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애 선생의 <그림 동화> 번역본이 새로 나왔다는 것 자체는 반가운 소식이나, 책소개 글에서 하버드 클래식스 선정 도서 운운 하는 대목을 접하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그림 형제의 저 민담집이야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고전 중의 고전인데 왜 지금 와서 굳이 하버드 간판을 들먹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식의 간판 내세우기는 아동서의 각종 수상 내역으로부터 시작해서 최근 수년간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무려 <그림 동화>에 대해서까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뭔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하버드 선정 고전 여부가 그토록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라면, 서울대 선정 고전 가운데 하버드에서 외면한 것들은 가치가 떨어지는 셈일까?


노벨문학상이며 퓰리처상 같은 것이야 그나마 알려진 편이지만 기타 문학상 중에는 그런 게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영 생소한 인물이며 사안을 기념하는 것도 많으니, 결국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가끔은 출판사에서도 잘 모르는 듯 오타까지 내곤 하는 각종 수상 실적을 굳이 갖다 붙이는 것도 결국 속물 근성의 소산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된다.


여하간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오래 전에 이데아총서 중 한 권으로 시작했다가 야금야금 전집의 꼴을 갖춰 가던 도중에 기약 없이 멈춰 버린 어느 작가의 작품이 속간될 때에도 "해리 포터 시리즈의 영화판에서 질데로이 록하트를 연기한 배우가 감독하고 시빌 트릴로니를 연기한 배우가 주연한 고전 영화의 원작" 운운하는 문구가 등장하진 않을까 싶기도 하고...



[*] 생각해 보니 집에 이미 갖고 있는 <그림 동화>만 해도 여러 권이다. 예전 을유문화사의 김창활 완역본부터 시작해서 김열규 완역본의 분권(전2권)과 합본이며 한길사 김경연 세트(전10권), 거기다가 삽화가 마음에 들어서 샀던 비룡소의 세 권짜리 선집과 문지의 대형판과 길벗어린이의 초대형판, 그 정반대에 해당하는 현대지성사의 이솝/그림/안데르센 미니북까지 있으니까. 지난번 구미 친모/외조모 미스터리 소식을 접하며 체인질링 전설을 읽어보려고 꺼냈던 <독일 전설> 완역본과 그 선집도 있고, 그림 형제/동화에 대한 연구서도 한두 권쯤 있는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꽤 오래 전에 구입한 영역본도 어딘가 파묻혀 있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트루데 부인>도 있었지...)


[**] 아니, 그나저나 선생님, 지금 괴테 전집을 서둘러 완간하셔야 할 참인데, 어째서 그림 동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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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에 관한 책을 하나 미리보기 하면서 이런저런 오류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아는 체 하고 났더니, 알라딘에서 비슷한 책 몇 권을 추천하는데 이번에는 <고쳐쓰기>란 것도 있다. 역시나 미리보기로 뒤적뒤적 하다 보니 루드비히 베멜만스의 그림책 <마들린느>의 내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살짝 알쏭달쏭한 구절이 등장한다. 바로 "포도나무로 뒤덮인 파리의 오래 된 기숙사"라는 구절이다. 보통 포도나 아이비나 담쟁이 같은 식물을 vine이라고 지칭하기 때문에 생긴 오류가 아닐까 싶은데, 원문을 살펴보니 역시나 vine이고 시공주니어의 번역서에서는 모두 "덩굴"로 옮겼다. 물론 담쟁이도 포도과 식물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수원도 아니고 "포도나무"는 좀 그렇지 않나 싶다. 책을 더 좋게 만들자는 "고쳐쓰기"의 장점과 방법을 설파하는 책 치고는 살짝 체면이 구겨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여차저차 해서 핑곗김에 "마들린느" 시리즈 가운데 현재 갖고 있는 네 권을 꺼내 오랜만에 완독했다. 가장 덩치가 작으면서도 가장 까불어 대는 마들린느의 이야기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수녀 선생님의 다급한 걸음을 묘사한 장면이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서둘러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뛰어가지만, 잔뜩 기울어진 상체에 비해서 하체는 긴 치마에 덮여 있기 때문인지 영 속도를 내지 못하고 제자리에만 붙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악몽에서 도망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경우를 그림으로 묘사하자면 대략 이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나저나 <마들린느와 개구장이>에 나오는 장난의 수위는 요즘 기준으로는 꽤나 높은 것 같아서 살짝 놀라기도 했다. 물론 마들린느도 평소 장난만 놓고 보면 요즘 기준으로는 딱 개초딩이라 그 부모 집에 포스트잇깨나 붙을 것 같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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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편집에 관한 책이 새로 나온 것 같아서 뒤적뒤적 해 보려는데 어째서인지 미리보기 버튼이 보이지 않는다. 요즘 워낙 컴퓨터가 깜박깜박하는 바람에 (방금 전도 자판이 먹히지 않아서 껐다가 다시 켰다) 그런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본문을 볼 수 없으니 밑에 나온 카드 리뷰인가 뭔가를 눌러보니 (이거 평소에 절대 안 눌러보고 건너뛴다. 동영상도 마찬가지고. 사실 책/글자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한 가지 오류가 눈에 띈다.


바로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을 출간 비화를 설명한답시고 출판사 이름 Faber and Faber 를 (아마도 영국식 발음이라 넘겨짚은 듯) "파버앤드파버"라고 적은 것인데, 이건 "페이버앤드페이버"가 맞다. 설립자의 손자인 토비 "페이버"가 나온 유튜브 동영상에서도 "페이버앤드페이버"라고 확인사살을 했으니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랴. 미국의 "크노프"(Knopf) 출판사와 함께 헛갈리는 출판사 이름의 양대산맥이었는데, 인터넷 덕분에 이젠 속이 다 후련하다.


카드 리뷰에 들어 있는 내용을 알라딘에서 지어낼 리는 없을 터이니, 십중팔구 책 안에도 "파버앤드파버"로 적혀 있을 터인데, 비록 사소한 오류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편집" 씩이나 다룬다는 책이다 보니 살짝 민망함을 느낄 만하지 않나 싶다. 이것 말고도 눈에 걸리는 대목은 몇 가지가 더 있었는데, (십중팔구 출판사가 작성했을 법한) 책소개 내용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묘비명에 friend 대신 frend 라는 "오탈자"가 적혀 있다고 지적한 대목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frend는 friend의 고어(중세 영어)이지 오탈자가 아니다. 이건 마치 훈민정음 서문에 나온 "어린"을 "어리석은"의 오탈자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궁금해서 원서를 구글링해 보니 오탈자가 아니라 철자의 변천에 관한 대목에서 언급되는 모양이다. 물론 책에서는 "오탈자로 보이는데 ... 사실은 중세 영어다"라고 제대로 설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책소개(보도자료)에서 대놓고 "오탈자"라고 단언한 것은 과도해 보인다.(이거야말로 박제감이 아닌가).


그나저나 여기까지 쓰고 다시 살펴보니 무슨 영문에서인지 이제는 미리보기 버튼이 나오기에 클릭해 보니, 약간 의아한 대목을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진지함의 중요성>을 실수로 무려 2만 부나 찍어 본 경험도 있다"(17쪽)는 구절인데, 원문을 살펴보니 2천 부를 찍어야 할 책을 실수로 2만 부 찍었다는 게 아니라, 제목에서 "진지함"에 해당하는 단어를 고어인 Earnest 대신 현대어인 Ernest 로 오타를 낸 채 2만 부나 인쇄했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번역에서도 차라리 "실수로" 대신 "제목에 오타가 난 채로" 정도로 수정해 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사실은 오스카 와일드의 성 Wilde 도 종종 Wild로 오타가 발생하기 쉬운데, 테리 이글턴의 <반대자의 초상> 표지에 딱 그렇게 잘못 쓴 철자가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지적하자면 저자 서문에 나온 "가동 활자"는 아마 그냥 "활자"라고 써야 맞을 것이다. "활자" 그 자체가 moveable type, 즉 조판과 해체가 가능한 자유로운 개별 타이프(자)라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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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덕분에 필립 할스먼의 <점프!>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 뒤적이면서 가장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사진은 바로 배우 탤룰라 뱅크헤드의 사진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이 책에 수록된 거의 모든 (왜냐하면 끝내 점프 포즈를 거절한 밴 클라이번 같은 사람도 있었으니까) 모델과 마찬가지로 힘차게 위로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 밑에 달린 사진가의 캡션처럼 "탤룰라 뱅크헤드의 발은 땅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다."(127쪽) 즉 이 배우는 오른손에 담배를 쥔 상태에서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잔뜩 위로 솟구친 시늉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자리에 서서 한 발만 들고 고개를 치켜드는 등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점프를 소재로 하는 사진집에서 유일하게 "가짜" 점프를 해낸 사람이니, 그것도 사진가의 말마따나 "탁월한 여배우가 꾸며낸" "탁월한 몸짓과 표현력"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사진가도 그런 이유에서 굳이 이런 점프 아닌 점프를 이 사진집에 수록했을 터이다. 이쯤 되면 이 여배우의 성격 자체가 평소에 장난을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자연스레 떠오르는데, 대표작인 히치콕의 영화 <구명 보트> 촬영 당시에는 아예 노팬티로 촬영장에 나와서 제작진을 당황시켰다는 일화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이건 히치콕 전기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매번 사다리에 오를 때마다 밑에 남자 스탭들이 우글거렸다나).


그런데 탤룰라 뱅크헤드라는 여배우나 히치콕의 영화까지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탈룰라"라는 이름만큼은 아마 대부분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건 최근 들어 유행한 인터넷 밈 때문인데, 자메이카 봅슬레이 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쿨러닝>의 한 장면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즉 경험도 전무하고 장비도 부실한 봅슬레이 팀이 본격 출범하면서 자기네 썰매에 무슨 이름을 붙여 줄지를 논의하는 대목에서, 그중 한 명이 "탈룰라 어때요?" 하고 제안하자 나머지 모두가 비웃다 못해서 "무슨 창녀 이름이냐" 하고 핀잔을 주는데, 곧이어 제안자가 "우리 엄마 이름인데..." 하고 덧붙이자 180도 태세 전환에 나서서 좋은 이름이라 둘러대는 것이다.


이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지금은 "탈룰라"라고 하면 말실수, 또는 패드립의 대명사가 되었다니 희한한 일이다. 물론 나야 <쿨러닝>보다는 <구명 보트>를 먼저 알았고, 그보다 더 먼저 탤룰라 뱅크헤드라는 배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도 종종 "탈룰라"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패드립보다는 오히려 노팬티가 먼저 생각나지만 말이다. 물론 이제는 할스먼의 사진집에 나온 가짜 점프 사진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앞으로 한동안은 노팬티 다음으로 가짜 점프 사진이 생각날 수도 있겠다.(여기서 문득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물려받은 아주머니 동명이인의 노팬티 스캔들도 생각난다).



[*] 책에도 나오지만 할스먼이 이 연작 사진을 찍게 된 계기가 "흠좀무" 하다. 자동차 재벌 포드 가족의 단체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심심풀이로 대뜸 에셀 포드(헨리 포드의 아들)의 부인에게 점프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해서 사진을 찍었더니만, 그걸 지켜보던 포드 2세(헨리 포드의 손자)의 부인이 "갑툭튀" 하더니만 자기도 점프 포즈로 찍어 달라고 자청해서 촬영을 했고, 그러고 나서는 문득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는 곳마다 유명인사를 상대로 점프 포즈를 요청해서 결국 유명한 사진집까지 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식으로 바꿔보자면 정주영 며느리와 손주며느리에게 점프를 시켰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홍라희한테 점프를 시켰더니 임세령까지 덩달아 점프를 자원했다고 해야 할까, 이런 것을 탈억제라고 하는지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흥미로운 일화인 것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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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러 가겠다며 바깥양반이 책 꺼내 놓으라기에 전기 세 권, 핵무기 개발 네 권, 고등연구소 세 권 (사실은 한 종), 파인만 세 권 (역시나 한 종), 기타 등등을 줄줄이 꺼내 놓았더니만, 이번 영화의 원작이라는 두꺼운 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로버트는 얼마나 좋았을까") 결국 아인슈타인과의 공동 전기에서 오펜하이머 장만 쏙 빼서 읽고, <트리니티>라는 만화책 한 권만 추가로 읽고 가서 영화를 본 모양이다. 물론 아무 것도 읽지 않은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쯤 되면 나로서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밖에 없다. "아니, 책으로 읽을 게 이렇게 많은데 뭐 하러 영화를 봐?"


영상 예술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전기 영화는 극적 표현을 위해서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아무래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전기나 논픽션 같은 쪽이 더 객관적이고, 설령 상충되는 시각이 있더라도 서로 대조해 보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비해 영상 매체는 강력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깊은 인상을 새겨주기 때문에, 일단 눈으로 한 번 본 광경은 잊어버리고 새로 상상하기가 어렵다. 짐작컨대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먼저 보면 소설 속 장면을 달리 상상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여하간 영화 덕분에 오펜하이머며 핵무기 관련서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본 것은 반가운 일이었고, 이번 기회에 뒤적뒤적 하면서 그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또는 상기하게) 되었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지금은 절판된 (아울러 알라딘에는 번역을 성토하는 글이 여럿 올라온) 제러미 번스타인의 오펜하이머 전기 표지를 보니 필립 할스먼의 저 유명한 "점프" 사진이 나와 있어서 새삼스레 그 화보집도 오랜만에 꺼내서 그 사진을 촬영하던 당시에 있었던 사진가와 과학자의 대화 부분을 읽어보기도 했다.(할스먼의 <점프!>도 이미 절판되었다. 요즘은 책의 수명이 정말 짧구나!)


필립 할스먼은 살바도르 달리와의 공동 작업으로 유명한 미국의 사진가인데, 언젠가 판에 박힌 초상 사진만 찍는 것에 지루함을 느낀 나머지 모델에게 점프 포즈를 제안했고, 의외로 반응이 좋자 주요 레퍼토리로 삼았다. 할스먼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찾아가서 사진을 찍었을 때, 오펜하이머는 천장을 바라보며 팔을 뻗고 펄쩍 뛰어오른 다음 그에게 질문했다. "제가 점프하는 모습에서 무얼 읽으셨나요?" 할스만이 잠시 고민하다가 뭔가 새로운 방향이나 목표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오펜하이머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뇨, 그냥 닿으려고 한 것 뿐이에요."(44쪽) [*]


<점프!>에서 다른 모델들은 대부분 팔을 내린 상태에서 뛰어오르고, 설령 팔을 치켜든 경우에도 오펜하이머만큼 길고 날렵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특히 남자들은 대부분 양복 저고리에 단추를 채운 상태이다 보니, 위로 치솟는 동작에서 어깨 부분이 부풀면서 볼품없이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예 시선을 하늘로 두고 풀어 헤친 양복 저고리를 휘날리며 뛰어오르는 오펜하이머의 모습은 정말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경쾌하다. 사진가에게 던졌던 질문과 그 답변까지 덧붙여 보면, 어쩌면 앞으로도 한동안 오펜하이머에 대한 내 인상은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이 사진으로 남을 것 같다.



[*] 참고로 이 일화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 역시 정보의 양에서는 두세 시간짜리 영화보다 책이 더 압도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제러미 번스타인은 역시나 물리학자로 일하면서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당대의 유명 물리학자를 직접 만나 보고 전기까지 썼는데, 놀랍게도 93세로 아직 살아 계시다! 예전에 전파과학사에서 나온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썼다고 기억하는데, 오펜하이머 전기에도 당사자를 직접 만났을 때의 일화가 실려 있기도 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일화는 번스타인이 오펜하이머를 처음 만나 인사를 했을 때의 일이다. 의외로 처음에는 오펜하이머가 냉랭하다 못해 무서운 얼굴을 짓더니만, 곧바로 자기가 조만간 고등연구소에 입소하게 되었다고 말하자 표정이 누그러지며 한없이 자애롭게 변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프로메테우스"로서의 역할 못지않게 천변만화하는 "프로테우스"의 기질까지 지닌 것은 아닌가 싶은 저 물리학자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로 기억해 볼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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