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여대에서 남녀 공학 전환을 둘러싸고 소란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니, 문득 어슐러 르귄이 에세이 가운데 하나에서 자신의 여대 체험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라는 에세이집을 오랜만에 뒤적여 보니, 기억과는 다른 내용이라 이번 사건에 굳이 갖다 붙이기는 곤란할 듯했다.


이 에세이집의 제목이 유래한 "당신의 여가 시간에"라는 글 도입부에서 르귄은 하버드 대학으로부터 1951년도 졸업생 설문 조사 요청을 받았다고 밝힌다. 하지만 자기는 여성이라 래드클리프를 나와서 그간 동문 취급도 못 받았는데, 이제 와서 태세 전환하며 동문 대접하는 것이야말로 하버드 특유의 오만이 아니겠냐고 꼬집는다.


하버드 대학은 1636년 설립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남성에게만 개방되었으며, 그 대안으로 1879년에 여성 전용 래드클리프 대학을 자매 학교로 설립했다. 1999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었기에 문제의 설문 조사를 실시한 2010년에는 래드클리프 1951년도 졸업생 르귄도 하버드 동문으로 간주되었지만, 이전까지는 아니었다는 거다.


나귀님이 래드클리프 대학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러브스토리> 때문이다. 남주가 하버드 다니고 여주가 래드클리프 다니면서 처음 만나는데, 나중에 다른 매체에서는 하버드-래드클리프라고도 언급하는 것을 보고 두 학교가 무슨 관계인지 궁금했다가, 나중에야 한 재단에서 운영하는 자매 학교임을 알게 되었나 그랬다.


래드클리프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헬렌 켈러일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도 익숙한 작가로는 거트루드 스타인, 바버라 터크먼, 에이드리언 리치, 앤 패디먼 등이 있고, 공상과학소설 분야에서는 "퍼언 연대기"의 저자 앤 맥카프리와 <시녀 이야기>의 저자 마거릿 애트우드가 각각 르귄의 동문 선배와 후배에 해당한다.


아쉽게도 르귄의 책에서는 여성 전용 대학에 다녔던 설움이라든지, 남녀 공학 전환의 폭력성과 비인간성에 대한 성토라든지, 키스 해링과 장미셸 바스키아 같은 그래피티 화가의 작품에서 락카칠이 차지하는 미술사적 의의에 대한 의견까지는 찾을 수 없었지만, 대신 분노를 자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은 있었다.


"분노에 관하여"에서 저자는 페미니즘 역시 분노를 무기로 삼았던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양성 권리를 얻겠다고 그저 화를 내는 건 이제 딱히 효과가 없다."(214쪽) 페미니즘을 아기에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분노와 짜증으로 자신의 욕구와 불만을 표시할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그 단계를 넘어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부된 권리는 분노를 통해 강력히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분노로는 권리를 잘 이행할 수 없다. 권리는 집요하게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215쪽) 예를 들어 미국의 낙태 찬반 논쟁에서도 지지자의 비폭력이 반대자의 폭력과 대조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점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분노가 그 효용을 넘어 계속되면 정의롭지 않아지고, 나아가 위험으로 바뀐다. 분노 자체를 목적으로 성장하고, 분노 그 자체를 가치 있게 여겼다가는 목표를 잃고 만다. 분노는 적극적 행동주의 대신 퇴보, 집착, 복수, 독선을 땔감으로 쓰기 때문이다."(216쪽) 저자는 2000년대 초 미국 공화당의 모습이 딱 그랬다고 예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대중적 분노, 혹은 정치적 분노"(216쪽)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한 다음,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사사로운 분노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에서 대뜸 남성 작가들에 대한 열등감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헤밍웨이를 보면 발로 걷어차고 싶고, 조이스를 보면 이가 갈리고, 필립 로스를 보면 화가 치솟는다나 뭐라나.


"내 분노의 원인은 질투나 부러움보다 공포라 해야 맞을 것이다. 헤밍웨이, 조이스, 로스가 정말로 위대한 작가들이라면, 내가 정말 좋은 작가나 아주 존경받는 작가가 될 일은 전혀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 왜냐하면 나는 절대 그들과 같은 걸 써서 독자를 즐겁게 하고 비평가들을 흡족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20쪽)


물론 르귄이 언급한 남성 작가 세 명이 시대를 잘 만나서, 또는 독자와 비평가에게 영합해서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인 남성 작가들인 그 세 명의 문학적 가치가 실제보다 과대평가되었던 것이 뒤늦게 확인되어 문학사적 위상이 낮아진다 한들, 그 반대급부로 르귄의 위상이 올라갈 일까지는 없을 것이다.


혹시 르귄의 문학 자체가 남성 작가에 대한 열등감의 산물이라도 되는 걸까? 섀클턴의 인듀어런스 모험을 읽고 감동하여 <어둠의 왼손>을 썼지만, 정작 저 모험가가 남긴 한 마디에 '인간'이나 '남녀' 대신 '남자'만 들어 있다는 이유로 분노를 드러내고, 급기야 아문센을 앞선 여성 탐험대에 대한 대체 역사 소설까지 썼으니 말이다.


포퍼와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 싸움에서건, 이 나오미와 저 나오미의 도플갱어 싸움에서건, 결국에는 상대방을 더 많이 의식하는 쪽이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셈이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백인 남성 작가들의 성공이며 백인 남성 모험가의 한 마디에 사사로운 분노를 느꼈을 때부터 르귄의 문학은 패배를 자인했던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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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엔가, 바깥양반 책꽂이에 뭐 찾으러 갔다가 <해방신학>이 눈에 띄기에, 이건 또 언제 사다 놓았나 싶어 잠시 꺼내 뒤적여 보았다. 당연히 내가 살 만한 책도 아닌 데다, 헌책방에서 흔히 보이는 구판이 아니라 2000년대에 들어서 나온 개정판이어서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그러다가 며칠 뒤에 문득 바깥양반이 그 책의 저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최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페루 출신의 도미니크회 사제로 저 유명한 책을 통해 해방신학이라는 분야의 기초를 잡은 인물로 유명하다. 내친 김에 바깥양반 책장을 둘러보니 다른 번역서도 몇 권 눈에 띄었다.


<해방신학의 영성: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물에서 마신다>(이성배 옮김, 분도출판사, 1987)는 몇 년 전엔가 누가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헌책방마다 수소문했던 절판본인데, 마침 적당한 가격에 두 권이 돌아다니기에 그 사람 것도 구해 주고 우리 것으로도 하나 더 구입해 두었다.


또 다른 절판본 <욥에 관하여: 하느님 이야기와 무죄한 이들의 고통>(김수복 & 성찬성 옮김, 분도출판사, 1990)은 의외로 알라딘 중고 매장에 한 권이 나왔기에 다른 책 살 때에 배송료 지우기 용도로 구입했는데, 알라딘에서는 저자가 "분도출판사 편집부 엮음"이라고 잘못 기재되어 있다.


가만 보니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도 저자명 표기가 제멋대로여서, <해방신학>과 <해방신학의 영성>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라고 썼고, <욥에 관하여>는 "구스따보 구띠에레스"라고 썼다. 여전히 간행 중인 <해방신학>의 표기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이니, 그걸로 통일한 모양이다.


그의 대표작인 <해방신학>에 대해서는 분도출판사의 대표였던 독일인 임인덕 신부의 회고록에 흥미로운 후일담이 들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운동권 서적 대접을 받았던 문제작이지만, 원서 출간 당시에 교황청에서도 별다른 지적 없이 인가를 내주었을 만큼 무해하다 여겨지던 책이었다.


여하간 임인덕 신부도 별 문제 없으리라 여겨 계약했고, 다만 보수적인 대구교구에서 인가를 거부할 수 있으니 아예 서울교구의 김수환 추기경에게 인가를 받아서 간행했다고 전한다. 곧이어 초판본을 당시의 관례대로 문공부에 보냈더니, 검열 과정에서 트집을 잡혀 판금될 위기에 처했다.


임인덕 신부의 말로는 "이 사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다. 그들에게도 빵을 나눠줘야 한다. 미국에서 수입한 빵을 나눠주기보다는 스스로 일하여 자기 빵을 만들 수 있게 하자"(162쪽)는 책이라지만, 독재에 반대하고 빈민과 땅을 공유하자는 등의 내용이 당국의 심기를 거스른 듯했다.


나귀님도 이번 기회에 뒤적여 보니, '해방'에 대한 내용 못지않게 '신학'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와서 딱히 균형을 잃었다고 볼 수는 없을 듯했다.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나자린>을 언급한 대목도 흥미로웠지만, 바슐라르를 "바셸라드"라고 오기한 것이 개정판에서도 여전한 점은 옥에 티였다.


문공부의 통보에 임 신부는 초판본 3천 부 가운데 대부분을 하룻밤 사이에 옮겨서 감춰놓고, 압수가 들어오면 이것뿐이라 발뺌하려고 수백 부만 남겨두었다. 다행히 실제 판금이나 압수 같은 후속 조치는 없었지만, 최대한 몸을 사리기 위해서 <해방신학>은 이때부터 몰래몰래 출고되었다.


오죽하면 재쇄를 찍을 때에도 판권에 초판이라 표기했는데, 자칫 트집을 잡힐 경우에는 초판본 재고를 판매했을 뿐이라고 오리발을 내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3천 부씩 14쇄까지 찍으면서도 여전히 "초판" 행세를 해서 "영원한 초판본인 <해방신학>이었다"(165쪽)는 것이 임 신부의 회고다.


독일 출신으로 히틀러 치하의 서적 탄압을 경험한 임 신부에게는 책을 검열하고 판금하는 관행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2020년에 타계했던 그가 최근의 게임 검열과 웹툰 검열 등 다양한 방면에서 아직 만연한, 또는 부활한 검열 소식을 들으면 또 어떻게 생각할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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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북펀드에 <구름 도감>이란 것이 있기에 뭔가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어린이용 그림책인 모양이다. 구름 좋아하는 나귀님이라서 관련서를 이것저것 사 모으기는 하지만, 생각만큼 전문적인 내용까지는 아닌 듯하니 그림은 예쁘지만 일단 꼬맹이들한테 양보하는 게 낫겠다.


다만 북펀드 광고에 나온 샘플 페이지를 토대로 한 가지 지적하자면, "안개모양 층운" 페이지에 나온 '판구'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한 대로 '반고'라고 적어야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중국 신화에 나온 거인 반고(盤古)를 중국어 발음대로 로마자 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간 수집한 구름 관련서가 지금도 나오나 궁금해 검색해 보니 의외로 절판된 것이 많았다. 예를 들어 <한 권으로 읽는 구름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름 사전>, <구름을 사랑한 과학자> 등이 그러했다. 조만간 보고 처분하려 했는데 아까우니 좀 더 갖고 있을까.


그래도 구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지 이후에도 구름 관련서가 의외로 많이 나왔다. 우선 구름감상협회의 대표라는 기상학자 개빈 프레터피니의 책이 세 종류나 나와 있다는 점이 신기하고, <구름물리학>이라는 전문 서적도 나와 있던데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뒤적여보고 싶다.


구름 책을 검색하다 보니 <땅에서 구름까지>도 나오는데, 이건 사실 자동차 공학 관련서이다. 언젠가 박완서 딸의 에세이에서 자동차 고치러 정비소 갔더니 그 책이 탁자에 놓여 있기에, 무슨 신앙 서적인가 궁금해 펼쳐 보니 공학 서적이라 당황했다는 일화가 나온 적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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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란마 1/2> 애니메이션을 새로 제작한 모양이다. 루미코의 개그 코드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나귀님이라 원작도 이미 전권 소장에 수차례 정주행한 데다가, 넷플릭스에서 <던전밥>과 <이세계 삼촌>을 재미있게 봤으니 과연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신작 애니메이션이 과연 어디까지 표현할지, 또 어디까지 용인될지가 새삼 걱정스럽기도 했다. 널리 알려졌듯이 원작 만화의 핵심은 저주로 인해 찬물에 닿으면 여자로 변하고 더운물에 닿으면 남자로 돌아가는 주인공의 이상 체질이다.


무술을 연마하느라 맨몸일 때가 많은 소년이 여자 몸으로 변하고서도 평소처럼 웃통을 벗고 돌아다녀 모두를 경악시키고, 화가 난 약혼녀의 옷을 빌려 입고서는 가슴이 꽉 끼고 허리가 헐렁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아 분노를 사는 등의 어이없는 상황이 웃음을 자아낸다.


사춘기 청소년의 성과 신체에 대한 호기심을 잘 활용했다는 평가부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와 크로스드레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잠재 코드를 찾아낼 수도 있는 작품인데,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구판 애니메이션이 불건전하다며 청소년 유해물 판정을 받기도 했다.


물론 여자로 변한 주인공의 가슴이 수시로 노출되고, 여자 속옷을 훔치고 다니는 변태 할아범도 나오니, 과연 일본 청소년 만화의 표현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하는 의문을 떠올리는 것도 사실인데, 과거에는 그저 웃기자고 만든 설정도 지금은 자칫 논란이 되기 쉽겠다.


그래서 넷플릭스의 <란마 1/2>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는데, 공개 이후에 유튜브에 올라온 분석 영상을 몇 가지 보니 구판 애니메이션에 비해 수위를 낮추었다는 평가가 대부분인 듯하다. 결국 일종의 검열이 작용하지 않았느냐 하는 불만이 적지 않은 듯하다.


왜 영상물에서 살인 묘사에는 관대한데 성 묘사에는 가혹한지 모르겠다는 누군가의 불만도 떠오르는데, 사실 현재의 검열은 그 자체로 모순점이 적지 않다. 단순히 미디어를 순화해서 인간을 교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검열 당국도 인간을 잘 모르고 있는 셈이다.


검열의 이런 모순이 가장 잘 드러난 최근의 사례는 경기도 교육청의 한강 작품 유해 도서 선정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내용상 청소년에게 어울리지 않아서라고는 하지만, 바로 그 작가가 노벨문학상씩이나 수상했으니 경기도 교육청으로서도 상당히 머쓱하지 않겠나!


나귀님도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문제가 된 한강의 소설은 상당히 기괴한 내용이라고 하니, 이쯤 되면 <올드보이>와 <기생충> 같은 해외 영화제 수상작과 묶어서 K-그로테스크라는 장르의 의의와 육성에 대해서도 한 번쯤 고찰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경기도 교육청의 한강 작품 유해 도서 지정이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학 입시일 것이다. 아무리 유해 가능성 농후한 내용이라도 국내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니, 이쯤 되면 당장 올해 수능부터라도 문제로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가장 확실한 예상 문제라서 필독서로 지정해도 부족할 법한데 오히려 금지한다니, 당장 한 문제가 아쉬운 수험생은 물론이고 학부모도 불만 가득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렇다면 차라리 교육부에서 한강 작품은 출제하지 않겠다고 미리부터 못을 박아 놓든가.


아이러니한 점은 오래 전부터 입시 문제에 사용된 필독서 중에도 청소년에게 유해해 보이는 내용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김동인의 "감자"인데, 한쪽은 원나잇에 대한 내용이고 다른 한쪽은 무려 성매매와 살인에 대한 내용이다!


'필독서'라는 명칭 자체도 의문이다. 언제부턴가 이른바 청소년 필독서 목록이 돌아다니던데, 수십 년 전에만 해도 없었던 풍조다. 문학평론가 김우창만 해도 <수레바퀴 아래서>가 필독서라는 것을 몰랐으며, 70세가 되어서야 처음 읽어보았다고 회고했을 정도이니까.


한편으로는 만초니의 <약혼자들>을 학교에서 필독서로 접하기 전에 읽어보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었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회고를 기억할 필요도 있다. 어찌 보면 필독서 지정이야말로 한 작품을 순수하게 읽지는 못하게 만드는 족쇄일 수도 있을 테니.


한강 작품의 유해 도서 논란을 계기로 문화 전반의 검열 문제도 생각해 볼 만하겠다. 최근 화제가 된 게임 분야 국정 조사에서 나온 누군가의 발언처럼, <오징어게임>이 진짜 게임이었다면 제작자가 에미상 수상은커녕 구속되었을 것이라는 일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 한편으로는 정부 주도의 검열이 없어지더라도, 온갖 불편러에 의한 인민재판식 검열은 계속될 것이고, 어쩌면 이쪽이 더 큰 문제일 수 있으니 과연 실효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수능이라고 한다. 과연 한강 문제는 나올 것인가 안 나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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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라는 책이 있기에 솔깃해서 클릭해 보았더니 나오미 클라인의 책이었다. 영어권 이름이니 '네이오미'라고 표기해야 맞을 것 같은데, '아이자이어' 벌린을 굳이 '이사야' 벌린으로 표기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성서의 표기법인 '나오미'가 굳어진 듯하다. 물론 그 이름의 유래를 감안하면 오히려 성서의 표기법이 히브리어 발음에 더 가깝겠지만.


특이하게도 클라인의 이번 책은 또 다른 '나오미'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바로 미국의 저술가인 나오미 울프인데, 국적과 외모부터 정치 성향이며 저술 내용까지도 상이한 두 사람을 대중이 종종 혼동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뜨끔할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나귀님 역시 클라인의 지적처럼 두 명의 '나오미'를 종종 헛갈렸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몇 년 전에 최악의 오역본 중 하나인 저메인 그리어의 책에서 나오미 울프의 역시나 오역된 인용문을 접하고는 '이 여자가 그 시꺼먼 책 쓴 사람인가?' 생각했었고, 거꾸로 나오미 클라인의 다른 신간을 접하고는 '이 여자가 그 해럴드 블룸한테 성추행 당했다고 폭로했다가 흡혈귀 딸년이라고 역공을 당했다는 사람인가?' 생각했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원래 좌파 진영에서 경력을 시작한 울프가 머지않아 우파, 그것도 극우 진영으로 선회해서 클라인과는 상반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인터넷이며 SNS를 통해 두 명의 '나오미'가 지속적으로 혼동되고, 울프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면 클라인까지 덩달아 대중에게 욕을 먹는 지경에 이르자, 클라인이 먼저 이 문제를 고찰하러 나섰다.


포퍼와 비트겐슈타인의 이른바 '부지깽이 논쟁'에서도 드러났듯이, 이런 경우에는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고 무시하는 쪽이 승리하게 마련이니, 결과적으로는 먼저 눈을 깜박인 클라인 쪽이 패배한 셈이 아닐까. 예를 들어 '어둠의 아이유'가 마구 날뛰는 상황에 진짜 아이유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이란 그저 침묵을 지키는 것밖에 없어 보이니 말이다.


물론 서문에 인용된 필립 로스의 말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가소롭고, 가소롭다기에는 너무 심각하다"는 딜레마의 상황이기는 하다. 그래서 클라인도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울프의 좌충우돌 행적을 뒤쫓으면서도, 온갖 음모론과 가짜 뉴스를 섭렵하는 과정에서 '지금 내가 왜 이걸 듣고 있는 걸까' 하고 종종 현타를 느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대중이 유명인을 혼동하는 경우에는 대개 뭔가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물론 앞서 언급했던 아이자이어 벌린을 처칠이 어빙 벌린으로 오인한 것은 진짜 착각이었겠지만, 슈바이처가 아인슈타인으로 오인된 사례나, 브루노 마스가 저스틴 비버로 오인된 사례나, 앤 머리가 (언젠가 콘서트에서 직접 소개한 일화처럼) 티나 터너로 오인된 사례가 그렇다.


앞자리 이름만 비교적 흔치 않다는 점만 같을 뿐, 외모와 성향과 발언이 천양지차인 클라인과 울프를 혼동하는 것은 대중의 무지와 무심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정확하고 섬세한 구분을 요구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법전' 스님이 기고한 개고기 반대 글조차도 오랜 세월 동안 '법정' 스님의 글로 오인되었듯이 말이다.


여하간 클라인은 자신의 도플갱어, 또는 분신으로 간주되는 울프가 곳곳에 남긴 행적을 오랜 시간에 걸쳐 추적했는데, 이 과정에서 각자가 속한 좌파와 우파의 현재 상황까지도 도플갱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깨달은 모양이다. 즉 좌파가 뭔가를 주장할 때마다 우파는 일종의 도플갱어를 만들어내서 상대편의 주장을 '반사'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귀님이야 서문 외에는 아직 읽은 것이 없으므로 클라인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만 보면 언제부턴가 좌파가 우파의 미러링에 꼼짝달싹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기도 한 듯하다. 대표적인 것이 가짜 뉴스인데, 기껏 팩트체크를 해 놓으면 유포자는 '아니면 말고' 하는 무책임한 입장을 고수하니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에도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무기는 최신 기술을 이용한 소통이었는데, 어느새 SNS와 유튜브로 우파가 대거 진출하면서 온갖 가짜 뉴스를 퍼트리게 되자 상황이 역전되고 말았다. 좌파도 종종 어떤 사안을 실제보다 과장하는 전략으로 재미를 보았지만, 우파는 대놓고 가짜 뉴스를 퍼트려서 훨씬 더 대박을 터트렸으니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클라인이 울프와 확연히 구분되는 '그 나오미'가 되지는 못했던 것처럼, 좌파인지 진보인지 하는 세력도 지금에 와서는 우파인지 보수인지 하는 세력과의 확실한 차별화에는 실패한 것이 가장 큰 문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중의 눈에 충분히 혼동할 만해 보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통에 실패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귀님이 보기에는 좌파고 우파고 진보고 보수고 간에 도덕성이라는 높은 가치를 버리고 위선적이고 속물적인 민낯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중대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 경우에는 주디스 슈클라의 지적처럼 위선이 잔혹성보다 더 큰 문제인 것처럼 과장되고, 결국에는 인간 혐오와 정치적 무관심을 낳아 이번 미국 대선처럼 극우 부활의 온상이 될 테니까.


여하간 도덕성을 회복하려면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터인데, 코로나 후유증에 각종 전쟁으로 몸살을 앓는 세계 경제는 물론이고, 부동산부터 사과값, 배추값, 치킨값, 배달료에 이르기까지 난리인 한국 경제도 가까운 시일 내에 좋아질 기미는 없어 보인다. 좌파의 약세와 우파의 득세를 단순한 도플갱어 전략 하나로만 보기는 어려운 이유다.




[*] 나오미 울프는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 선동가이고 기회주의자라는 비판도 받는 모양이다.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에게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했을 때 의외로 주변의 반응이 시큰둥했다는 것도 그래서였는지 모를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비록 블룸이 울프[쓰고 보니 여기서 또다시 이 나오미와 저 나오미를 헛갈렸다! '클라인'이 아니라 '울프'가 맞다]와의 부적절한 접촉을 한사코 부정했지만, 주위의 증언에 따르면 저 문학비평가는 실제로 제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등 사생활 면에서 제법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는 점이다.


[**] 그나저나 책 소개에서 언급한 "영국에서 부커상 다음으로 권위 있는 여성문학상 논픽션" 수상 실적은 살짝 낯간지럽다. '여성문학상'(Women's Prize for Fiction) 자체가 1996년에 제정되어 역사도 짧을 뿐더러, <도플갱어>가 수상한 '여성논픽션상'(Women's Prize for Nonfiction)은 2023년에야 신설되어 나오미 클라인이 제1회 수상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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