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성추문과는 별개로 영화의 역사상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차이나타운>은 LA의 한 사립탐정이 한 여성으로부터 남편을 뒷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시작한다. 탐정은 평소처럼 해당 남성의 외도 사실을 알아내서 증거 사진과 함께 의뢰인에게 넘기지만, 미처 몰랐던 뜻밖의 사실이 드러나며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사건의 발단인 불륜남이 극중에서 LA 시청의 고위 공직자로 수자원 정책을 좌우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물이 부족한 것으로 악명 높은 캘리포니아 주이다 보니 수자원을 둘러싼 이권 다툼도 적지 않다는데, 영화가 진행되며 밝혀지는 사건의 발단 역시 물 분배에 대한 관계자들의 의견 차이로 인해 생겨난 갈등이었다.


오래 전에 본 영화를 새삼스레 떠올리게 된 까닭은 최근 미국 LA 인근에 발생한 대형 산불의 진화 작업이 난항을 겪으면서 피해가 속출한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물은 부족하고 산불은 빈번했던 지역이라 최근 수년간을 돌아보아도 비슷한 사건이 매년 반복되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과거의 어떤 사례조차 능가할 만큼 대규모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지구온난화를 들먹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매년 수천 건씩 발생했다니 단순 인재로만 보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다만 자연 발생하는 주기적 산불이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반면, 최근의 산불은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는 까닭에 이득보다는 손실이 크다 봐야겠다.


연예인의 고급 주택이 전소되고 기회주의적 약탈까지 빈번하다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에도 약탈 소문이 퍼졌지만 결국 유언비어로 판명되었는데, 이번에는 사실인 듯하니 가뜩이나 치안 상황이 악화일로인 상태에서 무정부 상태가 펼쳐진 셈이다.(물론 비상 계엄 후 진짜 무정부 상태인 우리 입장에서 할 말까진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당선인 도널드 트럼프가 이번 사태를 놓고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비난했다고 해서 화제다. 하찮은 물고기 따위를 살리겠다며 수자원 정책을 변경하는 바람에 산불이 확산하는 중에도 진화에 필요한 물이 없어서 쩔쩔 매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인데, 물론 주지사는 물론이고 주 정부에서도 사실과는 다르다며 반박을 내놓았다.


도대체 무슨 물고기를 말하는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캘리포니아 주의 태평양 연안에 서식하는 바다빙어과의 고유종이라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깥양반이 좋아하는 술안주인 열빙어(시샤모)의 사촌 격이라는데, 하찮다는 폄하와 달리 그 지역의 주요 지표 생물이자 먹이 생물이며, 이미 반세기 전인 1973년에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었다.


이 물고기를 위협하는 원인으로는 서식지의 상태 악화, 외래종의 침입, 수질 오염, 수온 변화, 수자원 정책 등이 꼽힌다. 이번에 논란이 된 수자원 정책은 본래 트럼프 1기 집권 당시에 캘리포니아 남부의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북부의 자연적인 물길을 바꾸는 내용이었는데, 주지사가 이에 반대하면서 바다빙어의 보호를 구실로 삼았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여러 언론사가 이미 내놓은 팩트체크에 따르면 트럼프의 주장은 거짓에 불과하다. 농업용수 확보와 소방용수 부족은 별개의 문제이며, 주지사가 멋대로 뒤집은 결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방 정부와의 소송에서 바다빙어를 들먹인 것만은 사실이라서 주지사는 졸지에 하찮은 물고기와 귀중한 사람 목숨을 맞바꾼 악당이 되었다.


모든 생물이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고 보는 생태학의 관점에서는 어떤 생물을 하찮다고 간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고생물학자 리처드 포티의 말마따나, 하찮아 보이는 곤충이나 이끼에 대한 연구가 의외로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럼프의 주장이야 늘 그렇듯 지나친 과장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산불 진화가 어려운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강풍과 가뭄 같은 자연적 원인뿐만 아니라 기반 시설 노후화 같은 대책의 한계 역시 상황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듯하다. 이번 산불의 피해 지역이 서울 면적의 4분의 1에 달한다는 보도까지 접하고 보니, 새삼스레 미국이란 나라의 광활함과 아울러 그 진화 작업의 어려움 역시 깨닫게 된다.


한편으로는 자연 재해가 졸지에 정치적 쟁점으로 변모하면서 생겨난 파장 역시 만만치 않을 것도 같다. 산불이야 결국 사라지겠지만, '하찮은 물고기' 운운 하는 트럼프의 프레임 씌우기의 영향은 그보다 좀 더 오래 가지 않을까. 최근 우리나라의 탄핵 절차를 둘러싼 논란만 봐도 현실에서는 가짜 뉴스야말로 산불보다 더 무섭게 번진 듯하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깥양반이 영화 <하얼빈>을 보고 오더니 기대보다 괜찮았던지 새삼 김훈의 동명 소설까지 찾아 읽고 있기에 (그 소설이 영화 원작은 아니라 한다) 예전에 사다 놓은 <안중근 의사 자서전>을 함께 읽으라고 꺼내주었다.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라는 단체에서 1979년 간행한 동명의 세로쓰기 서적에서 공판 기록과 신문 기사 등을 제외하고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추모시 등 몇 가지만 엮어 1990년 가로쓰기로 간행한 비매품 서적이다.


안중근이니 윤봉길이니 이봉창이니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워낙 많이 들어 친숙하지만, 이번 기회에 자서전을 뒤적여 보고 관련 내용을 검색해 보니, 사실은 나도 많은 것을 잘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때 어느 걸그룹 멤버가 퀴즈에서 안중근을 몰라보고 엉뚱한 대답을 내놓아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았는데, 따지고 보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역사적 사실 외에 안중근을 속속들이 아는 일반인도 드물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귀님도 언제부턴가는 안중근을 비롯한 각종 '의사'들을 오히려 외면해 온 감도 없지 않은데, 저 유명한 손바닥 도장을 비롯해서 워낙 많은 이미지와 인용문이 사방에서 남발되어 피로했던 탓이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일종의 반대급부로 평소에 하도 많이 들어 본 안중근과 윤봉길보다는 미처 몰랐던 홍범도니 김산이니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바깥양반이 뒤늦게야 영화를 통해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게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인 듯한데, 덕분에 나귀님도 상당히 오래 전 어느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입했던 자서전을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다.


자서전 "안응칠 역사"는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쓴 것으로 자신의 출생과 성장부터 암살과 재판까지의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담고 있다. 아쉽게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필사본과 등사본만 남아 있다.


그런데 자서전 내용 중에 한 가지 희한한 일화가 눈길을 끌었다. 서울에 머물던 안중근이 부친 위독 소식을 듣고 귀향하던 길에 지인과 동행했는데, 마침 지인의 말을 몰던 마부와 시비가 붙어 얻어맞았다는 것이다.


당시 가뭄이 심했는데, 문득 마부가 길가의 전신주를 가리키며 '외국인이 세운 저 물건이 공중의 전기를 모조리 빨아들여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안중근이 읏으면서 '무식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러자 무식하다는 소리에 발끈한 마부가 말채찍으로 안중근의 머리를 여러 번 내리치며 욕을 퍼붓더라는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 주위 사람들이 마부를 처벌하자고 권했지만, 안중근은 그냥 보내 주었다 한다.


우습다면 우스울 수 있고, 또 민망하다면 민망할 수도 있는 일화인데, 뤼순 감옥에서 자서전을 쓰는 중에 그 일이 뇌리를 스쳤던 것으로 보아, 안중근의 입장에서도 사실은 마부의 소행이 두고두고 괘씸했던 게 아닐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짜 뉴스를 무작정 신봉하는 무식쟁이가 합리적으로 반박하는 현명한 사람에게 적반하장으로 굴었던 셈이니, 거짓에 미혹되어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에 전기가 도입된 지 불과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근대 기술을 처음 접한 조선인들로선 낯설고 두렵게 여겼을 터이고, 자연스레 자신들이 겪는 이런저런 불운을 그 탓으로 돌렸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영화 <파묘>를 통해 다시 주목 받은 '일제의 민족 정기 쇠말뚝 훼손설'도 같은 맥락의 헛소문인데, 근대 국가 일본의 식민지 수탈의 일환이었을 측량 사업이 미신적으로 왜곡되어 지금껏 회자되니 한심한 일이다.


헛소문이란 도깨비 사과와도 비슷해서 제아무리 반박하고 해명해도 사라지지 않고 기세등등해질 뿐이다. 최근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서 그 절차와 내용에 대해 제기된 온갖 가짜 뉴스와 억지 주장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똑같이 언성을 높여 보았자 해결될 리 없으니, 결국 안중근처럼 상대방의 욕설과 폭행에도 인내하며 최대한 투명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만이 방법이지 않을까. 물론 안중근도 나중에 생각하니 빡치긴 했던 듯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롬 첫화면에 뜨는 구글 홈페이지의 로고가 어째서인지 흑백으로 나와 있기에 눌러보니 지난 12월 29일에 무려 100세의 나이로 사망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거행되는 현지 시간 1월 9일이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된 까닭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여객기 사고로 인해 지난 주 내내 국가 애도 기간이었다. 그 여파로 방송이며 공연 등이 줄줄이 연기되고, '나는 많이 추모하는데 너는 왜 덜 추모하느냐'며 꼬투리 잡는 경우까지 생기자, 강요된 추모에 불만도 속출한 듯하다.


검색해 보니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국가 애도 기간은 천안함과 이태원에 이어서 이번 여객기 사고까지 모두 세 번 선포되었으며, 하루짜리 국가 애도의 날은 천안함과 9/11 때에, 그리고 의외로 1972년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사망 때에 선포되었다고 한다.


트루먼이라면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인기가 없었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 원래는 부통령이었다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 직위를 승계하게 되었는데, 누가 봐도 대통령 감까지는 아닌 소박한 인물이다 보니 우려를 자아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다가 갖가지 난제가 산적한 상황이다 보니 새로운 정부 출범부터 미국은 물론이고 전세계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렵사리 재선에까지 성공하며 비교적 무난하게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


지금은 역대 미국 대통령의 순위를 매길 때에 10위권 내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나름대로의 인기 대통령이지만, 재임 중에만 해도 트루먼은 솔직하다 못해 거칠게까지 느껴지는 돌출 발언 등으로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오르는 등 전반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 트루먼보다도 한층 더 인기가 없었던 대통령이 바로 최근 사망한 지미 카터이다. 우리에게는 퇴임 후의 각종 특사며 평화 운동 등으로 널리 알려지며 좋은 이미지를 쌓았지만, 재임 중의 카터는 연이은 정책 실패로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은 대통령이었다.


그나마 트루먼은 재선에도 성공했지만 카터는 재선에도 실패했고, 역대 미국 대통령의 평가에서도 트루먼은 갈수록 순위가 높아지는 반면 카터는 여전히 바닥 근처를 헤매고 있는 실정이니, 퇴임 후의 좋은 이미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의외로 보일 수 있겠다.


어찌 보면 카터야말로 '사람은 누구나 자기 무능이 드러나는 지위까지 승진한다'는 피터의 법칙의 사례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트루먼 같은 예외도 있으니 법칙까지는 아닌 것도 같지만, 최근 한국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젠가 알라딘 중고샵을 기웃거리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경상도 사투리로 옮긴 <애린 왕자>라는 책을 발견했다. 지역 방언으로 구술하거나 저술한 책이 나온 경우는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지만, 해외 유명 고전까지 사투리로 옮긴 경우는 처음 보는 셈이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십중팔구 누가 진반농반으로 만든 이벤트성 출판물이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최근 다시 알아보니 경상도 버전 <애린 왕자>에 이어서 전라도 버전 <에린 왕자>와 강원도 버전 <언나 왕자>까지 나와 있었다. 심지어 다른 출판사에서는 제주도 버전 <두린 왕자>까지 만들어서 내놓았다!


이쯤 되면 <어린 왕자>의 사투리 번역물 제작이 수년 전의 온갖 복각본과 초판본과 대만 카스테라와 탕후루처럼 일종의 유행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서울 버전 <어린 왕자>는 물론이고,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89-31 버전 <알라딘 왕자>'도 나올 수 있지 않겠나.


왜 하필 <어린 왕자>일까? 그야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번역본만 해도 부지기수일 터인데, 그 내용의 모호함 역시 인기를 더해주는 요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프랑스어 전공자인 지인의 말로는 원문 자체도 사실 그리 쉽다고까지는 할 수 없는 문장이라던데.


왜 하필 사투리일까? 이건 솔직히 나귀님도 모르겠다. 다만 일단 프랑스어에서 표준어로 번역하고, 다시 사투리로 번역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쳤으리라 짐작해 보면, 십중팔구 어떤 필요보다는 단순한 재미 때문에 만든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심지어 한 출판사가 세 종이나 냈으니까.


그렇다면 정작 그 지역 출신으로 사투리를 아는 독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마침 제주도 출신인 바깥양반에게 알라딘 미리보기에 올라온 <두린 왕자>를 보여주었더니, 처음에는 우스워하더니만 조금 읽다 말고 뭔가 좀 어색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현대식 표기법을 고수해서 생긴 한계일까.


제주어의 경우에는 민속학자 진성기가 채록한 자료집이 여러 권 있는데, 그중 <남국의 민담>과 <남국의 민요> 같은 책을 보면 아래아('아'와 '오'의 중간 발음이라는데, 때로는 둘 중 하나로 발음하는 듯하다) 표기를 비롯해서 미묘한 현지 발음을 살리려고 최대한 노력한 흔적이 남아 있다. 


진성기는 제주도 출신으로 해방 이후 현지 민속 연구를 사실상 개척한 선각자라고 할 수 있는데, 사설 박물관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지역 관청에 밉보여 골탕을 먹기도 하고, 지인에게 크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알고 있다. 저서로 '제주민속총서' 20여 권이 있다.


'제주민속총서'에는 신화, 전설, 민담, 민요, 무가 등 다양한 자료가 담겨 있는데, 검색해 보니 이와는 별개로 진성기가 신약성서 "마가복음"을 제주도 사투리로 번역한 단행본도 간행했다고 하니, 이것 역시 지역 방언의 특색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사투리라면 한때 표준어에 어긋나는 나쁜 습관처럼 간주되어 고쳐야 할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보다는 영어 학습에서 흔히 말하듯 일종의 이중언어구사능력이라고 바라보는 편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아프리카나 인도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한 사람이 여러 부족의 언어를 구사하듯이 말이다.


약점 대신 장점이라 생각하면,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도 제법 신선한 특기일 수 있겠다. 서울 출신 나귀님도 진성기 책에서 배운 민담 "청가개비"를 명절마다 구연해서 제주도 노인네들에게 삥 뜯고 있으니 <에린 왕자>나 <두린 왕자>를 구매한 독자들도 한 번 도전해 보면 어떨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번에 얼핏 보니 알라딘에서 이동식 책 선반을 사은품으로 주는 이벤트를 하는 것 같더니만,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아예 굿즈로 만들어 2만 원대에 판매하는 모양이다. 정식 명칭은 본투리드 3단 트롤리라는데, 쉽게 말해 바퀴가 달려 끌고 다닐 수 있게 만든 플라스틱 3단 선반이다.


그런데 나귀님 경험상 저런 물건은 생각만큼 유용하지도 않고 튼튼하지도 않다는 것이 문제다. 알라딘 트롤리는 한 칸이 폭 45센티, 깊이 26센티, 높이 25센티로 나오는데 일반적인 신국판 도서 규격이 가로 15센티, 세로 22센티이므로, 아무리 많이 넣어 보아야 한 칸에 한 줄씩만 들어간다.


예를 들어 집집마다 한 질씩은 있을 법한 '해리 포터' 시리즈의 구판을 가지고 알아보자면, 1999년에 나온 <마법사의 돌> 1권이 신국판, 236쪽, 두께 2센티, 무게 458그램이다. 단순 계산하면 트롤리 한 칸에 22권이 들어가는데, 문제는 '해리 포터 시리즈' 완질이 무려 23권이라는 거다.


어찌어찌 쑤셔넣어서 한 칸에 전23권 완질이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알라딘 트롤리가 모두 3칸이므로 결국 해리 포터 완질 3세트 총69권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각 권의 무게가 1권과 동일하게 458그램이라 가정하고 계산해 보면, 완질 3세트의 무게는 30킬로그램이 넘어버린다.


알라딘 트롤리의 상품 정보에는 안전 하중이 선반당 3.5킬로그램, 총10.5킬로그램이라고 나온다. 결국 해리 포터 구판과 비슷한 신국판 도서로 세 칸을 욕심껏 채우면 무게 한도의 세 배를 초과해서 파손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빈 공간이 아까워도 해리 포터 한 세트 이상은 무리이겠다. 


그런데 최근 새로 나온 해리 포터 20주년판은 전23권의 무게가 12.7킬로그램에 달한다니, 겨우 한 세트만으로도 알라딘 트롤리의 무게 한도를 초과하는 셈이다. 혹시나 구판이나 양장본이나 일러스트판이나 원서나 기타 관련서까지 올려둔 광팬이라면 혹시나 망가질까 조마조마하지 않겠나.


판타지 소설만의 문제도 아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단독 저서 16종의 무게가 총5킬로그램인데, 공저와 선집과 특별판까지 합치면 10킬로그램 가까이 되어서 역시나 아슬아슬하다. 구판이나 영역본까지 정성껏 모아둔 사람이라면 파손 가능성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이런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에 알라딘 트롤리는 결국 실용성이라고는 떨어지는 장식용 가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세 칸이나 되지만 한 칸만 책으로 가득 채워도 파손 위험이 있다니, 실제로는 상품 소개 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처럼 책이 아닌 다른 물건이나 담으라는 뜻이 아닐까.


나귀님처럼 책을 제법 가진 사람들이 이런 제품들을 불신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디자인이나 재질이나 간에 책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책을 안 보는 사람들이 만들어서 판매하는 제품이다 보니, 실제로 책을 보고 쌓아두는 사람에게는 불편하다는 것이다.


책이 하찮아 보여도 열 권, 스무 권이 모이면 그 무게는 상당하다. 그러니 책을 쌓아 두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 세상 그 어떤 책장도 허술해 보일 수밖에 없다. 넣으라는 공간마다 최대한 넣다 보면 가로판은 아래로 늘어지고 세로판도 옆으로 휘어져서 머지않아 못과 나사로 보강해야 한다.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책장도 책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동식 트롤리 따위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때 나귀님도 커다란 텔레비전을 너끈히 지탱한다는 이동식 받침대를 동네 가구점에서 구입해 보았는데, 책을 올려놓으니 일주일도 못 가서 플라스틱 바퀴가 망가지고 말았다.


고심 끝에 발견한 해결책은 화물 운반용 달리였다. 택배 기사가 물건을 담아 끌고 다니는 초록색 카트와 유사한 물건인데, 손잡이 없이 빨간색 바퀴와 초록색 상판만 있는 것을 달리라고 한다. 가로 40센티, 세로 60센티짜리 소형 달리 다섯 개를 구입해서 2단 책장을 두 개씩 올려 놓았다.


2단 책장 두 개면 대략 신국판 서적이 200권쯤 들어가는데, 달리 한 대에 최대 100킬로그램까지는 버틴다고 하니 끄떡없다. 물론 무게가 상당하다 보니 밀어서 움직이기도 아주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퀴가 빠지거나 우그러지는 등 망가지는 조짐은 20년 가까이 되는 지금까지도 없어 보인다.


책을 가진 사람이 이동식 책장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이동의 편리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공간의 효율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동식 책장이 있더라도 수시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넓은 공간이 필요할 때를 대비하여 언제라도 공간을 창출할 준비를 갖춘다는 의미일 뿐이다.


나귀님도 처음 달리를 이용해서 튼튼한 이동식 책장을 만들었을 때에는 이리저리 굴려서 이런저런 공간을 연출해 보며 큰 만족감을 느꼈고, 나중에 예정에도 없던 부엌 공사를 할 때에는 줄줄이 방으로 입장시켜 창출한 마루 공간에 부엌 살림을 쌓아두는 등 상당히 유용하게 써먹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책을 사는 사람의 욕심이 끝없다는 점이다. 이동식 책장에 가장 필요한 것은 빈 자리, 즉 책장이 옮겨갈 여유 공간이다. 그런데 책을 모으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공간이 모자라게 마련이니, 책을 사다 보면 언젠가는 이동식 책장에 필요한 빈 자리에조차도 책이 쌓여 버리고 만다. 


지금 나귀님의 마루 풍경이 딱 그러하니, 한때 어디로든 굴러다닐 수 있었던 이동식 책장도 지금은 앞뒤며 옆쪽까지 이런저런 책더미에 가로막혀 꼼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그 책더미만 치우면 다시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 가동 범위도 예전보다는 현격히 줄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동식 책선반에 가장 혹할 만한 사람이야말로 정작 그 제품의 혜택을 가장 못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오히려 책을 모으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지금 알라딘에서 판매하는 것과 같은 작고 소중한 이동식 책선반을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25. 03. 04. 추가: 최근 알라딘에서는 '트롤리'와 유사하지만 형태는 다른 '북 카트'라는 물건도 내놓은 모양인데, 이것 역시 무게 한도가 10킬로그램이니 '해리 포터' 한 질을 싣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낱권 스물세 권 가운데 뭘 싣고 뭘 싣지 말아야 할지, 어떤 권을 집어넣고 어떤 권을 뺄지 고민하는 탓에 밥맛도 없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으며, 짜증이 늘어 주위 사람과 곧잘 다투고, 부부 관계도 냉랭해지다 못해 험악해져서 출산율 급감에 일조하게 되지 않을까. 나귀님 입장에서 보자면 솔직히 왜 만들고 왜 사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물건이긴 하다마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