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예배에 가서 새벽에 들어온다는 바깥양반을 기다리며 새해 벽두에 카프카의 초단편 "법의 문 앞에서"를 읽어보았다. 여당이며 야당이며 저마다 법을 내세우며 대치 중인 시국이라, 일반인은 물론이고 전문가마저 과연 어떤 법이 어떤 법을 누를 수 있는지조차 설왕설래하는 상황이니, 도대체 법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까닭이다.


물론 카프카의 작품답게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한 남자가 법의 문 앞에 다가섰는데, 문지기에게 입장을 요구하지만 들어주지 않는다. 힘으로 통과하더라도 그 안에는 더 많은 문지기가 있다는 말에 남자는 포기하고, 이후 오랜 시간 법의 문 앞에 앉아서 문지기를 설득하며, 언젠가는 그곳을 통과하고 말겠다는 희망인지 착각인지에 빠져 오랜 세월을 보낸다.


그러다가 결국 노쇠하여 숨을 거두기 직전에야 그는 '왜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이 법의 문을 통과하러 오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떠올리고, 마치 그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듯한 문지기로부터 '왜냐하면 이 법의 문은 오로지 당신만이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곧 죽을 예정이므로 나는 이제 이 문을 닫아 걸겠다'는 답변을 얻는다.


젊어서 읽었을 때에는 카프카 특유의 역설과 부조리가 담긴 작품 중 하나로 간과하고 넘어갔는데, 지금의 상황에서는 일단 법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만 놓고 보아도 이래저래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이 본래 미완성작 <소송>에 등장하는 작중작이었다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제목에서 가리키는 사법 절차가 줄곧 헛바퀴만 돌기 때문이다.


관련 자료를 구글링해 보니, 이 작품의 의미에 대해서는 힘 없는 개인에게 불친절한 법의 부조리를 비판했다는 해석이 대부분인 모양이다. 이번에 읽으면서는 원칙적으로야 주인공의 입장을 허가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주인공의 입장을 불허하는 저 불가해한 문의 성격마냥 법 자체가 모순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꼬집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며칠 전에 생중계된 현직 대통령에 대한 공수처의 체포 시도를 지켜보니, 마치 카프카의 작품 속 내용과도 유사한 모순과 부조리가 현실에서 펼쳐진 셈은 아닌가 싶어 한심할 수밖에 없었다. 법을 위반한 사람을 법에 의거해 체포하려는 법의 집행자들이 또 다른 법에 의거해 법을 위반한 사람을 지키려는 또 다른 법의 집행자들에게 가로막힌 셈이었으니까.


법의 보호 대상인 대통령을 법의 명령에 따라 체포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아니, 애초부터 법을 수호하기로 약속한 대통령이 법을 어긴 것 자체는 정당한가? 흥미로운 사실은 마치 법의 정의와 한계에 대한 논란처럼 보이는 이런 모순과 대치가 실제로는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의지에서 유래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의지가 법을 왜곡해 모순을 만든 것이다.


현직 대통령은 검사 출신의 법잘알이고, 그를 체포하려는 사법 기관은 물론이고 그를 반대하고 두둔하는 입법 기관의 여야 정치인들조차도 모두 법잘알이다. 저마다 법에 대한 전문가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의견조차도 맞서고 엇갈려서 대치를 이어 나가고 있으니, 카프카의 소설에 나온 남자와 유사한 수많은 법알못의 처지야 굳이 말할 필요조차도 없을 법하다.


비상 계엄 이후 현재까지 법과 법의 대치 상황은 법에 대한 준수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제도의 약점을 보여주는 중대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우리 역사에 기록될 법하다. 물론 이런 대치는 어제오늘의 이야기도 아니다. 가깝게는 트럼프의 지난 임기에 벌어진 미국 의회 공격 사태가 있었고, 멀게는 민주주의의 온상인 고대 그리스에서도 비일비재했으니까.


일각에서는 문자 그대로 민중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상적으로 간주하는 고대 그리스에서조차도 일각의 지적처럼 민주주의는 변덕스럽고 예측불허라 불안정한 체제였다. 애초에 민주주의 자체에 큰 기대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그래서인데, 최근 한 달 간의 한국 정치 상황은 그런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이니 더욱 민망하기 그지없다.


현직 대통령의 관저 앞에서 벌어진 법과 법의 대치 상황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나같이 법잘알들로 이루어진 무리가 들어가려는 사람과 막아서는 사람, 또는 끌어내려는 사람과 나오지 않으려는 사람으로 나뉘어 벌이는 대결이야말로 카프카가 묘사한 저 법의 문 앞에 섰던 두 사람의 대치 상황 못지않게 기묘하다는 점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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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지쥰의 <조선의 점복과 예언>을 보면, 범죄 발생 시에 그 범인을 색출하는 데 사용하는 점술의 하나인 '고양이점'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사건과는 무관한 고양이를 데려다 놓고 고문해서 죽이거나, 또는 죽기 직전까지 내몰면, 빡친 고양이가 범인을 찾아가서 복수를 한다는 거다.


고양이를 일반적인 가축과는 차원이 다른 영물로 간주한 옛날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한편, 책에 나온 사례 중에서는 피해자가 고양이점을 계획한다는 사실에 지레 겁을 먹은 가해자가 고양이를 치우려다가 거꾸로 덜미를 잡혀 범죄를 실토했다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잖아도 지난주부터 알라딘 북펀드에서 개/고양이 대학살 운운 하며 호들갑을 떠는 책을 광고하기에, 내친 김에 로버트 단턴까지 한데 엮어서 뭐라도 한 번 써볼까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벌어진 역대급 항공기 사고로 심란해진 마음을 가까스로 수습해 보니 어느새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단지 무라야마의 책에 나온 내용뿐만 아니라, 지난 한 달 동안 한국 사회를 뒤집어놓은 대소동의 원인이 패스트푸드 체인점이며 아마추어 점집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까지도 돌이켜 보면, 올해는 정말이지 문자 그대로의 '주술적 사고'로 마무리되는 셈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주술적 사고'(magical thinking)라고 하면 자연스레 존 디디온의 <상실>이라는 책이 떠오르는데, 이 책의 원제가 "주술적 사고의 해"(The Year of Magical Thinking)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처음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제목을 보고 자기계발 에세이겠거니 오해했던 기억이 난다.


영어의 magical을 일반적 의미의 "마법"이나 "마술"처럼 비교적 좋은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인데, magical thinking은 오히려 "주술적 사고"나"미신적 사고"로 해석해야 한다. 앞서 말한 '고양이점'처럼 문자 그대로 인과성이 없는데도 엉뚱한 데에서 이유를 찾는 것이 이런 사고방식이다.


존 디디온의 책에서는 갑작스러운 남편의 사망 직후, 그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으로도 묘사된다. 예를 들어 죽은 남편의 옷을 왜 버리지 않느냐는 지인의 물음에 저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혹시 살아서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하고 우물거린다.


하느님은 믿지 않아도 지질학은 믿는다고 말할 정도로 평소에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했던 저자이니, 이런 스스로의 어리석은 행동에 적잖이 놀랐을 법하다. 따라서 "주술적 사고의 해"라는 원제는 저자가 겪은 슬픔뿐만 아니라 당혹과 자조까지 담은 절묘한 제목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떤 면에서 주술적 사고는 거대하고 냉혹한 현실의 앞도적인 파도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일 수도 있다. 계란으로 내리친들 바위가 꼼짝달싹이나 하겠느냐만, 최소한 그런 넋두리라도 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체념하고 있는 그대로 현실을 인정할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닐까. 


보기에 따라서는 어리석다 할 수도 있지만, 차마 감당 못할 슬픔 앞에서 무너지는 것 역시 인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개/고양이 대학살처럼 사안을 침소봉대하는 습관이야 고약하지만, 종종 남용되는 바로 그 공감 능력이 있었기에 인간은 개/고양이보다 우월할 수 있었으니까.


여하간 국가 수뇌부의 '주술적 사고'뿐만 아니라, 한 해의 끝자락에 일어난 초대형 사고로 인한 유가족의 '주술적 사고'도 적지 않을 듯하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지난 세월호 사건 때에도 현실을 부정하고 실낱같은 가능성에 매달리며 자책을 거듭하는 유가족의 모습이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도 한 해 내내 부음이며 다툼이며 금전 등 각종 사건사고를 경험하다 보니, 최근 있었던 여러 사회적 논란까지 더해서 제발 올 한 해만큼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적어놓고 보니 이런 푸념과 바람 역시 주술적 사고의 일종인 듯해 살짝 민망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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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시즌 2가 공개된 모양이다. 이미 잘 끝난 이야기를 장삿속에 굳이 되살려 설정과 인물을 추가해서 여러 시즌 우려먹다가 뜬금없이 끝장내는 미드의 단점을 따라하는 모양새인데, 벌써부터 혹평이 주를 이룬다 하니 이 한국 드라마의 운명도 이미 결정된 듯하다.


나귀님이야 한 번도 제대로 시청한 적은 없는 드라마지만, 하도 주위에서 관련 내용을 나팔 불기에 반강제적으로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나마도 일본 만화나 영화를 대놓고 모방한 듯한 그 설정이나 줄거리에 구멍이 많다고 생각해서 영 별로였는데, 세계적 인기였다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이와 유사하게 평론과 흥행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지만 나귀님으로서는 영 떨떠름했던 작품으로는 영화 <파묘>도 있다. 이것도 일본 설화며 홍콩 영화를 대놓고 모방한 외양에 영 미심쩍었는데, 먼저 보고 왔다는 바깥양반이 일제 쇠말뚝 이야기의 변주라며 혹평하기에 그러면 그렇지 싶었다.


심지어 흑막으로 '무라야마 쥰지'라는 일제 시대 주술사가 언급된다고 하기에 살짝 어이가 없었다. 물론 허구이니 상관없을 법도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했을 때 일본 오컬트 영화에서 바다의 악령 '이신순'이라든지, 악질 테러리스트 '안근중'의 악령이 나오면 우리도 기분 나쁘지 않겠나.


십중팔구 그 인물의 모델이 되었음직한 실존 인물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 1891-1968)은 총독부의 의뢰를 받아 조선 민속을 연구한 일본의 학자다. 직접 조사보다 간접 조사에만 치중했다는 이유로 비판도 받지만, 풍수와 귀신과 점복 등에 대한 그 저서는 오늘날 한국학의 필수 자료이다.


연구 주제가 워낙 특이한 쪽이다 보니 지금에 와서는 마치 조선의 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파견된 흑마술사 정도로 오해되는 모양이지만, 무라야마 지쥰은 도쿄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행정 서류와 통계 자료 같은 근대적인 방법을 동원해 조선의 민속을 연구했을 뿐이었다.


이른바 '일제의 민족 정기 훼손설'의 가장 큰 맹점은 이미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눈에 풍수와 점복 같은 조선의 민속이 비과학적 미신에 불과했음을 간과한 것이다. 그 대표적 연구자인 무라야마 지쥰의 입장도 마찬가지여서, 일부 저서의 서문에서 미신을 비판하는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이에 관해서는 전남대 일문과의 김희영 교수가 저술한 논문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의 조선인식: 조선총독부 조사 자료를 중심으로"(日本文化學報, 2009, no.43, pp. 323-342)에서 조선에 대한 무라야마 지쥰의 인식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으로 정리해 놓은 대목을 인용해 볼 만하다:


"첫째, 조선의 사상의 근저에는 귀신 신앙이 있고, 조선의 문화는 이 귀신 신앙의 영향 하에 있다. 둘째, 조선인의 민간 신앙은 원시적이며 그로 인한 폐해가 크다. 셋째, 조선인은 소극적 운명론자이며 혈연 중심 가족주의자이다." 애초에 그의 연구에서 민족 정기 따위는 관심도 없었던 셈이다.


물론 무라야마의 연구 자체가 식민지 경영을 돕기 위한 것임을 감안하면 그 정당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의를 제기할 만하다. 하지만 이 민속학자의 작업 배후에 어떤 오류가 있었다 한들, 그것은 미신을 맹종하는 전근대적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에 맹종하는 근대적 오류에 불과했다.


영화 <파묘>는 근대인 민속학자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뒤집어 전근대인 음양사의 이름으로 차용함으로써 '알고 보니 진짜 귀신'이라는 클리셰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는 이미 당시에 근대화를 이루면서 미신을 타파했던 일본의 현실을 외면한, 어찌 보면 '한국적으로 편협한' 해석일 뿐이다.


조선총독부에서 귀신과 풍수 같은 민간 신앙을 부정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던 것은 민족 정기의 훼손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간 심성의 파악을 위해서였을 뿐이다. 이런 근대적 연구조차 전근대적 주술이라 오해하는 풍조가 지금껏 계속되는 것이야말로 한국인 특유의 미신적 사고의 연장인 셈이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에는 미신적 사고가 맹위를 떨치는 듯하다. 말이야 누가 미신을 믿느냐고 웃어넘기지만, 인터넷 시대에 맨 먼저 온라인화한 것 가운데 하나가 '행운의 편지'를 비롯한 각종 미신이었고, 유튜브 시대가 되자 온갖 무당이 난립하며 갖가지 요설을 늘어놓고 있다.


남녀의 사주풀이나 연말연초의 토정비결은 시들해졌지만, 젊은 세대는 타로에 열광하는 풍조가 지배적이라 한다. 한때 혈액형으로 알아보는 성격 유형에 열광했듯이 지금은 MBTI를 맹신하는 풍조이다. 그저 편의상의 분류에 불과한 것을 마치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남발하는 셈이다.


반면 한때 조선총독부에서 파악에 열을 올렸던 전통적인 미신으로부터는 점차 탈피하고 있는 점도 희한하다. 최근 뉴스를 보니 지난 수년간 주요 납골당의 무연고 유골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전국 봉안 시설의 90퍼센트가 포화 상태라서 무연고 유골부터 폐기 방법을 고민한다는 것이다.


부모와 가족의 유골조차도 남에게 맡겨놓고 찾아가지도 않는다니. 이쯤 되면 <파묘>에 묘사된 풍수에 대한 믿음은 이미 근대적으로 극복된 걸까. 하지만 단순히 경제 논리에 따른 얄팍한 행동일 뿐이니 애초부터 미신은 핑계임을, 또는 주머니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오락 이외에 미신을 진심으로 신봉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최근 비상 계엄 전후의 상황을 보니 그 위력과 해악이 여전히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망연자실하게 된다. 정부 고위층이며 심지어 군 수뇌부까지도 무속 행위에 혈안이 되었다니 말이다.


애초에 그런 몰상식한 인간들은 출세하지 못하도록 주저앉혔어야 하는데, 도대체 어쩌다가 대통령부터 장성이며 기관장까지 하나같이 미신의 신봉자들이 요직을 차지한 걸까. 이쯤 되면 근대인 무라야마 지쥰 앞에서건, 가상의 음양사 무라야마 쥰지 앞에서건 우리도 할 말이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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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반세기 만에 돌아온 비상 계엄 사태를 경험하고 보니, 그간 세상이 변화 발전한다는 느낌도 말짱 환상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다. 이건 단순히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미국과 러시아는 신냉전에 접어들었고, 우크라이나며 중동 전쟁에서는 핵 위협까지도 종종 거론된다.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핵 공포가 사라지고 세계 평화가 실현되나 싶더니만, 21세기 내내 전쟁과 테러가 여전하여 지상에는 여전히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민주주의건 자본주의건 끝없는 발전의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이고, 한때 그 대안으로 여겨지던 다른 이념과 체계 역시 매한가지다.


결국 앞으로 나아간다고 여겼던 반세기조차 실상은 제자리걸음에 불과했으니 참으로 허망한 느낌마저 든다. 이런 상황에서 의외로 위안이 되었던 책은 지난번 현직 대통령의 실책 가운데 하나인 사과 가격 파동을 계기로 다시 읽은 역사 에세이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였다.


역사가 레이 황은 중국사의 여러 가지 특수한 사건들을 거론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역사가 장기적으로 합리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격언처럼, 아무리 이상하고 이해불가능하게 보인 사건조차도 결국에는 이치에 맞는다는 걸까.


어쩐지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나, 결국에는 하늘이 사람을 이긴다"는 말도 떠오른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에세이에서 각별히 인상적이었던 인용문인데, 아버지와 형을 죽인 원수의 시체를 파내서 매질한 오자서를 향해서 복수가 지나치다며 자제와 포용을 당부하던 신포서의 말이었다. 


물론 하늘의 법도나 섭리라는 것이야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허구의 개념에 불과할 것이고, 레이 황이 지적한 역사의 장기적 합리성 역시 무제한의 낙관주의를 깔고 있는 순진한 발전 사관까지는 아닐 것이다. 다만 수명의 장단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인식의 상대성을 지적한 것은 아닐까.


최근 뒤적인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에서는 물질 세계와 문명 건설을 처음부터 분리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왕조와 전쟁 중심의 정치사에 머무른 기존의 역사보다 더 넓은 시야를 도모하려는 것이었을까. 산과 바다처럼 유구함이 특징인 불변의 조건도 실제로 있으니 일리가 있어 보인다.


비록 불변까지는 아니어도 비교적 변화가 적거나 느린 자연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단지 그 위에서 복작대며 흥망을 거듭하는 인간사의 허망함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군웅과 제국의 정치와 군사 활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화며 문명이며 하는 것 역시 찰나의 가치밖에는 없는 게 아니려나. 


이쯤 되면 레이 황이 언급한 역사의 합리성도 설득력 있게 보일 수 있다. 그가 예시하는 중국 역사의 여러 사례만 보아도 수십 년의 정체와 퇴보는 가능할지 몰라도, 수백 년의 단위로 보자면 그런 문제점조차도 결국 극복되고 일신되어 문명이 더욱 견고해졌다는 것이 핵심 논지이니 말이다.


참새의 날개짓이 대붕의 날개짓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물론 길어야 칠팔십인 인간의 수명으로 보자면 수백수천 년의 장기 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실수를 반복한다'는 인터넷 밈처럼, 순간의 착오로 수십 년간 이어질 차질을 빚는 것도 그래서일까.


그렇게 보면 지난 반세기의 제자리걸음도 수백 수천 년의 견지에서는 결국 역사의 합리성에 희석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될 날이 오려나? 물론 지금의 현실에서는 '교통 사고가 있어야 합리적 교통 정책도 생기는 법'이라는 역사가의 현명한 조언도 아주 큰 위로까지는 되지 못할 법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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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책더미를 뒤지다가 몇 년 전에 알라딘 건대점에서 구입한 로버트 펜 워런의 <악마의 형제들>이 보이기에 꺼내 놓았다. 그 당시에 어떤 책을 사면서 배송료 지우려고 다른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작품은 생소해도 작가는 너무 유명하다 보니 주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버트 펜 워런(1905-989)은 20세기 미국의 저명한 작가로, 소설과 시 양쪽에서 퓰리처상을 모두 세 번이나 수상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아울러 클리언스 브룩스와 공저한 <시의 이해>와 <소설의 이해> 등을 통해 이른바 신비평의 대표적인 비평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특히 <소설의 이해>는 과거 우리나라 여러 대학에서도 교재로 사용된 까닭인지, 한동안 헌책방에서 복사본 원서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속편 격인 책이 <소설의 분석>이라는 제목으로 현암사에서 번역된 적도 있었고, 단독 저서로는 소설 <천사의 무리>가 삼성출판사에서 번역된 바 있다.


사실 소설 중에서는 1947년 퓰리처상 수상작 <왕의 모든 부하(All the King's Men)>가 가장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이 소설은 훗날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번스타인과 우드워드의 저서 <대통령의 모든 부하(All the President's Men)>의 제목 유래로도 알려져 있다. 


흔히 "모두가 왕의 신하"나 "모두가 대통령의 부하"로 옮기는 제목이지만, 실제로는 마더 구스 동요집에 수록된 "험프티덤프티"의 한 대목에서 가져온 구절이기 때문에 ("왕의 모든 말들, 왕의 모든 부하조차, 험프티를 살리지 못했네") 문맥을 감안하면 "모든 신하"와 "모든 부하"가 맞다.


<악마의 형제들>은 시 분야에서 워런의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장편 극시이다. "시와 대화로 된 이야기"라는 부제 때문에 구입 당시에 얼핏 살펴본 느낌으로는 운문 희곡이 아닐까 지레짐작했는데, 이번에 읽으며 다시 살펴보니 비록 희곡 형식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시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번역서의 제목은 "악마의 형제들"이지만 원제는 "용의 형제들"(Brother to Dragons)이고, 구약성서 "욥기" 30장 29절의 흠정역 성서 번역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영어 번역에서는 해당 구절을 "재칼의 형제들"로 옮겼고, 한글 성서에서도 "이리/승냥이의 형제"로 옮겼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리"가 "용"으로 오인되었는지는 몰라도, 욥이 자신의 몰락을 한탄하는 ("나는 이제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친구가 되어 버렸다") 대목이니, 해당 구절도 "용"보다는 "이리"가 그럴싸해 보인다. 다만 성서에서 "용"이 "악마"의 별칭이니 "악마의 형제들"로 옮긴 게 아닐까.


물론 이 제목에서 가리키는 "형제"의 행적을 보면 "악마"라는 섬뜩한 표현도 아주 틀린 것까지는 아니다. 1811년 미국 켄터키 주의 한 농가에서 백인 릴번 루이스와 이셤 루이스 형제가 17세의 흑인 노예 소년 조지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심지어 그 시체를 토막내서 불에 태우기까지 했다.


강요에 못 이겨 소년의 살해와 시신의 훼손에 동참했던 다른 흑인 노예들이 입을 다물어 버림으로써 단순 실종, 또는 도주로 처리될 뻔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바로 다음날 벌어진 대형 지진 때문이었다. 난리 통에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시신 일부가 결국 이웃에게 발견된 것이다.


비록 온전한 사람 취급까지는 못 받던 흑인 노예였지만, 그렇다고 당시의 법률상 함부로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형제는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고, 교수형이 확실해 보이는 상황에서 유서를 쓰고 동반 자살을 감행했지만, 결국 형 릴번만 사망하고 동생 이셤은 살아남았다.


문제는 살인자인 이들 형제가 무려 미국 전직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조카라는 점이었다. 제퍼슨의 여동생 루시가 찰스 루이스와 결혼해서 낳은 두 아들이 릴번과 이셤 형제였기 때문이다. 그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형제는 제퍼슨의 최측근인 탐험가 메리웨더 루이스와도 친척 관계였다.


그나마 제퍼슨의 대통령 임기가 사건 발생 전인 1809년에 이미 끝난데다가, 마침 해당 지역에 닥친 지진의 여파로 인해 그리 큰 스캔들로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누구보다도 옹호했던 인물인 제퍼슨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충격과 체면 실추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악마의 형제들>은 이 사건의 당사자와 주변인 여러 명이 사후에 만나서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인 워런도 RPW라는 이니셜로 등장해서 이런저런 질문이며 감상을 내놓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인 노예 소년 조지만큼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듯이)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제퍼슨은 생전의 기록 어디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지만, 이 작품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다시피 한 조카들의 행동 때문에 사후에도 수치와 당혹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된다. 급기야 양아들이나 다름없던 메리웨더 루이스까지도 제퍼슨을 난처하게 만든다.


루이스는 제퍼슨의 비서로도 재직했던 최측근이었으며, 이 대통령의 대표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루이지애나 매입 직후에 해당 영토를 탐험하러 떠난 원정대를 지휘했을 정도로 크게 신뢰 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훗날에는 정적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좌절한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루이스가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아무리 좋은 이상도 냉혹한 현실 앞에서는 무기력하더라고 주장하자 제퍼슨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 여동생의 간청을 받아들여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조카들을 용서하기로 한다. 인간에게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함을 시인한 것이다.


사실은 제퍼슨 본인도 흑백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새뮤얼 존슨의 비아냥처럼, '본인부터가 노예주인 주제에 자유를 가장 크게 부르짖은 인물'이기도 했으며, 노예제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 이용했을 뿐더러, 노예 여자에게서 사생아까지 낳았으니까.


따라서 제퍼슨이야말로 인간의 양면, 또는 모순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또 애써 억누른 사람이었다고 치면, 못된 조카들의 범행은 그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현실로 불러낸 악몽 같은 사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수수께끼로 남은 제퍼슨의 침묵 역시 그 반증일지도 모를 일이다.


역자 해설을 보면 남부 출신임에도 흑인 문제에 대해 침묵했던 워런이 본격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 입을 열기 시작한 작품으로도 평가하는 모양이지만, 그보다는 이성과 격정, 또는 천사와 악마의 공존이야말로 인간의 원초적인 상태임을 드러내는 것이 저자의 목표는 아니었을까 싶다.


워런은 <악마의 형제들> 초판을 1953년에 간행했고, 무려 사반세기 뒤인 1979년에 내용이 대폭 수정된 개정판을 간행했는데, 우리말 번역본은 그중 개정판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 운문 번역의 어려움을 감안하면 비교적 무난한 편이지만, 일부 대목에서는 살짝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다.


특히 편집 면에서 아쉬운 부분을 여럿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고유명사(미노토/미노타우로스)와 주요 용어(준주/테리토리)가 통일되지 않은 것이 거슬리고, 권말의 미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본문에서는 해당 부분에 미주를 보라는 표시가 없는 것 역시 이해하기 힘든 실수이다.


역자 해설도 작품의 해석에 치중하다 보니, 일반 독자가 이 책을 읽기 위해서 필요한 사전 지식을 제공하지는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흑인 노예 조지 살인 사건의 개요는 물론이고, 제퍼슨과 메리웨더 루이스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배경 설명을 해 줬다면 어땠을까.


그나저나 <악마의 형제들>을 읽고 보니 워런의 다른 작품도 어떨지 궁금해진다. 내친 김에 오래 전에 사다가 묵혀 놓은 소설 <천사의 무리> 번역본도 읽어보려고 꺼냈는데, 함께 수록된 버드 슐버그의 크리스마스 단편을 읽다 보니 휴일이 지나가 버렸다. 과연 올해 안에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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