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덕분에 필립 할스먼의 <점프!>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 뒤적이면서 가장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사진은 바로 배우 탤룰라 뱅크헤드의 사진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이 책에 수록된 거의 모든 (왜냐하면 끝내 점프 포즈를 거절한 밴 클라이번 같은 사람도 있었으니까) 모델과 마찬가지로 힘차게 위로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 밑에 달린 사진가의 캡션처럼 "탤룰라 뱅크헤드의 발은 땅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다."(127쪽) 즉 이 배우는 오른손에 담배를 쥔 상태에서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잔뜩 위로 솟구친 시늉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자리에 서서 한 발만 들고 고개를 치켜드는 등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점프를 소재로 하는 사진집에서 유일하게 "가짜" 점프를 해낸 사람이니, 그것도 사진가의 말마따나 "탁월한 여배우가 꾸며낸" "탁월한 몸짓과 표현력"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사진가도 그런 이유에서 굳이 이런 점프 아닌 점프를 이 사진집에 수록했을 터이다. 이쯤 되면 이 여배우의 성격 자체가 평소에 장난을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자연스레 떠오르는데, 대표작인 히치콕의 영화 <구명 보트> 촬영 당시에는 아예 노팬티로 촬영장에 나와서 제작진을 당황시켰다는 일화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이건 히치콕 전기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매번 사다리에 오를 때마다 밑에 남자 스탭들이 우글거렸다나).


그런데 탤룰라 뱅크헤드라는 여배우나 히치콕의 영화까지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탈룰라"라는 이름만큼은 아마 대부분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건 최근 들어 유행한 인터넷 밈 때문인데, 자메이카 봅슬레이 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쿨러닝>의 한 장면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즉 경험도 전무하고 장비도 부실한 봅슬레이 팀이 본격 출범하면서 자기네 썰매에 무슨 이름을 붙여 줄지를 논의하는 대목에서, 그중 한 명이 "탈룰라 어때요?" 하고 제안하자 나머지 모두가 비웃다 못해서 "무슨 창녀 이름이냐" 하고 핀잔을 주는데, 곧이어 제안자가 "우리 엄마 이름인데..." 하고 덧붙이자 180도 태세 전환에 나서서 좋은 이름이라 둘러대는 것이다.


이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지금은 "탈룰라"라고 하면 말실수, 또는 패드립의 대명사가 되었다니 희한한 일이다. 물론 나야 <쿨러닝>보다는 <구명 보트>를 먼저 알았고, 그보다 더 먼저 탤룰라 뱅크헤드라는 배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도 종종 "탈룰라"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패드립보다는 오히려 노팬티가 먼저 생각나지만 말이다. 물론 이제는 할스먼의 사진집에 나온 가짜 점프 사진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앞으로 한동안은 노팬티 다음으로 가짜 점프 사진이 생각날 수도 있겠다.(여기서 문득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물려받은 아주머니 동명이인의 노팬티 스캔들도 생각난다).



[*] 책에도 나오지만 할스먼이 이 연작 사진을 찍게 된 계기가 "흠좀무" 하다. 자동차 재벌 포드 가족의 단체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심심풀이로 대뜸 에셀 포드(헨리 포드의 아들)의 부인에게 점프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해서 사진을 찍었더니만, 그걸 지켜보던 포드 2세(헨리 포드의 손자)의 부인이 "갑툭튀" 하더니만 자기도 점프 포즈로 찍어 달라고 자청해서 촬영을 했고, 그러고 나서는 문득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는 곳마다 유명인사를 상대로 점프 포즈를 요청해서 결국 유명한 사진집까지 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식으로 바꿔보자면 정주영 며느리와 손주며느리에게 점프를 시켰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홍라희한테 점프를 시켰더니 임세령까지 덩달아 점프를 자원했다고 해야 할까, 이런 것을 탈억제라고 하는지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흥미로운 일화인 것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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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러 가겠다며 바깥양반이 책 꺼내 놓으라기에 전기 세 권, 핵무기 개발 네 권, 고등연구소 세 권 (사실은 한 종), 파인만 세 권 (역시나 한 종), 기타 등등을 줄줄이 꺼내 놓았더니만, 이번 영화의 원작이라는 두꺼운 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로버트는 얼마나 좋았을까") 결국 아인슈타인과의 공동 전기에서 오펜하이머 장만 쏙 빼서 읽고, <트리니티>라는 만화책 한 권만 추가로 읽고 가서 영화를 본 모양이다. 물론 아무 것도 읽지 않은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쯤 되면 나로서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밖에 없다. "아니, 책으로 읽을 게 이렇게 많은데 뭐 하러 영화를 봐?"


영상 예술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전기 영화는 극적 표현을 위해서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아무래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전기나 논픽션 같은 쪽이 더 객관적이고, 설령 상충되는 시각이 있더라도 서로 대조해 보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비해 영상 매체는 강력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깊은 인상을 새겨주기 때문에, 일단 눈으로 한 번 본 광경은 잊어버리고 새로 상상하기가 어렵다. 짐작컨대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먼저 보면 소설 속 장면을 달리 상상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여하간 영화 덕분에 오펜하이머며 핵무기 관련서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본 것은 반가운 일이었고, 이번 기회에 뒤적뒤적 하면서 그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또는 상기하게) 되었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지금은 절판된 (아울러 알라딘에는 번역을 성토하는 글이 여럿 올라온) 제러미 번스타인의 오펜하이머 전기 표지를 보니 필립 할스먼의 저 유명한 "점프" 사진이 나와 있어서 새삼스레 그 화보집도 오랜만에 꺼내서 그 사진을 촬영하던 당시에 있었던 사진가와 과학자의 대화 부분을 읽어보기도 했다.(할스먼의 <점프!>도 이미 절판되었다. 요즘은 책의 수명이 정말 짧구나!)


필립 할스먼은 살바도르 달리와의 공동 작업으로 유명한 미국의 사진가인데, 언젠가 판에 박힌 초상 사진만 찍는 것에 지루함을 느낀 나머지 모델에게 점프 포즈를 제안했고, 의외로 반응이 좋자 주요 레퍼토리로 삼았다. 할스먼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찾아가서 사진을 찍었을 때, 오펜하이머는 천장을 바라보며 팔을 뻗고 펄쩍 뛰어오른 다음 그에게 질문했다. "제가 점프하는 모습에서 무얼 읽으셨나요?" 할스만이 잠시 고민하다가 뭔가 새로운 방향이나 목표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오펜하이머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뇨, 그냥 닿으려고 한 것 뿐이에요."(44쪽) [*]


<점프!>에서 다른 모델들은 대부분 팔을 내린 상태에서 뛰어오르고, 설령 팔을 치켜든 경우에도 오펜하이머만큼 길고 날렵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특히 남자들은 대부분 양복 저고리에 단추를 채운 상태이다 보니, 위로 치솟는 동작에서 어깨 부분이 부풀면서 볼품없이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예 시선을 하늘로 두고 풀어 헤친 양복 저고리를 휘날리며 뛰어오르는 오펜하이머의 모습은 정말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경쾌하다. 사진가에게 던졌던 질문과 그 답변까지 덧붙여 보면, 어쩌면 앞으로도 한동안 오펜하이머에 대한 내 인상은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이 사진으로 남을 것 같다.



[*] 참고로 이 일화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 역시 정보의 양에서는 두세 시간짜리 영화보다 책이 더 압도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제러미 번스타인은 역시나 물리학자로 일하면서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당대의 유명 물리학자를 직접 만나 보고 전기까지 썼는데, 놀랍게도 93세로 아직 살아 계시다! 예전에 전파과학사에서 나온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썼다고 기억하는데, 오펜하이머 전기에도 당사자를 직접 만났을 때의 일화가 실려 있기도 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일화는 번스타인이 오펜하이머를 처음 만나 인사를 했을 때의 일이다. 의외로 처음에는 오펜하이머가 냉랭하다 못해 무서운 얼굴을 짓더니만, 곧바로 자기가 조만간 고등연구소에 입소하게 되었다고 말하자 표정이 누그러지며 한없이 자애롭게 변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프로메테우스"로서의 역할 못지않게 천변만화하는 "프로테우스"의 기질까지 지닌 것은 아닌가 싶은 저 물리학자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로 기억해 볼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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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나, 만화 좋아하는 양반과 통화하다가 요즘에는 북펀드인지 클라우드펀딩인지로 만들어서 서점 유통 없이 사전 예약자만 나눠 가지고 사라지는 책이 많은 모양이라고 이야기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책이 얼마 전에 그런 방식으로 출간되었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다. 부랴부랴 검색해 보았더니 클라우드펀딩으로 만든 책이기는 한데 다행히 일반 서점에서도 유통되는 모양이라서 알라딘에서도 검색되었고, 나중에 우연히 우주점에 중고가 하나 있어서 구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클라우드펀딩 페이지에서 대략적인 모습을 살펴볼 때부터 하나 의아한 것이 있었는데, 저 유명한 "나사식"을 최종 출간본이 아니라 저자 원고 형태로 실어 놓았더라는 점이었다. 당연히 식자며 수정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영 감상에는 어울리지 않은 상태여서, 도대체 왜 굳이 책을 낸다면서 이런 식의 영인본을 냈을까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한 독자들이 많았는지, 이 책을 실제로 구입한 사람들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한 게시글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막상 책을 구입해서 뒤적여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간의 반응들이 오해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책은 "작품집"이 아니라 "연구서"라는 것이었다. 물론 쓰게 요시하루의 대표작을 네 편이나 수록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작가의 만화를 연구한 본문에 덧붙인 부록에 불과했을 뿐이다. 원제인 <쓰게 요시하루: 꿈과 여행의 세계>를 직역하는 대신 <나사와 검은 물: 쓰게 요시하루 만화집, 작가 연구>라고 제목을 바꾸는 바람에 이런 오해가 생겨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작품집" 아닌 "연구서"라고 생각하면 부록으로 실린 만화가 간행본 버전이 아니라 원고 버전인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애초부터 감상 목적이 아니라 연구 목적이니만큼, 저자가 "XX 해파리"라고 적은 것을 편집자가 "메메(メメ) 해파리"로 오독하게 된 사례처럼 원고가 가공을 거쳐서 최종 간행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자는 뜻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즉 <어린 왕자 백과사전>이나 <빨강머리 앤 이미지북>이나 <가장 완전하게 만든 무민>처럼 작품이 아니라 레퍼런스북인 셈이다.


물론 독자의 입장에서는 속이 쓰린 일이지만, 그간의 여러 차례 교섭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완강하게 자기 작품의 한국어판 발간을 거부하고 있다니, 정식 작품집이 아니라 연구서를 통해서 원고 형태로나마 일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일 것이다. 이쯤 되면 <새만화책> 2권에 수록된 "나사식" 우리말 번역본의 간행 사실이 오히려 의아하고 놀라울 뿐인데, 그 책에도 쓰게 요시하루의 작품에 대한 연구 논문이 두 편이나 수록되어 있으니, 이번에 나온 책과 함께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 그나저나 <새만화책>은 예전에 알라딘 중고샵에서 흔히 볼 수 있었는데 (나도 그렇게 해서 샀으니까) 지금은 완전히 씨가 마른 모양이다. 제1집부터 제6집까지인가 나오고 폐간되었는데, 중간에 살짝 판형을 크게 해서 만든 대역본 특별판도 하나 있었다고 알고 있다.(책장에서 다시 꺼내기 귀찮아서 정확히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정기 간행물인 <새만화책>에 연재한 국내외 작가의 작품을 나중에 단행본으로 재간행한 경우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푸른 끝에 서다>와 (출판사가 바뀌기는 했지만) <앨런의 전쟁>이 그렇다고 알고 있다. 다만 <형무소 안에서>처럼 연재 중에 폐간이 되면서 더는 찾아볼 수 없는 작품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나사식"을 살펴보느라 다시 꺼내 놓은 제2집을 뒤적이다 보니 의외로 <골리앗>의 저자 톰 골드의 "왕국의 파수병들"이 나온다. 허허. 이건 톰 골드의 다른 작품집에도 아직 실리지 않은 것 같으니...<새만화책>의 뛰어난 선구안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아울러 에디시옹장물랭 화이팅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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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새로 번역되었던데, 다시 확인해 보니 처음 나온 흰색 양장본은 한정판이라며 이미 절판되고, 이제는 검은색 표지로 가격이 1만 원쯤 더 저렴해진 보급판만 간행되는 모양이다. 보급판이 금방 나올 줄 알았으면 초판에서 발견된 문제점 몇 가지를 일찍 지적해 줄 걸 그랬나 싶기도 한데, 요즘 와서는 북펀드랍시고 독자에게 구걸은 잘도 하면서 정당한 독자 의견 따위는 가뿐히 씹어버리는 출판사가 허다하니 모른 척 지나가도 그만이겠다.

 

솔직히 <프린키피아> 번역본이 새로 나온다는 소식까지는 반가웠지만, 박병철이 과연 그 일에 적합한 번역자인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구심이 없지 않았다. 물론 과학 분야의 대표적인 번역가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당장 <엘러건트 유니버스>만 봐도 특유의 의역과 첨언 스타일 때문에 호불호가 크게 갈렸다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자면 개성적인 번역인데, 뒤집어 말하자면 원문에 충실하지 않고 가독성을 위한 의역이 지나치다고 여긴 독자도 적지 않았었다.

 

특히 본문에서 저자의 말을 부연하거나 반박하는 내용의 역주가 길게 달린 경우도 있었는데, 때로는 이해를 도울 수도 있지만 때로는 몰입을 방해하는 느낌을 주기도 해서 독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기억이 맞나 싶어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오랜만에 꺼내 보니, 저자가 새천년을 앞두고서운운 한 대목에다가 번역하다 보니 새천년이 지나갔다는 역주를 달아 놓은 것이 눈에 띈다. ... 이쯤 되면 확실히 호불호가 갈릴 만해 보인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과연 번역자의 이런 개성이 <프린키피아>라는 유명 고전과 만났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였다. 고전 번역의 일차적인 원칙은 설령 문장이 딱딱해진다 하더라도 최대한 원문을 존중하는 것일 터인데, 번역자의 그간 행보를 보면 충실한 원문 직역과는 뭔가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뉴턴의 말 한 마디마다 일일이 토를 달지는 않더라도, 내용 이해를 위해 원문을 과감히 희생시킬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그래서 알라딘 미리보기로 번역서를 살펴본 결과 (비록 어디까지나 뉴턴의 서문에 한해서지만) 내가 확인한 부분에서는 예상대로 원문을 충실히 옮겼다고 보기에는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문장 자체가 워낙 옛날 말투에다가 유난히 장황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번역 과정에서는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운 대목이 여러 가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짜 알바를 할 이유는 없으니 비교적 사소한 두 가지만 지적해 보자.

 

첫째로, “그리스의 철학자 파푸스”(8)라는 인명은 그리스의 수학자 파포스라고 해야 맞다. 원문의 영어식 표기(Pappus) 말고 그리스어 표기(Πάππος)에 따르면 파포스가 맞고, 원문에는 없는 그리스의 철학자라는 첨언이 들어갔지만 본문의 맥락에서는 그리스의 수학자라고 해야 어울리며, 실제로도 수학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대한 오역까지는 아니지만,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을도모했다고 자화자찬하는 책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둘째로, “현대에는 자연에서 초자연적인 개념을 배척하고”(8)라는 구절에서 초자연적인 개념이라 뭉뚱그려 옮긴 구절의 원문은 실체적 형상과 비의(秘義)적 성질”(substantial forms and occult qualities)이다. 물론 오늘날의 과학에서는 무의미한 과거의 발상이니 초자연적인 개념이라 의역해도 그만일 듯하지만, 문제는 실체적 형상이 생성/변화를 설명하는 스콜라 철학의 용어로, 무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나름 유서 깊은 개념이란 거다.

 

파르메니데스 이래 고대 철학에서 존재(불변)와 생성(변화)의 모순 해결이 오랫동안 난제로 여겨졌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는 씨앗이 나무로 자라나는 변화를 씨앗 속에 들어 있었던 나무의 형상의 작용이라고 설명했으며, 이것이 로저 베이컨 같은 스콜라 철학자에 와서는 실체적 형상의 작용이라 개념화되었다는 것이다.(너무 개략적인 설명인 것 같지만, 여하간 코플스턴과 질송의 설명을 뒤적뒤적해 보고 나니까 대략 그러하다는 이야기다).

 

비의적 성질도 딱히 어떤 철학자나 학파의 주장인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 당시까지는 비록 눈에 보이기는 해도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을 퉁쳐 설명하는 일종의 임시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뉴턴의 중력 이론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비의적 성질이라는 비판이 일부 나왔었다니 그 용도를 대강 짐작할 만하다. 여하간 양쪽 모두 뉴턴 시대에는 익히 알려진 용어였던 만큼 초자연적인 개념대신 실체적 형상과 비의적 성질로 옮겨야 한다.

 

어차피 글자보다 숫자가 중요한 책, 즉 본문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식과 설명이 더 중요한 책이니, 짧은 서문 따위 아무러면 어떠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린키피아>는 과학적 의의뿐 아니라 과학사적 의의도 지닌 고전이므로, 저서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엿볼 수도 있는 대목인 서문을 홀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유명한 고전에 대한 외경심에서 일단 구매했지만 완독은 언감생심인 독자 대부분이 그나마 이해할 만한 부분은 서문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최근의 유행과 관련해서 이 책에서 마땅히 주목받아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정작 이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듯해서 한 마디 해볼까 한다. 바로 <프린키피아>가 나올 당시 왕립학회의 대표를 맡은 새뮤얼 피프스의 이야기다. 피프스라면 당대에는 관료 겸 정치인으로 활약했고, 사후에는 장서가 겸 일기 작가로 더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호색가이기도 해서 성매매는 물론이고 종종 성추행을 저질렀던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대표적인 사례가 16681025일자 일기에 나오듯 열일곱 살짜리 하녀의 보지”(cunny)를 만지다가 마누라에게 딱 걸린 사건이다. 결국 부부가 대판 싸우고서 하녀의 해고로 마무리했으니, 이쯤 되면 성폭력에다가 부당 해고까지 일삼은 그의 도덕성이 영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프린키피아>의 초판 속표지에 왕립학회 대표 자격으로 피프스의 이름(S. PEPYS)이 들어갔고, 이 속표지를 활용한 번역본 보급판 표지에도 역시나 들어갔다는 점이다.

 

물리학계의 제1원리가 뉴턴의 <프린키피아>라면 현재 한국 사회의 제1원리는 페미니즘일 터이니, 이쯤 되면 상습 성폭력범 겸 악덕 고용주의 후원으로 간행된 것도 모자라서 가해자의 이름을 버젓이 표지에 적은 책이라는 이유로 <프린키피아>에 대한 전국적 불매 운동이 벌어져야 마땅하지 않을까.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뉴턴 역학에 대한 국가 차원에서의 거부 운동이 벌어져야 마땅하지 않을까. 여러 페미니스트와 프로불편러의 동참을 권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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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샤이러의 <제3제국의 흥망>이 새로 나온 모양이다. 원서가 1960년에 나왔으니 무려 환갑이 넘은 셈인데 아직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노인 학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이 용어는 최근 아이패드2를 초기화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이놈의 물건이 iOS 9.3.5 업데이트 이후로는 계속 버벅대서 주로 고전 에로책 읽기용으로만 사용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저장 공간 부족 메시지가 나와 구글링해 보니 초기화밖에 방법이 없어 보였다. 초기화를 해보니 의외로 쌩쌩 잘 돌아가기에 결국 노후 기기 수명 연장, 일명 "노인 학대"에 성공하긴 했는데, 문제는 백업을 안 해놓는 바람에 에로책이 모두 날아갔다는...)


이미 에디터 구판본 전4권도 갖고 있는데, 이건 일본어 중역에 오타도 많아서 읽기가 썩 좋지는 않았다고 기억한다. 페이퍼백 원서도 하나 갖고 있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고, 같은 저자의 <베를린 일기> 원서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역시나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최초의 번역서인 안동림 번역본도 예전에 어디선가 기념 삼아 구입해 놓았던 기억이 나서 책장을 뒤적뒤적 해 보았더니... 세상에! 아직 남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참 별놈의 책을 다 안 버리고 갖고 있었구나 싶어서 나 스스로가 살짝 징그러워졌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런 징그러움 덕분에 또 하나 끄적끄적 적어볼 수 있게 된 셈이기는 하지만.


안동림 번역본은 원서가 간행된 이듬해인 1961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했는데, 다섯 권이 한꺼번에 나온 것이 아니라 3개월마다 순차적으로 간행되었다. 즉 1권은 1961년 6월, 2권은 1961년 9월, 3권은 1961년 12월, 4권은 1962년 3월, 5권은 1962년 6월에 간행되었으니 완간에 딱 1년 걸린 셈이다. 내가 가진 책은 다섯 권을 박스 하나에 한꺼번에 담아 놓은 세트인데, 결국 완간된 1962년 6월 이후에나 제작된 물건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1-2권의 표지 디자인이 3-5권과는 다르다는 점인데, 아마 간행 도중에 변경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울러 1권은 1962년 6월의 재판본, 4권은 1962년 11월의 재판본이다.


안동림 번역본은 분권 형식과 디자인부터 십중팔구 1961년에 간행된 일본어 번역본의 중역으로 추정되는데, 구글링해 보니 일본에서도 반세기가 다 되었던 2008년에 새로운 번역본이 간행되었으니, 이래저래 "노인 학대"는 어느 나라에서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도서관에서 검색해 보면 안동림 번역본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출판사를 옮겨 간행된 적이 있었다고도 나오는데, 이건 나도 실물을 구경한 적은 없다. 에디터 번역본은 단어 선택과 문장 구조가 대동소이하고 심지어 오역한 부분조차 똑같다는 점에서 정황상 안동림 번역본을 베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드는데, 물론 확증까지는 없고 그저 심증일 뿐이다.


윌리엄 샤이러는 히틀러가 한창 대두하던 시절에 베를린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이력의 소유자로 (그 시절의 이야기가 바로 <베를린 일기>라고 알고 있다), 전후에 미군이 노획한 대량의 독일어 문서를 토대로 <제3제국의 흥망>을 저술했다고 알고 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학술적인 차원에서 (아울러 비판자의 여러 가지 입장을 반영하여) 여러 가지 내용상의 단점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이 저술 자체가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은 이미 저자 스스로도 서문에서 시인한 바 있으니 크게 비난할 거리가 되지는 못하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그 "노인 학대" 급의 지속적인 인기야말로 "현대의 고전"의 다른 표현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나저나 새로 나온 번역본은 무려 7만 원짜리이다 보니 선뜻 손이 나가지도 않을 뿐더러, 과연 제대로 만들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앞설 수밖에 없다. 이런 의구심은 알라딘 미리보기로 대조한 몇 군데 번역문에서 살짝 미심쩍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데, 공짜 알바해 줄 생각은 없으니 가장 확실한 실수 두 가지만 일단 지적질하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첫째는 "역사서로 손꼽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9쪽)라는 대목인데, 원서와 대조해 보니 "위대한 역사서로 손꼽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라고 되어야 정확하다. 교정 중에 단어가 하나 달아난 모양인데, 안동림/에디터 중역본 모두에서는 정확히 옮긴 대목이기도 하다.


둘째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소도시 브라우나우 암 인의 수수한 집에서 태어났다"(22쪽)고 옮긴 대목인데, 안동림 중역본에는 "수수한 집에서"를 "수수한 여관 가스토프 줌 포메르에서"라고 (에디터는 "수수한 여인숙에서"라고) 옮겼기에, 원서를 대조해 보니 후자가 정확한 번역이었다. 비교적 최근에 간행된 존 톨랜드의 히틀러 전기에서도 세관원이었던 아돌프의 아버지가 당시 부임지의 "포메르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고 서술한 바 있었으니, 이것 역시 사소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누락/오역이라고 지적할 만한 부분이다. 이밖에도 몇 가지 문맥을 착각한 듯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귀찮아서 더 이상은 파고들지 않기로 하고 말았다.


물론 투키디데스의 저술을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대목에서 해당 역사서를 소설책이라 오독할 독자가 생길 리는 없을 것이며, 히틀러가 "여관"이 아닌 "집"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대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승리로 끝났다는 잘못된 인상을 받을 독자가 생길 리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안동림/에디터 중역본이 "거리명"으로 오역한 "브라우나우암인"을 "도시명"으로 정확히 옮긴 것은 확실히 더 나아진 점이다. 하지만 7만 원이라는 가격을 감안해 보면, 아울러 "정식으로 완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정확하고 깔끔한 번역"이라는 출판사의 자평을 감안해 보면, 뭔가 어울리지 않는 잔실수같아 해 보는 말이다.



[*] 그나저나 이번 책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 나온 나치 관련서에서 표지에 하켄크로이츠를 턱하니 박아 놓은 것을 보면, 새삼스레 일본 욱일기에 대한 그간이 여론몰이/선동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실감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쪽과 서쪽에서 저마다 악명을 떨쳤던 전범국의 상징인데, 우리가 기분 나쁘니까 너네도 욱일기는 쓰지 말라고 지랄발광을 하면서도, 정작 저쪽에서 기분 나빠할 만한 하켄크로이츠는 스스럼없이 써먹기도 하고, 심지어 골빈 연예인들 중에는 나치 경례며 군복까지 입는 경우가 없지 않았으니 말이다. 심지어 독일 내에서는 오랜 세월 간행조차도 금지되었던 <나의 투쟁>을 "고전"이라는 미명으로 오래 전부터 간행해 온 나라가 바로 이 잘난 대한민국이다. 위안부며 징용이며 각종 전쟁 범죄는 전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유대인의 음모에 불과하다고 일축하고,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갖가지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도 없는 것이 이놈의 나라이다. 따지고 보면 욱일기에 대한 양놈들의 인식은 하켄크로이츠에 대한 조선놈들의 인식과 대동소이하다고 봐야 무방할 것이다. 즉 어떤 나라나 정권이나 시대를 상징하는 것뿐이지, 그걸 쓴다고 해서 그 나라나 정권이나 시대를 지지하고 옹호한다는 뜻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그리고 심지어는 욱일기도 아니고 그냥 태양광선 묘사에 불과한 경우인데 억지를 부리는 경우도 흔하다). 자기네는 남의 역사에 아무 관심도 없고 심지어 왜곡이나 폄하까지도 서슴없이 행하면서도, 전혀 상관도 없는 동네까지 찾아가서 결의안이니 소녀상이니로 수요 없는 K-역사를 공급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K-모순이자 K-위선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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