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빈과 홉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당연히 책은 아직 오지 않았다) 거기서 주인공의 주요 공격 대상은 또래 여자친구인 수지(Susie)와 베이비시터인 로잘린(Rosalyn)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나마 베이비시터는 월등한 신체 조건으로 꼬맹이 캘빈을 종종 제압하지만, 동갑내기 수지는 거의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캘빈이 수지에게 거는 장난은 대부분 이유 없이 자행하는 것이니 만큼, 요즘 분위기에서는 이 만화 속 꼬맹이조차도 개저씨에 한남충 소리를 듣고도 남을 것 같지만, 사내아이들이 종종 관심을 표현한답시고 계집아이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거는 것이야 예전부터 왕왕 있었던 일인 것도 사실이다.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는 짜증나고 황당하겠지만.


언젠가 김필원 프로에서 (이 양반 요즘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한 청취자가 보낸 사연 중에, 어린 시절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서 노심초사하다가 나름대로는 관심을 끌어 보겠답시고 버스에서 졸고 있는 여자아이 눈 밑에다가 물파스를 발랐다가 이후로는 완전히 미친 놈 취급을 받고 외면당했다는 게 있었다.


당시 방송 중에는 진행자며 청취자 모두 웃음이 터졌다는 반응이었고, 나 역시 듣다 말고 웃음을 터트리기는 했지만 막상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을 터이니 딱히 웃음이 나올 리는 없었을 것도 같다. 심지어 진짜 성범죄의 경우조차도 "장난"으로 둘러대어 유야무야되는 불합리한 경우도 십중팔구 있었을 터이니까.


다만 예전보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 돌이켜 보면, 세상을 살다 보면 (앞서 캘빈의 집에 도둑이 들었던 에피소드처럼) 뭔가 내 뜻대로는 풀리지 않는 일이 있게 마련이고, 이른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의 상황이라든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의 상황이 있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만사를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고, 지혜는 뒤늦게야 찾아오니 훗날에 가서야 예전 일을 돌아보며 아쉬움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흔히 말하는 인생 n회차가 되면 좀 더 잘 살아보겠다는 상상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런 맥락일 터인데, 그렇다고 해서 늘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을까.


그나저나 "수지" 이야기가 나왔으니 작년엔가 구입해서 뒤적이다가 안방 머리맡에 놓아둔 책더미 밑에 깔려 있던 <인사이드 세른: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풍경>이라는 책의 기묘한 표지에 나온 또 다른 "수지"가 생각난다. 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자 존 엘리스의 사무실 모습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 종이로 만든 해골이 책장에 걸려 있는 것이다.


해골의 가슴팍에는 I spoke bad about SUSY 라는 종이 명패가 걸려 있는데, 번역하자면 "나는 수지(SUSY)를 안 좋게 말했습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SUSY란 Supersymmetry, 즉 "초대칭"의 약자인데, 해당 연구소에서 오래 근무했다는 물리학자 박인규는 권말에 붙인 해제에서 이 해골과 명패의 내용에 담긴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존 앨리스의 연구실에는 해골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해골은 목에 종이 하나를 걸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I spoke bad about SUSY’라 적혀 있죠. ‘SUSY’는 초대칭이론(supersymmetry)을 말합니다. ‘존 엘리스가 초대칭이론에 악담을 했다’는 것인데, 결과는 두고 봐야 합니다. 물론 아직까지 엘에이치시(LHC)에서 초대칭입자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열화당의 인스타그램 홍보 게시물 중에서. https://www.instagram.com/p/BjVsvn8AcVe/?hl=fr)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박인규의 설명과는 정반대가 되어야만 정확할 것만 같다. 존 엘리스야말로 SUSY의 지지자인데 왜 그가 SUSY에 대해서 악담을 한단 말인가? 차라리 그 해골은 "SUSY를 악담하는 자의 최후는 이러할 것"이라는 뜻으로 존 엘리스가 걸어 놓은 일종의 경고 표시라고, 아울러 명패의 내용은 곧 죄목이라고 봐야 맞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심슨 가족>의 오프닝에서 매번 바트가 학교 칠판에 "앞으로는 00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자기 죄목을 반성문 삼아 쓰는 처벌을 받는 것과도 유사한 상황인 셈인데, 막상 존 엘리스와 그의 물리학적 입장에 대해서 분명히 잘 알고 있었을 법한 한국인 물리학자가 해골과 명패에 대해 전혀 엉뚱한 해석을 내놓았다는 것은 뭔가 좀 신기하다.


문제의 초대칭 이론은 아직까지 가설이라서 CERN에서 실험을 통해 입증 노력을 하고 있다는 모양인데, 일각에서는 여러 차례 실험에도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회의적인 반응도 나오는 모양이다. 그 이론의 옹호자인 엘리스가 자기 연구실에 가짜 해골까지 걸어 놓으면서까지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도 그런 맥락 때문일 수 있겠다.


엘리스의 "수지" 애호와는 달리 캘빈은 "수지"에게 항상 적의와 경멸만 드러내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둘이 앞에서는 서로를 욕하다가 뒤돌아서서는 미소짓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인 에피소드도 있었던 듯하니, 그들의 다툼과 장난도 그들 (또는 "저자") 나름대로는 이른바 꽁냥꽁냥의 한 가지 형태라고 봐야 맞을 듯하다.(최소한 물파스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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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과 홉스" 박스 세트 이야기가 나왔으니, 추석 연휴에 "하인라인 단편 전집" 박스 세트가 알라딘 중고샵에 네 질이나 올라와 있기에 그중 한 질을 구매한 이야기도 살짝 꺼내야 할 것 같다. 역시나 할인율이 높지 않아서 살짝 고민했지만, 어차피 사게 될 것이니 조금 비싸더라도 그냥 지금 눈 딱 감고 사버리고 치우자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지난번 시공사의 선집이 의외로 금세 절판된 것 때문에 뒤늦게 아쉬웠던 기억 때문이기도 하고... [*]


그나저나 하인라인 단편 전집은 막상 받아 보니 비닐도 뜯지 않은 완전 새것이어서 횡재한 셈이 되었지만 (나머지 세 질 구입한 사람 소리 질러!) 앤 카슨이 말한 사슴의 음문도 아닌 주제에 너무 꽉 끼는 박스에서 책을 꺼내 보니 한 가지 의아한 대목이 있었다. 박스 세트 정가는 20만 원으로 나온 반면 각 권은 2만 4천 8백 원이어서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낱권으로 사면 20%나 더 비싼 셈인 건가 싶다.


최근에는 북펀드다 뭐다 해서 출간 전에 예약 판매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그런저런 사정으로 간행되는 과정에서 낱권과 세트의 가격 차가 발생한 것인지 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하드커버를 씌워놓아서 두꺼워 보일 뿐 실제로는 300페이지도 안 되는 책들도 일괄적으로 2만 4천 8백 원이니, 보기에 따라서는 과도한 가격이라고 볼멘 소리를 낼 여지도 없지 않아 보인다. 흔히 말하는 장르 독자 등쳐먹기의 또 다른 사례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는 아작 출판사의 간행물이니 살짝 의심스럽기도 했는데, 이놈의 출판사는 원래도 번역/편집이 한심한 수준이었던 데다 (코니 월리스 단편집에서는 디킨스/디킨슨을 혼동하기도 했고, 할란 엘리슨 단편집에서는 "리츠 호텔만한 다이아몬드"를 "리츠 크래커만한 다이아몬드"로 오역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무식하다고 보면 될 듯하다) 나중에 모 작가와의 분쟁 이야기도 나온 것으로 보아 돈도 잘 안 주는 모양이니 문제가 많아 보인다.


그러다 보니 하인라인 단편 전집도 번역/편집은 제대로 되었을까 살짝 미심쩍었는데, 예상대로 그중 제7권을 꺼내서 단편 하나를 읽다 보니 몇 가지 오역/오타가 눈에 띈다. 시오도어 스터전도 자기 단편 속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언급했던 "금붕어 어항"이라는 작품인데,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오는 것이다. "그레이브스 박사가 통에 연결된 줄을 끊었다. 두 사람은 보기 흉하고 다루기 힘든 그 통을 도르래를 연결하려 낑낑댔다"(67쪽)


그런데 앞뒤 문맥을 보면 보트에 고정한 통 모양의 관측 장비를 손으로 들어서 바다에 던져 넣으려는 대목이므로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맞다. "그레이브스 박사가 통을 고정한 줄을 끊었다. 두 사람은 보기 흉하고 다루기 힘든 그 통을 들어올리느라 애를 먹었다." 위에서 "도르래를 연결하려"라고 오역한 부분의 원문은 get a purchase on, 즉 그냥 "(손으로) 붙들다"라는 뜻이다. 그 외에도 "보트 담장 장교"(65쪽)라는 희한한 직책도 나온다.


하인라인에 대해서는 최근 들어 "아동성애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듯한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작이 의외로 용감하다고, 또는 무모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시공사의 걸작선 가운데 하나인 <여름으로 가는 문>에서는 역자 후기에서 이 문제를 직격하고 있던데, 그렇게까지 내용이 불편했다면 왜 굳이 그런 작품을 골라서 번역/간행했느냐는 반문도 가능해 보인다.(당연히 그게 내용의 전부가 아니니까 그랬겠지!)


이건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고 미국에서도 하인라인의 작품 속 여성 비하라든지, 아동 성애라든지, 근친상간이라든지 하는 쟁점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독자가 적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장점보다는 오히려 단점 때문에 간행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드며 히틀러의 책도 버젓이 돌아다니는 판에 지금 와서 하인라인만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뭔가 좀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그렇게 되면 오이디푸스 희곡은 뭐고, 구약성서는 또 뭔가?)


사람들의 사고와 풍습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니, 페미니즘이건 맑시즘이건 그루초맑시즘이건 간에 불과 수십 년 사이에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일시적 통념을 마치 절대적인 기준인 양 휘둘러서 만사를 재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프로불편러들이야말로 자기 시대의 지배적 사고방식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솔직히 박정희 시대의 반공주의자들과도 사실 별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닐지...?




[*] 비슷한 사례로 베틀북의 로알드 달 걸작선이 있는데, 절판 직후에 다섯 권 가운데 세 권인가는 예전 강/정영목 번역본의 재간행으로 또다시 나온 반면, 한 권은 아예 다른 번역본이 나왔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처음에는 아동서와 어른서(?) 모두를 내는 출판사이다 보니, 이 선집에 수록된 "마누라 바꿔먹기"(?) 단편 같은 경우에는 애들이 보기에 좀 뭐해서 금방 절판시켰나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보다는 차라리 조만간 나온다는 일부 작품의 영화화 때문에 다시 한 번 판권 확보 경쟁이 벌어진 것이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하간 진실은 저 너머에...) 내가 확인한 바로는 베틀북의 걸작선이 작품 수는 가장 많았고, 강/정영목 번역본의 초판본이나 재간행본 모두에는 없는 것도 있었다. 뭐가 뭔지 궁금해서 네 가지 판본의 수록 작품 목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가 있긴 한데, 언제 한 번 올리려다 안 올리고 이렇게 구구절절 말로만 떠들고 있다. 예전에 과레스끼의 신부님/읍장님 단편 시리즈도 비슷한 목록을 만들었는데 컴퓨터가 맛이 가는 바람에 자료를 날려버린 기억도 난다. 민서/서교 번역본을 대조했던 것인데 이제 와서는 귀찮아서 다시 하게 될까 싶기도 하다. 여하간 기회가 되면 올려 보든가 아니면 말든가. 누가 딱히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여하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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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바람에 바깥양반 아침 먹여 내보내고 나서 어젯밤 주문하려다가 못한 중고매장 만화책 더하기 역사책이 생각나서 (달랑 두 권인데 2만 5천 원이어서 배송료가 면제되니 좋은 일인가, 아니면 한심한 일인가) 알라딘에 접속해 혹시 그 사이에 더 올라온 물건이 있나 기웃거리다 보니 "캘빈과 홉스" 박스세트가 벌써 중고로 나와 있다.


잠시 고민했다. 신간이라 중고 할인율도 높지 않은데 굳이 지금 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이전에 원서로 몇 권 갖고 있다가 결국 다 처분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새삼스레 다시 읽어볼 필요도 없는 것 같고, 여친과 베이비시터를 겨냥한 주인공의 작중 행동을 보면 요즘 기준으로는 딱 여혐에 한남충에 개초딩 소리를 들을 것도 같고...


그래도 결국 주문 버튼을 누르게 된 까닭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그중 한 장면 때문이다. 하루는 캘빈 가족이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집에 도둑이 들어서 쑥대밭이 되어 있다. 아들 앞에서는 비교적 침착했던 부모였지만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서는 자기네가 당한 끔찍한 일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몸서리친다.


이 대목에서 캘빈의 아버지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내뱉는 독백이 있다.(지금 구글링해 보니 이 장면의 스캔본이 여럿 나오는 것으로 보아 나 못지않게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이 제법 많았던 듯하다). 자기가 어렸을 때에는 어른이 만사를 다 알고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꼭 그렇지도 않더라는 거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절대권력에 무소불위인 것처럼 보이는 어른들이지만 실상은 그들 역시 수많은 한계 앞에서 매일같이 좌절하게 마련이니, 가장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이고 (다른 무엇보다)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막상 정체도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가정이 약탈당했다는 사실 앞에서의 무기력과 자괴감을 토로하는 대목인 셈이다.


어린 시절에 읽었다면 느낌이 또 달랐겠지만, 이미 원서를 구입해서 읽었을 당시에는 "벼르고 벼르다 다 자랐소"인 상황이어서인지, 캘빈의 갖가지 몽상이며 개초딩 짓보다도 오히려 어머니의 곤경과 아버지의 자괴감 쪽에 더 마음이 쓰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흔히 말하듯 둘리보다 고길동이 더 불쌍해 보이면 이미 어른이 된 것이라니까.


여하간 거의 20여 년 만에 다시 (이번에는 번역서로) 읽게 되는 셈이니, 과연 이번에는 해당 장면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피너츠>를 완전판으로 처음부터 읽으면서 놀랐던 최근의 또 다른 경험처럼 (찰리 브라운이 이렇게 왕따를 당했을 줄이야!) 이전에는 놓쳐 버렸던 또 다른 행간의 의미라도 발견하게 되려나...



[*] 그나저나 책소개/보도자료에서 원서 출판사를 "유니버설 맥밀"이라고 잘못 적었던데, "앤드류스 맥밀 유니버설"(Andrews McMeel Universal)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파 사이드, 캘빈과 홉스, 딜버트 같은 만화 시리즈는 물론이고 <블루 데이 북>처럼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많이 펴내는 출판사로 기억한다.(그나저나 딜버트 작가도 최근 들어 구설수에 휘말리며 단숨에 나락으로 가버린 모양이다. 딜버트 애니메이션 가운데 하나인 "끼"(the Knack)를 지금도 가끔 한 번씩 찾아보곤 하는데, 특유의 냉소적 풍자를 마음에 들어 했던 독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이래저래 씁쓸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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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또 아는 척 하고 나서 알라딘을 휘적휘적 돌아다니다 보니, 이번에는 윌리엄 블래티의 <엑소시스트>가 새로운 번역본으로 간행되었다고 해서 또 깜짝 놀랐다. 예전에 범우사에서 <무당>으로 나왔다가 나중에 <엑소시스트>로 제목을 바꾸어 다시 나왔었는데, 저자명으로 검색해 보니 구판 정보도 아직 알라딘에 남아 있다.


공포영화 쪽에서는 워낙 유명한 작품이고 음악도 유명한데, 그렇잖아도 그저께였나 라디오에서 "문라잇 섀도"라는 노래가 나오기에 이게 마이크 올드필드의 노래였지 싶어서 결국 유튜브로 "튜블라벨스"까지 한 번 틀어보고 나서야 끝을 맺었다. 버진 회장 자서전을 보면 이 음반으로 처음 대박을 터트렸다는 증언도 나와 있다.


<엑소시스트> 이야기가 나왔으니 생각이 났는데, 여기서 악귀와 싸우는 젊은 신부로 나온 제이슨 밀러는 원래 배우가 아니라 극작가였다. 그것도 대표작 <아, 우리가 챔피언 먹었던 그해>로 1973년 희곡 부문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진짜배기 극작가이다.(이 작품은 현대미학사의 희곡 선집 <마로윗츠 햄릿>에 수록되어 있다). 


물론 나도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오래 전에 구입해서 한동안 방치하던 책 가운데 하나인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이라는 괴이한 제목을 가진 책 잡담 책을 뒤적이다가 제이슨 밀러의 특이한 이력을 (아울러 고향 동네 이야기를) 발견하고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밀러의 희곡은 과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고등학교 농구부의 주전 선수들이 이제 중년이 되어 다시 모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제는 노인이 된 당시의 코치까지 모셔 놓고 서로의 근황을 묻는 훈훈한 분위기로 시작되지만 이내 서로의 갈등과 불만과 문제가 부각되면서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과거의 오점까지 들먹여진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곪아 터지기 직전의 보잘것 없는 삶을 살아가며 과거의 영광을, 그것도 정당하게 얻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되뇌는 그들의 모습은 경멸과 동정을 한꺼번에 불러 일으키며, 코치의 주도하에 "우리가 남이가!"로 다시 한 번 갈등을 무마하는 마무리에 가서는 씁쓸한 여운을 남겨준다.


지금 다시 살펴보니 1982년과 1999년에 두 번이나 영화화도 되었던 모양인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82년 작의 출연자 명단을 보니 브루스 던, 마틴 신, 폴 소르비노처럼 이제는 그 자녀가 우리에게 더 친숙한 배우들이니 새삼스레 세월을 실감하게 된다. 아쉽게도 이후 영화 출연이 많아지며 밀러의 희곡 창작은 급감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뜬금없이 지금 와서 왜 <엑소시스트>인가 했더니만, 역시나 리메이크판 영화인지 시리즈인지가 제작되는 모양이다. 최근 들어서는 이런 식의 리메이크가 하도 많아지고 빨라져서 어떤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모를 지경이다. 문제는 리메이크가 뛰어난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원작이나 최초 각색에 먹칠도 종종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인어공주> 실사판의 경우처럼 어설픈 리메이크와 정치적 공정성 도입은 오히려 반발을 불러오는 부작용이 있으니, 나귀님처럼 제법 나이 많은 올드 팬들로서는 우후죽순 식의 리메이크 바람이 도무지 반가울 리가 없는 실정이다. 새로 나온다는 <엑소시스트> 소식에 기대보다는 불안을 먼저 느끼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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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애 번역본 <그림 동화>에 대해서 또 뭔가 아는 척 끄적끄적하고 나서 알라딘을 이리저리 해파리처럼 방황하고 있자니 첫화면에 나온 신간 중에 표지 디자인 비스무리한 것이 있어서 뭔가 하고 살펴보니 무려 스티븐 킹의 시간인데 제목이 <페어리테일>이다.


처음에는 제목 그대로 "우리 시대의 동화"를 제임스 서버 식으로 써 놓았나 궁금해서 미리보기를 클릭해 보았는데, 구구절절한 묘사와 함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을 보니 장편인 듯하다. 프랭클린 이야기만 해도 막 공포스러워지는 작가이니 우화는 무리일까.


그나저나 맨 앞의 헌사를 보니 REH, ERB, HPL이라는 이니셜이 등장하기에 뭘까 생각해 보니,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알겠는데 두 번째는 누군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고민 끝에 결국 구글링해 보았더니 나처럼 궁금해 한 독자들이 많았는지 이미 답변이 나와 있다.


내가 못 맞힌 사람은 바로 <타잔>과 <펠루시다>의 작가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였다. 나머지 두 사람은 로버트 E. 하워드와 H. P. 러브크래프트인데, 로버트 실버버그의 "지옥의 길가메시"에서도 그랬듯이 종종 세트로 붙어 다니니 금방 딱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나저나 러브크래프트의 인기인지 유행인지는 솔직히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콜린 윌슨의 말마따나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뭔가 허술한 느낌도 없지 않은데, 바로 그런 저렴한 재미 때문에 사람들이 더 열광하는 것인지 다른 이유가 더 있는지.


러브크래프트와 관련해서는 비교적 최근에야 그에 대한 언급이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나온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그 두꺼운 책을 뒤적여 보았던 기억이 난다. 저자는 철학자라면서 웬 코스믹 호러를 언급하나 싶어서 의아하고 또 신기했었다고 할까.


들뢰즈/가타리가 러브크래프트를 언급한 대목은 타자니 의태니 하는 개념과 연관지어서였던 것 같은데, 그 전후 맥락만 살펴본 것이어서 정확한 의미까지는 역시나 불명이었다. 핑크 팬더도 나오던데 그게 영화인지 만화 캐릭터인지 영화 속 보석인지도 애매했고.


가만 보면 철학자인 저자들은 영화나 소설에서 가져온 사례를 이용해서 개념을 설명하는데, 독자나 연구자는 오히려 실제보다 더 심오한 의미인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라이너스의 담요를 굳이 라이너스 폴링의 담요로 오역한 실제 사례처럼.


물론 들뢰즈/가타리를 숙독했다고 해서 러브크래프트가 더 재미있어질 리야 없겠지만, 러브크래프트를 숙독한 사람이라면 들뢰즈/가타리를 읽으면서 좀 더 잘 이해할 만한 대목이 몇 개쯤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양쪽을 다 본 사람이 흔치야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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