였는데 머리숱이 없어선지 이야기도 생각만큼 안 풀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좋다니까 하자는 무모함도 웃겼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좋다니까 하는 무모함을 열내며 따라가는 아치 근성 같은 것도 얼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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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6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소설 같아요. 완전 해맑은 분은 단연 돋보이는 캐릭터구요!
그래서 코팅을 하시려구요? 아무리 해맑은 분이 추천한다고 해도 저는 못할 것 같아요.
10년 다 되어가는 피아노가 집에 있는데, 소리만 잘 나면 장땡이다 싶은 채로 방치해두고 있답니다.
피아노가 소리 맑게 나면 되죠 뭐 ㅎㅎ
아치 근성의 결말을 기대해봅니다 :)

Arch 2011-12-06 21:30   좋아요 0 | URL
여기에 하루키 비유를 하면 하루키 팬인 다락방님이 초큼 성질날지도 몰라요. 히~ 잘 쓴 글이라면 수다쟁이님 칭찬을 냉큼 받았을텐데, 아쉽습니다. 회사 다니니까 글이 재미없고, 나란 사람도 재미없어지고 그래요. 엉어허ㅡ,.ㅜ

코팅은 검증된 케이스가 아니라 그건 안 하고 피아노는 물걸레 꼭 짠 걸로 닦으려구요. 다음에 해보고 잘 되면 좋겠어요. 일하는 곳에 있는 피아노는 자주 닦아주고 조율해야하는 녀석이라 간만에 의욕 좀 내봤어요^^

이진 2011-12-06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왠지 코팅을 하면 안될것 같은 느낌이 풍긴단 말입니다...
하지마셔요 ㅋㅋ

Arch 2011-12-06 21:31   좋아요 0 | URL
네! 안 할게요^^ 소이진님~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연재해서 작은 파장을 일으켰던 금태섭씨의 <디케의 눈>을 읽은 적이 있다. 김두식씨와는 다른 방식으로 법에 대해 얘기를 하고 질문을 하는 것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영화나 책의 내용을 인용한 부분이었다. 저자가 법에 대해 얘기한 것도 좋았지만 꼭꼭 씹어 인용한 얘기들이 무척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라쇼몽을 인용해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하는 대목은 영화를 보는 것만큼 흥미진진할 정도였다.

  트루이요의 독재정치가 오스카 와오에게 미친 영향<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과 유신 시대, <쌍둥이별: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언니를 위해 존재하는 생명과 유전공학의 딜레마, <새벽의 약속>과 부모의 과보호, <나를 보내지마>와 성매매특별법에서 도구로서 인간을 생각하면 안 된다는 통찰. 몇몇 인용과 주제간 연결은 거칠기도 하지만 문제가 되는 사안을 쉽게 이해하고 다른 쪽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은 유의미하다.

 유럽에서 부르카 착용 금지 법안 문제가 이슈였을 때 종교적 자유와 여성 억압, 배타적인 규율이란 주제로 머리가 복잡한 적이 있다. 그때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여자의 머리카락은 빛을 내어 남자들을 흥분시킨다. 그게 여자가 베일로 머리를 가려야 하는 이유이다. 만약 베일을 쓰지 않는 게 더 문명화된 것이라면, 동물들이 우리보다 더 문명화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1979년 팔레비 국왕을 축출하고 종교혁명을 완수한 호메이니 정권이 여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베일을 써야한다고 공표하면서 한 말이다.
 종교의 자유, 문화적 다양성과 함께 양성평등, 보편적 인권의 문제 등 고려해야 할 요소는 수없이 많다. 찬성하는 주장이나 반대하는 논리나 나름의 근거가 있기 때문에 쉽게 물리치기 어렵다. 그러나 단순히 종교적 선택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르카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페스세폴리스의 작가가 대학 입학을 위한 이념 시험에서 시험관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들어보야 한다. 
 시험관이 “사트라피 양, 당신의 서류를 봤어요. 오스트리아에서 살았더군요. (...) 그곳에서 베일을 썼나요?”라고 묻자 마르잔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요. 하지만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해왔어요. 만약 여자의 머리카락이 그렇게 많은 문젯거리가 된다면 신은 여자를 대머리로 창조했을 거라고 말이죠.” 이슬람의 신이건, 기독교의 신이건, 신은 적어도 남자를 흥분시키기 위해 여자의 머리카락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착용 금지냐 아니냐란 어떤 입장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어떤 결론을 내려야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지 않아야 하며 ‘왜’라는 질문을 잊지말고 해야 하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딜레마와 다양성, 소통을 화두로 여러 이야기들을 이어나간다. 거세하면 성범죄가 사라질까, 체벌은 정말 아이를 위하는걸까, 위협이나 고문이 없는데도 허위자백을 하는 이유는 뭘까, 음란함은 어떻게 정해지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을까, 성매매특별법을 위한 변론까지. 궁금한 사안이었지만 기존에 있던 생각대로 결론을 맺자니 아닌 것 같고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 생각을 바꾸자니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예컨대 학생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것을 굳이 조례 제정을 통해서 인식 시켜야 할 정도로 학교 내 사제간 체벌은 문제 되고 있다. 선생님을 때린 학생 얘기의 경우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문제를 지적하는 논거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때 나온 이야기가 선생님 인권 얘기였고 최근엔 선생님과 제자 중 어느 쪽에서 더 폭력 가해자가 많이 나왔나는 통계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 전에 학생들끼리 서로 때리도록 시켰다면?(책에 나온 내용) 그럼 처음 전제는 문제가 된다. 모든 사안에 대해 깊이 알고자하는 노력을 그만두고 편향된 시각을 확신하는 순간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확신의 함정>은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이 제일 잘 안다고 자신하는 순간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궁금한 사안을 단순한 방식으로 결론짓기보다는 계속 질문하고 나아가 자기 논리와 여러 방향성을 제시해야할 필요성을 얘기한다. 그 과정이 흥미진진하지 않은건 금태섭씨의 유려하고 정직한 글 솜씨와는 별개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그리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여러 의견을 포용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입맛에 맞는 정보와 의견만 통하는 세상은 답답할 뿐이다. 

 저자 금태섭은 어릴 때,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단다. 세상의 부조리한 일들에 대해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당연히 누군가 자신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거다. 성인이 된 후, 작가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는지 질문 하게 되었고 그 질문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논리와 통찰로 무장한 채 거리낌 없이 답을 찾아나가는 데 여기에 적힌 글들이 작은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바람은 적어도 내 경우엔 긍정적이다. 그렇다고 내가 논리와 통찰로 무장한 아치라는 얘기는 아니다. 작은 격려만 살짝 취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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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12-0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 답지 않게 한 페이퍼에 책을 마구 쑤셔 넣었네요(아치가 이러는거 처음보는 듯). 그런데 이 책들은 금태섭이 본인의 책에서 언급한거란 거죠? 위에 새벽의 약속,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마이 시스터즈 키퍼, 나를 보내지마에 대해 막 나오는데 반가워서 죽을 뻔 했네요. 나 다 읽었어, 막 이러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이 책 계속 읽고 싶었어요. 아치에게 긍정적인 책이라니, 흐음, 나도 읽어볼게요. 일전에 한겨레21에 신간 소개로 나왔을 때 메모해두었었거든요. 인용된 책들 중에 제가 읽은게 많아서 어쩐지 금태섭의 이 책이 완전 더 재미있게 읽힐 것 같지 뭐에요. 히히히히히

아치 페이퍼다, 좋다. 얼쑤~

Arch 2011-12-06 17:34   좋아요 0 | URL
페이퍼 옮기는 것 해보니까 별로 안 복잡하네. ^^
다락방은 눈 안 아파요? 눈이 쪼이듯 아파요. 하루에 페이퍼 두개를 쏟아내려니 하하^^ 큰 일 했네, 큰 일 했어.<--자조 농담?

네. 마구 쑤셔넣는거 정말 나답지 않아 리스트로 할까하다가 검색한게 아까워서 비밀 페이퍼로 옮겼거든요. 그런데 야심차게 새 카테고리도 만들었고 다락방이 댓글을 남겼으니 이 페이퍼를 다시 살려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안 읽었지만 알라딘에서 본 책이 나오니까 나도 반가웠어요. 이 책, 표지 기억나. 이러면서 히~ 그치만 반갑다고 죽진 마요.

다락방은 나보다 더 멋진걸 볼거에요. 난 저기 부르카 부분이 참 좋고 책에 나온 몇몇 구절이 괜찮아서 막 타이핑 하다가 이 책을 다음에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페이퍼를 쓰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막 책을 쑤셔넣으니까 좀 어색해요. 이 카테고리가 앞으로 잘 될지 모르겠어요.
 

 며칠 전 청룡영화제에서 류승완 감독의 대리 수상 소감이 화제가 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부당거래에 반대하고, 그런 의미에서 FTA를 반대한다.' 청룡영화제의 진심과 공정성엔 의심이 가지만 류승완 감독의 수상소감은 인상적이었다. 문화예술업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긴 최효종을 고소한 강용석을 보니 국민여론이 끓어넘치게끔 군불을 때우는 작태가 곳곳에서 보이기는 한다. 

 주변 사람들은 한미 FTA 협상이 비준되면 농업은 망하겠지만 다른 분야에선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얘기들을 한다. 노동의 유연화, 노동 선택의 자유를 통해 우리에게 남은게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소릴까. 우리 농산물은 아깝지만 소비자의 권리를 위해선 협상이 불가피하다란 입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마트에서 다국적 기업이 가져다놓은 제품을 맘껏 고를 수 있는 자유란게 정말 이름 그대로 자유일까.

 예전에 통신판매로 데이터 요금제를 팔 때가 있었다. 전혀 필요도 없고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생경한 사람들에게 '고객에게 꼭 필요한' 것을 판다는 식으로 뻥을 친거였다. 데이터 요금제란게 필요한 소수를 제외한 사람들은 얼떨결에 가입을 해놓고 한참 후에 상품을 해지했다. 주민번호 인증이나 몇몇 과대 포장된 용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자체안전망도 있었지만 애초에 몇백명의 사람들을 TM으로 고용해 필요없는 요금제를 파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때 그런 생각을 한적이 있다. '왜 이 사람들은 쓰지도 않고 필요도 없는 요금제를 가입해놓고 매달 그 돈을 지불하는걸까.' 실적이 안 나오고 맨날 팀장에게 끌려가 자신감과 열정 부족을 지적 받아도 나아지지 않는 성과 때문에 그 일을 그만 둔 후에도 그 질문은 잊혀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거였다. 사람들은 핸드폰 요금이 더 나오거나 덜 나오는 것 정도, 그렇게 신경쓰지 않는다는걸.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고 가사 노동을 하고 학교를 가는 일들,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와 안 맞는 문제에 더 신경을 쓸 수 있다는 걸. 

  그래서 대개는 통신사가 알아서 자신의 요금을 계산해 청구할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한다.(물론 나처럼 신용카드 청구금액이 믿기지 않아 일일이 계산해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기대가 어긋났을 경우 소비자로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간단하다. 선택지가 얼마 없긴 하지만 통신사를 바꾸면 된다. 아니면 통신사 해당 게시판에 민원을 올리거나 관할 기관에 문의를 해서 계속 귀찮게 구는거다. 그런데 그건 너무 귀찮다. 그래서 통신사가 알아서 잘하겠거니 맡겨놓는거다.

 한미 FTA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 시각도 그렇지 않을까. 정부가 알아서 잘하겠지, 설마 독소조항이란걸 다 떠안고 이런 협상을 하겠어. 협상을 하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인데. 헌데 어쩌나. 통신사가 자신들의 VVIP고객들에게도 버젓이 필요하지도 않은 요금제를 팔아먹는걸. 알아서 잘하라고 뽑아놓은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하지 못한다. 시위를 했더니 물대포를 쏜다. 다음해에 투표를 잘하자는 말은 허무할 정도로 막막하다. 한판 뒤집기도 아니고 맨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한미 FTA반대 문화집회를 하고 뒤풀이로 대포집에서 꼬막에 막걸리를 먹었다. 평소에 어패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즈음의 꼬막은 너무나 맛있어서 달짝지근한 막걸리와 정말 잘 어울렸다. 물론 혼자서 꼬막에 막걸리였다면 맛도 재미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그 분위기가 좋았으니 맛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운동을 했다는 분에게 내가 알고 있는 쥐꼬리만한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왜 아직도 구호를 외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나요. 운동 방식이 투박한건 아닌가요. 몇년 전 그나마 상황이 좋았을 때 왜 제대로 하지 못했나요. 답이 안 나올게 뻔한데도 할말들이 자꾸 샘솟았다. 그분은 이런 얘기를 해주는게 참 고맙다고 했다. 답을 얻지 못했지만 나에게는 어떤 대안이 있는지를 생각해봤다. 기꺼이 헌신하고 누군가의 문제제기에는 열려있다. 그런 자세를 배워야하는걸까. 

 암암리에 미국산 소고기가 유통되고 있다. 호주산이 미국산으로 바뀌고 병원 가기 후덜거리는 세상이 와도 어떻게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밖보다 집이 더 춥지만 기름 보일러라 아끼는 지금처럼 그때도 민간화된 공과금을 어떻게든 견디면 될 것이다. 아마 그 후로도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살아야하는지, 삶을 살아가는게 아니라 견디고 참고 이겨내야만 그나마 살 수 있다는게 납득이 안 된다. 그게 참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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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7 2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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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9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