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한강의 작품이 재간행되는 모양인데, 알라딘에 도배된 광고를 보니 그놈의 "부커상" 언급도 재개되는 듯하다. 수상 당시부터 줄곧 잘못을 지적했던 나귀님이니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데, 한강의 수상 내역을 단순히 "부커상"이라고만 하면 안 되는 이유야 분명하다.


보통 "부커상"이라면 1969년에 제정되어 5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문학상을 가리키며, 영어로 저술되어 영국에서 간행된 작품만이 대상이다. 반면 한강이 받은 것은 2016년 수상 당시에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이었다가, 2020년부터는 "인터내셔널 부커상"으로 지칭되는 별개의 상이다.


"부커상"의 "인터내셔널" 부문은 영국에서 간행된 외국 작품(번역 포함)이 대상이며, 2005년에 제정되어 격년으로 시상하다가 연례 시상으로 개편된 2016년에는 저자 한강과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가 공동 수상했다. 따라서 처음부터 영어로 쓴 영국 작품만 시상하는 "부커상"과는 다르다.


비유하자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외국어작품상"의 차이와도 유사하다. 양쪽 모두 작품에 주는 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2023년 아카데미 외국어작품상" 수상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2023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라고 주장한다면 당연히 거짓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알라딘의 <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책 소개에는 "2016년 부커상 수상작"이라고 적어 놓았고 (바로 밑의 내용에서는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이라고 바로잡아 놓았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하는 페이지 약력에서도 "2016 / 부커상 / <채식주의자>"라고 적어놓았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반영하자면, 엄밀히 말해서 한강의 이력은 "2016년 부커상 수상"이 아니라 "2016년 부커상 번역 부문 공동 수상"이라고 해야 한다. 나귀님이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부커상 번역 부문"이라고 굳이 풀어쓰는 이유도 "본상"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거다.


인터내셔널이건 코민테른이건 간에 어쨌거나 "부커상"은 "부커상"이니까, 모로 가도 한강만 찬양하면 되니 아무래도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문제는 "2016년 부커상 수상" 자격을 정당히 주장할 수 있는 다른 책이 우리나라에도 나와 있기... 아니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이 바로 2016년 부커상, 즉 인터내셔널도 코민테른도 아닌 "본상"의 진짜 수상작인 폴 비티의 소설 <배반>인데, 당시 4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부커상 최초로 영국 작가가 아닌 미국 작가가 수상한 경우라고 해서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미 절판되었지만 말이다.


물론 한강이라는 작가도 대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작가를 무시하면 안 될 것이다. 수상 직후 사생활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며 이미 이혼한 남편에게 누를 끼치면 안 된다고 말했듯, 진짜 2016년 부커상 수상자에게도 누를 끼치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해 보는 말이다.


얼마 전 살만 루시디의 "부커상 3관왕"에 대해서도 지적했었지만, 유독 부커상과 관련해서는 이런 오류가 계속되는 듯하니 희한한 일이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십중팔구 한강의 수상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문학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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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렇잖아도 발표를 앞두고 알라딘에서도 수상자 맞히기 적립금 행사를 했는데, 어쩐지 이 한국 작가가 다른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1위로 꼽혔기에, 노벨문학상이 단순히 한국 작가 인기 투표는 아니지 않나 의아하던 참이었다.


나귀님은 오래 전부터 후보로 거론되던 응구기 와 시옹오나 마거릿 애트우드 정도를 예상했고, 굳이 아시아로 와도 차라리 무라카미 하루키가 받으면 모를까 한국 작가가 받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오래 전부터 반복되던 노벨상 국뽕 타령 때문에 아예 가능성부터 젖혀놓았던 까닭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귀님이 한강이라는 작가를 과소평가하게 된 것도 그놈의 국뽕 타령 때문이었다. 평소 맨부커상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을 법한 사람들까지 나서서 세계 3대 문학상 타령을 늘어놓기에, 급기야 그 작가의 이름이며 그 작품의 제목만 봐도 외면하곤 했었으니 말이다.


이유야 어쨌거나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한 작가를 코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았다는 것은 큰 실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투표는 하지 않았지만, 설령 했더라도 적립금을 받지는 못했을 터이니, 이쯤 되면 나귀님도 남은 평생 로또 번호 따위 맞힐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되겠다.


나귀님이야 아직 한 편도 읽어보지 않은 작가이므로 당장 뭐라고 평가하기는 어렵겠다. 다만 앞서 맨부커상 번역 부문 수상 직후의 국내 반응 가운데 영역본의 오역을 둘러싼 논란도 있었음을 상기해 보면, 이번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는 뭔가 아이러니가 한층 더해지지 않나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맨부커상 번역 부문 수상작인 영어 번역본이 원문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뒤늦게 나왔기 때문인데, 번역의 한계와 문화적 차이 같은 근본적 난점을 감안하더라도 "팔"과 "발"을 혼동하는 등의 초보적인 오역이 수시로 등장한다는 것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 힘든 문제다.


물론 비슷한 비판은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관련해서도 제기된 바 있었다.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영역본 <설국>이 저 일본 소설가의 세계적 명성 획득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인 한편, 그 번역의 적절성을 둘러싼 논란이 줄곧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이덴스티커의 번역은 <설국>의 유명한 도입부를 비롯해서 번역하기 까다로운 일본어 원문을 영어로 상당히 잘 소화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결국 번역자가 원문을 무시하면서까지 자기 입맛대로 작품을 재창작한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일본 문단에서는 2류 작가가 번역가를 잘 만난 덕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험담까지 나돌았고, 급기야 당사자인 가와바타와 사이덴스티커조차 서먹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물론 험담과는 별개로 상당수의 중견 작가들이 줄줄이 이 미국인을 찾아와서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가와바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영어 번역이 결정적이었듯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서도 영어 번역이 결정적이었다 치면, 어떤 면에서 양쪽의 성과도 모국어의 위력보다는 영어의 위력 덕에 성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영역본이 오역투성이라니 우습지 않은가.


물론 작가나 작품을 폄하하려는 뜻은 없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심사 과정에서는 간행 언어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사 주체인 스웨덴 아카데미도 세상 모든 언어를 읽지는 못하므로 영어와 프랑스어 등 몇 가지 주요 언어로 간행된 작품 중에서 후보작을 고른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주요 언어로 출간되지 않은 제3세계 작품의 불리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되었는데, 뒤집어 보면 번역본을 많이 만드는 것이야말로 노벨문학상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뜻이 된다. 한국에서도 이를 감안하여 오래 전부터 정부와 민간에서 한국 문학 해외 번역 지원 제도가 있었다.


다만 번역 지원은 한국인 번역자를 거쳐 비상업 출판에 그치는 수요 없는 공급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반면, 한강의 경우에는 외국인 번역자가 작품을 물색하고 외국 출판사와 적극적으로 교섭해 상업 출판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까지는 자체 경쟁력을 인정받은 셈이라 하겠다.


그렇게 정석대로 간행된 영역본이 맨부커상 번역 부문에서 수상한 덕에 이 한국 작가에 대한 관심이 계속 더 많이 생겨났다고 전하니, 문득 어린 왕자가 사는 소행성을 발견한 천문학자가 전통 의상 대신 양복을 걸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연구 결과에 세상이 주목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도 한글로만 남았다면 세계가 알아줄 리 없다. 한강의 작품 역시 간행 수년 뒤에 영어라는 세계 공용어로 번역되어 더 주목받게 되었으니, 데보라 스미스라는 번역자를 만난 것이며 그로 인해 영역본을 만들어낸 것이 이 작가의 경력에서는 결정적인 한 수라 하겠다.


다만 앞서도 지적했듯이 영역본 오역 논란은 아쉬울 수밖에 없는데, 이제는 노벨문학상까지 탔으니 관련 논란과 비판조차 영구히 박제되어 버리지 않았나 싶다. 앞서 가와바타와 사이덴스티커의 사례처럼, 이제 소설가 한강의 명성도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와 영원히 결부된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역이나 첨언이 과하다 한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낙동강의 <육식맨>이 되어 오늘 준비한 고기부터 보자고 말하는 일이야 없을 것이다. 다만 한글날 직후에 그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 나니, 그 영역본을 둘러싼 논란이며 영어의 위력을 실감했기에 묘하다는 생각에 적어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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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슈디 신작을 살펴보는데 뜬금없이 "부커상 3관왕" 이야기가 나온다. 무슨 뜻인가 궁금해 살펴보니, 책날개의 저자 약력에서부터 "<한밤의 아이들>로 '부커 오브 부커스'(1993년)와 '베스트 오브 더 부커'(2008년)를 수상하며 부커상 3관왕이라는 문학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고 적어 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의 세 가지 수상 실적 가운데 1981년의 부커상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가 그냥 인기 투표에 불과했다는 거다. 즉 '부커 오브 부커스'는 1993년에 그 문학상의 제정 25주년을 기념해서 지금까지 나온 수상작 가운데 최고를 뽑은 것이지, 매년 시상한 정식 부커상까지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베스트 오브 더 부커'는 이름 그대로 2008년에 그 문학상의 제정 40주년을 기념해서 선정한 것이었으며, 우선 전문가 심사위원이 여러 후보작을 추리고 일반 대중의 참여를 거쳐 결정된 인기 투표였다. 당장 위키피디아의 부커상 항목에도 위의 두 가지 상은 "특별상"으로 분류되어 있다.


양쪽 모두 정식 시상이 아니라고 치면, "3관왕"은 억지 주장일 수밖에 없다. 보통 다관왕이라는 것은 한 대회에서 여러 부문에 걸쳐 수상한 경우를 가리키지 않나? 쿳쉬와 애트우드처럼 실제로 부커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작가도 "2관왕"이라기보다는 "2회 수상자"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예를 들어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가운데 20세기 최고작과 역대 최고작 하나씩을 선정해서 <대부>가 뽑혔다고 치면, 그걸 가지고 아카데미 시상식 3관왕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영화의 3관왕 실적이라면 197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각색상을 수상한 것만을 가리킨다.


물론 루슈디의 작품을 꾸준히 간행하고 있는 문학동네의 입장에서야 그 작가의 탁월함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아무래도 뭔가 억지스러워서 지적하는 것이다. 이전 작품에 수록된 약력에서만 해도 그럭저럭 설명하고 넘어갔던 내용을 지금 와서 유독 강조하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2011년 간행한 <피렌체의 여마법사>에서는 "1993년에는 지난 25년 간의 부커 상 수상작 중 최고의 작품을 뽑는 '부커 오브 부커스'에 선정되었다"고만 썼다. 2011년 간행한 <한밤의 아이들>에서도 "부커상 40주년을 기념해 일반 독자들이 선정한 '베스트 오브 더 부커'의 영예를 안았다"고만 썼다.


2012년 간행한 <루카와 생명의 불>과 <하룬과 이야기 바다>에서도 무난하게 넘어갔고, 2020년 간행한 <2년 8개월 28일 밤>에서는 그냥 부커 상, 부커 오브 부커스, 베스트 오브 더 부커를 받았다고만 쓰고 말았는데, 비슷한 시기의 다른 책에서는 3관왕 드립이 본격화되었으니 약력도 중구난방이었다.


즉 2015년 간행한 <조지프 앤턴>에서부터 뒤표지에 "유일하게 부커 상을 세 번 수상한 작가"라는 표현이 등장하더니만, 역시나 2015년 간행한 <이스트, 웨스트>의 약력에서부터 "루슈디는 한 작품으로 부커 상을 세 번 수상하는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겼다"는 의아한 주장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2022년 간행한 <악마의 시>와 2023년 간행한 <무어의 마지막 한숨>의 약력에서도 역시나 세 번 수상 이력을 들먹이며 "문학사상 유례 없는 기록" 드립이 나오더니, 결국 그 내용이 2024년 간행한 신작 <나이프>의 약력에까지 이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이건 3관왕이라고 볼 수 없다.


만약 출판사의 주장처럼 특별상 수상 실적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2018년의 부커상 제정 50주년 기념 최고작 선정에서 루슈디의 작품이 빠진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국 <한밤의 아이들>의 문학적 가치가 부정되었다는 뜻일까? 알고 보니 루슈디도 아주 탁월한 작가까지는 아니라는 뜻일까?


나귀님이 보기에는 그저 세월이 흐르면 유행도 바뀌어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로만 이해될 뿐이다. 한때의 걸작이나 졸작도 재평가를 거쳐서 그 위상이 달라질 수 있으며, 또다시 한 세대나 한 세기가 지나면 재평가를 거쳐서 그 위상이 달라진 경우를 문학사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으니까.


참고로 <한밤의 아이들>이 '부커 오브 부커스'를 수상한 1993년의 부커상 수상작은 로디 도일의 <패디 클라크, 하하하>였다. 이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서 헌책방에 많이 돌아다니던 책인데, 지금은 아마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거다. 루슈디의 작품이라 해서 이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같은 논리라면 알라딘도 '나귀님 선정 최악의 쇼핑몰' 분야에서 2024년 2월, 8월, 9월에 각각 1위를 했으므로 무려 3관왕이다. 아니, 이런 추세라면 2024년 전체 1위에다가, 어쩌면 21세기 전체 1위까지 달성할 수 있을 터이니, 그 다관왕 기록은 계속 늘어나면 늘어났지 결코 줄어들지는 않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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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책 안 산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만, 그래도 필요한 책은 가끔 한두 권씩 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주 잠실롯데월드타워점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니꼴라이 고골>이 중고로 나와 있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구입했다. 마침 이마 이치코의 취호 연작 가운데 최근작(그래도 무려 2021년 간행본)이 같은 지점에 있기에 배송료도 지울 겸 함께 구매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이번 잠실롯데타워점 구매 도서는 아무래도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이마 이치코의 만화는 (언제부턴가 살짝 억지스러운 전개와 급마무리가 일반화되는 것 같아 불만이긴 하지만) 예외라고 해야 되겠지만, 가장 기대했던 나보코프의 고골 연구서가 알고 보니 번역도 엉망이었고, 품질 등급도 상급이라지만 실제로는 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번역 문제부터 짚어보자. 이 책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펼쳐 본 부분은 당연히 단편 "외투"에 대한 분석인 제5장 "가면의 극치"였다. 1980년대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러시아 문학과 저항정신>이라는 책에 수록되어서 처음 접했던 글인데, 이전까지는 단순히 소아성애자 성향의 변태 불곰 영감님인 줄로만 알았던 양반의 비평가로서의 역량을 깨닫고 깜짝 놀랐었다.


그런데 <니꼴라이 고골>에 수록된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니, 내가 기억하는 내용과는 뭔가 다른 거다. 이상하다 싶어 영어 원문을 구글링해 보니 오역인 듯했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도 꺼내서 대조해 보았는데, 강의록을 재구성한 그 책에서도 고골 부분만큼은 <니꼴라이 고골>의 내용 중에서 발췌했다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대목은 이렇다.



>>> 외투를 입지 않은 아까끼 아까까예비치의 유령으로 간주된 인물은 사실상 아까끼의 외투를 강탈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아까끼 아까까예비치의 유령은 외투를 입지 않고 스스로의 힘에 의존한 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이상야릇한 역설적인 상황에 푹 빠진 경찰관은 이 유령을 아까끼의 외투를 강탈한 사람이 아니라, 유력인사의 외투를 강탈한 사람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김문황 번역, 208-9쪽) <<<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외투"의 줄거리를 기억해야만 한다. 가난한 하급 관리가 전재산을 털어 새 외투를 한 벌 장만하지만, 처음 입고 나간 바로 그날 밤에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빼앗기고 만다. 딱한 하급 관리는 외투를 찾게 도와달라며 고급 관리를 찾아가지만, 상대방으로부터 냉대를 받자 절망 끝에 사망하고, 이후 유령으로 나타나서 고급 관리의 외투를 강탈한다.


그런데 나보코프는 여차 하면 기발한 환상 소설로 끝날 수도 있었을 법한 이 단편의 막바지에 달라붙은 여담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즉 고급 관리의 외투를 강탈하고 만족한 유령이 사라진 이후에도 관련 목격담은 끊이지 않았으며, 한 번은 심약한 경찰관 한 명이 우연히 목격하고 그 뒤를 쫓다가 오히려 덩치 크고 우락부락한 유령으로부터 위협을 받아 도망쳤다는 거다.


나보코프는 마지막에 목격된 유령, 즉 경찰관을 위협하고 떠난 존재가 사실 하급 관리의 유령이 아니라 앞서 하급 관리의 외투를 강탈한 강도였다고 지적한다. 고골이 늘어놓은 갖가지 여담 때문에 독자가 간과하기 쉬운 이 뜻밖의 사실을 알고 나면, "외투"는 단순히 풍자와 환상을 버무린 작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생의 잔인함과 부조리함에 대한 씁쓸한 고발이 된다. 


나귀님도 "외투"를 여러 번 읽었지만 맨 마지막 유령의 정체에 대해서는 줄곧 간과했던 참이어서, 나보코프의 에세이를 처음 읽었을 때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문황의 번역은 원문에도 없었던 첨언 때문에 문장이 난삽해져서 처음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참고로 위에 인용한 대목을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겼다.



>>> 외투를 잃어버린 아카키 아카카예비치의 유령으로 비춰진 사람은 사실 그 외투를 훔친 사람이다. 아카키 아카카예비치의 유령은 외투의 부재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순경이 이야기의 기묘한 역설 속에 빠져들어 정반대의 인물인 외투 도둑을 유령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혜승 옮김, 127쪽) <<<



이전에도 지적했듯이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역시 오역이 적지 않지만 (나중에 개정판이 나왔지만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위의 인용문에서 가운데 문장만큼은 그럭저럭 옮겼다. 즉 하급 관리의 유령이 구천을 배회한 이유는 오로지 상실한 외투를 되찾겠다는 강한 집착이었기에, 고급 관리의 외투를 빼앗아 그 결여가 충족되자 만족하면서 성불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김문황 번역본만 보면 이게 그런 뜻이라고는 해석하기 힘들다. 문제는 제5장 내내 이런 식으로 헛다리를 짚은 문장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특히 원문에도 없었던 첨언을 해서 오류를 자초한 경우가 많은데, "외투"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별개의 인물인 화자(나)를 주인공(아까끼 아까끼예비치)으로 오인해 "나(아까끼 아까끼예비치)"(200쪽)라고 써 놓은 것이 그렇다.


러시아어 전공자가 영어책을 번역했으니 어쩔 수 없는가 싶다가도, 정작 미국 대학에서 고골 전공으로 석/박사를 받았다는 역자 약력을 보면 의아할 수밖에 없다. 해설에서 나보코프가 한때 몸담았던 "웰즐리 대학"(Wellesley College)의 이름조차도 줄곧 "웨슬리"로 여러 번 적어 놓았을 정도이니, 무려 25년의 노력 끝에 내놓았다고 자부하는 번역서 치고는 너무 부실하다.


심지어 나귀님이 받은 책은 한 페이지(225-226쪽)의 윗부분이 접혀서 잘못 재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찢어져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알라딘에서는 상급이라고 판정해서 정가 28,000원의 60%인 16,400원으로 판매가를 책정했다. 이쯤 되면 알라딘 본사 차원에서 나귀님을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하자 있는 책들만 갖다 놓고 구입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나저나 나보코프 번역서는 왜 이렇게 오류가 많을까? 가장 큰 이유는 번역자들의 무능이다. 저자가 현학 취미에다가 워낙 의뭉스러운 성격이다 보니 독자 오도하기를 밥 먹듯 하는데, 그 지뢰밭을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하다 보니 지난 수십 년간 오역본이 양산되었던 것이다. 이번 잠실롯데타워점 구매 도서가 영 실망스러웠던 궁극적인 이유도 결국 그것이었고 말이다.



[*]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뒤져 본 "외투"의 비교적 최근 번역본인 민음사와 창비 책에도 오역이 심심찮게 눈에 띄니, 결국 대한민국에서 "외투"를 온전히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도 같다. 어쩐지 이것 역시 나보코프의 말마따나 "고골스러운" 부조리의 한 가지 사례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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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알라딘에서 책을 많이 안 사다 보니 쿠폰이나 적립금을 받아 놓고서도 시한을 넘겨 날리는 일이 잦다. 어제인가도 무슨 적립금 1천 원이 또 날아갔다기에 다시 이벤트 페이지까지 찾아가서 클릭클릭해서 또다시 쟁여놓았다. 십중팔구 또 날릴 것 같기는 하지만, 또 혹시나 하는 마음이라서...


그나저나 해당 이벤트 페이지를 보니 알라딘에서 9월 사은품으로 책모양 칸막이 정리함이라는 물건을 주는 모양이다. 나귀님이 보기에는 또 다른 플라스틱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책 표지를 디자인에 응용했다니까 또 뭔가 궁금해서 클릭해 살펴보는데, 세부 정보 페이지에서 이상한 대목을 발견했다.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독일어판 표지를 응용한 케이스 전면에는 초록색으로 인쇄된 꽃화분 문양이 들어 있는데, 세부 정보 페이지에 그 확대 사진이 나와 있고 "제작 공정상 플라스틱 사출 부분의 홈에는 인쇄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는 불량이 아닙니다"라는 설명이 덧붙어 있는 것이었다.


사진을 보면 초록색 꽃화분 문양에서 잎사귀와 줄기 일부분이 인쇄되지 않고 동그랗게 파인 부분이 있다. 설명대로 사출구와 맞닿았던 부분의 플라스틱이 분리 과정에서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움푹 꺼지게 되었고, 결국 초록색 꽃화분 문양을 인쇄할 때 그 부분만큼은 잉크가 묻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핏 보면 알라딘 측의 설명대로 제작 공정상의 부득이한 결함처럼 보이기도 하고, 원산지가 중국이라는 것까지 알고 나면 더욱 부득이한 결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얀색 바탕에 초록색 문양이 인쇄되다 보니, 문제의 사출 구멍 자국이 멀리서 봐도 상당히 눈에 잘 띈다는 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프랑켄슈타인> 표지를 응용한 다른 두 가지 케이스의 경우에는 해당 부분에 마침 여백인지 흰색인지가 들어 있어서 별 티가 나지 않는데, <수레바퀴 아래서>만큼은 유난히 티가 난다. 그렇다면 제작 공정상의 결함만이 아니라, 오히려 디자인 단계의 잘못도 있지 않을까?


무슨 말인가 하면, 사출 구멍 때문에 케이스 표면에 완벽한 인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애초부터 알았다면, 차라리 여백이 적은 <수레바퀴> 대신 여백이 많은 <앨리스>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표지로 교체하든지, 아니면 문양을 수정해서라도 사출 구멍 부분에 여백을 두어야 했지 않느냐는 거다. 


반대로 알라딘에서 샘플을 확인하고 디자인할 때에는 없었던 사출 구멍이 제작 단계에서 갑자기 추가된 셈이라면, 이건 누가 봐도 제작업체의 잘못이고 불량이므로 전량 반품하고 손해 배상을 청구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여하간 알라딘의 책임이건 제작업체의 책임이건 간에 불량품은 분명하다.


하자가 있는 물건이라면 사은품이건 상품이건 간에 아예 내놓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 현재 알라딘은 '하자가 있다'는 공지만 올리고 사은품 배포를 강행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 알라딘은 불량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솔직히 누가 봐도 불량이고 하자이니 말이다.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이전에도 오랫동안 중고 서적 하자 문제로 고객센터의 문을 두들겼을 때의 전형적인 답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매입 과정에서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아 하자 있는 책을 보내고서도, 이에 대해 항의하면 맨 먼저 내놓는 말은 '중고 물품의 상태는 보기 나름'이라는 것이었다.


즉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니요, 바로 네 마음이니라'라는 뜻이니, 하자가 있다는 것은 네 의견일 뿐이고 우리는 멀쩡한 물건 보냈으니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셈이었다. 이게 사실 무적의 논리이기 때문에, 이걸 논파하려면 물건의 구체적인 하자 사진이며 이유를 구구절절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 고객센터의 말마따나 애초에 중고 물품의 상태 판정이 사람마다 제각각이라면, 나귀님의 판정이나 알라딘의 판정이나 절대적이지는 않으니 애초부터 기준이 없어진다. 뒤늦게야 알라딘에서 품질 판정 기준을 만든 이유도 그래서이겠지만, 역시나 투표로 결정했으니 주관적인 기준일 뿐이다.


여하간 그간 고객센터와 지겹게 싸워 왔던 나귀님의 이력을 돌이켜 보면, 멀리서 봐도 딱 티가 날 만큼 중대한 하자가 있는 책모양 칸막이 정리함의 문제를 어디까지나 제작 공정상의 불가피한 결과일 뿐 "불량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넘어가는 알라딘의 사고방식이 대범하다 못해 무섭게 느껴진다.


물론 연휴는 물론이고 평일에도 응급실을 못 찾아서 위급한 환자가 죽어 나가고, 부동산 가격이 널을 뛰고, 그 여편네가 명품백을 챙기는 상황에서도 절대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을 우두머리로 둔 나라이다 보니, 뭐, 알라딘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게 있겠느냐고 반문하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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