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철학자 겸 정치인 키케로의 삶에서 최고의 순간은 아마 카틸리나 내란 음모를 저지하고 '국부' 칭호를 받은 바로 그때였을 것이다. 하지만 더 넓은 견지에서 따져 보자면, 바로 그 영광의 순간이 키케로의 삶에서는 결정적인 패착이자 이후에 몰아닥친 역풍의 원인이었으며, 머리와 양손이 잘리는 비참한 최후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의 시작이기도 했다.


내란의 주모자 카틸리나는 본래 귀족 출신이지만 공직 선거에서 패배하자 앙심을 품었고, 포퓰리즘 공약으로 얻은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무력 행사를 통한 정권 탈취를 모의한다. 정보 유출로 모의가 사전 발각되자 수괴인 카틸리나는 로마를 빠져나갔지만, 공모자 가운데 여러 명이 체포되어 구금된 상태에서 그 처분을 놓고 원로원에서 긴급 회의가 열렸다.


당시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카틸리나를 비난하는 연설을 모두 네 번에 걸쳐 내놓았는데, 그중 마지막 연설에서는 구금된 내란 공모자를 즉결 처형하자고 주장했다. 카이사르가 대안으로 징역형을 제시했지만, 카토의 지지를 얻은 키케로는 결국 내란 공모자 처형을 집행했고, 그 결과로 앞에서 말했듯이 '국부' 칭호를 얻으며 모두의 칭송을 받았다.


후세의 역사가들이 지적했듯 카틸리나 내란 음모 사건은 위험성이 과대평가된 면도 없지 않지만, 제거 대상 1순위로 살생부에 오른 키케로의 입장에서야 상황이 위중하다고 판단할 이유가 충분했다. 문제는 신약성서에서 사도 바울의 사례로 널리 알려졌듯이, 아무리 비상 상황이라도 로마 시민을 정식 재판에 회부하지도 않고 처형한 것이 위법이라는 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년 후에 정적 중 하나가 과거 내란 관련자 처형의 불법성을 지목하며 반격에 나서자, 결국 키케로는 전재산을 빼앗기고 목숨만 건져 로마에서 탈출하는 처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힘겨루기로 인한 복잡한 정세로 망명 생활은 비교적 금방 끝났지만, 한때 '국부'로 추앙되던 키케로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쇠퇴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카이사르가 반대했듯 제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로마 시민을 즉결 처형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처형된 공모자들이 하나같이 귀족 자제라는 점 역시 강대한 세력과의 숙원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원인이었다. 내란의 위협은 사실이었지만, 대중과 원로원의 지지가 굳건한 상황에서 좀 더 아량을 베풀었다면 어땠을까.


오래 전에 읽은 키케로 전기며 관련 역사서를 다시 한 번 꺼내 뒤적여 본 까닭은 당연히 최근 진행 중인 우리나라의 탄핵 정국 때문이다. 탄핵안 가결 직후부터 야당이 이미 정권이라도 교체된 듯 큰소리치기에 저러다 역풍 맞지 않겠나 싶더니만, 그렇잖아도 이번 공수처의 헛발질에 극우를 중심으로 보수가 결집하며 대립 양상이 점점 본격화되는 듯한 모양새다.


비상 계엄 해제 직후 누군가가 이번 일을 키케로의 카틸리나 내란 음모 저지에 비견했었는데, '선거'와 '내란'과 '살생부'와 '탄핵'이란 친숙한 키워드가 포함된 그 사건도 결국 깔끔하게 마무리되지는 못하고 시빗거리를 남긴 까닭에 키케로 개인의 불행과 로마의 국가적 혼란으로 이어졌음을 감안하면, 우리로서는 가급적 그 선례를 따르지 않기를 바라야겠다.


비상 계엄과 내란 모의를 놓고 지금 여러 갈래로 이루어지고 있는 수사에서는 너도나도 '법잘알'인 관계로 숱한 주장과 해석이 충돌하는 상황이다. 종종 분통 터지는 상황도 없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절차의 정당성을 유지하면서 시빗거리를 남기지 않고 순리대로 진행하여, 내란 동조 및 비호 세력이 꼬투리를 잡을 만한 여지를 없애는 것만이 최선은 아닐까 싶다.


비상 계엄 당일에 해제 결의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한시가 급하니 서두르라는 일부 의원들의 볼멘소리를 가라앉히며, 이것도 다 절차적 정당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국회의장이 타일렀던 것처럼, 말 그대로 급할수록 차분히 가는 것만이 최선은 아닐까.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서는 못 쓴다는 점을 공수처의 헛발질이 보여주지 않았는가.


아울러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관계자들에게는 실실 쪼개지 말고 표정 관리부터 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진지함이 결여되면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사안이 엄중한 만큼 불필요한 조롱과 돌출 발언으로 공연히 상대를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 윤석열에 실망한 유권자라 해서 모두 이재명을 지지할 리 없다는 사실이 최근 여당 지지율 회복 추세로 드러나지 않았나.


비록 형세를 오판해 훗날 반격의 빌미를 자초했던 키케로조차도 내란 공모자 처형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카틸리나 비난 최후 연설의 말미에서는 혹시 자기가 내란 진압에 실패해 살해된다면 가족을 돌봐 달라 부탁하며, 나중에라도 자기 아들을 보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의 자식임을 기억해 달라고 모두를 향해 호소한다.


키케로의 직업에 항상 '웅변가'가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감동적인 발언인데, 물론 탄핵을 주도한 야당 의원들에게 거기 버금갈 명연설을 요구할 생각은 없다. 다만 역사상 가장 똑똑한 철학자 중 하나였던 사람도 최대한 진지하게 행동한 (그런데도 역풍을 맞았던) 선례가 있으니, 그만도 못한 댁들은 알아서 눈치 챙기라고 핀잔을 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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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성추문과는 별개로 영화의 역사상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차이나타운>은 LA의 한 사립탐정이 한 여성으로부터 남편을 뒷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시작한다. 탐정은 평소처럼 해당 남성의 외도 사실을 알아내서 증거 사진과 함께 의뢰인에게 넘기지만, 미처 몰랐던 뜻밖의 사실이 드러나며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사건의 발단인 불륜남이 극중에서 LA 시청의 고위 공직자로 수자원 정책을 좌우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물이 부족한 것으로 악명 높은 캘리포니아 주이다 보니 수자원을 둘러싼 이권 다툼도 적지 않다는데, 영화가 진행되며 밝혀지는 사건의 발단 역시 물 분배에 대한 관계자들의 의견 차이로 인해 생겨난 갈등이었다.


오래 전에 본 영화를 새삼스레 떠올리게 된 까닭은 최근 미국 LA 인근에 발생한 대형 산불의 진화 작업이 난항을 겪으면서 피해가 속출한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물은 부족하고 산불은 빈번했던 지역이라 최근 수년간을 돌아보아도 비슷한 사건이 매년 반복되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과거의 어떤 사례조차 능가할 만큼 대규모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지구온난화를 들먹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매년 수천 건씩 발생했다니 단순 인재로만 보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다만 자연 발생하는 주기적 산불이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반면, 최근의 산불은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는 까닭에 이득보다는 손실이 크다 봐야겠다.


연예인의 고급 주택이 전소되고 기회주의적 약탈까지 빈번하다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에도 약탈 소문이 퍼졌지만 결국 유언비어로 판명되었는데, 이번에는 사실인 듯하니 가뜩이나 치안 상황이 악화일로인 상태에서 무정부 상태가 펼쳐진 셈이다.(물론 비상 계엄 후 진짜 무정부 상태인 우리 입장에서 할 말까진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당선인 도널드 트럼프가 이번 사태를 놓고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비난했다고 해서 화제다. 하찮은 물고기 따위를 살리겠다며 수자원 정책을 변경하는 바람에 산불이 확산하는 중에도 진화에 필요한 물이 없어서 쩔쩔 매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인데, 물론 주지사는 물론이고 주 정부에서도 사실과는 다르다며 반박을 내놓았다.


도대체 무슨 물고기를 말하는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캘리포니아 주의 태평양 연안에 서식하는 바다빙어과의 고유종이라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깥양반이 좋아하는 술안주인 열빙어(시샤모)의 사촌 격이라는데, 하찮다는 폄하와 달리 그 지역의 주요 지표 생물이자 먹이 생물이며, 이미 반세기 전인 1973년에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었다.


이 물고기를 위협하는 원인으로는 서식지의 상태 악화, 외래종의 침입, 수질 오염, 수온 변화, 수자원 정책 등이 꼽힌다. 이번에 논란이 된 수자원 정책은 본래 트럼프 1기 집권 당시에 캘리포니아 남부의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북부의 자연적인 물길을 바꾸는 내용이었는데, 주지사가 이에 반대하면서 바다빙어의 보호를 구실로 삼았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여러 언론사가 이미 내놓은 팩트체크에 따르면 트럼프의 주장은 거짓에 불과하다. 농업용수 확보와 소방용수 부족은 별개의 문제이며, 주지사가 멋대로 뒤집은 결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방 정부와의 소송에서 바다빙어를 들먹인 것만은 사실이라서 주지사는 졸지에 하찮은 물고기와 귀중한 사람 목숨을 맞바꾼 악당이 되었다.


모든 생물이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고 보는 생태학의 관점에서는 어떤 생물을 하찮다고 간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고생물학자 리처드 포티의 말마따나, 하찮아 보이는 곤충이나 이끼에 대한 연구가 의외로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럼프의 주장이야 늘 그렇듯 지나친 과장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산불 진화가 어려운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강풍과 가뭄 같은 자연적 원인뿐만 아니라 기반 시설 노후화 같은 대책의 한계 역시 상황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듯하다. 이번 산불의 피해 지역이 서울 면적의 4분의 1에 달한다는 보도까지 접하고 보니, 새삼스레 미국이란 나라의 광활함과 아울러 그 진화 작업의 어려움 역시 깨닫게 된다.


한편으로는 자연 재해가 졸지에 정치적 쟁점으로 변모하면서 생겨난 파장 역시 만만치 않을 것도 같다. 산불이야 결국 사라지겠지만, '하찮은 물고기' 운운 하는 트럼프의 프레임 씌우기의 영향은 그보다 좀 더 오래 가지 않을까. 최근 우리나라의 탄핵 절차를 둘러싼 논란만 봐도 현실에서는 가짜 뉴스야말로 산불보다 더 무섭게 번진 듯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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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영화 <하얼빈>을 보고 오더니 기대보다 괜찮았던지 새삼 김훈의 동명 소설까지 찾아 읽고 있기에 (그 소설이 영화 원작은 아니라 한다) 예전에 사다 놓은 <안중근 의사 자서전>을 함께 읽으라고 꺼내주었다.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라는 단체에서 1979년 간행한 동명의 세로쓰기 서적에서 공판 기록과 신문 기사 등을 제외하고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추모시 등 몇 가지만 엮어 1990년 가로쓰기로 간행한 비매품 서적이다.


안중근이니 윤봉길이니 이봉창이니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워낙 많이 들어 친숙하지만, 이번 기회에 자서전을 뒤적여 보고 관련 내용을 검색해 보니, 사실은 나도 많은 것을 잘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때 어느 걸그룹 멤버가 퀴즈에서 안중근을 몰라보고 엉뚱한 대답을 내놓아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았는데, 따지고 보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역사적 사실 외에 안중근을 속속들이 아는 일반인도 드물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귀님도 언제부턴가는 안중근을 비롯한 각종 '의사'들을 오히려 외면해 온 감도 없지 않은데, 저 유명한 손바닥 도장을 비롯해서 워낙 많은 이미지와 인용문이 사방에서 남발되어 피로했던 탓이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일종의 반대급부로 평소에 하도 많이 들어 본 안중근과 윤봉길보다는 미처 몰랐던 홍범도니 김산이니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바깥양반이 뒤늦게야 영화를 통해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게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인 듯한데, 덕분에 나귀님도 상당히 오래 전 어느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입했던 자서전을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다.


자서전 "안응칠 역사"는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쓴 것으로 자신의 출생과 성장부터 암살과 재판까지의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담고 있다. 아쉽게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필사본과 등사본만 남아 있다.


그런데 자서전 내용 중에 한 가지 희한한 일화가 눈길을 끌었다. 서울에 머물던 안중근이 부친 위독 소식을 듣고 귀향하던 길에 지인과 동행했는데, 마침 지인의 말을 몰던 마부와 시비가 붙어 얻어맞았다는 것이다.


당시 가뭄이 심했는데, 문득 마부가 길가의 전신주를 가리키며 '외국인이 세운 저 물건이 공중의 전기를 모조리 빨아들여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안중근이 읏으면서 '무식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러자 무식하다는 소리에 발끈한 마부가 말채찍으로 안중근의 머리를 여러 번 내리치며 욕을 퍼붓더라는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 주위 사람들이 마부를 처벌하자고 권했지만, 안중근은 그냥 보내 주었다 한다.


우습다면 우스울 수 있고, 또 민망하다면 민망할 수도 있는 일화인데, 뤼순 감옥에서 자서전을 쓰는 중에 그 일이 뇌리를 스쳤던 것으로 보아, 안중근의 입장에서도 사실은 마부의 소행이 두고두고 괘씸했던 게 아닐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짜 뉴스를 무작정 신봉하는 무식쟁이가 합리적으로 반박하는 현명한 사람에게 적반하장으로 굴었던 셈이니, 거짓에 미혹되어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에 전기가 도입된 지 불과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근대 기술을 처음 접한 조선인들로선 낯설고 두렵게 여겼을 터이고, 자연스레 자신들이 겪는 이런저런 불운을 그 탓으로 돌렸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영화 <파묘>를 통해 다시 주목 받은 '일제의 민족 정기 쇠말뚝 훼손설'도 같은 맥락의 헛소문인데, 근대 국가 일본의 식민지 수탈의 일환이었을 측량 사업이 미신적으로 왜곡되어 지금껏 회자되니 한심한 일이다.


헛소문이란 도깨비 사과와도 비슷해서 제아무리 반박하고 해명해도 사라지지 않고 기세등등해질 뿐이다. 최근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서 그 절차와 내용에 대해 제기된 온갖 가짜 뉴스와 억지 주장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똑같이 언성을 높여 보았자 해결될 리 없으니, 결국 안중근처럼 상대방의 욕설과 폭행에도 인내하며 최대한 투명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만이 방법이지 않을까. 물론 안중근도 나중에 생각하니 빡치긴 했던 듯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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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 첫화면에 뜨는 구글 홈페이지의 로고가 어째서인지 흑백으로 나와 있기에 눌러보니 지난 12월 29일에 무려 100세의 나이로 사망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거행되는 현지 시간 1월 9일이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된 까닭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여객기 사고로 인해 지난 주 내내 국가 애도 기간이었다. 그 여파로 방송이며 공연 등이 줄줄이 연기되고, '나는 많이 추모하는데 너는 왜 덜 추모하느냐'며 꼬투리 잡는 경우까지 생기자, 강요된 추모에 불만도 속출한 듯하다.


검색해 보니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국가 애도 기간은 천안함과 이태원에 이어서 이번 여객기 사고까지 모두 세 번 선포되었으며, 하루짜리 국가 애도의 날은 천안함과 9/11 때에, 그리고 의외로 1972년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사망 때에 선포되었다고 한다.


트루먼이라면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인기가 없었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 원래는 부통령이었다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 직위를 승계하게 되었는데, 누가 봐도 대통령 감까지는 아닌 소박한 인물이다 보니 우려를 자아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다가 갖가지 난제가 산적한 상황이다 보니 새로운 정부 출범부터 미국은 물론이고 전세계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렵사리 재선에까지 성공하며 비교적 무난하게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


지금은 역대 미국 대통령의 순위를 매길 때에 10위권 내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나름대로의 인기 대통령이지만, 재임 중에만 해도 트루먼은 솔직하다 못해 거칠게까지 느껴지는 돌출 발언 등으로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오르는 등 전반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 트루먼보다도 한층 더 인기가 없었던 대통령이 바로 최근 사망한 지미 카터이다. 우리에게는 퇴임 후의 각종 특사며 평화 운동 등으로 널리 알려지며 좋은 이미지를 쌓았지만, 재임 중의 카터는 연이은 정책 실패로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은 대통령이었다.


그나마 트루먼은 재선에도 성공했지만 카터는 재선에도 실패했고, 역대 미국 대통령의 평가에서도 트루먼은 갈수록 순위가 높아지는 반면 카터는 여전히 바닥 근처를 헤매고 있는 실정이니, 퇴임 후의 좋은 이미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의외로 보일 수 있겠다.


어찌 보면 카터야말로 '사람은 누구나 자기 무능이 드러나는 지위까지 승진한다'는 피터의 법칙의 사례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트루먼 같은 예외도 있으니 법칙까지는 아닌 것도 같지만, 최근 한국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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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알라딘 중고샵을 기웃거리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경상도 사투리로 옮긴 <애린 왕자>라는 책을 발견했다. 지역 방언으로 구술하거나 저술한 책이 나온 경우는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지만, 해외 유명 고전까지 사투리로 옮긴 경우는 처음 보는 셈이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십중팔구 누가 진반농반으로 만든 이벤트성 출판물이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최근 다시 알아보니 경상도 버전 <애린 왕자>에 이어서 전라도 버전 <에린 왕자>와 강원도 버전 <언나 왕자>까지 나와 있었다. 심지어 다른 출판사에서는 제주도 버전 <두린 왕자>까지 만들어서 내놓았다!


이쯤 되면 <어린 왕자>의 사투리 번역물 제작이 수년 전의 온갖 복각본과 초판본과 대만 카스테라와 탕후루처럼 일종의 유행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서울 버전 <어린 왕자>는 물론이고,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89-31 버전 <알라딘 왕자>'도 나올 수 있지 않겠나.


왜 하필 <어린 왕자>일까? 그야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번역본만 해도 부지기수일 터인데, 그 내용의 모호함 역시 인기를 더해주는 요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프랑스어 전공자인 지인의 말로는 원문 자체도 사실 그리 쉽다고까지는 할 수 없는 문장이라던데.


왜 하필 사투리일까? 이건 솔직히 나귀님도 모르겠다. 다만 일단 프랑스어에서 표준어로 번역하고, 다시 사투리로 번역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쳤으리라 짐작해 보면, 십중팔구 어떤 필요보다는 단순한 재미 때문에 만든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심지어 한 출판사가 세 종이나 냈으니까.


그렇다면 정작 그 지역 출신으로 사투리를 아는 독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마침 제주도 출신인 바깥양반에게 알라딘 미리보기에 올라온 <두린 왕자>를 보여주었더니, 처음에는 우스워하더니만 조금 읽다 말고 뭔가 좀 어색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현대식 표기법을 고수해서 생긴 한계일까.


제주어의 경우에는 민속학자 진성기가 채록한 자료집이 여러 권 있는데, 그중 <남국의 민담>과 <남국의 민요> 같은 책을 보면 아래아('아'와 '오'의 중간 발음이라는데, 때로는 둘 중 하나로 발음하는 듯하다) 표기를 비롯해서 미묘한 현지 발음을 살리려고 최대한 노력한 흔적이 남아 있다. 


진성기는 제주도 출신으로 해방 이후 현지 민속 연구를 사실상 개척한 선각자라고 할 수 있는데, 사설 박물관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지역 관청에 밉보여 골탕을 먹기도 하고, 지인에게 크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알고 있다. 저서로 '제주민속총서' 20여 권이 있다.


'제주민속총서'에는 신화, 전설, 민담, 민요, 무가 등 다양한 자료가 담겨 있는데, 검색해 보니 이와는 별개로 진성기가 신약성서 "마가복음"을 제주도 사투리로 번역한 단행본도 간행했다고 하니, 이것 역시 지역 방언의 특색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사투리라면 한때 표준어에 어긋나는 나쁜 습관처럼 간주되어 고쳐야 할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보다는 영어 학습에서 흔히 말하듯 일종의 이중언어구사능력이라고 바라보는 편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아프리카나 인도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한 사람이 여러 부족의 언어를 구사하듯이 말이다.


약점 대신 장점이라 생각하면,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도 제법 신선한 특기일 수 있겠다. 서울 출신 나귀님도 진성기 책에서 배운 민담 "청가개비"를 명절마다 구연해서 제주도 노인네들에게 삥 뜯고 있으니 <에린 왕자>나 <두린 왕자>를 구매한 독자들도 한 번 도전해 보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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